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5년,
우리 부부는 굵직한 턴잉 포인트를 많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벽' 앞에 선 느낌, 안개 속인데 한 발을 내디디면 바로 허공인 낭떨어지 앞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느꼈었습니다.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문이었고, 낭떨어지인 줄 알았는데 대로변이었던 경험도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나날들이 견딜 수 없이 싫었습니다. 안개를 내 힘으로 걷어낼 수 있다 생각했는지 안달복달 하기도 했었지요. 결혼 15년을 함께 걸으며 둘이 함께 가는 길이라면 막다른 길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은 뱃심이 생기는 듯 합니다.


산길을 걷다 모퉁이 같은 길을 만나니 쭉 뻗은 길보다 오히려 반갑더군요.
올해부턴 월요일 함께 보내는 시간들에 더 의미를 부여해 보자는 것에 합의.
유진피터슨 목사님 부부의 월요 안식일 보내는 방식을 컨닝하여 매 주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걷기'라고 하면 '가르침'과 짝을 이루어 남편 안에 있는 오래 된 묵상의 화두이지요.)
우리의 '월요 안식일 걷기 피정'은 시작되었고,
장소는 그간 눈여겨 봐 둔 심학산이 당첨되었습니다.

 

 

무심도 했지만,
처절하리 만큼 상황도 협조를 안 해줘서 '죄인 중의 괴수 남편'이 되고 만 저의 생일이었습죠.
뒤늦은 참회와 더불어 저 빨간 귀여운 백팩에 영혼을 담아 겨우 죄사함을 받았답니다.
그 사연 많은 가방 메고 고고씽. 했는데...
그야말로 천천히 걷는 둘레길인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저 헐렁한 가방이 무거워지더군요.

 

 

 

'정말 귀엽고 당신한테 딱 어울리는데! 무겁다고 나한테 메라고만 하지마.' 라면서 사줬는데,
'그러마'하고 철썩 같이 약속을 했는데 첫 날부터 결국 저 앙증맞은 백팩이 제자리를 찾아갔네요. 둘이어서, 둘이 함께 살아가는 거라서 고맙다는 생각을 아침부터 했었습니다.
아이들 문제로 '한계'에 부딪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남편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자연스레 평안해지는 것을 보면서요. 그랬습니다. '엄마도 주고 아빠도 준 이유가 있네. 우리 엄마는 혼자 우리를 키우면서 얼마나 그 짐이 버거웠을까?' 그러게요. 그러게나 말이예요.

와, 그런데 산행을 하다보니 이런 랩이 저절로 나왔어요.

남편 산행 패션 맘에 안 드나요?
그래도 다행인줄 아세요.
통 큰 청바지에 운동화 신은 것보단 않잖아~~~~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으니 멋이 없지.
무거운 니트 가디건 까지 입어줘야 등산패션의 완성~

이거 월요일 안식일 제대로 즐기려면 커플 등산복 한 벌 놔드려야 겠어요.
저런 패셔너블한 패션은 우리 부부만이라서 상당히 돋보이더만요. ㅎㅎㅎ 

 

 

잠시 쉬면서 떡 한 조각, 커피 한 잔 하다가.........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떡뽀뽀 한 번 했싐다. ㅎㅎㅎㅎㅎㅎㅎ

 


 

산수유가 이번 주면 봉우리를 터뜨릴 거라고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그러시대요.
다음 번에 가면 노란 산수유가 우릴 맞아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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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로 인해서 하루 저녁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짐을 다 챙기고 여유가 있어서 현승이에게 간식 챙겨 먹으라는 쪽지를 한 장 남기려고 펜을 들었다가 세 장을 연거푸 써서 벽에 붙였습니다.  현관에서 들어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곳 벽에 나란히 붙였습니다.


편지 마지막 부분에 하트을 그려 넣었는데 의도적으로 남편에겐 여섯 개, 아이들에겐 다섯 개를 그렸지요. (채윤, 현승 편지 쓰면서 하트 갯수에 신경을 쓰면서 그렸어요. 혹여 양 쪽 갯수가 다르면 안되니까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요. 채윤이나 아빠는 예사로 볼 일이지만 현승이는 (쪼잔하게도) 분명히 하트의 갯수를 셀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통화를 하면서 '엄마, 그런데 왜 우리는 하트가 다섯 개고 아빠는 더 많아?' 합니다. (완전 예상문제!) '세 봤어?' 하니까. '응, 아빠가 제일 먼저고 그 다음 우리야?' 이렇게 스스로 답을 하더군요.


가정의 중심은 부부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많은 일들이 아이들에 맞춰 돌아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가정은 부부중심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사이좋고 행복한 게 우선이고, 가정의 주춧돌이라는 것이지요.


아주 일찍 '자식농사를 마음대로 안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자식은 마음대로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대로'라는 기준 자체가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어쨌든 둘이 행복한 것이 최선의 자녀양육 노하우라 믿습니다.


