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고,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다”

『기독교 강요』 장 칼뱅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자기 지식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에니어그램 1단계를 시작하여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만나는 영성과정까지. 한 달에 하루씩 닷새의 시간 동안 전에 해보지 않은 질문,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특별히 내적 여정 저녁반을 신설했습니다. 기본 1,2단계를 6주간 여정으로 진행합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토요반]

✔ 일시와 신청

기본1단계 : 8월 22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1SQPcu

기본2단계 : 9월 19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1QyrRj

심화1단계 : 10월 24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2ABrdFz

심화2단계 : 11월 21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iBcmfn

영성단계 : 12월 19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2C8cD90

+ 장소 :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인원 : 9명 + 비용 : 12만 원/ 1일
+ 문의 : 010-4235-8020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저녁반]

✔ 신청 : https://bit.ly/3gD30y9

+ 일시 : 9월7일(월) ~ 10월 12일(월) 6주간, 오후 7시 ~ 9시
+ 장소 :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인원 : 9명 + 비용 : 단계별 12만 원/ 3주
+ 문의 : 010-4235-8020

✔ 입금계좌 : 농협 301 - 0240 - 4119 - 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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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은 같은 것을 좋아한다❞

 

2020년 6월 26일 금요일, 연구소 특강으로 신소희 수녀님을 모시고 '의식 성찰' 강의를 들었다. 2008년쯤, 같은 주제의 강의로 수녀님을 처음 뵈었다. 한 시간 남짓 수강자로 앉아서 뵌 것이 유일한 만남이었다. 그때로부터 기다렸다. 수녀님께 직접 배울 기회가 오기를.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존재를 뒤흔드는 강의여서는 아니다. 막연히 '이분은 진짜'라는 느낌이었지만,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른다. 적어도 내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강하게 끌리는 대상은 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드러낸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생각 날때마다 한 번씩 수녀님을 검색했다. 어느 순간 소속된 기관에서 이름이 찾아지지 않고, 어디서도 수녀님의 강의나 피정 동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작년 2019년, '영적 식별'이란 주제의 강의에서 수녀님 성함을 보게 되었다. 6주간 영적 식별 강의를 듣고, 이후에 극적으로 2박 3일의 피정에 참석하는 믿을 수 없는 만남이 이어졌다. 수녀님에 대한 정보는 1도 없었는데. 강의와 피정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수녀님의 전공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라는 것. 신앙 사춘기의 어두운 숲을 혼자 헤맬 때, 읽고 읽고 읽다 다다른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신비가들이 수녀님 전공에 닿아 있다는 것. 올해 또 6주간 강의 들으며 배우고 있다. 십수 년의 세월을 넘어 기다리던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그리운 하나님❞

 

삼위일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던 어거스틴은 하나님 닮은 인간 마음 안의 삼위일체를 발견했다.(라고 수녀님의 강의를 통해 배웠다.) 지성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이것은 기억, 이성, 의지이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비출 때, 그 비추임을 알아듣는 이성이 의지에게 동의를 구하고, 의지가 예스하면서 이성과 기억과 의지가 조화롭게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된다. 그중 기억이란, 내가 누군지를 기억하는 동시에 내가 찾는 대상에 대한 기억이다. 내가 찾는 분, 그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심장이 쿵 떨어진다. 십수 년 전 한 번 만난 수녀님의 가르침을 기다렸던 것은, 어떤 목마름이었다.

 

수녀님 특강이 있던 날 시작 인사를 하며 그 얘길 했었다. 그 세월 기다렸던 나도 대단하고, 그 시간 생전 처음 수녀님의 강의를 듣자고 모여온 사람들도 대단하다고. 나나 그들이나 어떤 목마름, 갈망을 따라온 것이라고. 어거스틴의 말로 하면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길이 아닐까. 마침 눈에 띄는 신간이 있었는데 제목은 <그리운 하나님>이다.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현대 영성가까지 여러 신비가들의 기도를 모은 작은 책이다. 책을 보는 순간 수녀님께 배운 영성가들의 가르침이 떠올랐고, 그분들의 삶과 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운 하나님'이지 싶었다. 엊그제 수녀님께 그 책을 선물했다. 내가 뭐라고, 내게 배우러 오시는 분들이 늘 고맙다. 그분들께 수녀님을 소개하고, 함께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다니! 기적이고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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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장례식. 짧고도 긴 장례식의 마지막 시간인 하관예배는 추웠다. 날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교우 몇 분이 장지로 찾아오셔서 찬바람 속 하관예배에 함께 하셨다. C집사님께서 전복죽을 가져오셨다. 경황 중에 어떻게 전해져 내 가방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묻고 돌아온 저녁, 텅 빈 몸에 들어간 따스함이었다. 어떻게 얼마나 먹었던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따뜻했다. 마지막 하관예배 때 차디찬 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느낌이라 덜덜 떨며 서 있었는데. 그 순간과 대비되어 따스한 기억으로 흐릿하게 남아 있다.

 

바쁜 사모님 조금 도와줘서 하나님께 칭찬 좀 받으려 한다며 몇 번 김치를 나눠주곤 하셨었다. 엄마 장례식 이후로는 거의 매주일 김치며 밑반찬을 주셨다. 눈물을 달고 사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반찬통 하나하나 꺼내 풀어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반찬 보따리는 엄마(친정 엄마) 상징의 원형 같은 것 아닌가. 집사님 반찬 우리 엄마 반찬, 비슷한 구석 하나 없지만, 딱 봐도 그냥 엄마 반찬이었다. 한참을 넙죽넙죽 얻어먹다 날씨도 더워지고 죄송해서, 어렵사리 그만 주십사고 말씀드렸을 때 그러겠노라 하시며 "이제 친정 엄마 놀이 그만 할게요.^^" 하셨다. 

 

친정 엄마 놀이. 아, 친정 엄마 놀이! 김치며 멸치 볶음, 전복죽과 약식이 친정 엄마 떠나 구멍 숭숭 뚫린 마음을 메워주는 엄마표 반찬이었다! 친정 엄마표 밑반찬 보따리는 주렁주렁 달린 내 결핍 보따리 중 하나이다. 엄마에게 김장김치, 양념 같은 것을 받아 먹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평생 착취해온 엄마를 아직도 착취할 수 있는 딸들이 얄밉고 질투가 났다. 내 손은 친정에서 올 때가 아니라 친정 갈 때 먹을 것 보따리로 무거웠으니. 아기가 된 엄마는 내가 만든 꽃게찜을 그렇게 좋아했다. 수년 전 엄마 몸이 처음 무너졌을 때, 질리도록 꽃게찜을 해다 나르곤 했다. 당시 꽃게찜을 싸들고 다니며 마음의 입이 닷발은 나와있던 것 같다. 우리도 자주 못 먹는 비싼 꽃게 사는 게 부담돼서가 아니라, 음식 만드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전 같으면 "야야, 비싼 걸 왜 하냐?" "우리 신실이 몸도 약헌디, 하지 마라." 했을 엄마가 "꽃게찜 안 혀 왔어?" 하면 마음이 턱 무너졌다. 아기같은 엄마가 귀엽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렇게 엄마의 존재가 작아지고 작아지다 없어져 버릴까봐, 엄마가 죽을까봐...... 아직은 엄마한테 더 받으며 살고 싶은데 주는 존재로 사는 내가 서러웠다. 늙은 엄마를 가진 내가 가여웠다.

