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9

 

최 선생님과 함께 여행, 그것도 제주여행이다. 일이 되려면 이렇게 또 쉽다. 하루게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선생님 모시고 햇살 좋은 날 드라이브 한 번 해야지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걷기도 전처럼 누리질 못하시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 한 분이 제주 한 달 살이 중이라며 보낸 풍광 사진에 감탄하다 된 일이다. K 선생님은 모임에서 마음이 통하던 큰 언니 같은 분이다. “, 부럽네요!” “부러우면 와요.” 이런 말을 주고받다 전격 성사되었다. 썩 건강하지도 않은 노인을 모시고 하는 여행에 이렇게 설레다니. 나답지 않은 일. 못 말리는 나의 최 선생님 사랑이다.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하아, 이런 날도 있네요. 선생님과 비행기 여행이라니요. 언젠가 해주신 비행기 착륙 활강 얘기가 생각나요.

 

무슨 얘기지? 내가 비행기에 대해 뭘 안다고, 무슨 얘기를 떠들어댔을까?

 

아유, 선생님. 저 건망증 상담해주셨잖아요. 제가 왜 선생님 댁에 가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렸을 때요. 비행기가 이륙 때 고도를 높일 때와 달리 활강 시간은 길다고 하셨잖아요. 창밖은 아직 대서양 위인데 왜 이리 빨리 내려가는 거야 싶다면서요.

 

그런 얘길 했어? 내가?

 

네에. 제 나이가 그런 때라고 하셨잖아요. 막 활강을 시작하는 때요. 고도가 거의 낮아지지도 않았는데 불쾌감은 가장 크다고요. 건망증에 대해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죠. 중년을 거쳐 노년으로 가는 긴 활강이고 낯선 시작이어서 그렇다고요. 정말 위안이 됐는데요.

 

아아, 맞다. 맞다. 어느 책에서 읽은 얘기를 해줬지? 정신 좋네. 내가 한 말도 기억이 안 나. 긴 활강의 끝에 다 와서 그래. 나는 곧 착륙하는 비행기외다. . 출발한다.

 

네, 선생님 지금 착륙 아니고 이륙 중이십니다. 하하.

 

그러네. . 이제 막 이륙하다 치자. 내 인생 지금 막 시작이다. 하하. 아이고, 정 선생과 제주도를 다 가네.

 

그러니까요, 선생님. 너무 좋아요. 아으, 신나! K 선생님 덕분이에요. 너무 부러워요. 한 달 제주 살이라니. 요즘 제 친구들 로망인데, K 샘은 그걸 하시네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용기가 참 대단하세요. 용기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 일인데, 남편분도 대단하시고요. 에고, 부러워라.

 

정 선생, 어차피 알게 될 거고 K 선생도 허락한 것이니 말할게요. K 선생 일종의 별거예요. K 선생 쪽에서는 별거고, 남편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이에요. 이혼 결심한 지 좀 됐는데, 남편은 완강하게 반대하고. 좀 어려운 시간 보냈어요.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나 봐요.

 

네에? 상상도 못 했어요. 늘 밝고 평온해 보이셔서요. 그런 일이 있으실 줄이야. 남편분도 좋은 분 같았는데요. 성실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시지 않나요? 자녀들도 다 잘 되고, 부족할 것 없어 보였는데. 정말 뵐 때마다 늘 행복해 보이셨는데. 우리 모임에서도 그야말로 피스 메이커셨잖아요.

 

그러게. 남편도 그래서 당황스럽대요. 그게 문제였는지 모르지. 속은 썩어가고 있는데 꾹 참고 내색하지 않은 것.

 

어, 선생님. 남편분도 만나보셨어요?

 

실은 남편이 상담받을 수 있냐고 연락이 왔었어요. K 선생과 내 관계가 있으니, 다른 데를 소개했고. 그래서 겸사겸사 제주에 가는 거예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만, K 선생 얘기를 좀 들어주기라도 하려고. 마침 정 선생도 결혼에 관한 책도 쓰고, 그 분야 전문가잖아. 놀러 가는 줄만 알았지? 이제 비행기 탔으니 빠꾸 시키지도 못할 테니 알려줘야지. 에헴.

 

네에? 그런 거였어요? 저만 혼자 엄청 들떴네요. 민망해라. 아, 그리고 저 전문가 아녜요, 선생님. 어쩌다 보니 책 쓰고, 책 쓰고 나니 한두 번 강의하고 그러는 거지. 제 코가 석 자예요. 아, 진짜…. 여러모로 부담되네. 비행기 돌릴 힘도 없고. 땅콩이라도 던져야 하나.