현승이가 왜 자기가 일등이 아니고 아빠가 일등이냐고 질투의 화신이 되어 타오르면 말해 줍니다. '너도 부러우면 나중에 정말 좋아하는 색시 만나서 일등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어.' 이렇게 세뇌를 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마음에 있는 그대로 하트를 매기자면 조금 다릅니다. 확실히 다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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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어둠은 이길 수 없는 깊고 깊은 생명의 빛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아침 내 창가에 내린 햇살과 같네


얼핏 사진만 보면 부부듀엣 '김씨네' 작은 콘서트 같습니다. 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만.
노래 한 곡으로 다 설명할 수 있기도 한 강의와 아름다운 만남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만.
그렇다고 노래 한 곡으로 끝내는 건 강의에 대한 예의도 블로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까요.
강의나 블로그는 주절거리는 것이 제 맛!


다사다난 했던 지난 일주일의  가운데 날, 수요일이었지요.
청평의 휴양림에서 몇 커플이 모인 신혼부부 학교에서 오랜만에 부부가 함께 강의를 했습니다.
요즘 한참 둘이 꽂혀 있는 '꿈이 있는 자유'의 '그대를 향한' 노래로 '장소팔 고춘자식 결혼강의'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절망은 어쩔 수 없는 날마다 새로운 소망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내게와 내 작은 삶을 향기롭게 해


연애와 결혼에 관한 강의는 이렇게 더블강의로 시작을 했었는데,
JP님이 사역에 집중하신 탓, 제가 연애 관련 글을 기고하게 된 탓으로 한 동안 홀로 많이 다녔습니다. 오랜만에 강의 준비하면서 필수 옵션으로 한 번 싸워주시고,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덕에 더 진지한 논의와 나눔을 할 수가 있었지요.


대체로 강의안을 준비하고, 마이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강의를 하게 되는데....
대본에 없는 또는 대본에 있지만 훨씬 더 뜨거운 마음으로 토해내는 언어들이 있어서 감동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자들은 왜 부부싸움을 하다가 지금 싸우는 주제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거기서 또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고.... 이러는 걸까요? 왜 이러는 걸까요?'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남편이 그랬습니다. 여자들은 철저하게 약자다. 고부간의 갈등에서, 부부사이에서, 이 사회의 구조속에서 철저하게 약자이며 피해자이기 때문에 피해의식에 싸여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알 때 남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은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다. 자기를 죽이신 것이다. 그래서 '미안해'는 철저하게 남자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순간적으로 강사 아닌 수강자가 되어 마음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면서 울컥했습니다.

'가사와 양육과 부모님 섬기는 문제등 모든 것에 있어서 아내는 약자이고 피해자 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관계에 있을 때, 아들의 입장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철저하게 아내의 편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어머니들도 같은 약자이지요. 게다가  대부분의 어머님들이 남편의 인정이나 애정의 표현조차 못 누리셨고요'
건강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결심한 남편의 고뇌가 얼마나 클 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남편의 심정을 다시금 헤아리며 숙연해집니다.




내 시로는 너무 부족한,
내 노래엔 다 담을 수 없는,
내가 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나의 기쁨.



'신혼부부부학교' 교장선생님 부부는 우리의 오랜 친구, 영혼의 친구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걸 한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결혼을 앞 둔 교회 후배들을 데리고 '결혼예비 학교'를 열고, 그들이 결혼한 시점에 '신혼부부 학교'를 또 연 것입니다.
전 날 휴양림에 들어가 바베큐 파티를 하면서 커플들이 만난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밤이 깊도록 나누고 느긋한 오전 시간에 강의를 듣고....
저 신혼부부 커플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신혼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남편과 아내 사랑하는 걸 좀 제대로 가르쳐줬으면.... 부부됨에 관한 공부 좀 시켜줬으면 하면서 얼마나 목이 말랐었는지. 이들은 특권층입니다.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그대를 내게 그허락한 그 을 보게 하는 힘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이토록 나의 전부를 아름답게 해

 
좋은 부부 공동체를 갈망하던 끝에 만난 친구가 백&김 부부이고,
오랜 기간의 만남으로 서로에게 좋은 거울과 위로자와 상담자가 되어줬었는데...
이들로 인해서 후배 부부들이 참 좋은 것을 누리고 있네요.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부럽습니다. 아무나 다닐 수 없는 '신혼부부 학교'에 다니는 네 커플의 학생들이 부럽고, 자신들의 삶과 경험으로 값진 것을 나누며 기뻐하는 교장선생님 부부들이 부럽고.


