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감 / 불행감


언젠가부터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멜로디가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누군가 하모니가 잘 맞는 사람과 꼭 한 번 제대로 불러보리라. 불러보고 싶다. 오래된 노래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란 곡이다. 두 개의 멜로디가 나란히 어우러져 겹치는 듀엣곡이다. 예전 한영교회 샬롬찬양대 지휘할 때 함께 불렀던 기억이 아련하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 막으나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지난 1월 교회 사경회 특송으로 부르는 기회를 딱 얻었다. 내 영혼에 찬양의 샘이 마를까 보내주신 노래 짝이 하나 있다. 탱탱한 젊은 목소리에 기대어 노래했다. 연습하느라 부르고 부르다 보니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맴돌았던 것이었다. 따르던 스승을 잃고(영영 잃은 것으로 알고 있었겠지) 십자가 언덕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 위에 선 두 사람. 그 막막한 걸음걸이를 떠올렸던 것 같다.


적나라한 2절 가사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그렇다. 나는 자주 이 세상 사는 길이 엠마오의 길이라고 느낀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소망 없는 하루를 사는 날이 많다. 엠마오 내려가는 길 위의 두 사람, 그 사람들 뒤를 비슷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먼지 나는 길이다.


나타남 / 들이닥침


특송을 부르다 부끄럽게도 목에 메고 말았다. 먼지 나는 길 위에 선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니! 나는 안다. 모두 실재라는 것. 절망과 공포 속의 홀로 걸음도 실재요, 그 곁에 홀연히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을. 그분은 나타나는 분이다. 그분의 부재로 내 영혼이 말라갈 때, 부재로 현존하는 분. 가장 부조리한 일상에 들어와 조용히 함께 걸어주시는 분.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게 해놓고 다시 사라지시는 분. 


아닌 게 아니라 특송을 부른 그 사경회에서 박영돈 교수님의 세 번의 설교는 내게 '나타난 말씀'이었다. 사모님과 짧은 대화 역시 갑자기 들이닥친 위로와 격려였다. 그렇게 그분의 은총은 예고 없이 나타나거나 들이닥쳤다. 늘 그러했다. 그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는 용기를 북돋운다.


나타난 스승들


래리 크랩의 <행복>과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 동시에 발간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의 스승들. 래리 크랩이 한 번, 리처드 로어가 한 번 나를 회심 시켰다. 내 인생에 두 스승이 나타나(들이닥쳐) 영적 가면을 벗겨내라 촉구하였고, 내내 충실한 안내자로 함께 해주셨다. 두 스승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내가 아니었을 터.


게다가 들고나온 제목이 '행복'이다. 또 '떨어짐'이다. 서문만 읽어도 이 선생님들이 뭔 얘기를 늘어놓으실지 알겠는 사이가 됐다. 늘 하시던 그 얘긴데 또 새롭고, 읽는 자세를 다시 고치게 된다. 전에 알아들었던 그 얘기가 다시 새롭게 들리는 것은 그사이 살아낸 스승들의 지난한 삶을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로 엠마오로, 드물게 예루살렘을 향해 쉬지 않고 걸었던 거장들의 진솔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떨어짐 / 행복


올라가기 위해서 떨어지고,

진정 행복을 위해 쓰디쓴 일상의 잔을 마셔야 하리라.

스승이 나타나 단호히 가르치시니 어쩔 것인가.


 




괴발개발 억지로 쓴 여행기이지만,

이 부분은 나름대로 의미를 발견한 부분인 듯 하다.  


여행 갔다 와서 가장 마음에 남고 충격이 컸던 것은 남이 보는 내 보습이었다. 나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무서워하고 싫어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이 싫었다. 여행에서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너무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적응하고 생각해보면 그건 기회였다. 1달 동안 나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 그러기에 평생 내가 될 수 없는 그 모습을 조금 흉내 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형 누나들도 나를 그런 아이로 인식한 것 같았다.

