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물이란 무엇인가?

주는 사람의 취향, 받는 사람의 취향. 뭣이 중한가?


#2


생일선물로 현승에게 운동화를 받았다.

선물을 주는 사람 현승이의 취향은 확고했다.


엄마 선물로 엄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운동화를 사 줄 것이다.

운동화라는 아이템도, 어떤 운동화를 선사 할 지도 결정은 내가 한다!

(주는 이의 모든 것이 확고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너무 비싸다거나 다른 선물을 제안 한다면 생일 선물은 없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주느니 나는 엄마 생일 선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엇을 선물할 지는 내가 결정한다!


고심 끝에 운동화를 주문을 했고(커플 느낌의 제 운동화까지 사면서 세뱃돈 탕진)

기분이 날아갈 듯한 현승이가 지껄여댔다.


"엄마, 자부심을 갖고 신어야 해. 브랜드 자체는 흔하지만 그 중에도 희귀템이야.

색깔도 다른고, 딱 엄마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이 운동화를 신을 때는 꼭 그......  자부심을가져야 해. "

 


#3


엄마, 앞으로 나는 신발만은 마음대로 살 거야. 뭐라 하지 마. 나는 정말 신발을 좋아해. 저번 꽃친 캠프에서 아이과 친해진 것도 다 운동화 때문이었어. "너 운동화 예쁘다' 이런 말로 처음 친해지기 시작했어. 엄마가 꿈에 나온 신발은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했지? 신발은 내가 나를 드러내는 싶은 방법 중 하나야. 나는 정말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독특한 점을 갖고 싶어. 동시에 남과 달라서 튀는 건 또 싫어. 뭔가 남다르게 하고 싶지만 옷으로 표현하면 너무 눈에 띄게 돼. 주목받는 건 정말 싫어. 하지만 누군가 남다른 나의 모습을 알아줬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어. 신발이 딱 적절해. 신발이 튈 때 주목받는 정도는 내가 딱 견딜 수 있는 정도야. 그리고 신발 예쁘다고 주목 받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 엄마, 내가 신발 덕질을 하는 이유야. 신발은 정체성이라며! 나한텐 신발이 중요하고, 엄마 생일 선물로 엄마에게 딱 잘 어울리는 운동화 사주는 게 내가 너무 행복해."


#4


중2 어느 날, 해외 직구로 나이키 운동화를 사겠다는 가격이 가당치 않았다. 제 용돈으로 사겠다는데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가진 원칙이 있다. 중2 쯤 되면 통제 한다고 통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실패가 뻔한 선택이라도 이를 악물고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강의 하곤 한다)  운동화 덕질이 심해진다 싶었다. 생각 없는 쇼핑 덕질에 빠진 놈이 내 아들이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알고 있었다. 더는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5


"엄마, 마음에 들어?

사이즈는 어때?

정말 마음에 들어?

색깔 좋지? 흔한 색이 아니지?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잖아. 그치?"


돈과 에너지를 많이 쓰는 현승이 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이 아이에게 운동화는 그냥 신발에 지나지 않음이다.


오래도록 간직할 생일 선물 운동화가 되지 싶다.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이랬다 저랬다, 한댔다 안한댔다.

곡절 끝에 현승이도 일 년의 방학, 갭이어를 갖기로 했습니다.

누나의 뒤를 이어 꽃친 4기가 되었고 느슨한 청소년 백수의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설거지, 청소, 화장실 청소.

꽃친의 집 하루는 이런 일들과 함께 하지요.

