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닮아 그림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채윤이. 그림 그리며 개인 상담 받고, 그림으로 마음을 만나는 집단 상담을 몇 회기 하더니 풍덩 빠져버렸다. 게임도 안 하고, 유투브도 안 보고 그림만 그린다. 내 글쓰기 강의 곁눈질로 듣고 열심히 쓰더니 요즘은 그림만 그린다. 심지어 일기도 그림일기다.

휴가 중이다. 숙소의 밤, 할 것 없어 심심한 중에 그림에 빠진 채윤에게 속담 퀴즈를 냈다. 신서유기 송민호 저리 가라! 우리 채윤이가 더 천재다! 천재적 오답을 깨알 필기했다.


호랑이도?
죽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토끼 보고 안심한다.

빈 수레가?
은수레다.

오뉴월 감기는?
오랜 간다.

수염이 석 자라도?
묶어야 예쁘다.

빚 좋은?
때깔.

바늘 도둑이?
소 된다.

못된 송아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

말 한 마디로?
상처 받는다.

닭 잡아먹고?
알 깨먹고.

같은 값이면?
안 산다.

가지 많은 나무에?
열매 맺힌다.

가는 날이?
오는 날.


'푸름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 속담  (0) 2021.02.15
채윤이 첫 투표, 나의 오랜 기도  (0) 2020.04.15
딸, 여정의 벗 되다  (0) 2020.02.07
현실 놀이, 현실 남매  (0) 2019.07.28
축하가 필요한 수험생  (0) 2018.11.26
이김이 필요한 수험생  (0) 2018.10.15

 

 

 

 

당신도 나도 단 한 번의 인생 밖에 살지 못한다. 그런데 마치 다른 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으로 산다.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은 내일이 올 거야, 같은 희망이든. 언젠가 로또 같은 한 방이 터질 걸 기대하는 환상이든. 심지어 '이생망이야!' 하는 말조차 애초 다른 좋은 삶이 있었는데 뭔가 잘못됐다고 하는 것 같다. 희망이든, 환상이든, 지레 뒤집어쓰는 절망이든 변하지 않는 진리는 나는 단 하나의 생 밖에 살지 못한다.

 

자기 앞의 생.

 

1일 1영화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영화 제목과 정보, 목록만 훑어보다 영화 한 편 볼 시간 다 버린다는 '넷플릭스 증후군'에 있단다. '증후군'에 지기 싫은 마음에 빠르게 선택하려고 한다. 대략 장르 정하고 직관적으로 탁 찍어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 웬만하면 좋다. <자기 앞의 생> 제목에 끌려서 보았다. 그렇고 말고. 자기 앞의 생!이다. 누구나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갈 뿐이다. 타인 앞에 놓은 생을 살게 되진 않는다. 영화가 그런 건지,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1일 1영화 하면서 1일 1눈물까지 패키지다. 요즘 보는 영화마다 그렇다. 

 

 

 

 

 

"내 머릿속에서 그 일을 지워달라고, 그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제발 그 사건을 기억 속에서 지워주세요." 한참 전에 글쓰기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다. 고통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절절하지만 그럴수록 그 기억이 또렷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난 날 겪은 그것들을 가지고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살아야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마담 로사도, 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엄마를 그리는 난민 소년 모모도. 지나간 고통이 크고 또렷하여 오늘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생망은 아니다. 그 뻔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희망이 자기 앞의 생을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된다. 고유하게 아픈 어떤 인생들이 교차하고, 거기서 살아야 할 어떤 이유가 발견될 때 생은 다른 길로 접어든다.

 

 

 

 

 

아침에 눈을 떠 그대로 누운 채로 남편에게 말했다. "마음이 괴로워. 이유 없이 마음이 괴로운지 모르겠어." 어젯밤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며칠 이런 상태였던 것 같기도. 결국 아침 먹은 걸 체하고 말았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 말고 먹은 것도 없어 텅 빈 구역질을 했다. 오후에도 맥을 놓고 누워 있다 "선생님, 글을 써서 올리고 밤새 체한 것처럼 아파서 잠을 못 잤어요." 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어젯밤 그 글을 읽고 가슴이 콱 막혔었다. 그의 이야기인데, 아니 그가 치료하는 아이 이야기인데, 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오래전에 다 정리된 '나의 이야기'라 여겼는데 무슨 일이지? 이유 없이 괴로운 게 아니었다. 요 며칠 뭔가 죽도록 욕을 먹은 느낌도 있었다. 뒤가 아니라 앞에 놓인 생에 관한 것이다. 내 앞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몸살이다. 갑자기 일어나 책꽂이로 가서 브레넌 매닝의 <신뢰>를 꺼냈다. 필요한 책, 약이 되는 책이 꼭 이렇게 갑작스런 처방전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다.

 

영화도 그렇다. 오늘 본 <자기 앞의 생>이 그렇다. 고통이든 행복이든 비교가 불가한 자기 앞의 인생들이 있음을, 인생과 인생의 교차점에서 생기는 화학반응 같은 삶의 의미와 희망 같은 것들을 영화가 일깨워주었다. 약이 된 영화였다. 지난 날을 끌어안고, 다가오는 생을 마주하며, 오늘 내 인생과 겹쳐진 벗들을 위한 기도로 이 밤을 마무리하면 이 체기가 온전히 가실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앞의 생  (0) 2021.02.14
두 교황 : 둘, 그 사이 또는 너머  (2) 2020.04.10
릴레이 독서  (0) 2020.02.23
토이 스토리 : 쓰레기와 구원자 사이  (0) 2019.07.12
다시, 책만 보는 바보  (2) 2019.06.30
지금 이 순간, 분별  (6) 2019.03.02

 

 

 

 

 

소설

 

전작 주의자로서 마음에 든 작가의 책은 절판도서를 웃돈 주고 사서라도 읽는다. 스캇 펙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자이다. 전작이 다 뭔가, 전작을 기본 두세 번씩 어떤 책은 옆에 끼고 있다시피 한다. 그러나 실은 '전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스캇 펙이 쓴 소설 두 권은 10년이 되었어도 읽지를 못했다. 받아들이기 싫었다. 나의 펙 박사님이라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나 《거짓의 사람들》의 스캇 펙이다. 스스로 '과학자'라 말하는 심리학자이다. '과학'의 배를 타고 합리적 추론의 노를 저어 영성의 섬에 닿는 기가 막힌 저서이다. 그러면 됐지. 과학자가 무슨 소설이란 말인가. 과학자를 표방하여 쓴 저서에서 그렇듯 투명하게 자신의 드러냈으면 됐지, 뭐가 부족하여 소설이란 말인가. 

 

 

소울 

 

영화 <소울>을 보았다. 어쩐 일인지 영화 중간에 졸고 말았다. 졸고 났더니 맥락을 다 놓쳐서 관람했다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미리 접하고 간 영화에 대한 극찬이 무성했는데, 무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함께 본 남편이 참 좋았다는데 뭐가 기억에 남았어야 말이지. 안 되겠다, 식구 중 유일한 미 관람자인 현승이와 함께 재관람하기로 했다. 식사 중에 픽사 애니메이션 얘기로 수다가 길어졌다. "엄마, 코코를 안 봤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 영화를 안 봤을 수가 있지?" 하며 저녁 식사와 대화가 끝났다. 아이들 설거지하는 사이 바로 <코코>를 사러 네이버에 영화로 달려갔다. 영화가 끝나니 식구들은 모두 방으로 흩어지고 어두운 거실에 혼자다. 'Remember Me'를 들으며, 마마 코코가 "파파?" 하고 따라 부르는 'Remember Me'를 들으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다. 소울. 영혼. '영혼'에 대한 심상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엄마다. 세상을 떠난 영혼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바로 그리움으로 달려간다. 영화 <소울>을 보며 졸기 시작한 지점이 딱 생각난다. 몸을 입기 전 영혼은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직 내가 아는 영혼들, 나와 연결되었던, 연결된 영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코코>의 해골바가지 영혼들이 참으로 정겨웠다.

 

 

소설

 

1월 말에 스캇 펙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창가의 침대》를 연이어 읽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벌써 여러 번 읽은 남편이 새해 다시 또 꺼내 읽고 책꽂이에 꽂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이걸 한 번씩 읽을 거야." 괜히 질투가 나서 무작정 펼쳐 들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심리적 영적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남편이 이 책을 읽고 조금 달라졌었다. 하도 신기하여 나도 좀 읽어볼까 펼쳤었는데 영 마음이 펼쳐지질 않았었다. 결국 읽지 못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고 단지 질투심에 펼쳐 든 책에 쏙 빠져버렸다.  《창가의 침대》 역시 출간 되자마다 보관함에 담아 두었었는데 영 마음이 향하질 않았다. 때가 되었는지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단숨에 읽고 바《창가의 침대》를 집어서 달렸다. 

 

 

소울

 

글을 얼마나 썼다고, 상상력도 빈약한 주제에 요즘 언감생심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려면 허구의 장치가 필요하겠구나 싶다. 자칭 과학자인 스캇 펙이 소설을 쓰고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스캇 펙은 '영혼'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에서는 몸을 떠난 사후 세계의 영혼을, 《창가의 침대》에서는 이 땅을 사는 영혼을 그린다. 과학자로서 치료자로서,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역작은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장과 변화에 천착한 스캇 펙은 결국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악'에 가까운 존재로 지목한다. 두 소설은 그 이야기의 변주이고. 에고로 가득 찬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변화시키길 거부하고)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악이라고 정의한다. 치료 장면에서 그런 존재들을 만났고, 결국 '악' 또는 '거짓의 사람'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아프게 자기의 진실을 마주하며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끝내 변화하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희생양을 찾는가.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 지점에서 스캇 펙은 '영혼'을 떠올린 것 아닐까.