 

나는 한국에 와서 잘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 젤 큰 이유는 방금 말한 내 모습이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크게 바뀌거나 안과 밖이 달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 한국에서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데 양심이 찔렸고 잠깐 1달이지만 행복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 이후에 계속 많은 생각을 하면서 느낀 건데 어찌 보면 유럽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 둘 다 나 자신이고 내가 만든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여러 모습이 부끄럽고 양심에 찔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두 였고, 앞으로도 계속 나 자신일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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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5

 


제목이 내가 매일 기쁘게(찬송가 191)’이다. 이런 제목의 찬양을 부르면서 울 수 있을까? 빠른 템포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온몸 들썩들썩 손뼉 치며 찬양하면서 말이다. 물론 너무 기뻐서 울기도 하니까 당연히 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내가 매일 기쁘게찬양을 하면서 아픈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내가 해봐서 안다. 이 찬송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 콕 찍어 정해준 나의 찬송이다. 밝은 성격에 익살 떨며 깔깔거리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이기에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같은 가사와 딱 들어맞는 캐릭터라는 것. 동의한다. 내게 가장 쉬운 감정이 기쁨이다. 그러니 찬송가 191내가 매일 기쁘게는 나의 찬송이 맞다.

 

그러나 내 아무리 긍정의 사람이지만 늘 기쁘게 수는 없는 일이다. 지탱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로 어깨가 축 쳐지고 마음의 생기가 바짝 말라버린 어느 날이었다. 기쁘게 찬양하자는 인도자의 템포와 따라 손뼉 짝짝 치면서 찬송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전주가 끝나고 저 가사를 입에 담는 순간 눈물 둑이 터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가슴이 딩딩 울리는 통증이다. 한때 내가 숲의 새처럼 이 노래 하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묘지 사이를 휘파람 불며 걸어갈 기세로 소망과 긍정의 날을 살았는데. 그 기쁨의 날과 메마른 순간의 간극이 너무 크다. 슬픔이라고도, 막막함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이고 아픔이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여기서 노래하는 기쁨은 외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의 감정만은 아니다.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나를 알아주는 말이 무성하고, 몸은 건강하여 활기가 넘칠 때 흘러나오는 콧노래가 아니다. 순례의 길, 좁은 길이다. 성공하고 인정받는 것에 취해서 기뻐 그 자리에 안주한다면 순례의 길이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제치고 달려야 하는 길, 성공을 위해 사랑과 진실을 유보하고 달리는 길을 좁은 길이 아니다. 그 순례의 길, 좁은 길에서 밤낮 기뻐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의 감정이거나 노래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타고난 밝고 명랑한 성품에 힘입어 좋아라 손뼉 치며 부르는 찬송, 피상적인 기쁨 그 이상의 고백일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바, 기쁨이 사라진 메마른 땅을 밟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행복과 기쁨이 꼭 좋은 것, 그 반대는 피해야할 것도 아니다.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1),

십자가 앞에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도(2),

기쁜 마음으로 주의 뜻을 행함(3)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음(벗을 날에 대한 소망, 4)

 

이유는 한 하나! 주의 영, 성령이 함께 하심이다. 평안과 기쁨은 성령 충만의 중요한 지표라고 한다.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진 것도 서글퍼 눈물이 흐르는데, 성령 충만의 부재라고? ,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든 스미스 목사님은 저서 <예수의 음성>에서 우리 마음의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한다. 기쁨과 평화는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주는 시금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성령의 임재에 대한 중요한 지표로서 기쁨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기쁨이나 평화가 유일하게 정당한 정서적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노, 두려움, 슬픔, 절망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불안정한 세상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부르기로 한다. 찔찔 짜면서 나는 숲에 새와 같이 기쁘다노래할 것이다. 깨어진 세상을 살며 때로 슬픔과 분노가 기쁨을 향한 정직한 발돋움이 될 수 있기에. 내가 주님 안의 참된 평화를 맛보았던 그 어느 날에도, 그 다른 어느 날 죄에 빠져 평안함이 없을 때에도, 그 어느 기쁨의 날을 그리워하며 상실감에 젖어 눈물 흘릴 때에도 주의 영은 함께 하시니 말이다. 기쁨의 근원이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