'방학이 일 년이라서' 현승이 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더 떠들고 싶으나 지금 떠들어대고 싶은 바로 그 얘기를 이미 책에 다 썼네요.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공식 게으름뱅이를 부려먹는 맛이 있지! 설거지 해, 빨래 돌려 놨으니 다 되면 널어, 밥 먹고 청소기 한 번 돌려라. 사춘기 끝의 키 크고 힘 세고 시간 많은 유휴 노동력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것 역시 우리 집 만의 얘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꽃친 소개 셀프 영상을 제작한 적이 있는데 싱크대, 청소기, 세탁기가 거의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한참 웃었다. 식구들이 먹은 그릇을 닦고, 밥을 안치고, 빨래를 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끼 밥을 먹는 일, 깨끗한 옷을 입고 안전한 집에 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공부 벼슬을 하느라 제 방 정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가 가족이 먹고 입는 것을 위해 봉사한다. 밥이고 빨래고 저절로 되는 줄 살았던 아이가 제 손으로 해보면서 양말 좀 뒤집어 놓지 마라, 밥을 남기지 마라잔소리를 한다. 그 잔소리는 엄마 흉내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살아본 자의 목소리이다.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식사 전에 이런 구호를 외쳤던 것 같다.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농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선생님 먼저 드세요그러니까 밥알 하나에 담긴 수고와 땀을 기억하는 교육이었을 것이다. 참교육이다. 제 몸으로 참여하여 수고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제 손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공부 벼슬 하느라 여력이 없다고 미리 포기한 부분이었다. 청소년 백수 생활로 얻은 예상치 않았던 수확이다. 하하.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 '꽃친의 게으른 집 하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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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말, 특히 격려의 말에 관심이 많은 터라. 아니,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말을 들어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러하듯 나를 보는 그들도 그러하겠기에 내 말의 돌아봄에 생의 에너지 절반은 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게 말은 또한 글이다. 말이 부드럽고 달달하다 하여 속까지 그러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의 없고 날카로운 말이 성숙한 인격와 날카로운 지성의 지표인 것도 아니지만. 


정색하고 농담하고, 진담은 가볍게 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이 분열적인 말로 여러 사람 헛갈리게 한다는 것을 인식해가는 중이다. 농담하다 정색하고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나는 별의별 선을 다 넘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어떤 선을 넘어오면 정색하고 굳어버리는 못된 습관도 있다. 속으로면 정색하고 겉은 말랑하게 응대하곤 이불 뒤집어 쓰고 뒹구는 경우도 있다. 말, 참으로 어렵다.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중 하나라 하고 유일하게 완독한 <어스시 전집>을 쓴 어슐러 르 륀이 작년에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유작 에세이집을 읽고 있다. 80이 넘어 블로그에 쓴 글들이란다. 나이 80이 되어서도 블로그 할 수 있을까. 이렇듯 날카롭고 따스하여 관조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얄팍한 긍정의 말로 두려움을 가장하지 않고, 문학적 미사려구로 자아팽창을 포장하지 않으며, 무례한 말로 진실을 가장하지 않는. 안팎이 투명한, 정련된 언어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 책의 일부이다. 입에 붙은 상투적 격려와 긍정적인 말을 돌아보게 한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어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누군가를 돕거나 성장시킬 수 없다. 말하는 이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피상적인 말잔치일 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하는 진실한 말, 그러나 사랑에 기반 한 따뜻한 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의 수련’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년의 실체를 전적으로 나쁘게만 보고 노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노인들을 대하고 싶은 나머지 노인들의 현실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선의를 가득 담아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 선생님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솔직히 말해 팔십사 년을 사는 일이 그저 생각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희 할머니는 혼자 살면서 아흔아홉 연세에도 아직 차 운전을 하신답니다!”
할머니 만세다. 유전자를 잘 타고난 분이다. 아주 귀감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는 본보기로는 틀렸다.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의 상태다.
“오, 선생님은 불구가 아닙니다! 스스로 불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불구가 되는 법이지요! 제 사촌은 척추가 부러졌었는데 금방 이겨내고 지금은 마라톤 경기에 나가려고 훈련을 받아요!”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두려움은 현명하기 어렵고 결코 친절할 수 없다. 대체 누굴 위한 격려인가? 진심으로 노인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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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 청년부 생활이 주는 유익 중 하나는 주체적 참여 태도이다. 시스템화 된 성경공부나 훈련의 기회가 적은 대신 스스로 채워야 할 배움의 시간과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예배 설교 시간에 여기저기서 노트 필기 하는 모습이 갑자기 눈에 많이 띄었다. 옆에 앉은 채윤이도 부지런히 적어대고 있었다. 청년부에서 설교 나눔을 하는데 함께 같은 노트를 구입해서 필기하기로 했다는 것. 스스로 뭐라도 하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올해에는 한 달에 한 번 [이우 청년 신학클럽] [이우 청년 북클럽]이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신학클럽은 남편이, 북클럽은 내가 이끈다. 목사님 앉혀 놓고 신학과 신앙, 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하는 시간이 신학클럽이다. 북클럽은 말 그대로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나누는 것인데 내 목표는 어쨌든 읽게 하는 것이다. 한 달에 한 권을 못 읽어도 된다. 한 줄이라도 읽으면 된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본회퍼, 손봉호, 이현주, 존 스토트. 우리 부부 썸의 시작, 연애의 시작과 헤어짐엔 이 네 분이 함께 했다. 이분들의 책이 있었다. 언제 들어도 재미있을 남의 연애 이야기, 목사 부부의 연애 이야기로 시작하니 다들 눈이 초롱초롱. 좀 세게 약을 쳤다.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죄라고 말했다. 진심 우리 청년들이 읽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읽는 힘으로 스스로 서는 사람,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읽고 또 읽으면서 자기 확장의 노력을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의 관심 주제 키워드를 포스트잇에 적고 나누었다. 크고 작은 고민들이 이미 선정해놓은 책과 잘 맞아 떨어진다. 한 달 넘게 심사숙고 하여 책을 골랐다. 2019년을 사는 청년들의 고민을 다루되 (어떤 의미로든)치우치지 않을 것, 책은 어렵거나 현학적이지 않을 것, 이런 원칙을 가지고. 올해 청년부가 된 채윤에게 일정 부분 읽혀 보기도 하면서 꼭 읽힐 책을 고르려고 했다. 어쨌든 목표는 읽게 만드는 것다. 모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바로 책을 구입했다며 인증샷이 단톡에 올라왔다. 벌써 보람이고, 기대가 된다. 