 

 

소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살았다. 재작년에 내적 여정에 오신 S 선생님은 조용히 여정의 전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연말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하는 일이었고, 좋은 직장이었는데 내적 어려움을 유발하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작년 1년을 쉬면서 치유 글쓰기에 참여했는데, 어찌나 지난하게 글로 자신을 만나가는지! 같은 주제로 한 번 더 글을 쓰시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는데 기꺼이 재수강을 하셨다. 어떤 주제의 글을 써도 S샘의 글엔 '아버지'가 어른거렸고, 재수강에선 더욱 아버지가 새롭게, 또렷이 드러났다. S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로 쓰는 일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몇 바닥 씩 글을 쓰고 또 썼다. 올해 복직을 앞두고는 꿈 모임에 신청하여 참여했다. 몇 주 전 순서가 되어 자신의 꿈을 나눴는데, 또 아버지이다. 투명한 사람에겐 꿈도 투명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 투명한 말은 듣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꿈 모임 마치고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고 했다. (이 땅에서의 온전한 화해가 가능할까, 특히 부모와.) 나 또한 S샘 생각으로 먹먹해져 지내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선물로 보냈다. 그 책을 읽고 꿈의 메시지를 복기하면서 마음이 잘 정리되었다고 한다. 꿈 나눔 후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월요일 밤, 글을 한 편 쓰고는 "내일은 병원에 계신 아빠 면회를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하고 잠이 들었단다. 다음 날 화요일 새벽에 아버님 임종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아버님을 저 하늘로 보내드렸다. 조문을 가서 만난 S샘의 얼굴이 평안해 보였다. 장례식 마치고 꿈 모임 방에 올린 글로 보는 S샘의 마음의 여정은 그야말로 소설이다. 이 아름다운 마음의 여정으로 소설 한 편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

 

소설, 소울

 

스캇 펙 같은 통찰력이 있는 것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깊은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마주하는 일을 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높은 도덕적 행동과 착한 모습 너머의 추하고 완고한 모습을 볼 때 혐오스럽고 동시에 몹시 두렵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인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뜻이고 혐오스러움이 동시에 두려움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또는 스스로 의식하는 자아는 부족하고 선하지 않다며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들 안에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땐 경외감이 든다. 어떤 아름다움 같은 걸 본다. 《창가의 침대》에서 평생 침대에 누워 살아야 했던 중증 장애인 스티븐의 빛나는 영혼, 그 빛을 알아본 상처 투성이 간호사 헤더의 빛은 나도 얼핏 접해본 것들이다.'그 20여 년 치료 장면에서 만난 아이들, 엄마들, 그리고 내적 여정이나 강의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 아니 일상을 둘러 싼 사람들. 몸이 아니라 영혼으로 만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설명이 불가한 지점이다. 스캇 펙이 그려낸 인물 중 '스티븐'을 태어나서 한 번도 침대를 떠나본 적 없는 중증 장애의 몸을 가진 존재로, '그로초브스키 부인'을 마비된 몸을 가진 존재로 그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볼 힘은 1도 없고, 온전히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몸과 대비된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답고 자유로운지 상상함으로 보게 한다. 매캐덤스라는 흐트러짐 없는 외향(태도, 능력)을 갖춘 이가 논리를 통해 앞으로 살아갈 길을 고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전신 마비의 스티브, 삶은 무질서하고 상처투성이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간호사 헤더, 매력 없는 외모와 일 못하는 원장 시터먼 같은 사람과 대비되는 매캐덤스의 멀끔한 외향은 그 자신의 영혼과는 또 어떻게 대비되는지. 

 

남편은 앞으로 새해가 시작 될 때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다시 읽겠다고 한다. 그가 그 책을 뽑아 들 때마다 나도 덩달아 그 옆에 있는 《창가의 침대》를 뽑아들까 한다. 융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성장하여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약 이 땅에서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며 죽어서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 스캇 펙은 그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그렇다면 오늘 이 순간의 성장을 회피할 이유가 무엇인가, 소용이 무엇인가.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소울  (2) 2021.02.12
아무것도 너를  (0) 2021.01.18
중년을 위한 치유 글쓰기  (1) 2021.01.04
밤에 온 러브레터  (0) 2020.12.23
아래로부터의 영성  (0) 2020.12.10
끝까지 가라  (0) 2020.11.27
  1. 2021.02.13 15:36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1.02.14 23:03 신고

      그렇게 하셨으면,
      그렇게 내적 여정을 걸어가셨으면.

      제 나름대로 그런 기대가 있는데요. 선생님 꼭 그렇게 가고 계시네요. 정말 감사해요. 다르지만 또 크게 다르지도 않을 각자의 여정 걷고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해요 :)

 

 

 

엄마 충청도와 전라도,

고모 평안도,

시어머니 경기도.

 

 

내 몸에 흐르는 음식의 피가 이런 지역색을 띠고 있는데, 세 여인들에게서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배추 전'이 나는 그렇게 좋더라. 배추 전은 강원도 음식이라는 것 같은데. 노란 배추로만 가능한 줄 알았더니 봄동 배추를 가지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봄동을 사서 겉잎은 전으로 속잎은 겉절이로 해서 몇 번을 먹었다. 봄동은 어쩐지 그냥 마음이 끌리는 식재료이다. 장을 보러 가서 봄동이 눈에 띄면 일단 사고 본다. 이름에 끌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파로 추운 날에 '입춘'이라는 절기가 끼어들어 있다. 더위로 지글거리는 날에 만나는 '입추’가 있다. 그런 느낌 같다. 아직 추운데, 체감하는 계절은 겨울인데 봄동이라니! 그러자면 어릴 적에 본 것 같기도 한 봄동이다. 시골에 살았지만 농사를 짓는 집은 아니어서 통 아는 것은 없지만 눈에 익은 풍경들이 있다. 겨울 언 밭에서 누런 잎을 달고 바닥에 딱 붙어 있던 봄동을 봤던 것 같다. 또렷하지 않은 그 이미지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봄도 그립고, 어린 시절 그 밭이 그립고, 어릴 적 봄이 오는 날의 차갑고도 따스한 공기도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엄마, 엄마가 그립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동 전  (0) 2021.02.05
탑블레이드 스테이크  (0) 2021.01.18
사랑(이)라면, 죄책감(이)라면  (1) 2021.01.10
미미-채윤네-차돌박이 떡볶이  (0) 2020.12.10
미미-채윤네 떡볶이  (3) 2020.12.05
취향 맞춤 점심  (0) 2020.10.07

 

 

 

 

 

지하주차장까지 마중 나온 현승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양손에 짐을 든 현승이를 생각해서 급한 마음으로 층 버튼을 눌렀다. 빠르게 13층 누르고, 그리고 빠르게 11층을 눌렀다. 어, 하고 다시 빠르게 11층을 눌러 취소했다. 그 사이 천천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짧은 침묵, 그리고 현승이가 말했다.

 

 

엄마, 지금 11층 버튼... 닫힘 버튼이라고 누른 거지?

엄마는 잘못이 없어.

11층 버튼이 닫힘 버튼이었어야지, 11층 버튼인 것이 잘못이지.

엄마가 요즘 막 던지는 말들 있잖아.

그것도 엄마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이 잘못이야.

엄마가 하고 싶은 그 뜻을 담고 있어야지, 왜 다른 뜻을 담고 있어.

엄마는 잘못이 없어.

 

 

말의 잘못

: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기로 하고 역할 분담을 시킨다. "현승이 아침 올려!" 현승이가 알아듣고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울린다. 방금 전 채윤이가 "엄마, 나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갈 거야"라고 말해준 덕분이다. 내 말이 요즘 이렇게 나가고 있다. 아침-물 정도의 맥락은 상당히 선명한 편이다. 하는 말과 나온 말 사이의 연관성이 찾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너무나 흔한 일이라 웃음으로 승화할 수도 없다. 멍청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11 버튼이 닫힘 버튼이 아닌 게 잘못이지.

튀어나온 단어가 엄마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담지 않은 게 잘못이고.

 


이것은

지극한 공감과 위로인가,

뼈 때리는 저격과 경고인가.

 

 

아무튼 아들은 잘못이 없다.    

 

 

 

  

  1. 2021.02.04 22:47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1.02.05 16:21 신고

      현승이랑 비슷한 마음 결을 가진 이모가 그 마음 알아주는구먼! ㅎㅎㅎ

 

 

엄마, 아빠랑 이혼할 거야?

