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8

 

 

선생님께서는 지하주차장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여러 일이 몰려 있는 날이라 몸도 마음도 분주하다. 함께 확인하고 보낼 선생님의 원고 마감날이기도 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침에 원고를 가져다드리고 확인하시는 사이 다른 일을 보기로 했다. 아이를 태워 현장학습 장소에 데려다주는 일이다. 복잡한 일정으로 아이도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 잠깐이지만 낯선 어른 마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내려오시기 전에 엄마가 빨리 올라가라며 압박하고 투덜거렸다. 나도 그게 편한데, 굳이 내려오시겠다니 말이다. 벌써 내려오셔서 엘리베이터 현관 앞에 환하게 웃으며 서 계셨다. “어이구, 잘 생긴 아들이구만. 모르는 할머니가 나타나서 주책이지? 만나보고 싶었어. 악수 한 번 할까.” 벌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아들 녀석 인상을 보니 이제 타박 들을 일만 남았구나! 바쁜 척 서둘러 인사 의례를 마무리하고 다시 출발했다. 사춘기 막바지 낯가림 최강자 아들의 불평불만 세례를 각오하고.

 

그런데 교수님인데 왜 그냥 할머니 같애?” 의외의 순순한 말투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아이가 하는 말이다. “그래? 교수님이라도 할머니는 할머니시지. 연세가 있으신데.” “아니, 뭐 교수님 같지가 않고 그냥 착한 할머니 같애. 할머니들은 둘 중 하나거든. 착한 할머니이거나 진짜 싫은 할머니이거나. 엄마가 왜 교수님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사람에 관심이 많고 직관적인 아이이긴 하지만, 자식! 별 걸 다 알아채는군! 아이에게 최 선생님에 관한 얘기를 별로 한 적이 없는데. 차라리 최 선생님께는 아이들 얘기를 하는 편이다. 워낙 이런저런 걸 많이 물어보시고 한 번 들었던 얘기는 잊지 않고 다시 물어주시니. 사춘기 막바지에 있는 아이에 대한 걱정을 많이 늘어놓았던 것 같다. “엄마, 그리고... 아까 교수님이 악수할 때 돈 주셨어.” 아이 손에 지폐가 들려져 있다. , 용돈 주시려고 부러 내려오셨구나! , 그래서 니 마음이 녹았구나! 어쨌든 부드러워진 아이 목소리에 나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다시 선생님께 갔다.

 

나눠줄 줄 아는 호감 노인

 

아이가 정 선생을 꼭 닮았네. 사람 바라보는 눈빛이 꼭 정 선생이야. 시 쓰고 철학 한다는 그 아들이죠? 그러게 생겼네.

 

아유, 선생님. 그건 옛날 어릴 적 얘기예요. 지금은 외제 차, 명품 운동화에나 관심 있는 그냥 그런 애예요. 어떻게 해야 돈 많이 벌어서 그런 걸 살 수 있는지, 최대 관심사라니까요. 에휴, 정말 꼴 보기 싫고... 걱정이에요. 아참, 선생님 무슨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일부러 내려오셨군요.

 

돈 좋아하는 친구에게 어필이 됐겠네. 하하. 명품 운동화는 얼마를 줘야 사는 거야? 명품 운동화 하나 사주면 잘생긴 아들내미한테 인기를 얻겠구만.

 

그놈의 운동화 소리 듣기도 싫어요. 아닌 게 아니라 용돈 덕인지 선생님 아주 점수를 제대로 따셨어요. 아이 어릴 적에 제가 풀타임으로 일했잖아요. 시부모님이 육아 도와주셨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커서 남다른 마음이 있어요. 노인들을 좀 친근하게 느낀달까, 따스하게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사춘기 되면서 교회나 밖에서 만나는 어떤 노인들 모습을 지나치게 싫어하더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무례한 노인들을 보면 견딜 수가 없대요. 저는 그게 애정과 연민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제 할머니, 특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거든요. 아무튼, 그 과한 감정이 늘 걱정이긴 한데, 잠깐 뵈었는데도 선생님이 참 좋은가 봐요. 선생님 앞에 두고 이런 말씀 드리니까 오글거린다. 용돈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히히. 어이구, 죄송합니다.

