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위문공연이다. 무료하고 때로 무력하거나 우울한 내 일상의 위문공연이다. 서원이가, 작년 어느 날부터 음악수업에 나타나 내게 기쁨이 되었던 서원이가 동네로 찾아왔다. 첫 수업이 잊히지 않는다. "이거 해볼 사람? 서원이가 해볼래?" 하니 고개를 천천히 저으면 몸을 뒤로 뺐다. 눈으로는 "네넵! 해볼래요, 하고 싶어요, 저 잘해요. 뭐든지 잘해요."라고 말하면서. 눈으로 하는 말을 듣고, 살살 달래서 결국 하게 만드는 게 으막션샘미 특기인지라. 뒤로 뺀 몸 이내 앞으로 나와 연주를 했다. 그리고는 음악시간마다 기대에 찬 눈으로 앉아서 나를 맞아주곤 했었다. 일주일 중 가장 피곤한 시간, 무거운 키보드를 질질 끌다시피 들고 찾아간 교실에서 만나는 비타민C 레모나였다.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수업이 중단되고 학기가 마쳐버려서 굿바이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서원이 엄마의 제보로 음악수업 있는 목요일을 그렇게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모나 서원이와 OO님이 엄마와 아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놀랐었지)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아이들의 '추구'는 늘 그 자체에 가깝다. 그러니 아이들은 지금 추구하는 것을 얻으면 그냥 행복인 것이다. 다른 목적 없이, 아무 헤아림 없이, 좋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줄 때, 아이들이 행복한 만큼 나도 행복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뿐, 목적할 뿐이기 때문이다. 수단 아닌 목적의 존재가 된다는 것,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서원이를 만나게 되었다. 집 교도소에서 출옥하여 '기쁨' 그 자체를 만나다니.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밝은 색 니트를 입고, 귀걸이도 했다. 심장박동이 기쁨의 박자로 빨라지는 것이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기분. 일찍 집을 나서서 태재고개를 넘어 걸어가는 길, 발걸음이 이리 가벼울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공원에 잠깐 갈까? 요 앞에 길을 건너면 공원인데... 했더니. 나는요, 차를 타고 가는 공원으로 가고 싶은데요. 이 계시같은 한 마디에 율동공원으로 향했고, 걸으며 큰 소리로 카쥬를 불고, 30초 그림자 밟기, 30초 얼음땡 놀이도 했다.

헤어지는 분위기가 되자 놀이터에 가고 싶다, 집에는 장난감이 하나도 없다, 우리집은 15층이라 뛸 수가 없다, 1층에 살면 좋겠는데 1층은 집이 안 나온다.... 어설픈 (그러나 뭔가 부동산 판도를 읽고 있는 듯한 ㅎㅎㅎ 웃긴)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길거리 스탠딩 톡킹 어바웃'이 길어지고 깊어져 속내 털어놓기 타임이 되었다.

다음에 날씨 따뜻해지고 코로나도 끝나면 다시 와서 놀자. 코로나가 끝나면 좋겠다.

나는요, 코로나가 끝나는 게 좋지 않아요. 나는요 재택근무를 좋아한다구요. (6세 입에서 재택근무! ㅎㅎㅎ 코로나로 재택근무 하는 엄마랑 함께 있어서 좋다는 뜻) 

(갑자기 아빠의 일상 공개) 아빠는 새벽에 가면 늦게 오거든요. $*&^@#$%^!#$ (이 부분 깨알 재밌는데... 사생활... 큐큐)

(스물한 살 누나 체벌하는 문제를 상담까지 해줌) 어, 옷걸이로 때리지 말고요. 패트병으로 엉덩이를 때리세요. 그게 아파요. (실은 스물한 살 누나가 선생님보다 커서 때리는 게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더니 그때부터 너무 길게 자세하게 설명) 누나가 스물할 살이 될 때, 한 살이 더 먹을 때 말예요. 선생님도 또 한 살을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같이 나이를 먹으니까 선생님이 나이가 더 많은 거예요. 선생님이 더 작아도 나이는 더 많은 거니까... 때릴 수 있어요. (아, 그러면 집에 가서 누나가 또 방을 안 치우고 있으면 막 패트병으로 때려야지! 의지를 보여줬더니) 아니, 처음부터 때리는 게 아니라 일단 말로 하세요.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패트병으로 때리세요. (너무 친절한 체벌 상담 ㅎㅎㅎ)

다 옮겨 적을 수 없어서 아쉬운, 녹음하지 않아서 아쉬운 긴긴 대화였다.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간질거린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를 산다. 그리고 초대한다. 우리 역시 지금 여기에 머물도록. 그 무엇도 목적하지 않고 목적한다. 나를 목적한다. 존재를 목적한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선물을 준다. 길에 서서 나눈 그 대화, 잊지 못할 것 같다. 좋았던 과거도 아니고, 더 좋아질 미래 어느 날도 아닌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린 시간이다. 코로나로 인해 마음 놓고 숨을 쉴 수 없고, 손잡고 악수를 나눌 수 없는 나날이지만. 그 순간만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행복감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로 내 어두웠던 과거와, 으막션샘미로 행복한 현재와, 새로운 창작의 꿈꾸는 미래를 한 줄에 꿰면서 내 일상으로 다가와 깜짝 놀래킨 사람이 서원이 엄마였다. 언어로 기록하기 어려운 그런 신비이다. 그러고 보면 '신비' 역시 무엇을 목적하지 않는, 그냥 그것, 그냥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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