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맞아! 그게 정말 의외지? 엄마는 호기심도 많고, 성격이 막 외향적이라서 와아아아~ 이렇잖아. 새로운 걸 막 해보고 모험적일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안 그럴 것 같은 아빠가 보면 새로운 걸 막 해보려 하고, 안 해본 걸 겁 없이 하고 그래. 보기하고 쫌 달라.

 

'엄마 아빠의 모든 것을 논평하기' 놀이에 취미를 붙인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인정, 완전 인정! 안 먹어본 것 먹기, 안 가본 길 가기(어, 이건 좋아하긴 하는데!), 신문물 받아들이기... 에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로운 것 앞에는 주춤하며 심지어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다 딱 한 번만 해보면 '다 안다'는 식으로 팽창되곤 하니, 경박한 것도 병이다.

 

코로나 19로 약속된 3, 4, 5월 약속된 모든 강의는 취소되었다. 간간이 zoom으로 진행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일언지하!는 아니지만 여러 말로 모두 거절했다. 대면 강의도 대규모보다 적은 인원을 좋아하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얘기 나눌 수 있으면 더 좋다. 강의인 듯 편하디 편한 수다인 듯 집단상담 같은 만남이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몸과 몸으로 만나는 강의에 눈빛 대화가 가능한 거리면 딱이지, 싶고. 하물며 모니터를 보고 강의를 한다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렇듯 여러 말로 거절했지만, zoom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최대한 엉덩이 뒤로 빼고 한 걸음 물러나고 물러나고 했지만 피하기 어려운 요청에 굴복하여 새물결을 맞았다. 한때 부산, 제주도에도 강의하러 간 적이 있는데 요즘은 몸이 안따라줘서 2시간 이상 걸리는 곳은 엄두도 잘 못 낸다. 한데 zoom을 타고 뉴욕에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지난 월요일, 뉴욕우리교회 교우들과 온라인 강의로 만났다. 아닌 게 아니라 수강자들과 눈 맞춤할 수 없는 환경이 치명적이었다. 

 

농담이었지만 약간 진담이기도 했..... "제가 강의 정말 강의를 잘하는데, 모니터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실력 발휘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시작하며 한 말을 남편이 방에 숨어서 듣고는 하루 종일 성대모사로 놀렸다. "제가요오, 강의를 정말 정말 잘하는데...... 우와, 자기 입으로 강의를 잘한대. 큭큭큭" 안 그래도 민망하여 이불 킥을 수도 없이 할 판이었는데, 남편 엉덩이를 이단앞차기로 차줄까 싶었다. 

 

강의를 잘하고 못하고, 다 지난 일 어쩌겠냐만. 계획이란 계획이 다 틀어지고만 코로나19 정국 덕에 지구 반대편 형제자매들과 연결된 것은 낯설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 아닌데, 단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 어렵고도 쉬운 한 걸음을 떼 봤다.  

 


요즘은 무슨 얘길 하다가도 결국 글쓰기 얘기다. 이번 주말 방송되는 CBS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오늘 있었던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도 기승전...... 글쓰기!였다. 코로나 블루 얘길 하다가 글쓰기, 육아 얘기 하다 글쓰기. 이렇게 되고 있다. 보통은 책 출간 즈음에 방송에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는데, 어쩐지 맥락 없는 자리가 자꾸 생기는 중이다. 그 자리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글쓰기' 예찬이라니!

 

정말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긴 시간 준비한 강의보다 짧게 글쓰는 시간으로 모두들 배우는 바가 크다. 지도자 양성은 역시 글쓰기다! 자랑 삼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옮겨 걸어놓지 않을 수 없지!

 

자기 이해를 위한 글쓰기, 치유와 성장을 위한 쓰기의 힘.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며 배움입니다.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에서 매주 글을 씁니다. 함께 쓰고, 집에 돌아가 혼자 쓰고, 혼자 쓴 자기 성찰의 글을 다시 공유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쓰기 시작하면 변화가 생깁니다. 쓰는 행위가 홀로 하는 것 같지만, 함께 쓰고 그것을 나눔으로 유익은 극대화 됩니다.

예를 들면 어제는 ‘내 인생 나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항변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짧은 시간 손이 가는대로 씁니다. 글은 각 사람을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놀라고 새롭게 배웁니다. 아마 이 주제로 혼자 썼다면 자기 감정에 함몰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공간에서 쓴다는 것, 그리고 쓰는 이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느낌은 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를 받아주는 공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로 약속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지요.

일단 주제의 첫 번째 목표는 공간과 사람에 힘입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였습니다. 각자 쓴 내용은 늘 자기 안에서 꽝꽝 울리지만 언어화 되지 못한 아우성일지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겠지요. ‘누군가’ 나의 편이 되어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변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 겁니다. 쓰는 행위는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내 편이 되어 자기를 변호해주는 것이지요. 실은 이게 먼저죠! 내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최고의 변호사는 나니까요.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봅니다.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은 나, 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아마 내가 되고 싶은 나, 에니어그램으로 말하면 '자아 이미지'일 것입니다. 자아 이미지에 집착하여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에 됩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오릅니다. 손이 가는대로 써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거기에 덧붙여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제가 글쓰기 주제를 내주며 의도한 바는 이 지점이었습니다.)

사람이 글을 쓰고, 글이 사람을 이끌고, 사람들이 글을 빙자하여 자신을 내놓고, 그들이 다시 쓰고... 글은 또 어두운 자아의 숲을 헤쳐 새로운 길을 내고... 끝나지 않을 이 연결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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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의식에는 노래 주머니가 있다. 온갖 노래가 다 들어있고, 스치듯 지나는 자극에 툭툭 튀어나온다. 아이들 어릴 적엔 함께 하는 일상이 노래였다. 길 가다 민들레를 보면 바로 재생 버튼.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18개월 우리 채윤이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우리 채윤이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놀이터에서 시소에 앉으면 "시소 시소 올라가면 푸른 하늘 내려오면 꽃동산 재미나는 시소" 언제 어디서든 노래가 튀어나왔다. 단어 하나, 스치는 장면 하나가 노래를 불러낸다. 직접 자극이 아니어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찬송가도, 가요도, 팝송도, 가곡도 장르 불문으로 흘러나온다. 지금은 기능이 저하되긴 했지만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를 4절까지 외울 수 있고, 다른 장르의 노래 가사 암기력도 이에 준한다. 음악 치료사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운명이다.

