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mpossible Dream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bear with unbearable sorrow
To run where the brave dare not go

To right the unrightable wrong
To love pure and chaste from afar
To try when your arms are too weary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r pause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And I know if I'll only be true
To this glorious quest
That my heart will lay peaceful and calm
When I'm laid to my rest

And the world will be better for this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휴가의 끝을 다른 시작으로 잇는 노래가 계시처럼 라디오에서 나왔다. 이룰 수 없음을 알지만, 이길 수 없음도 알기에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 꿈과 싸움을 멈추지는 말아야겠다고 노래가 노래하고 내 마음이 따라 부른다.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그 별을 찾은 이상, 몇 억 광년 전부터 그 별을 향해 걸어온 이상. 가자고, 한 발 앞은 캄캄해도 저기 멀리 별빛을 바라보며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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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타공인 별명이 '삶은 요리'였었었었었는데.

삶이 온통 요리 하는 기쁨으로 충만하진 않았지만, 

요리하여 손님 맞이하고, 사진 찍어 포스팅 하는 낙이 아주 큰 낙이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날을 떠올리며 흔히 말하 듯 "그땐 어떻게 그랬지? 젊긴 젊었어." 라는 말로 퉁칠 수 있는 시절.


흔치 않은 일정, 연달아 3일 강의가 있고, 장례 예배까지 있었던 주일에 식사 초대가 있었다.

즉흥적으로 있는 것 다 때려 넣어 하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몇 달 전부터 약속된 식사를 위해 몇 날 며칠 고민하는 것도 괜찮은 창의활동이다.

몸은 피곤한 토요일 오후였지만, 양손 가득 장을 봐서는 집안 가득 멸치향 날리며 육수 끓이는 맛.

맛 아니고 향기?

멸치 육수향은 그 꼬리리함과 구수함이 어우러져 유난히 내겐 치유의 향기이다.



메인은 묵사발이었다.

전날 멸치육수 내서 냉장고에 넣었고, 먹기 두어 시간 전에 냉동실에 넣어 살얼음 얼렸다.

일단은 날이 더워 선택한 메뉴이다. 

손님 중엔 대입 수험생이 둘 있어서 두 친구 (고기 먹고 힘 내라고) 등갈비찜은 일부러 했다.

그런데 수험생 중 하나가 묵사발을 한 그릇 먹고 수북하게 한 그릇 더 추가로 맛있게 먹는다.

엄마 얘길 들어보니 그 아이 임신했을 때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이라고, 

어디서 구하질 못해 결국 못 먹었다고, 그랬더니 아이가 태어나 묵사발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보람 돋았다! 이게 요리하는 맛이지! 이 묵사발은 수험생 지우와 지현이를 위한 기도 한 사발이다.   


맛있다는 말에 기분 좋고, 요리 잘한다는 칭찬도 어깨를 으쓱게 하지만 

내가 알아주는 내 요리, 그걸로 충분한 요리이다.

아이들 어릴 적에 일부러 피했던 학부모 모임, 엄마들 모임이었다.

만나서 떠들어 봐야 불안만 커지고 집에 오면 공부 못하는 아이 닦달하게 되고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기에.

아이들은 그걸 엄청난 결핍감으로 갖고 있다.

우리 엄마는 친구들 엄마랑 친하지 않았어! ㅠㅠ

중학교 졸업하고 만난 '꽃다운 친구들' 가족은 아이들에게나 내게나 결핍감 치유의 만남이다.  

좋은 사람들을 위한 식사 한 끼, 여기에 담는 마음과 정성을 내가 알아준다. 

참 선하고 아름다운, 준비만으로 족한 나의 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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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수십 수백 번 말함으로, 수십 수백 번 발설한 말로 내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는 마이크 잡는 강사가 얻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기도 하다.  내 입으로 수백 수천 번 하는 멋진 말이 다른 사람의 귀와 마음을 훔칠지언정 나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독이 되는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이런 경우는 마이크 잡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치명적인 특급열차이다. 그런 의미로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오면 늘 조금씩 두렵고, 조금 공허한 마음이 되곤한다. 특급열차가 눈 앞에서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십 수백 번 발설함으로 조금 나아진 내 존재의 구석이 있으니 위안 삼아 떠벌여본다. 지난 주 연구소가 기획한 첫 번째 특강으로 [성격유형 사용법 : 신앙 여정에서]라는 이름의 강의를 했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있던 말들이었다. MBTI나 에니어그램이 개인의 성장은 물론이거니와 신앙여정에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함에도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가끔 '모 선교단체에서 가르친 에니어그램으로 상처 받은 분들 에프터 서비스를 우리 연구소에서 하는 거냐' 농담을 하기도 한다. 


