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안 돼."

"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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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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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시집 못 가."

 

라고, 남편이 예전 엄마 말을 흉내 냈다.

엄마는 내 결혼이 늦어지는 게 책 때문이라고 했었다.

시집을 이렇게 잘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말이다.

 

중요한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밤, 밤 독서.

좋은데, 너무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흠, 다시는 시집 못 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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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돌아가시고 한 50여 일 지난날이었다. G 권사님의 아버님께서 소천하셨단 소식이다. 아, 어쩌나! 권사님은 어머님 보내드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권사님께서 어머님을 보내드린 후 한참 힘드셨단 얘길 전해 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위로의 마음을 건네지 못했었다. 엄마를 잃고 나니 권사님이 힘드셨단 얘기가 비로소 몸으로 알아들어졌다. 딸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엄마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많은 죽음으로 연습한다 해도 엄마를 잃는 것은 새로운 슬픔이구나! 엄마 장례 후 권사님께서 건네는 메시지 하나도 더 깊은 곳을 건드리며 다가왔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남다른 분인데, 아버님마저 보내셨구나! 싶으니 속에서 쿵, 하고 무엇 하나가 또 무너져 내렸다.

 

멀리 남해에 차려진 장례식에 내려가는 준비를 하는 차에 또 다른 비보. N 집사님의 어머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이다. 쿵! 쿵쿵! N 집사님은  G 권사님의 남편이시다. 그러니까 권사님의 시어머님 또한 같은 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가 함께, 같은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는 소식이다. 죽음이 이렇게 덮칠 수 있다고? 공포가 밀려왔다. 아내의 죽음 후에 쓴 애도 일기, 『헤아려 본 슬픔』에서 C. S. 루이스가 말했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 애도는 진행 중이었고, 나는 아직 죽음의 강에 휩쓸려 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슬픔은 때때로 공포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역시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무섭지는 않으나, 무서울 때와 흡사한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지는......" 그런 상태이다.

 

하루 일정으로 남해와 보은, 두 곳에 들러 조문하는 일정으로 교우들과 함께 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큰 슬픔 중에 가장 힘이 되어줄 남편 없이, 아내 없이 각각 장례식을 치룬다는 것이. 줄줄 흐르는 권사님의 눈물은 마스크 안으로 흘러 모여 저수지가 될 것 같았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기나긴 시간을 버스에서 보냈다. 자다 깨다 하며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정신줄을 놓았다 잡았다 한 것 같기도 하고. 보은에서 조문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했다. 차에 오르는 순간 이제 끝났구나, 두어 시간이면 집에 가 편히 누울 수 있겠지 싶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났다. 휴게소 들르지 않고 논스톱으로 달리겠다고 출발한 버스인데...... 어쩌지. 어쩌지 싶으니 몸은 더욱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위로 아래로 분출할 것 같은 무엇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사님 한 분이 화장실이 급하여 첫 휴게소에서 버스를 세우셨다. 집사님을 따라 달려서 내려 낮에 남해에서 먹은 것까지 토해냈다.

 

울렁거림은 진정은 되었지만 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출발한 버스에 길게 누워 스스로 안정, 절대 안정을 진단했다. 몸 안에서는 조그만 자극에도 다시 분출하겠다는 것들이 꿈틀거렸다. 비상용으로 비닐봉지를 앞에 두고, 식은땀 흐르는 몸으로 가만히 숨만 쉬며 누워 있었다. 음악의 힘을 빌어 안정을 찾게 위해 이완시키는 음악을 틀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이 들리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눈에서는 눈물이, 온몸에선 식은땀이. 캄캄한 창에 엄마 얼굴이 어른거린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거였구나. 엄마, 엄마...... 속으로 엄마를 불러보는데, 엄마가 아니다.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예원아, 예원아, 예원이 어딨니......"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뒤틀렸다. 뒤틀리는 몸과 마음을 안전벨트에 꽉 묶어두고 소리 없이 눈물과 식은땀을 흘렸다. 예원이.

 

바로 일주일 전, 예원이 장례식이었다.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예원이 장례식이라니. 그리고 실은 아직 예원이를 말할 수 없다. 애도의 첫 단계가 '부정'이라면 예원이 만큼은 끝까지 부정하고 싶다. 예원이 소식을 들었던 밤, 모든 것이 끝났다 싶었다. 그대로 죽음의 강에 나를 던지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겠구나, 생각도 했다. 40여 일 전에 엄마를 보냈던 과정과 똑같이 화장장을 거쳐 한 줌의 재로 마주한 예원이를 세종시 어느 추모공원에 안치하고 돌아왔다. 그날 그 시간 이후로 집안에서 예원이는 금기어가 되었다. 나도, 남편도, 채윤이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괜찮은 듯 살아졌다. 남해에서 보은까지, 하루 종일 죽음을 마주했던 몸이 요동을 쳤다. 슬프다고, 슬프다고, 예원이 그 빛나는 생명이 아깝다고 몸부림을 했다. 몸이 말했다. 슬프다고,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그 슬픔은 분출하고 싶은 분노이며 공포라고.

 

엄마 애도의 진행상황을 보고하는 몸의 신호가 하나 있다. 장례식 당일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침 입관식에서 이미 젖었고, 하루 종일 그런 채로 다녔다. 그날 이후로 마스크 꼈던 입주위가 시도 때도 없이 실룩거린다. 마그네슘이 부족하여 눈 떨림 현상이 온다는데 그 비슷한 증상일 것이다. 암튼 아무 때나 왼쪽 입술 위가 떨렸다. 마치 어릴 적에 울음을 참으려 할 때마다 입이 삐죽거려지고, 입술이 떨렸던 것처럼. 수시로 실룩거리는 입술로 대화 중에 민망한 순간이 자꾸 생겼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나아졌다.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진도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횟수도, 강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예원이 보내고 거짓말처럼 다시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최대한 '부정'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몸은 속아주지 않았다. 버스에 누워 몸에게 슬퍼할 것을 허락했다. 

 

충분히 슬퍼할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엄마, 예원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잊어라, 생각하지 마라,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약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감정,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는 슬퍼하는 사람을 그대로 봐주지도 않는다. 그만 해라, 언제까지 그 얘기냐. 그만하라는 압력이다. 압력에 못이겨 억압하고 만다. 가장 정직한 나,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몸이 말한다. 아직 슬퍼, 나 아직 슬프다니까.

 

