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야기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매우 가치 있는 낭비이다. '치유 글쓰기' 모임을 지속하게 하는 연료가 되는 책 <헝거>의 석탄 창고 같은 표현은 이것이다.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글을 썼다. 아주 많이 썼다. 어린 소녀들이 잔인한 소년과 남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내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썼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소리는 잃었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다. 『헝거』 록산 게이

 

록산 게이가 천 가지라면, 나는 한 백 정도 될까.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나이, 다른 상황에서 쓰고 또 쓰면서 내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얼마나 지겨운가, 얼마나 지겨울까, 하면서도 썼다. 도대체 누가 지겹다는 거야, 하면서 누군가는 지겨워할 것을 두려워하며 썼다. 그리고 정말 나는 나를 조금 믿어주게 되었다. 평생 내가 나를 향해 날리던 비난의 화살이 무수하다. 예민하다, 까탈스럽다, 속 좁다, 사랑이 없다, 참을성이 없다, (심지어) 미성숙하다, 믿음이 없다, 신앙심이 부족하다.

 

일찍 마주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통, 부조리, 상실을 느끼는 감각이 예민하다.
그 예민함을 글로 다스리며 살고 있다.


『슬픔을 쓰는 일』 저자 소개를 다시 쓰며 비로소 가치 중립적인 말이 되었다. 그 많은 자기 비난의 소리가 저렇게 표현되어 나왔다. 쓸 당시에 몰랐고, 책이 나왔을 때도 무감각했다. 오랜만에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하고 이런저런 책을 다시 읽으며 깨달아졌다. '고통, 부조리, 상실을 느끼는 감각이 예민하다'는 것은 내가 나를 받아주는 것이다.  이미 스스로를 미워하는 나를 더 미워하도록 부추긴 외부의 목소리, 거기 딱 붙은 확성기의 실체도 조금 알아본다.

글쓰기는 '나는, 나는, 나는'이라고 말하는 행위이다. _ 조앤 디디온

 

치유 글쓰기 강의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구 중 하나이다. 하찮고 지질한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참가자들에게 영혼을 다해 전하고픈 메시지이다. 누구도 묻지 않는, 관심 보이지 않는 나의 이야기, "이제 그만 잊어"라고 하는 것을 쓰는 일에 대해서. 원래 글쓰기는 '나는, 나는, 나는' 하며 시작하는 것이다. 조앤 디디온의 이 말에 내가 먼저 힘을 얻곤 했다. 이번 텀 글쓰기 강의 준비를 하다 이 말이 아니라 이 말을 한 '조앤 디디온'을 다시 만났다.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를 읽다 번쩍! 하는 부분을 만났다. 다섯 살부터 노트에 일기(심지어 소설)을 썼던 자신을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중략)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을까. 나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인 나는 '슬픈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런 인생이었다.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조앤 디디온 자신이다. 조앤 디디온이 남편을 잃고 쓴 애도일기 『상실』을 손에 넣었다. 이 책부터 읽고 싶었으나 절판된 지 오래고, 중고서점에는 오만 원짜리가 올라와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을 보고 나니 참을 수 없었다. 온라인 중고를 죄 뒤져 가장 싸게 삼만 팔천 원으로 『상실』을 구매했다. 세상의 모든 애도에 관한 책을 다 읽을 기세였던 작년 봄,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이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도통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감정의 일렁임 없이 덤덤하게 읽고 있다. 알겠는, 너무도 알겠는 마음이라 내가 쓴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다시 낯설게 두렵다. 남편의 죽음, 아이의 죽음... 모든 죽음은 단 하나의 새로운 상실이다. 


-불안한 투덜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 정신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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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healed 2021.10.17 23:26 신고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저도 이 질문에 대답해 볼께요..

    • BlogIcon larinari 2021.10.31 08:33 신고

      질문에 대한 답을 지난하게 하고 있잖아. ^^ 계속 쓰는 글들이 저 질문에 대한 답인 것 같은데!
      미해결 욕구에 '분홍'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는 감각이라니! 참으로 고유한 이름 붙이야. 이름을 잘 붙이는 일은 그 자체로 치유야.

  2. BlogIcon healed 2021.10.31 18:11 신고

    분홍 욕구를 조금은 채워도 보고 대부분은 인정하며 가 보려구요..
    부지런히 또 다른 애들도 만나면서요...
    언니는 저한테 찐분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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