이우 청년 북클럽 도서 목록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백소영, 뉴스앤조이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헨리 나우웬, IVP
[신도의 공동생활]  디이트리히 본회퍼, 대한기독교서회
[연애의 태도]  정신실, 두란노
[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은행나무
[좋은 사람은 드물다]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세계관 수업]  양희송, 복있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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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가 지낸 꽃다운 친구들(청소년 갭이어) 얘기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수진 대표가 1부를 쓰고, 저는 2부에 큰 아이 채윤이가 경험한 ‘꽃친’ 간증을 했습니다.

곡절 끝에 현승이도 올해 학교를 째기로 했습니다.

꽃친 4기가 됩니다. 마침 내일 4기의 1년 방학을 시작하는 방학식이 있는 날이네요.

자세한 책 소개 대신 에필로그를 나눕니다.



학교의 시계를 멈춰 세우고 자기만의 열일곱 한 해를 보낸 채윤이는 이제 꽃다운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꽃친을 하든 바로 고등학교에 가든 어차피 후회는 있을 거라 스스로 예언하더니 가끔 아쉬워하고 대부분의 날에 만족하며 열여덟, 열아홉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춘기 끝에 멈추며 꺾인 채윤이 인생항로는 대체로 순항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두려움으로 했던 선택이 무색하도록 꽃친 이후의 항해가 순조로웠습니다.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 없었단 말은 아닙니다. 결국 대학입시 앞에 섰고, 헤쳐 나가야 할 암초들이 있었지만 딱 한 뼘씩 자기만의 항로를 찾아나갔다는 점에서 순항입니다. 이제 법정 성인입니다.

 

아이들의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엄마, 누나 깨울까?” 늦잠으로 여는 누나의 열일곱 하루가 고통스럽도록 부러웠던 둘째가 어느 새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누나 채윤과는 전혀 다른 아이, 또 다른 우주입니다. 남다른 선택으로 튀는 것 자체가 싫은 아이는 행여 부모가 누나의 길로 보낼까 나는 꽃친 안 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동안 학교생활로 지쳐본 적이 없다며 멈추어 쉴 이유도 명목도 없다는 것이지요. 내심 안심이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되는 아이가 없습니다. 둘째는 올해 꽃친 4기가 됩니다. 이유도 명목도 없다던 아이가 꽃친을 하겠다고 합니다. 솔직히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너는 어차피 공부할 건데, 그냥 쭉 가면 안 되겠니!’ 아이의 선택보다 저 자신의 반응에 더욱 놀랐습니다. 꽃친 전도사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살았거든요. 때를 얻든 못 얻든 꽃친을 전했습니다. 두려워 주춤거리는 부모에겐 일단 한 번 해보세요. 후회할 일이 없어요.’ 진심으로 전도했지요. 헌데, 내 마음의 머뭇거림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많은 사람이 가는 길에 묻어가는 것, 타고 가던 기차를 쭉 타고 가는 것이 편하지.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역시나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것이었어요. 한 존재를 멈춰 세우는 선택은 아이나 부모나 용기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처럼, 마치 청소년 안식년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해야 할 고민은 다 한 후에 둘째 아이의 멈춤을 선택했습니다. 이 책에 쓴 많은 이야기를 바로 제게 들려줄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한 마디로 정리해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는 자란다!