  

20여 년 전, 결혼 초만 해도 밥 하다 전화해서 엄마 레시피 챤스를 쓸 수 있었다. "엄마, 오징어 도라지 무침 어떻게 해?" 하면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채윤이 현승이는 외할머니가 손수 구워 정성으로 발라주시던 굴비를 흐릿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엄마의 손맛이 그리움이 된 것은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요리에서 손을 뗀 것은 물론, 뇌세포가 느슨해지면서 엄마만의 요리 레시피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더 안타까웠다. "엄마, 엄마가 해주던 곱창전골 먹고 싶은데. 육수 어떻게 내고, 곱창 손질 어떻게 했는지 가르쳐줘" "생각이 나남? 다 잊어 부렀지. 다 잊어부렀어." 벌써부터 부모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나는, 엄마 반찬의 상실로 엄마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래서 유난히 친정 엄마표 김치 보따리, 스치로폴 박스에 담긴 김치 같은 것을 보면 서글퍼지곤 한다. 집사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가셨나? 매주 반찬을 나눠주시는 것이 그저 잘 챙겨 먹으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 마음이셨을 것이다. 헌데 '친정 엄마 놀이'라는 언표가 어쩐지 내 결핍의 보따리를 알고 하시는 말씀 같이 느껴져 먹먹해졌다. 어느 날은 마지막 남은 겨울 김치 한 포기로 만드셨다며 김치전을 부쳐주셨다. '이제 김장 한 포기를 끝으로 겨울을 완전히 보냈습니다. 사모님도 마음의 겨울을 털고 일어나시길 기도합니다.' 하셨다. 딱 두 달이 되는 날이었고, 자꾸 날짜를 세며 보내는 나는 의미를 담아 더 힘을 내야지, 하던 차였다. 마지막 겨울 김치라니, 이 전을 먹으면 어쩐지 그리 될 것만 같았다. 누군가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라고 말했다면 "마음대로 털어지면 나도 털고 싶다"라고 불끈 슬픔에 젖은 화가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따스하게만 다가왔다. 봄처럼.

 

슬픔에 싸인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설픈 말을 하느니 가만히 손잡아 주는 것이 좋다. 아니 손을 잡아주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슬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어쩔 줄 모르는가. 장례식 직후, 흑백 세상을 살던 나는 만나는 누구라도 붙들고 엄마 얘길 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저 엄마에 대해 물어봐 줬으면 싶었다. 엄마의 마지막 날이 어떠했는지,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엄마가 싫었던 때, 엄마가 좋았던 때...... 무엇이든 물어봐주면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렵다면 제대로 치루지도 못한 장례식 절차라도 물어봐 줬으면. 누구도 그것을 물어주지 않았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어서였음을 안다. 우리 모두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른다.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 있고, 이렇게나 명징한 인간의 운명인데 입에 올리지 못하고 일단 피하고 보려 한다. 나 역시 슬픔에 잠긴 사람 앞에서 그랬었다. 

 

말대신 건네는 음식이 말보다 크게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넙죽넙죽 받으며 민망함도 있었지만 "그래, 난 지금 돌봄이 필요한 상태야" 인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실은 얼마나 돌봄을 원했던가. 의연하게 일상을 살았지만 누군가 나를 아기처럼 안아주며 돌봐주길 기다리고 바랐던 것 같다. 지방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점심 메뉴를 고심하던 친구가 "따뜻한 국물이 있는 밥을 생각해 봤는데......"라고 말했다. 블로그에 연재되는 애도글을 꼼꼼히 읽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이 한 마디가 그저 따뜻한 국물이었다. 엄마를 잃고 애도하는 것은 퇴행의 시간을 지나는 것인지 모른다. "엄마, 엄마" 어린아이처럼 부르게 된다. 어린아이에게 가닿는 것은 말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 알사탕 하나, 과자 한 봉지이다. 

 

몸으로 경험한 것만 남는다. 아니 몸의 기억이 가장 오래 간다. 엄마의 음식이 미치도록 그리운 것은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학자였다면, 내가 엄마의 지성을 사랑했다면, 엄마가 남긴 글이 있고 관념이 있을 텐데. 내가 사랑한 것은 엄마의 몸. 그것이 사라지자 엄마가 해준 음식은 영영 다시는 먹지 못할 것이 되었다. 영영. 그러고 보면 정말 마음 깊이 따스하게 남은 것은 말이 아니라 '먹을 것'이다. 이 즈음 감자가 쏟아져 나오는 철이 되면 나는 감자 샐러드를 잔뜩 만들곤 한다. 햄 같은 것 넣지 않고 오이와 양파를 넣어서. 오이를 넓고 길쭉하게 썰어서 소금물에 꼭 짜서 넣으면 아삭하고 맛이 있다. 어쩌다 이것을 연례 음식으로 하게 되었지? 생각해보면 명일동 K 권사님의 감자 샐러드 코스프레다. 명일동에서 한 아파트에 사시던 권사님께서 가끔 우리 집 현관에 음식 담긴 비닐봉지를 걸어두고 가셨다. 감자 샐러드나 빨갛게 양념한 돼지고기. 맛도 있었지만 따스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리움 때문에 해마다 이 즈음이면 그때 주셨던 맛을 더듬어 비슷한 모양의 감자 샐러드를 만들게 된 것 같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는 애도하는 사람이었다. 애도하는 이를 어떻게 도울까 하는 생각이 나는 걸 보니 한 발 빠져나왔나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용기있게 다가가 그가 잃은 사람에 대해 묻고, 얘기 나눌 수 있을까. 덥석덥석 음식을 만들어 아무것 바라지 않고 그저 안기고 돌아올 수 있을까. 말보다 몸으로 사랑하여 진정한 것을 남기는 인생 후반을 살고 싶다. 동생은 엄마가 만들어 주던 양파 볶음밥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엄마의 손으로, 몸으로 남긴 흔적이 아픈 그리움이지만 사랑의 기억이기도 하다. 다시 먹지 못할 엄마의 곱창전골과 영양부추 샐러드와 아삭 시원한 김치는 그리움이며 사랑이다.

 

C집사님의 노란색 2단 반찬통은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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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한 지 얼마 안 되는 깨끗한 흰 벽을 본 아이는 신이 납니다. 마침 손에 크레파스가 있었거든요. 엄마가 스케치북에 그림놀이 하라고 주셨어요. 뭔가 자꾸 삐져 나가는 느낌. 선 하나도 긋다 마는 느낌. 너무 좁은 건가? 그때 하얀 ‘벽’을 본 겁니다. 여기야! 속이 시원하게 그어보고 그려 봅니다. 이거지! 여기였구나. 엄마가 이걸 하라고 크레파스를 준 거야! 으아, 짜릿짜릿!

잠시 후 돌아온 엄마의 표정은...... 네, 여기까지요.

미사 나음터는 정말 좁아터져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 이렇듯 빼곡히 들어앉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그렇게 들어앉은 사람들 사이가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먼 느낌으로 불편하지 않아 감사합니다. 암튼 뭐 하나 들여놓을 수 없는 공간. 지도자 과정 시작하니 화이트 보드가 필요하지 뭡니까. 필요하지만 공간이 안 되는데 어쩌겠나 싶었는데. 연구원 샘 한 분이 아무도 몰래 혼자 머리를 쓰신 겁니다.

모니터 위에 마카펜으로 막막 쓰게 만들어 놓으신 거죠. 처음 쓸 때는 살짝 후덜덜 했지요. 두 번째 되니 아주 짜릿합니다. 새로 도배한 벽지에 그림 그리는 느낌이랄까. 블랙 보드로 변신한 모니터. 지도자 과정 1기가 연구소 식구 다섯, 과정에 참여하신 분 여섯 도합 열한 개의 우주가 만나 한 주 한 주 진행되고 있습니다. 매시간 함께 새로운 질문 앞에 서며, 우리만의 돌파구, 나만의 여정을 더듬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더듬어 가는 영적 여정이 뭔가 짜릿합니다. 으아, 짜릿짜릿!

