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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거절을 연이어 두 번을 했다. 때늦은 거절이라 민폐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니,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하자. 쓰기로 약속한 글을 기한이 다 되어 포기했다. (거절, 어긴 약속, 포기, 실패... 어떤 표현이든 달게 받겠다.) 하나는 엄마 잃은 딸이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 돌아가신 엄마를 새롭게 만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딸을 잃은 아빠의 애가이다. 하나는 서평이고 하나는 추천평이었다. <슬픔을 쓰는 일>이 연결시킨 일이 분명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부담은 됐지만 두 분 저자에게 위로든 무엇이든 건네고 싶었다. 마감이 다 되도록 끙끙거리다 둘을 다 포기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못 쓰겠어요."하는데, 몸이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거절한 원고는 있었지만, 약속하고 쓰지 못한 글은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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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로 P가 높지만 강의 약속에 늦는 일은 거의 없다. 30분 전 도착을 목표로 하지만 15분 전, 10분 전에 도착하는 경우는 있지만. 1월 초, 강의 시간에 30분을 늦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내가 유발했다.) 지하 서부간선도로에서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걸 한 번 놓치고. 성산대교까지 가서 돌아와야 하는데, 도통 네비가 해독이 되지 않아 근처 한강공원, 양평동을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강의하는 교회까지 가서는 건너편에 두고 막히는 길 유턴하러 갔다가 또 몇 바퀴. 딱 무엇에 씐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갖 감정이 식은땀과 함께 지나가고. "나는 늦었다. 늦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것 외에는 없다." 받아들였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온몸으로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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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힘이 세다. 정말 가기 싫은 강의였다. 늘 말하던 주제였지만, 입을 떼면 줄줄 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마음의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30분 전에 도착하려 했는데 30분 지각을 했으니 1시간을 늦은 셈이다. 마음이 한 일이다. 무의식이 작정하고 뺑뺑이 돌린 것이었다. 무의식을 탓할 일은 아니다. 강의에 지각한 것도, 약속한 원고를 쓰지 못한 것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빠르게 바르게 분별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분별에 앞서는 것은 '인정'이어야 하겠고. 한계를 가진 나, 한계를 가지고 사는 삶의 구멍들과 구멍에 빠지는 날들의 아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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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내내 붙들고 씨름하던 주제가 '비극'이었다. 그리스 비극부터 오늘 여기 일상의 비극까지. 슬픔은 '애도'를 통해서만 치유된다고 마르고 닳도록 말하고 써왔다. <슬픔을 쓰는 일>이 그 결정판이다.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지혜를 가져와 좌절의 기술을 가르치는 어느 철학자의 책이다. 슬픔과 애도에 대해 쓰고 강의하면서 역시나 마르고 닳도록 인용하는 퀴블로 로스의 애도 단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슬픔의 다섯 단계 목록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처음 네 단계, 즉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건너뛰어서 곧장 다섯 번째 단계인 수용으로 갈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되살려내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므로 그들의 죽음을 과도하게 슬퍼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덧붙일 것이다. 가능한 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슬픔을 쓰는 일> 한 권을 통째로 반론으로 들이밀 수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인정한다. 삶에 널린 수많은 좌절, 어떤 좌절, 내가 유발한 어떤 위기들은 곧장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건너뛰고 수용! 어떤 날, 어떤 일은. 수용하고 겪어내야 한다. 결국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퀴블로 로스 여사의 5단계는 기계적 순서가 아니라 결국 잘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고. 더 나은 날까지는 아니어도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 외에 다른 선택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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