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어디든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이라니. 겨우 '삶'의 최소한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행이라니. 어디 가고 싶은 곳 없냐고 또 자꾸 묻는데 역시 가당치도 않은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뭐지? 그런 게 있었나? 느낌이 없어졌는데.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경탄하는 것인데 지금 어떻게 여행이 가능하지? 앞산 진달래가 피어도, 목련이 봉우리를 터트려도,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꽃이든 낙엽이든 계절 없는 흑백의 시간을 산다고 하는 게 좋겠다. 꽃 사진을 보내오는 벗들이 있어 '아, 그렇구나. 이런 시절이지. 생명이 움트는 때……' 그제야 목련, 개나리가 색을 입고 눈에 들어오는데, "무심도 하다. 엄마가 죽었는데 꽃이 피고 움이 트다니" 하다 이내 다시 흑백 이미지가 된다. 

 

'긴 여행 말고, 아침 일찍 출발해 돌아오는 것으로 통영 갈까? 도다리 쑥국 먹으러 가볼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도다리 쑥국 기사를 보고 툭 나온 말이 1박2일 통영이 되었다.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통영도, 바다도, 도다리 쑥국도 그저 흐릿한 흑백사진이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면 자동반응으로 설레곤 한다. 강동 쪽에 오래 살아서 어딘가 떠날 때 지나는 첫 관문이 동서울 톨게이트였다. 딱 그 지점을 지나면 '떠나는구나!' 들뜨곤 했었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익숙한 휴게소들 지나는데 덤덤한 내 마음이 슬픔을 일깨우고, 잠시 스치는 슬픔도 싫어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좋고, 설레고, 행복한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의 걱정에 내가 먼저 하는 말인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도다리 쑥국 정도 상상하고 내려간 통영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무계획 여행이라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다 어느 공원을 걷는데 동백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다. 아, 동백꽃! 걸을 기분이 되었다. "여기 좋다. 좀 걷자." 걸어야 하니까 걷는 것이 아니라 걷고 싶어졌다. 다리에 없던 힘이 들어갔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서 만났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아니, 흑백 속 컬러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흑백 속 컬러,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처럼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봉오리들이 색을 입고 마음에 들어왔다. 예쁘다…… …… …… 슬프도록 아름답다. 살아있는 엄마와의 마지막 연결, 전화기로 함께 찬송 부르던 장면을 두고 남편이 '찬란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했었다. 떨어져 뒹구는 동백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찬란한 슬픔이었고, 그 슬픔은 잊었던 심미감을 흔들어 깨우는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전화기, 아니 카메라를 꺼내 이 각도 저 각도로 담았다. 아름다움이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음악치료는 음악을 선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질성의 원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클라이언트의 정서와 음악 사이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 가라앉은 정서에 사용하는 음악과 흥분된 사람에게 쓰는 음악을 우선 동질성이라는 기준으로 골라야 한다. 우울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다짜고짜 밝고 경쾌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치료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모든 치료의 원리일 것이다. '공감'이라고도 한다.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이 내 마음에 공감으로 다가왔다. 동질(同質) 성의 작용이고, 바깥의 풍경과 마음의 풍경이 공명했다. 동네 흔하게 핀 꽃을 볼수록 덤덤해지고 냉담해진 것은 동질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탓이었구나. 나는 이렇게 슬픈데, 꽃천지라니. 이토록 처절한 상실의 시간에도 생명이 움트고 있다니. 자연의 섭리조차도 나를 외면하고 고립시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만 슬퍼하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채근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품고 일한다. 내면과 외적 상황의 연결, 나와 너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치유를 일으킨다. 그 어떤 연결보다 슬픔의 연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연대가 가장 치유적이다. "결코 연결되지 않겠다"는 태도로 글쓰기, 꿈집단 첫 시간에 앉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로 피 흘리는 중이라고 나는 읽는다. 몇 회기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보통 첫 시간의 그 사람이다. 상처를 발설하고, 내 상처와 마주 앉은 이의 아픔이 공명할 때 존재가 우리를 일깨운다. “아, 연결되어 있었어!” 좋은 얘기, 다 나아져서 이제는 괜찮은 얘기, 은혜로 축복받은 간증만으로는 어렵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라고 박정은 수녀는 말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연결은 상처, 실패, 상실을 투명하게 드러낼 때진정한 것이 된다. 사람의 상처와 공명하며 연결된 경험이 많지만,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자연이 동질성을 드러내 주었다. 

 

어제는 4월3일. 동백꽃으로 가슴에 담긴 4.3의 날이다. 4월 3일 저녁엔 한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동시에 곡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일상을 살던 엄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아들, 딸이 동시에 죽임 당한 날인 것이다. 그 죽음 하나하나 내가 엄마를 잃고 모든 감각을 다 잃은 그런 살아 있는 죽음의 경험일 텐데. 그 죽음에 이름도 제대로 붙여지지 않은 채, 끝나지 않은 애도로 피맺힌 슬픔이 툭툭 떨어지는 날이다. 동백꽃은 내게 4.3의 무고한 죽음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들의 죽음이다. 동백꽃은 내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꽃 같은 청춘이다. 작년 1월, 성폭력 상담가 교육을 받는 중 김복동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1926년 생이다. 우리 엄마는 1925년 생이다. 장례식 어간에 인터뷰와 영상들 찾아보며 먹먹한 시간을 보냈다. 그 할머님들의 삶을 마주할 때, 또 돌아가셨단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동백꽃 한 송이 떨어지는 느낌으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우리 엄마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어느 죽음이 안타깝지 않고,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은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말처럼 성별, 얼굴색, 빈부와 학식의 차이, 그 모든 차이가 태양볕 아래 눈처럼 녹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라는 기쁨을 느낀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큰 고통과 슬픔은 우리 모두 예외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가진 것, 이룬 것,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결속시킨다.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통영 어느 공원에 떨어져 나뒹구는 동백꽃은 나와 연결된 수많은 죽음, 아버지와 아버님, 엄마와 김복동, 김학순 할머님, 4월 진도 앞바다의 아이들, 제주도의 이름은 모르지만 하나하나 특별하고 고유한 죽음에 연결시켰다. 슬프지만 슬픔 속에 깊은 연결이 어떤 말로도 만져지지 않았던 마음을 만져주었다. 

 

집으로 올라오기 직전 한산도를 바라보며 바닷가 벤치에 앉았다. 한결 기운이 났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아름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고마웠다. 동백꽃이 공감해준 덕이다. 집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 "여보, 나는 우리집 거실과 안방 침대가 무서워. 거기서 견뎌야 할 시간이 두려워. 그럼에도 거기서 견뎌야 할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 피할 수 없다는 것,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렇게 말하니 다시 마음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이젠 자꾸 밖으로 나와. 이제 다른 시간도 필요해." 절대시간은 남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침 앞산에 연둣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다가오는 생명의 기운이 위협적이지 않고, 고맙고, 아름답다. 6시, 클래식 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간, '데니 보이'가 흘러나왔고 오랜만에 음악에 귀가 열렸다. 넘어가는 해가 남긴 한 조각 아쉬움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생명의 기운을 수줍게 머금은 나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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