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이 스토리>에 대한 애틋한 정은 일단은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3편에서 대학생이 된 앤디가 우디 일행을 떠나는 장면, 어마어마한 상실감으로 보았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망각의 심연으로 떠밀려 내려갈 때의 안타까움과도 비슷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채윤이 현승이가 어렸을 적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와우와우 수건, 곰돌이 이불에 대한 감정이다. 아이들은 잊지만 엄마는 잊을 수 없는, 아기 적 아이들의 애착에 대한 애착 같은 것. 쓰다보니 단지 아이들 유년만은 아니구나 싶다.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내 유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여하튼 현승이 어릴 적, 엄마 중독증상이 심하던 시절에 "너는 내 친구야. 영원한 친구야" <토이 스토리> 주제가를 어깨동무 하고 부르던 날이 있었다.


가령 이런 -> 무촌에 가까운 일촌끼리의 우정 


개봉 하자마자 <토이 스토리4>를 가족들과 함께 봤다. 보니에게 간 토이들이 어찌 되는가, 아련한 설렘으로 남몰래 두근두근. 사전 정보 없이 약간 넋을 놓고 보다 목에 가시가 하나 걸렸다. "쓰레기" 폐품으로 만든 토이 '포키'가 등장한다. 보니가 현재 시점 가장 사랑하는 토이 등극이다. 사랑받는 토이로서 자신을 인식하질 못하는 포키이다. '사랑받는'은 고사하고 '토이' 정체성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쓰레기, 쓰레기라며 틈만 나면 쓰레기통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 건 '쓰레기'인데, 영화 때문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식도 부근에 걸려 소화되지 못하는 단어이다. 어쩌다 귀에 꽂힌 '쓰레기'라는 말이 목에 걸려 다른 무엇도 섭취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통 먹질 못하니 마음의 힘이 다 빠져나가 이것도 저것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점점 쓰레기가 되어 가는 찰나. 영화가 무슨 작정이나 한듯 쓰레기, 쓰레기... 한다.


토이 정체성이 확실한 우디가 이걸 보아 넘길 리 없다. 그 자신 최애 장난감의 영예를 잃고 벽장에 처박히는 존재일지언정, 주인 보니의 사랑받는 토이 '포키'를 지켜내는 우디. '너는 쓰레기가 아니야, 사랑받는 장난감이야!' 토이의 존재 의미는 주인 아이의 기쁨이 되는 것. 주인의 사랑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의 행복한 유년을 지켜주는 것. 1,2,3 편은 그 정체성에 눈물겹게 충실한 우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자아'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성육신한 예수님을 향해 하늘로부터 들린 명확한 메시지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이다. 인간 예수님은 내내 이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사셨다. 사랑받는 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메시지를 전하고,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하튼, 쓰레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토이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우디의 노력은 눈물겹다.


 

1편인가, 2편인가. 버즈의 등장 스토리가 생각났다. 버즈는 '우주전사' 정체성으로 미친 애처럼 등장했다. 지구인지 우주인지를 제가 구할 수 있다며. 아, 이때도 우디는 '너는 우주전사가 아니야. 앤디의 사랑받는 최신식, 최애 장난감이야'를 일깨우려 애썼다. 물론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라인도 있었고. 이 스토리가 떠올라 넷플릭스로 혼자 <토이 스토리> 1,2,3을 정주행 하고 말았다. 


도덕적, 종교적 교훈으로 감상평 마무리 하는 것 촌스러운 줄 아는데. 아픈 영혼의 두 증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기비하와 자아팽창.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고, 칭찬 받지만 욕도 얻어 먹고, 성공하지만 실패하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마주하기 싫은 아픈 영혼이 도피하는 곳이다. 쓰레기이거나 우주전사이거나. 한 번 실패로 쓰레기가 되고, 한 번 성공으로 세상을 구원할 전능의 전사가 된다. 대부분의 일,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사이 어디를 오가는 존재임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힘, 더 큰 존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존을 모르는 토이들처럼 말이다. 고질적인 내 지병과 병증이다. 모 아니면 도, 전부 아니면 제로. 하나 실패했다 싶으면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나를 팽개치고 싶은. 강하거나 약하고, 착하거나 나쁘고,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한 열흘 우디와 포키와 버즈를 가슴에 품고 다녔더니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이 쑥 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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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 꿈모임에 ‘고양이’가 등장했습니다. 고양이는 꿈, 특히 여성의 꿈에 의미가 큰 상징입니다. 고양이는 독립적인 동물이죠. 페르시안 고양이의 도도함이 절로 떠오릅니다. 누구의 인정이나 허락이 필요치 않은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입니다. 여성의 꿈에 고양이가 등장했다면 독립성, 단지 심리적 독립이 아니라 영성적 독립을 촉구하거나 안내하는 것일 겁니다. 이 모티브로 ‘여성성’에 대해 풍성한 나눔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다를까요.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가 천차만별입니다. ‘다름’이 ‘고유함’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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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앞의 오전 꿈모임에선 이런 꿈을 들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를 씻기고 특별히 사타구니를 잘 닦아주려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티브로 ‘타자화 된 여성성’을 나눴거든요. 남편, 남성, 아버지의 눈으로 본 나의 몸. 그리고 여성성. 결국은 한 번쯤 당해 본 성추행의 기억입니다. (네, 여성이 모이면 셋 중 하나는 성추행, 다섯 중 하나는 성폭력의 경험입니다.) 안전한 곳이기에 솔직하게 나누고 발설하는 것으로 이미 치유의 강물이 넘실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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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화요일 밤 꿈에선 ‘초경’의 경험이 소환되었습니다. 초경 즈음, 2차 성징을 맞은 자신의 몸을 기쁘게 환영해본 여성은 많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적인 존재로 여성의 몸은 죄와 수치심 그 자체라고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미 규정 당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월경이 찾아오면 그것을 숨겨야 하고, 생리대는 감춰야 하고, 행여 옷이 묻었다면 큰일이 난 것입니다. 월경을, 월경하는 몸을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소환된 초경의 기억으로 여성성의 경험을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

놀랍습니다! 연구소 꿈모임이 일주일에 세 번인데, 연달아 같은 주제입니다. 여성, 타자화 된 여성의 몸, 여성성. 화요일 저녁으로 시작하여 수요일 오후 ‘고양이’라는 상징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연구원 중 한 분이며, 오후 꿈모임의 멤버인 쌤이 혼자 한 달 대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 사진이 하나 단톡방에 올라옵니다. 핑크색 우산을 쓴 고양이 사진입니다. 헐, 대박, 흐억.... 멤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쌤, 대만에서 득도하셨나요?” 연구소에 몰카 설치하고 가셨어요? 참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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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저녁엔 전부터 계획된 박정은 수녀님의 ‘여성과 영성지도’ 특강에 참석했습니다. 꿈모임 식구들 여럿이 함께 했지요. 꿈과 영성생활 집단여정을 통해서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얘기해주셔서 자부심 뿜뿜하며 살짝 놀랐지요. 아니, 워크숍 주제를 주시는데 ‘여성의 성’입니다. 참석한 우리들 “예습 했잖아요. 우리 어제요....” 이 지점에선 놀라서 놀랍지도 않은 지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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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읽으시면 뭐 대단한가 싶으실 텐데. 경험한 사람들에겐 놀라운 신비입니다. 신비란 말로 다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이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만. 여성, 여성적인 것, 여성성의 치유와 구원은 연결되는 것, 발설하는 것, 누가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함께 걸어가 주는 것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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