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셨던 오빠가 앞산을 보시며 

"상록수가 좀 있어야 겨울에도 푸르른데, 상록수가 하나도 없구나." 하셨었다. 

아, 그렇구나. 산의 갈색이 유난하다 싶었더니.


겨울산, 겨울나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나무를 보면 주문을 걸며 눈을 흐리게 떴다. 

어서 봄이 와라. 어서 봄이 와서 푸르러져라. 금방 봄이 올 거야. 봄이 올 거야.


오빠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게 상록수가 필요하지 않다.

이 쓸쓸하고 슬픈 겨울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오지 않은 봄을 가불하여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겨울산의 겨울이 참 길구나 싶었다. 

작년 12월 17일에 이사 왔는데, 길가에 개나리가 피었는데 산은 아직도 겨울산이다.

겨울이 참 길구나! 그래도 산이 있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있으니 춥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남편은 "산 색이 달라졌어. 안 보여? 얘들아, 안 보이니? 보라색으로 바뀐 거야."

혼자 UFO를 본 것처럼 흥분하고 그러는데, 애들은 물론이고 솔직히 나도 감흥이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져다고? 


봄은 왔지만 바람은 찬 월요일에 앞산에 올랐다.

따뜻하게 입고 노부부처럼 말 없이 1열종대로 걸어 산에 올랐다.

손톱만 한 연두색 초가 미약하게 봄을 밝힌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다음 주가 되면 일제히 봉우리를 터트리겠네!

진달래도 분홍빛 초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칙칙하다.  


종필 님의 마음을 뺏은 보라빛의 실체 확인!

고개들어 본 높은 가지에도 아기 같은 새순이 가득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대놓고 초록은 민망하다며 겨울산 품은 갈색으로.


찬바람 쌩쌩 봄의 산을 올랐다 내려간다.

이쯤엔 시나 노래가 하나 튀어나와야 제격이지.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홍순관 <산 밑으로>


내려오는 길목엔 쓰러져 누운 큰 나무 한 그루. 에고, 어쩌다!

그 옆엔 쓰러지는 나무에 치어 덩달아 화를 입은 작은 나무 한 그루. 에고, 너는 또 무슨 죄냐!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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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3월의 마지막 주일은 봄이다!

개나리가 피었다.

봄이구나! 가볍게 옷을 입고 나갔더니 찬바람이 품을 파고든다.

봄이지만 춥구나!

 


일주일 전인 3월 24일, 3월 셋째 주일에는 확신이 없었다.

봄인가? 아닌가?

예배를 마치고 나와 채윤이가

"봄인데, 날씨가 이런데 집으로 그냥 못 가. 엄마, 어디든 가자."

중앙공원으로 갔다. 

봄이라는 느낌 없이 집을 나왔던 건데, 봄이었고 따뜻했다!

 ​


중앙공원에 온 봄은 미미하고 작았다.

들여다 봐야 보이는 봄이었다.

노란 산수유만이 파란 하늘 배경 삼아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야. 제비꽃. 어렸을 적엔 '앉은뱅이꽃'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그런 말을 안 써."

"엄만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게 보여?"

"노안이지만 좋아하는 건 다 보여. 엄마가 이 꽃을 작아서 좋아하는 지도 몰라."

"엄마, 그러고 보면 엄마 하는 일은 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네. 

장애인, 그중에도 장애 아이들, 성폭력 생존자들, 여자들......."


채윤이 말에 뭉클, 위로를 받았다.

작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과 연결된 일을 한다니!

과분한 영광이다.


3월 셋째 주일, 들여다 보며 찾은 봄의 흔적과 따스함의 여운이 길다.

3월 마지막 주일, 멀리서도 보이는 개나리가 한창이더니 심지어 눈발이 날렸다.

4월 첫째 주일에는 또 새로운 얼굴의 봄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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