월간<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JP&SS의 사랑과 책_1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는 것이 혹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관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을 간직한 채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하다보면 단지 '사회적 통념'이라 할만한 정보만을 갖고 있는 경우를 허다하게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 통념 하나만으로 무식하게, 별 노력 없이 자기 가정에 들이대고 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결혼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사실 우리 부부도 이 부류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예비부부학교라도 있어 그곳에서 배우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지만 이 사회적 통념을 걷어내고 좀 더 좋은 원칙을 찾아내는 일, 좀 더 우리 부부의 현실에 적합한 원리를 발견하는 일, 무엇보다도 결혼의 무수한 주제들에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내는 일에 우리 부부는 적지 않은 노력을 해왔다. 무엇보다도 '대화'를 통해, 때로는 부둥켜안고 '기도'하는 일로, 그리고 여타 문제들을 만나서는 함께 책을 통해 '공부'하는 일로 말이다.

부부가 함께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책을 사이에 두고 사귐을 가졌고 책을 함께 보며 생활의 지혜들을 길러 내려 줄곧 노력해 왔다. 첫 만남에서부터 헤어짐을 거쳐 결혼하기까지 우리는 책과 함께 나란히 걸었고, 결혼 이후에도 갖가지 당면한 부부문제를 책을 통해 함께 풀어갔으니 책은 좋은 상담가이자 교사임에 분명하다.

독서와 함께 자란 우리의 사랑과 이해, 남편 되고 아내 되고 부모 되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가볼까 한다.


1. 만남에 즈음하여

(신실) 30이 되어도 시집을 못 가고 있는 딸 걱정에 밤잠을 설치시는 우리 엄마에게 '책'은 괜한 미움의 대상이었다.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나날이 책꽂이의 책만 늘어가니…. 딸보다는 책을 구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시집 못 가는 이유를 책에다 덮어씌우신다. '여자가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해지면 못 쓴다' 하시며….

하긴 나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박사과정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혼수에 수백 권의 책을 동반할 여자 좋아할 남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겠나?

무엇보다 함께 책을 읽으며 삶을 나눌 동등한 상대로 여자를 대할 그런 남자를 만날 수나 있는 것일까?

(종필) 부모님은 내게 초중고 시절 책 한 권을 사주신 적이 없다. 물론 부모님 역시 책을 읽지 않으셨다. 찌든 가난과 힘겨운 돈벌이만으로도 하루는 버거웠기에, 게다가 글공부를 제대로 해 보신 적이 없었기에 그럴 여유도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는 건 천성이란 말인가! 가족 중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고, 읽기와 쓰기에 그다지 흥미도 없던 내 십대 말에 느닷없이 1920년대의 작가 김동인의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나는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미'는 급기야 대학을 휴학하고 일년간 책만 읽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시기에 다들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니 고시공부니 하여 학교를 떠나던 시기였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책 100권을 읽겠노라고 휴학을 한 것이다. 나로서는 최소한의 지적 기본, 즉 교양을 갖추는 일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고, 다른 한편 어린 시절 책을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한 집요한 보상심리이기도 했다. 뒤 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휴학은 평생의 반려자를 사로잡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 된 셈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책 읽지 않는 남자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고 하니….


2. 만남 : 손봉호와 이현주

(신실) 어느 날 청년회 주보에 기고된 글을 읽으며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손봉호를 욕하면 내 오봉산이 참지를 못하고…책을 통해서 그 분을 만나고 존경하게 되었다' 아니 손봉호 교수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사람이 있단 말야? 우리 청년회에? 그것도 직접 만남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사실 손봉호 교수님의 책들은 내게 크리스천으로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장 강하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책들이고 때문에 손 교수님은 내 마음의 스승이었다. 대체 누가 이 글을 썼담? '아~ 지난번에 새로 등록했다던 그 얼굴 칙칙하던 애! 보기하고 다른걸...'

알고 보니 손봉호 교수님의 책만이 충격이 아니었다. 책을 통해서 만나 나의 또 한 분의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 그 얼굴 칙칙한 새신자 JP가 이현주 목사님 또한 알고 존경한다는 것이다. 두 분은 영 다르다. 고신 교단 장로인 손 교수와 감리교 목사 그것도 쫒겨 난 목사 이현주….

아! 예전에 혼잣말했던 것이 머릿속을 스친다. '예? 제 이상형이요? 손봉호와 이현주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 사람요'

이러고 있는데 여기에다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했으니. 그룹 성경공부 하고 있는 자리에서 최근에 읽은 최악의 책을 말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의 JP "전모 목사의 입니다. 으악! 나 얼마 전에 그 책 서점에서 잠깐 읽고 '하나님! 이 땅의 성도들이 이런 책 그만 좋아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었는데….

(종필) 내 안에 꿈틀거리는 뭔가를 아무도 해소해 주지 않는 작은 교회를 떠났다. 그곳은 내 어머니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교회를 나오기 직전 나는 본 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외로웠지만 나는 본 회퍼에 흠뻑 빠져있었으므로 꿈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 청년회에서의 첫날, 친숙한 공동체의 한 가운데를 박차고 나와 낯선 공동체의 구석에 앉아 어색함에 떨고 있던 나의 정신을 일순간에 뒤흔든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선 시간이 무르익어 갈 즈음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한 묘령의 자매가 옆구리에 책을 한 묶음 꿰차고 들어와 사람들을 들썩들썩 요동시키더니, 새로 그룹스터디 할 교재를 소개한다고 하면서 입을 떼는데…'본 회퍼가 말하길…'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아! 본 회퍼라니!! 코드가 맞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3살이나 많은 연상이니 그 당시 꿈이라도 꿨을까? 그렇지만 꿈을 꾸게 만든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청년회 주보에 이현주 목사의 우화 하나가 실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고신 교단 주보에 이현주 목사의 글이라? 이것은 도무지 (교단차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건만 나로서는 엄청난 매력 포인트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누가 이런 글을? '아하~ 그 본 회퍼 누나로구나! 주저할 수 없다!!!'