 

죄송은? 기분 좋구먼. 사람 마음 얻기가 쉬운 일인가? 돈 몇만 원으로 청소년 마음을 얻었으면 보통 이문을 본 게 아닌데! 역시나 노인네가 할 일은 돈 내놓는 일이야. 하하.

 

처음 만남이 생각났다. 종강 날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혼잣말. 그날 식사를 선생님께서 사겠다고 하셨다. 어느 발 빠른 사람이 나서서 계산을 하자 이 사람들, 노인 배려 없네. 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밥 사는 거밖에 없는데. 그걸 빼앗네.” 무력한 받아들임으로 들렸고, 진심으로 섭섭해하시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 말에 이끌렸고 오늘의 이런 관계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부자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부자 같다. 이런 집에 사시는 것만 봐도. 돈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꼭 노인이 아니라도 남을 위해 기꺼이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이제 나도 마냥 받아먹을 나이가 아니다. 배움도 삶도 먹을 것도 말이다. 나눠줘야 하는 중년, 중견 사람이다. 후배들 만나면 후하게 밥을 사고 싶고, 넉넉하게 나누고 싶지만, 현실 재정이 늘 발목을 잡는다. 지인들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마음을 같이 하여 위로하고 축하할 일이 아닌가. 그것을 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조의금과 축의금이고. 마음은 넉넉한데 현실 재정으로 손이 떨릴 때 조금 비참한 심정이 된다. 가족들 몸 어디가 아프면 몸 걱정이 아니라 병원비 걱정으로 먼저 마음이 무거울 때도 그렇다. 선생님처럼 넉넉히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있다면 나도 멋진 노인, 호감 노인이 될 수 있을까? 돈 걱정 없는 노년이 가능할까? 내 생각을 읽기라고 하셨나?

 

재산이 갈수록 적어지면 좋겠어

 

, 나 이사해요. 주인이 집을 팔았다고 나가라네. 시간은 넉넉히 준다니 알아봐야지.  

 

어머, 선생님 댁이 아니었어요? 전세였었나요?

 

, 나 집 없어. 허허. 전세예요. 남의 집 살이야.

 

아휴, 이사가 보통 일이 아닌데. 힘드셔서 어떡해요?

 

내가 크게 힘든 것은 없어요. 아들이 알아서 해주는데... 아들한테 미안하죠. 선생님은 이사를 많이 해봤어?

 

저요? 저는 정말 평균 2년에 한 번 이사예요. 전세를 살아도 한 집에 오래 살기도 하던데요. 저는 유난히 그게 잘 안 맞아요. 워낙 또 전세가 따라잡을 수 없이 오르기도 하니까요. 저 2년을 주기로 계속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어요. 선생님.

     

아유, 그렇구나! 고생이지 그거. 암튼 여기서 멀리 가진 않을 거니까 이사 가도 자주 와야 해.

 

그럼요! 선생님, 원고 교정한 것 좀 보셨어요?

 

전세니 자가 소유 주택이니, 아파트 평수가 어떻고 시세가 어떠니 하는 것에 어두운 편이다. 어두운 편이지만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친구들 모임 같은 데 가면 대부분 자기 집은 가지고 있고, 집도 한 채가 아닌 경우도 많으니까. “나 이번에 또 이사해.” “, 나 거기 안 살아. 이사했는데. 전세가 너무 올라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경우 뭐랄까 조금 위축된달까.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헌데 선생님은 왜 전세를 사실까? 쓸데없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그야말로 쓸데없는 궁금증이니 차라리 말을 돌려버렸다. 말을 돌렸더니 선생님이 다시 유턴을 시키시네.

 

, 교정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 봐줬겠어. 그나저나 지금 집에서 계약은 얼마 남았길래? 전세가 또 올랐을 것 아니유? 아들이 집을 알아보는데 이 아파트도 그새 어마어마하게 올랐다고 하더라고. 집 없는 사람들 서러워서 어떻게 살아? 선생님도 남편도 공부하고 애 키우고 하느라 집 장만하는데 신경을 못 썼구나.