학교의 시계를 멈춰 세우니 아이의 시간이 시작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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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블로그 12년 여 만에 방문자 백만 돌파했습니다.

2003년에 쓴 글부터 켜켜이 쌓여 있고요.

블로그 시작은 2007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싸이월드 클럽에 살았지요.    

이 글은 2747번 째 글입니다.


쓰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쓰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요, 제 인생.


백만 번의 들락거림이 없었다면,

들락거려주는 이가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요.


백만 번의 들락거림은 백만 송이 장미로군요!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이 피었으니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향 갈 티켓은 확보 했으니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자유로움으로 더 투명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장미 백만 송이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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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 :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막말을 할 때, 화가 나고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나는 리더가 되긴 틀린 거 같애.


현승 : 누나, 마키아벨리를 읽어.


종필 : 오오, 김현승! 군주론?


현승 : 군주가 되려면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가 있어야 해.


채윤 : 나한테는 사자가 없어. 사자의 힘이 없어.


현승 : 사자는 엄마한테 있지. 우리 집에서 사자는 엄마한테만 있어.


종필 채윤 : (격한 공감) 맞아! 맞아!


이 백성들이 군주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군주를 앞에 앉히고 희롱하기를 서슴치 않으니.


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엄마는 경찰(Click!)이었는데 군주가 되다니.

13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승진했구나. 


내 이 어여쁜 백성을 위하여 성군이 되리라.


 






신앙 사춘기.

서른 여덟 쯤 시작한 그 알 수 없는, 낯선 시간을 한 마디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온전히 내가 창작한 용어는 아니지만 뉴스앤조이 연재글로 많은 공감을 얻었으니

정서적, 경험적 저작권은 내게 있는 것으로 하자.


신앙 사춘기 시간 동안 나름대로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다.

설교, 예배, 기도. 이런 것들이 죄 의미 없게 느껴져 신앙 사춘기였지만

돌아보면 기특하게도 다른 언어를 찾아 말씀과 기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었다.

언어를 놓아 버리는 기도, 향심기도를 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보았던 개역개정이 아니라 메시지 성경을 읽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읽는 예수님, 바울의 편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내게로 직접 오는 계시와도 같았다.

당시 교회 수요예배에선 로마서 강해를 했었는데 같은 본문 정반대의 메시지였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는 색색의 밑줄, 눈물 자국으로 아주 볼만 하다.


메시지 성경을 끊고 개역개정으로 돌아왔다.

교회 성경 일독 독려에 힘입어 새 마음을 가져본다.

개역개정으로 읽는 성경. 다시 개역개정인데, 맨 처음 읽는 개역개정 같다.

좋다.

아침 저녁 독서 전에 먼저 마음이 끌리는 책이 성경이다.


큰 글자 성경을 주문했다.

받아보니 생각보다 더 크고, 더 두껍다. 

우리 엄마의 성경책 같다, 라고 생각되는 순간

내 인생 마지막 성경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읽고 또 읽으며 낡아지는 이 책과 함께 몸도 더욱 낡아질 텐데. 우리 엄마처럼.

눈에 맞는 돋보기가 없어 더는 글을 읽을 수 없을 때 마지막까지 붙드는 책이 이 책이 되었으면.

이젠 읽지도 못하며 폼으로 들고 다니는 엄마의 낡고 낡은 성경과 오버랩 된다.


기나긴 사춘기 끝(일까?)에 다시 붙든 개역개정 성경이 

'아장아장 성경'이니 '우리 아기 첫 성경' 같은 생애 첫 성경 같기도 하고,

인생 마지막 성경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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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바게뜨 2층 구석 테이블에서,

그 수많은 카페들 어느 자리에서,

두물머리에서,

한강공원 잔디밭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가장 흔한 주제였다.


한 7년 전으로 시간을 돌리면 다가올, 아니 오지 않는 연애와 결혼을 

스케치조차 되지 않는 막연한 그림으로 그리던 시절이었지.

막상 결혼이 성큼 다가온 날에도 예측할 수 없는 날들에의 두려움과 염려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러다 하나 둘 결혼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시절에,


"야, 너네들 나중에 아이들 낳으면 한복 입고 단체로 세배 오면 재밌겠다."


농담처럼 던지며 그려본 날이었다.

그 말을 기억하곤 명절 끝날에 큰 오빠 집으로 모여든 동생들처럼 우르르 몰려왔다.

제 엄마, 제 아빠를 닮은 아이들이 꼬물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신기할 뿐이다.

결혼 날을 받아놓은 마지막 타자까지, 정말 모두 가는구나!