강의로 책으로 배우고 내 몸으로 살아내서 빚어진 에니어그램, 기도, 치유 글쓰기를 모두 갈아 넣어 지도자 과정을 일궈가고 있습니다. 커리큘럼에 계획된 것 이상의 통찰에 내게서 나오고, 흘러가고, 다시 내게 흘러오는 것에 한 주 한 주 놀랍기만 합니다. 지식 전달에 멈추지 않고, 함께 경험하고 자라는 시간이 되자 마음 먹으니 연구원 다섯 분도 같은 마음이 되어 그 무엇 아끼지 않고 자신을 내어 놓으니 이런 공동체 어디 또 있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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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25 16:25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7.07 12:59 신고

      둥이들이 많이 컸지요?
      카톡 프로필에서 예쁜 아가들 가끔 보고 있어요. 사진으로 보면 예쁜데, 키우는 현실은 얼마나 어려우실까 생각도 하고요. ^^
      마음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예배실 여기저기서 우연히 마주치던 그 기억이 새롭고 그립기도 해요.
      일하며 육아하며, 가장 치열하고도 가장 생명력 넘치는 인생의 시간들 잘 살아내시고, 작은 기쁨들 놓치지 않으시길 기도할게요 :)

 

 

 

성석제의 짧은 소설 모음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을 읽다가 꿀재미 발견.

소설 제목은 "되면 한다" 이고,

"우리 사비 회만원이지?"

"닮은 살걀" 이런 말들.

 

이런 말장난 좋아서 껌뻑 죽는 나는 식탁에 앉아 애들에게 킬킬거리며 전해주었죠.

방역이고 뭐고 밥풀 튀면서.

"엄마, 우리 예전에 홈대 현타운"에 살 때 말야......"

웃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내 싱거운 장단에 춤춰주는 사람은 역시 현승이.

홈대 현타운, 홈대 현타운....... 나 이런 거 왜 이렇게 재밌어? 

 

여기저기 만나는 사람마다 이 얘길 전하고 살아 있는 사례를 많이 모아보았습니다.

 

번둥 천개

곱은 졸목길

야치 참채죽

중고딘 알라점(친구 자신의 실수)

흼과 꾸망(친구가 강의를 듣는 중 강사의 말 중에서 주웠다고)

자둑과 방기(젊을 때 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이 날 설교 이후 몇 개월 목사님 얼굴만 보면 터져서 죽는 줄 알았음)

오백쩜 종뻔(내 경험. 매우 어려운 분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 어디서 내려주면 되냐는 말에 명일동 500번 종점 앞에 내리고 싶은 심정을 담음)

사랑아 보영해(방송 출연자의 실수)

 

이런 거 좋아하는데 좋은 사례와 간증 있으면 댓글이든, 메시지든 전해주십쇼!

단어의 초성을 바꿔서 발음하는 이런 현상을 '스푸너리즘(spooerism)이라고 한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뉴칼리지의 학장이었던 W. A. Spooner가 이런 실수를 자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 조금 다른 꿀잼, 사진 이야기

 

엄마, 나 꿀물 좀 먹을게.

혼자 타 먹을 수 있어? 더운물에 타서 얼음 타는데......(반사적으로 일어남)

아냐, 아냐, 엄마.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바로 마실게.

바로 꿀물 마시는 현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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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안 돼."

"왜?'

.

.

.

.

.

.

.

.

"음, 시집 못 가."

 

라고, 남편이 예전 엄마 말을 흉내 냈다.

엄마는 내 결혼이 늦어지는 게 책 때문이라고 했었다.

시집을 이렇게 잘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말이다.

 

중요한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밤, 밤 독서.

좋은데, 너무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흠, 다시는 시집 못 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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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영업합니다  (0) 2019.10.25

 

 

 

 

엄마 돌아가시고 한 50여 일 지난날이었다. G 권사님의 아버님께서 소천하셨단 소식이다. 아, 어쩌나! 권사님은 어머님 보내드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권사님께서 어머님을 보내드린 후 한참 힘드셨단 얘길 전해 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위로의 마음을 건네지 못했었다. 엄마를 잃고 나니 권사님이 힘드셨단 얘기가 비로소 몸으로 알아들어졌다. 딸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엄마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많은 죽음으로 연습한다 해도 엄마를 잃는 것은 새로운 슬픔이구나! 엄마 장례 후 권사님께서 건네는 메시지 하나도 더 깊은 곳을 건드리며 다가왔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남다른 분인데, 아버님마저 보내셨구나! 싶으니 속에서 쿵, 하고 무엇 하나가 또 무너져 내렸다.

 

멀리 남해에 차려진 장례식에 내려가는 준비를 하는 차에 또 다른 비보. N 집사님의 어머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이다. 쿵! 쿵쿵! N 집사님은  G 권사님의 남편이시다. 그러니까 권사님의 시어머님 또한 같은 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가 함께, 같은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는 소식이다. 죽음이 이렇게 덮칠 수 있다고? 공포가 밀려왔다. 아내의 죽음 후에 쓴 애도 일기, 『헤아려 본 슬픔』에서 C. S. 루이스가 말했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 애도는 진행 중이었고, 나는 아직 죽음의 강에 휩쓸려 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슬픔은 때때로 공포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역시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무섭지는 않으나, 무서울 때와 흡사한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지는......" 그런 상태이다.

 

하루 일정으로 남해와 보은, 두 곳에 들러 조문하는 일정으로 교우들과 함께 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큰 슬픔 중에 가장 힘이 되어줄 남편 없이, 아내 없이 각각 장례식을 치룬다는 것이. 줄줄 흐르는 권사님의 눈물은 마스크 안으로 흘러 모여 저수지가 될 것 같았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기나긴 시간을 버스에서 보냈다. 자다 깨다 하며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정신줄을 놓았다 잡았다 한 것 같기도 하고. 보은에서 조문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했다. 차에 오르는 순간 이제 끝났구나, 두어 시간이면 집에 가 편히 누울 수 있겠지 싶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났다. 휴게소 들르지 않고 논스톱으로 달리겠다고 출발한 버스인데...... 어쩌지. 어쩌지 싶으니 몸은 더욱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위로 아래로 분출할 것 같은 무엇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사님 한 분이 화장실이 급하여 첫 휴게소에서 버스를 세우셨다. 집사님을 따라 달려서 내려 낮에 남해에서 먹은 것까지 토해냈다.

 

울렁거림은 진정은 되었지만 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출발한 버스에 길게 누워 스스로 안정, 절대 안정을 진단했다. 몸 안에서는 조그만 자극에도 다시 분출하겠다는 것들이 꿈틀거렸다. 비상용으로 비닐봉지를 앞에 두고, 식은땀 흐르는 몸으로 가만히 숨만 쉬며 누워 있었다. 음악의 힘을 빌어 안정을 찾게 위해 이완시키는 음악을 틀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이 들리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눈에서는 눈물이, 온몸에선 식은땀이. 캄캄한 창에 엄마 얼굴이 어른거린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거였구나. 엄마, 엄마...... 속으로 엄마를 불러보는데, 엄마가 아니다.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예원아, 예원아, 예원이 어딨니......"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뒤틀렸다. 뒤틀리는 몸과 마음을 안전벨트에 꽉 묶어두고 소리 없이 눈물과 식은땀을 흘렸다. 예원이.