선물이 되는 지점, 독이 되는 지점의 경계를 오래 고민해왔고, 그 부분을 나누려는 강의였는데 생각 만큼 잘 전달하진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삶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으로 자위고 있다. MBTI와 에니어그램을 몰랐으면 지금의 가 없을 것 같다. MBTI와 에니어그램을 몰랐다면 이렇게나 다른 남편과 화평하며, 아니 오히려 다름을 기뻐하며 20여 년 살 수 있었을까. (MBTI는 결혼하고 풀타임 일하면서 직장서 제대로 알게 되어 전문과정 교육을 남편과 함께 받았다.) 이런 도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도 모르는 내 성격이 가진 어두움이 아이들을 덮치고 옭아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도 온전히 알아차리고 있는 건 아니다.)


지난 주일에 꽃다운 친구들 가족 모임이 집에서 있었다. 1기 가족의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채윤이는 1기, 현승이는 현재 4기로 일 년의 청소년 방학을 누렸고 누리고 있다. 1기 모임이지만 공교롭게도 '꽃친  다둥이 가족'이라 불리는 모임이었다. 남매, 자매가 둘 다 꽃친에 참여한 가족들이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 여섯은 모두 1기, 3기, 4기 꽃치너들이었다. 현승이와 올해 함께 하는 4기 친구도 있다는 것.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각 신이 났다. 그 중 특히 1기 채윤이는 우리 집에 처음으로 이 가족들을 초대한다는 것에 한참 전부터 들떠있었다.


문제는 현승이, 아니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문제인 현승이다. 저녁을 먹는데 아이들고 어른들이고 낄낄깔깔인데 유일하게 긴장한 표정의 현승이. 꽃친 4기에서 별칭 '머쓱타드'로 불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뭔가 어색하고 머쓱한 아이이다. 안다. 낯선 곳은 너무 낯설고, 긴장되는 곳에선 너무 긴장 되며 주목받는 것의 부담이 너무 부담인 아이이다. 그래도 그럴 줄은 몰랐다. 저녁 먹고 아이들은 채윤이 방에 몰려가 떠고 난리가 났는데 뒷정리를 하는 내게 다가왔다. (소곤소곤)"엄마, 나 밖에 나가도 돼? 방에 못 들어가겠어. 제발." 결국 음식 쓰레기 봉지 하나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사라졌다. 


현승의 부재를 확인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들 놀라고 살짝 당황. 이 정도로 '머쓱타드'였나. 걱정들을 하시는데 현승이 걱정도 있는 것 같고 부모 걱정도 하셨다. 엄마 아빠 괜찮냐? 다행히 엄마 아빠는 괜찮다. 조금 속상한 면이 있지만, 현승가 그렇게 이상한 애가 아니라는 변명을 할까 하는 마음일 땐 심장박동도 빨라지고 한 구석 저릿하기도 했지만 괜찮다. 아파트 주변을 혼자 빙빙 돌 생각을 하면 짠하기도 했지만. 결국 손님들 출발하신 후 혼자 집으로 걸어들어 오는 걸 목격 당하고 말았다. 