빠바 2층에서, 어느 카페에서, 카톡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얘네들의 내일을 나의 기도로 가져와 절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꿈이, 꿈들이 이루어졌다. 분명.


다만 몰랐던 것, 아니 알지만 모르기로 했던 것들이 있다.

꿈은 늘 현실과 일상을 패키지로 엮어서 질질 끌고 온다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지만 끌고 온 패키지의 무게를 질 힘이 없어서 다시 새로운 꿈을, 

어쩌면 이런 경우 '허튼 꿈'을 꾸는 것으로 도망치고 만다.


꿈은★이루어졌다.

현실의 옷을 입고 온 꿈을 사는 것이 늘 오늘의 몫이다.

다들 제 몫의 이루어진 꿈, 오늘을 잘 살아내면 좋겠다는 바램이 새로운 기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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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향이 탱글탱글 향기롭고 달달하여 명절 기분을 돋구고 있습니다.

설 며칠 전 택배로 온 레드향인데 직장에서 온 설 선물이네요.

우리 사장님 쓸모 있는 센스 보소! 과대포장 대신 과일 하나라도 더! 

울퉁불퉁 유기농 레드향을 턱턱 집어넣은 듯 투박한 박스입니다.

맛과 향과 식감이 솨라있습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님이 정신실 소장에게 보낸 셀프 명절 선물 :)


여전히 사비 털어 운영하고, 

교통비도 없이 일하러 상담하러 다니는, 

지속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거룩한 낭비'를 자처하는 연구원들에게 보낸 명절 선물입니다.

(예, 수익자부담으로 상담과 강의 하고 있는데, 마음성장연구소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곧 정식 후원 요청을 공지로 알리려는데요.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들 함께 해주세요.

하나님, 이 글 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세요! 엉엉)


아이디어를 낸 재정담당 연구원의 마음도,

이걸 받고는 '무슨 돈이 있다고!' 하는 연구원의 마음도,

걱정스럽고도 은근 기쁘고, 기쁘고도 자부심 돋는, 

자부심 돋고도 맛있는 선물인 것 같습니다.

식구들 앞에서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는 말은 사구동성으로 같고요.


걱정과 즐거움이 오가는 단톡에 소장으로서 가오 딱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인간미가 없슴미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슴미까!


'거룩한 인적 자원의 낭비'가 지속 가능해지기 위해

더욱 연결되어 함께 성장하고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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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설교 준비 부담으로 가장 무거운 발걸음, 토요일 출근의) JP 아빠 

또는 남편이 부드럽게 명했다.
장보러 나간다고 했지? 나 김밥 하나 사다 줘.


아내와 딸, 두 여자의 장보기는 늘 그렇듯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 

도로는 늘 예상보다 밀리고, 한두 번 네비를 잘못 보고 차를 돌리고 돌리고 한다.

두 여자에겐 일상이거니와, 점심을 기다리는 남자에겐 혹독한 시간.

(일까? 아니면 익숙해진, 각오 된 일상일까)


엄마, 시간이 이러면 아빠 점심이 너무 늦어지는 거 아냐? 배 고플텐데.

그러네! 아빠한테 전화 해.

뭐라고? 그냥 아빠가 사서 먹으라고?

아니. 우리가 늦게 갈 거니까 배 고프지 말라고.

일단 걸어. 엄마가 말 할게.


여보, 설교 준비 잘 돼? 우리가 장 보고 당신 점심 갖고 가면 늦을 거 같거든,

그러니까 당신 배 고프지 말라고. 배 고프면 안 돼. 알았지?

어, 알았어.

그래.

어.

응.

그래.

어.

응.

갔다 올게.

응.

끊어.


용건보다 긴 어, 응, 음, 그래....... 를 듣다 일그러진 채윤이 얼굴.

아니 썩어버린 딸의 표정.


김채윤, 부럽지.

어.

모가 부러워?

맘대로 조종 할 수 있는 남자가 있는 게 부러워,

배 고프지 말라면 배 안 고프고, 화를 내도 이쁘다 하고, 

넘넘 부러워.

야, 그런데 이런 남자는 세상에 없어. 너 아빠 같은 남자 찾지 마.

싫어!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아빠 같은 남자 찾아서 결혼 할 거야,

그게 내 복수야, 그런 남자 찾아서 엄마빠 앞에서 더 꽁냥꽁냥 할 거야, 

나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 만나는 게 복수가 아니야, 

반드시 아빠 같은 남자 만나서 엄마 약 올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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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이 먹고 살아간다.