이토록 좋은 만남들이 우리의 전부를 아름답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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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련 김종필 대표'도 아니고,
그 이름도 어색한 '김종필목사'
오늘 목사되고 첨으로 주일예배에 축도를 했습니다.
1부 예배 마치고 그 분께 온 메세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는데 울컥했어'
2부 예배엔 실시간 영상예배로 화면 캡쳐해서 저 사진을 건졌습니다.
3부 예배엔 본당사수 하고 그 분의 축도를 머리 조아리고 실시간으로 받았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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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안수를 받은 주일에는 매 예배마다 담임목사님 대신 축도를 하는 배려 깊은 전통이 있네요.
게다가 5부 예배엔 결혼식이 있어서 이재철목사님과 나란히 주보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이.... 하악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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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안수받고, 바로 그 주 토요일에 결혼식 주례를 하는 영광이 있었어요.
극강동안으로 인한 우려가 있었지만 특유의 진중함으로 어렵고 떨리는 첫 주례를 통과했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주례하는 당신보다 내가 더 떨려서 죽는 줄 알았고, 집에 와선 떡실신이었소)
감사하고 신비롭게도 늘 그리운 가족같은 한영교회 분들이 여러 분 계시는 자리에서 안수 후 첫 설교, 첫 축도를 했다는 게 믿어지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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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교회 회보에 '부활'에 관한 칼럼을 써야했지요. 딱 작년 이 맘 때 샘물호스피스로 간 한솔이, 아버님의 암선고 이후로 남편에게 죽음과 부활은 얼마나 뼈아픈 주제였는지요.

월요일 안수식,
수요일 결혼강의와 총선,
토요일 주례,
주일 축도.
옆에서 지켜보며 그 어떤 일보다 가장 고통스럽게 해낸 일이 이 원고였습니다.

그렇게 의미있은 많은 '처음'들이 있는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그의 글의 결론처럼 1년이나 지속된 고난주간을 직면하며 죽음을 짊어졌으나 부활의 영광을 함께 사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주방 씽크대 앞에 꽃이 피었습니다.
한 송이 두 송이 꼬맹이 쥬스병에 꽂아 둔 꽃들이 볼수록 사랑스럽습니다.
저기 꽂힌 꽃들이 들꽃이면 더 그럴듯 하겠네요.
저렇게 꽂아두는 꽃 바라보는 걸 좋아합니다.
소박하고, 일상스럽고요.





남편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부끄럽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목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박한 안수식에선 사실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님, 친정엄마 두 분이 가장 감동에 겨우셨었던 것 같습니다.




블로그의 절친님들께 죄송합니다.
누구보다 함께 기뻐해주실텐데 미리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가장 욕 많이 먹는 사람들이 목산데... 목사되는 게 뭐 자랑할 일이라고...' 
라며 갓 나온 따끈따끈한 김목사님이 그러길 원했습니다.
그래도 우연히 알게되어 찾아와 준 친구들이 있어서 마음 따뜻하고 고마웠습니다.





베스트 샷! 입니다.
이런 사진 좋아요. 다들 끝나고 돌아갔는데 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 둘이 얼굴만 보겠다고 달려와서 껌껌한 교회 주차장에서 찍었습니다. 이웃주민 영주가 자기 한 몸 바쳐 희생하여 베스트샷 건졌습니다.^^
떠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두고두고 TNTer들이 삶의 위로와 기쁨이 되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나면 좋은친구~우. 나의 TNTer들 고마워요. 사진에 없다고, 함께 하지 못했다고 슬퍼하거나 노여줘하지 말아요. 마음으로 모두 함께였어요.



 



목사가 별 건 가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 구석구석에서 하늘의 삶을 살아내고,  그 속에서 건져 올린 소박하지만 살아있는 말씀으로 그 나라를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당신 그렇게 걸어가는 길에 함께 할께요. 오늘처럼, 그렇게 살아요.

 

 

 

 

 

 

1.

사골을 끓여서 한 번 먹을 양만큼 담아 얼렸다. 시어머니께로 가는 사골이었다. 두통 때문에 냄새에 예민하셔서 당신 손으로 끓이면 입맛이 떨어져 드실 수 없다고 하셔서 언젠가부터 어머니께 사골이 생기면 내가 갖다 끓여서 인건비를 사골국물로 떼고 다시 갖다드리는 시스템이 생겼다. 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그러겠노라 한 것이다. 나는 사골 끓이는 게 쫌 재밌는데다 최대한 어머니가 뭔가를 하시고, 뭔가를 나눠주셔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로와지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어머니를 위하고, 자발적이었던 일이었는데 이번엔 좀 껄쩍지근한 마음으로 주고 받는 형국이 되었다.

 

2.

며느리 편에서 보자면 유달리 요구가 많으신(당신편에서는 전혀 그 반대로 생각하고 계시는) 어머니가 신혼 초부터 기사로, 같이 살 때는 김치담그는 도우미 아줌마로, 어머니의 대리 주치의로, 하시라도 말씀을 들어들어야 하는 상담자로 많은 역할을 요구하셨다.
어머니과 관계맺기 1단계 시절에는 '거절하지 못함에 대한 자괴감'에 힘이 들었다. 마음으로는 어머니의 요구가 과하다 여기면서 '안돼요'를 적재적소에 꽂질 못해 '어...' 하다가 불려나가고 '어...' 하다보면 운전하고 있고 그랬다. 이건 뭐 내가 자발적으로 섬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끌려다는 것이니 내 몸만 괴롭지 하다못해 효도를 했다는 어떤 고차원적인 기쁨조차 잘 느낄 수 없었다.