1월 한 달 현승이는 '유럽 인문학 여행'에 다녀왔습니다. 낯선 곳, 새로운 일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시작은 정말 우연. 페이스북에 청소년 인문학 여행 광고가 뜨기에 찬찬히 보니 좋아보였습니다. 그야말로 1도 기대하지 않고 옆에 있던 현승에게 보여주며"현승이도 이런 데 가면 좋겠다" 했더니"간다고 하면 보내줄 거야?" 의외의 대답! 일단 나꿔채서는 "보내줄게.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보내줄게. 지금 접수하면 할인도 해줘. 할까?" "어, 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덜컥 결정할 수 있는 비용은 아니었지만 프로 낯가림러가 하겠다니 일단 기회를 잡았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중2가 되도록 사교육비 거의 들이지 않고 공짜로 키웠으니! 기꺼이 보내기로 남편과 마음을 맞췄습니다. 다녀와서 간단 소감을 남겼는데 본인 허락받아 블로그에 내놓습니다. 준비부터 다녀와서까지 엄마 아빠 속 뒤집어지고, 쓰리고 한 얘기가 여행기보다 열 배는 길겠으나 그건 꿀꺽 삼키기로 하고요.

 


처음에는 엄마의 권유였다. ‘아직 몇 달이나 남았고 지금 나는 행복하니까 뭐라는 심정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때도 불안함이 있었지만 유럽을 갈 거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그저 좋았다. 여행 가기 한 달 전부터 서서히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때쯤 또 학교 시험이 끝나서 가든 말든 일단 놀자라는 생각으로 놀았다. 2주일 정도 남았을 때부터 하루하루 정말 후회하면서 지냈다. 특히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친구들이 방학 때 같이 놀 계획을 세우는 걸 들을 때는 더 후회가 심해졌다.

 

인천공항에서 우리 여행팀이 모였을 때 불안감이 짜증으로 바뀌고 엄마 아빠한테 짜증을 냈다. 근데 출국심사를 하고 비행기 타는 걸 기다릴 때는 공항 분위기가 주는 설렘이 더 커졌다. 정말 힘들게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도착하고 부산스러운 분위기 속에 숙소로 이동해 방배정을 받고 잠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은 이랬었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시작은 짜증과 후회만 가득했다


여행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딱 어느 시점 이후로 그저 그냥 친한 친구들과 형들, 누나들과 놀다 온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른들이 '많은 것을 배우고 와' '보는 눈을 넓혀 와' 같은 이야기들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놀다가 온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저 노는 것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정말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여행 초반에 내가 정말 싫어하는 스타일의 몇몇 애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계속 연락을 할 정도로 친해졌다. 사람은 누군가를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단점만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 친구들은 내가 처음 봤을 때 너무 시끄럽고 말을 막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하는 행동들이 계속 눈에 밟히면서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 자기가 편하고 좋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좋은 점 밖에 안 보인다. 정말 신기했다. 그 친구들과 친해지니까 깨네가 하는 말은 그저 웃기고 공감이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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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권의 책을 함께 읽었고 이제 일곱 번째 책을 시작하는 작은 모임이 있다.

우연한 만남에 부드럽지만 강한 의지 한 스푼 넣어서 몇 사람을 모았다.

좀 웃기고 가끔 지나치게 진지한, 믿을만 한 언니가 설레발 하니 어어어, 하고 따라온 동생 몇이다.

함께 읽고 배우고, 나누고, 기도하고, 더불어 자라간다는 조금 막연한 목적으로 시작했다.

나이 먹어 뭔가를 같이 해보자는 뜻도 있었는데, 역시나 막연하고 모호했었지.

'영성모임'이라 불렀다.