삼시 세끼 집밥 먹는 네 식구 돌봄 노동이 무보수 극한직업이지만,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리고 있다.


편의점 도시락에 꽂힌 현승이,

스스로 감자볶음도 만들고 스팸에 구멍 뚫어 계란 채워 부치는 요상한 반찬도 창작하는 채윤이,

그리고 많은 집안 일을 하지만 요리는 통 못하는 JP.


그럭저럭 굶지 않고 먹고 살고 있다.


일(또는 공부)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 더욱 멀게 느껴지는 것은

집으로 고고씽!을 시원하게 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마트 들러 불편한 주차를 하고, 장을 보고, 낑낑거려야 돌아올 수 있는 집이라 그렇다.


식탁 차릴 때마다 공치사 한 스푼, 유세 한 사발을 애피타이저로 먼저 내놓으니

식구들도 꽤 지겹고 더럽고 치사하겠지만

진짜 삼시 세끼 밥 먹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럭저럭 화평 이루며 먹고 살고 있다.


이번 설은 밖에서 식사 한 끼 하고  끝내기로 해서 따로 음식 할 일은 없는데

색다른 요리 하나 해보고 싶어서 머리를 굴려봤다.

이렇듯 자발적 에너지가 솟구칠 때, 이런 때만 밥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밥은 또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일본 가정식 식당에서 먹어본 연어장 덮밥을 종필, 채윤, 현승 모두 좋아한다.

그래서 도전했다. 연어장 덮밥.

짜다, 물 더, 엇, 간장 더, 엇, 혀에 감각이 없어.

간 맞추는데 고전 했지만 약간 조금 성공적.


시댁, 친정에 가져가려고 따로 담아둔 걸 현승이가 탐낸다.

정말 가져갈 거냐, 굳이 뭘 가져가냐, 얼마 되지도 않는데 두고 먹는 게 낫지 않겠냐.

이것은 칭찬. 맛있다는, 최고의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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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을 영화 <가버나움>으로 시작했더니 한 주간이 무겁다,

라는 말도 가볍다.


나는 왜 '자인'이 아니고 난민이 아닌가.

나는 어쩌다 (대체 뭘 잘한 게 있다고) 국적이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보장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시작한 질문은 최근 몇 달, 아니 몇 년 내 존재를 뒤흔드는 질문을 자꾸 끌고 나온다.


나는 어쩌다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뒷자리 '2'와 정체성이 충돌하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왜 성소수자가 아닌가.


나는 왜 세월호에 아이를 태워보낸 엄마가 아닌가.

나는 어쩌다 아침 저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미친 행운을 누리는가.


금요일은 여성 인권 운동가, 위안부라 불리는 김복동 할머니 발인이었다.

며칠 그분의 인터뷰를 다시 읽고 영상을 돌려 보았다.

성폭력 전문 상담가 교육을 받는 금요일 수업엔 오전 내 영화와 영상 두 편을 보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멀쩡히 승승장구 하는 가해자와 같은 세상을 사는 피해자들이,

한때 장래가 촉망 되었고 우등생이었고 매력이 넘치던 피해자들이 차마 끝맺지 못하는 물음을 던진다.

왜 하필 나죠? 왜?


그 질문 앞에 몸과 마음이 풀어 헤쳐져 바닥으로 흘렀다.

다시 나는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나는 왜 멀쩡히 살아 있고, 존엄을 지키고 있는가.


<가버나움>의 자인은, 열두 살 자인은,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있던 자인은,

출생 기록도 없고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자인은 부모를 고발한다.

죄목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이다'


나도 언젠가 그 비슷한 고발장을 쓰고 제출했던 적이 있다.

다만 부모가 아니라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내 하나님이었다.

바닥에 뒹굴고 내 몸을 자해하고, 피를 토하며 고발하던 끝에, 

응답인 듯 응답이 아닌 듯, 수용인 듯 체념인 듯 실존을 그저 끌어 안았다.


열두 살 자인은 고발장을 쓰는데 내 심장이 다시 불끈거리지만,

나는 이제 고발장 쓰기도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자인에게, 나의 아이들에게,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답을 하거나

할 수 없다면 변명이라도 둘러대야 할 것 같다. 


약자를 향해 배제와 혐오를 서슴치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열두 살의 패기가 끓기도 하지만

끓는점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화학반응이 일어나 슬픔과 무기력이 되고 만다.


그저 묻고 또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물으면 생각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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