 

처음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는데, 두 번째라 놀랍지 않았다. 둘째 현승이의 말이다. 좋은 분위기였다. 성탄절로부터 연말연시, 그리고 이어진 특새로 네 식구가 뒹굴며 삼 시 세 끼를 하는 중이었다. 성탄으로 시작한 나날이고, 이사하고 정신 차려보니 집 앞에 이마트 트레이더스였다. 이렇게 많은데 이 가격? 여기에 넋이 나가 연일 먹방이었다. 이러다 파탄 나겠다 싶어서 장보기를 멈추고 냉장고 파먹는 중 묵은지 베이스로 꽤 괜찮은 파스타를 만들었다. 다들 정말 맛있게 먹으며 "찬양하라, 엄마를! 정신실을 찬양하라!" 기분 좋은 집회였다. 나는 자비롭고 겸손하기에 한 마디 했다. "별 거 아냐. 아무거나 넣고 한 거야. 당신도 배워. 당신도 혼자 해 먹을 수 있어. 이제부터  좀 배워야지." 

 

 

그 말 끝에 채윤이는  "엄마는 왜 아빠가 엄마보다 더 오래 살 거라고 규정해? 엄마가 혼자 남을 수도 있잖아."라고 오버를 했다. 현승이는 열 술을 더 떴다. "엄마, 아빠랑 이혼할 거야?" 혼자 사는 아빠에 대해 채윤과 현승이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 채윤인 시종일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쿨한 채윤이다. 현승이는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서 말과 행동 너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 언젠가부터 잦아진 엄마 아빠의 충돌, 엄마도 이해되고 아빠도 이해되다 엄마한테 화가 나고 아빠로 속상한 현승이는 한 발 더 나간다. 한 발 한 발 나가다 열 발을 나가서 하는 말이 "이혼할 거야?"이다. 작년 가을, 아니다 작년 여름휴가, 아니다 언제부터지? 누나와 아빠, 엄마와 아빠 사이 크고 작은 갈등이 많았다. 페미니즘 때문이기도 하고, 성인이 된 누나가 제 목소리 내는 과정이기도 하고, 갱년기 엄마 아빠의 숨기지 못하는 유치함이기도 했다.

 

 

아이들 앞에서 거침없이 갈등을 드러냈다. 인신공격까진 하지 말자 다짐했고, 남편과 내가 서로에게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남편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분명한 뜻이 있었다. 일단 페미니즘이다. 영 페미니스트 채윤이 앞에서 무뎌진 내 감각이 살아났고, 딸을 더 진화한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포기했던 부분에서 다시 날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스스로도 꽤 괜찮은 남자 사람 아빠지만 여전히 달라져야 하는 남자 사람 아빠를 마주하며 분열적으로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아빠 앞에 거침없이 맞설 수 있는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채윤이를 위해서 부러 채윤이 편에 섰다. 누구보다 진보한 남편이지만 가부장제 안에서 자란 습성을 고스란히 가진 남편에 대해 함께 분노해줬다. 해줬다, 보다는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앞에서 투닥거릴 일이 더 많아졌다.

 

 

실은 더 아픈 뜻이 있다. 남편과 함께 쓴 결혼에 관한 책 제목이 '와우결혼 :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이다. 자신감이 지나쳐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제목은 나름대로 해학을 담은 것이었다. 와서 보라는 것은 우리 부부가 얼마나 행복한지, 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싸우는지'였다. 말하자면 대놓고 부부싸움, 지면에서 하는 부부싸움이었다. 글을 쓰고 책을 낼 때만 해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잘 살고 행복하다는 게 아니라 얼마나 싸우고 있다는 얘기라니까요! 이런 자부심이었다. 세월이 지나 중년이 되고 부부 관계로 어려운 분들을 만나다 보니 이것조차 얼마나 폭력적인 자랑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이렇게 안 싸워요,나 우리 이렇게 잘 싸워요, 나 결국 우리 부부 잘 났어요, 하는 자랑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우리 같은 부부가 사회와 교회에 끼치는 해악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젊은 부부의 위기 상담을 하면서 확인하는 바, 좋은 부부에 대한 환상이 갈등 해결에 장벽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부모님은 가정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교회 목사님 부부, JP&SS 부부, 션-정혜영 부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가정을 꿈꾸고 결혼했고, 기도하면 그런 가정 될 것이라는 '환상'이다. 환상은 현실이 될 수 없다.  환상이 신앙과 만나 신경증이 되는 것을 아프게 지켜보았다. 기도하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집착이다. 현실 부부 사이에서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기도로 도피하고 말하서 결국 해결점에서는 비켜나고 마는 것을. 책을 쓰고 청년들 앞에서 강의에서 했던 말들을 아프게 되짚어 보게 된다.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혼을 꿈꾸거나, 심정적으로 이혼의 상태로 사는 이들을 보면서 회개한다. 좋은 부부, 건강한 관계, 행복한 가정 같은 것에 대해 함부로 나불대던 입을. 내 삶은 the way가 아니라 a way라고 힘주어 말했어야 하는데.

 

 

이런 성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유치하고 부끄럽지만 그대로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이다. 두 아이 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판단능력이 생겼다는 확신도 있다. 코로나로 너무 붙어 있다 보니 제어가 안 되는 것도 있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면도 있다. 싸움이 없는 부부가 아니라 잘 싸우고 잘 성장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는 또 하나의 환상을 만들고 있는지도. 그런데 여하튼 현승이의 질문, "엄마 아빠 이혼할 거야?" 이건 나름대로 심각했다. 현승인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두렵다고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현승이가 아직 어리다는 것. 아니, 부모 앞의 아이들은 평생 어릴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조금 아프고, 조금 미안하고, 조금 막막하다. 

 

 

월요일에 남편과 강릉에 다녀왔다. 언제나처럼 남편은 내가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길, 먹고 싶은 것에 맞춘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남편은 '나'에게 맞추기 때문이다. 정말 별 것 없는 하루였다. 강릉에 갔고, 검색한 순두부 맛집에 갔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그냥 차선을 선택했고, 그럭저럭 괜찮았고, 커피도 좋아하지만 기분에 따라 카페를 선택했고, 많이 아쉽지만 우리가 원했던 건 그저 바다를 보며 커피 마시는 거였으니 대충 만족했고. 채윤 현승 기쁘게 해 주려고 회를 포장했고, 저녁으로 집에 와 맛있게 먹었고. 이게 전부다. 이게 일상이다.

 

 

남편이 쉬는 월요일 하루 일정으로 속초, 양양, 강릉에 다녀오는 날이 많다. 그게 그것인 일상이지만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늘 새롭게 아름답다. 겨울이면 더욱 그렇다. 가지만 남은 겨울 나무가 석양과 함께 빚어내는 풍경은 예술이다. 이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내 마음의 여정은 더 예술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39년 전 그 겨울 이후, 눈 똑바로 뜨고 겨울나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나다. 수묵화 같은 겨울 산이 아름답다고 말하던 남편에게 화내던 나다. 이젠 안다. 그 아름다움을. 상실이 빚은 풍요의 예술을 나는 안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며 DJ가 되었다. 싱어게인 가수들 한 바퀴 돌고, 그 노래들이 끌고 나오는 추억의 노래를 다시 듣고.... 김정호의 '하얀 나비'가 나는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그 청승맞음이 좋다. 청승 떠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인데 희한하다. 청승으로 시작해서 청승으로 끝나는 이 노래가 좋아서 리메이크하는 모든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다. 오늘은 황치열이다.

 

 

내 존재에 깊이 박힌 청승을 안다. 치명적인 상실, 존재에 뿌리 박힌 '잃어버림'에 대한 감각 또는 통증이다. 그것은 내 마음의 텅 빈 공간이다. 아버지 죽음에서 기인한다고 믿었는데 그 이전이다. 그 이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전, 이전이다. 이전의 근원은 아직 잘 모르겠다. 강릉 가던 길인지, 강릉에서 오던 길이지 모르겠다.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생각해보니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늘 무언가 그리웠어. 그리운 그 무엇을 잡으면 놓칠 것 같았고 빼앗길 것 같았고 실제로 경험적으로 그랬어. 그런데 당신 만나고부터 무언가를 그리던 텅 빈 공간이 채워졌어. 물론 그 이후로 외롭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고, 실존적 슬픔이 없어졌다는 뜻도 아닌데, 당신 만나고 무언가 치명적인 그리움이 치유됐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 완벽하다는 뜻도 아니고, 더 바랄 게 없다는 뜻도 아닌데 이 사람은 내 청승을 거둬갔다. 청승맞은 노래를 부끄럼 없이 부르고 들을 수 있게 해 줬다. 

 

 

현승인 늘 엄마 아빠의 대화에 귀가 커진다. 내용엔 관심이 없다. 감정적 대결이 있을까 없을까, 그로 인해 엄마 아빠가 아플까, 이것이 관건이다. 현승이 입장이 되어 생각해본다. 우리가 요즘 너무 서로를 막대하나, 특히 내가...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부러 그러기도 하고. 분명한 건, 더는 나를 포장할 수 없게 된 갱년기 탓도 있다. 더욱 분명한 건... 이대로 나를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이 사람뿐인 걸. 내 인생의 청승을 거둬간 이 사람은 포장을 모르는 사람이다. 책 쓰고 방송에 나가고, 잘 나가는 아내를 포장지로 이용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사람이다. 온 몸이 포장지 투성이인 나는 "니도 좀 포장을 해라고!!!! 세련되게 포장을 해보라고!!!!!" 하며 자해를 하고 몸부림을 하다 제 풀에 포장지가 벗겨져 버리는 형국이다. 이랬든 저랬든,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 이런 말은 다시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한다. 보여주는 결혼 말고, 다만 아프게 사는 결혼으로 만족해 보려고 한다.  "엄마, 아빠랑 이혼할 거야?" 아들에게 이런 말 들으며 꿋꿋하게 잘 살아보려고.   