 

허허, 놀러 가는 마음으로 가면 돼. 나도 그런 가벼운 마음이에요. 이 좋은 봄날에 내 친구 정 선생과 제주 여행 가는 거지. 가면 재워줄 친구가 기다리고 있고. 공항으로 나와 있겠다고 했어요. 이런 상태로 혼자 지내는 게 좋기만 하겠소? 같이 좀 놀아주고 옵시다. 얘기도 들어주고.

 

네, 그나저나 그런 뜻이면 선생님만 가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제가 있어서 편하게 상담하실 수 있겠어요?

 

내가 미리 얘기해뒀어. 이제는 말하고 싶대요. 그리고 상담은 무슨! 걱정하지 말고 정 선생 평소대로 해요.

 

그렇다면 저도 가볍고 묵직하게, 편하게 마음먹겠습니다.

 

, 말도 재밌게도 한다. 가볍고 묵직하게, 편하게. 좋네. 사실 나는 K 선생 이런 행보가 그리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아.

 

네? 이혼에 찬성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내가 뭐라고 남의 이혼에 찬성하고 말고 하겠소! K 선생 부부가 평생 부부싸움 한 번 해본 적이 없다면 믿겠어요? 부부싸움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겠지만. 큰 소리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대요. 평생 바쁘게 일하던 남편이 은퇴하고 집에 들어앉은 지가 1년쯤 됐나. 더 됐나? 같이 그렇게 오래 붙어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죽을 듯이 힘들었대요. 혼자 끙끙거리다 정신과에도 가고 약도 먹고 그랬나 봐.

 

아아…. 혼자서요? 그러면 남편분에게 암 말씀도 안 하시고요?

 

그렇지.

 

병원에 가실 정도면…. 말을 안 한다고 남편은 모르셨나요?

 

모르긴 해도 그 지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평생 싸우지 않았다는 말이, 평생 서로 좋기만 했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두 사람 다 그런 성격이 그런 데다, 신앙심도 작용했겠죠. 갈등은 무조건 죄다, 이렇게들 여기잖아요.

 

그건 그래요. 선생님. 드러내고 함께 해결하기보다 일단 은혜로 어떤 문제든 덮고 보려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신앙의 이름으로 문제를 더 키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부부 사이든, 친구 관계든, 교회 교우들 간에든 갈등을 드러내고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일단은 피하고 싶은 거죠. 그럴 때 발동하는 게 심리학적으로 방어기제라는 거 아니겠어. 나는 상담하면서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신앙을 방어기제로 쓰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은혜, 감사. 이렇게 초월해 버리면 더는 뭐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K 선생의 도발이 꼭 부정적이진 않다는 거예요.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선생님. 저번에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 보실 때도 그런 얘기 하셨잖아요. 적당한 가면으로 포장하지 않고, 감정 다 드러내며 싸우고 화해하며 더 돈독해지는 것이 우정이라고요. 아, 그런데 그게 부부로 가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친구는 싸우고 절교했다가 다시 친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부부는 정말 이혼하면 남이잖아요. 그냥 남이라는 한 마디로 담을 수 없는 고통과 스트레스가 이혼의 과정이고요.

 

평생 상담하면서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려요. 가톨릭 사제이자 심리학자인 마르틴 파도나이(Martin H. Padovani)라는 분도 똑같은 얘길 해서 반가운 적이 있었는데. 폭력보다 침묵 때문에 파경에 이르는 결혼 생활이 더 많아요. 가정불화나 이혼의 원인이 갈등이라고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갈등 해결을 위한 갈등이 없거나, 그것을 피하려고 하다 결국 파국을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정 선생 말마따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행복한 부부로 보이는 K 선생이라서 나도 많이 놀랐어요.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싶은 거예요.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고통을 침묵으로 덮고 있다면 더더욱.

 

맞는 말씀인데, 나도 청년들에게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한 좋은 연애할 수 없다고 말하긴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 갈등을 드러내고 갈등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모른 척 덮어두고, 느끼지 않아야 살아지는 것이 결혼 아닌가. 졸혼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소설가 이외수 선생 부부의 졸혼 뉴스가 나왔을 때, 친구들 분위기가 그랬다. 나도 하고 싶다, 졸혼. 그동안 맞춰 사느라 충분히 애썼으니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런 얘기들이 오가곤 했다. 신앙이 있는 친구나 비신자 친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 입담 좋은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6)” 이 말이 무서워서 이혼은 생각지도 못하지만, 졸혼은 어쩐지 좀 나은 것 같다나. 치명적인 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에 다들 웃고 동의했던 것 같다. 그때 결혼의 민낯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이혼이 아니라 졸혼이라면, 그래서 종교적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다면? 마지못해 유지하는 결혼보다는 졸혼? 그거 괜찮네. 휘청,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 그게 아니고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가 흔들리는 거였다.