 

바로 일주일 전, 예원이 장례식이었다.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예원이 장례식이라니. 그리고 실은 아직 예원이를 말할 수 없다. 애도의 첫 단계가 '부정'이라면 예원이 만큼은 끝까지 부정하고 싶다. 예원이 소식을 들었던 밤, 모든 것이 끝났다 싶었다. 그대로 죽음의 강에 나를 던지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겠구나, 생각도 했다. 40여 일 전에 엄마를 보냈던 과정과 똑같이 화장장을 거쳐 한 줌의 재로 마주한 예원이를 세종시 어느 추모공원에 안치하고 돌아왔다. 그날 그 시간 이후로 집안에서 예원이는 금기어가 되었다. 나도, 남편도, 채윤이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괜찮은 듯 살아졌다. 남해에서 보은까지, 하루 종일 죽음을 마주했던 몸이 요동을 쳤다. 슬프다고, 슬프다고, 예원이 그 빛나는 생명이 아깝다고 몸부림을 했다. 몸이 말했다. 슬프다고,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그 슬픔은 분출하고 싶은 분노이며 공포라고.

 

엄마 애도의 진행상황을 보고하는 몸의 신호가 하나 있다. 장례식 당일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침 입관식에서 이미 젖었고, 하루 종일 그런 채로 다녔다. 그날 이후로 마스크 꼈던 입주위가 시도 때도 없이 실룩거린다. 마그네슘이 부족하여 눈 떨림 현상이 온다는데 그 비슷한 증상일 것이다. 암튼 아무 때나 왼쪽 입술 위가 떨렸다. 마치 어릴 적에 울음을 참으려 할 때마다 입이 삐죽거려지고, 입술이 떨렸던 것처럼. 수시로 실룩거리는 입술로 대화 중에 민망한 순간이 자꾸 생겼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나아졌다.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진도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횟수도, 강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예원이 보내고 거짓말처럼 다시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최대한 '부정'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몸은 속아주지 않았다. 버스에 누워 몸에게 슬퍼할 것을 허락했다. 

 

충분히 슬퍼할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엄마, 예원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잊어라, 생각하지 마라,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약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감정,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는 슬퍼하는 사람을 그대로 봐주지도 않는다. 그만 해라, 언제까지 그 얘기냐. 그만하라는 압력이다. 압력에 못이겨 억압하고 만다. 가장 정직한 나,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몸이 말한다. 아직 슬퍼, 나 아직 슬프다니까.

 

애도 심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말한다. 애도에 대한 반응은 명백하게 신체적으로 온다고. 우는 것만 아니라, 훌쩍거림, 가슴의 압박감, 딸국질, 헐떡거림, 한숨 쉬기, 목이 조이는 것 같은 호흡 곤란, 먹을 수 없음, 식욕부진, 목에 음식이 걸린 것 같은 느낌, 위와 신장의 잦은 탈, 육체적인 탈진 또는 흥분 등이다.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 David K. Switzer, 학지사) 이 명백한 반응은 가장 정직한 반응이기도 하다. 몸이 가장 정직하다. 그런 의미로, '애도'의 개념을 정립한 죽음과 애도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말한다.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라고. 이제는 다 잊었고 정리되었다고 머리가 말할 때도 몸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공교롭게도 특정한 날에 이유 없이 아프고 기분의 저하를 보이는데, 그 날은 고아원에 보내진 날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시기라는 것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아직 달력을 읽기에는 한참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앞에 나열한 신체 증상만이 아닐 것이다. 아동문학가 매들린 렝글(Madelain L' Engle)은 C. S. 루이스의 애도 일기 『헤아려 본 슬픔』을 읽음으로써, 사람마다 겪는 슬픔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자신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 읽은 것이다. 사람사람이 겪는 슬픔이 다른 것처럼 신체 증상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게는 새벽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증상, 입술 떨림이었다. 장례 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한 날에는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지끈 이가 부러졌다. 여행 가면 마지막까지 쌩쌩했던 내가 가장 먼저 피곤해 꼬꾸라졌다.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단체에 모임이 있어서 나간, 척 공식 모임에서는 혈압이 떨어져 시야가 흐려지고 두통이 오고 기운이 빠져나가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머리 차원에서 "괜찮아,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 움직인 날에 몸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몸이 말하는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래?" 하고 지나치기 일쑤. 유난 떠는 것처럼 비칠까 봐,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요즘도 간간이 입술이 위 근육이 실룩거리며 울음 참는 모양새를 한다. 이젠 잠도 잘 자고, 컨디션도 좋은 편이다. 그런가 싶더니 요 며칠 다시 서늘한 가슴으로 이른 새벽에 눈을 뜬다. 당황하지 않는다.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지만 슬픔의 강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도는 "끝이 없고, 위로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애도의 원인인 상실, 죽은 엄마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술 떨림이 온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다 10년 쯤 후에 다시 입술 위가 실룩거린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렇지. 내가 사랑하던 엄마가 없어, 하고 몸이 일깨우는 그리움과 슬픔을 그대로 마주할 것이다. 그렇게 가늘게 애도의 끈이 이어지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저 하늘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에, 그 날에 끝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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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텃밭을 일구신 장로님께서 수확한 쌈야채를 듬뿍 주셨다. 갖가지 야채 사이에 오이 한 개가 파묻혀 있었는데, '유일하게 열린 오이'라고 남편이 전해주었다. 직접 혼자 지어본 농사는 없지만, 경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는 설렘을 안다. 제 모양을 갖춘 열매가 매달린 것을 보고, 수확하는 기쁨도. 그놈을 어찌 먹을까? 저 오이 하나가 실 한가닥이 되어 어린 날의 기억을 줄줄 끌고 나온다. 짧게 한 교회에 몸 담았던 장로님이신데, 야채와 함께 무엇보다 유일한 오이를 넣어주신 게 특별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어렸을 적, 아마 이 즈음일 것 같다. 봄 지나고 채소든 과일이든 따먹을 것이 생기는 때. 저녁 무렵이면 "사모님"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언니나 오빠나, 집사님들이 있었다. 손에 든 바구니에 금방 딴 복숭아가 들어있기도 하고, 고추나 가지 같은 채소도 있다. 첫 열매. 그 해 처음 난 수확물을 목사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도 그리 알았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어떤 특권의식 같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지난주에 어렸을 적 친구를 만났다. 옛 친구 만나면 지금 얘기보다 그때 얘기를 하게 되는데. 결국 시간여행이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동네 친구이며 교회 친구이기도 해서 같이 많이 놀았는데, 같은 놀이도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있는 친구였다. 풀 뜯어서 가짜 김치 담그는 소꿉놀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배추를 구하고, 집에서 고춧가루를 훔쳐다 진짜 김치를 담가 땅에 묻어 놓기도 했다. 난리 부르스를 추며 놀았다. 어른이 안 계실 때는 그 집에 몰려가 부엌에 모여 되지도 않는 뭔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 친구 집 부엌이 난리 부르스의 무대가 된 날이었다. 누군가 찬장을 뒤지다 가장 안쪽에서 커피병을 발견해서 꺼내 들었다. 뚜껑에 커다란 별이 하나 있는 맥스웰 커피병이었지 싶다. 그러자 집주인인 친구가 "야아, 그거 손대지 마. 그거 목사님 심방 오시면 드리는 거야!" 했다.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셨다. 그 친구네는 동네에서도 꽤 어려운 편에 들었었다. 그런 친구 집에 당시엔 흔하지도 않은 커피가 찬장 안쪽에 들어 있고, 오직 목사님을 위한 것이라니. 그 역시 당연히 그래야 했던 어떤 의식, 목사를 특별해 대접해야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깨가 으쓱했던 것 같고, 다시 특권의식을 당연히 하는 마음이었다. 