 

 

 

 

  1. BlogIcon 겨자씨한알의꿈 2021.02.08 22:36 신고

    선생님.. 글 읽으며 눈물 찔끔.나올락말락.
    어디 읽어주고 싶은글.
    위로받고 갑니다.

    • BlogIcon larinari 2021.02.11 10:01 신고

      선생님의 공감에 저도 위로 받아요.
      명절 잘 보내세요 :)

  2. 2021.02.09 13:06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1.02.11 10:04 신고

      저도 글 올리면서 '잘 쓰지 못한 글'이라는 부끄러움이 항상 있다는 거, 모르시죠? 늘 그런데.... ^^ 가끔 이런 흔적으로 늘 읽어주시고 함께 해주심 느끼고 있어요. 곧 다시 새 그룹 시작하려고요. 바로 블로그에 알릴게요. 요일은 변경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거기서 참석하시기 좋은 시간대, 또는 요일을 비밀댓글로 좀 남겨봐 주시겠어요?

 

 

 

 

여보, 이거 하나 남겨줘. 나 이따 갔다 와서 먹을 거야.

 

온라인 주일 예배 설교하러 가는 목사가 남긴 말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사랑스럽다. 목사가 된 후, 한 교회를 책임 맡은 목사가 된 후 토요일 아침부터 주일 예배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가족들 숨도 못 쉬게 하는 사람이다.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존재 자체로 눈치를 보게 하는 것이, 그냥 숨을 못 쉬게 하는 것이, 설교 준비는 '산소'로 하는 건가 싶다. 설교 준비는 광합성하는 식물이 밤을 보내는 메커니즘인가? 집안의 산소란 산소는 다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만 내놓는 존재인가. 설교자는. (그렇다고 설교를 잘하면 말이나 안 하지, 하는 말을 하지 않으련다.) 토요일에 아빠가 사무실에 나가지 않으면 아이들도 긴장이다. 토요일엔 빨래도 안 돌리고(빨래 너는 건 아빠 몫이라) 안방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한다. 공평하게 분배된 설거지도 당연히 열외이다. 때로 (아마 설교가 안 풀리는 날이겠지) 음악을 크게 틀거나 셋이서 재밌는 얘기 하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안방 문을 타고 넘는 것도 곤란하다. 까다롭다, 정말.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모두 잠든 시간 혼자 일찍 일어나 정장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나간다.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다. 1부, 1부, 3부 통틀어 드리는 온라인 예배 덕에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교회 아기들이 그렇게 선망하는, 제 아빠가 결혼식 가려고 차려입으면 "하아, 아빠 멋있다. 목사님 같아!" 한다는 비주얼로 나가면서 말했다.

 

이거 하나 남겨 놔. 갔다 와서 먹을 거야.

 

"보장 못해. 사수할 거면 냉장고에 숨겨 놔." 그 말 듣고 냉장고 안에 고이 숨겨 두고 나갔다. 그렇게 까칠하게 굴며 준비하던 설.교, 예.배.인.도, 하러 나갔다. 유투브 예배 영상 보면서 팬이 된 아가가 가져온 마카롱이다. 그런데 나는 저 말이 더 은혜가 된다. 설교자 남편보다 나이 쉰이 된 남자가 "이거 하나 남겨 줘"라고 하는 마카롱을 들여다보는 게 더 감동이다. 쉰이 된 그 남자는 평생 자기 욕구를 잘 모르고, 욕구를 모르니 표현은 더욱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아니다, 이 사람은 자기 내면을 모를 수 없는 사람이다. 젊은 날부터 밥 먹고 하는 일이 내면 성찰이었다. 자기 안의 있는 욕구 중 맛있는 무엇을 먹고 싶다거나, 더 많이 먹고 싶다거나 하는 것은 (알아도) 그냥 무시해 온 사람이다. "아빠는 그냥 넘길 줄 알아. 아빠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불편한 것이 있어도 그냥 받아줄 줄 알아" 약간의 존경과 안타까움을 담아 아들 현승이가 말했다. 사실 나는 갈수록 남편이 그냥 넘길 줄 아는 것이 불편하다.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좋겠다. 오십이나 된 남자에겐 그냥 넘기는 것이 더는 미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넘기고 흘려보낼 수 있는 의지는 젊을 때나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의지가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생의 오후에는 불편한 것을 느끼고 때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힘이다. 절실한 영성 훈련이다. 그래서 마카롱 하나를 지키려는 그 말이 좋다. 식구들이 다 먹어 치운 후에 "마카롱 어딨어? 내 꺼는?" 하거나. 아니 그 말도 못 하고 삐쳐서 속으로 쌓아두지 않고 그냥 "남겨 둬"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중년 이후의 숙제는 늘 하던 말만 하고, 생각하던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에서 단 1mm라도 빗나가는 것이다. 중년 이후 엄마 아빠의 말은 아이들이 백발백중 예측한다. 그것이 위험신호이다. 아이들은 예측하며 동시에 지겨워하고, 지겨움이란 귀를 틀어막는 전자동 귀마개니까. 별 말 아니라도 안해 본 말을 하는 것은 치매 예방에도 좋고 무엇보다 고귀한 영성훈련이 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안 한다 하는 것을 해보는 용기는 나이 들어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아름다움인지. 마카롱 하나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남편의 설교를 더 귀 기울여 듣게 하는 유혹이다.  

 

 

 

 

새벽기도 없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남편이 한 번씩 특별 새벽기도를 도모할 때는 나름 의미가 있어서(또는 받은 은혜가 있어서)이다. 신년 새벽기도를 한다고 했다. 전도사님과 단둘이 나가서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주제는 "해피 앤딩을 위한 여섯 개의 메모"란다. 교인 평균 연령이 나보다 딱 10년이 높은 교회이다. 새로 등록한 젊은 부부들을 제외하고 남자 교우 중 남편은 거의 제일 젊은 축이다. 이력으로나 성향으로나 청년 · 젊은 부부 목회에 최적화된 목사라 생각했는데, 인생이 알 수 없듯 목회자의 길도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지금 여기를 받아들인 남편은 은퇴 이후의 삶, 그리고 '좋은 죽음을 위한 좋은 삶'에 꽂혀 있었다. 남편이 말하는 해피 앤딩은 단순한 죽음이 아님을 안다.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현재이라는 뜻이다. 실존적 신앙은 실존적 죽음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는 것을 남편과 수도 없이 얘기했었다.

 

'해피 앤딩'이란 단어에 마음 머물러 신년 기도회에 끌렸다.  "J 전도사와 둘이만 나가서 할 거야." 이 말도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수요 기도회 할 때마다 "당신 와서 찬양 인도할래?" 먹히지 않을 말을 한 번씩 던지던 기억도 나서 "내가 새벽기도 찬양인도할까?" 했다. 옆에 있던 현승이는 작년 신년 새벽기도회 때 ppt를 맡아 개근하고, 아침에 먹던 해장국의 맛, 집에 와 2차로 자는 달콤한 잠의 맛을 떠올리며 "아빠, 나도 갈래." 했다. 채윤이는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지만, 엄마가 오랜만에 하는 찬양인도니 반주자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반주자 말고 일당 쳐주는 반주 알바로 섭외했다. 

 

월, 화, 수 3일 기도회 하고 폭설과 함께 한파였다. 이사한 우리 집은 교회와 꽤 멀어졌고,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 있다. 걱정하시던 운영위에서 목, 금, 토 새벽기도를 취소하고 한 주 연기하여 다시 월, 화, 수로 진행하기로. 날수로는 일주일이지만 체감은 2주의 새벽기도였다. 얼마만의 찬양인도인가. 텅 빈 교회당에서 방송용도 아니고 오프라인 용도 아닌 청중을 가늠할 수 없는 찬양을 했다. 음정 틀려, 박자 틀려, 선곡 구려. 채윤 현승에게 구박받으며 하루하루 날짜 지우듯 지나며 새벽 기도를 마쳤다. 

 

좋았다!

 

내 인생 마지막 특새의 기억이 끔찍하다. 그 특새에서 여러 번 불렀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메마른 땅에 샘물 나게 하시기를" 이 찬양은 트라우마에 가깝다. 그 2,3년의 특새, 수요기도회가 혼재되어 고통으로 남아 있다. 방언 기도를 받기 위한 특별 기도회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평신도에서 갑자기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 강요 당하고 감시 당하는 새벽기도는 고통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인생에서 깊은 기도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절절할 때였기도 하다. 아마 한국 교회에 대한 소망의 마지막 빛이 꺼져버린 나날이었지 싶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지만,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 내 마음이 캄캄해졌다고, 내 안의 소망이 무너졌다고 그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내 마음이 가장 캄캄할 때 내 하나님은 가장 환하게 다가오신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던 지도자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나의 하나님까지 망하시진 않는다는 것도. 새벽기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심지어 남편이 목회자가 된 탓이 아니라는 것도.