애도 심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말한다. 애도에 대한 반응은 명백하게 신체적으로 온다고. 우는 것만 아니라, 훌쩍거림, 가슴의 압박감, 딸국질, 헐떡거림, 한숨 쉬기, 목이 조이는 것 같은 호흡 곤란, 먹을 수 없음, 식욕부진, 목에 음식이 걸린 것 같은 느낌, 위와 신장의 잦은 탈, 육체적인 탈진 또는 흥분 등이다.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 David K. Switzer, 학지사) 이 명백한 반응은 가장 정직한 반응이기도 하다. 몸이 가장 정직하다. 그런 의미로, '애도'의 개념을 정립한 죽음과 애도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말한다.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라고. 이제는 다 잊었고 정리되었다고 머리가 말할 때도 몸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공교롭게도 특정한 날에 이유 없이 아프고 기분의 저하를 보이는데, 그 날은 고아원에 보내진 날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시기라는 것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아직 달력을 읽기에는 한참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앞에 나열한 신체 증상만이 아닐 것이다. 아동문학가 매들린 렝글(Madelain L' Engle)은 C. S. 루이스의 애도 일기 『헤아려 본 슬픔』을 읽음으로써, 사람마다 겪는 슬픔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자신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 읽은 것이다. 사람사람이 겪는 슬픔이 다른 것처럼 신체 증상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게는 새벽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증상, 입술 떨림이었다. 장례 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한 날에는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지끈 이가 부러졌다. 여행 가면 마지막까지 쌩쌩했던 내가 가장 먼저 피곤해 꼬꾸라졌다.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단체에 모임이 있어서 나간, 첫 공식 모임에서는 혈압이 떨어져 시야가 흐려지고 두통이 오고 기운이 빠져나가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머리 차원에서 "괜찮아,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 움직인 날에 몸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몸이 말하는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래?" 하고 지나치기 일쑤. 유난 떠는 것처럼 비칠까 봐,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요즘도 간간이 입술이 위 근육이 실룩거리며 울음 참는 모양새를 한다. 이젠 잠도 잘 자고, 컨디션도 좋은 편이다. 그런가 싶더니 요 며칠 다시 서늘한 가슴으로 이른 새벽에 눈을 뜬다. 당황하지 않는다.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지만 슬픔의 강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도는 "끝이 없고, 위로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애도의 원인인 상실, 죽은 엄마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술 떨림이 온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다 10년 쯤 후에 다시 입술 위가 실룩거린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렇지. 내가 사랑하던 엄마가 없어, 하고 몸이 일깨우는 그리움과 슬픔을 그대로 마주할 것이다. 그렇게 가늘게 애도의 끈이 이어지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저 하늘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에, 그 날에 끝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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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텃밭을 일구신 장로님께서 수확한 쌈야채를 듬뿍 주셨다. 갖가지 야채 사이에 오이 한 개가 파묻혀 있었는데, '유일하게 열린 오이'라고 남편이 전해주었다. 직접 혼자 지어본 농사는 없지만, 경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는 설렘을 안다. 제 모양을 갖춘 열매가 매달린 것을 보고, 수확하는 기쁨도. 그놈을 어찌 먹을까? 저 오이 하나가 실 한가닥이 되어 어린 날의 기억을 줄줄 끌고 나온다. 짧게 한 교회에 몸 담았던 장로님이신데, 야채와 함께 무엇보다 유일한 오이를 넣어주신 게 특별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어렸을 적, 아마 이 즈음일 것 같다. 봄 지나고 채소든 과일이든 따먹을 것이 생기는 때. 저녁 무렵이면 "사모님"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언니나 오빠나, 집사님들이 있었다. 손에 든 바구니에 금방 딴 복숭아가 들어있기도 하고, 고추나 가지 같은 채소도 있다. 첫 열매. 그 해 처음 난 수확물을 목사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도 그리 알았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어떤 특권의식 같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지난주에 어렸을 적 친구를 만났다. 옛 친구 만나면 지금 얘기보다 그때 얘기를 하게 되는데. 결국 시간여행이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동네 친구이며 교회 친구이기도 해서 같이 많이 놀았는데, 같은 놀이도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있는 친구였다. 풀 뜯어서 가짜 김치 담그는 소꿉놀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배추를 구하고, 집에서 고춧가루를 훔쳐다 진짜 김치를 담가 땅에 묻어 놓기도 했다. 난리 부르스를 추며 놀았다. 어른이 안 계실 때는 그 집에 몰려가 부엌에 모여 되지도 않는 뭔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 친구 집 부엌이 난리 부르스의 무대가 된 날이었다. 누군가 찬장을 뒤지다 가장 안쪽에서 커피병을 발견해서 꺼내 들었다. 뚜껑에 커다란 별이 하나 있는 맥스웰 커피병이었지 싶다. 그러자 집주인인 친구가 "야아, 그거 손대지 마. 그거 목사님 심방 오시면 드리는 거야!" 했다.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셨다. 그 친구네는 동네에서도 꽤 어려운 편에 들었었다. 그런 친구 집에 당시엔 흔하지도 않은 커피가 찬장 안쪽에 들어 있고, 오직 목사님을 위한 것이라니. 그 역시 당연히 그래야 했던 어떤 의식, 목사를 특별해 대접해야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깨가 으쓱했던 것 같고, 다시 특권의식을 당연히 하는 마음이었다. 

 

어릴 적 이런 기억, 목사 딸로서의 특권의식, 터무니 없는 특권의식은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힘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다. 한때, 이런 내가 몸서리치게 싫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이 늦게 목회자가 되어 다시 들어간 목회자의 세계는 당연한 특권의식의 세상이었다. 어릴 적 내가 태어나 보니 목사 딸이라서 누렸던 첫 열매를 먹는 특권 같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처럼. 그 세계 안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평신도 성인으로 살다 들어간 목회자의 세계의 당연함이 낯설다 못해 역겨웠다. 그때부터는 어릴 적의 나, 어릴 적 우리 가족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교인들이 땀 흘려 가꾼 열매, 첫 열매를 가만히 앉아 받아 당연한 것으로 받아먹었다니! 가난한 과부의 찬장 숨긴 커피를 독식하다니! 엄마 아버지가 조금 파렴치 하게 느껴졌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참회의 마음으로 썼던 글 <레위인 콤플렉스>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신앙 사춘기를 통과하던 시절이다. 어릴 적의 나도, 그 글을 쓴 나도 다 나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나다. 오늘 저 오이 하나가 뭉클하게 좋았다. 어떤 마음으로 보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적 "사모님,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유" 하며 들고 온 바구니 속의 복숭아가 떠올랐다. 친구 집 찬장 속에서 발견한 커피병이 떠올랐다. 특권의식이니 그에 대한 부끄러움이니, 꿈같은 얘기 같고 그저 마음이 따뜻하다. 누군가를 위해 좋은 것을 아껴둘 수 있는 마음, 그 대상이 신적 권위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면 거룩하기까지 한 내어줌이겠지. 

 

엄마 아버지가 교인을 갈취하는 목회자 부부도 아니었다. 그 커피병 친구가 그랬다. 아직 시골의 그 교회 다니고 계신 친정 엄마에게 "신실이 엄마, 사모님 돌아가셨대" 했더니 너무 안타까워 하셨다고. "그 사모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가장 사모님 같은 분이고, 그런 사모님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어." 하셨단다. 울컥 뜨거운 것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 말 듣는 순간 엄마 얼굴과 함께 무화과나무 생각이 났다. 꽃밭 한 구석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열매를 잘 맺는 무화과였다. (잎이 무성했음에도! ㅎㅎ) 나는 무화과의 달착지근한 맛이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 무화과나무는 우리 집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것 같아 좋았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집에 돌아갔는데 무슨 풀냄새가 진동했다. 잎이 무성했던 화단의 무화과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교인 중 한 분이 어디가 아픈데, 무화과 잎을 끓여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들은 엄마의 거침없는 선택이었다. 무화과 잎 국물을 마시고 교인이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우리 집 무화과나무는 다시 열매 맺지 못했다. 시들시들 죽고 말았다. 나는 그 무화과나무가 아깝고 아까웠다.

 

교인들 집의 첫 열매를 당연함으로 받아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마도 아버지도 나름대로 내어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거침없이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었던 시절...... 사람들의 상상 속에 목사가 독재자이거나 사기꾼일 수 없었던 시절...... 거룩한 분노와 불신이 아니라 맹목적 신뢰와 존경이 교회의 기반이었던 무지몽매하여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절이다. 말라서 죽어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그 복숭아와 무화과나무가 오버랩되어 자꾸 어른거린다. 말라죽은 무화과나무가 살아나 주렁주렁 복숭아 열매를 맺는 그림을 상상했다. 

 

'상실과 고립'이란 주제로 영상 강의를 하나 했는데, 그 여파인지 상실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강의 중에 질문을 던졌다. "잃어버린 것들, 잃어버려 아쉬운 것들을 떠올려 보자"라고. 그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이번 주 내내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구나, 오이와 함께 그 질문이 나를 그 시절로 이끌었구나.     

 

한 입 깨물면 '그리움'과 '의미'의 즙이 팡팡 터질 것 같은 저 오이,

흠...... 어떻게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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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현승이를 부르려는데 '운형이', 동생 이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꽤나 반복되는 말실수다. 말실수는 무의식의 발로라는 프로이트를 끌어오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일찍부터 동생의 엄마 노릇을 자처해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겨진 늙은 엄마, 어린 동생(그래 봐야 두 살 차이인데) 사이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누가 지워준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말, 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들 있지 않은가. "이제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 이제 네가 잘해야 한다, 엄마에게 잘해라, 동생 잘 보살펴라......" 

 

장례식 후 외가 친가 친척들이 다같이 모여서 확대 가족회의 같은 걸 했다. 남겨진 세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와 무엇보다 남매의 교육 문제가 관건이었다. 누군가 내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꿈이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고,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냉철한 작은 외삼촌이 딱 잘라서 말해주셨다. "안 돼, 음악은 할 수 없다. 그건 돈이 많이 들어.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음악을 할 수는 없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런 식의 말씀이었다. 아, 그렇구나! 장래희망 목록에서 음악은 지웠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결국 뒤늦게 음악치료를 선택한 건 아쉬움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 가족회의가 남긴 인상은 강하다. 마음에 심긴 메시지도 분명하다.

 

아버지 없음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한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겠구나, 아버지가 없으니 알아서  인생을 일궈가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한 몸이 아니구나, 동생과 엄마은 내가 잘 돌봐야 해, 까지 갔을 것이다.  엄마가 무책임한 어른은 아니었다. 엄마 역시 자기희생적인 사람이고 책임감 또한 강했다. 그렇더라도 우리 남매에게, 특히 내게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더욱 엄마까지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엄마를 보며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하는 것이 내 깊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친절하고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두려울수록 엄마에게 더 신경질적이었고, 걱정이 깊어지면 원망을 쏟아놓곤 했다. 