 

어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 아무래도 잘못 따라나선 것 같애? 가볍게 묵직하게 편하게 놀고 오자니까.

 

그게 아니고요. 선생님 혹시 졸혼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그럼, 이외수 씨가 공개적으로 졸혼을 했잖아요. 얼마 전에 그걸 다시 취소했다지 아마? 이외수 씨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부인이 취소했다지요? 그게 왜? K 선생한테 이혼 말고 졸혼을 하라고 할까?

 

모든 갈등을 다 드러내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 뉴스가 나왔을 때요, 친구 중 졸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할 수만 있다면 다 하고 싶다는 거예요. 좋아서 유지하는 결혼이 없는 것 같았어요. 저는 나름대로 결혼에 만족하는 상위 5% 부부라는 자부심이 있거든요. 아니, 음…. 있었었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때 졸혼이란 말에 끌린 거예요. 남편이 싫은 건 아니지만, 편하게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인지 어쩐지. 문득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요 제가, 저희 부부가 행복해서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행복한 것인가 싶네요. 외적인 평화를 위해서 덮어두고 보지 않으려는 갈등이 있나 싶기도 하고요.

 

성찰 병!

 

네?

 

성찰 병이라고. 심리적 영적 결벽증! 하하. 사람 참! 결혼을 유지하는 것 어려운 일이죠. 맞아요. 혼자 사는 게 쉽지, 나와 다른 사람과 마음 맞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어렵고말고. 그래서 내적 외적 갈등이 있는 거고.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표현하고 살겠어요? 매일 싸우다 볼 일 못 보겠네. 졸혼에 환호하는 친구들 마음, 충분히 이해되는데?

 

아…. 저도 뭔가 결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사실 요즘 남편에게 쌓인 게 하나둘이 아니거든요. 갈등을 덮어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집에 가면 싸워야겠다, 제주살이 선언이라도 해야지,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어요.

 

엄한 부부 사이를 쑤셔놓는 게 됐구만. K 선생 얘기하는 거예요. 착하게 신앙생활에 충실한 사람이잖아요. 분노나 섭섭함 같은 것을 표현할 줄 몰랐던 거예요. 아니, 표현 이전에 인식을 못 한 거지. 감정이라는 게 에너지거든. 특히 분노 같은 감정 말이에요. 참는다고 없어지면 참 좋은데, 그 왜 열역학 제1 법칙이라는 게 있잖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에너지는 스스로 소멸하지 않아. 참고 인내하는 것은 미덕인데, 참아서 없어지면 참 좋겠는데,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지. 억압해서 압력받은 것은 언제 어디선가는 터지고 만다는 거예요. K 선생의 갑작스러운 이혼 선언이 그런 것 아니겠어?

 

그렇다면 에너지가 너무나 오랜 시간 고여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K 선생님의 상황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데 어쩐지 절망적으로 다가와요. 선생님께선 부정적으로만 보이진 않는다고 하시는데….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느낌적 느낌으로는 K 선생님은 어쨌든 더는 남편과 함께하기가 싫으신 거잖아요. 한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으신 거잖아요.

 

그러게. 현재로선 그런 것 같아요.

 

비행고도 때문일까. 가슴이 답답해 온다. 최 선생님께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 이혼 선언이 부정적이지 않다면 K 선생님에겐 지금 이혼만이 답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대안이 있다는 걸까. 60을 코앞에 두고 수면 위로 떠오른 갈등이라니. 평생 묵은 갈등이라니. 너무 늦은 것 아닐까? K 선생님은 어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최 선생님의 달관한 듯한 말씀에 마음이 갑갑하다 못해 화가 나려는 것 같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생에 대해 했다는 말이 있어. 인생이란, 처음 40년은 본문을 갖추고, 나머지 40년은 거기에 주석을 다는 거래요. 주석이 없다면, 본문에 담긴 의미를 올바르고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인생 후반에는 살아온 날에 대해 주석을 달아야 한대. K 선생을 비롯해서 대부분 부부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분명 뭔가에 끌려 결혼했을 거예요. 살다 보면 사람의 이면이 보이고, 어떤 식으로든 충돌을 하죠. 처음엔 싸우기도 했겠지. 사람 안 바뀌니까, 포기하고 또 사는 거예요. 아이도 키워야 하고. 그렇게 살다 중년을 맞고 은퇴의 시기가 돼요. 내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야.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생의 후반기에는 살아온 날을 반추하며 성장하는 거예요.

 

반추라면요?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회개랄지, 그런 걸까요?

