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있는 공간만 찾아 다니며 견딘 여름이 갔다.

버스라도 타려고 맨몸으로 걸으려면 극기훈련 하는 심정이었지.

바로 저 길이 그 극기훈련 코스였다.

맨몸으로 걸어도 겁나지 않는 길,

정도가 아니라 높고 푸른 하늘과 딱 좋은 바람이라니.


맑은 날 하루하루가 아까운 시절이다.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노트북 앞에 앉는 나를 보면 혀를 끌끌 찬다.

엄마, 오늘 한 번도 밖에 안 나갔어?

밖에 날씨 엄청 좋아.




(남자 였음) 수염 덥수룩 했을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벌떡 일어나 아까운 가을을 붙들러 나간다.

책도 안 들고 휴대폰 케이스에 든 카드 하나 덜렁 들고 나간다.

한 달 전만 해도 지옥 훈련장이었던 길을 발길 닫는대로 걷고,

걷다 반찬 가게 앞에서 물김치 한 봉지 하고,

몇 걸음 걷다 옥수수 찌는 냄새가 좋아 한 봉지 산다. 


검은 봉지 손에 들고 덜렁덜렁 걷는데 까치 녀석 옆에서 알짱거린다. 

지금 여기를 살며 자유로운 친구들은 역시 새, 

새는 우리들의 선생님이지.




공원 앞 어린이집 앞에 서서 목을 빼고 한참 기웃거린다.

예쁜 아기 지효네 교실이 저긴데.

날씨 좋은데 아가들 산책 안 나오나?

머리 큰 형님 반 친구들만 공원 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미세먼지 없는 공간이 아이들 소리를 빨리 흡수해 버린다.


공원 계단 콘크리트 틈의 초록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꾸미지 않은 자신으로 족한 친구는 역시 들풀이지.

우리의 참된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나리꽃을 보라!




공원 벤치에 앉아 옥수수 두 개를 뚝딱 다 먹었다.

 저 아래 브런치 카페 디쉬가 부럽지 않구만.

음뇽뇽뇽, 맛있다.




집 앞 골목에 서서 하늘 올려다 보다 꽃을 든 빌라를 본다.

그 위에 이불 빨래 머리에 쓰고.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각이 나오질 않아

얼른 집에 올라와 주방 창문에 매달려 허리 꺾고 찍어 얻은 사진.

빨래 널고 걷는 행복, 돗자리 깔고 김밥 먹고, 커피 마시고, 누웠던 

합정동 집 옥상이 떠오른다.

마음이 쎄하다.




사 온 물김치를 통에 옮겨 담는데 

눈대중으로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 통? 저 통? 잠시 고민하다 뽑은 통에 담았는데

일부러 맞춘 것처럼 딱 들어간다. 


딱 알맞은 오늘, 지금 이 순간이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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