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을 달리다보면 암사동을 지나서 강동대교로 가는 길에 고개가 있습니다. 결혼 전에 구리에 살 때 항상 그 오르막을 오르고 내려서 강동대교를 타고는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 즈음은 대학원 다니면서 과외를 할 때였는데....늦은밤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 고개를 지날 때쯤이면 '이제 집에 다 왔다. 하루 일이 다 끝났다' 하는 안도감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언젠가 오랫만에 그 길을 혼자 운전하고 지나는데 그대로 강동대교를 넘어 구리로 가면 엄마랑 동생이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내 자유로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남편은 학기 중이었고 아이들 때문에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운전을 하고 집에 가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미혼 때의 그 자유로움이 마구 그리워지고, 또 계속 생각을 발전시키다보면 남편과 아이들이 내 자유로움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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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면 밥을 먹이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공부를 봐주고, 사역을 도와야할 많은 책임감으로 주부로서의 저는 자유로움이나 여유가 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가끔 아이들이 먼저 나가고 혼자 집에 있다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는 조금 낫지만 어찌됐든 집에 있으면 자유로움이나 여유는 잊어줘야 하지요. 대부분의 주부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요?  

오늘은 집에 있는데도 '여유, 자유' 가 내 것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나갔습니다. 예매를 하면서 '당신도 갈거야?'라고 묻는 것을 꼭 '안 가도 된다'는 것으로 들어버리고 셋을 묶어서 내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집에 있는데도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여유가 있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거실의 탁자 앞이죠. 읽는 책, 새로 읽을 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탁자 앞에서 구리로 넘어가는 88도로를 운전하는 느낌이 살짝 드네요. 오랫만에 이런 느낌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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