 

3.

부단히 괴로워했다. 겉으로는 착한 며느린데 속으로는 항상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 통합되지 못하는 내 정서 때문에 말이다. 그럴 때 남편이고 누구고 '아니, 그렇게 하고나서 힘들면 처음부터 못한다고 하던지!' 이러면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게 되면 이렇게 고민하겠냐고! 하면서... 마음의 여정을 하면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이냐, 사랑이냐' 사실 어머니의 과한 요구에 거절하는 못하는 것은 내가 착해서도 아니고, 사랑해서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착한며느리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움, 부모님조차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는 말 뿐인 신앙인이 될까 두려움, 남편의 인정과 칭찬을 잃을까봐 두려움.... 기타 등등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서는 거절을 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훨씬 마음이 자유로와지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4.

어머니를 수 많은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어머니의 끝없는 이야기를 들어드리면서 정말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해 드리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만성두통과 불면증은 사랑받아야 나으실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니던 가톨릭의 기도피정에 모시고 다니고, 가끔 야외로 모시고 나가 하염없이 시간을 두고 어린시절 상처 이야기도 들어드렸다. 매일 매일 통화하며 어머니가 하루를 지내며 누구를 만나서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내셨는지 들어드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읽기 쉬운 치유에 관한 책을 사다드리고 급기야 어머니의 병이 마음의 문제임도 인식시켜드리고 상담받는데 까지 모셔갈 수 있었다.

 

5.

작년 이 맘 때 아버님께서 갑자기 암선고를 받으시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천국에 가셨다. 아버님의 짧은 투병기간 동안, 돌아가신 이후에 어머님의 선택과 행동에 많이 실망이 됐다. 다시는 어머니를 마주할 수 없을 만큼 어머니의 인격과 신앙에 실망스러워졌다. 아버님을 그리며 매일매일 우시는 것조차 슬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이었다. 마음으로 애를 쓰지도 않았지만 몸이 어머니를 향해서 움직이질 않았다. 어머니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싶기만 했다. 다시는 예전처럼 어머니를 사랑하게 될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버님을 잃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하시고, 마음 붙일 교회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어머님의 말씀과 행동 역시 최악으로 치달으시는 것 같아 짧은 전화 통화 조차도 버거웠다.

 

6.

그럴수록 담담해지고 차거워지는 내 마음이다. 그 동안 나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도 몸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 어머님께 다가가 사랑해드릴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어머님이 몹시 섭섭해하실 뿐 아니라 내 마음을 더 얼어붙게 만드는 언사도 서슴치 않으셨지만 그저 어머님과 선을 긋고만 싶다. 기회가 있으면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 드리고 입에 발린 격려나 칭찬은 한 마디도 내지 않았다. 어머님이 가장 힘들 때 가장 기대고 싶으실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죄송하긴 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는 걸 하겠다고 나설 힘이 이젠 내게 없다.

 

7.

어머님께 말씀 드렸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 여전해요. 제가 행동이 달라졌어도 어머니에 대한 마음까지 달라진 건 아니예요. 그리고 괄호에 다음 말을 괄호에 넣었다. 그러나 다시 예전처럼 어머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지금으로선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해요. 그러나 이제껏 어머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제 힘으로 못했어요. 정말 모르겠고 길을 잃을 때마다 성령님 그 분이 신비롬게 안내하시고 그 손 잡고 왔어요. 혹, 그 분께서 다시 제 손을 잡고 끌어가신다면 회복될 수 있을거예요. 어머니, 여기까지예요. 지금은 여기까지예요.

 

8.

사골 한 그릇 한 그릇에 그 전 같은 따스함이 없는 걸 어머니도 아실 것이다. 따스함은 없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실낱 같은 의지 함 줌은 있다. 어머니 뿐 아니라 관계며 삶의 모든 문제에서 힘겨울 때마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라며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곤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저 사골에 담았다. 나의 노래를....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이제껏 내가 본 김종필이 가장 활기가 넘칠 때는 소그룹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섬기고 있을 때다. 공부할 때 또는 책을 볼 때 가장 김종필스럽기는 하지만 김종필은 공부가 삶과 연결되지 않는 것을 죽을 만큼 못견뎌 하는 사람이다. 김종필의 철학과 공부의 대부분은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드러날 때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남편은 '대화' 그 중에서도 '듣기'의 철학에 매료돼 있는 사람이다. 매료돼 있는 만큼 잘 듣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고, 목장이나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는 그런 것 같다. 소그룹 공동체를 더 의미 있게 나아가게 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프로젝트에 김종필은 남다른 감각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 것 같다. 남편에게 목회를 하기 위한 어떤 은사나 리더쉽이 있는 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목회를 위한 리더쉽이 따로 있는 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편의 이런 점은 목회를 할 때도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는다.