 

한 주, 아니 두 주간, 오전에 줌 강의 있는 날에 새벽기도 마치고 와서 눈을 붙이지도 못하고 오후 4시까지 달려야 하는 날이 있었다. 몸은 한 없이 피곤했지만 좋았다. 음정 틀려, 박자 놓쳐, 선곡 구린 찬양도 나는 좋았다. 많은 청중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매일 한 분 정도의 교우를 생각했다. 그분이 이 찬양으로 힘내시면 좋겠다, 기도할 용기 내시면 좋겠다, 이 정도의 바람밖에 없었다. 내 마음에 품은 그분이 누군지 그분 자신도 세상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좋았다. '해피 앤딩을 위한 여섯 개의 메모'로 이어지는 남편의 설교도 좋았다. 죽음을 등에 짊어지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끌어 안는 삶을 살겠다는 용기는 삶에의 열정이 되었다. 20여 분의 기도 시간이 좋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한 2021년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 그날, 트라우마로 남은 특새며 새벽기도와 화해하고, 그 시절 사람들과 화해하고, 내 하나님과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게 짱이다!

 

 

 

  1. 2021.02.02 10:55

    비밀댓글입니다

  2. 2021.02.03 03:55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1.02.05 16:26 신고

      뭉클하네요!
      정말 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하는데도 그 속으로 사시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요. 그런 울림과 속삭임이 들리신다면 힘을 빼고 이끄심에 따라야 하는 때인가 싶기도 하네요. 맞아요. 들어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책은 올 상반기 끝에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예상은 그러한데 모든 게 일단 들.어.가.봐.야. 제대로 알게 되는 거니까요!^^

 

 

걸어서 장 보러 가는 곳이 이마트 트레이더스인 상황. 걸어가서 우유나 콜드쥬스 1+1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사서 덜렁덜렁 들고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리는 주차장 쪽이 아니라 1층 출입구로 슬렁슬렁 걸어 들어가 고기 한 팩 딱 사서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건 뭐 올림픽공원이 자기 앞마당이라는 올림픽아파트 사는 친구 안 부러운 일이다. 한 번씩 마음먹고 가서 몰아서 장 봐야 했던 곳, 웬만하면 10만 원 단위로 카드를 긁게 되는 곳 아닌가. 고기 좋아하는, 한참 키가 크는 중(이라고 믿고 싶은)인 현승이 때문이라도 한 번씩 꼭 들러줘야 했던 곳이 코앞에 있다. 

 

등심 안심도 아니고, 척아이롤도 아니고 '탑블레이드'라는 고기가 있다. 트레이더스 매장 통틀어 가장 저렴하다. 생긴 건 부챗살이다. 꼬맹이 적 한때 잠깐 꽂혔던 그 팽이 탑블레이드가 고기로 변신하여 열아홉 현승이 앞에 나타날 줄이야. 잘만 구우면 아주 감동적인 스테이크가 된다. 피가 뚝뚝 떨어져도 좋다!는 식으로 엄마, 레어! 레어! 알지? 노래를 부른다. 올리브유와 소금, 로즈메리나 오레가노 같은 아무 허브에 재웠다가 버터 잔뜩 녹여 막막 구워서 꺼낸다. 그 팬에 양파를 비롯한 야채를 익히고, 익히는 동안 힘줄 부위 잘라내고 고기를 썬다. 야채를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뜨겁게 달군 가운데에 다시 고기를 모셔서 내주면 좋아서 환장을 하신다.

 

 

 

다 좋았는데, 누나 없이 독식하는 것도 좋고, 운동 다녀와서 배고픈 상태도 딱이었고, 다 좋았는데 파프리카가 삐꾸다. 현승이는 음식의 식감과 향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기준은 상당히 개인적이다. 파프리카는 생으로 마요네즈를 찍어 먹기에 적절하지 굽는 것은 안 된다고. 향이 너무 강해서 고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심지어 파프리카 근처에에서 구워진 야채까지도 오염이 되었다고. 먹어보지도 않고 일단 저렇게 한쪽으로 가지런히 몰아놓았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 파프리카 따위를 탑블레이드에 끼워 팔지 않을게. 

 

 

 

반쯤 먹었을 때 김치콩나물국을 내주면 캬아, 캬아, 해장국 먹는 아저씨 소리를 낸다. 엄지 두 개가 척 올라온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동 전  (0) 2021.02.05
탑블레이드 스테이크  (0) 2021.01.18
사랑(이)라면, 죄책감(이)라면  (1) 2021.01.10
미미-채윤네-차돌박이 떡볶이  (0) 2020.12.10
미미-채윤네 떡볶이  (3) 2020.12.05
취향 맞춤 점심  (0) 2020.10.07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나님을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다

_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연구소 2년차를 맞던 2020년을 새해 이 기도로 시작했다. 같은 노래를 새 마음 새 부대에 담아 2021년의 다시 불러야겠다 싶었다. 노래 가사에 온전히 마음과 몸을 맞추어 살고 싶다. 개인적인 삶은 물론 연구소를 일궈가는 마음도 딱 이것이다. 연구소 SNS에 올렸던 것 그대로 가져왔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억압하고 위장했던 감정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허튼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내적 여정과 모든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와 벗님들이 진짜 감정을 만나는 일에 정진하여 오직 슬퍼할 것에 슬퍼하고 분노할 것에 분노하는 길을 가겠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며❞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의 환상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그 환상의 끝이 내 생각, 내 논리, 내 지성의 우월주의이며 결국 타인과 나를 분리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지금 여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치유하는 현존을 살겠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제 존재 안에 이미 부어진 사랑을 믿으며 내주하시는 성령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겠습니다. 상담과 모든 여정 중에 만나는 벗님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치유의 힘을 믿으며 함께 걷겠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이름을 얻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연결되는 단 한 분을 소중히 대하겠습니다. 빠른 성장, 눈에 보이는 치유의 열매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지금 여기 치유하는 현존으로 계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나음터가 되겠습니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소울  (2) 2021.02.12
아무것도 너를  (0) 2021.01.18
중년을 위한 치유 글쓰기  (1) 2021.01.04
밤에 온 러브레터  (0) 2020.12.23
아래로부터의 영성  (0) 2020.12.10
끝까지 가라  (0) 2020.11.27

 

 

 

저녁으로 치킨을 시키기로 했는데, 연습실 갔다 늦는다는 채윤이가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먹을까, 했더니 그냥 셋이 먹어, 했다. "그럼 니 꺼 남겨놓을게. 와서 데워 먹어." 그런데 기프트콘으로 시킨 치킨이 예상과 달리 양이 적었고, 모두 배고팠고, 싹 먹어 치웠다. 먹는 것이 행복인 채윤이가 실망하면 어떡하지? 안절부절... 치킨 됐고, 라면 먹겠다는 말에 반색을 해서 '도착 10분 전에 알려줘. 엄마가 딱 끓여 놓을게!' 했다. 콩나물, 대파 팍팍 넣고 정성 다해서 시간 딱 맞춰 끓였다. 뭐라도 더 마음을 담고 싶어 심지어 파슬리 가루를 뿌렸다. (이건 정말 아니었는데... ㅡ.,ㅡ) 밥상을 받은 채윤이가 말했다.

 

"와아... 대박! 죄책감이야? 치킨 안 남긴 죄책감?"

 

"야아, 죄책감인지, 사랑인지 맛으로 느껴봐."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동 전  (0) 2021.02.05
탑블레이드 스테이크  (0) 2021.01.18
사랑(이)라면, 죄책감(이)라면  (1) 2021.01.10
미미-채윤네-차돌박이 떡볶이  (0) 2020.12.10
미미-채윤네 떡볶이  (3) 2020.12.05
취향 맞춤 점심  (0) 2020.10.07
  1. BlogIcon 괜 찮 아 2021.03.01 07:47 신고

    라면 맛있겠네요

 

 

 

 

"양수리 쪽으로 드라이브 나갔다 올까?" 아침 뉴스에서 본 얼어붙은 북한강 사진에 끌려서 던져봤다. 그냥 해본 말인데 혹한에 신년 새벽기도 취소하고 마음이 허해진 남편이 냉큼 붙들었다. 

 

 

눈 세상, 얼어붙은 강물, 빈 가지 사이로 보이는 텅 빈 하늘. 와, 정말 좋았다. 사람 많이 모이는 쪽 말고 마재 성지 쪽으로 해서 강변으로 갔다. 누가 누가 어떻게 와서 거닐다 갔나, 사람 발자국 쫓는 재미도 좋지만! 와, 새 발자국 발견. 신발도 안 신고 얼음 위를 저러고 걸으면 얼마나 발이 시릴까? 

 

 

 

 

새 님께서 남 걱정 말고 아들 걱정이나 하란다. 발목도 차지 않는 스니커즈 양말을 신은 아들 말이다. 조금 걷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질 것 같다며 홀로 차로 돌아가버렸다.

 

 

 

 

언 강을 보더니 아빠와 딸이 뛰어 들어갔다. 물만 보면 요리 본능이 발동해서 물수제비를 뜨는 남자. 꽁꽁 언 강에서도 일단 물수제비를 뜨고 본다. 

 

 

 

 

아빠를 인력거 삼아 썰매를 타기.

동네 안쪽을 걷는데 연밭이 맨질맨질 매끄럽게 잘도 얼었다. 엇, 거기 놓인 두 대의 썰매를 발견. 역시나 경험주의자 부녀가 뛰어 들어가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상쾌도 한 기분에 젖었다. 