 

어릴 적 이런 기억, 목사 딸로서의 특권의식, 터무니 없는 특권의식은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힘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다. 한때, 이런 내가 몸서리치게 싫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이 늦게 목회자가 되어 다시 들어간 목회자의 세계는 당연한 특권의식의 세상이었다. 어릴 적 내가 태어나 보니 목사 딸이라서 누렸던 첫 열매를 먹는 특권 같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처럼. 그 세계 안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평신도 성인으로 살다 들어간 목회자의 세계의 당연함이 낯설다 못해 역겨웠다. 그때부터는 어릴 적의 나, 어릴 적 우리 가족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교인들이 땀 흘려 가꾼 열매, 첫 열매를 가만히 앉아 받아 당연한 것으로 받아먹었다니! 가난한 과부의 찬장 숨긴 커피를 독식하다니! 엄마 아버지가 조금 파렴치 하게 느껴졌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참회의 마음으로 썼던 글 <레위인 콤플렉스>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신앙 사춘기를 통과하던 시절이다. 어릴 적의 나도, 그 글을 쓴 나도 다 나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나다. 오늘 저 오이 하나가 뭉클하게 좋았다. 어떤 마음으로 보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적 "사모님,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유" 하며 들고 온 바구니 속의 복숭아가 떠올랐다. 친구 집 찬장 속에서 발견한 커피병이 떠올랐다. 특권의식이니 그에 대한 부끄러움이니, 꿈같은 얘기 같고 그저 마음이 따뜻하다. 누군가를 위해 좋은 것을 아껴둘 수 있는 마음, 그 대상이 신적 권위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면 거룩하기까지 한 내어줌이겠지. 

 

엄마 아버지가 교인을 갈취하는 목회자 부부도 아니었다. 그 커피병 친구가 그랬다. 아직 시골의 그 교회 다니고 계신 친정 엄마에게 "신실이 엄마, 사모님 돌아가셨대" 했더니 너무 안타까워 하셨다고. "그 사모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가장 사모님 같은 분이고, 그런 사모님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어." 하셨단다. 울컥 뜨거운 것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 말 듣는 순간 엄마 얼굴과 함께 무화과나무 생각이 났다. 꽃밭 한 구석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열매를 잘 맺는 무화과였다. (잎이 무성했음에도! ㅎㅎ) 나는 무화과의 달착지근한 맛이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 무화과나무는 우리 집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것 같아 좋았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집에 돌아갔는데 무슨 풀냄새가 진동했다. 잎이 무성했던 화단의 무화과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교인 중 한 분이 어디가 아픈데, 무화과 잎을 끓여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들은 엄마의 거침없는 선택이었다. 무화과 잎 국물을 마시고 교인이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우리 집 무화과나무는 다시 열매 맺지 못했다. 시들시들 죽고 말았다. 나는 그 무화과나무가 아깝고 아까웠다.

 

교인들 집의 첫 열매를 당연함으로 받아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마도 아버지도 나름대로 내어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거침없이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었던 시절...... 사람들의 상상 속에 목사가 독재자이거나 사기꾼일 수 없었던 시절...... 거룩한 분노와 불신이 아니라 맹목적 신뢰와 존경이 교회의 기반이었던 무지몽매하여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절이다. 말라서 죽어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그 복숭아와 무화과나무가 오버랩되어 자꾸 어른거린다. 말라죽은 무화과나무가 살아나 주렁주렁 복숭아 열매를 맺는 그림을 상상했다. 

 

'상실과 고립'이란 주제로 영상 강의를 하나 했는데, 그 여파인지 상실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강의 중에 질문을 던졌다. "잃어버린 것들, 잃어버려 아쉬운 것들을 떠올려 보자"라고. 그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이번 주 내내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구나, 오이와 함께 그 질문이 나를 그 시절로 이끌었구나.     

 

한 입 깨물면 '그리움'과 '의미'의 즙이 팡팡 터질 것 같은 저 오이,

흠...... 어떻게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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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현승이를 부르려는데 '운형이', 동생 이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꽤나 반복되는 말실수다. 말실수는 무의식의 발로라는 프로이트를 끌어오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일찍부터 동생의 엄마 노릇을 자처해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겨진 늙은 엄마, 어린 동생(그래 봐야 두 살 차이인데) 사이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누가 지워준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말, 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들 있지 않은가. "이제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 이제 네가 잘해야 한다, 엄마에게 잘해라, 동생 잘 보살펴라......" 

 

장례식 후 외가 친가 친척들이 다같이 모여서 확대 가족회의 같은 걸 했다. 남겨진 세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와 무엇보다 남매의 교육 문제가 관건이었다. 누군가 내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꿈이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고,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냉철한 작은 외삼촌이 딱 잘라서 말해주셨다. "안 돼, 음악은 할 수 없다. 그건 돈이 많이 들어.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음악을 할 수는 없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런 식의 말씀이었다. 아, 그렇구나! 장래희망 목록에서 음악은 지웠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결국 뒤늦게 음악치료를 선택한 건 아쉬움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 가족회의가 남긴 인상은 강하다. 마음에 심긴 메시지도 분명하다.

 

아버지 없음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한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겠구나, 아버지가 없으니 알아서  인생을 일궈가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한 몸이 아니구나, 동생과 엄마은 내가 잘 돌봐야 해, 까지 갔을 것이다.  엄마가 무책임한 어른은 아니었다. 엄마 역시 자기희생적인 사람이고 책임감 또한 강했다. 그렇더라도 우리 남매에게, 특히 내게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더욱 엄마까지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엄마를 보며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하는 것이 내 깊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친절하고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두려울수록 엄마에게 더 신경질적이었고, 걱정이 깊어지면 원망을 쏟아놓곤 했다. 

 

특히 경제적인 책임감을 과도하게 가져왔다. 엄마는 늘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이었고, 우리 교육에 관한 한 철저했다. 대학까지 학비 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청소년 시절에도 조르고 조르고 또 조르면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엄마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부담, 동생에게 뭐라도 하나 더 사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게 꽤 보람이 있었다. 더 누리고 싶어서 퇴근 후에 과외 알바를 했다. 대학원 준비하며 직장 그만두고 과외에 투신(?) 했더니 수입이 훨씬 나아졌다. 학비를 위해 돈을 모으는데 아주 잘 모아졌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고치긴 틀렸고 새로 사야 하는데...... 엄마의 걱정 몇 마디에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냉장고를 샀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돈이 있었을 것이다. 모른 척했으면 엄마가 해결했을 것이다. 정말 내놓기 싫었는데,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았다. 냉장고를 사고도 한참 서러웠다.

 

엄마와 동생을 위해서 내가 돈을 벌여야 한다는 책무감이 떠나질 않았다. 동생의 고아 의식, 즉 아버지 없는 결핍감이 물리적 힘에의 집착이 되었다면 내겐 경제적인 책임감과 정신력 같을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린 내게 지성의 표상이었다. 아버지가 설교 준비하는 앉은뱅이책상 옆에 엎드려 산수공부를 하고 글짓기 숙제를 했다. 덧셈 뺄셈을 하는데 교과서에 나온 강아지를 개수 그대로 연습장에 그려주던 아버지 모습이 아련하다. 반공 선언문 쓰기 숙제를 하는데 '유비무환'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쳐주며 글 안에 넣어서 써보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지성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지적인 욕구가 끝이 없는 것, 아버지 부재가 남긴, 고아 의식이 내게 남긴 결핍감일지 모른다.

 

청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H가 나는 잊은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를 하던 시절, 해마다 합창, 성경암송, 성경고사 등의 대회가 있었다. 노회대회에 나가서 입상하면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성가대 아이들 데리고 전국대회에 출전한 적이 몇 번 있다. 어느 해, 노회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심사를 맡은 사람이(교수인지, 음악 선생인지 모르겠다) 어이없는 심사평을 했다. 노래는 잘했지만 지휘자의 복장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휘자인 내 치마 길이가 짧았다고! (아,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네!) 당시 자타공인 페미니스트였지만, 페미니스트이고 아니고 문제도 아니었다. 대회는 어찌어찌 마쳤지만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임원을 맡았던 당시 부장 선생님을 통해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글을 써서 전달하고, 그 발언에 대해 공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여차저차 결국 사과를 받았다. 