 

글쎄, 잘 하고 잘못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잘못 살아왔다고 해서 그것을 지워버릴 수는 없는 거니까. 정 선생 말처럼 K 선생이 너무 늦게 자기감정을 만났다고 칩시다. 이혼하든 계속 살든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을 위해 그렇게 참고 살아왔을까? 그렇게 살아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또 무엇이고?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거지. 중년 이후 노년으로 가는 삶의 과업이라고 생각해요. 이제껏 살아온 삶에 주석을 다는 거지.

 

아…. 이혼의 문제가 아니군요.

 

그래, 다행히 남편도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상담을 요청해오지 않았소.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각각 돌아보는 거지. 정 선생, 사람 감정이 또 아주 재밌는 것이, 삼라만상이 그렇듯 고정된 게 아니라우. 우리가 같은 강물에 몸을 두 번 담글 수 없듯이 감정은 계속 변하고 흘러가거든. 정 선생, 제주도 여행 간다고 신나던 감정 어디 갔어요?

 

그러게요? 그 감정 다 지나갔죠. 지금은 답답하기만 하네요.

 

허허, 거 봐. 나는 이게 인간 소망이라고 봐. 우리가 힘주고 버티지만 않으면 변하고, 바뀌고, 흘러가거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드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금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K 선생 마음이, 그 부부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소. 그래서 우리 기도에 소망이 있는 것 아닐까?

 

아아…. 엇, 선생님 웃긴 생각이 났는데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남편과 싸우잖아요. 싸움보다는 늘 저의 일방적 공격이긴 하지만요. 그런 날은 부러 말씀 묵상도 기도도 안 하는 거예요. 말씀 보고 기도하면 꼴 비기 싫은 마음이 사라질 걸 알거든요. 기도하나 봐라, 기도하나 봐라, 하면서 기도하는 자리 째려보면서 왔다 갔다 해요.

 

허허허, 그냥 다니지도 않고 째려보면서 다녀? 에고, 재밌다.

 

진짜 진리네요! 선생님. 감정은 끝없이 변하는군요.

 

그럼, 흘러가는 감정 붙들고 있는 게 몹쓸 고집이지. 내가 바뀌나 봐라! 너를 싫어하기로 한 내 생각도 바꾸지 않을 거야! 이렇게 힘주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어떻게 흘러 들어가겠어? K 선생은 지금 자기 결혼이 대단히 잘못됐고 이걸로 끝이라 여기는지 모르겠는데, 실망만큼 좋은 시작이 없어요.

 

아오, 선생님 그런데요. 좋은 시작은 좀 그래요. 너무 낭만적? 음…. 이상적인 말씀 같아요.

 

아까부터 불편해 죽겠지? 현실 모르는 혼자 사는 노인네의 허황한 희망 같아? 하하.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카를 융(Carl Jung)이 말하는 남성 안의 여성, 여성 안의 남성 기억 안 나요?

 

알죠.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성이 숨어 있고, 남성의 무의식 안에는 여성성이 있다고요. 그것을 잘 통합해내야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요. 지금 두 분은 여성성 남성성 문제는 아니잖아요.

 

글쎄, 아닐까? 갱년기에 어때요? 남자들이 전에 없이 막 감상적이 되어 눈물 흘리고, 여자들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따지는 태도 같은 거. 이전과 다른 모습 보인단 얘기 안 들어봐요?

 

아, 선생님. 안 들어보긴요. 일상이죠. 남편이 예전에 안 그랬는데 사소한 일에 삐지고 그러는 데 정말 당황스럽고 죽겠어요. 제 친구 남편은요, 마초 같은 남자거든요. 요즘 트로트 들으며 가사에 감동해 눈물을 그렇게 흘린대요. 친구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고요. 너무 꼴 보기 싫다는 거예요.

 

하하하. 그래,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여성 호르몬이 더 발현하는 거지. 남자로 살아오느라 회피하거나 묻어두었던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신호라고 해요. 여자도 마찬가지고. 카를 융이 말하는 중년 이후 통합과 성장이 또한 그런 의미야.

 

아, 갱년기에 그런 큰 의미가!

 

융은 그래서 이때의 위기를 영적인 삶으로의 초대라고도 해요. 이제 비로소 나로 온전히 살아가는 시작이 되는 거지. 이혼하고 안 하고보다 중요한 건, 평생 남편에게 기대하던 것을 거둬들이고 내 안에 있는 남성성을 어떻게 건강하게 살려낼 수 있는가 하는 거야. 내 인생 본문의 주석을 다시 쓰는 일이라 할 수도 있고. 장담컨대, 생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거에요. 이래도 좋은 기회가 아닌감? 야아아, 벌써 제주도다! 긴 활강 시작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시니어 매일성경> 5, 6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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