외향형 엄마로서, 사람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아니 잘만 해내면 에너지 팍팍 받는 외향형 엄마로 내향형 아들을 본다. 내게 가장 자연스러운 에너지 흐름과 정반대로 방향이라면 내향형 아들 마음이 어떨지 조금 이해가 된다. 닦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생겨먹은 제 마음의 모양을 받아들이고 좋아할 때 변화도 가능하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니니까, 내 말에 내가 설득된 면도 있다. 남편이 말한다. "속상하긴 하지만 나는 현승이 이해가 돼." 내향형 아빠로서 충분히 이해 할 것이다. "나도 그래, 나도 이해해 나도 그런 적 있어." 외향형이지만 감정형이 나도 어쩐지 현승이 같이 굴었던 청소년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감정형으로서 사람과 관계에 대한 신경쓰임이 늘 과다하여 오히려 다가가지 못하고, 숨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저런 내 생긴 모양을 부끄러워 할수록 아이에게서 발견되는 내 모습이 화가 나고 두 배로 수치스럽곤 했는데. 나를 더 많이 닮은 채윤이를 볼 때도 비슷한 매커니즘이었다. MBTI를 알지 못했다면, 에니어그램을 알지 못했다면 그 매커니즘을 보는 눈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혹 가지게 된다해도 시간이 더, 더, 더 많이 걸렸을 것이다. 머쓱타드 현승이가 꽃친 쉼표식에서 '덕밍아웃'이라는 덕질 공개를 했다. 3년 전에 채윤이도 똑같은 것을 했었는데, 발표하는 태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현승에게는 저 앞 마이크를 들고 선 건 자체가 대단한 용기이며 도전임을 안다. 


현승이도, 채윤이도, 종필도 나도 내 생긴 마음의 모양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준 MBTI, 에니어그램. 

참 고마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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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갑자기 무엇을 먹고 싶고,

먹고 싶은 그것을 내가 만들 수 있는데

재료가 모두 준비되어 있다면

갑자기 벌떡 요리를 하는 것이 내게는 기쁨, 예기치 않은 기쁨이다. 


갑.자.기.

갑자기 일어나는 즐거운 일이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에로스 에너지라는 것을 알았다, 기보다는 알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남자 JP가 "여보, 떡볶이, 떡볶이 해줘."

이 말에 빛의 속도로 일어나 오리고기 한 팩을 뜯어 후라이팬에 펼쳐 널었다.

떡볶이는 언제 먹어도, 언제 들어도 거부할 수 없는 음식인데, 갑.자.기. 떡볶이 주문이라니.

오리고기를 펼쳐 널기 무섭게 "빨간 떡볶이야!"라고, 평소답지 않은 구체적인 주문이다.

어, 빨강? 펼쳐 널부러진 오리고기 위에 고추가루를 일단 뿌리고, 되는대로 양념을 쏟아 붓고

마늘을 과하다 싶도록 넣은 다음 떡을 투입하니 빨간 오리 떡볶이가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오후부터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었지, 라는 자각이 오자마자

한 컵 철철 넘치게 물을 붓고 끓이니 빨간 오리 '국물' 떡볶이가 되었다.


고기 좋아하는 현승이,

빨간 떡볶이 좋아하는 JP,

국물 빼놓곤 다 좋은 채윤이,

국물이 좋은 나.


갑자기, 야식 타임이 되었고,  모두 만족하는 야식 메뉴가 되었다.


내가 당신처럼 계획한 것을 계획한 시간에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이 환상적인 야식을 즐길 수 있었겠는가. 

갑.자.기. 분출하는 식욕과 발생하는 일을 즐거워지 않는다면,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겠는가.


갑.자.기. 

갑자기 발생하는 욕구와 욕구에 부응하는 기쁨, 예기치 않은 기쁨을 그대 아는가?



- 지구의 반 J님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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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에 한 남자 청년이 필기를 무척 열심히 하거나, 또는 낙서를 심하게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필기라 여기기엔 어쩐지 청년의 이미지에 자유분방함이 넘쳤고, 낙서라 여기기엔 진지했다. 물론 잠깐 스친 느낌이었다. 강의 마치고 개인적인 질문도 받고 인사를 나누는데 그 청년이 그렸다며 내민 내 얼굴이다. 강의 들으며 필기 또는 낙서로 열심히 강사를 그려준 것이다. 가끔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이 있지만 유난히 좋은 건 '청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쩐지 그냥 편이 되어주고 싶고, 청년이 뭘 하면 그저 좋아 보인다. 특히나 어느 청년이 자발적으로 한 무엇이라면, 좋고 좋고 또 좋은데. 자발적인 작품이라니.