그러나 꾸준히 만나고 꾸준히 읽었고, 이번에 끝낸 책은 무려 햇수로 3년을 끌었다.


그대가 따라가는 실이 있지

그 실은 변화하는 것들 사이를 지나가지

그러나 실은 변화하지 않지

사람들은 그대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해하지

그내는 그 실에 관해 설명을 해야만 하지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렵지

그대가 그 실을 붙잡고 있는 한, 길을 잃을 수는 없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지

그리고 그대는 고난을 겪으면서 늙어가지

무슨 짓을 해도 시간이 펼쳐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

그대는 결코 그 실을 손에서 놓아버리지 않지


<세상의 이치> 윌리엄 스탠포드


<불멸의 다이아몬드>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시인데 '그 실'은 '진짜 자기'(거짓자아 아닌)를 뜻한다고 하는데,

돌아보면 우리의 모임 또한 '그 실' 같았다.

변하는 일상을 속에서,

굳이 우리가 왜 모이지? 우리는 어떤 관게 무슨 모임이지?

설명하거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어려운, 

고난 당하는 서로를 바라보고, 늙어가는 서로를 확인하면서 만났다.

끊어질 듯 말 듯, 가느다란 실 같으나 결코 놓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같이 책을 읽자고 했다.

청년 시절, 결혼을 하고 싶은데 마음 같이 않았던 교회 친구들 모아 책을 읽자 했고.

남편과 사귀기자마자 함께 책을 읽었고,

결혼 후 신혼부부 모임을 만들어 주일마다 책나눔을 하고.

(아기들 기어다니고 똥기저귀 굴러다니는 신혼집 거실 돌아다니며 치열하게도 모였다.)

마음에 딱 맞는 한 커플과 넷이서 진하게 읽고 나누는 시간도 있었다.

가정교회 선배 부부들을 졸라 부부 책모임을 하기도 하고,

아끼는 제자 한 둘을 붙들고 읽기 만남을 갖기도,

아이 키우며 돌아버릴 것 같은 처지의 동병상련 엄마들 모여 육아 책을 읽기도.

젊은 사모님들을 불러 모아 함께 한 시간도 있다.


[스승이신 예수가 우리를 부른 곳은 공동체이다!]

젋은 날 배운 이 한 문장에 꽂혀 공동체를 일구고 가꾸는 것에 조용히 목숨을 걸고 살아온 시간이다. 

남편과의 공동체가 모든 공동체의 질을 결정하는 바로미터였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 섬긴 가정교회와 청년 목자모임은 어떤 결정체였다.

매주 10인 분이 넘는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먹고, 밤늦도록 하하호호 엉엉엉엉 웃고 울었던.


이 모든 (책)모임이 각각 소중하고 고유의 의미를 지녔지만,

어쩌면 이 '영성모임'을 향한 머나먼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나온 작은 공동체 경험에 대한 보상 또는 배움의 열매로서의 만남일지 모른다.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에 지쳐 있는 내게 줄 것도 받을 것도 있는 만남이었달까. 

이 실낱처럼 이어온 모임은 나를 지탱하고, 나를 비춰보게 하는 안전한 공동체이다. 

그간 만들고 이끌어 왔던 어떤 책모임보다 덜 힘이 들었다.

아니 갈수록 힘 들이지 않고 모임을 유지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하자.


자발성과 정직성.

좋은 공동체가 가진 특징을 나는 이 두 가지로 정리하겠다.

이 두 원칙에만 부합하자는 마음으로 영성모임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아니 영성모임이 가르쳐준 것이 이 두 가지 원칙이다.

자발적이고 투명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 또한 영성모임을 통해 배운 것 같다.

여섯 권의 책을 함께 통과해왔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다.

주먹 불끈 쥐고 지켜내고자 하지 않았지만 미미하게 이어지더니 쌓인 열매가 저러하다.