 

남편과 양평 치유의 숲을 걸었다. 야생의 산길이었다. 숲은 곳곳이 노래 재생 버튼이 숨겨진 곳이다. 이제 내려가자 하고, 방향을 돌려 나오는데 갑자기 바짓가랑이 붙잡는 흰색 꽃 한 무더기. 찔레꽃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꽃밭이 있었다. 가장 안쪽에 가장 큰 꽃나무가 담 쪽으로 기울어져 서있었는데 찔레꽃이었다. 장미, 나리꽃, 붓꽃, 작약, 백일홍, 샐비어, 달리아,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했다. 아침이면 아버지가 수돗물에 호스를 꽂아 꽃밭에 물을 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어쩐지 그 꽃밭은 아버지 것 같았다. 한데 유일하게 찔레꽃은 엄마 소유로 기억이 된다. 나무가 커서 꽃을 많이 피웠는데, 꽃이 만개하면 가시 많은 그 찔레꽃을 꺾어 교회 강대상 옆에 꽂아놓곤 했다. 손재주가 없는 엄마가, 어떻게 어떻게 화병에 꽂아놓은 품새가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꽃꽂이와 엄마는 도대체 어울리는 조합도 아니다. 그래서 더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찔레꽃은 엄마다. 

 

찔레꽃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재생 버튼이 눌렸다. 실은 엄마 돌아가시고 내내 뱃속에서 울리고 있는 노래다. 아니다. 입원 후 엄마로부터 격리된(그렇다, 이제 생각하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우리 엄마에게서 격리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는 자나 깨나 그리움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었다. 장례식 후 음원 사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른 모든 가수를 검색해서 들었다.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 내겐 더 익숙한 노래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부르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을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잠 안오는 밤
기러기 울음 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어린 마음에 가사가 절절하게 와 닿았었다. 사실 난 분리불안이 있어서 엄마가 떼놓고 어디 가질 못했었는데. 장날 장 보러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고, 엄마는 오지 말라고 쫓고, 울며 따라가다 또 혼나고. 그랬던 기억이다. 늘 그리웠다. 사실 난 엄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릴 적에도 그리 생각했었는데. 엄마 몸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랬었다. 그러니 초등 저학년 때부터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세'는 마음에 백 번 공감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는데, 좋아하던 노래들이 꼭 다 저랬다. 초등학교 때 매년 학교 대항 예술제가 열렸다. 노래, 무용, 외에도 여러 분야가 있었다. 학교 대표로 군 교육청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도 교육청 대항에 나가고, 거기서도 입상하면 예술제를 무대에 서게 되었다. 3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로 독창 부분에 출전하곤 했다. 지정곡 한 곡, 자유곡 한 곡을 불렀다. 5학년 때 자유곡이 '은행잎'이다. 독창 지도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 대회 준비를 하며 자유곡을 고르느라 이 곡 저 곡을 부르는 중이었다. 몇 곡을 부르다 이 노래 '은행잎'을 부르고 났더니 그러셨다. "야, 너는 참 애가 무슨.... 이런 노래를 이런 감성으로 부르냐. 너 참 감수성이..." 그때 감수성이란 말을 처음 배웠다.

 

은행잎

가을 바람 솔솔솔 불어오더니
은행 잎은 한 잎 두 잎 물들어져요
지난봄에 언니가 서울 가시며
은행잎이 물들면은 오신다더니 

 

어쩐지 이런 노래들이 좋고 잘 불러졌다. 부재, 상실, 그리움이 담긴 가사들이 어린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은행잎'을 불러 입상을 하고 6학년이 되었다. 다시 예술제를 준비할 때가 되었을 때 자유곡 선정을 위해 여러 곡 불러보지도 않았다. 내 노래로 한 곡을 정해서 가져오셨다. '아빠 생각'이었다. 잘 불렀고, 입상을 하고 다시 예술제 무대에 섰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유곡 선정을 잘못해서, 내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가끔은 시차의 기억에 오류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일이 먼저고, 그 때문에 이 노래를 선택했던 거지!' 6학년 대회 이후로, 다음 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이 노래 역시 늘 깔린 내 마음의 BGM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가 다시 그리워 아프다. 가슴이 쓰리다.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던 어린 날의 내가 가엾어 가슴이 쓰리다.    

 

아빠 생각

봄이 오니 제비도 돌아왔건만
멀리 떠난 우리 아빠 언제나 오시나
기적소리가 울릴 때면 설레이는 이 마음
아아 우리 아빠 보고픈 우리 아빠

 

내가 사랑하던 모든 노래가 이렇듯 운명을 끌고온 것일까. 어쩌자고 나는 어릴 적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엄마 떠난 지 70여 일이 지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엄마가. 결국 나는 이렇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았구나. 엄마가 보고 싶다. 양평 숲에서 본 그 찔레꽃을 한 잎 따먹고 올 걸 그랬나. 꽃잎에서 엄마의 맛이 났을까. 엄마, 이렇게 말고  "엄마 엄마" 꼭 두 번을 부르고 싶다. 늘 마음에 울리는 저 노래 탓인가 보다. "엄마 엄마" 불러도, "엄마 엄마" 두 번을 다시 불러 네 번을 불러도 "와이야~" 하는 답이 없다. 엄마 엄마, 부를 때마다 휑하고 부는 찬바람에 마음만 아득해질 뿐이다.

 

 

 

희끗한 머리칼, 흐릿한 시력, 흐물흐물한 살.

거스를 수 없는 늙은 몸의 신호, 3종 세트다.

흐물흐물한 살들이 복부에 모이고, 두둑해진 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먹어도 살은 찔 것 같지 않았던 남편의 배가 두둑해졌다.

"탄수화물 먹지 말래. 나 이제 저녁 안 먹을 거야. 닭가슴살 먹을 거야."

그 답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어떤 욕구보다 식욕이 낫았었는데, 

절제하려 하면 이상하게 더 치솟는 것이 우리의 욕구다.

"아, 여보. 어떡해. 이것밖에 안 남았어. 밥이 자꾸 없어져. 맛있는데 너무 빨리 없어져."

 

금요일인데, 저녁으로 닭가슴살 하나를 먹겠다고 한다.

그러고 기도회 다녀오면 분명 또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고민에 빠질 것이다.

"현승아, 라면 먹을까?"

여드름 때문에 인스턴트 끊겠다는 아이까지 끌어들여 라면을 끓일지 모른다.

 

닭가슴살 대신 떡볶이를 먹기로 했는데.

떡은 딱 한 주먹 넣었고, 

양배추, 마늘쫑,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파를 산더미 같이 넣었다.

저탄수화물 떡볶이라고 하자. 

떡볶이라기보다는 족보가 야채 볶음 쪽인 것 같지만.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다.

 

등교날이라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떡볶이 재료를 보고 기겁을 했다.

"와, 이걸 다 넣었다고? 최악이다. 최악의 떡볶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더 늙어서 이까지 못 쓰게 되면 떡볶이 죽을 개발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떡볶이를 참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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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J 2020.05.26 10:57

    사모님표 떡볶이는 늘 다양한 변신을!
    근데 매번 맛있어 보이기 있기, 없기요!! ㅋㅋㅋ

  2. SJ 2020.05.26 11:02

    즐겨 쓰시던 '음식'에 대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는게.. 한결 안심이 되고.. 그렇습니다... 대충 이렇게 얘기해도 제 맘 아시죠?