그렇게 바쁜 인기 강사는 아닌데 해마다 이때는 주가상승이다. 8월 15일을 낀 앞뒤 2박3일을 전국의 거의 모든 교회 청년부의 수련회 기간이다. 벌써 강의 약속이 되었는데 몇 차례 섭외 전화가 온다. 일정상 가능하더라도 하루에 두 번 강의를 하진 않기 때문에 맨 처음 인연이 닿은 바로 그 교회 청년부를 만난다. 15, 16, 17 수련회 기간 중 하나 씩, 세 번의 강의를 마친 저녁이다. 전과 달리 세 교회 중 대형교회가 하나도 없고, 어쩐지 느낌이 비슷한 교회들이었다. 두 교회는 이미 강의를 한 번 다녀왔고, 두 번째 만나는 만남이기도 해서 내 교회 청년부를 만난 느낌으로 정겨웠다. 



그래서 삼일 내내 좋았다. 기간 중에는 사랑하는 권사님을 천국에 보내드렸고, 사이사이 위로예배 발인예배를 드렸다. 슬픔과 그리움으로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고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했지만 강의하고 이들을 만나는 순간 만큼은 생명력과 기쁨이 넘쳤다. 그야말로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을 오가는 사나흘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발인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권사님을 보내드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수련회장으로 가 10시부터 3시까지 강의였는데. 운전하고 가는 동안에는 강의를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오후 3시까지 내 몸과 마음이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각 10시,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고,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던지지는 농담 한 마디에 환호성을 지르며 물개박수를 쳐대는 그들의 에너지가 나를 이끌었다. 3시까지 너끈했다.


결혼 첫 해. 결혼해서 너무 좋은데.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은데 그 해 여름 수련회 시즌이 되자 우리 둘 모두에게 병이 생겼다. 수련회 앓이였다. 청년으로 살던 10여 년, 여름마다 수련회에 올인했고, 거기서 얻은 영적 심리적 에너지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 수련회 금단현상으로 마음을 잡지 못고 뒹굴거리다 에라, 교회 청년부 수련회에 아이스크림이나 사다주자! 하고 일어나 양평의 수련회장으로 갔었다. 그때 사진이 있다. 채윤이 임신하고 긴 입덧으로 몸이 많이 허약해졌었는데 마냥 좋았다. 돌아오는 길, 휴일 저녁 교통체증이 최악이었던 기억.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년부 수련회에 대한 아련한 마음. 생각난다. 생각난다.


스스로 사유하고, 책 읽는 청년들을 특별히 애정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청년들의 자발성과 창조성이다. 대단한 자발성이나 창조성이 아니다. 수련회 프로그램을 스로 만들고,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더 의미있게 진행할까 애쓰고 참여하는 태도. 그것은 긍정성이다. 자발성과 창의성을 한데 모으는 일이고, 그런 수련회는 거의 대박 재밌고 은혜롭다. 삼일 연속 갔던 청년부의 수련회는 그런 에너지가 넘쳤다. 최근에 별로 접하지 못한 에너지라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울 만큼 좋았다. 두 번은 특히 안면을 튼 청년들이라 내 개그코드도 알고, 스타일로 감지했기에 더 잘 소통할 수 있었다. 오늘 강의는 아예 대형을 바꿔 다같이 원으로 마주고 앉자고 제안을 했다. 감상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마주앉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강의하다 카메라 드는 일이 없는데 청년들끼리 얘기하는 시간을 주고, 또 주제활동을 하면서 자꾸 찍게 되었다. 사진을 찍었고 특히 동영상을 찍었다. 와글와글, 와글와글, 그러다 갑자기 와하하하하, 박수소리와 함께 터지는 웃음이 참 듣기 좋았다. 이들이 나눈 이야기, 만든어 낸 이야기며 그림이 참으로 기발하니 발표를 시켜놓곤 와하하하, 내가 웃고 박수를 친다. 청년사역이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청년부 목회자나 선교단체 간사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나도 동의한다. 헌데 지난 며칠의 경험으로는 청년가 살아 움직이며 부흥할 것 같은 느낌이다. 코스타나 성서한국에서 만나는 청년들도 참 좋은데. 대단한 시대적 의식이 없어도 그저 청년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함께 모여 있는 지역교회의 청년부의 좋음을 따르지 못한다.


