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의견의 차이 또는 갈등이라 해도 좋을 상황을 인내로 헤쳐 나가는 시간, 숨을 고르며 남편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다르다고 생각했고, 다름의 간극이 멀어 다시 손을 맞잡을 수 있을까 싶은 시점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은 달래고 어르는 말처럼 들렸었다. 달래지고 얼러지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 '같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차분하게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다'고 설득하는 태도 때문에 달래졌던 것 같다. 

요즘 자주 속으로 생각한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구나!" 남편과는 물론이고 아이들과도 그렇고. 많은 경우 그렇다. 3인칭 시점으로 지켜보는 '말'들은 대부분 같은 마음을 다른 언어로 표하고 있다고 느낀다. 같은 마음이란 '평화와 자유' 같은 것들이다. 화해와 연결, 이해하기 이해받음 같은 것들이다. 문제는 언어가 담은 마음이 아니라 그저 언표만을 듣고 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귀와 눈이다. 서로 다른 뜻(마음) 이 아니라 같은 마음 다른 표현이기에 더 어렵구나, 이런 생각도 한다.   

적어도 남편과는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음'에 대해 빨리 감지할 수 있다. 그러자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 그러자 내가 보인다. 더욱 또렷이 보인다. 알고도 모르고 모르지만 알았던 내가 잘 보인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지점은 에너지와 속도의 차이이다. 나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남편은 부러 천천히 뒤처져 숙고한다. 알고보면 같은 결론, 같은 뜻이다. 나는 '계획 세우기'로 뜻을 향해 나아가고, 남편은 명확한 마침표를 위해 뜻을 갈무리 한다.  말을 하다보면 간극이 엄청나지만 뜻이 같고, 바라보고 있는 곳이 일치한다.

안성의 있는 미리내 성지를 걸었다. 같은 뜻으로 걸었다. 뜻을 담은 소리가 달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알아듣는 귀가 생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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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가 사라진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이 블로그 전 집은 싸이월드 클럽이었지요. 

2006년 6월, 끙끙 며칠  걸려 짐을 옮기고 둥지를 틀었습니다.

12년 살면서 짐은 꽤 늘었지만 여전히 살 만한 공간입니다. 

하남, 덕소, 하남, 명일동, 합정동, 분당으로 몸이 사는 집은 옮겨 다녔지만

마음은 마음 편히 내 집이려니, 전셋값 올릴 걱정 없이 여기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내내 여기서 살려구요.


전처럼 자주 글을 쓰지 못하지만 휴업은 아닙니다.

신상 입고가 안 될 뿐, 가게는 계속 열려 있습니다.


일상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내 얘기를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느라 겪어야 하는 불편함과 불이익에도 익숙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대나무숲'이니까요. 

여전히 하루에도 몇 편 씩 블로그 포스팅을 합니다. 

오직 머릿속 노트북에서요.

일상이 계속되는 한, 블로그에 쓰지 않을 방법이 없지요.

영화 리뷰도, 가족 이야기도, 내적 여정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도.

마음으로 늘 포스팅하고 있어요. 


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을이 왔고, 남자에게 소국을 조르고, 

꽃을 든 남자가 들어오고,

꽃을 든 남자가 이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싱크대 앞 창가에 생기를 키우는 작은 화병에도 가을 한 줌이 꽂힙니다.


기대했던 앞산의 가을은 생각보다 밋밋합니다.

올봄, 마음을 들뜨게 했던 연초록의 나무들이 미적미적 생기를 잃어갑니다.

붉고 노랗게 아름다움을 뽐내는 화려한 퇴장은 모르는 모양입니다.

단풍이 예쁜 나무들이 아닌가 봐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요.

화려하게 불태우는 것만이 존재의 의미는 아니니까요.

그저 있음으로 위로와 기쁨을 선사한 자연, 自然의 소임을 다 한 녀석들.

볼품없이 색이 바래고, 잎을 떨구고, 텅 빈 산이 되어도 그저 좋겠습니다.


우짜든지 일상도, 블로그도 영업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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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시간 

이 좋은 공간


혼자 집구석 지키는 토요일 

점심으로 뭘 먹지?


냉장고 뒤적뒤적

떡볶이 떡 0.5인분


그럼 떡볶이지


고추장 말고 다른 재료 제로!

뭐라고 있지 않겠쓰?


엊그제 속초시장에서 사 온 하얀 명란

뙇!!!!!!!!!!!!!!!!!!!!!!!!!!!!!!!!!!!!