    • BlogIcon larinari 2020.05.26 21:14 신고

      안심된다는 말, 딱 와닿죠!
      특히 '한결' 안심되니까! ^^
      이젠 총각이 된 한결이 볼 날이 머지 않았으니, 한결이 가족 만날 생각이 기쁨 한 조각이에요.

연구소에서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세월을, 허튼 꿈이라 조롱하는 목소리를, 양 옆에 책의 성을 쌓고 읽고 또 읽던 외로움 밤을, 두려움으로 문을 닫아걸고는 아무 말을 쓰고 또 써 쌓인 노트들을 당신은 모른다. 2008년,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의 수강자가 되어 낯설 길에 들어섰던 날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얼마나 먼 길을 걸어온 것인가. 마흔 되기 전부터 시작된 영적 방황이었다. 나를 잃고 신앙을 잃었으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신앙을 찾아야 다시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전의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았다.

 

에니어그램, 가톨릭 영성의 길로 맘 먹고 들어선 2008년 지도자 과정이었다. 과정을 마치고 연구소 식구로 초대받았을 때의 기쁨도 당신은 모른다. 강의를 하지만 모두 자원봉사다, 라 해도. 돈도 명예도 무엇보다 따스한 받아들임조차 없는 곳에 뛸 듯 기쁘게 투신했다. 오직 배움 때문이었다. 충분히 쌓인 음악치료사의 경력과 학위, 개신교 안에서 이미 알려진 프로필도 아무것도 아닌 곳인데, 그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황송하기만 했다.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곳에 가서 강의를 듣고, 연구원들과 뒤풀이 하며 내적 여정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길을 잃었고, 나도 잃었고, 신앙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오래된 새로운 길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길이, 그러나 딱 봐도 내가 가고자 했던 거기로 이어질 길이 있었다. 그 생소한 문화, 생각보다 언어가 너무나 달랐던 그곳에서 반만 알아듣는 바보처럼 앉아 있었다. 모든 걸 적고, 모든 걸 기억하고, 집에 오면 복습하고, 책을 찾아 읽고 기록했다. 갑작스레 연구소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함께 마음을 나누던 선생님들은 "너는 버려진 거야. 인정해"라고 했지만, 정말 바보 같게도 함께 한 시간을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여전히 감사했다. 상실감은 너무나 커서 며칠 몸이 아팠고, 연애하다 헤어진 것처럼 마음에 찬바람이 많이 불었다.

 

홀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 내 마음을 알아들어 주는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이 슬플 뿐이었다. 그때부턴 혼자였다. 혼자, 그 누구도 모를 가톨릭 영성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기도하고 그랬다. 책이 책을 안내하고, 또 다른 책이 안내한 절판된 책을 찾아 중고서점을 헤맸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긴 시간을 보냈다. 에니어그램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냈다. 친구를 만났다. 믿어주고 도와주는 영혼의 벗들과 손을 잡고 우리 집 거실에서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시작했다. 욕심 없이 나처럼 목마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만났다. 왔다 떠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한 번 왔다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다음 단계 여정을 열고, 또 그다음 단계 강의를 준비했다. 내가 준비되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나처럼, 꼭 나처럼 목마른 사람들은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세미나 전 과정을 듣고, 다른 집단 여정에서 만나고, 소식이 끊어졌다가도 또 이어지고.

 

2018년 12월, 기적처럼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가 생겨났다. 믿기 어려울 만큼 준비된 네 사람이 내 곁에 든든하게 서 있다. 역시 목말랐던 사람들, 얼마나 목말랐으면 이렇듯 계산 없이 자기를 던져 이 샘의 물을 사겠는가. 연구원 네 사람이 없다면 지도자 과정을 개설하는 오랜 꿈이 마침내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내게 없는 것들을 기가 막히게 가진, 가진 것을 사심 없이 내놓는 사람들과 이 어려운 걸 해냈다. 공간이 작아 더 많은 사람을 뽑을 수도 없다. 지도자 과정 1기 6명이 우리에게 왔다. 얼마나 목말랐으면, 얼마나 자기를 찾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찾고 싶었으면 이 구석진 곳까지 왔다. 

 

나를 잃고, 신앙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빛이 왔다. 구원의 빛이 왔다.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왔고, 어두운 밝음으로 왔다. 쓰디쓴 달콤함으로 왔다. 자랑거리를 내려놓는 지점에서 왔고, 내가 쌓았던 착한 행실과 헌신과 섬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왔다. 내가 기나긴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른 것처럼, 자기 아픔과 그림자를 만나며 고립의 시간을 통과했던 사람들이 오늘 지도자 과정에 온 것이다. 미루어 짐작은 되지만 결코 안다 말할 수 없는 자기의 시간을 통과해서 왔다. 에니어그램 나부랭이에 빠져서 내면이나 파고 있는 게 무슨 도움이 되냐는 조롱의 소리를 거스르고 왔다. 착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똑똑해 보이는 포장지를 벗어야 환영받을 수 있는 곳임을 알면서 왔다. 

 

2008년, 지도자 과정 수강자로 앉아 뛰던 가슴을 기억한다. 정호승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한다. 내가 연구원 넷, 지도자 과정 1기 여섯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 오늘 남모를 떨림과 고마움을 사랑하는 이유는 시인의 말과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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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J 2020.05.26 11:06

    글과 상관없이.. 더 야위어진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가고, 마음이 가요... 머지않은 시간에 뵈러 갈게요.