공동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편과 나를 하나 되게하는 가장 큰 열망 중 하나는 공동체이다. 둘 사이 정직하고 자발적 공동체 되고자 20년 노력해왔고, 그 열매가 깊고 풍성함을 고요히 강렬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 또한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우리를 이어준 본 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이 결국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난 며칠, 사랑하는 권사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며 그 이별을 통해 공동체를 느낀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느낀다.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 라는 찬양 가사가 적절할 것 같다. 그런 때, 다 사그러졌을 때 '죽음'을 통해서 사그러진 사랑이 되살아나다니! 



채윤이가 굳이 권사님의 장례예배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이른 아침 드리는 발인예배까지 가면서 차에서 나눈 이야기가 있다. "엄마, 권사님께 너무 죄송한 게 있어. 권사님이 나한테 써주신 편지에 멋진 실용음악가가 되어라, 고 해주셨는데. 권사님이 내가 하는 음악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그래서 권사님 아프실 때 찬송가 한 곡 편곡해서 녹음해서 보내드리려 했거든. 실은 녹음도 해놨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하려고 못 보내드렸어. 너무나 아쉬워. 엄마, 권사님과 내가 나이로나 개인적으로 크게 관계가 있는 것 아닌데도. 내가 마음이 이런 것, 이게 공동체인인가봐." 교회에서 누구보다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있는, 자발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청년 공동체를 선망하는 채윤이가 그렇게 말했다. 실은 생기 넘치는 수련회에 가면 청년이 된 채윤이 생각이 많이 난다. 채윤이 대신 내가 부럽다. 


자발적이며 창조적인 사람들, 청년들의 모임. 두어 시간 안에 작품이 하나 뚝딱 나오고, 한 15분 만에 기발한 이야기 하나를 뚝딱 만들어지는, 하하호호 깔깔깔깔. 살아 생기가 느껴지는 공동체, 다시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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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란히 앉아 커피 마시며 창밖을 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카메라를 들고 일어났다. 안개가 만들어 낸 새 아침의 풍경, 이 좋음이 어떤 형용사로 표현되지 않는다. 최신형 아이폰 카메라에도 담을 수 없다. 순간 온몸으로 누리고 감사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렇게 느긋한 월요일 아침을 누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정수기 코디님이 오셨다. 아, 맞다! 어제 문자가 왔었지.


남편도, 느긋하게 아침 먹던 현승이와 조카 우현이도 조용히 빨리빨리 방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코디님께 아침에 커피 드셨어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했더니 반색하신다. 핸드드립 해서 아이스로 드렸는데. 커피향 너무 좋다고 감동하셨다. 커피 드리고 깜빡하고 있던 라디오를 켰다. 나대로 탁자로 와 책을 보고 있었다.


“고객님, 이 커피를 그냥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저 잠깐 앉아서 밖에 풍경을 좀 보면서 마실게요. 비도 오고 음악도 있는데. 잠깐 앉아도 되지요? 이런 순간은 잠시 누리고 싶네요! 화초도 너무 예뻐요. 카페라고 생각하고...” 하셨다. 내 마음이 다 좋아서 “얼마든지요! 뭘 아시네요. 일은 일이고 쉴 기회가 오면 쉬는 거죠!” 했다. 


순간을 누릴 줄 아는 코디님, 참 멋지다. "고객님 일 보세요. 저는 커피 마시고 잠시 누릴게요" 그리고는 말 없이 그저 등을 보이고 앉으셨다. 뒷 모습을 바라보는데 그냥 좋아서 책에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까요?” 했더니 "좋죠!' ㅎ시며 팔을 번쩍 들어 ‘나 커피 마셔요!’ 하는 포즈까지 하셨다.