가만히 구경하다 사진이나 찍고 요걸로 어떻게 글을 쓸까, 머리나 돌리는 게 제일 편한데. 굳이 썰매를 타보라고. 나는 됐다고 하는데도 굳이 타보라고. 그래도 싫다고 하니 책상다리 하고 앉아만 있으라고. 못 이기는 척 내려가 앉았더니... 우후~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집을 나서서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와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파아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 하늘이 있다! 나도 모르게 "와아, 파란 하늘이다. 하늘이 있어서..." 라고 했는데 세 식구의 귀 여섯 개가 모두 쫑긋하고 있는 느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말문이 딱 막혀 버렸다. 잠깐의 정적 후에 와하하하 비웃는 저 무리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하늘이 있어서, 하늘이 늘 여기 있어서... 

 

 

 

 

혹한의 한 가운데에서 두물머리 강변을 걸었다.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혹한의 두물머리  (0) 2021.01.09
2021 Big Family Day  (0) 2021.01.07
2020 Big Family Day  (0) 2020.01.25
연두를 기다리니 분홍이 옴  (0) 2019.04.14
꿈은★이루어지건만  (0) 2019.02.06
햇빛이 비추어 눈물이 납니다  (5) 2018.12.23

 

2021년 1월부터 <시니어 매일성경>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란 큰 제목을 걸고 중년 이후의 삶과 영성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요. 무엇이든 써야하는데 무엇을 쓸지, 쓰고 싶은지 모를 때면 꼭 혜성 같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글을 써보라" 옆구리 찔러주시고 멍석 깔아주시는 iami님 덕입니다. 엄마 돌아가신 이후 죽음, 상실, 애도에 천착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준비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중 제안을 해주셔서 도전해봅니다. 중년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일단 손을 놓았고요. 생의 오후인 중년 이야기를 건너 뛰어 저녁놀이 물드는 시간, 황혼에 머물러 보려고요. 쓰려고 마음 먹으니 살아보지 않은 날을 언감생심 논할 수 있나 싶어요. 감 놔라 배 놔라, 편하게 가르치고 행세하고 싶어서 '부캐(최선생님)'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럼 한 번 써보겠습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

 

 

내 나이 쉰셋,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이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고, 배울 것은 많은 세상이다. 새로운 일을 자주 시도하는 편이지만 좀처럼 설레는 일은 없다. 일은 물론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 만나봐야 거기서 거기니 조금 서글프다. 헌데 오늘 예상치 못한 만남이 낯선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솜털 피부에 말랑한 언어를 가진, 호기심 가득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여든을 넘긴 어르신! 눈꺼풀부터 턱밑 피부까지 중력의 법칙에 온전히 순응하는 근육이며, 검버섯이 핀 얼굴의 최 선생님이다. 한 학기 강의를 들었고, 종강하던 날엔 수강생들 다함께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전에 출간하신 책 개정판을 내시는데 도움을 드리기로 했고, 그 일로 오늘 처음 개인적으로 뵙게 된 것이다. 교정작업을 도와드리겠다고 한 것은 선생님과 만남의 끈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인 것을 알지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원하여 결정했다. 뭔가 끌림이 있었고, 그저 그 끌림에 따른 것인데 결론적으로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좋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

 

여든 넘기신 선생님을 뵙고 와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어쩐지 안 계셔도 조금 죄송하지만. 50대가 되고 갱년기를 통과하며 나는 늙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 좋은 노년을 준비하고 싶다. 그러자니 닮고 싶은 노인들을 찾아보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조금 좌절이 된다. “저런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반면교사는 정말 흔하디 흔한데, 닮고 싶은 분은 없다. 또래 친구들과의 대화는 갱년기 증상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찾아오는 노화의 증상들을 경유한 후 종착지는 나이 드신 부모님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고집으로 속 터지는 이야기, 가여워서 더욱 답답한 이야기. “우리는 그렇게 늙지 말자!”로 대화가 끝나지만, 나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그런 노인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노인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요즘은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학창시절에는 길을 가거나 버스 안에서 그렇게 또래 남학생만 보이더니, 청년 때는 그 나이대 남자만 보였다. 임신해서 다닐 때는 임산부만 눈에 띄어, 세상에 임산부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아이 키울 때는 당연히 유아차 밀고 가는 엄마와 그 안의 아기가 어떤 차보다 크게 보였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에서도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내 나이대 남자 사람, 여자 사람이 아니라 노인들이 자꾸 보인다. 길에서 마주치는 불특정 노인은 물론이고, 뉴스에 등장하는 노인과 노인집단, 무엇보다 주변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유독 노인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다. 연세 드신 부모님 걱정과 겹쳐진 탓도 있지만, 나름대로 누구를 찾는 것이다. 좋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 이것은 내 노년을 상상하며 미리 가불해 가져온 두려움과 닿아 있다.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

 

 강의에서 최 선생님을 뵙고 깜짝 놀랐다. 강사가 은퇴 교수님이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연세 드신 분일 줄은 몰랐다. 어쩐지 실망스럽기도 했다. 느릿한 말투나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고, 강의 계획도 엉성했다. 모처럼 마음 먹고 시간과 돈을 투자한 건데, 성의 없는 강사를 만난 것 아닌가 싶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아, 엉성한 계획이나마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뭘 그렇게 잘 잊으셨다. 다음 시간에 나눠주겠노라 하셨던 자료는 까맣게 잊기 일쑤. 질문 하나에 답하시다 강의 주제를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렇다. 강의가 강의 흐름같았다. 지적인 구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내게는 정말 불편한 방식이었다. 강의 계획에 따라 어떤 책을 읽어가면 전혀 다른 책 얘기를 하셨다.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 흐름이 편해졌다. 듣는 내 태도도 달라졌다. 노트북 앞에 놓고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는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바로 받아쳐서 강의를 한글파일로 만드는 기계라는 평을 들을 정도이다. 최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점점 기계 작동이 느슨해졌다. 어쩌다 보면 키보드에 올려놓은 손이 스르르 멈춰 서 있기 일쑤. 강의 후반에 가서는 제목만 쳐놓고 아예 손을 내리고 있었다.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흘러가게 되었다고나 할까.

 

필기할 내용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워 담고 싶은 마음으로 필기하던 손을 내려놓았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저 마음으로 들어 젖어 들고, 물드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모르겠다. 맞다, 선생님의 강의는 악착같이 필기하여 어디 써먹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용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도 아니며,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의가 강물처럼 나를 스쳐 가도록 두는 게 좋았다. 들을 땐 좋았는데 돌아서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필기한 것도 없으니 손에 남는 것도 없는 강의가 종강이라니 아쉬웠다.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선생님 모시고 식사로 인사 나누자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가 오가고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며 최 선생님께서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라고 하셨다. 가당키나 한가. 여기저기서 아닙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요, 요란스럽더니 누군가 발 빠른 사람이 나가 계산을 해버렸다.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뒤쪽에서 선생님과 함께 섰다가 혼잣말처럼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 사람들, 노인 배려 없네. 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밥 사는 거밖에 없는데. 그걸 빼앗네.” 바람처럼 지나가는 말의 가벼움에 놀랐다. 말씀의 내용도 그렇고. 여태 15주를 가르쳐주셨는데,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밥 사는 일밖에 없다고?

 

드물게 만난 호감 노인

 

그 말씀이 마음에 콕 와서 박혔다. 무슨 말씀이지? 그냥 하시는 말씀인가? 노인이지만 80대라는 연세가 무색한 분 아닌가. 아직 가르칠 게 있는 분, 할 수 있는 게 없으시다니. 진정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 혼잣말처럼 하셨으니 누구 들으라고 예의상 하신 말씀 같지는 않다. 한 학기 동안 들었던 물 흐르듯 하는 강의는 다 빠져나가고 그 한 문장이 남은 듯하다. 어쩐지 그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카페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일부러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다. 강의 들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호기심으로 선생님을 관찰했다. 호감 노인, 드물게 만난 호감 노인이었다. 내가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가까이 다가가 앉고 싶은 사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은 호감. 저 멀리 나타나기만 해도 뒷걸음질 쳐지고, 되도록 피해가고 싶은 사람 비호감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다가가 말 건네고 싶은 노인을 만난 건 거의 처음이다. 강의 때의 매력은 교수님으로서의 매력이지 한 인간, 한 노인은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책 개정판 작업 얘기가 나왔고,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덥석 이 호감 노인을 붙들었다.

 

원고 받으러 간다는 명목으로 선생님 댁을 찾았다. 유난히 긴장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몇 주 전, 그 카페에서의 내 판단이 과연 옳았을까? 일을 도와드리는 문제가 아니라, 좋은 노인을 만났다는 판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만나 실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게 걱정이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노인을 배려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식사비 계산하시도록 기꺼이 양보해드렸다. 일단 점수를 땄다. 하지만 실은 정말 점수를 딴 건지, 아닌지 잠시 확신이 흔들렸다. 지난 종강 식사 때처럼 얼른 나가서 계산하는 게 어르신 대접 아닐까. 예의 없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라고 잠시 머릿속에 쓰던 소설이 사라진 것이, 식당을 나와 걷는데 어르신과 걷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파랗고 하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적당히 부는 바람에 취해서 감탄하느라. “선생님, 하늘 구름 바람은 아주 그냥 잘 어울리는 삼합이에요.” 했더니 하하 웃으셨다. 말도 참 재밌게 한다며 삼합, 삼합하며 웃으셨다.