    • BlogIcon larinari 2020.05.26 21:17 신고

      남은 시간 잘 마무리 하고,
      마지막 추억 쌓고 오셔서 기쁘게 만나요 ❤

부모 없는 아이는 고아, '부모 없는 아이'라는 자기 인식은 고아 의식이다. 이승우 작가의 말을 다시 빌자면, 고아 의식은 남과 다르다는 의식이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것이다. 즉, 고아 의식을 가진 아이는 고아가 아닌 척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내적 여정으로 마음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확신하는 바, 사람의 지나친 노력은 모두 고아 의식에 기인한다. 온전히 믿을만한 아버지와 엄마가 있다면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로, 자기 자신이 되어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다. 있는 그대로 사랑 받음을 기대하고 세상이 태어났는데, 그 기대는 생애 초기부터 어긋난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먹여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보듬어주는 부모는 없다. (라고 아이는 인식한다) 뭐라도 해야, 생존 욕구든 안전 욕구든 심지어 애정 욕구도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아 의식'이란 단지 부모 없음이 아니라 부모 없는 아이처럼 온전히 돌봄받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결핍감이다. 물리적으론 살아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부재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뼈를 깎아서 해 준 사랑을 셈하는 부모가 있다면, "아빠(엄마)가 준 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억압이었어요. 아빠가 주고 싶은 걸 준 거잖아요. 엄마가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요. 내가 원했던 건 그게 아니라고요." 하며 울부짖는 아이가 있으니. 부모가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부재하는 부모의 존재가 상실의 시작이다. 돈, 일, 애정, 인정과 칭찬, 분노, 지식, 종교 등 어떤 것에든 중독되어 있는 미성숙한 존재라면, 진정한 의미의 어른으로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면 그의 자녀는 실존적 고아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실존적 고아이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지킬 힘을 키우려 할 것이다. 내 동생에게 자기를 지키는 힘은 그야말로 물리적인 힘. 그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동생보다 싸움(맞다, 주먹으로 치는 그 싸움이다)을 잘 하고 센 인간은 없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사춘기 시절부터 키가 쑥쑥 크고 어깨가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아버지처럼 기골이 장대해졌다. 강한 아이가 되었다. 싸워서 이기고, 동네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로 이름을 날리고, 소위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

 

아버지 없는 모든 아들이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빈 자리』라는 쓴 도널드 밀러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은 내 동생과 달랐다. 아버지를 대신할 권위자, 권위자의 인정과 칭찬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만난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빈자리라는 고백으로 쓴 책이다.

 

동생은 스스로 제 힘을 키웠다. 싸우고 이기고, 그 끝은 합의를 봐야 하고. 엄마와 함께(누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어린 엄마가 되어) 뒷수습을 했다. 경찰서에도 갔고, 합의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어쩐지 그리 힘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비행 청소년이란 느낌보다 그냥 죽이 잘 맞는, 밤늦도록 끝도 없이 얘기를 나누는 동생일 뿐이었다.  

 

비행 청소년이고 사고뭉치였지만, 역설적으로 엄마와 내겐 든든한 힘이 되기도 했다. 늙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해도 주지 못한 안전을 동생이 보장해 주었다. 동네 골목에서 추행을 당해도 얼른 집에 있는 동생 불러내면 그 자리에서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다. 집 앞에 와 진을 치고 밤새 기다리는 등, 스토킹 하던 동기 남자애를 정리해준 전설 같은 에피소드도 있다. 그렇게 줄줄이 딸려 나오는 해결사 역할 동생에 관한 기억이 많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생은 내게나 친척들에게, 제 친구들에게 해결사이다. 불의의 냄새를 맡는 잘 발달된 육감과 몸을 아끼지 않는 싸움꾼 기질을 결국 교회 개혁을 위해 불태웠으니, 엄마 말로 하면 '이게 다 주님의 은혜'다. 

 

모르지 않았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늙은 엄마와 약한 누나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은 힘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음을. 그렇게 만들어진 동생의 사회적 자아의 빛과 그림자까지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 동생이 세 아들의 아빠가 되고, 아이들과 관계 맺는 것을 지켜보며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모르는 아픔이구나! 같은 아버지, 같은 엄마였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취약한 엄마를 경험하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구나. 동생의 고아 의식이 '힘'으로 보상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았고, 마음 공부를 한 이후에는 명확히 이름 붙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안타깝고 가엾어서 마음을 많이 쏟았지만 닿을 수 없는 고유한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동생이 SNS에 올린 글이다. 

시민운동에 온 시간과 마음을 쏟던 시절, 어린 아내와 아기였던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일을 접고 재택 해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아빠 노릇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몸으로 놀아줬고 아내 대신 훈육을 담당했다. 큰아들 수현이가 학교에서 '우리 아빠 마음은요'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충격이 되고 마음이 아팠다. 유독 내 자식에게만 엄격한 나를 반성하던 차에 애들 학교 <아빠 사랑 캠프>에서 아들에게 읽어 줄 편지를 쓰라고 했다. 쓰면서, 낭독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수현이 뿐 아니라, 어린 시절 운형이에게도 읽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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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아~
아빠가 왜 수현이를 샬롬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름, 그러니까 태명이 바로 ‘샬롬’이야. 샬롬은 헤브라이어로 ‘평화’라는 뜻인데,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랑 같은 단어야. 아빠가 수현이 태명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네가 솔로몬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야. 그 이름 뜻대로 네 인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랐던 거지.

그런데 얼마 전에 아빠가 네 행복을 깨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 몇 주 전 수현이가 학교에서 활동한 ‘우리 가족의 마음 표현하기’를 봤단다. 아빠를 동물로 비유한다면? ‘사자’, 날씨로 표현하면? ‘태풍’, 맛으로 표현하다면? ‘맵다’. 모두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더라. 그날 밤, 수현이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혼이 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더라.

샬롬아! 미안하다. 아빠가 혼을 내면서 너무 심하게 화를 내는 건 잘못 한 것 같다. 아빠 본심은 그게 아닌데, 그저 우리 수현이를 바르게 키우려고 그런 건데 너에게 상처를 준 것 같구나. 아빠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고 좋은 아저씨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정작 아들인 너에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생각이 든단다.

한편으로는 네가 쓴 걸 보고 안심이 되기도 하더라. 아빠가 무섭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원래는 착해서 진달래’ 같고, 너희들을 ‘사랑해서 빨간색’ 같다는 내용을 보고, ‘아 그래도 우리 아들이 아빠 마음을 알아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빠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아니? 아빠가 초등학교 4학년, 지금 네 나이 때였단다. 그때는 아버지가 없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었지.

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에도 바쁘셔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신 적이 없단다. 여행을 갔던 추억도, 운동을 했던 적도 없어.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온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안 계셨지. 수염이 자라고 나서 면도하는 법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어.

샬롬이가 태어나던 날, 왜 그런지 모르지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아 수건 한 장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단다.(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아빠는 그때 다짐했지. 우리 살롬이에게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목욕탕도 함께 가고,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같이 좋아해 주고, 면도하는 법도 알려 줄 거라고 말이야.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가? 윗집에 살던 아저씨가 술에 취해 우리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어. 그때 아빠는 무서워서 이불 속에 숨어 자는 척하고 있었단다. 그 이후로 ‘내 가족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결국 아빠는 이렇게 강한 사람이 되었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빠가 함께 해 주고 방패가 되어 줄게.

앞으로는 힘이 세고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사랑해.

2015년 11월 7일.
수현이의 샬롬과 행복을 바라는 아빠가.