끊어지지 않고 여기 '영성모임'까지 이어온 그 실은

오래 전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책모임, 그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 실을 손에서 놓아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르시되 가서 전, 하라 하시니

 

아뢰되 나는 어깨가 뻣뻣하고 둔한 자라

제가 벌써부터 오십견인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네 남편 종필이 있지 아니하냐

그의 어깨가 튼튼하고 일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할 일을 주라

그가 모든 힘쓰는 일을 맡아 행할찌라



이르시되 내 새 전,을 너희에게 주노니 사랑 전,을 하라

하시니

신실이 이르되 내가 이 하트전 하나로 퉁치리라

동태전, 동그랑땡, 깻잎전..... 이 모든 것을 퉁치리라 하니라



또 이르시되

가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의 손으로 전, 하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명절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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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살아와 자신의 작품 ‘엘리제를 위하여’가 소비되는 방식을 확인하면 어떤 표정 지을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수업 시작 종, 초인종 소리, 심지어 쓰레기차 후진 알림 멜로디. "이렇게나 쓸모 있는 유용한 음악을 내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며 좋아할까요?


칼 융이 살아온다면요? 자신의 심리유형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 MBTI가 쓰이는 방식을 본다면요? "딱 보니 너는 ESTJ라서 그래. 아, 그 사람은 INFP라서 그래. 는 어쩔 수 없어....." 유형으로 이름표 붙이고 규정하는 하나님 놀이를 어떻게 볼까 싶어요.


칼 융 최후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찬찬히 읽자니 그간 했던 수많은 MBTI 강의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반성, 또 반성하게 되네요. 융은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역사가 칼 융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든 현상이든 만들어진 틀에 끼워 넣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쉬운 만큼 게으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틀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게으름이야말로 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에니어그램을 '거울'이라고 합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잡아내는 인간의 본성, 자기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안다 하는 순간 어리석음으로 떨어지고, 섰다 하는 순간 넘어지는 인간입니다. 신비롭게도 안다 하는 순간 나의 새로운 면을 비춰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에니어그램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입니다. MBTI도 자기를 객관화의 도구로만 쓰인다면 이보다 신박한 거울이 없을 것입니다.


칼 융이 그린 무의식의 지도는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은 물론 많은 영성가들의 가르침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인격의 빛과 그림자, 남성성과 여성성의 일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며 온전함을 추구하는 태도. 그 지난한 고뇌와 깨달음의 여정이 <기억 꿈 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빨리 쉽게 읽히지 않는, 차마 죽죽 밑줄을 그어댈 수 없는 책입니다. 경외감을 느끼며 읽었습니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칼 융




 

 

아아, 고민되네.

치즈도 올리고 싶고 계란도 올리고 싶고.

두 개 다 올리면 맛이 이상하고.

어떡하지.

아아, 어떡하지.

그냥 계란으로 할게. 계란 올려줘.

 

네 마음 잘 알아, 아들.

짬짜면 심정, 엄마가 잘 알지.

기다려!

옜다, 계치김치볶음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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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저런 책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문 시작이 저러하다. 이 책 나오고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자꾸만 마주쳤는데, 굳이 클릭하지 사서 읽을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알라딘 중고서점 놀이에 빠진 탓에 꼭 읽을 책이 아니어도 관심이 있던 책이라면 구매하고 본다. 이런 방식으로 만난 보석같은 저자도 있었다. 기대보다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이 먼저 나오는데 그걸 그저 빠져들어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밤이 깊도록 읽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꾸었다. 예상대로 불편하고도 불편한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 제목처럼 '평범한 일상에 숨은 공포'가 내 평범한 일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금방 읽어버렸는데 책이, 아니 가해자의 엄마가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월을 다 보냈다.