 

문제는 그 일을 복기하는 H의 말이었다. 나는 잊고 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며 "언니, 정말 집요하게 느껴졌어. 왜 저렇게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조금 알겠어."라고 했다. 나도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다. 지금과는 비할 수도 없는 시절, 성인지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분노하고 용기를 내고, 집요할 수 있었을까? 그 일에 대한 해석이었을까? 나이가 한참 많은, (청년들에게 현자 노릇을 하던)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너는 아버지가 없어서 제 멋대로인 구석이 있다."라고 했다. 털썩!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몸부림 친 결과가 아버지 없는 아이를 드러냄이 되었다고?! 아버지 없는 애 면전에 두고 할 말인가 싶었지만 별말을 못했었다. 당시 나를 보던 주변 사람들의 시각이었겠구나, 싶다. 부드럽고 물러 터졌으며 흐리멍덩하다는 내가 가진 자아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

 

아버지 없음은 내 인생 지성의 부재이며, 자존심을 지켜줄 권위의 부재였다. 그렇게 내가 나를 지키며 무시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평생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은 것은 아버지 없음, 고아 의식의 발로이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야 하는 처절함이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선망하고, 아버지와 동일시 하던 어린 딸, 그 아이의 선택이 이제 와 나는 한없이 가엾다.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에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참가자 넷  중 세 사람의 주제가 아버지였다. 내적 여정에서 어린 시절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보다 엄마를 동일시하는 딸이 더 많고, 둘 다 고통의 근원이었을 테지만 아버가 준 고통을 더 치명적으로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감정이입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고, 인식했다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버지와 동일시 되어 있었고, 심지어 우상화했다. 눈에 없는 신을 형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능인지 모른다. 내가 자라고 사춘기를 겪는 동안 내내 곁에 살면서 간섭하고 상처를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는 이상화되다 못해 우상이 되었다. 엄마를 혐오하고 아버지를 이상화하며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여성인 나를 스스로 낮추고 비하했다. 이율배반적으로 외부 남성 권위에는 분노하고 대항하게 되었다. 당연히 왜곡된 가부장적 하나님이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은 다시 내 안의 여성주의와 충돌했다. 영적 여정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분열이었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몇 년 전에 읽은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이다.  여성들 안의 영웅심리와 불안을 아버지와의 딸의 동일시로 설명하는 페미니즘 에세이다. 

 

'영웅의 딸'이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를 이상화 하고 어머니는 거부한다......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와 아버지처럼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딸들의 욕망은 그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와 남자들의 세계를 모방하면서 일찍부터 그녀의 남성적인 성품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지나친 자기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 속에 아버지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개별적인 정체성 수립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 중에서

 

엄마도 동생도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꼭 내게 물었다. 노인이 되면 고집쟁이 되기가 쉬운데 엄마는 내 말을 잘 들었다. 며느리와 관계에서 섭섭함을 토로하다가도 내 몇 마디에 금세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고치곤 했다. 엄마와 동생이 내게 물어올 때, 무심한 듯 응대하지만 조용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엄마나 동생이 겪는 일상의 어려움이 다 내 책임 같고, 해결해줘야 할 것 같았다. 과도한 책임감이다. 내 힘에 부치는 짐을 지고 평생 힘겹게 지내왔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아이러니하거나 신비롭게도 그 무게가 내 존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동일시되어 과도한 힘을 내어 살아온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나를 나 되게 만들었다. 차마 내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폴 투르니에 박사, 고아 대선배께서 그의 책에 먼저 썼으니 그의 입을 빌어본다.

 

고아라는 것은? 나는 항상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습니다. 폴 투르니에 『고통보다 깊은』 중에서

 

나를 형성한 것들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적당히,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책임감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엄마의 딸로서, 아니 그 누구의 딸이 아닌 나로, 역할의 옷을 벗고 가볍게 살아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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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ratigya 2020.06.07 23:58 신고

    하나마나 한 말...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깊이 공감하고 정말 그런 말 더는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니의 모든 것..아름다워요...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3 신고

      아냐, 그대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존재가 말보다 앞서거든! 그대의 존재를 내가 아오 :)

  2. 2020.06.08 11:00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7 신고

      이런 메아리를 기다렸어요. 이 글을 계속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나말고 이런 누군가가 또 있어'라는 확신이거든요. 그 누군가에게 당신만 그런 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기도, 무엇보다 나만 이런 것 아니라는 그 말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드디어 들었네요. ^^

      이렇게 말씀 들으니 위로도 되고, 새롭게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요. 아, 나도 그랬었지..... 우리 모두 잘 살아남아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 참 다행이에요. 특히나 좋은 남편에 좋은 아빠 되셨구요!

      사모님 형수님 이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전생에 잃어버린 남매였었잖아요. ㅎㅎㅎ 그곳의 시간들 곱게 마무리 하고 들어오셔서 뵈어요. (사모님 말로 형수님으로 가기로요!)

 

 

 

"쓰면 말하고 싶어진다. 말해보면 읽고 들어야 함을 깨닫는다. 드러내야 부족함을 안다. 드러내야 잘 되면 잘 되는대로, 또 못 되는대로 채워야 함을 느끼게 된다. 쓰기·말하기를 하면 듣기·읽기는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강원국의 글쓰기』 중에서

 

방송에 나가거나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할 얘기도 없으면서 왜 섭외에 응했을까?” 부담감으로 잠을 설치고, 마치고 나서도 홀가분함보다는 “그 말을 왜 했지? 다른 말을 했어야지…·” 이불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지나고 보면, 강원국 작가님 말처럼 드러내야 부족함을 알게 되기에 저 자신의 글과 말을 돌아보는 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저는 여전히 제 목소리, 말투, 얼굴 생김까지 낯설고 민망하여 제대로 보진 못하지만 공유하고 알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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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표현할 언어가 거의 없다. '내 마음속 대통령' 같은 표현도 있고, 존경이나 사랑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다 담아지지 않는다. '노사모'였던 적은 없다. 그를 그리워하는 노란 모자의 물결 같은 걸 보며 연결된 느낌으로 적잖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노사모라서는 아니다. 군중 속의 하나로 그분을 좋아하거나 따르는 것 아니다. 진영, 집단적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말이 아니라 삶 때문에 좋아했고 존경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었다. 예수 따르는 사람이라 자처하는 어른들에게 실망하여 교회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던 시절, 그래서 삶의 소망도 끊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 즈음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하필 그 시절이어서, 그 죽음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신앙의 빛이, 영혼의 불이 꺼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캄캄한 밤을 통과하며 '정답' 없이 의문을 품고도 신앙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존경하는 어른이 누구냐?는 물음에 신앙 공동체 안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내 마음속에 노무현 대통령 같은 어른이 없다. 어쩐지 이것이 좀 부끄러웠다. 이젠 조금 당당해졌다. 생각해보면 가장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정말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서거 11주기 지나며 유난한 그리움으로 봉하에 다녀왔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 당일 일정은 어려워졌다. 교대로 운전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박 여행으로 계획하고 밀양에 숙소를 예약해뒀다. 전날 내적 여정 세미나 마치고 와 늦은 밤에 예약한 숙소를 취소하고 창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모님 한 분을 만나야지 싶어서다. 창원에서부터 내적 여정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사모님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아이 둘을 데리고 ktx를 타고 올라와 시가에 맡기고는 세미나에 왔다. 코로나 19로 이후 일정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목마름이 전해져 왔다. 잠깐이라도 가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남편끼리 신대원 동기라서 더욱 좋은 일이었다. 