 

조카들은 어느덧 사춘기에 진입했다.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고자 하는 결심은 아빠의 것이다. 아이들은 제게 느껴지는대로 느낀다. 게다가 사춘기이니 부모가 준 것보다 주지 않은 것에, 부모의 미덕보다 온갖 악덕만 보는 때이다. 힘이 세고 강해서 사자 같고 태풍 같은 아빠의 든든함이 아니라 그 이면을 느낄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기로 결심한 아빠의 서사을 이해할 수 없다. 아빠가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죽음의 강이 덮쳐 기댈 언덕, 아니 발 디디던 지반이 그대로 무너져 없어지는 아침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도 넥타이를 붙들고 쩔쩔 매면서 첫 양복 입는 그런 아침도 없을 것이다. 대신 태풍 같은 아빠의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기억할 것이다. 결핍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고아 의식은 대물림 된다. 

 

동생과 조카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우리 아이들과의 이야기이다. 고아인 채로, 또는 고아 의식을 가지고 부모가 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이제 진짜 고아가 됐네"라는 말이 몇 번 나왔다. 동생과 대화에서도 했던 것 같다. 아직 고아이다. 아직? 아직이라니. 여전히 고아이다. 이렇듯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내 안에서 아버지 잃은 아이가 우는 날이 있다. 가끔 생떼를 쓴다. 그러면 나는 고아인 그 아이의 울음에 압도되어 어른으로 있지 못한다. 내 아이와 동급이 되어 싸우고 상처를 준다. 어른이 되지 못한 엄마 앞에서 우리 아이들은 고아가 된다. 동생의 말처럼 따스한 말을 우리 딸, 아들에게 건네야 하며 어린 시절 나에게 건네야 한다. 동생은 제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제게 약함을 허락해야 한다. 

 

고아라 부르고, 고아 의식에 이름 붙일 일이다. 이제 진짜 고아가 되었다. 

 

 

 

 

 

 

 

 

남편 JP와는 많은 점이 다르고,

그 이상으로 비슷해서 쿵작이 잘 맞는다 싶지만,

JP&SS 부부의 세계, 해가 거듭될수록 같은 점은 뭐고 다른 점은 또 뭐지,

싶은 것이다.

 

다만 요즘 '우리 부부의 세계]에서는 함께 걷는 것과 나무와 풀을 향한 애정에서 100% 일치이다. 

 

JP 생일을 하루 지낸 월요일,

생일에 못 먹은 미역국을 전문점에 가서 고급스럽게 먹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차에 탔는데,

늘 그렇듯 졸음이 쏟아지더라.

 

차만 타면 그렇게 잠이 온다.

결혼 생활 21년, 남편과 차 타고 움직인 시간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중 1/3의 시간을 조수석에 앉아 꿀잠 자며 보냈다.

 

막 떠들다 갑자기 잠들고,

아픈 엄마 보고 오며 엉엉 울다 갑자기 잠들고,

심지어 엄마 장례식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꺼이꺼이 울다 갑자기 곯아 떨어졌다고,

아이들이 놀린다.

 

꿀잠 자고 일어나니 '신구대학교 식물원' 주차장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계획이었는데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주 많은 풀꽃 친구들을 만나고, 키가 큰 나무 아래를 걷는 기쁨!

 

 

 

 

풀도 보고, 나무도 보고, 뱀까지 보고.

충분히 보고 걸었을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식물원 카페에 앉아 장대비 내리는 화원을 바라보는 기쁨.

빗소리 들으며 책 읽는 기쁨.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공들여 가꾸던 마당 꽃밭이 있었다.

계절 따라 피던 꽃들, 익숙하여 정겨운 꽃들이 있다.

아버지의 화원을 떠올리게 하는 작약이며 붓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 받으며 꽃밭에 물 주던 아버지를 떠올리는 기쁨, 또는 그리움.

 

 

 

 

 

결혼기념일 일주일 후가 어버이날이다. 결혼하고 맞은 첫 어버이날에 양가 부모님께 선물 대신 현금 봉투를 드렸다. 엄마는 "니가 돈이 어딨다고!" 하며 봉투를 되돌려주었다. 이후로도 어버이날이든 생신이든 "됐다, 필요한 것 없다." 하곤 했다. 넙죽 받아 누리지 못하는 엄마가 싫고, 늘 마음이 아팠다. 밖에서 식사하자고 약속해 놓고 모시러 가면 어느새 밥을 차려놓고는 "그냥 집이서 먹자."며 기운을 뺐다. 어떤 특별한 '날'들이 점점 더 아무렇지 않은 날이 되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그렇게 되었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챙겨드리면 고마워하시고, 그렇지 않아도 무신경하셨다. 그러니 어버이날이 왔다고 해서 더 슬프거나 그리울 일은 아니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어버이날이라 힘들겠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글쎄, 그다지......" 하고 말았다.

 

어버이날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선물을 챙기는 지인들을 보며 야릇해졌다. 마음 밑바닥에서 출렁거리는 슬픔은 여전하다. 어버이날이라고 더한 것은 아니다.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계실 때도 어버이날과 아닌 날의 차이는 없었으니까. 어버이날에 부모님과 맛난 음식 먹으러 가는 친구가 부러운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도 카네이션 달아줄 엄마가 있으면 좋겠네." 이런 생각까지 나가지도 않는다. 슬픔의 강물이 더 출렁거리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작은 일렁임조차 멈춰버리는 듯, 덤덤하고 고요하다. 다만 야릇하다. "그날은 부모님 식사하기로 한 날이라 안 되겠는데요." 이 사소한 얘기를 못 들은 척하고 싶은 야릇함이다. 야릇함은 무기력이 되고 무기력이 우울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며칠이었다.

 

주말을 지내고 남편이 엄마가 있는(있다니? 엄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추모공원에 가자고 했다. 어버이날이 의미 없는 것처럼, 엄마가 묻힌 손바닥만 한 공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카 지희가 아이들 데리고 다녀왔다면 전화를 해왔다. 공원 측에서 꽃 가져다 놓지 말라는 말에 그냥 갔는데, 가져다 놓은 사람들이 있더라고.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돌을 주워다 왕할머니 비석 앞에 놓았다고 했다. 어린 증손주들이 찾아가 할머니를 기억하고 왔다니 어쩐지 거기 엄마가 있는 것 같았다. 딱딱하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출렁출렁 다시 슬픔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났다. 비로소 다시 눈물이 났다. 고모, 실감이 나지 않아요, 고모도 그래...... 살아계실 때 더 많이 가볼 걸, 설날에 늦게라도 갈 걸 그랬어요...... 특별하지 않는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울었다. 

 

집에 있던 카네이션 화분에서 한 송이를 잘라내 들고 엄마에게 갔다. 전날 아이들이 가져다 놓은 흰돌과 나뭇가지가 비석 옆에 놓여 있다. 비석과 크기가 딱 맞는 작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나란히 두었다. 비석의 낯선 글자를 읽어본다. 