 

하늘 구름 바람 삼합과 함께 선생님의 웃음에 무장해제 되었다. 선생님 댁 현관에 들어설 때는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사무실과 주거공간이 알맞게 분리된 넓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시야가 뻥 뚫린 경관의 상담실이 있고 복도를 통과하면 거실이다. 거실이야말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탁 트인 하늘을 마주한다. 상담심리학 교수로 은퇴하신 선생님은 간간이 상담 일을 하시고, 마음에 관한 강의도 하신다. 혼자 사시는 넓은 집이 내담자를 받아들이는 선생님의 마음 같아 열린 공간 같이 느껴졌다. 용건인 선생님 책 얘기는 시작도 못하고 내 얘기를 털어놓아 버렸다. 묻지도 않으셨는데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선생님, 조금 오글거리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저는 제 나름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저런 몸과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노년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죄송해요, 선생님.

 

      (정색하시며) 뭐가요? 뭐가 죄송해요?

 

      (당황) 아, 선생님 앞에서 제가 노년이 가깝다느니 이런 말씀을 드려서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 앞이 어때서? 내가 늙은이라서? 정 선생 얘길 하는 거잖아요. 나는 내가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고, 정 선생도 나이 먹는다는 얘긴데 그게 뭐? 노년이 몹쓸 시절도 아니고. 하하. 어려워하지 말아요. 하고 싶은 얘기 편하게 해요.

 

      실은 선생님, 저희 종강 식사 자리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이 남아 어쩐지 말씀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왜 식사 사려고 하셨잖아요. 노인이 되면 밥 사는 일 밖에 할 게 없는데... 하신 말씀을 들었어요. 저희에게 융(Carl Jung) 심리학을 가르쳐 주셨고, 여전히 상담도 하고 계시잖아요.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신데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싶었고요. 그 말씀이 신선하게 들렸어요. 아까 제가 노년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은 좋은 노년의 삶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구요, 그러기 위해서 준비할 것이 있다면 준비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데 배울 곳이 없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닮고 싶은 노년을 만나고 싶은데... 네, 뭐 그러던 중 선생님 말씀이 아주 크게 들렸어요. 밥 사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하하, 그 말이 정 선생에게 화두(話頭)가 되었구만. 내가 본의 아니게 공안(公案)을 던진 셈이고, 참구(參究)하던 정 선생을 오늘 우리집에까지 끌어들였네. 노인네가 어쩌다 흘린 말에 제대로 걸려들었어. 그나저나 나는 정 선생 나이 때 그런 생각 못했는데 어쩌다 그리 멀리 내다보는 고민을 해요.

 

그때 어디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 어디서 찬양이? 선생님의 휴대폰 벨 소리였다. , 그럼 선생님도 크리스천이신가. 그랬다. 이건 더 의외였다. 한 학기 만나면서 선생님이 종교가 있으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 종교를 가지셨다면 불교에 가까우실 분이었다. 조금 전에도 화두, 공안, 참구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의외였지만 선생님은 권사님이셨다. 말씀으로는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하셨다. 더욱 마음이 편해져 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노인이 할 일은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

 

      선생님, 저는 이제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을 겪는데요. 노안이 오고, 오십견에서 시작하여 몸 여기저기가 망가지면서 좀 많이 놀랐어요. 대부분의 증상 앞에는 ‘퇴행성’이 붙더라고요.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고치는 병이 아니라고 들렸거든요. 오십견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오십견이 낫는다 해도 노화는 진행될 것이고,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받아들이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고요. 또래 친구들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이런 거거든요. 결론은 탄수화물을 끊고, 좋은 생각을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자!예요. 신앙이 있는 친구들은 천국 소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하려 하기도 하죠. 그런데 어쩐지 저는 그럴수록 더욱 답답한 거예요. 젊을 때는 의지를 발동하고, 열정을 쏟아부으면 될 것 같은 희망이 있었죠. 실제로 되기도 했고요. 오십견 온 팔을 부여잡고 있으면 더는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리고 또 친구들 대화의 또 다른 주제는 ‘노년의 부모님’이거든요. 40년 한결같이 같은 문제로,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시는 부모님. 알코올 중독, 분노중독 아버지와 종교중독 어머니의 간극, 건강염려증에 애정결핍으로 늘 새로운 병원을 찾아 모셔야 하는 어머니도 계시고요. 늘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수십 수백 번 합리적 설명을 해야 하거나, 참다 참다 화를 내고 죄책감이 휩싸이는 일상 같은 것들이요. (이 지점에서 선생님의 표정에 살짝 먹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눈치챘으나, 발동 걸린 말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친구들 20년 후에는 자기 엄마와 똑같아지겠구나! 실은 이 친구들도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가 똑같거든요.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오빠도 책임을 감당하시라고 해,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 아예 전화를 받지 말어. 쏟아지는 조언과 충고도 비슷해요. 이래서 소용없고, 저래서 소용없어. 되돌아오는 반응도 똑같고요. 뫼비우스의 띠 같아요. 그리고 헤어지며 하는 말은 늘 ‘야야, 우리는 정말 잘 늙자’예요. 그런데 저는 정말 잘 늙기는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만 드네요.

 

      (엄마 미소 지으시며) 틀린 말이 없네. 맞아요. 갈수록 어디 아프냐고 묻는 것보다 안 아픈데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빨라요. 나도 노인네지만 노인이 되어 고착된 생각, 특히 신앙 같은 것들은 변화나 성장이 거의 불가능해요. 나부터도 이렇게 늙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저 조금 민망하고 오글거리지만, 선생님 뵈면서 닮고 싶은 어르신을 제대로 처음 만났다 싶고요. 그래서 책 작업이든 무엇이든 도와드리면서 배우고 싶어요.

 

      하하, 사람 잘못 봤는데. 나 고집쟁이 노인네야. 우리 아들한테 물어봐요. 융 심리학에서 말하잖아.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나한테서 발견한 좋은 모습이 있다면 그건 선생님 안에 있는 것이에요. 무엇보다 좋은 노년을 꿈꾸는 마음을 잘 품고 지금처럼 배우고자 하면 정 선생이 그런 노인 될 거예요. 그렇게 되세요. 나는 아니에요.

 

      네, 선생님 그러면요, 이건 좀 답해주세요. ‘밥 사는 일밖에 할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어떻게,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세요?

 

      꿈보다 해몽이네. 허허. 결국 나이 먹어 늙으면 알게 될 일, 미리 알 필요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어요. 나도 내 나이 믿어지지 않고, 이렇게 늙은 나이, 말 안 듣는 몸이 나 같지 않고 힘들어요. 내가 나이롱이라 성경은 잘 모르지만, 노인에게 아주 적실한 말씀이 하나 있어요. 어디 나오더라. 베드로 얘기예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일 거예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내 생각에 노인의 할 일은 주도권을 내려놓는 거예요. 무조건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 남이 누구든 나를 주도하도록 내어주어야 편하다니까. 가까이는 자식들에게 그렇고, 제자들에게 그러려고 해요. 나도 젊을 때는 무척 깐깐한 선생이었어요. 수퍼비전 줄 때는 울지 않았던 학생이 없었어. 지금은 내가 그렇게 해봐요. 누가 나를 만나러 오겠어.

 

유레카! 내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선생님께서 다 설명할 수도 없으시지만 그런 삶의 기쁨이 있다고 하셨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행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베드로의 노년을 따르는 선생님의 노년을 많이 듣고 기록해야지 싶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유난히 보랏빛, 붉은빛의 오묘한 조합으로 아름다웠다.

 

      이 시간이면 소파에 앉아 해가 넘어가는 걸 봐요. 혼자 살기 때문에 참 쓸쓸한 시간이기도 해요. 내 인생의 시간이겠지. 아니다! 해가 넘어가고 노을이 물드는 시간은 정 선생의 시간이겠다. 나는 이제 밤이에요. 정 선생이 부럽네. 나는 5, 60대 늙음의 신호가 왔을 때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성공과 성취에 취해서 젊을 때 살던 그대로 살았지. 조금 더 일찍 노화를 받아들이고, 팔을 벌리는 방향으로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뭐,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어. 지는 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 빛으로 생기는 저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팔을 펴는 연습하라고 오십견이 오는지도 몰라. 정 선생 강의 들을 때 보니까 어깨 힘주고 정신없이 노트북 두드려대던데. 그렇지, 나중엔 손을 놓더라고. 하하. 노화의 강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요. 이야, 오늘 노을 정말 예쁘네. 정 선생같이 예쁘네.

 

새벽으로부터 동이 트고 정오를 향해 높아지는 해, 그리고 오후가 되어 부드러워지는 빛과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인생 주기와 빗대어 한참 이야기 나눴다. 선생님은 당신의 시간은 밤이라고 했다. 영원한 잠이 들기 전 마지막 시간으로 정리가 된다고. 그러며 좋은 노년은 없다, 고 하셨다. 좋은 노년은 좋은 중년의 결과일 뿐이라고. 어둠이 내리기 전, 하루 중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인 이 시간을 겸허하게, 나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며 지내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셔서 아쉽다고. 앞으로 뵐 때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밤이 오기 전에 돌아봐야 할 진정한 나, 진정한 삶에 대해 얘기 나눠보자고 하셨다. 가슴이 뛴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지만, 남은 것은 늙음 뿐인 나날이라 생각했는데. 전에 느껴보지 못한 아주 고요한 새로운 설렘이다. 다음 만남이 벌써 기다려진다.