 

네, 선생님. 사실 재주도 없어요. 주택 청약을 해라, 뭘 어떻게 해라. 주변에 또 부동산 전문가가 한둘인가요? 훈수들 두고 걱정도 하는데, 도통 그쪽으론 몰라요. 관심도 없고요. 그러려니 하며 살아요. 이사할 때가 되면 또 상황에 맞는 적당한 집 찾아 이사하고, 새로운 동네에 좋은 점 발견하며 살고... 이제 뭐 익숙한데요. 아이들 크고 저도 나이를 먹으니 조금씩 더 걱정이 되긴 하더라고요. 이 나이에 뭘 하고 산 건가 싶기도 하고요.

 

뭘 하긴? 정말 중요한 것을 하며 잘 산 것 같은데. 불안하긴 하죠. 괜히 의식주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일에 바탕인데. 하이고, 이번 집에서는 이사 안 가고 더 살면 좋겠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아드님이 알아서 해준다고 해도, 신경을 안 쓰실 수 없잖아요. 변화를 좋아하시니까 괜찮으신가요?

     

왜 신경이 안 쓰여? 일단 아들한테 미안하지. 나도 젊어서부터 선생님처럼 집 사고 재산 불리고, 이런 것에 젬병이었어요. 남편이 좀 알아서 하긴 했는데, 남편 떠나고는 뭐 그저 일하면서 근근이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벅찼지. 그래도 낙천적인 성격이라 크게 걱정은 안 해요.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는 생각이니까. 살던 집은 하나 있었는데, 상담실과 주거 공간을 합치면서 팔았어요. 저쪽에서 상담하고 건너와 살림하는 이런 집이 딱 좋더라고. 전세로 들어와서 이러고 살고 있어요. 그때 아들이 사는 게 좋다고 했는데 그러고 싶질 않더라고.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이 갈수록 적어졌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죽은 다음에 뭐든 남지 않았으면 싶고.

 

어머, 선생님. 재산이 적어졌으면 좋으시겠다고요?

 

아니 아니이, 욕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다. 그냥 나이 들어 가볍게 살고 싶단 말이유. 이상이지, 이상! 실수였어. 그때 샀어야 했대. 이번에 이사하려고 보니까 상황이 어렵대. 내가 척척 해결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아들 고생 시키게 되어 미안하지.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야.

 

후후, 대략 알겠어요. 어떤 마음이실지. 그런데 선생님은 친구분들과 비교하거나 그렇게는 안 되세요? 연세 드시면 그런 마음도 없어지실까요?

 

아이고, 연세 드셔도 사람 마음 다 똑같습니다. 평생 하던 비교심이 어디로 가? 노인네들이 하찮은 것으로 비교하고 자랑질하고 더 그러지. 내 친구들이 다 잘 살아요. 잘 살아도 보통 잘 사는 부인네들이 아니지. 한참 때만큼은 아니지만 부동산이고 뭐고 아직도 다 통이야.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돈으로 감을 놔라 배를 놔라들 하지. 내가 안 들어먹으니까 별종 친구로 내놨어요. 한때 젊을 때는 관심사가 달라서 불편하기도 했었고, 마음으로 밀어내기도 했었는데... 돈이 좋은 건 사실이잖우. 안 그래? 돈 많으면 좋지 뭐. ? 잘 사는 친구들 부러워요? 은근히 자랑하고 그러나?

 

그런 친구들은 없어요. 제가 없으니까 자격지심이죠. 혼자 비교하고 꿀꿀하고 그렇죠, 뭐. 사실 그렇게 부럽진 않거든요. 돈이 많다고 행복해 보이진 않으니까요. 그런데 어쩌지 못하는 위축감이 있어요. 집도 그렇고 저는 특히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지점으로 가면 많이 우울하더라고요. 아까 보신 아들놈만 해도 어릴 적엔 제가 가장 행복한 줄 알더니만요. 경제력으로 충분히 지원받는 친구들하고 비교를 하는 거예요. 왜 아니겠어요? 저도 눈이 있어서 다 보이는데... 벌써 돈에 민감하더라고요. 제가 준 결핍감으로 아이를 망치는 것 아닌가 싶고. 실질적으로 요즘은 성적도 비싼 학원 값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와 남편은 정말 무능한 부모거든요. 마음이 좀 아프죠.

