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동네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동네 안에, 동네와 어우러져 지어진 집이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동네 산책을 했다. 로망 중의 로망이다. 아침에 일어나 시골길을 걷는 것. 그래서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3일 내내, 비가 오는 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른 아침 산책을 했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이 교회이다. 어릴 적 우리 교회 같았다. 첫날 산책에 나서서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발이 끄는 곳이 교회였다. 교회 마당에 하얀 백합이 야생적으로 피어 있었다. 꽃집에서 보는 백합, 꽃다발 안에 든 백합이 아니라 얼마나 반가운지.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발이 이번에는 예배당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는데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사람은 없다. 바로 조금 전까지 새벽기도 마치고 가장 늦도록 기도하신 어느 권사님(또는 권사님 나가시는 걸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던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익숙한 냄새,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난다. 이 교회에서야 장의자 냄새일 테고.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다 싶은 건 어릴 적 교회의 마루에서 나던 그 냄새 아닐까. 감각적 냄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여하튼 존재에 새겨진 어떤 냄새이다. 기도하는 엄마 옆에서 방석 깔고 자던 그때부터 몸에 배였을 것이다. 애기 때부터. 엄마는 산후조리 마치고부터 온갖 예배들에 갔을 테고. 수요일이나 금요일 또는 새벽 예배 때 엄마 옆 방석 위에 누워 잠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 시절 나무 냄새와 함께 새겨진 것이 노래들, 찬송들, 어린이 찬송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교회에 앉아 기도하고 나와 걷는데 흘러나온다. 냄새와 함께 저장된 어릴 적 그 노래들이.

연못가에 자라는 한 송이 백합
천사같은 흰 옷을 입고 싶어서
맑은 샘물 거울에 몸을 비추며
푸른 하늘 우러러 기도합니다

 

담 밑의 봉숭아 어여쁜 봉숭아
그 누가 날마다 키우시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날마다 쉬잖고 키우신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어릴 적 불렀던 많은 찬송들이 내 세포 구석구석에 저장되어 있다. 음악치료사나 어린이 성가대 지휘자, 찬양 인도 선생님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 키워졌는지 모르겠다. 그 많은 찬송 중에서도 '꽃'으로 비유된 어린이에 동일화되었다. 목사관 마당의 풍성한 꽃밭, 그 꽃밭에 정성 들이던 엄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인 것도 같고. 무엇보다 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분꽃, 나리, 백합, 찔레, 작약.... 같은 꽃들이 사시사철 눈앞에 피어 있었으니 노래 가사로 만나면 익숙할 밖에. 그 모든 기억이 나다. 그 기억들이 나를 형성했다.

신앙 사춘기를 겪어 내며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었던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웠던가. 엄마의 화원, 아버지의 화원에서 고이 길러진 내가 견딜 수 없었다. '화원'이 아니라 '비닐하우스' 같았다. 온실 속의 화초. 부모의 온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실, 교회의 온실에서 사랑받는 어린 백합꽃에서 야생의 나리꽃이 되기 위해 했던 몸부림이라니. 엄마를 아버지를, 교회를 혐오하며 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시절이었다. 하나님께는 벌써 버림받았고. 은혜 비를 거부하는 어린 백합꽃을 하나님이 돌아보실 리가 있겠나 싶었었다. 그랬으니 그렇게 찾아도 불러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겠지.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치유와 회복의 끈 소속감』이란 책을 방학 동안 함께 읽었다. 마치는 날이다. 마지막 챕터에 "봉인된 명령"이라는 말이 나온다. 내 존재 숨겨진 어떤 씨앗을 일컫는 말이다. 되어야 할 내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 '나'가 되기 위해서는 봉인을 풀어야 한다. 그 봉인은 고유한 상처이기도, 고유한 육아 환경이기도, 고유한 성격이기도 하다. 나의 총체, 내 기억의 총체이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필요하다면 치유하면서 되어야 할 내가 되어간다. 내 존재의 봉인된 명령에 이름을 붙여보자 싶은데, 책의 공동 저자인 데니스 린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식으로 "봉인된 명령"에 이름 붙인 것을 코스프레해보자면 "아이의 노래" 정도 될까 싶다. 내 존재의 소중한 부분, 나를 형성한 어떤 좋은 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아이'와 '노래'를 빼놓을 수 없으니. 아이가 부르는 노래 같은 존재로 세상의 선에 기여하고 싶다.

 

 

오래된 교회 옆에는 오래된 종탑이 있었다. 내 아득한 기억 속에도 종탑이 있다. 예배 시간이 가까워오면 엄마가 종탑에 달린 줄에 매달려 종을 쳤다. 아주아주 어릴 적에 보았기 때문에 흐릿 하달 수도 없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남편에게 종탑을 보여주며 "우리 엄마가 어렸을 적에 종을 쳤어. 첫종, 재종 알아? 예배 시간 전에 두 번의 종을 쳐. 첫종을 치고, 예배 시간이 임박하면 재종이라고 한 번 더 쳐." 말하고 나니 귓가에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은 철이 들었을 때는 차임벨로 바뀌었고, 스피커를 타고 댕댕 찬송 멜로디가 울리는 종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일찍 저녁을 먹고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댕댕 종소리가 울렸다. 진짜로 들렸다. 뭐지? 싶었는데 수요일 밤이었고 수요예배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였다. 종탑의 종을 실제로 친 것인지, 스피커로 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 던의 시가 생각나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울린다.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나를 형성한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 나를 최초로 형성한 엄마와 아버지를 생각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꽃밭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한다. 종소리와 꽃을 생각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딸이라서 받아 안은 무수한 상처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잃었던 세상을 생각한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엄마와 남겨져 살아야 했던 날들의 좌절들을 생각한다. 아이같이 순수하여 상처였던 엄마의 신앙과 성격을 생각한다. 늙은 나이에 낳은 딸을 애지중지, 걱정에 걱정으로 키웠던 엄마의 사랑을 생각한다. 엄마가 쳤던 종소리를 들어본다. 기억 가장 깊은 곳에 귀 기울이며. 엄마의 죽음이 감소시킨 나를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으로 감소된 나로 인해 씻겨 내려간 내 자아를 생각한다. 엄마의 종은 나를 위해 울린다. 나의 봉인된 명령의 이름은 "아이의 노래" 또는 "엄마의 종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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