마침 내가 읽고 있는 구절은 이랬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벗이여, 아무쪼록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의 품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사랑을 그대의 근본으로 삼고 팔을 뻗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어제 설교 내용은 '헤세드'였다. 헤세드, 충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랑! 방에 있던 남편이 이 얘기를 듣고 "정신실 설교 제대로 들었네. 헤세드야!"한다. 설교의 감동 때문인지, 창밖의 풍경 때문인지, 순간을 누릴 줄 아는 코디님 내면의 힘 때문인지. 찰나의 사랑이 그분의 현존을 일깨우는 월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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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송이 장미  (0) 2019.02.14


최영미 시인이 최근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내놓은 작품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소비할 때 작가는 뭔가 제재를 해야 한다고. 본인은 그러지 못했고, 돌아보면 그래야 했었다는 얘기였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으나 막을 수 있는 일인가 싶다. 출간은 물론이거니와 신변잡기 한 줄이라도 SNS에 쓰는 행위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읽히기를 각오하는 일이다. 저자거리에 내놓을 때는 이미 독자의 것이다. 현시욕에 불타 자기를 쓰고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감수해야 할 마땅한 짐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빛 향기'에 출연한 영상이 한 주간 방송되고 유투브에 올라왔다. 내 영상 오글거려 못본다는 칭얼거림도 그만 해야겠다. 남편과 함께 방송을 봤다. 첫 시청자이고, 가장 많이 신경 쓰이는 시청자이니 평이 궁금할 수 밖에. 어째 표정이 좋질 않았다. (언제는 표정이 좋은 사람인가요?)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책 내용은 더 비판적이고, 무엇보다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지나치게 개인적인 간증으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내 표정에서 더 얘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읽혀졌다고 했다.


촬영하고 나서는 홀가분하고 마음이 가벼웠는데 남편의 말에 덮어두었던 감정과 생각이 올라왔다. 처음 방송 섭외가 왔을 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매체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신앙 사춘기>가 담지한 날것의 감정들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진보 언론에 기고한 글을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말로 푸는 것인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씀 드렸다. 담당 작가님 말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방송 전 인터뷰를 하고 나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역시나! 책에 담은 바로 그 이야기가 나오질 않았다. 간증이라는 형식의 한계이자 은혜로운 방송이라는 제한 때문이었다. 하지 말 걸 그랬다. 방송에 나갈 걸 생각하니 기도가 절로 나왔다. 작가가 책을 내고 책에 담은 얘기를 솔직하게 할 수 없다는 건 최영미 시인이 말하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소비되는 일에 작가 스스로 앞장 서는 일이 아닌가. 


막상 촬영 때는 편했다. 동창 윤유선과의 반가운 만남 덕이기도 하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획을 확실하게 긋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방송을 보고 남편의 반응을 보니 조금 서글퍼졌다. 연재를 시작할 때 '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겠다고 했다. 그 말이 올무가 되어 벌벌 떨며 찌르느라 울고, 싸매느라 다시 울며 썼다. 헌데 이번 방송에서는 싸매기만 한 것 같아 드는 자괴감이다. 


하루 이틀 마음에 담고 묵혀보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뉴스앤조이 연재 당시에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매체의 특성 때문이었을 것. '찌르면서 동시에 싸매기' 위해서 그토록 고통스러웠는데 정작 독자들은 자기 입맛에 맞게 찌르는 용도로 공유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교회가 싫고 특히 목회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자기 방식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보면서도 자괴감이 들었었다. 


쓰는 나의 마음 그대로를 읽어줄 독자가 어디 있겠는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 불리는 나 역시 책을 통해 나를 읽는다. 찌르는 칼이 되든 싸매는 붕대가 되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그리고 나는 (아직) 착하고 순한 그리도인들에게 더 애정이 많다. 책의 표현대로라면  종교중독자, 착한 나쁜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회개할 것이 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바라는 바, 강사로 작가로 소비되고 싶은 방식은 일단 싸매고 서서히 찌르는 식이다. 청년들이 멘토를 찾아 돌아다니며 묻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책을 읽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는 청년들이 답답하다. 하지만 이미 그러고 있는, 자의식 충만한 청년들은 가르칠 것이 없다. 책하고는 담 싼 청년이 한 권이라도 읽게 만들고, 자기 안의 힘을 믿고 주체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내 기쁨이다. 한 사람, 한 권이면 된다.