 

남편이 설교를 잘 할 지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설교가 형편없는 목사님은 정말 사절이다. 남편이 좋은 설교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돕겠다는 생각이 있다. 열심히 연구하고, 남의 것 인용해서 자기 것처럼 말하는 것 못하는 김종필이기에, 또 설교가 삶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선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을 못 견디는 김종필이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혹 목사가 돼서 그런 기준에 도달하는 설교가 안 된다고 여겨지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지.ㅎㅎㅎ

 

집 밖에서는 여성운동을 돕고 페미니즘을 외쳐대면서 정작 자신의 아내에게는 다른 기준을 요구하며 사는 '무늬만 페미니스트'인 남성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모님은 자신의 남편인 목사님에게 '여보 우리 이불 가지고 강단에 가서 삽시다' 한다고 한다. 설교하는 것처럼 가정에서 살아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필씨는 아내에게 부모님께, 장모님께, 형과 누나, 처남, 조카들의 검증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인격의 소유자다.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어머님이 남편 인격의 제 일의 덕목으로 '정직'을 꼽으신다. 이것 역시 신학을 하려는 김종필씨가 가지는 또 하나의 메리트다.

 

이렇게 주절거리는 건 굳이 마지막 몸부림을 해보려는 내 이기심일 뿐이고... 주께서 쓰시겠다 하시면 뼈도 여물지 않은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태울 수 있는 것이니까. 어떤 사람에게든 장점 그 곳에 항상 약점이 있는 것이니까 쓸데없는 자부심 내려놓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루하루 일구어 나가기로 하자.

 

사실 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 남편이 신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큰 마음의 짐들과 염려를 내려놓았다. 올 해 신학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내년에 하든지, 그리고 우리 가정의 먹고 살 일 등에 대해서는, 심지어 내가 사모가 되어야 한다는 그 부담까지도 별로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6년 전에 신학을 할 수도 있었고, 4년 전에 신학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 세월 동안 기윤실에서, 대학원에서, 교육개발원에서, Young2080에서 했던 일과 맺었던 관계들이 또 다른 김종필로 성숙시켰고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결혼 초 부터 우리 부부를 일으켜 세웠던 그 한 마디로 긴 글을 맺을까 한다. 앞으로 또 어떤 마음의 시련이, 삶의 시련이 닥칠지라도...우리는 그렇게 살 것이다.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

 

                                                                                                          2005.6

 

 

예전 한영교회 청년회 시절에 한영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선배가 한 분 계셨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선배는 교직을 정리하고 기윤실 간사로 자원하여 들어갔다. 그 시절 교회가 떠들썩 했었다. 장로님들 대표기도 하실 때마다, 혹 기윤실 관련 광고에 그 분의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좋은 직장, 안락한 직장을 포기하고 대신.....'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윤실로 가신 선배는 지금 기독교 시민운동에서 내로라 하는 현역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던 최영기 목사님은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어느 날 모든 걸 버리고 신학교로 가셨다. 실리콘 밸리에서 위 아래로 인정받는 공학박사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부름을 받아셨단다. 해서, 훌훌 다 털어버리고 순종하여 신학을 시작하셨단다. 지금 최영기 목사님은 '셀교회, 가정교회'를 시작하고 성공적으로 안정시킨 것으로 한국교회에 정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일하고 계신다.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이 들었던 얘기다. 하나님이 일꾼으로 부르셨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실패만 하고,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나중에 매 맞고 신학교 가게 된다. 외적 소명, 즉 같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이 공감해 주지도 않는데 충만한 내적 소명만을 가지고, 이 일 저 일 그야말로 실패만 거듭하다 '선지동산'을 향하는 사람들을 나는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던가?

 

박수 칠 때 떠나라?!

 

적어도 내 남편이 신학을 하려면 화려한 자리를 박차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폼나는 장면을 연출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누가 말하는 것처럼 그래야 목회에도 성공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말이다. 내 마음의 바닥에서는 이런 부끄러운 욕망과 좌절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존심 상하게 '신학으로 도피한다'는 평을 들으며 신학을 하다뉘....말이다.

 

