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다녀왔다. 4월 16일에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아이들이 무탈하게 닿았다면 재잘재잘 즐기고 놀았을 기간이다. 여러 일정 중, 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오설록에 수학여행 아이들 무리와 만났다. 4월의 제주는 슬프다. 꽃이 피면 시들고 난 후 떨어지기 마련인데, 활짝 핀 채로 댕강 떨어져 누운 동백이 늘 슬프다. 모든 아까운 생명을 떠올리게 한다.
격주로 연재하는 '신앙 사춘기 너머' 탈고하고 가벼운 제주행을 누리고 싶었는데. 그럴 리가... 정신실이. 원고 싸들고 가서 새벽 시간 밤 시간 짬짬이 붙들고 있었다. 겨우 탈고하고 '됐다, 편히 자자!' 하고 폰을 들고 누웠는데 뉴스 메인이 프란치스코 교황님 선종이었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폐렴으로 위중하다 고비를 넘기셨고, 퇴원했고, 부활절에 베드로 광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셨는데... 선종이라니!
왜냐하면, 막 탈고한 원고의 주제가 이런 것이었다. '존경할만한 영적 지도자, 그대는 가졌는가' 글을 쓰는 내내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가졌나? 가졌다. 교황 프란치스코. 진보니 보수니, 모든 수식어를 떼고 그분은 현존하는 사람 중, 내가 아는 예수님과 가장 닮은 분이었다. 개신교인이, 개신교 목사의 아내가 가톨릭의 교황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어디다 대고 할 수가 없어서, 혼자 사랑하는 분이었다. 선종 소식에 왜 이리 슬픈가 싶어 이런저런 장면을 떠올려 보니, 이분에 관한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하신 말씀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 이 말로 내 마음속 책 한 권을 이 한 마디로 정리하겠다.
4월의 제주엔 유채꽃을 필두로 노란색 꽃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크기나 모양이 제비꽃 닮은 '양지꽃', 해를 향해 정면으로 얼굴을 들고 있는, 해가 지면 꽃잎을 오므려 얼굴을 가리고 마는 '하늘바라기꽃', 어쩐지 나 같았다. 작고 바닥에 붙어 있어서 '앉은뱅이꽃'이라고도 불리는 제비꽃인데. 키 작다고 붙여진 내 별명이기도 하다.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는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내 인생 첫 노래가 생각나는 '하늘바라기꽃'도 말이다. 괜스레 동일시된다. 노란 리본 때문일까?
엄마 돌아가시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황망한 몇 개월을 보내며 가톨릭의 '연도'라는 기도가 참 부러웠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이단이나 되는 듯 화들짝 하면서, 고인을 위한 기도는 입에 담지도 못하는데. 가톨릭에선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위한 기도가 일상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립고, 그분들의 영혼이 궁금할 때면 언제든 '연미사'라는 이름으로 봉헌하고 기도하는 것이 부러웠다. 교황님 선종 뉴스를 보다 보면 알고리즘으로 뜨는 것이 죄다 추모 미사이다. 바티칸에서는 연일 추모 기도가 이어지고. 우리나라 성당에서도 추모 미사가 이어진다. 혼자 사랑이니, 조용히 명동성당의 분향소라도 찾을까 싶었다.
오늘 영성지도가 있는 날이라 부천의 가톨릭대학에 갔다. 마치고 나왔는데 캠퍼스의 바람이 좋길래 무작정 잠시 걸었는데. 성당 앞이었다. 문 열고 들어갔더니... 분향소가 준비되어 있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성당에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고통 앞에서 중립을 모르는 사랑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다. 영성지도 신부님께서 교황님의 유서에 담긴 '내 생애 마지막 시간의 고통을 봉헌한다'는 말씀이 단지 육신의 고통이었겠는가, 보수적인 추기경들과 신자들의 끝없는 비난과 위협 가운데 느끼셨을 심적 고통이 아니었겠는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해처럼 빛나는 곳, 그곳에서 지금은 평화로우시겠지. 어쩌면 부활주일 지내고 돌아가셨을까, 어쩌면 세월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즐길 그 타이밍에 돌아가셨을까. 부활을 살고 계실 것이다. 그분 자서전 제목이 '희망'인데. 일상에서 누리는 부활의 희망으로의 초대라 여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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