이렇게나 파렴치한 제목이라니. 신간 안내로 이 책을 접한 이후 자꾸 신경이 쓰이면서도 굳이 읽지 않고 마음으로 밀어낸 것은 저 파렴치한 제목 탓이다. 가해자의 엄마라면 입 다물고 자숙해야 마땅한 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내가 가해자의 엄마요! 하며 책을 내다니.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밀어냈다. 가해자답게 찌그러져 있어야지, 어디다 대고 공적인 글을 남기느냐! 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짙게 깔려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확인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가해자의 엄마'는 번역과정에서 붙여진 제목인 듯하다.)  


읽으면서, 다 읽고나서도 쉽게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내용 자체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도 엄청났지만, 제목을 향한 내 반감을 톺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아니 나는) 얼마나 흔하게 착한 편, 피해자, 좋은 나라에 동일시 하는가. 그렇게 쉽게 동일시하고는 나쁜 나라, 가해자와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다. 뉴스로 접하는 사건, 역사 속에 일어난 일, 심지어 성경의 사건 속에서는 나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 석에 앉는다.  오래된 어느 날이었다. 성전에서 기도 드리는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에게를 읽다가 평생 나는 세리에게 감정이입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바리새인과 나 사이에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손가락질이나 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고 있는 나를 깨달았던 순간, 발 아래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으나 그 이후에도 늘 습관처럼 피해자, 약자, 착한사람에 동일화 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서 당연히 나를 피해자 자리에 둔다. 늘 내 중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활방식일지 모른다. 성장과 치유라는 주제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착한 사람 고치기가 나쁜 사람 고치는 것보다 수십 배 어렵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무의식적인 자기 규정, 자아상이 '나쁜 사람'일수록 더 빠른 정서적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최소한의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것이 병적인 자기 죄책으로 신경증의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을 가진 사람이 변화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예수님 말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하기도 하셨다. Karl Jung이 그의 자서전에서 한 '선에 빠지면 반드시 악해진다'는 말의 뜻일 것이다. 자기 안의 선과 악이 공존함을 인정는 것이 이 온전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내 안의 악, 가해자 습관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지나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말조차 보기 싫었던 것이다.


책을 추천한 조한혜정 교수의 말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피해자는 가해자일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일 수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피해자의 논리, 상처 받은 자의 입장을 특권처럼 남용해 무례한 말과 행동을 정당화 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는 역설적 자기규정으로는 편히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처지로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안절부절 끝에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라는 싹이 나기도 했다. 안절부절만 하지 말고 의지를 다하여 겸허해야겠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인 나여.


사건이 나고 16년이 지나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엄마의 말처럼 이상한 가정이 아니었다. 역기능 가정 아니고, 부모가 중독자도 아니고, 부유하지만 검소하고,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특히 아이 교육에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가정이었다. 흔한 '문제 아이 뒤의 문제 부모'라는 논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가정의 아이가 무고한 친구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면 어느 가정의 아이에게 가해자의 가능성이 없겠는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러니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동의 추천사처러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헛수고'가 바로 이 책이다.


앤드루 솔로몬이 해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아이가 총격 살해범이 되는지, 이유를 찾고 규정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 부모의 탓이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우리 집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니 이런 재앙을 겪을 일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많은 육아서를 읽고, 세바시 강의를 찾아 듣는 이유는 선한 것을 집어 넣으면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믿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때때로 육아강의를 하곤 하는데, 이 지점에서 늘 조금씩 마음이 어렵다. 이러이런 방식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키운다면 아이는 자기 재능을 꽃피우고 자유로운 아이가 되면 궁극적으로 당신은 좋은 부모에 등극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그런 것을 말해줄 수 없다면 젊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엄마들이 내 앞에 앉아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 말을 중간에 끊지 마세요 / 여러 사람 앞에서 아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 따뜻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봐 주세요 / 이런 육아 십계명이 있다. 육아 강의 시작하며 이걸 보여주곤 하는데, 찰칵찰칵 폰으로 ppt 화면을 찍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요? 이걸 읽고 이런 엄마가 되어야지 결심하고 어린이집 간 아이를 기다려요. 아이 오기 5분 전,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옵니다. 얘,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김치 가져가라. 어머니 저희 일정이 있는데요,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하고 네네 전화를 끊었어요. 어린이집 갔던 아이가 들어와 떠들기 시작해요. 엄마 오늘 친구가..... 시끄러! 들어가 씻어!" 이 쯤이면 모두 공감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엄마됨의 방법을 배운다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도를 닦아서 시어머니 전화에 결코 시험 들지 않고, 아이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키운다 해도 기대하는 결과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이것이 팩트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육아 책, 육아 강의로 배우지 말란 말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하나의 우주이며 미지의 세계이다. 그렇다. 나는 너를 알 수 없다. 가해자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 이것이다. 낳았고, 너를 지키며 길렀고, 공들여 너의 인격을 만들어 왔고, 대화 했고, 기도 했는데...... 나는 너를 몰랐다!