 

특히 경제적인 책임감을 과도하게 가져왔다. 엄마는 늘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이었고, 우리 교육에 관한 한 철저했다. 대학까지 학비 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청소년 시절에도 조르고 조르고 또 조르면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엄마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부담, 동생에게 뭐라도 하나 더 사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게 꽤 보람이 있었다. 더 누리고 싶어서 퇴근 후에 과외 알바를 했다. 대학원 준비하며 직장 그만두고 과외에 투신(?) 했더니 수입이 훨씬 나아졌다. 학비를 위해 돈을 모으는데 아주 잘 모아졌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고치긴 틀렸고 새로 사야 하는데...... 엄마의 걱정 몇 마디에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냉장고를 샀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돈이 있었을 것이다. 모른 척했으면 엄마가 해결했을 것이다. 정말 내놓기 싫었는데,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았다. 냉장고를 사고도 한참 서러웠다.

 

엄마와 동생을 위해서 내가 돈을 벌여야 한다는 책무감이 떠나질 않았다. 동생의 고아 의식, 즉 아버지 없는 결핍감이 물리적 힘에의 집착이 되었다면 내겐 경제적인 책임감과 정신력 같을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린 내게 지성의 표상이었다. 아버지가 설교 준비하는 앉은뱅이책상 옆에 엎드려 산수공부를 하고 글짓기 숙제를 했다. 덧셈 뺄셈을 하는데 교과서에 나온 강아지를 개수 그대로 연습장에 그려주던 아버지 모습이 아련하다. 반공 선언문 쓰기 숙제를 하는데 '유비무환'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쳐주며 글 안에 넣어서 써보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지성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지적인 욕구가 끝이 없는 것, 아버지 부재가 남긴, 고아 의식이 내게 남긴 결핍감일지 모른다.

 

청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H가 나는 잊은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를 하던 시절, 해마다 합창, 성경암송, 성경고사 등의 대회가 있었다. 노회대회에 나가서 입상하면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성가대 아이들 데리고 전국대회에 출전한 적이 몇 번 있다. 어느 해, 노회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심사를 맡은 사람이(교수인지, 음악 선생인지 모르겠다) 어이없는 심사평을 했다. 노래는 잘했지만 지휘자의 복장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휘자인 내 치마 길이가 짧았다고! (아,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네!) 당시 자타공인 페미니스트였지만, 페미니스트이고 아니고 문제도 아니었다. 대회는 어찌어찌 마쳤지만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임원을 맡았던 당시 부장 선생님을 통해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글을 써서 전달하고, 그 발언에 대해 공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여차저차 결국 사과를 받았다. 

 

문제는 그 일을 복기하는 H의 말이었다. 나는 잊고 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며 "언니, 정말 집요하게 느껴졌어. 왜 저렇게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조금 알겠어."라고 했다. 나도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다. 지금과는 비할 수도 없는 시절, 성인지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분노하고 용기를 내고, 집요할 수 있었을까? 그 일에 대한 해석이었을까? 나이가 한참 많은, (청년들에게 현자 노릇을 하던)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너는 아버지가 없어서 제 멋대로인 구석이 있다."라고 했다. 털썩!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몸부림 친 결과가 아버지 없는 아이를 드러냄이 되었다고?! 아버지 없는 애 면전에 두고 할 말인가 싶었지만 별말을 못했었다. 당시 나를 보던 주변 사람들의 시각이었겠구나, 싶다. 부드럽고 물러 터졌으며 흐리멍덩하다는 내가 가진 자아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

 

아버지 없음은 내 인생 지성의 부재이며, 자존심을 지켜줄 권위의 부재였다. 그렇게 내가 나를 지키며 무시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평생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은 것은 아버지 없음, 고아 의식의 발로이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야 하는 처절함이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선망하고, 아버지와 동일시 하던 어린 딸, 그 아이의 선택이 이제 와 나는 한없이 가엾다.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에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참가자 넷  중 세 사람의 주제가 아버지였다. 내적 여정에서 어린 시절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보다 엄마를 동일시하는 딸이 더 많고, 둘 다 고통의 근원이었을 테지만 아버가 준 고통을 더 치명적으로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감정이입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고, 인식했다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버지와 동일시 되어 있었고, 심지어 우상화했다. 눈에 없는 신을 형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능인지 모른다. 내가 자라고 사춘기를 겪는 동안 내내 곁에 살면서 간섭하고 상처를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는 이상화되다 못해 우상이 되었다. 엄마를 혐오하고 아버지를 이상화하며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여성인 나를 스스로 낮추고 비하했다. 이율배반적으로 외부 남성 권위에는 분노하고 대항하게 되었다. 당연히 왜곡된 가부장적 하나님이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은 다시 내 안의 여성주의와 충돌했다. 영적 여정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분열이었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몇 년 전에 읽은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이다.  여성들 안의 영웅심리와 불안을 아버지와의 딸의 동일시로 설명하는 페미니즘 에세이다. 

 

'영웅의 딸'이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를 이상화 하고 어머니는 거부한다......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와 아버지처럼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딸들의 욕망은 그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와 남자들의 세계를 모방하면서 일찍부터 그녀의 남성적인 성품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지나친 자기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 속에 아버지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개별적인 정체성 수립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 중에서

 

엄마도 동생도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꼭 내게 물었다. 노인이 되면 고집쟁이 되기가 쉬운데 엄마는 내 말을 잘 들었다. 며느리와 관계에서 섭섭함을 토로하다가도 내 몇 마디에 금세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고치곤 했다. 엄마와 동생이 내게 물어올 때, 무심한 듯 응대하지만 조용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엄마나 동생이 겪는 일상의 어려움이 다 내 책임 같고, 해결해줘야 할 것 같았다. 과도한 책임감이다. 내 힘에 부치는 짐을 지고 평생 힘겹게 지내왔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아이러니하거나 신비롭게도 그 무게가 내 존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동일시되어 과도한 힘을 내어 살아온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나를 나 되게 만들었다. 차마 내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폴 투르니에 박사, 고아 대선배께서 그의 책에 먼저 썼으니 그의 입을 빌어본다.

 

고아라는 것은? 나는 항상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습니다. 폴 투르니에 『고통보다 깊은』 중에서

 

나를 형성한 것들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적당히,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책임감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엄마의 딸로서, 아니 그 누구의 딸이 아닌 나로, 역할의 옷을 벗고 가볍게 살아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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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ratigya 2020.06.07 23:58 신고

    하나마나 한 말...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깊이 공감하고 정말 그런 말 더는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니의 모든 것..아름다워요...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3 신고

      아냐, 그대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존재가 말보다 앞서거든! 그대의 존재를 내가 아오 :)

  2. 2020.06.08 11:00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7 신고

      이런 메아리를 기다렸어요. 이 글을 계속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나말고 이런 누군가가 또 있어'라는 확신이거든요. 그 누군가에게 당신만 그런 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기도, 무엇보다 나만 이런 것 아니라는 그 말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드디어 들었네요. ^^

      이렇게 말씀 들으니 위로도 되고, 새롭게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요. 아, 나도 그랬었지..... 우리 모두 잘 살아남아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 참 다행이에요. 특히나 좋은 남편에 좋은 아빠 되셨구요!

      사모님 형수님 이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전생에 잃어버린 남매였었잖아요. ㅎㅎㅎ 그곳의 시간들 곱게 마무리 하고 들어오셔서 뵈어요. (사모님 말로 형수님으로 가기로요!)