 

끌리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덥석덥석 만나질 않는다. 하지만 끌리는 사람은 바빠도 만난다. 멀리 있어도 만난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만나야만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고 배워서 그렇다.(도대체 누가 내게 가르친 것이냐) 애써 어려운 만남을 찾아다녔고, 기웃거리고 집적거렸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며 주먹 꽉 쥐고 애를 쓰곤 했다. 그러고 살며 꽉 쥔 손바닥은 내 손톱에 찔려 피가 날 정도였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한계'는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게 제일이지. 

 

철학 상담과 영성 공부를 통해 얻은 배운 가장 큰 것은 '사랑이 있는 곳'을 거침없이 찾아가는 힘이다. 찾아간다기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흐름에 몸을 맡겨 흘러간다고 하는 게 좋겠다. 사랑은 무엇을 목적하지 않으니 힘을 빼고 목적의식을 흐릿하게 하면 어떠리. 가르치고, 배우고, 교훈을 얻고, 구축하고, 지키고, 감동을 주고...... 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그저 만나는 것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퍼뜩 생각나는 사람을 거침없이 만나고. 장거리 운전이 안 되는 낡아진 몸이 되어가고 있으니, 마음의 힘도 더 뺄 일이다. 

 

 

맞아, 맞아! 그게 정말 의외지? 엄마는 호기심도 많고, 성격이 막 외향적이라서 와아아아~ 이렇잖아. 새로운 걸 막 해보고 모험적일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안 그럴 것 같은 아빠가 보면 새로운 걸 막 해보려 하고, 안 해본 걸 겁 없이 하고 그래. 보기하고 쫌 달라.

 

'엄마 아빠의 모든 것을 논평하기' 놀이에 취미를 붙인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인정, 완전 인정! 안 먹어본 것 먹기, 안 가본 길 가기(어, 이건 좋아하긴 하는데!), 신문물 받아들이기... 에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로운 것 앞에는 주춤하며 심지어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다 딱 한 번만 해보면 '다 안다'는 식으로 팽창되곤 하니, 경박한 것도 병이다.

 

코로나 19로 약속된 3, 4, 5월 약속된 모든 강의는 취소되었다. 간간이 zoom으로 진행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일언지하!는 아니지만 여러 말로 모두 거절했다. 대면 강의도 대규모보다 적은 인원을 좋아하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얘기 나눌 수 있으면 더 좋다. 강의인 듯 편하디 편한 수다인 듯 집단상담 같은 만남이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몸과 몸으로 만나는 강의에 눈빛 대화가 가능한 거리면 딱이지, 싶고. 하물며 모니터를 보고 강의를 한다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렇듯 여러 말로 거절했지만, zoom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최대한 엉덩이 뒤로 빼고 한 걸음 물러나고 물러나고 했지만 피하기 어려운 요청에 굴복하여 새물결을 맞았다. 한때 부산, 제주도에도 강의하러 간 적이 있는데 요즘은 몸이 안따라줘서 2시간 이상 걸리는 곳은 엄두도 잘 못 낸다. 한데 zoom을 타고 뉴욕에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지난 월요일, 뉴욕우리교회 교우들과 온라인 강의로 만났다. 아닌 게 아니라 수강자들과 눈 맞춤할 수 없는 환경이 치명적이었다. 

 

농담이었지만 약간 진담이기도 했..... "제가 강의 정말 강의를 잘하는데, 모니터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실력 발휘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시작하며 한 말을 남편이 방에 숨어서 듣고는 하루 종일 성대모사로 놀렸다. "제가요오, 강의를 정말 정말 잘하는데...... 우와, 자기 입으로 강의를 잘한대. 큭큭큭" 안 그래도 민망하여 이불 킥을 수도 없이 할 판이었는데, 남편 엉덩이를 이단앞차기로 차줄까 싶었다. 

 

강의를 잘하고 못하고, 다 지난 일 어쩌겠냐만. 계획이란 계획이 다 틀어지고만 코로나19 정국 덕에 지구 반대편 형제자매들과 연결된 것은 낯설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 아닌데, 단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 어렵고도 쉬운 한 걸음을 떼 봤다.  

 

  1. BlogIcon pratigya 2020.06.02 17:16 신고

    역쉬~ 멋져용 언니~~~ @.@


요즘은 무슨 얘길 하다가도 결국 글쓰기 얘기다. 이번 주말 방송되는 CBS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오늘 있었던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도 기승전...... 글쓰기!였다. 코로나 블루 얘길 하다가 글쓰기, 육아 얘기 하다 글쓰기. 이렇게 되고 있다. 보통은 책 출간 즈음에 방송에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는데, 어쩐지 맥락 없는 자리가 자꾸 생기는 중이다. 그 자리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글쓰기' 예찬이라니!

 

정말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긴 시간 준비한 강의보다 짧게 글쓰는 시간으로 모두들 배우는 바가 크다. 지도자 양성은 역시 글쓰기다! 자랑 삼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옮겨 걸어놓지 않을 수 없지!

 

자기 이해를 위한 글쓰기, 치유와 성장을 위한 쓰기의 힘.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며 배움입니다.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에서 매주 글을 씁니다. 함께 쓰고, 집에 돌아가 혼자 쓰고, 혼자 쓴 자기 성찰의 글을 다시 공유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쓰기 시작하면 변화가 생깁니다. 쓰는 행위가 홀로 하는 것 같지만, 함께 쓰고 그것을 나눔으로 유익은 극대화 됩니다.

예를 들면 어제는 ‘내 인생 나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항변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짧은 시간 손이 가는대로 씁니다. 글은 각 사람을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놀라고 새롭게 배웁니다. 아마 이 주제로 혼자 썼다면 자기 감정에 함몰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공간에서 쓴다는 것, 그리고 쓰는 이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느낌은 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를 받아주는 공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로 약속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지요.

일단 주제의 첫 번째 목표는 공간과 사람에 힘입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였습니다. 각자 쓴 내용은 늘 자기 안에서 꽝꽝 울리지만 언어화 되지 못한 아우성일지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겠지요. ‘누군가’ 나의 편이 되어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변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 겁니다. 쓰는 행위는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내 편이 되어 자기를 변호해주는 것이지요. 실은 이게 먼저죠! 내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최고의 변호사는 나니까요.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봅니다.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은 나, 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아마 내가 되고 싶은 나, 에니어그램으로 말하면 '자아 이미지'일 것입니다. 자아 이미지에 집착하여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에 됩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오릅니다. 손이 가는대로 써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거기에 덧붙여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제가 글쓰기 주제를 내주며 의도한 바는 이 지점이었습니다.)

사람이 글을 쓰고, 글이 사람을 이끌고, 사람들이 글을 빙자하여 자신을 내놓고, 그들이 다시 쓰고... 글은 또 어두운 자아의 숲을 헤쳐 새로운 길을 내고... 끝나지 않을 이 연결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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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의식에는 노래 주머니가 있다. 온갖 노래가 다 들어있고, 스치듯 지나는 자극에 툭툭 튀어나온다. 아이들 어릴 적엔 함께 하는 일상이 노래였다. 길 가다 민들레를 보면 바로 재생 버튼.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18개월 우리 채윤이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우리 채윤이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놀이터에서 시소에 앉으면 "시소 시소 올라가면 푸른 하늘 내려오면 꽃동산 재미나는 시소" 언제 어디서든 노래가 튀어나왔다. 단어 하나, 스치는 장면 하나가 노래를 불러낸다. 직접 자극이 아니어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찬송가도, 가요도, 팝송도, 가곡도 장르 불문으로 흘러나온다. 지금은 기능이 저하되긴 했지만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를 4절까지 외울 수 있고, 다른 장르의 노래 가사 암기력도 이에 준한다. 음악 치료사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운명이다.