 

권사 이옥금

1925. 12. 12. 출생 

2020. 03. 11. 소천

 

조카 말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옥금 권사님의 출생과 '소천'이라니. "우리 엄마 어디 갔지? 엄마, 엄마 어딨어?"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불렀을 '엄마', 물었던 질문 '엄마 어디야?'. 어버이날에 선물 받아야 할 엄마가, 빕스에 가서 새우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먹어야 할 엄마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추모공원에서 나와 강화도의 카페로 갔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펼쳐 읽었다. 아내를 잃고 쓴 애도 일기이다. 세계적인 문호도, 사상가도,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중학생도, 50대 그냥 그런 여자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상실을 통과하며 쓰는 글에는 같은 질문이 담긴다. 

 

사람들은 이제 H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평화롭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중략)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 걸까? 기독교 세계에서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고 동방에서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안식'한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다른 건 다 제쳐 두더라도, 남은 사람들을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이별이 떠나는 사람에게는 왜 고통스럽지 않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 품 안에 있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손이 그녀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봐 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단 말인가? (중략) 자, 회피한다고 얻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고통 속에 있으며 이를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해서는 안 되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나의 애도일기를 구독하는 이들,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는 벗들에게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 부모님께 더 따스하게 대하겠다 결심하고, 전화를 한 번 더 한다.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계실 때 잘해야겠다 결심들을 한다. 좋은 생각이다. 내 상실감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얻은 통찰이리라. 우리 엄마의 죽음이 어떤 엄마에게 따뜻한 전화 한 통이 된다. 그 엄마는 '이 딸이 왜 이러지. 이쯤이면 짜증 내며 전화 끊을 때가 됐는데, 어찌 이렇게 가만히 오래오래 얘기를 들어 주지?' 싶을지 모른다. 이 역시 야릇한 느낌으로 온다. 내 엄마의 죽음, 이 어마어마한 상실이 누군가에게 전화 통화 한 번이구나. 묘하게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 결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고소하다. 금세 잊을 것이다. 다시 전처럼 귀찮아하고 짜증도 낼 것이다. "같은 얘기 좀 그만 하라" 타박할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떠난 후에 후회할 것이다. 내가 그러했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처럼.

 

슬픔은 글로 배울 수 없다. 상실과 애도는 몸으로, 물리적인 시간을 통과하며 겪고 배우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 죽음으로 평생 엄마 잃을 날을 예습했지만 소용없는 것이었다. 오롯이 통과해야 하는 시간, 슬픔을 위해 내어 주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뱃속 깊은 곳에 슬픔이 출렁이고 있는데 "아직도냐, 이제 그만 잊어라"는 말을 들을까 자꾸 숨기게 된다. 틀어막게 된다. 흐르게 하지 못하고 댐을 세워 멈추려 하는 나를 본다. 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는 강박이다. 슬픔의 시간은 단축시킬수록 좋다고 누가 강요하고 있는가. 저요! 내가 나를 지겨워한다. 내 글에 질린다. 

 

장례식 후 바로 읽었던 책 『애도 수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명절과 기념일들이 다가올 때마다 비참하다. 어떤 기념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 싫었다. 애도도 정도껏 해야지! 마음에서 마구 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문장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 정도까지 하지는 말자. 명절이나 기념일에 휘둘리지 말자. 결국 엄마 떠난 첫 어버이날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댐을 세우다 어정쩡하게 우울과 무기력의 어버이날을 보내고 말았다. 이조차도 어쩔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니까. 댐을 쌓아 감정을 막았다, 어느 날 수문을 죄 열어 쏟아냈다, 다시 막기도. 나도 모르는 구멍이 생겨 줄줄 새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가 슬픔을 마주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슬픔을 위한 시간을 채우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대로 내 존재의 모양인지 모른다.  

 

 

 

 

  1. BlogIcon pratigya 2020.05.13 15:44 신고

    생뚱맞은 공감...저도 제 글이 질려요...언니...

    • BlogIcon larinari 2020.05.20 21:12 신고

      이런! 글 좋아, 정말 좋은데!
      언니가 가서 댓글로 소통해야 했는데 말이지. =3 =3 =3

 

교회 말씀 묵상을 나누는 밴드에 남편이 올린 글이다.

갈 곳 없는 어버이날에 기억이 감사가 되는 묵상이다.

'어버이 은혜 감사' 너머 '하나님 은혜 감사'로 멀리 높게 바라보게 된다. 

 

<5월 8일 금요일>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김종필)

오늘의 말씀 : 열왕기하 4:1-7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예언자 수련생이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사별과 가난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빚쟁이들이 두 아들을 노예 삼으려 합니다.
이 미망인의 고통과 슬픔의 무게가
갑자기 제게 전이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기름 한 병을 붙드시니,
빚도 갚고 생활비도 되고
아들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지만, 제 상상력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미망인의 남은 인생은 비록 가난과 고난이었지만,
두 아들은 착한 아내를 얻고
신임을 얻어 하나는 포도원 관리 책임자가 되고
하나는 아버지를 따라 예언자 수련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습니다.
미망인의 생은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숨결로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그녀는 많은 새벽을 바치고
모든 상황을 바치고
두 손 위에 올려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미망인이 받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부와 권력은 아니었지만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가난한 두 아들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하나님 품에 안기신 장모님이 생각납니다.
목사였던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고,
딸, 아들 둘 데리고 가난과 고난의 길로 들어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빈자리는 영예로운 믿음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를 생각하다
가난과 고난이 역전되어 은혜와 영예가 된 장모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버이날, 이제는 카네이션을 드리지 못하지만,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려드립니다.

주님, 미망인에게 부어주신 기름 한 병의 은혜와 긍휼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이우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1. BlogIcon pratigya 2020.05.12 17:50 신고

    아멘...
    잔잔하게 깊은 위로를 주시네요...

    • BlogIcon larinari 2020.05.13 09:27 신고

      그러게. 위로가 되더라. 남편의 입을 통해 듣는 엄마, 사위의 가슴에 남은 장모님 이야기에 MSG가 없어서 더 깊이 다가와.

 

 

현승이가 누나를 위해 준비한 저녁 식사.

누나 들어오기 30분 전에

엄마가 제게 차려줘 맛있고 행복하게 먹은 그대로

누나에게 해주겠다고.

 

애는 많이 쓰던데,

 

샐러드드레싱을 막막 깍두기까지 뿌리고, 

밥과 반찬 비율 안 맞고,

 

정성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신경질 나서 막 차린 밥 같기도 하고,

 

누나는 잠깐 감동하고 먹기 시작하자 바로

돈가스 더 구우라 하고,

깍두기 더 꺼내고 그런다.

 

우리 현승이,

(나이는 여덟 살 아니고 열여덟 살)

마음은 참 깊고 따뜻한데,

깊고 따듯한 마음에 손이 '똥손'이라......

그 따스함과 청순함과 깊이를 못 따른다.