 

 

 

"쓰면 말하고 싶어진다. 말해보면 읽고 들어야 함을 깨닫는다. 드러내야 부족함을 안다. 드러내야 잘 되면 잘 되는대로, 또 못 되는대로 채워야 함을 느끼게 된다. 쓰기·말하기를 하면 듣기·읽기는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강원국의 글쓰기』 중에서

 

방송에 나가거나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할 얘기도 없으면서 왜 섭외에 응했을까?” 부담감으로 잠을 설치고, 마치고 나서도 홀가분함보다는 “그 말을 왜 했지? 다른 말을 했어야지…·” 이불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지나고 보면, 강원국 작가님 말처럼 드러내야 부족함을 알게 되기에 저 자신의 글과 말을 돌아보는 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저는 여전히 제 목소리, 말투, 얼굴 생김까지 낯설고 민망하여 제대로 보진 못하지만 공유하고 알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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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표현할 언어가 거의 없다. '내 마음속 대통령' 같은 표현도 있고, 존경이나 사랑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다 담아지지 않는다. '노사모'였던 적은 없다. 그를 그리워하는 노란 모자의 물결 같은 걸 보며 연결된 느낌으로 적잖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노사모라서는 아니다. 군중 속의 하나로 그분을 좋아하거나 따르는 것 아니다. 진영, 집단적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말이 아니라 삶 때문에 좋아했고 존경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었다. 예수 따르는 사람이라 자처하는 어른들에게 실망하여 교회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던 시절, 그래서 삶의 소망도 끊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 즈음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하필 그 시절이어서, 그 죽음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신앙의 빛이, 영혼의 불이 꺼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캄캄한 밤을 통과하며 '정답' 없이 의문을 품고도 신앙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존경하는 어른이 누구냐?는 물음에 신앙 공동체 안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내 마음속에 노무현 대통령 같은 어른이 없다. 어쩐지 이것이 좀 부끄러웠다. 이젠 조금 당당해졌다. 생각해보면 가장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정말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서거 11주기 지나며 유난한 그리움으로 봉하에 다녀왔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 당일 일정은 어려워졌다. 교대로 운전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박 여행으로 계획하고 밀양에 숙소를 예약해뒀다. 전날 내적 여정 세미나 마치고 와 늦은 밤에 예약한 숙소를 취소하고 창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모님 한 분을 만나야지 싶어서다. 창원에서부터 내적 여정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사모님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아이 둘을 데리고 ktx를 타고 올라와 시가에 맡기고는 세미나에 왔다. 코로나 19로 이후 일정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목마름이 전해져 왔다. 잠깐이라도 가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남편끼리 신대원 동기라서 더욱 좋은 일이었다. 

 

끌리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덥석덥석 만나질 않는다. 하지만 끌리는 사람은 바빠도 만난다. 멀리 있어도 만난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만나야만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고 배워서 그렇다.(도대체 누가 내게 가르친 것이냐) 애써 어려운 만남을 찾아다녔고, 기웃거리고 집적거렸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며 주먹 꽉 쥐고 애를 쓰곤 했다. 그러고 살며 꽉 쥔 손바닥은 내 손톱에 찔려 피가 날 정도였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한계'는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게 제일이지. 

 

철학 상담과 영성 공부를 통해 얻은 배운 가장 큰 것은 '사랑이 있는 곳'을 거침없이 찾아가는 힘이다. 찾아간다기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흐름에 몸을 맡겨 흘러간다고 하는 게 좋겠다. 사랑은 무엇을 목적하지 않으니 힘을 빼고 목적의식을 흐릿하게 하면 어떠리. 가르치고, 배우고, 교훈을 얻고, 구축하고, 지키고, 감동을 주고...... 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그저 만나는 것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퍼뜩 생각나는 사람을 거침없이 만나고. 장거리 운전이 안 되는 낡아진 몸이 되어가고 있으니, 마음의 힘도 더 뺄 일이다. 

 

 

맞아, 맞아! 그게 정말 의외지? 엄마는 호기심도 많고, 성격이 막 외향적이라서 와아아아~ 이렇잖아. 새로운 걸 막 해보고 모험적일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안 그럴 것 같은 아빠가 보면 새로운 걸 막 해보려 하고, 안 해본 걸 겁 없이 하고 그래. 보기하고 쫌 달라.

 

'엄마 아빠의 모든 것을 논평하기' 놀이에 취미를 붙인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인정, 완전 인정! 안 먹어본 것 먹기, 안 가본 길 가기(어, 이건 좋아하긴 하는데!), 신문물 받아들이기... 에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로운 것 앞에는 주춤하며 심지어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다 딱 한 번만 해보면 '다 안다'는 식으로 팽창되곤 하니, 경박한 것도 병이다.

 

코로나 19로 약속된 3, 4, 5월 약속된 모든 강의는 취소되었다. 간간이 zoom으로 진행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일언지하!는 아니지만 여러 말로 모두 거절했다. 대면 강의도 대규모보다 적은 인원을 좋아하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얘기 나눌 수 있으면 더 좋다. 강의인 듯 편하디 편한 수다인 듯 집단상담 같은 만남이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몸과 몸으로 만나는 강의에 눈빛 대화가 가능한 거리면 딱이지, 싶고. 하물며 모니터를 보고 강의를 한다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렇듯 여러 말로 거절했지만, zoom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최대한 엉덩이 뒤로 빼고 한 걸음 물러나고 물러나고 했지만 피하기 어려운 요청에 굴복하여 새물결을 맞았다. 한때 부산, 제주도에도 강의하러 간 적이 있는데 요즘은 몸이 안따라줘서 2시간 이상 걸리는 곳은 엄두도 잘 못 낸다. 한데 zoom을 타고 뉴욕에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지난 월요일, 뉴욕우리교회 교우들과 온라인 강의로 만났다. 아닌 게 아니라 수강자들과 눈 맞춤할 수 없는 환경이 치명적이었다. 

 

농담이었지만 약간 진담이기도 했..... "제가 강의 정말 강의를 잘하는데, 모니터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실력 발휘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시작하며 한 말을 남편이 방에 숨어서 듣고는 하루 종일 성대모사로 놀렸다. "제가요오, 강의를 정말 정말 잘하는데...... 우와, 자기 입으로 강의를 잘한대. 큭큭큭" 안 그래도 민망하여 이불 킥을 수도 없이 할 판이었는데, 남편 엉덩이를 이단앞차기로 차줄까 싶었다. 

 

강의를 잘하고 못하고, 다 지난 일 어쩌겠냐만. 계획이란 계획이 다 틀어지고만 코로나19 정국 덕에 지구 반대편 형제자매들과 연결된 것은 낯설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 아닌데, 단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 어렵고도 쉬운 한 걸음을 떼 봤다.  

 

  1. BlogIcon pratigya 2020.06.02 17:16 신고

    역쉬~ 멋져용 언니~~~ @.@


요즘은 무슨 얘길 하다가도 결국 글쓰기 얘기다. 이번 주말 방송되는 CBS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오늘 있었던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도 기승전...... 글쓰기!였다. 코로나 블루 얘길 하다가 글쓰기, 육아 얘기 하다 글쓰기. 이렇게 되고 있다. 보통은 책 출간 즈음에 방송에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는데, 어쩐지 맥락 없는 자리가 자꾸 생기는 중이다. 그 자리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글쓰기' 예찬이라니!

 

정말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긴 시간 준비한 강의보다 짧게 글쓰는 시간으로 모두들 배우는 바가 크다. 지도자 양성은 역시 글쓰기다! 자랑 삼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옮겨 걸어놓지 않을 수 없지!

 

자기 이해를 위한 글쓰기, 치유와 성장을 위한 쓰기의 힘.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며 배움입니다.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에서 매주 글을 씁니다. 함께 쓰고, 집에 돌아가 혼자 쓰고, 혼자 쓴 자기 성찰의 글을 다시 공유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쓰기 시작하면 변화가 생깁니다. 쓰는 행위가 홀로 하는 것 같지만, 함께 쓰고 그것을 나눔으로 유익은 극대화 됩니다.

예를 들면 어제는 ‘내 인생 나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항변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짧은 시간 손이 가는대로 씁니다. 글은 각 사람을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놀라고 새롭게 배웁니다. 아마 이 주제로 혼자 썼다면 자기 감정에 함몰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공간에서 쓴다는 것, 그리고 쓰는 이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느낌은 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를 받아주는 공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로 약속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지요.

일단 주제의 첫 번째 목표는 공간과 사람에 힘입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였습니다. 각자 쓴 내용은 늘 자기 안에서 꽝꽝 울리지만 언어화 되지 못한 아우성일지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겠지요. ‘누군가’ 나의 편이 되어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변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 겁니다. 쓰는 행위는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내 편이 되어 자기를 변호해주는 것이지요. 실은 이게 먼저죠! 내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최고의 변호사는 나니까요.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봅니다.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은 나, 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아마 내가 되고 싶은 나, 에니어그램으로 말하면 '자아 이미지'일 것입니다. 자아 이미지에 집착하여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에 됩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오릅니다. 손이 가는대로 써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거기에 덧붙여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제가 글쓰기 주제를 내주며 의도한 바는 이 지점이었습니다.)