가해자 엄마의 말이라 싫어 피하고 싶었던 책을 통해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 육아일기 십수 년을 써 온, 육아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신앙도 좋아 기도까지 열심히 하는 엄마인 내가 들어야 바로 그 말을 들었다. 




 








태어나 중학교 2학년까지 살았던 고향, 충청남도 한산을 찾았다. 남편 제안으로 휴가 중에 일부러 일정 잡아 들렀다. 마침 한산 오일장 서는 날이라 어릴 적 장날을 기억하고 한껏 부풀었으나 한산하기만 한 한산장이었다. 점심을 먹어야 해서 '오라리 집'으로 들어갔다. 내게는 아스라하고도 친근한 '오라리'이다.


혼자 갔으면 조용히 먹고 나왔을 텐데 남편이 주인 할머니께 장사하신지 얼마나 되셨냐, 아내가 어릴 적에 여기 살았다, 말문을 터주었다. 35년 되셨다면서 "오디 사셨슈?" 하셨다. 저 위에 한산제일교회라고, 그 교회 목사님 아시냐고 했더니..... "아, 그 탄 가스로 돌아가신 정 목사님"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그때 당시 잠깐 교회를 댕겼슈" 하시더니 우리 엄마한테 수십 번 들었던 교회 얘기를 들려주셨다. 눈물이 터질락말락 놀랍고 신기했다. 잠시 후에 식사하러 들어오신 어르신에게 "저기, 옛날이 교회 목사님 알쥬? 이 양반이 그 딸이랴" 하...자마자 "정선득 목사님?" 하신다. 당시에는 교회 안 다니셨는데 지금 한산제일교회 장로라고 하시며.


동네 구석구석 돌아보고 사진 찍고 하는데. 지나가는 연세 드신 분 아무나 붙잡고 "제가 예전 교회 집 딸입니다" 하면 다 아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에 교인 아닌 분들은 나를 '교회 집 딸'이라 불다. 태어나보니 목사 딸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동네 절에서 사는 어떤 아이에게 '절집 딸'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교회 집 딸' 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절집 딸, 되게 이상한 애처럼 보인다. 이런 느낌이구나. 부모의 딸이 아니라 '특별한 어떤 집에 사는 사람 중 하나의 아이'


고향 동네를 뒤로 하고 겨울 논 사이 국도를 달리는데 기억의 조각들이 마구 떠오른다. '교회 집 딸'이란 말을 조금 다르게 인식한 후에 무의식 중에 '교회 집 딸, 목사 딸'이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 속으로 자꾸 이렇게 말했다. '교회 집에도 엄마 아부지가 있고, 그냥 당신 집하고 똑같습니다. 죽이 잘맞는 동생과 엄마 아부지 놀릴 궁리를 하다 싸우다 혼나다 하면서 사는 그런 일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도 목회자 가정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거룩하지 않다는 걸 설명하기 참 어려웠다. "그냥 당신 가정과 비슷한 정도의 행복과 문제를 가진 가정이라구요." 엄청 홀리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그 사람의 마음에 그린 이미지의 투사라는 것을 알기에 사실을 알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남편이 목사가 된 이후로 남편 직업을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그냥 낯이 뜨겁고, 한 마디 설명하고 싶은 마음 누르게 된다. "목산데,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기꾼은 아니에요. 그냥 장점도 있고, 장점만큼의 약점도 가진 한 사람이에요."


