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짠 계획이 아니라 흐르는 대로 따르다 좋은 하루를 보냈다. 조금 차분히 말하고 싶어서 '좋은 하루'라고 했다. 쉽게 들뜨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평소의 나대로 말한다면, 대박 신기한 사랑의 하루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점심 약속이 있었다. 초5, 초4의 어린이 성가대로 만난 제자 둘이다. 그때 내 나이는 27세. 그러니까 얘네들은 몇 살이냐. 자축인묘진사... 모르겠다. '울고 웃고'가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단톡이든, (언제 적) 마이피플이든, 라인이든. 개그 코드가 맞고, 선생님이고 뭐고 격의 없이 서로 놀리는 게 쉬워서 "웃고"이다. 웃다 말고 급하게 진실이 튀어나와 울기도 해서 "울고"다. 갑자기 들어온 전화 한 통으로 대단한 계획 없이 성사된 모임이다. 

 

십수 년 전, 얘네들과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을 함께 읽고 기도도 가르치고, 메시지 성경읽기도 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기가 막힌 일이다. 당시 나는 신앙 사춘기 절정이었다.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그 캄캄한 시절에도 할 것은 다 했다고 했는데. 할 것을 다 한 게 아니라 살자고 하는 짓은 했었구나. 마음 잘 맞는 제자들 데리고 <영성 수업>을 했었구나! 집에서 떡볶이 해서 먹이고 커피 내려서 마시고 하면서. 그 시간이 얘네들에게 어떤 씨앗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나를 살게 하는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정말 나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구나. 그 메마른 시간에도 살아 있는 시간을 찾아냈었다.

 

"우리 어제 만난 것 같지 않아요?" 라는 말에 격한 공감. 본 지가 몇 년인데 어제 명일동 LG 아파트나 그 동네 어느 카페에서 만난 느낌이다. 길지도 않은 시간, 별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느낌이 가득하다.

 

돌아오는 길, 죽전에서 '고봉삼계탕' 간판을 보았다. 바로 핸들을 꺾어 들어가서 삼계탕 포장 주문을 했다. 주일 예배에서 만났는데 안색이 썩 좋지 않은 Y 생각이 났다. 코로나를 앓고 몸이 썩 괜찮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포장하고 집 앞으로 갔다. 잠깐 내려오라 했더니 괜찮으시면 잠깐 올라오셔도 된다 해서 계획 없는 침입을 했다. 남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이 무례한 행각, 내가 해본 적이 있던가? 내 사랑 일곱 살, 다섯 살 두 남매가 토끼처럼 뛰면서 반기고. "사모님, 이리 와봐요." "사모님, 이거 봐바요." "사모님, 내가 사진기 만들어 줄까요?" "사모님, 국기 퀴즈 내봐요." "사모님 이제부터 나랑 책 파는 집을 만들어요." "사모님, 이제부터 우리 자요. 눈을 뜨면 지는 거예요." 그러다 헷갈려서, 목사님... 목사님... 전도사님... ㅎㅎㅎ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사모 정체성이란 거의 없는데, 사모님, 사모님, 이 말이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남매의 엄마인 Y는 내가 코로나를 앓을 때 집 앞 현관에 간식을 두고 갔었다. 워킹맘으로 시간을 어떻게 쪼개 쓰고 있는지 잘 아는데, 바쁜 퇴근길에 들렀을 생각하니 뭉클했다. 그런 배려를 받았는데, 한참 언니인 나는 이후 Y 가족이 모두 확진받았단 소식을 듣고도 챙기고 돌아보질 못했다. 참 고마운 가족이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뒷부분 가사 "나 피곤치 아니하며"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메마른 땅, 메마른 땅"을 헤매던 시절, 이 가족이 없었으면 더욱 메마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먼지 나는 시간을 걸을 때 "어쩌면 내가, 우리가 좋은 사람인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줬었다. 

 

우리 깨어진 본성이란, 사랑을 향해 가지 않는다. 사랑 받을 곳을 향하기보다는 "누가 날 싫어하나, 누가 날 비난하나" 그 소리를 향해서 귀가 커진다. SNS 어디서 누가 내 욕을 하는가, 거기에 골몰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백 번 들어도, 그 반대의 메시지 한 번이면 그거 하나만 붙들고 며칠이고 잠을 못 이루는 우리이다. 사랑받을 곳으로 가야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기도 어떤 때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필요하다. 자아 팽창을 유발하는, 고래나 춤추게 하는 허튼 칭찬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음'을 확인해주는 곳을 부러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은 애써 찾고자 하지 않았는데, 흐르는 대로 따르다 선물 폭탄을 받은 날이다. 깊이 감사한다. 오늘 이 온기를 오래 간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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