사람이 글을 쓰고, 글이 사람을 이끌고, 사람들이 글을 빙자하여 자신을 내놓고, 그들이 다시 쓰고... 글은 또 어두운 자아의 숲을 헤쳐 새로운 길을 내고... 끝나지 않을 이 연결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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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의식에는 노래 주머니가 있다. 온갖 노래가 다 들어있고, 스치듯 지나는 자극에 툭툭 튀어나온다. 아이들 어릴 적엔 함께 하는 일상이 노래였다. 길 가다 민들레를 보면 바로 재생 버튼.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18개월 우리 채윤이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우리 채윤이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놀이터에서 시소에 앉으면 "시소 시소 올라가면 푸른 하늘 내려오면 꽃동산 재미나는 시소" 언제 어디서든 노래가 튀어나왔다. 단어 하나, 스치는 장면 하나가 노래를 불러낸다. 직접 자극이 아니어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찬송가도, 가요도, 팝송도, 가곡도 장르 불문으로 흘러나온다. 지금은 기능이 저하되긴 했지만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를 4절까지 외울 수 있고, 다른 장르의 노래 가사 암기력도 이에 준한다. 음악 치료사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운명이다.

 

남편과 양평 치유의 숲을 걸었다. 야생의 산길이었다. 숲은 곳곳이 노래 재생 버튼이 숨겨진 곳이다. 이제 내려가자 하고, 방향을 돌려 나오는데 갑자기 바짓가랑이 붙잡는 흰색 꽃 한 무더기. 찔레꽃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꽃밭이 있었다. 가장 안쪽에 가장 큰 꽃나무가 담 쪽으로 기울어져 서있었는데 찔레꽃이었다. 장미, 나리꽃, 붓꽃, 작약, 백일홍, 샐비어, 달리아,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했다. 아침이면 아버지가 수돗물에 호스를 꽂아 꽃밭에 물을 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어쩐지 그 꽃밭은 아버지 것 같았다. 한데 유일하게 찔레꽃은 엄마 소유로 기억이 된다. 나무가 커서 꽃을 많이 피웠는데, 꽃이 만개하면 가시 많은 그 찔레꽃을 꺾어 교회 강대상 옆에 꽂아놓곤 했다. 손재주가 없는 엄마가, 어떻게 어떻게 화병에 꽂아놓은 품새가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꽃꽂이와 엄마는 도대체 어울리는 조합도 아니다. 그래서 더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찔레꽃은 엄마다. 

 

찔레꽃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재생 버튼이 눌렸다. 실은 엄마 돌아가시고 내내 뱃속에서 울리고 있는 노래다. 아니다. 입원 후 엄마로부터 격리된(그렇다, 이제 생각하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우리 엄마에게서 격리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는 자나 깨나 그리움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었다. 장례식 후 음원 사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른 모든 가수를 검색해서 들었다.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 내겐 더 익숙한 노래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부르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을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잠 안오는 밤
기러기 울음 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어린 마음에 가사가 절절하게 와 닿았었다. 사실 난 분리불안이 있어서 엄마가 떼놓고 어디 가질 못했었는데. 장날 장 보러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고, 엄마는 오지 말라고 쫓고, 울며 따라가다 또 혼나고. 그랬던 기억이다. 늘 그리웠다. 사실 난 엄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릴 적에도 그리 생각했었는데. 엄마 몸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랬었다. 그러니 초등 저학년 때부터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세'는 마음에 백 번 공감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는데, 좋아하던 노래들이 꼭 다 저랬다. 초등학교 때 매년 학교 대항 예술제가 열렸다. 노래, 무용, 외에도 여러 분야가 있었다. 학교 대표로 군 교육청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도 교육청 대항에 나가고, 거기서도 입상하면 예술제를 무대에 서게 되었다. 3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로 독창 부분에 출전하곤 했다. 지정곡 한 곡, 자유곡 한 곡을 불렀다. 5학년 때 자유곡이 '은행잎'이다. 독창 지도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 대회 준비를 하며 자유곡을 고르느라 이 곡 저 곡을 부르는 중이었다. 몇 곡을 부르다 이 노래 '은행잎'을 부르고 났더니 그러셨다. "야, 너는 참 애가 무슨.... 이런 노래를 이런 감성으로 부르냐. 너 참 감수성이..." 그때 감수성이란 말을 처음 배웠다.

 

은행잎

가을 바람 솔솔솔 불어오더니
은행 잎은 한 잎 두 잎 물들어져요
지난봄에 언니가 서울 가시며
은행잎이 물들면은 오신다더니 

 

어쩐지 이런 노래들이 좋고 잘 불러졌다. 부재, 상실, 그리움이 담긴 가사들이 어린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은행잎'을 불러 입상을 하고 6학년이 되었다. 다시 예술제를 준비할 때가 되었을 때 자유곡 선정을 위해 여러 곡 불러보지도 않았다. 내 노래로 한 곡을 정해서 가져오셨다. '아빠 생각'이었다. 잘 불렀고, 입상을 하고 다시 예술제 무대에 섰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유곡 선정을 잘못해서, 내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가끔은 시차의 기억에 오류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일이 먼저고, 그 때문에 이 노래를 선택했던 거지!' 6학년 대회 이후로, 다음 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이 노래 역시 늘 깔린 내 마음의 BGM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가 다시 그리워 아프다. 가슴이 쓰리다.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던 어린 날의 내가 가엾어 가슴이 쓰리다.    

 

아빠 생각

봄이 오니 제비도 돌아왔건만
멀리 떠난 우리 아빠 언제나 오시나
기적소리가 울릴 때면 설레이는 이 마음
아아 우리 아빠 보고픈 우리 아빠

 

내가 사랑하던 모든 노래가 이렇듯 운명을 끌고온 것일까. 어쩌자고 나는 어릴 적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엄마 떠난 지 70여 일이 지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엄마가. 결국 나는 이렇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았구나. 엄마가 보고 싶다. 양평 숲에서 본 그 찔레꽃을 한 잎 따먹고 올 걸 그랬나. 꽃잎에서 엄마의 맛이 났을까. 엄마, 이렇게 말고  "엄마 엄마" 꼭 두 번을 부르고 싶다. 늘 마음에 울리는 저 노래 탓인가 보다. "엄마 엄마" 불러도, "엄마 엄마" 두 번을 다시 불러 네 번을 불러도 "와이야~" 하는 답이 없다. 엄마 엄마, 부를 때마다 휑하고 부는 찬바람에 마음만 아득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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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한 머리칼, 흐릿한 시력, 흐물흐물한 살.

거스를 수 없는 늙은 몸의 신호, 3종 세트다.

흐물흐물한 살들이 복부에 모이고, 두둑해진 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먹어도 살은 찔 것 같지 않았던 남편의 배가 두둑해졌다.

"탄수화물 먹지 말래. 나 이제 저녁 안 먹을 거야. 닭가슴살 먹을 거야."

그 답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어떤 욕구보다 식욕이 낫았었는데, 

절제하려 하면 이상하게 더 치솟는 것이 우리의 욕구다.

"아, 여보. 어떡해. 이것밖에 안 남았어. 밥이 자꾸 없어져. 맛있는데 너무 빨리 없어져."

 

금요일인데, 저녁으로 닭가슴살 하나를 먹겠다고 한다.

그러고 기도회 다녀오면 분명 또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고민에 빠질 것이다.

"현승아, 라면 먹을까?"

여드름 때문에 인스턴트 끊겠다는 아이까지 끌어들여 라면을 끓일지 모른다.

 

닭가슴살 대신 떡볶이를 먹기로 했는데.

떡은 딱 한 주먹 넣었고, 

양배추, 마늘쫑,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파를 산더미 같이 넣었다.

저탄수화물 떡볶이라고 하자. 

떡볶이라기보다는 족보가 야채 볶음 쪽인 것 같지만.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다.

 

등교날이라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떡볶이 재료를 보고 기겁을 했다.

"와, 이걸 다 넣었다고? 최악이다. 최악의 떡볶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더 늙어서 이까지 못 쓰게 되면 떡볶이 죽을 개발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떡볶이를 참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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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J 2020.05.26 10:57

    사모님표 떡볶이는 늘 다양한 변신을!
    근데 매번 맛있어 보이기 있기, 없기요!! ㅋㅋㅋ

  2. SJ 2020.05.26 11:02

    즐겨 쓰시던 '음식'에 대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는게.. 한결 안심이 되고.. 그렇습니다... 대충 이렇게 얘기해도 제 맘 아시죠?

    • BlogIcon larinari 2020.05.26 21:14 신고

      안심된다는 말, 딱 와닿죠!
      특히 '한결' 안심되니까! ^^
      이젠 총각이 된 한결이 볼 날이 머지 않았으니, 한결이 가족 만날 생각이 기쁨 한 조각이에요.