 

 

 

 

 

 

  1. BlogIcon pratigya 2020.05.05 19:02 신고

    똥손이어도 괜찮아~~~~
    너무 감동적이예요 ㅡ.ㅜ

    • BlogIcon larinari 2020.05.08 09:47 신고

      pratigya 이모가 어릴 적부터 현승이 마음에 공감을 많이 해줬던 기억 :)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들, 자연의 숲, 스스로 그러한 숲, 숲길을 걷는 기쁨이라니. 

 

 

 

 

 

 

 

숲을 바라보며 눈을 뜨고, 거실 창 너머로 바라보던 숲을 걷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산다. 숲을 아는 분, 나무와 풀을 사랑하는 분들과 4월의 숲을 걸었다. 언어와 예술을 요란하지 않게 요리하는 것이 삶인 일상의 미학 선생님들. 같이 걸으니 늘 보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이름 모를 '너들'에게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아이엠그라운드 나무 풀이름 알기] 놀이가 주는 즐거움. 

 

 

 

 

 

 

 

언어화 하기, 이름 붙이기의 고수인 두 분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목짠님, 몽년님. 가끔은 세 살 채윤이 발음으로 '서쉐숵 목짠님'. 20여 년 가까이 된 오래전에 교회 셀모임인 '가정교회' 호칭이었다. 가정교회는 우리 부부 인생, 교회에 대한 꿈과 사랑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경험인데. 기쁨과 고통, 소망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았다. 사랑하던 교회를 가장 사랑했던 방식이었다. 교회와 소그룹 공동체를 사랑하는 두 분께도 그랬을 것이다. 두 분과 함께 같은 가정교회에 몸담았던 시간을 길지 않았는데, 두 분과의 만남은 가정교회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더 길고 깊은 만남이 되었는데 어쩌자고 아직도 목짠님, 목녀님이다.

 

떠나온 교회가 가정교회에 담았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꿈을 살아가고 있는지, 사람 냄새나는 관계의 생명력으로 풍성한지, 명분과 의무의 짐으로 무겁기만 한 인위적 모인인지, 그 사이 어디쯤을 오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젠 떠나온 교회, 그 교회의 가정교회가 어떻게 흘러가든. 그 정신을 요란하지 않게 이어오고 있는 것은 두 분과 우리 부부가 생각하게 된다. 누구보다 가정교회를 열심히 세웠고, 연구했던 두 목자가 아니었던가. 누구보다 초대교회 정신을 살고 싶었던 두 목자였었다. 목자, 목녀님이란 호칭이 참으로 부적절하다 느껴지지만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것 아닌가 싶기도.    

 

 

 

 

 

 

 

몇 달에 한 번씩 두 분을 만나고 오는 길 기분 좋은 남편이 늘 같은 말을 한다. 정신실, 두분만 만나면 편하게 하고 싶은 말 다하는 것 같아. 정신실스럽다고. 마음 편히 웃고, 할 말 못 할 말 다 하더라고. 가정교회를 하며 제일 좋았던 것, 동시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투명한 나눔이었다. 적어도 두 분은 내게 잘 들어주는 분이다. 갈수록 더 '들어주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나와 남편에게 대나무 숲이 되어주시는 것 같다.

 

숲, 주님의 숲.

 

청년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가정교회에서 뭉클하게 불렀던 노래다. 아프고 힘든 청년들의 숲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 떡볶이와 커피가 있는 우리집 거실이 그들의 숲이 될 수 있다면 싶었었다.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찾아온 푸르른 저 숲속에
평온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당신이 지나온 거리는 언제나 낯설게 느껴
그 어디에도 평화없네 참 평화 없네 그렇지만 당신의 앞에 펼쳐 주님의 숲에 
지친 당신이 찾아온다면 숲은 두 팔을 벌려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당신의 지친 어깨가 이젠 쉬도록 편히 쉬도록
여기 주님의 숲에

 

4월 연초록의 숲에서 두 분이 우리에게 주님의 숲이 되어주셨다. 누군가의 숲이 되어준지도, 누군가의 숲에 들어가 쉬어본 지도 오래다. 따스한 공동체, 숲, 주님의 숲.

 

 

 

 

 

 

두 분 댁에 다녀오면 신메뉴를 배워오기 때문에 아이들이 좋아한다. 새로운 식재료를 소개하고 나눠주시기도 한다. 포장 근사한 선물이 아니라 넉넉한 식재료를 언제든 나누고 싶은, 나눌 수 있는 언니네 가족 같다. 있어 보이는 케이크가 아니라 내일 아침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스콘이나 식빵을 사 가고 싶은, 사갈 수 있는. 허위의식 없이 오고 가는 나눔들. 

 

두 분이 내주시는 식탁을 좋은 것은, 두 분을 좋아하는 이유와도 닿는다. 허세 없고, 규모 있고, 품위 있음이다. 책과 문화와 여행을 규모 있게 누리는 일상을 진심 배우고 싶다. 숲에서 내려와 집에서 티타임을 하는데 현승이가 라오스에서 사 온 컵받침을 예뻐라 하시더니 돌아가셔서 바로 저걸 만드셨다. 원작보다 더 예쁘다. 내게 없는 감각과 손재주라 더 멋져 보인다. 저 연배쯤 될 때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싶은 선배가 있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

 

말의 이면을 헤아리지 않고 그러한 그대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이렇게 좋구나. 자연을 닮은, 4월의 숲을 닮은 만남이 슬픔 가득한 봄날에 큰 위로가 되었다.      

 

 

 

  1. mary 2020.05.09 14:28

    어머나.. 부끄럽사옵니다..
    마음은 오고가는 것이니 서로가 공히 누리고 있는 것이쥬^^
    그 애증의 가정교회가 크게 일조한거 같기도 하네 ㅎㅎ
    각자의 공간에 나눈 그 날의 숲이야기도 재미지고. 가을을 기다리며

    • BlogIcon larinari 2020.05.13 09:25 신고

      더 오글거리게 써서 더 민망하게 해드릴 수도 있었는데 참았습니다. ㅎㅎㅎ
      문득 그 애증의 가정교회를 또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어요. 이날 정말 좋았나봐요. 어쩌면 각자 다들 한 포스팅 씩 하시고! ^^

탁월한 예술가 가운데 고아가 많다고 한다. 보를레르, 카뮈, 사르트르, 도스토예프스키, 단테, 볼테르, 스탕달……. 창조성의 기원이 결핍과 상처라고 말하는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지지하는 예이다.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많은 작가들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인터뷰나 글을 통해 밝히는 작가들의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표현이 다를 뿐 '결핍감'이다. 이승우 작가는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참고할 때 글쓰기의 기원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프다'라고 밝혔다. 아파서 글을 썼고,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파서' 쓰기 시작한 자신에 비추어 고아 또는 고아 의식과 창조성의 관계를 유추한다.