평소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잘 부르지 않았던 찬양 '똑바로 보고 싶어요' 의 가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맴돌았다.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진작 남편의 신학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오늘의 이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신학의 '신'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또 신학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도 마음으로 지지해주지 않았던, 결국 이렇게 막다른(?) 길까지 유보하고 유보하게 한 내 책임이 아닌가?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자책감, 거기다가 자기연민,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결심한 남편 옆에는 내가 가장 든든히 서서 지켜줘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그다지 정리되는 것들이 없었다.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하면서 원망어린 기도를 했고 내가 나락에 떨어질지언정 남편은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남편의 반응이다. low self-esteem인 김종필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옆에서 보는 내가 자존심 상해서 죽겠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황인데 정작 김종필씨 자신은 이상하리 만큼 허허로운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괜찮다는 것이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더 주도적, 적극적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남편 특유의 low self-esteem이 발동되어 '역시 나는 안되겠나봐' 하면서 자기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대략 예측되는 시나리온데 의외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오래 전, 남편과 교제하고 얼마 안돼서 결혼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중압감 등으로 인해서 헤어졌었다. 곡절 끝에 다시 만났을 때 김종필은 예전의 우유부단하고 결혼 얘기만 나오면 회피하고 자신없이 굴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신실누나와 결혼할 것이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남편 답지 않게 확언을 할 때가 생각이 났다. 그 때 처럼 어떤 확신 있는 말을 내지 않지만 흔들림 없는 남편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처럼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난리를 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고...참으로 건.강.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나 역시 지난 한 두 달 오버가 심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충분히 알고 있는 남편의 약점인데 내 안의 어두운 것들에 비춰져서 오버에 오버를 거듭하며 분노하고 그랬었나보다. 목사인 동생이 그랬다. '하나님의 목적은 내가 누구를 돕고, 뭔가를 하고, 이루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나 하나 사람 만드는 것이 있는 것 같다'고....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은 인간 정신실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였는지 모르겠다. 인간 정신실, 아내로서의 정신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시고 사람되라고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었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서도 그랬다. 우리 엄마의 사위에 대한 평은 늘 이렇다. '사람이 점잖고, 찬찬하고....차~암, 저 사람은 어찌 저렇게 찬찬한지...' 우리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평은 이렇다. '걔가 어릴적 부터 점잖았었다' 그렇다. 남편은 겉보기 점잖은 사람이다. 입에 발린 말, 조금이라도 정서상 오버가 된다 싶은 말, 결정적으로 어떤 말이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거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남달리 내가 김종필에게 빠진 이유는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어쩌면 때로 인정하지도 않는) 가능성들을 보았다는 것.

때문에 나는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서 사는 동안 남편의 low self-esteem 성향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가끔 '좀 나서지, 좀 드러내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좋았다. 오히려 내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좋기도 했다. '이렇게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인데 내가 살면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인정해 줄 때 정말 좋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거야'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정혜신의 말처럼 남편의 low self-esteem 적인 성향은, 제3자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의 안정감, 자신이 서 있을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다.

이렇게 나는 오히려 남편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이 부분을 존경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런 확신에 가까운 생각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편이 신학을 결심했던 때부터다. 아니, 정확히 신학을 결심했다는 것은 주변에 알리기 시작한 때부터다. '김종필이 신학을?' '과연 김종필이 목회에 적합한가?' '김종필은 카리스마가 없는데... 리더쉽이 약한데....' 하는 반응들을 보면서 부터이다. 반응들이 이렇게 나오는데 정작 김종필씨 자신은 별로 시원한 답을 하질 못한다. 결국 다시 김종필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김종필은 지금 정말 신학이 절실해서가 아니라 썩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의 도피로서 신학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 같은 것들이었다.

신학을 하는 문제로 처음으로 우리 부부가 나름대로 신뢰하는 어떤 분을 만나러 같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터질듯 답답함으로 우리는 대화를 잘 풀어갈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남편은 늘 하던 방식대로 미온적이고 수동적으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얘기했다.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싶어서 찾아갔던 그 분은 '당신은 성공해본 경험이 있냐?' 하는 질문으로 내 자격지심 충만한 상상력을 건드렸다. 즉, '목회자는 어떤 일에든 성공을 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볼 때, 너는 그다지 성공을 경험해보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니가 하겠다니 해야지 어떡하겠나? 하는 메세지로 들리는 것이다.

남편의 직장은 헤드가 되시는 분은 우리나라 청년사역에서 내로라하는 권위자이시다. 신학을 하겠다는 남편에게 그 분께서 조심스레 물으셨단다. '당신의 은사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셨단다. 그리고 후문으로 들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길 '김종필 간사 보다 그 와이프가 목회를 하면 잘 하겠다고...' 역시 나의 자격지심과 상상력은 다시 한 번 의기투합 하였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별 은사라고는 없다. 목회를 하려면 은사(다른 말로 '다재다능')가 있어야지...차라리 당신의 아내가 MBTI도 잘 하고, 글도 잘 쓰고 다재다능 한 것 같다. 목회는 그렇게 다재다능한 사람이 해야한다' 라고 튀들어서 들어버렸다.

이런 저런 일들로 나는 현기증이 나도록 가슴이 무너졌다. 그렇게도 자기 안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남편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떤 유능한 여자들은 결혼을 끝으로 자신의 능력을 다 사장시켜 버리고 마는데 나는 결혼을 통해서 더 당당해지고, 사람들 앞에 더 드러나게 되었다. 그 유일한 이유는 남편 김종필의 관용과 협조과 인정과 격려였다. 유치부 지도교사를 하라면서 스스로 고등부 총무 교사를 포기하고, 찬양대 지휘를 하라면서 청년부 교사로 봉사하기로 작정한 것을 포기하고.....그 때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면서 칠렐레 팔렐레 하고 설쳐댔으니.....

