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에서 “사랑하면 보입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요한1서 4:7-21 본문이다. 설교에서 인용된 도종환 님의 시 “배롱나무” 한 구절이 작은 사랑의 불꽃이 되었다. 설교에서 그 시를 마주한 이후로 온 세상이 배롱나무다. 무슨 마법 같다. 배롱나무가 이렇게 흔한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략)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사랑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셨고, 당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 영혼의 재료가 사랑일진대. 내 영혼에는 사랑의 기본값이 있지. 그렇지! 오랜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설교 후에 찬송가 314장을 불렀다. 2절 가사가 목에 걸려서 넘어가질 않았다. 이전에도 부를 때마다 늘 조금씩 불편했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에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내 비록 주 믿는 성도 중 하나이지만, 이런 차별적 사랑을 받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불편해졌다. 이런 찬송 가사가 얼마나 많은가. 나 아닌 누군가를 ‘죄인’이라 이름 붙이고 타자화하는 이런 식의 찬송 가사며 텍스트가 얼마나 흔한가? 구원받은 나와 구원이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 배제와 혐오에 닿는 자칭 선한 뜻 중 하나가 ‘구원받은 자아’ 특권의식이다. 그런 의미로 ‘주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큰 사랑’은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삐뚤어졌다. 설교로 받은 은혜를 찬송으로 다 쏟는 형국이었다.

예배 후 오후에는 젊은 부부들과 ‘육아 세미나’가 있었다. 육아 얘기를 하는데, 대화가 자꾸 자기 부모님과의 관계로 흘러간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의 최선이었겠지만, 부모님께 “미안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한다. 흔히 듣는 말이다. 크고 작은, 물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부모 폭력으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그저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들으면 살겠다고 한다. 그러면 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할 수 있는태도가 필요한 것 아니냐 하는 데 다다랗다. 한 자매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각이 아이들에게 온전히 사과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어머니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 분이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미안해”라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고, 나름의 처절한 기도의 몸부림으로 비신자 어머니를 용서한 체험의 고백임을 알고 있다. 존재를 향한 ‘미안함’이 존재적 죄인에 대한 자기 자각 없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자기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키우지만, 죄인인 자기 현주소를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죄와 죄인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는 기도와 성찰이 사랑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314장 2절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이유를 안다. 구원받은 자신, 구원받은 데다가 그 누구보다 구원의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자아팽창에 허덕이는 사람을 안다. 그리하여 자기는 ‘큰 사랑’ 받기 합당한 성도라는 자의식이 충만하다. 구원의 강 건너편에 있는 죄인이라 이름하는 이들을 가엾게 여기며 구원자 역할을 자처한다. 가엾게 여기는 것이 겸손에 뿌리내린 연민이면 좋을 텐데, 교만과 자아팽창이니 종착지가 사랑일 리 없다. 그 사람을 잘 안다. 너무 익숙하고 잘 아는 사람이라 모른 척하고 싶을 뿐이다. 모른 척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비슷한 사람 찾아내어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손가락질과 남 탓의 명수이기도 하고. 이런 찬송을 부르며 안도감을 느끼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던(는) 나다.

마침 읽은 아빌라의 데레사 <영혼의 성>에서는 이런 구절을 만났다. 기도 여정의 맨 마지막 단계, 일곱 번째 마음의 방에 관해서이다. 죄인에 대한 인식의 방향이 사랑과 혐오의 갈림길에 선 우리에게 이정표 되는 것임을 알겠다.

“이 불행한 영혼들은 캄캄한 감옥 속에서 수족이 묶인 채 공이 될 선이라고는 아무것도 못할 지경으로... (중략) 정말이지 이런 영혼들은 동정할 만하고, 한때 우리도 그런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보면서, 주께서는 이들에게도 인자를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각별히 마음을 써 기도하고 태만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사랑하면 보인다.
배롱나무가 보이고,
배롱나무 당신이 보이고,
내가 보이고,
죄가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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