 

 

연구소에서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세월을, 허튼 꿈이라 조롱하는 목소리를, 양 옆에 책의 성을 쌓고 읽고 또 읽던 외로운 밤을, 두려움으로 문을 닫아걸고는 아무 말을 쓰고 또 써 쌓인 노트들을 당신은 모른다. 2008년,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의 수강자가 되어 낯설 길에 들어섰던 날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얼마나 먼 길을 걸어온 것인가. 마흔 되기 전부터 시작된 영적 방황이었다. 나를 잃고 신앙을 잃었으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신앙을 찾아야 다시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전의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았다.

 

에니어그램, 가톨릭 영성의 길로 맘 먹고 들어선 2008년 지도자 과정이었다. 과정을 마치고 연구소 식구로 초대받았을 때의 기쁨도 당신은 모른다. 강의를 하지만 모두 자원봉사다, 라 해도. 돈도 명예도 무엇보다 따스한 받아들임조차 없는 곳에 뛸 듯 기쁘게 투신했다. 오직 배움 때문이었다. 충분히 쌓인 음악치료사의 경력과 학위, 개신교 안에서 이미 알려진 프로필도 아무것도 아닌 곳인데, 그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황송하기만 했다.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곳에 가서 강의를 듣고, 연구원들과 뒤풀이 하며 내적 여정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길을 잃었고, 나도 잃었고, 신앙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오래된 새로운 길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길이, 그러나 딱 봐도 내가 가고자 했던 거기로 이어질 길이 있었다. 그 생소한 문화, 생각보다 언어가 너무나 달랐던 그곳에서 반만 알아듣는 바보처럼 앉아 있었다. 모든 걸 적고, 모든 걸 기억하고, 집에 오면 복습하고, 책을 찾아 읽고 기록했다. 갑작스레 연구소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함께 마음을 나누던 선생님들은 "너는 버려진 거야. 인정해"라고 했지만, 정말 바보 같게도 함께 한 시간을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여전히 감사했다. 상실감은 너무나 커서 며칠 몸이 아팠고, 연애하다 헤어진 것처럼 마음에 찬바람이 많이 불었다.

 

홀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 내 마음을 알아들어 주는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이 슬플 뿐이었다. 그때부턴 혼자였다. 혼자, 그 누구도 모를 가톨릭 영성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기도하고 그랬다. 책이 책을 안내하고, 또 다른 책이 안내한 절판된 책을 찾아 중고서점을 헤맸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긴 시간을 보냈다. 에니어그램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냈다. 친구를 만났다. 믿어주고 도와주는 영혼의 벗들과 손을 잡고 우리 집 거실에서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시작했다. 욕심 없이 나처럼 목마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만났다. 왔다 떠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한 번 왔다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다음 단계 여정을 열고, 또 그다음 단계 강의를 준비했다. 내가 준비되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나처럼, 꼭 나처럼 목마른 사람들은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세미나 전 과정을 듣고, 다른 집단 여정에서 만나고, 소식이 끊어졌다가도 또 이어지고.

 

2018년 12월, 기적처럼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가 생겨났다. 믿기 어려울 만큼 준비된 네 사람이 내 곁에 든든하게 서 있다. 역시 목말랐던 사람들, 얼마나 목말랐으면 이렇듯 계산 없이 자기를 던져 이 샘의 물을 사겠는가. 연구원 네 사람이 없다면 지도자 과정을 개설하는 오랜 꿈이 마침내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내게 없는 것들을 기가 막히게 가진, 가진 것을 사심 없이 내놓는 사람들과 이 어려운 걸 해냈다. 공간이 작아 더 많은 사람을 뽑을 수도 없다. 지도자 과정 1기 6명이 우리에게 왔다. 얼마나 목말랐으면, 얼마나 자기를 찾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찾고 싶었으면 이 구석진 곳까지 왔다. 

 

나를 잃고, 신앙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빛이 왔다. 구원의 빛이 왔다.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왔고, 어두운 밝음으로 왔다. 쓰디쓴 달콤함으로 왔다. 자랑거리를 내려놓는 지점에서 왔고, 내가 쌓았던 착한 행실과 헌신과 섬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왔다. 내가 기나긴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른 것처럼, 자기 아픔과 그림자를 만나며 고립의 시간을 통과했던 사람들이 오늘 지도자 과정에 온 것이다. 미루어 짐작은 되지만 결코 안다 말할 수 없는 자기의 시간을 통과해서 왔다. 에니어그램 나부랭이에 빠져서 내면이나 파고 있는 게 무슨 도움이 되냐는 조롱의 소리를 거스르고 왔다. 착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똑똑해 보이는 포장지를 벗어야 환영받을 수 있는 곳임을 알면서 왔다. 

 

2008년, 지도자 과정 수강자로 앉아 뛰던 가슴을 기억한다. 정호승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한다. 내가 연구원 넷, 지도자 과정 1기 여섯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 오늘 남모를 떨림과 고마움을 사랑하는 이유는 시인의 말과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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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J 2020.05.26 11:06

    글과 상관없이.. 더 야위어진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가고, 마음이 가요... 머지않은 시간에 뵈러 갈게요.

    • BlogIcon larinari 2020.05.26 21:17 신고

      남은 시간 잘 마무리 하고,
      마지막 추억 쌓고 오셔서 기쁘게 만나요 ❤

부모 없는 아이는 고아, '부모 없는 아이'라는 자기 인식은 고아 의식이다. 이승우 작가의 말을 다시 빌자면, 고아 의식은 남과 다르다는 의식이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것이다. 즉, 고아 의식을 가진 아이는 고아가 아닌 척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내적 여정으로 마음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확신하는 바, 사람의 지나친 노력은 모두 고아 의식에 기인한다. 온전히 믿을만한 아버지와 엄마가 있다면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로, 자기 자신이 되어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다. 있는 그대로 사랑 받음을 기대하고 세상이 태어났는데, 그 기대는 생애 초기부터 어긋난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먹여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보듬어주는 부모는 없다. (라고 아이는 인식한다) 뭐라도 해야, 생존 욕구든 안전 욕구든 심지어 애정 욕구도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아 의식'이란 단지 부모 없음이 아니라 부모 없는 아이처럼 온전히 돌봄받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결핍감이다. 물리적으론 살아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부재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뼈를 깎아서 해 준 사랑을 셈하는 부모가 있다면, "아빠(엄마)가 준 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억압이었어요. 아빠가 주고 싶은 걸 준 거잖아요. 엄마가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요. 내가 원했던 건 그게 아니라고요." 하며 울부짖는 아이가 있으니. 부모가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부재하는 부모의 존재가 상실의 시작이다. 돈, 일, 애정, 인정과 칭찬, 분노, 지식, 종교 등 어떤 것에든 중독되어 있는 미성숙한 존재라면, 진정한 의미의 어른으로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면 그의 자녀는 실존적 고아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실존적 고아이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지킬 힘을 키우려 할 것이다. 내 동생에게 자기를 지키는 힘은 그야말로 물리적인 힘. 그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동생보다 싸움(맞다, 주먹으로 치는 그 싸움이다)을 잘 하고 센 인간은 없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사춘기 시절부터 키가 쑥쑥 크고 어깨가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아버지처럼 기골이 장대해졌다. 강한 아이가 되었다. 싸워서 이기고, 동네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로 이름을 날리고, 소위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

 

아버지 없는 모든 아들이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빈 자리』라는 쓴 도널드 밀러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은 내 동생과 달랐다. 아버지를 대신할 권위자, 권위자의 인정과 칭찬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만난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빈자리라는 고백으로 쓴 책이다.

 

동생은 스스로 제 힘을 키웠다. 싸우고 이기고, 그 끝은 합의를 봐야 하고. 엄마와 함께(누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어린 엄마가 되어) 뒷수습을 했다. 경찰서에도 갔고, 합의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어쩐지 그리 힘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비행 청소년이란 느낌보다 그냥 죽이 잘 맞는, 밤늦도록 끝도 없이 얘기를 나누는 동생일 뿐이었다.  