늦게 목회자 된 남편보다 목회자로 사는 것에 대해 더 복잡하고 민감한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교회 집 딸, 목사의 딸'이라는 페르소나에 대한 고민이 어릴 적부터 유난했다. 오라리집 아주머니 말씀을 듣다가 확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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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한파의 겨울에 결혼 이후 가장 추운 집에 살고 있다.

최강 한파의 최강 실사판은 욕실이다.

한 벽이 다 창이다. 

시골 교회로 동계 수련회 왔다는 생각으로 욕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심지어 세면대에서 온수가 안 나온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잘 해결이 안 되는데 가족들 수련이 깊어져 웬만한 건 그냥 적응해 산다.

피부에 좋겠지, 덜덜 떨면서 세면대 냉수로 세수하곤 하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어, 김현승 천잰데. 화장실 한 번 들어가 봐"

왜? 왜? 우리 아들이 왜, 왜? 

방에 있던 채윤이도 기본 장착되어 언제든 튀어 나오는 질투심을 안고 화장실로 튀어 들어갔다. 

더운 물 잘 나오는 샤워기를 세면대에 걸어서 쓰는 신박한 모양새였다.


"이거 내가 생각한 거야. 내가 쓰고 그대로 둬서 김현승도 쓰고 나간 거야. 내 아이디어라고오!"

채윤이가 이러자........


희한하다.

현승이가 했다고 생각하며 '천재다' 싶은데

채윤이가 했다고 하니 '역시나, 잔머리 100단 우리 채윤이'

말이 이렇게 나오네.


현승이 아이디어라 생각하고 보면 뭔가 시적인 상상력과 영감이 가득한 느낌인데.

채윤이 아이디어라고 보면 잔머리, 꼼수로 보인다냐.

어찌 그런다냐. 큭큭.


 




'꿈은 당신에게 배달된, 봉투 안에 든 편지' 라고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혹여 어떤 메시지가 든 편지라면 발신자는 누구이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크리스천의 꿈은 조금 다를까요? 뱀 꿈은 마귀의 시험에 들었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거나 미래를 예견하는 방법이 될까요?


프로이트(Sigmund Freud)라면 무의식의 억압된 욕구가 꿈의 발신자라 하고, 융(Carl Gustav Jung)이라면 자기 안의 신적인 자아 Self로부터 오는 것이라 합니다. 나쁜 꿈은 없고, 모든 꿈은 우리를 도우러 온다고 입을 모아 말하지요. 여러 영성가들은 존재 중심에서 우리는 붙드는 사랑의 목소리, 그분이 발신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뱀 꿈이며, 악몽을 비롯한 모든 꿈은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너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자이다’


작은 그룹에서 꿈 여정을 하면서 "당신은 불필요한 심리치료비 1만 달러를 벌었다"는 말을 자주 떠올립니다. 가짜자기와 그 너머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하는 눈이 생긴 사람에게 리처드 로어 신부가 하는 말인데요. 정직하게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심리상담 수십 회기의 효과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꿈을 나누는 집단 여정에 초대합니다.


♧ 일시 : 2월 20일(화) ~ 3월27일(화) 오후 2시-5시
            매주 화요일, 6회기
♧ 장소 : 마포구 신수로 56 순총빌딩 B1층
            (광흥창역 4번 출구 도보 6분)
♧ 인원 : 선착순 5명    ♧ 수강료 : 7만 원
♧ 문의 : 010-4395-0501(문자로 주세요)
♧ 신청 : http://bit.ly/2DVzbFU



신화학자 고혜경 선생의 꿈 강의 한 번 들어보세요.

단지 꿈이 아니라 정서적 영적 성장에 관심 있으신 분들 귀가 커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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