 

그래, 부모 마음이 그렇지. 어이구, 정 선생도 엄마구나! 그렇지, 엄마지. (따뜻하게 등을 쓰다듬어 주신다.) 돈이 참 그래. 내 친구들 말이유. 돈이 많은 건 좋아. 대부분 신자들이거든. 다들 기도하며 부동산하고, 기도하며 아이들 좋은 학원 보내서 일류대 보내고 유학 보내고 그랬어. 그런 거 잘 되는 게 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하거든. 그럼, 하나님이 주셨겠지 뭐. 그런데 돈이 많은 것까진 좋은데, 그게 참 희한하단 말이지. 가만 보면 돈을 지키려고 사는 것 같아요. 정치고 뭐고 결국 모든 일의 판단 근거가 부동산이야. 아파트값 떨어지냐 마냐가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 같거든. 그것도 좋다 쳐. 그러다 보니까 정말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요. 나는 그게 희한하단 말이지. 나는 신앙이 나이롱이긴 하지만.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통 마음 쓰신 것 같거든. 이 친구들 나보다 믿음도 뜨겁고 내가 따라가질 못한 신자들이에요. 돈이 많은 건 문제가 아닌데, 돈이 많은데 마음을 맑게 비우고 사는 일이 어렵구나 싶은 거야. 나도 사실 거기서 크게 다른 족속은 아닙니다만.

 

선생님은 혹시 어릴 때나 젊을 때 어렵게 사신 적이 있으세요?

 

?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고생 없이 컸어요. 부모님 잘 만나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했고, 결혼하고도 큰 부를 누린 적은 없지만 크게 고생한 것도 없지. 그래서 내가 교만했고, 그러다 큰코 다친 거예요. 그게 다 내 잘난 탓인 줄 알았지. 그런 게 다 자랑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요.

 

선생님의 회심 지점인 것 같다. 50대에 겪으신 상실의 경험, 남편과 부모님을 비슷한 시기에 잃으셨던 그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다른 통찰과 지혜, 깊이는 늘 그 경험과 닿곤 한다. 고난을 겪는 모든 사람이 성찰의 길로 들어서진 않을 텐데, 다시금 머리가 조아려진다.

 

돈 없이 사는 게 내 십자가인가

 

선생님, 저는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요. 공부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 잘하고 그러면 언젠가 한 번 복을 받겠지, 했어요. 보상을 해주시겠지... 하하. 그게 안 되나 봐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봐요. 돈 없이 사는 게 내 십자가인가? 그런 생각도 해보거든요. 돈 걱정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평소 무슨 걱정을 하고 살까, 쓸데없는 남의 걱정을 해요. 공부할 때 특히 그랬거든요. 저는 장학금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러니까 학비 걱정 아니었으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었을까 싶어요. 헤헤, 해보는 소리예요. 제가 안 살아본 삶이니까요.

 

안 살아본 삶이라... 그렇지. 살아보지 않은 삶은 모르는 거야 정말. 내가 은퇴하고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평생 교수 이름값으로 비싼 상담 했거든. 받을 만큼 받았고 누릴 만큼 누렸으니 다르게 살아야겠다 마음을 먹었어요. 지금은 내가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되돌려준다는 마음으로 상담해요.

 

선생님, 그러면 상담비를 도대체 얼마 받으세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무료 상담은 아니시잖아요.

 

그렇지. 무료는 아니지.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며? 돈 가는 곳에 마음 가는 것이니 마음을 가져와서 상담받으려면 돈을 내야 해. 주님께서 딱 간파하신 것 같아요. 상담비는 천차만별이야. 내가 정하지 않고 내담자가 정해요. 낼 수 있는 만큼 정하게 해. 물론 기준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와, 그럴 수가 있군요. 멋져요, 선생님.