 

비행 청소년이고 사고뭉치였지만, 역설적으로 엄마와 내겐 든든한 힘이 되기도 했다. 늙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해도 주지 못한 안전을 동생이 보장해 주었다. 동네 골목에서 추행을 당해도 얼른 집에 있는 동생 불러내면 그 자리에서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다. 집 앞에 와 진을 치고 밤새 기다리는 등, 스토킹 하던 동기 남자애를 정리해준 전설 같은 에피소드도 있다. 그렇게 줄줄이 딸려 나오는 해결사 역할 동생에 관한 기억이 많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생은 내게나 친척들에게, 제 친구들에게 해결사이다. 불의의 냄새를 맡는 잘 발달된 육감과 몸을 아끼지 않는 싸움꾼 기질을 결국 교회 개혁을 위해 불태웠으니, 엄마 말로 하면 '이게 다 주님의 은혜'다. 

 

모르지 않았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늙은 엄마와 약한 누나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은 힘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음을. 그렇게 만들어진 동생의 사회적 자아의 빛과 그림자까지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 동생이 세 아들의 아빠가 되고, 아이들과 관계 맺는 것을 지켜보며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모르는 아픔이구나! 같은 아버지, 같은 엄마였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취약한 엄마를 경험하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구나. 동생의 고아 의식이 '힘'으로 보상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았고, 마음 공부를 한 이후에는 명확히 이름 붙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안타깝고 가엾어서 마음을 많이 쏟았지만 닿을 수 없는 고유한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동생이 SNS에 올린 글이다. 

시민운동에 온 시간과 마음을 쏟던 시절, 어린 아내와 아기였던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일을 접고 재택 해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아빠 노릇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몸으로 놀아줬고 아내 대신 훈육을 담당했다. 큰아들 수현이가 학교에서 '우리 아빠 마음은요'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충격이 되고 마음이 아팠다. 유독 내 자식에게만 엄격한 나를 반성하던 차에 애들 학교 <아빠 사랑 캠프>에서 아들에게 읽어 줄 편지를 쓰라고 했다. 쓰면서, 낭독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수현이 뿐 아니라, 어린 시절 운형이에게도 읽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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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아~
아빠가 왜 수현이를 샬롬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름, 그러니까 태명이 바로 ‘샬롬’이야. 샬롬은 헤브라이어로 ‘평화’라는 뜻인데,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랑 같은 단어야. 아빠가 수현이 태명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네가 솔로몬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야. 그 이름 뜻대로 네 인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랐던 거지.

그런데 얼마 전에 아빠가 네 행복을 깨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 몇 주 전 수현이가 학교에서 활동한 ‘우리 가족의 마음 표현하기’를 봤단다. 아빠를 동물로 비유한다면? ‘사자’, 날씨로 표현하면? ‘태풍’, 맛으로 표현하다면? ‘맵다’. 모두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더라. 그날 밤, 수현이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혼이 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더라.

샬롬아! 미안하다. 아빠가 혼을 내면서 너무 심하게 화를 내는 건 잘못 한 것 같다. 아빠 본심은 그게 아닌데, 그저 우리 수현이를 바르게 키우려고 그런 건데 너에게 상처를 준 것 같구나. 아빠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고 좋은 아저씨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정작 아들인 너에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생각이 든단다.

한편으로는 네가 쓴 걸 보고 안심이 되기도 하더라. 아빠가 무섭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원래는 착해서 진달래’ 같고, 너희들을 ‘사랑해서 빨간색’ 같다는 내용을 보고, ‘아 그래도 우리 아들이 아빠 마음을 알아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빠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아니? 아빠가 초등학교 4학년, 지금 네 나이 때였단다. 그때는 아버지가 없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었지.

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에도 바쁘셔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신 적이 없단다. 여행을 갔던 추억도, 운동을 했던 적도 없어.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온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안 계셨지. 수염이 자라고 나서 면도하는 법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어.

샬롬이가 태어나던 날, 왜 그런지 모르지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아 수건 한 장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단다.(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아빠는 그때 다짐했지. 우리 살롬이에게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목욕탕도 함께 가고,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같이 좋아해 주고, 면도하는 법도 알려 줄 거라고 말이야.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가? 윗집에 살던 아저씨가 술에 취해 우리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어. 그때 아빠는 무서워서 이불 속에 숨어 자는 척하고 있었단다. 그 이후로 ‘내 가족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결국 아빠는 이렇게 강한 사람이 되었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빠가 함께 해 주고 방패가 되어 줄게.

앞으로는 힘이 세고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사랑해.

2015년 11월 7일.
수현이의 샬롬과 행복을 바라는 아빠가.

 

조카들은 어느덧 사춘기에 진입했다.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고자 하는 결심은 아빠의 것이다. 아이들은 제게 느껴지는대로 느낀다. 게다가 사춘기이니 부모가 준 것보다 주지 않은 것에, 부모의 미덕보다 온갖 악덕만 보는 때이다. 힘이 세고 강해서 사자 같고 태풍 같은 아빠의 든든함이 아니라 그 이면을 느낄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기로 결심한 아빠의 서사을 이해할 수 없다. 아빠가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죽음의 강이 덮쳐 기댈 언덕, 아니 발 디디던 지반이 그대로 무너져 없어지는 아침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도 넥타이를 붙들고 쩔쩔 매면서 첫 양복 입는 그런 아침도 없을 것이다. 대신 태풍 같은 아빠의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기억할 것이다. 결핍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고아 의식은 대물림 된다. 

 

동생과 조카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우리 아이들과의 이야기이다. 고아인 채로, 또는 고아 의식을 가지고 부모가 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이제 진짜 고아가 됐네"라는 말이 몇 번 나왔다. 동생과 대화에서도 했던 것 같다. 아직 고아이다. 아직? 아직이라니. 여전히 고아이다. 이렇듯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내 안에서 아버지 잃은 아이가 우는 날이 있다. 가끔 생떼를 쓴다. 그러면 나는 고아인 그 아이의 울음에 압도되어 어른으로 있지 못한다. 내 아이와 동급이 되어 싸우고 상처를 준다. 어른이 되지 못한 엄마 앞에서 우리 아이들은 고아가 된다. 동생의 말처럼 따스한 말을 우리 딸, 아들에게 건네야 하며 어린 시절 나에게 건네야 한다. 동생은 제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제게 약함을 허락해야 한다. 

 

고아라 부르고, 고아 의식에 이름 붙일 일이다. 이제 진짜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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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JP와는 많은 점이 다르고,

그 이상으로 비슷해서 쿵작이 잘 맞는다 싶지만,

JP&SS 부부의 세계, 해가 거듭될수록 같은 점은 뭐고 다른 점은 또 뭐지,

싶은 것이다.

 

다만 요즘 [우리 부부의 세계]에서는 함께 걷는 것과 나무와 풀을 향한 애정에서 100% 일치이다. 

 

JP 생일을 하루 지낸 월요일,

생일에 못 먹은 미역국을 전문점에 가서 고급스럽게 먹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차에 탔는데,

늘 그렇듯 졸음이 쏟아지더라.

 

차만 타면 그렇게 잠이 온다.

결혼 생활 21년, 남편과 차 타고 움직인 시간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중 1/3의 시간을 조수석에 앉아 꿀잠 자며 보냈다.

 

막 떠들다 갑자기 잠들고,

아픈 엄마 보고 오며 엉엉 울다 갑자기 잠들고,

심지어 엄마 장례식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꺼이꺼이 울다 갑자기 곯아 떨어졌다고,

아이들이 놀린다.

 

꿀잠 자고 일어나니 '신구대학교 식물원' 주차장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계획이었는데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주 많은 풀꽃 친구들을 만나고, 키가 큰 나무 아래를 걷는 기쁨!

 

 

 

 

 

 

풀도 보고, 나무도 보고, 뱀까지 보고.

충분히 보고 걸었을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식물원 카페에 앉아 장대비 내리는 화원을 바라보는 기쁨.

빗소리 들으며 책 읽는 기쁨.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공들여 가꾸던 마당 꽃밭이 있었다.

계절 따라 피던 꽃들, 익숙하여 정겨운 꽃들이 있다.

아버지의 화원을 떠올리게 하는 작약이며 붓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 받으며 꽃밭에 물 주던 아버지를 떠올리는 기쁨, 또는 그리움.

 

 

 

 

 

결혼기념일 일주일 후가 어버이날이다. 결혼하고 맞은 첫 어버이날에 양가 부모님께 선물 대신 현금 봉투를 드렸다. 엄마는 "니가 돈이 어딨다고!" 하며 봉투를 되돌려주었다. 이후로도 어버이날이든 생신이든 "됐다, 필요한 것 없다." 하곤 했다. 넙죽 받아 누리지 못하는 엄마가 싫고, 늘 마음이 아팠다. 밖에서 식사하자고 약속해 놓고 모시러 가면 어느새 밥을 차려놓고는 "그냥 집이서 먹자."며 기운을 뺐다. 어떤 특별한 '날'들이 점점 더 아무렇지 않은 날이 되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그렇게 되었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챙겨드리면 고마워하시고, 그렇지 않아도 무신경하셨다. 그러니 어버이날이 왔다고 해서 더 슬프거나 그리울 일은 아니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어버이날이라 힘들겠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글쎄, 그다지......" 하고 말았다.