 

남편과 양평 치유의 숲을 걸었다. 야생의 산길이었다. 숲은 곳곳이 노래 재생 버튼이 숨겨진 곳이다. 이제 내려가자 하고, 방향을 돌려 나오는데 갑자기 바짓가랑이 붙잡는 흰색 꽃 한 무더기. 찔레꽃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꽃밭이 있었다. 가장 안쪽에 가장 큰 꽃나무가 담 쪽으로 기울어져 서있었는데 찔레꽃이었다. 장미, 나리꽃, 붓꽃, 작약, 백일홍, 샐비어, 달리아,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했다. 아침이면 아버지가 수돗물에 호스를 꽂아 꽃밭에 물을 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어쩐지 그 꽃밭은 아버지 것 같았다. 한데 유일하게 찔레꽃은 엄마 소유로 기억이 된다. 나무가 커서 꽃을 많이 피웠는데, 꽃이 만개하면 가시 많은 그 찔레꽃을 꺾어 교회 강대상 옆에 꽂아놓곤 했다. 손재주가 없는 엄마가, 어떻게 어떻게 화병에 꽂아놓은 품새가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꽃꽂이와 엄마는 도대체 어울리는 조합도 아니다. 그래서 더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찔레꽃은 엄마다. 

 

찔레꽃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재생 버튼이 눌렸다. 실은 엄마 돌아가시고 내내 뱃속에서 울리고 있는 노래다. 아니다. 입원 후 엄마로부터 격리된(그렇다, 이제 생각하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우리 엄마에게서 격리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는 자나 깨나 그리움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었다. 장례식 후 음원 사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른 모든 가수를 검색해서 들었다.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 내겐 더 익숙한 노래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부르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을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잠 안오는 밤
기러기 울음 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어린 마음에 가사가 절절하게 와 닿았었다. 사실 난 분리불안이 있어서 엄마가 떼놓고 어디 가질 못했었는데. 장날 장 보러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고, 엄마는 오지 말라고 쫓고, 울며 따라가다 또 혼나고. 그랬던 기억이다. 늘 그리웠다. 사실 난 엄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릴 적에도 그리 생각했었는데. 엄마 몸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랬었다. 그러니 초등 저학년 때부터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세'는 마음에 백 번 공감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는데, 좋아하던 노래들이 꼭 다 저랬다. 초등학교 때 매년 학교 대항 예술제가 열렸다. 노래, 무용, 외에도 여러 분야가 있었다. 학교 대표로 군 교육청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도 교육청 대항에 나가고, 거기서도 입상하면 예술제를 무대에 서게 되었다. 3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로 독창 부분에 출전하곤 했다. 지정곡 한 곡, 자유곡 한 곡을 불렀다. 5학년 때 자유곡이 '은행잎'이다. 독창 지도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 대회 준비를 하며 자유곡을 고르느라 이 곡 저 곡을 부르는 중이었다. 몇 곡을 부르다 이 노래 '은행잎'을 부르고 났더니 그러셨다. "야, 너는 참 애가 무슨.... 이런 노래를 이런 감성으로 부르냐. 너 참 감수성이..." 그때 감수성이란 말을 처음 배웠다.

 

은행잎

가을 바람 솔솔솔 불어오더니
은행 잎은 한 잎 두 잎 물들어져요
지난봄에 언니가 서울 가시며
은행잎이 물들면은 오신다더니 

 

어쩐지 이런 노래들이 좋고 잘 불러졌다. 부재, 상실, 그리움이 담긴 가사들이 어린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은행잎'을 불러 입상을 하고 6학년이 되었다. 다시 예술제를 준비할 때가 되었을 때 자유곡 선정을 위해 여러 곡 불러보지도 않았다. 내 노래로 한 곡을 정해서 가져오셨다. '아빠 생각'이었다. 잘 불렀고, 입상을 하고 다시 예술제 무대에 섰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유곡 선정을 잘못해서, 내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가끔은 시차의 기억에 오류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일이 먼저고, 그 때문에 이 노래를 선택했던 거지!' 6학년 대회 이후로, 다음 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이 노래 역시 늘 깔린 내 마음의 BGM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가 다시 그리워 아프다. 가슴이 쓰리다.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던 어린 날의 내가 가엾어 가슴이 쓰리다.    

 

아빠 생각

봄이 오니 제비도 돌아왔건만
멀리 떠난 우리 아빠 언제나 오시나
기적소리가 울릴 때면 설레이는 이 마음
아아 우리 아빠 보고픈 우리 아빠

 

내가 사랑하던 모든 노래가 이렇듯 운명을 끌고온 것일까. 어쩌자고 나는 어릴 적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엄마 떠난 지 70여 일이 지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엄마가. 결국 나는 이렇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았구나. 엄마가 보고 싶다. 양평 숲에서 본 그 찔레꽃을 한 잎 따먹고 올 걸 그랬나. 꽃잎에서 엄마의 맛이 났을까. 엄마, 이렇게 말고  "엄마 엄마" 꼭 두 번을 부르고 싶다. 늘 마음에 울리는 저 노래 탓인가 보다. "엄마 엄마" 불러도, "엄마 엄마" 두 번을 다시 불러 네 번을 불러도 "와이야~" 하는 답이 없다. 엄마 엄마, 부를 때마다 휑하고 부는 찬바람에 마음만 아득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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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한 머리칼, 흐릿한 시력, 흐물흐물한 살.

거스를 수 없는 늙은 몸의 신호, 3종 세트다.

흐물흐물한 살들이 복부에 모이고, 두둑해진 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먹어도 살은 찔 것 같지 않았던 남편의 배가 두둑해졌다.

"탄수화물 먹지 말래. 나 이제 저녁 안 먹을 거야. 닭가슴살 먹을 거야."

그 답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어떤 욕구보다 식욕이 낫았었는데, 

절제하려 하면 이상하게 더 치솟는 것이 우리의 욕구다.

"아, 여보. 어떡해. 이것밖에 안 남았어. 밥이 자꾸 없어져. 맛있는데 너무 빨리 없어져."

 

금요일인데, 저녁으로 닭가슴살 하나를 먹겠다고 한다.

그러고 기도회 다녀오면 분명 또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고민에 빠질 것이다.

"현승아, 라면 먹을까?"

여드름 때문에 인스턴트 끊겠다는 아이까지 끌어들여 라면을 끓일지 모른다.

 

닭가슴살 대신 떡볶이를 먹기로 했는데.

떡은 딱 한 주먹 넣었고, 

양배추, 마늘쫑,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파를 산더미 같이 넣었다.

저탄수화물 떡볶이라고 하자. 

떡볶이라기보다는 족보가 야채 볶음 쪽인 것 같지만.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다.

 

등교날이라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떡볶이 재료를 보고 기겁을 했다.

"와, 이걸 다 넣었다고? 최악이다. 최악의 떡볶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더 늙어서 이까지 못 쓰게 되면 떡볶이 죽을 개발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떡볶이를 참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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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J 2020.05.26 10:57

    사모님표 떡볶이는 늘 다양한 변신을!
    근데 매번 맛있어 보이기 있기, 없기요!! ㅋㅋㅋ

  2. SJ 2020.05.26 11:02

    즐겨 쓰시던 '음식'에 대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는게.. 한결 안심이 되고.. 그렇습니다... 대충 이렇게 얘기해도 제 맘 아시죠?

    • BlogIcon larinari 2020.05.26 21:14 신고

      안심된다는 말, 딱 와닿죠!
      특히 '한결' 안심되니까! ^^
      이젠 총각이 된 한결이 볼 날이 머지 않았으니, 한결이 가족 만날 생각이 기쁨 한 조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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