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수술 후 말을 하지 못하던 어느 날 아침.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일깨워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힘든 몸으로 식사준비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세 식구를 깨우는 일인데....
아이들 학교 갈 시간은 가까와 지는데 세 식구를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합니다.
소리는 낼 수 없으니 종을 하나 찾아다가 귀에 대고 쨍쨍 울렸습니다.
이렇게 말 없이 세 식구를 깨우면서 스트레스가 턱 정도 까지 올라왔습니다.
남편이 왜 저렇게 아침잠이 많은 지 결혼 10년 동안 풀지 못하는 숙제다 싶으니 더욱 지쳤습니다. 겨우 일어난 남편이 겨우 애들을 깨우고, 늦게 일어난 현승이는 짜증을 내면 앵겨붙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순간적으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습니다.
아빠한테 쌓여 있던 것이 부글부글할 무렵, 현승이가 안전핀을 뽑은 것이지요.

이런 날 만큼은 좀 일어나서 최소한 내 목소리를 대신해줘야 하는 거 아냐?
새벽기도 갔다 왔다구? 이런 상황에서 그런 핑계는 이기적일 뿐이야.

2.

방학이라 온 식구가 집에 있습니다.
오전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오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있었습니다.
집에 와 보니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댁에 가지 않는 한 결코 하지 않는 것이 컴퓨터 게임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컴퓨로 에니메이션 DVD를 보는 것이 고작 모니터를 마주보는 유일한 시간 입니다.  두 녀석 시간만 주면 거실에 온갖 것들 다 늘어놓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놀 수 있는 녀석들입니다. 비록 치우는 게 힘들고 온 집안에 정신이 없어도 컴퓨터 게임보다 백 배 낫다는 생각으로 감수하는 일입니다.
헌데 아이들의 아빠는 본인 편하게 독서하시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애들을 컴퓨터 게임 앞에 놓아두시다니요...
또 혈압이 오릅니다. 나는 자기가 없는 일주일을 어떻게 지내는데....
컴퓨터 게임시키면 내 몸 편한 거 몰라서 내가 못하는 줄 아나? 아빠가 돼서 말야...
애들은 나 혼자 키우냐고...

3.

온 식구가 이마트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장보기를 마치고 널따란 주차장에 쇼핑카트를 밀고 들어 섰습니다. 짐이 실려 있고, 현승이가 타고 있고, 채윤이가 매달려 있는 쇼핑카트를 아빠가 삥그르르 돌리기 시작합니다. 다 돌아가면 또 돌리고 다 돌아가면 또 돌리고....애들은 소리 지르고 좋아서 죽습니다.
저는 한 발 물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마음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옵니다.
'우리 애들한테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는 말입니다. 아빠와 아이들이 셋이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때, 엄마한테 혼나고 아빠 품을 찾아 파고드는 아이들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우리 애들에게 아빠가 있다니...너무 다행이야' 합니다.

내적여정을 하면서 사춘기시절 아버지의 부재가 얼마나 큰 빈공간을 만들어냈는지 새삼스럽게 보게 됩니다. 자꾸 자꾸 새어나오는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는 그 빈 공간에서 나오는 말임을 이제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빈 공간을 모진 책임감으로 채워야했던 사춘기 이후의 시절들이 오늘의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4.

내 어린시절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아도 채윤이와 현승이에게 김종필 아빠가 있는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일상의 의미없는 시간들을 놀이공원으로 만들어주는 상상력과 건강한 몸을 가진 아빠, 엄마의 날카로움을 관용과 이해심으로 마모시켜주는 아빠, 새벽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아빠.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 그 진지하신 몸을 망가뜨려 웃겨주시는 아빠.

이 글을 쓰며 맨 위 두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용서를 선언합니다. 아니 공식적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사랑이 더 진보하지 못하고 늘 같은 문제로 쪼아대는 옹졸함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당신이 우리 아이들의 아빠라서 얼마나 감사하고 든든한지....


0123456789

'아이가 키우는 엄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학이다 자유다  (11) 2009.02.06
스타워즈 폐인  (17) 2008.09.20
패스트푸드점  (10) 2008.03.11
종업식에 읽는 편지 하나  (10) 2008.02.22
내 기쁨  (16) 2008.01.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