 

고아 의식

 

이 언표가 나의 어떤 부분에 이름을 주었다. 고아 의식의 내용은 '나는 남과 다르다'인데 이 '다름'은 주장하고 드러낼 수 없는 다름이라는 것이다. 내 말로 하자면 '부끄러운 다름'이기에 숨겨야 하는 것이고, 고아가 아닌 척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도의 작업이다. 이승우 작가는 흉내 내기의 체질화가 창작 능력의 비밀이라고 추정한다. '~척' 하고 흉내를 내다 실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작 능력이 되는 것 아니겠냐고 한다. 이 부분은 어쩐지 비약인 듯싶고, 수긍이 되지 않는다. 소설가로서 지난한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겠으니 내가 모를 창작의 세계이겠지. 분명한 것은 고아 의식,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자의식이 나로 하여금 쓰게 했고, 여전히 쓰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방송 촬영을 하나 했다. 엄마 장례 마치고 바로 써서 보낸 기고문으로 심적 타격을 입은 터라 뭐든 새로운 일을 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었는데. 몇 번 안 되는 방송 출연 중에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프로그램 작가님 추천이라니 안심이 되고, 주제도 진행방식도 부담이 없을 듯하여 수락했다. 방송에 임박하여 작가 인터뷰를 하는데 사이다 없이 고구마를 계속 입에 넣는 느낌이었다. 당일 방송 주제가 분명히 있는데 말을 할수록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답답했다. 게다가 임팩트 있는 간증이나 일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괜히 수락했구나 싶었다. 역시 아직 활동할 때가 아니었는데 싶었고. 취소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 출연자가 여럿이니 내가 망한다고 프로그램이 망하는 건 아니겠지, 며칠 이불킥 할 각오로 비워지지 않는 마음을 비웠다. 대본 없는 토크 방송이니 가서 나오는 말을 하자. 

 

할 수 있는 이야기, 내 이야기를 했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란 주제에 따라 '일기 쓰기' 얘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죽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라는 도덕 한 스푼의 말랑한 주제에 죽음을 얘기하려니 뜬금없는 것 같았다. 작은 실천이라니! '실천'이라면 어떤 도덕적 의지의 발로일 텐데 나의 일기 쓰기 시작엔 어떤 의식이나 의지가 없었다. 의지가 있다면 생존 의지였을까. 아마 간증 프로그램에 나갈 때마다 생기는 내적 버성김은 실존과 실천 그 사이일 것이다. 처절한 실존을 실천의 덕목으로 쉽고 간단하게 언어화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러기 싫음. 그런데 아무튼 눈물 없이 담담하게, 농담도 하면서 일기 쓰기와 치유, 쓰기를 통해 나다워지는 이야기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내놓을 수 있었다.

 

진행자였던 추상미 씨의 이야기가 연결되었다. 뉴스로 본 기억으론 한참 컸을 때가 아닐까 싶었는데, 아버지 추송웅 님을 잃은 때가 열네 살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동일시 하던 딸이라는 면에서 비슷했다. 재난 같은 아버지 상실을 내가 '쓰기'로 채웠다면 자신을 읽었다고. 친구들이 하이틴 로맨스를 읽을 때 <죄와 벌> 같은 인간 실존을 묻는 소설을 읽었다고. 끝없이 읽었다고. 짧은 한두 마디 말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연결이었다. 어쩌면 그도 결핍, 상실감, 고아 의식 때문에 읽고, 또 일고, 고뇌하다 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연기와 작품에는 고아 의식에 기인하는 창의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 

 

고아가 아닌 척 하는 것이 체질화가 되어 결국 실감 나는 창조성 있는 작품을 쓰게 된다는 이승우 작가와의 추론이 어쩐지 내겐 딱 들어맞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척'을 하느냐 무의식적으로 그러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고아가 아닌 척'을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첫 등교하던 날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 어느 날 아침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교실에 들어섰고, 아마도 다른 날보다 더 심하게 장난을 치고 깔깔거렸을 것이다. 장례 며칠 동안 고아 의식이 빠르게, 뚜렷하게 각인된 탓에 고아처럼 보이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고아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밝고, 당차고, 칙칙하지 않게, 가엾어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밤이 와 혼자가 되면 비로소 '고아 의식'이 아니라 '고아'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를 부르는 일이 일기 쓰는 일이었다. 눈물로 일기장을 적시며 썼다. 그래야만 다시 아침이 왔을 때 하나도 슬프지 않은 말짱한 얼굴로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굴지 않을 수 있었다.

 

고아 의식, 고아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살았던 건 아닐까. 아버지가 없어서 부끄러웠고,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들킬까 더 부끄러웠다. 작년 아버지 추도식 마치고 일부러 찾아간 고향에서 그 모든 부끄러움이 나를 만들어 왔다는 것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아무리 '척'을 해도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오지 않고, 다시 아버지 있는 사랑받는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썼는지 모르겠다.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는 것, 수치심이 나를 이끌어 오늘의 내가 되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피하지 않고, 의식하고, 애쓰고, 애쓰다 분열적이 되고, 더 깊이 상처 받으면서 말이다.

 

연구소 연구원 모임에서 책 한 권을 진하게 읽었다. 자신의 중독을 고백하며 시작하여 중독의 근원인 결핍감을 만나고, 결핍감이 가진 내 고유의 '천재성'에 눈을 뜨고 그 끝에 (역시 내 고유의)'봉인된 명령'이라 이름 하는 소명을 더듬어 보았다. 세 저자 중 한 사람이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에 매여 이런저런 중독(특히 종교중독)의 삶을 살다 치유자로 사는 오늘을 고백하며 말한다.

 

나는 상처 치유에 관한 열 권의 책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그것들은 주로 슬픔, 곧 내가 직접 경험한 많은 치유를 다루고 있다. 내용뿐만 아니라, 글 쓰는 것에 대한 나의 재능도 존(동생)의 죽음에 대한 상처에서 왔다. 나는 내가 아주 불안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썼고, 얼마 되지 않아 쓰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 나는 존의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선물을 발달시켰다.  『치유와 회복의 끈 소속감』 p 200

 

나 역시 그러하다. 아버지의 죽음, 고아 의식을 대면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선물을 발달시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아 의식, 상처를 초월한 '나'는 없다. 초월할 수 없다. 이 땅에 사는 한은 이 고아 의식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고 이것이 '나'이며 나의 소명이고, 내가 발견한 은총의 선물이다. 결핍이지만 은총인 나를 안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다 결국 끝에 다다를 것이다. 그 끝에서 만날 것이다. 고아 의식, 결핍과 상처, 수치심을 모두 씻은 듯 초월한 이들을. 망가진 몸에서 해방된 엄마가, 무너진 정신에서 자유로워진 예원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혼으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예원이가 지난주 갑자기 떠났다. 아직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 않다. 오직 지금 내게 또렷한 것은 호기심과 연민으로 반짝이던 그 눈망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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