페미니스트로서 더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지만 교회 안의 착한 자매들을 얻고 싶어서, 여성의 편이 되고 싶지만 성인지 감수성이 개발되지 못해 죄의식 속에 분노하는 남성을 잘 설득하고 싶어서, 목회자에게 당한 성폭력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인 줄 알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조차도 채근과 압박으로 듣는 생존자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늘 어정쩡함에 머문다. 역시나 자괴감 만발이지만 내게 닿은 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된다.    


찌르든 싸매든, 

칼이 되든 붕대가 되는 

그것은 읽는 사람, 보는 사람 마음이다.

쓰고 말하고 설쳤던 나의 어정쩡함은 내 몫의 짐이다.

칼로 쓰든 가위로 쓰든, 화장실 휴지로 쓰든 마음껏 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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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남편 김P는 존대말의 사람이다. 

미융의 남편 남궁P는 반말의 사람이다.


사람들은 김P에게 함부로 많을 놓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걸지 않는다.

남궁P는 누구보다 먼저 말을 놓고 반말을 유발한다.


우리 결혼식 때, 신랑신부 퇴장길 끝에서 흔한 꽃가루가 뿌려졌다. 

퐁퐁, 작은 폭죽도 터졌다.

폭죽 일발장전 하고 한 방에 땡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남자 집사님이 계셨다.

순간 퇴장하는 신랑 김종필과 눈이 마주쳤다.

진지한 눈빛에 기가 꺾여 차마 당길 수 없었다고, 조용히 폭죽을 내려놓았다고.


작년 말, 오랜 기다림 끝에 남궁P가 결혼을 했다.

우리 현승이를 비롯한 교회 주일하교 아이들이 축가를 불렀다. 

축가 부르러 나온 아이들, 사춘기 어간의 아이들의 표정이란 안 봐도 뻔하다.

축가팀과 마주한 신랑이 바로 스태프 모드로 전환되어 손가락 입가에 대고 웃는 표정을 주문했다.

축가를 부를 때는 아이들보다 더 건들거렸다.


우리 남편 김P와 미융의 남편 낭궁P는 많이 다르다.

미융과 나도 다르다. 나는 한국 여자, 미융은 베트남 여자.

"사모님, 이 책 다 읽었어?" 

우리 말을 꽤 잘하는 미융이지만 이런 신선한 웃음 유발하는 디테일이 있다.

"아내는 매일 책만 봐요. 여기 보면 <책만 보는 바보>라는 제목이 있어요."

남편이 대신 답했다.  

미융은 고개를 절래절래, 책을 싫어한다.


남궁P는 뭐든 잘 먹고, 음식도 눈앞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뚝딱뚝딱 만들지만

특히 떡볶이를 좋아한다. 결혼 전 현승이와 그 일당을 데려다 많이 해먹이셨다.

미융은 떡볶이를 싫어한다. 

한국 와 일하던 직장에서 늘 간식으로 나왔던(떡볶이, 김밥, 라면) 메뉴, 

그 기억 때문에 싫다고 한다.

남궁P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함께 먹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오빠 떡볶이 좋아해. 오빠 떡볶이 먹어! 나 안 좋아해. 안 먹어!"

미융은 이러면 된다고 한다. (와, 인생 띵언!)


남편이 지금 교회에 부임하며 주일학교 사역자로 남궁P를 스카웃 했왔던 건 여러 모로 신의 한 수였다.

많은 사람에게 선물이 되었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에겐 큰 선물이었다.

사춘기 남자 아이들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을 수 있는 선생님이 몇이나 되겠는가.

결혼과 동시에 이주노동자 사역으로 떠난 남궁P를 아이들은 여전히 좋아하며 찾는다.

사랑의 흔적이 남겨진 탓이다.   


남편과 남궁P는 다르고, 참 많이 다르다.

나와 남편도 다르고, 참 많이 다르다.

남궁P와 미융이 다른 점을 찾아면 헤아릴 수도 없다.


이렇게 다름에도 달달한 일상을 산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한 식탁에 모여 달콤한 쉼의 만남을 가졌다.