 

어버이날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선물을 챙기는 지인들을 보며 야릇해졌다. 마음 밑바닥에서 출렁거리는 슬픔은 여전하다. 어버이날이라고 더한 것은 아니다.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계실 때도 어버이날과 아닌 날의 차이는 없었으니까. 어버이날에 부모님과 맛난 음식 먹으러 가는 친구가 부러운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도 카네이션 달아줄 엄마가 있으면 좋겠네." 이런 생각까지 나가지도 않는다. 슬픔의 강물이 더 출렁거리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작은 일렁임조차 멈춰버리는 듯, 덤덤하고 고요하다. 다만 야릇하다. "그날은 부모님 식사하기로 한 날이라 안 되겠는데요." 이 사소한 얘기를 못 들은 척하고 싶은 야릇함이다. 야릇함은 무기력이 되고 무기력이 우울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며칠이었다.

 

주말을 지내고 남편이 엄마가 있는(있다니? 엄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추모공원에 가자고 했다. 어버이날이 의미 없는 것처럼, 엄마가 묻힌 손바닥만 한 공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카 지희가 아이들 데리고 다녀왔다면 전화를 해왔다. 공원 측에서 꽃 가져다 놓지 말라는 말에 그냥 갔는데, 가져다 놓은 사람들이 있더라고.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돌을 주워다 왕할머니 비석 앞에 놓았다고 했다. 어린 증손주들이 찾아가 할머니를 기억하고 왔다니 어쩐지 거기 엄마가 있는 것 같았다. 딱딱하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출렁출렁 다시 슬픔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났다. 비로소 다시 눈물이 났다. 고모, 실감이 나지 않아요, 고모도 그래...... 살아계실 때 더 많이 가볼 걸, 설날에 늦게라도 갈 걸 그랬어요...... 특별하지 않는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울었다. 

 

집에 있던 카네이션 화분에서 한 송이를 잘라내 들고 엄마에게 갔다. 전날 아이들이 가져다 놓은 흰돌과 나뭇가지가 비석 옆에 놓여 있다. 비석과 크기가 딱 맞는 작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나란히 두었다. 비석의 낯선 글자를 읽어본다. 

 

권사 이옥금

1925. 12. 12. 출생 

2020. 03. 11. 소천

 

조카 말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옥금 권사님의 출생과 '소천'이라니. "우리 엄마 어디 갔지? 엄마, 엄마 어딨어?"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불렀을 '엄마', 물었던 질문 '엄마 어디야?'. 어버이날에 선물 받아야 할 엄마가, 빕스에 가서 새우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먹어야 할 엄마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추모공원에서 나와 강화도의 카페로 갔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펼쳐 읽었다. 아내를 잃고 쓴 애도 일기이다. 세계적인 문호도, 사상가도,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중학생도, 50대 그냥 그런 여자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상실을 통과하며 쓰는 글에는 같은 질문이 담긴다. 

 

사람들은 이제 H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평화롭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중략)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 걸까? 기독교 세계에서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고 동방에서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안식'한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다른 건 다 제쳐 두더라도, 남은 사람들을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이별이 떠나는 사람에게는 왜 고통스럽지 않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 품 안에 있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손이 그녀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봐 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단 말인가? (중략) 자, 회피한다고 얻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고통 속에 있으며 이를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해서는 안 되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나의 애도일기를 구독하는 이들,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는 벗들에게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 부모님께 더 따스하게 대하겠다 결심하고, 전화를 한 번 더 한다.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계실 때 잘해야겠다 결심들을 한다. 좋은 생각이다. 내 상실감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얻은 통찰이리라. 우리 엄마의 죽음이 어떤 엄마에게 따뜻한 전화 한 통이 된다. 그 엄마는 '이 딸이 왜 이러지. 이쯤이면 짜증 내며 전화 끊을 때가 됐는데, 어찌 이렇게 가만히 오래오래 얘기를 들어 주지?' 싶을지 모른다. 이 역시 야릇한 느낌으로 온다. 내 엄마의 죽음, 이 어마어마한 상실이 누군가에게 전화 통화 한 번이구나. 묘하게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 결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고소하다. 금세 잊을 것이다. 다시 전처럼 귀찮아하고 짜증도 낼 것이다. "같은 얘기 좀 그만 하라" 타박할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떠난 후에 후회할 것이다. 내가 그러했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처럼.

 

슬픔은 글로 배울 수 없다. 상실과 애도는 몸으로, 물리적인 시간을 통과하며 겪고 배우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 죽음으로 평생 엄마 잃을 날을 예습했지만 소용없는 것이었다. 오롯이 통과해야 하는 시간, 슬픔을 위해 내어 주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뱃속 깊은 곳에 슬픔이 출렁이고 있는데 "아직도냐, 이제 그만 잊어라"는 말을 들을까 자꾸 숨기게 된다. 틀어막게 된다. 흐르게 하지 못하고 댐을 세워 멈추려 하는 나를 본다. 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는 강박이다. 슬픔의 시간은 단축시킬수록 좋다고 누가 강요하고 있는가. 저요! 내가 나를 지겨워한다. 내 글에 질린다. 

 

장례식 후 바로 읽었던 책 『애도 수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명절과 기념일들이 다가올 때마다 비참하다. 어떤 기념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 싫었다. 애도도 정도껏 해야지! 마음에서 마구 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문장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 정도까지 하지는 말자. 명절이나 기념일에 휘둘리지 말자. 결국 엄마 떠난 첫 어버이날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댐을 세우다 어정쩡하게 우울과 무기력의 어버이날을 보내고 말았다. 이조차도 어쩔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니까. 댐을 쌓아 감정을 막았다, 어느 날 수문을 죄 열어 쏟아냈다, 다시 막기도. 나도 모르는 구멍이 생겨 줄줄 새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가 슬픔을 마주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슬픔을 위한 시간을 채우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대로 내 존재의 모양인지 모른다.  

 

 

 

 

  1. BlogIcon pratigya 2020.05.13 15:44 신고

    생뚱맞은 공감...저도 제 글이 질려요...언니...

    • BlogIcon larinari 2020.05.20 21:12 신고

      이런! 글 좋아, 정말 좋은데!
      언니가 가서 댓글로 소통해야 했는데 말이지. =3 =3 =3

 

교회 말씀 묵상을 나누는 밴드에 남편이 올린 글이다.

갈 곳 없는 어버이날에 기억이 감사가 되는 묵상이다.

'어버이 은혜 감사' 너머 '하나님 은혜 감사'로 멀리 높게 바라보게 된다. 

 

<5월 8일 금요일>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김종필)

오늘의 말씀 : 열왕기하 4:1-7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예언자 수련생이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사별과 가난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빚쟁이들이 두 아들을 노예 삼으려 합니다.
이 미망인의 고통과 슬픔의 무게가
갑자기 제게 전이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기름 한 병을 붙드시니,
빚도 갚고 생활비도 되고
아들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지만, 제 상상력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미망인의 남은 인생은 비록 가난과 고난이었지만,
두 아들은 착한 아내를 얻고
신임을 얻어 하나는 포도원 관리 책임자가 되고
하나는 아버지를 따라 예언자 수련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습니다.
미망인의 생은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숨결로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그녀는 많은 새벽을 바치고
모든 상황을 바치고
두 손 위에 올려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미망인이 받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부와 권력은 아니었지만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가난한 두 아들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하나님 품에 안기신 장모님이 생각납니다.
목사였던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고,
딸, 아들 둘 데리고 가난과 고난의 길로 들어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빈자리는 영예로운 믿음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를 생각하다
가난과 고난이 역전되어 은혜와 영예가 된 장모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버이날, 이제는 카네이션을 드리지 못하지만,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려드립니다.

주님, 미망인에게 부어주신 기름 한 병의 은혜와 긍휼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이우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1. BlogIcon pratigya 2020.05.12 17:50 신고

    아멘...
    잔잔하게 깊은 위로를 주시네요...

    • BlogIcon larinari 2020.05.13 09:27 신고

      그러게. 위로가 되더라. 남편의 입을 통해 듣는 엄마, 사위의 가슴에 남은 장모님 이야기에 MSG가 없어서 더 깊이 다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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