3. 짧은 교제와 헤어짐 ; 존 스토트

(신실) 우린 연애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커플이었다. 세 살 연하가 무엇이 중요하랴? 온갖 책들이 이렇게 열심히 중매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지금 연애 중. 떨리는 가슴을 안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 내 손에는 그이에게 줄 손수 싼 도시락이 아니라 수 백 페이지짜리 존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들려져 있다. 나를 만나러 오는 그의 손 역시 내게 줄 꽃다발이 아니라 같은 책이 들려져 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연애초기에 데이트 하러 가면서 웬 사전 두께만한 책? 그렇다. 우리는 데이트 하면서 낭.만.적.으.로. 북스터디 했다. 함께 존 스토트를 읽으며 열띤 토론으로 사랑을 나눴다. 함께 같은 책을 읽으며 더욱 하나 되고 싶었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존 스토트 목사님을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다른 지를 가르쳐 주었고 그걸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확인해 주었다. 존 스토트를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스토트의 오른 쪽, 다른 사람은 왼쪽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이현주적이었고 난 내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손봉호적이었다. 우리를 중매했던 책은 이번에 우릴 갈라놓았다.

(종필) 그녀와의 사귐이 불안하긴 했지만 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처음엔 같은 점을 찾는 일로 인해 흥미 있었고 차차 차이점이 드러나면서 불안해했다. 이 차이를 묵인하고 넘어설까? 아님, 짚고 넘어가야 할까? 차이는 이랬다. 교회가 수 천 년 간 축적하여 전수해 온 전통의 수용에 대한 유연성은 생각보다 크게 벌어져 보였기에 생긴 문제였다. 합동교회의 딸인 아내의 보수성은 통합교회의 아들인 내게 갈수록 갑갑해 보였고, 반대로 나의 자유분방한 해석은 아내에겐 갈수록 불안한 이유가 된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 것으로 짐작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함께 '책'을 보기로 했다. 신학적 다양함 속에서 그래도 일치를 위해 노력한 존 스토트는 우리의 균열을 잇기 위해 중재자로 모셔지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펼쳐 들고 매주 한 장씩 읽고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분의 중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우리 둘은 미묘한 차이를 보였고, 그 차이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보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 차이는 삶의 태도와 라이프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에 합의했으므로 우리는 서서히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아도 그 때 우리가 함께 책을 본 일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설령 우리 두 사람이 나중에 다시 못 만났다고 할지라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간의 별 노력 없이 - 예컨대, 한쪽에서 기도해 보니 아니라는 둥, 차이의 원인을 추적해 보지도 않은 채, 원래 두 사람은 안 어울린다고 단정해 버리는 둥 - 헤어짐의 통보와 수용을 용납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야 하는 수많은 커플들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헤어짐에 앞서 최소한의 성숙한 절차를 거친 것은 잘 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4. 홀로 성경으로 돌아가

(신실) 헤어진 이후의 시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 마약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 즈음 출간된 임철우의 <봄날> 다섯 권을 내리 읽으며 80년의 광주라는 과거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 나를 잊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속에서 울고 분노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러나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은 또 다시 칼날 같은 바로 현재 나의 고통.

성경을 붙들어야 했다. 성경을 통해서 나를 정직히 보지 않으면 결코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사무엘 상하를 통해서 다윗을 묵상하면서 나는 다시 내 자리를 찾아간다. 내 인생에서 이렇듯 절절하게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남자 역시 배우자의 최상의 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삭처럼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순적히 만나게 해 주세요'
순적히 만난 배우자는 몇 개월 전 헤어졌던 JP 그였다.

(종필) 과거에 잠시 했던 짝사랑을 잊기 위해 1년을 허비했던 기억이 채 기억 저편에 묻히지 않았는데, 이 만남을 어찌 잊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왜 '말'은 이중성 아니 다면성이 있을까? 그간 쏟아 냈던 그녀에게 향한 말들은 밤낮 귓가에 부딪히고 내 음성은 나조차 생소할 정도로 나는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김영민의 <신 앞의 철학, 신 없는 구원>을 비롯한 그의 언어의 세계에 시름시름 앓아가며 빠져들었다. 현학적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참 좋은 방편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포맷하고 두 글자짜리 기독교 용어에 충실하게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던 자유주의자의 가면을 벗고 성경으로 예수에게로 돌아가 거기서 진짜 '사랑'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보자, 그녀와 나의 신학적 차이는 더 이상 '차이'의 축에도 끼지 못한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보다 더 내게 적합한 여자를 만날 수 없으리라!


5. 혼수 준비하며 스터디하기 : 빌 하이블스

(신실) 결혼을 준비한다. 우린 또 북스터디 한다. 주례를 맡으신 목사님이 숙제를 내 주셨다. 빌 하이블스의 <크리스천의 연애와 결혼>을 매 주 한 장씩 읽고 함께 토론한 것을 정리해서 가져와라. 그래서 우린 다시 스터디한다. 장롱 고르러 갔다가 저녁에 스터디하고 드레스 맞추고 나서 또 스터디하고…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서로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가정을 얘기하고 장점을 얘기하고 단점을 고백하고 그리고 함께 만들어갈 가정의 설계도를 그려간다.

우리를 중매했던 '책'은 우리의 결혼을 끝까지 책임져 줄 것만 같다. 왠지 이 놈의 책들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만 같다.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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