 

 

 

 

 

이사하며 식탁을 바꿨다. 6인용이다. 바꿀 때도 되었었다. 특히 의자 두 개는 언제 주저앉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의자만 좀 편안한 걸로 바꿔야지 하고 있었다. 남편의 뜻이 확고했다. 바꾼다, 꼭 6인용으로 바꾼다. 4인용 식탁이 좁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식사하다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이 유난히 많았는데, 이유 중 하나가 비좁은 식탁 때문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랬다. 맛있는 걸 해서 맛있게 먹으며 얘기가 길어지다, 마음이 쩍쩍 갈라진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넷이서 정말 이렇게 저렇게 얽혀 싸웠다. 부부가 투닥투닥, (어릴 적부터 늘 있던 일이지만 유난히 심각하게) 남매끼리 티격태격, 거기다 전에 없던 국지적도 등장했다. 모자가, 부녀가 서로 더는 못 봐주겠다는 식으로 부딪쳤다. 코로나 블루 현상일 것이다. 각자 자기 문제로 어려운데, 어려운 넷이 붙어 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꼭 그 때문도 아니다.

 

 

갱년기 현상이기도 하다. <와우결혼 :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 이런 책을 함께 쓸 정도로 자신감 충만한 부부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각자 고유한 존재이다. 다름이 선물이 되어 더욱 풍성한 일상을 살기도 하지만 달라서 어려운, 그 고통 또한 여전하다. 연인과 부부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기술은 싸움의 기술이다,라고 강의에서 주장하는 바.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부부의 필살기이다. 양상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갱년기라고, 낯선 생애 주기를 살면서 에두르고 포장하는 기술력이 떨어졌다. 유치해졌다. 식탁에 나란히 앉아 "아 쫌, 다리 내리고 앉으라고. 좁다고. 옆으로 좀 가라고. 내 자리 여기까지 침범했다고!' 

 

갱년기, 그러니까 인생 전후반을 나누는 전환점이다. 식탁 자리싸움만은 아니다. 생애 전반 애써서 달려온 중년의 남녀가 인생 내리막길 앞에서 영적 현기증을 느낀다. 낯선 내적 갈등이다. 자신과의 새로운 싸움이다. 자신과의 싸움을 자신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밖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가장 편하고 만만한 남편에게 싸움을 걸고 트집을 잡는다. 갱년기 유치한 부부갈등은 이런 것이다. 날씨 얘기하다가도 싸우고야 만다는 그런, 한창 좋을 때 말이다. 여기에 성인 자아를 찾아 어린 시절 자신과 부대끼고, 페미니스트로서 가부장제와 투쟁하는 딸 채윤이도 한몫했다.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아빠와, 어린 시절의 폭군 엄마와 붙게 되는 것이다. 현승이라고 잠잠할쏘냐. 엄마 중독자에서 벗어나 아빠와 가까워지고 싶은 사춘기 끝 현승이는 또 엄마와 싸운다. 글 몇 줄로 써보니 간단한데, 돌아보면 여러 번 폭풍에 휘말린 한 해였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게 다 팬데믹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 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합리적이고 어떤 면에서 과학적인 남편의 해결방법은 일단 공간을 넓히는 것이었다. 마주 앉는 식탁을 바꿔야 한다! '이삭의 우물' 교회 목사가 되어 붙든 이름이기도 한 '르호봇'을 내세웠다. 이삭이 우물로 인한 여러 번의 다툼이 끝에 마지막으로 판 우물의 이름이 르호봇이다. 르호봇은 '넓은 공간'이란 뜻이다. 넓어져야 한다. 넓어지지 않고는 다툼을 멈출 길이 없다. 마음이 당장 넓어지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나 요원한 일이다. 일단 남편의 뜻을 따랐고, 6인용 식탁을 샀고, 막상 들여놓으니 너무 길다 싶었지만 결국 좋은 선택이었다. 넓어졌다.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공간이 생기니 둘러앉은 마음들에도 여유가 생긴 것 같고.

 

1월 1일 저녁 가족 송년 리추얼 'Big Family Day' 시간을 가졌다. 현승이까지 글을 쓸 수 있게 된 때부터 시작하여 10년이 훌쩍 넘은 가족 행사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그려보는 시간이다. 2020년의 기억으로 마인드맵을 그린다. 작년에 썼던 기도제목을 꺼내 읽어보고 거기 비추어 지난 일 년을 돌아본다. 한 해의 기도제목을 적는다. 남편과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팠다. 여러 좋은 이유들을 대면서, 가족들을 찔러내는 내 말이 보이고 좁아터진 마음이 보여서. 어쩌다 이 찬양 얘기가 나왔는지 준비하면서 시와 그림의 <항해자>를 듣게 되었다.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항해에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의 항해에 방향을 잡아주시옵소서

 

어쩐지 2021년 인생의 항해를 다시 출발하는 느낌이다. 2020년, 가장 큰 사건은 엄마를 천국에 보내드린 일이다. 묘하게도 엄마를 애도하는 시간을 보내고, 억지로 그 글을 마침표를 찍고 난 하반기에 아버지가 새롭게 만나졌다. 아니 새로울 것은 없다. 긴 세월 부둥켜안고 울며 뒹굴었던 그 아버지이고, 그 이야기들이다. 아버지 부재에 붙들려 살아온 40여 년 인생이 엄마 떠난 자리에서 새롭게 보인 것 같다. 아버지 엄마가 다시 보이니 내가 다시 보인다. "아버지 없는데 엄마까지 죽었으니 나 정말 고아야! 누가 나 좀 돌봐줘." 평생 내 속에서 훌쩍거리던 아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이미 어른이니 나이 든 부모님은 떠나시기 마련이지.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은 마음이다. 계시처럼 주어진 올해의 찬양이다.

 

 

 

 

 

주방에 비해 과한 크기라고 느껴져 불편했던 6인용 식탁이 갈수록 참 좋다. 내 취향과 내 방식으론 상상도 못할 해결 방식을 제시한 그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고맙다. 4인용은커녕 혼자나 겨우 앉을 찻상보다 작은 마음을 가진 엄마로 자주 다치면서도 또 다가와주고, 좋아해 주는 아이들이 고맙다. 그러고 보면 연구소를 찾아주는 분들에게도 같은 고마움이다. 식탁이 넓어져 무릎 부딪히는 일 없다고 좋은 날만 있으랴. 갈등 없는 환상 같은 나날만 펼쳐지랴. 네 식구가 자기 빛을 내고 자기답게 살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또 충돌하고 찌르고 상처도 날 터. 가족의 삶이고 인간의 길이니 이 항해를 다시 떠날 밖에. 2021년, 쉰셋에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로 간다.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혹한의 두물머리  (0) 2021.01.09
2021 Big Family Day  (0) 2021.01.07
2020 Big Family Day  (0) 2020.01.25
연두를 기다리니 분홍이 옴  (0) 2019.04.14
꿈은★이루어지건만  (0) 2019.02.06
햇빛이 비추어 눈물이 납니다  (5) 2018.12.23

중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중년의 ‘중(中)’은 가운데입니다. 인생 등반 한가운데 서 있으며 내려가는 삶이 시작입니다. 생의 오후로 가는 길목에는 생각지 못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 같지 않은 몸, 알 수 없이 밀려오는 공허감, 100세 인생이라는 노령화 사회에서 아직도 살아가야 할 기나긴 날들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입니다.

중년의 ‘중(重)’은 무거움이기도 합니다. 중년의 위기는 도전이며 기회입니다. Carl Jung은 자신이 상담에서 만난 중년 이후 내담자의 문제는 모두 ‘영적’인 문제였다고 합니다. 중년의 숲을 지나는 여성들이 함께 모여 쓰고, 읽고, 나눕니다. 글은 잘 못 쓰셔도 됩니다. 나다운 나로 생의 오후를 살고 싶은 ‘중년’을 느끼는 여성(나이 크게 괘념치 않으나 38세 이후 여성 권장)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중년 글쓰기 후에 나눠주신 후기 중 일부입니다.

❝평생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풀어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수용하고 용납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살았다. 내게도 수용 받고 싶고, 용납받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이라는 게 아쉽다. 길을 걷는데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씀으로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신실샘이 늘 말했던 글쓰기가 가장 주체적 행동이라는 것이 비로소 알아들어졌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1월 14일(목)~2월 25일(목) 오전 9시30분~12시(6주간, 2/11 설날 휴강)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3pH9S1X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생의 오후 시간 : 글로 길어 올리는 영성의 샘물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 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어머니 하나님을 찾아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참고도서 : <내 나이 마흔>, 안셀름 그륀, 성서와 함께
<위쪽으로 떨어지다>, 리처드 로어, 국민북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이루

 

중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20210114~)

<생의 오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신청양식 입니다.

docs.google.com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소울  (2) 2021.02.12
아무것도 너를  (0) 2021.01.18
중년을 위한 치유 글쓰기  (1) 2021.01.04
밤에 온 러브레터  (0) 2020.12.23
아래로부터의 영성  (0) 2020.12.10
끝까지 가라  (0) 2020.11.27
  1. 2021.01.04 16:28

    비밀댓글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