라끌렛으로 시작하여 김치말이 국수로 끝난 메뉴는 다국적, 너무 다국적.


다름, 뭐 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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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창 밖 앞산의 푸르름에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짧다. 이내 고개를 숙여 창가의 화분에게 굿모닝! 기나긴 굿모닝 인사다. 한 놈 한 놈 건강을 살핀다. 제 몫의 푸르름을 유지하는지, 잎은 탱탱한지. 그러며 어느 놈이 목이 마른지 알게 된다. 핸드드립 동포트(꼭지 부분 가늘어 천천히 물주기가 딱이다!) 목은 마른 것 같진 않은데 어쩐지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녀석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원인을 모르니 대응도 할 수 없다. 그저 소성케 되길 기도한다. 앞산 푸르름을 배경으로 잘 자라는 화초들 덕에 아침마다 생명의 기운을 받는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렇게 화분을 잘 키워요' 집에 오신 분들이 빈말인지 아닌지 칭찬을 하신다. 화분이 울고 보채는 것도 아니고, 등원 하원 시간 챙겨야 하는 애들도 아니고, 세 끼 밥을 먹이거나 목욕시킬 것도 없으니 바쁘다고 돌보지 못할 애들은 아니다. 아침에 잠시 눈을 맞추고 가끔 사진을 찍어주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 화초가 잘 되는 것은 인정! 내 마음의 정원이라 여기고 싸구려 화분 몇 개라도 가까이 두고 돌보는 일상이 오래다. 어느 때부턴가 수월하다. 그다지 힘을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나, 힘도 안 들이고 화초 잘 키우는 여자!


신혼 초, 노란 벽지 집에서 처음으로 화초를 들이던 때나 지금이나 죽어 나가는 애들은 비슷하다. 조금 줄었을 수도 있겠다. 잘 돌본다고 돌보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다 결국 고개를 푹 꺾어버리고 마는, 급기야 시들고 마는 애들은 어쩔 수 없다. 화초 키우기가 수월해졌다 느끼는 지점이 분명하다. 죽어 나가는 화초에 대한 과한 죄책감을 놓으면서부터이다. '에고, 또 죽였네! 난 정말 화초를 못 키워, 다 죽여!'에서 '죽을 놈은 죽고 말더라' 하는 마음이 되니 거짓말처럼 화초 잘 키우는 여자가 되었다.


변화의 방향이 밖에서 안인지, 안에서 밖인지는 모르겠다. 화초가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젊은 날부터 '관계의 실패자다'라는 자의식으로 살았다. 알고 보면 실패한 관계 하나 둘이다. 모든 관계를 다 잘할 수는 없구나! 불가능한 목표였구나, 깨닫게 되면서 과도한 힘이 빠져나간 것 같다. 착한 크리스천 강박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고 말해도 좋다. 가장 확실한 표현은 내 한계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일 수는 없어!


이렇듯 단순한 진리를 알아듣기까지 얼마나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던가. 자기혐오의 시간이었던가. 자아팽창의 시간이었던가. 그 시간을 통과하며 관계에 대해 쓰고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의 실패자가 관계 강사가 되었다니! 관계의 실패자일 때나 관계 강사인 지금이나 실패하는 관계는 비슷할지 모른다. '에고, 또 실패했네, 역시 나는 관계의 실패자야'에서 '내가 애써도 안 되는 관계가 있더라, 잃을 사람은 잃을 수밖에 없더라'하는 마음이 되니 거짓말처럼 사람을 좀 아는 여자가 되었다. 


사람에게서 배워 화초를 잘 키우게 된 것인지, 화초를 키우다 사람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디 한 방향이겠는가. 안팎을 오가며 습득하게 되었겠지.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말라죽은 화분을 숨기고 싶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 내 안의 내가 마구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인 줄 모르는 탓이었다. 단번에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이제야 사람인 줄 안다.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가진, 희망과 절망 또한 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도 먹고 싶은 사람인 줄 안다.


창밖이 저렇듯 푸른 산인데, 창가의 화초 또한 저렇듯 싱싱한 초록이라니! 

내 눈 앞의 풍경이라니! 토요일 오전, 나의 한가한 일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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