한 동안 내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내가 표현하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고 이 일, 저 일을 선수쳐 버린 내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로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칠렐레 팔렐레 '나는 남편 잘 만나서 결혼하고도 내 일, 교회 봉사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잘 나간다' 하며 살고 있는 한심한 내 자신. 그런 일들의 반복으로 결국 남편은 점점 더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잃어 갔던 건 아닌지....어쩌면 지난 한 두 달 그렇게도 몸이 아팠던 이유는 몸이라도 아파서 그 죄책감을 면해 보려는 또 다른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부분에서 여전히 나는 내 자신을 온전히 용서할 수가 없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손색이 없었던 청년 김종필. 그 청년 김종필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은 김종필이 목사가 되어 있을 거라고, 아니면 언젠가는 목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신실과 결혼한 지 6년 차가 된 김종필을 향해서는 '신학을 하겠다'는 그 결심 하나에 애정의 발로든 무엇이든 간에 왜 이리 걸려오는 딴지가 많은지.... 것두 가장으로서의 책임 같은 현실적인 상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김종필씨 자신이 목회에 적절한 자질이나 은사가 구비가 안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 이런 딴지들 속에서 나는 다시 흔들려야 하는 것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니 김종필씨의 low self-esteem은 더 이상 미덕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좀 자신에 대한 피알좀 하고 살지. 누가 없는 것 가지고 피알을 하라하나? 자신이 남편으로, 아빠로 어떻게 인정받고 살아가는지, 얼마나 독서량이 많은지, 목장에서 얼마나 자주 성공적인 경험을 하는지,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은지..........좀 드러낼 때 드러내고 살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다고 찬양하면서 자신이 얼마가 귀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인식하며 당당해지지. 나 자신에 대한 '용서되지 않음'을 투사하여 필요 이상으로 남편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2005년 6월

 

제 안에는 '표현의 영'이 늘 살아 역사하시는 모양입니다.  남편이 늦게 신대원을 가기로 결심했던 7년 전. 고민하고 결심하여 그 길을 가야하는 당사자 남편보다 옆에서 더 난리 부르스를 땡겼습니다. 함께 고민하며 기꺼이 동의했지만 그냥 맨입으로 신대원에 보낼 수 없어서 서너 편의 글을 당시 싸이 클럽에 썼었습니다. 우연히 그 글을 다시 읽게 되었고, 다시 읽으면서 '정신실, 참 애쓰며 산다' 싶었습니다. 표현하지 않고 때로 잘 느끼려하지도 않는 남편 몫까지 대신해서 느끼고 정리하고 말로 글로 토해내는 시키지 않은 짓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느라 그나마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도.... 어렵고도 쉬웠던 7년 여의 세월을 보내고 목사안수를 받으며 이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냥, 다시 꺼내 읽고 나누고 싶습니다. 1탄입니다.

 

***********

 

최근 더위도 잊을 정도로 심취해서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사람 vs사람>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이명박과 박찬욱 얘기가 '백미러 없는 불도저의 자신감  vs 상향등 없는 크레인의 자존감'이라는 부제로 붙어서 나온다. 이 첫 장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남편 김종필이 박찬욱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박찬욱이 <올드 보이>로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 저자는 '소박하다 못해 의아한 수준'이라고 했다. '로만 폴란스키 같은 거장을 직접 만나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은 것만 해도 충분히 영광이었다' 며 '위대한 감독들이 경쟁 부문 후보에 많이 올라이렇게 큰 상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기쁨을 나타냈단다. 그러면서 저자는 박찬욱의 이 발언에 대해서 'low self-esteem'에 가깝다고 평을 했다.  'low self-esteem' 즉 '낮은 자존감' 대학원 공부할 때 얼마나 많이 들어본 말인가? 정신과든 특수아동 분야든 '낮은 자존감'은 음악치료의 목적영역 중 빼놓을 수 없는 치료 목적이다.


남편에게 '당신하고 박찬욱이 닮은 데가 있어' 했더니 허허허 웃으면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중학교 때 경험을 하나 얘기해 주었다. 중학교 때 전교 회장을 뽑는 자리에 후보로 올랐단다. 말하자면 정견발표 같은 걸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 자리에 선 것 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라고 했단다. 박찬욱이 서 있던 자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반응이 어쩜 이리도 비슷한가? 그렇다. 나도 가끔 남편을  'low self-esteem' 쪽으로 추측해 본 적이 있다.

 

김종필씨는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떠벌일 줄을 모른다. 나는 내가 운동신경이 지독하게 무디기도 하거니와 때문에 신나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부러워서 남자들의 운동에 관심이 많다. 운동을 잘 하는 남자인가? 아닌가?는 내가 남자들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런 남자들이 있다. '농구하면 나지. 족구? 내가 잘 하지. 내가 축구 좀 해'하면서 무슨 운동이든 다 잘 한다고 떠벌이는 사람들 말이다. 막상 경기하는 걸 보면 그저 뭐 중간 정도랄까? 잘 봐줘서 중상 정도? 그런 사람이 그렇게 심하게 떠벌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 보기에 김종필씨는 못하는 운동이 없다.(최근에 하고 있는 축구는 확실히 썩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심심치 않게 골을 터뜨리니 아주 못한다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족구, 탁구, 농구, 배드민턴.... 내가 눈으로 확인한 건 그 정도다. 사람들이 김종필씨를 보면서 '운동을 디~게 못하는 줄 안다' 몸도 기다랗기만 한데다가 잘 내색도 안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평을 들으면 내가 오히려 흥분이 된다. 남편보다 운동을 못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한 수 가르치고 잘난 척을 해도 김종필 자신은 별다른 내색이 없다.