 

멋진 일이 아니고. 내가 그러면서 안 살아본 삶을 배운다니까. 현직에 있으며 상담할 때는 아무래도 비싼 상담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만나지 않았겠어요? 지금같이 하다 보니 알음알음 오는 사람들이 다른 거예요. 정말 상담 개입이 필요한데 돈 때문에 접근이 불가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라는 거야. 평생 상담하고 살았지만, 사람을 새로 배운다는 느낌이에요. 돈이 절대적으로 없어서 어려운 삶을 나는 모르는구나, 싶은 거예요. 그런데 분명한 건, 그래요. 돈이 없어서 오히려 행복을 아는 사람은 있는데, 돈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못 찾겠습디다. 이런 일이 있었다우. 재산을 많이 남기고 남편이 먼저 간 친구가 있어. 갑자기 돌아가셔서 재산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 자녀들이 유산 문제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깊어지는 골을 어떻게 할 수가 없겠더라고. 친구는 남편 잃은 슬픔보다 살아있는 자녀들 잃는 고통이 더 컸을 것 같아. 문제는 그걸 지켜본 다른 친구들이 우리는 저러지 말자, 돈 다 쓰고 죽자, 사회 환원을 하자, 하며 반면교사 삼는가 싶더니 금세 잊어요. 돈 지키느라 또 전전긍긍이에요. 돈 많다고 돈 걱정 없는 노년을 사는 건 아니야. 하긴 돈이 좋지. 내가 그 어렵다는 사춘기 아들내미 마음도 샀잖아. 조금 전에. 하하.

 

그러네요, 선생님. 돈의 위력이 장난 아니네요. 그놈 아주 까칠하고 사람 보는 눈이 높은 앤데. 그 애 마음을 사셨네요.

 

그러니까 말야.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에고, 선생님. 이 연세에 집도 없으시고... 방 빼야 하시고... 어쩌신대요? 헤헤헤. 저랑 처지가 비슷하세요.

 

그러게나 말이오! 하하하. (웃음을 멈추고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신다.) 정 선생, 사는 게 힘들지? 그래도 난 정 선생이 행복해 보여. 살아보니 인생에서 끝까지 해결 안 되는 문제가 다들 하나씩 있더라. 정 선생은 자기 십자가라고 했나? 그 십자가 지고도 잘 사는 것 같아 나는 부러워요. 빈말 아니야. 내가 간간이 듣는 정 선생 가정 얘기, 일하고 신앙생활 하는 얘기 들으면 나도 젊어서부터 좀 저렇게 살 걸 싶거든. 속에 있는 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됐지.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얘기가 정말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 왔을까. 내가 솔직한 편이고 약점을 내 입으로 까발리는 그런 성격이지만 돈에 관한 한 수치심이 크다. 불쌍해 보일까, 취약해 보일까 돈에 연연하지 않은 척을 잘한다. 가난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선 더더욱 괜찮은 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다 선생님께 이런 얘기를 다 하게 되었을까. 털어놓고 보니 부끄러울 것도 없는 것 같고. 가난하면 얼마나 가난한가. 내 십자가니 뭐니 하는 말도 결국 자기 연민이며 욕망의 다른 표현일 때가 많다. 마음이 복잡하다. 복잡한데 가볍고, 뭔가 위안이 넘실대는 것 같기도 하다. 밥 잘 사주는 예쁜 할머니, 용돈 잘 주는 착한 할머니. 나도 그런 거 하고 싶다. 그게 못할 게 뭐야? 밥 한 끼 사주고, 용돈 몇만 원 쥐어 줄 돈이 내게 없냐고? 있네. 하면 되겠네.

 

오지 않은 노년의 돈 걱정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돈 걱정 없이 사는 삶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돈 걱정이 돈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것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오늘 분량의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돈 걱정 없는 인생이겠구나. 홍순관의 노래 한 소절이 마음에서 툭 올라온다. “죽음이 나를 털려 할 때에 빈주머니 내놓고 돌아가자 아버지 계신 그 집으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공명하는 노래이다.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이 갈수록 적어졌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죽은 다음에 뭐든 남지 않았으면 싶고.” 돈 걱정으로 자주 위축되고 자주 믿음이 흔들리는 내 마음에 심긴 한 말씀이다.

 

<시니어 매일성경> 3,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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