올리브유 두르고

조랭이 떡 한 줌에 통마늘에 명란


으아 뭘 더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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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하루 종일 강의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몸이 정직하게 말한다. 9월28일 토요일. 내적여정 하루 세미나 마치고, 평소 같으면 회식으로 긴장 풀 시간이지만 간단한 식사하고 서초동으로 향했다. 연구소 공식 일정도 아닌데 연구원들이 죄 서초동으로 출동이다. 몸이 안 좋아 집에 계시는 선생님은 아쉬워 어쩔 줄 모르시고.


서초역에서 나갈 수나 있을까 하면서 그저 사람 파도에 밀려서 떠나녔다. 파도에 몸과 마음과 목소리를 맡겨 흘러간다. 하루 종일 강의하느라 목을 썼는데 어디서 새힘이 흘러나와 검찰개혁! 검찰개혁! 외치며 춤추듯 걷고 있었다. 


인파와 구혹 속에서 귀를 의심하게 하는 구호를 들었다. 문재인 개새끼, 문재인 개새끼. 뭐라고? 200만 인파에 둘러싸인 섬같은 맞불(은 무슨!)집회 앞이었다. 우리는 인산인해지만 쌩목인데 빵빵한 스피커에 대고 어떤 여성이 외쳤다. 


법치수호-조국구속-문재인 탄핵


스피커가 선동하면 쌩목의 촛불들이 하하 웃으며 받아쳤다. 


검찰개혁! 조국수.호! 문재인체.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외치는 소리에는 흥이 넘쳐난다. 번쩍 촛불을 드는 팔도 춤을 추듯 흔들린다. 높다란 무대 위에선 남자는 빵빵한 스피커로도 부족하다는 듯 피를 토한다. 문재인 개새끼 조국 개새끼. 온몸을 뒤틀어 젖먹던 힘까지 짜내는 폭력성이 차라리 가련하다. 촛불 시민들은 힘도 안 들이고 하하 웃으면 문재인, 체고!로 받아친다. 흘러가는 인해, 사람의 파도들, 이 사람들이 진심 체.고! 체고! 최고!


지난 8월, 검찰개혁 정국이 시작되던 시점 조국 장관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 어간에 투병 중이시던 권사님의 병세가 악화되신 일이 겹쳤다. 며칠 인생 최악의 불면의 밤을 보내고, 권사님 장례를 치르고, 연이은 여름 수련회 강의로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한 칸도 남지 않았었다. 남편의 분석만 간간이 들으며 가급적 뉴스를 멀리했다. 내 한 몸 지키기 위한 방어였다. 그래도조국 장관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촛불 광장에 나가면 에로틱 파워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흘러다니는 느낌이다. 에로틱 파워란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말하는 삶 충동이다. 성 충동 그 이상의 에너지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 생명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여성신학자 카터 헤이워드는 하나님을 '에로틱 파워'라고 불렀다고 한다. 바로 그 충만한 생명, 생기이다. 서로에게 한없이 너그러지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양보하면 길을 터주고, 가져온 것을 나눠주는. 별다른 말이 없어도 긍정 에너지로 하나 되는 느낌이다.


남편이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아를 설명하며 들려주는 자기 경험이 있다. 어렸을 적 어머니따라 기도원에 가서 겪을 일이다. 앉을 자리가 비좁아 한 번씩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강사 목사가 '할렐루야' 하면 '아멘'을 외치며 방석을 들고 앞으로 한 뼘씩 이동하는 시간이었단다. 상상할 수 있 듯, '아멘'은 크게 외치되 앞으로 나가지 않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 앞에 공간이 생겨 편안해지되 바로 뒤에 앉았던 엄마 따라간 어린 아이는 뒤에서 밀리고 앞에서 막히니 숨이 막히는 지경이 되었다고.


촛불 광장에 나가면 딱 그 반대이다. 자기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들로 중간에 누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바로 길이 난다. 나가는 사람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도 그렇게 말랑할 수가 없다. 그 사이에 들리는 욕설은 타나토스 충동이 광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현장이다. 극단의 공격성, 배제와 혐오. 자기로 가득 차 누구도,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타나토스의 감옥에 갇힌 자로 보일 뿐이다. 


젊은 시절에 기도가 목말라 어느 대형교회 철야집회 간 적이 있다. 극장식 좌석이었는데 늦게 온 사람들이 안쪽의 빈자리로 들어가려 할 때, 무릎을 틀어 자리를 내주는 분들의 짜증스런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 통성기도를 한 판 하고나서 찬송 부르는 시간이었다.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 나 역시 종교생활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인간이기에 어디서 어떤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까. 


어쨌든 촛불광장에는 교회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톨레랑스가 있고, 유머와 재치로 받아치는 너그러움이 있고, 에로틱 파워가 사람들 사이에 강처럼 흐른다. 희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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