운동 뿐이 아니다. 기타도 한 기타 치고, 찬양 인도도 한 인도 하고, 예전에는 노래 자작곡도 잘 했고, 그만하면 글도 좀 쓰고..... 객관적으로 얼마나 잘 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김종필씨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 낫다는것이다. 김종필씨에게 있어서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나'다. 그래서 자랑을 못하는 것 같다. 늘 자기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니까 말이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가끔 있다. 이런 자리에서 남편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뭐 또래 모임에서도 말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암튼 더 현저하게 말 수가 주는 것이 사실이다. 논의 되는 주제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그것이다. 나이도 어린 자신이 섣불리 말하는데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좋은 점이 드러나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 같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저자가 박찬욱에 대해서 하는 말을 보면,

 

박찬욱은 휘몰아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가 쑥스러워서 그렇게 못한다. '외면의 자기'가 인정받는 것에 비해 '내면의 자기'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겸손과는 조금 다른 얘기다. 일반적인 사람의 평균치보가 더 'low self-esteem' 쪽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제3자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의 안정감, 자신이 서 있을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다.


병리적인 수준의 'low self-esteem'이 아니라면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적절한 자신감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넘치거나 모자른 수준의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모자른 자신감이 어쩌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05년 6월.



이거슨.
이삿짐 센터 직원님들도 아니고,
우리 채윤이 어렸을 때 즐겨보던 에니메이션, 쌍둥이 형제가 공사도 하고 요리도 함께 하면서 말없이 대형사고를 쳐대는 <팻과맷>의 한 장면도 아니고,
그저 처남과 매형이 아이들 이층침대 구조 바꾸는 일에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언젠가 매형은 시민단체 운동가로 일하고 있었고,
처남은 아버지의 대를 이은,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2대 목회자로 교회의 녹을 먹고 있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자리가 바뀌어 매형은 늦깎이 목회자로,
처남은 늙은 나이에 시민단체 바닥 간사로 들어가더니 타고난 싸움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교회개혁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있기도 했다.
처남 매형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신뢰와 존중 속에 살짝 어려워 하는 사이.
그러나 서로 안 보이는 곳에서는 놀리며 낄낄거리는 사이로 돈독하고 돈독하다.


결혼 전부터 누나를 삥뜯어 사는 게 일상이었던 처남이 자기 손으로 처음 제대로 된 옷을 한 벌 사더니만 완전 맘에 들어 감격에 감격을 마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옷을 이렇게 싼 가격에 사다니....' 하면서 몇 주를 좋아서 펄쩍펄쩍 뛰더니똑같은 티셔츠 똑같은 청바지를 사다 매형에게 안겼다.

 

 



우리 남매가 서로 서로 맘 놓고 삥뜯는 사이, 서로 서로 맘 놓고 뜯겨주는 사이다.
더불어서 처남과 매형도, 올케와 시누이도 아낌없이 주고 나누는 사이라서 햄볶는다.
만날 때마다 서로 뭔가를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고,
또 뭔가를 뺏어가려고 안달인 이율배반적인 관계. 좋다. 차~암, 좋다.





내가 느끼는 남편의 최고의 장점이기도, 내게 가장 버거운 성품이기도 한 것이 '치우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 꺼니까 더 괜찮고 나와 연관있으니까 더 근사하단 식의 무의식적 치우침이 참 없은 사람이다. 당연히 내 여자라고 무분별하게 편들어주는 일이 없다(라고 말하면, 이제 눈치 많이 생겼다고! 나름 노력 많이 하고 있더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나는 내 새끼라고 무조건 편이 되어주는 사랑을 받아보질 못했다. 내 새끼이기 전에 먼저 목사의 딸이었다 .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혼날 일은 일단 내가 먼저 혼나고 한 개 더 혼났고, 안아줘도 남의 아이들 먼저였고, 뭘 잘해와도 칭찬보다 먼저 '교만하지 마'라는 설교를 먼저 들어야헸다(라고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편' 또는 '편 들어주기'에 집착한다. 치우침 없는 남편의 성품은 내가 얼마나 편에 매여있는 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였고, '아, 저렇게 사는 방식도 있구나'를 가르쳐주는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덕분에 최근 나는 '편'에 매여서 얼마나 나 자신을 들들 볶으며 살아왔는지를 깊이 성찰 중이다.


발렌타인 화이트 데이, 이런 걸 거의 챙기지 않는다. 연애 때도 그랬던 것 같아. 결혼하고 어느 핸가는 발렌타인데이에 남편에게 '난 왜 쵸콜렛 안주냐! 나도 좀 다른 여자들처럼 쵸콜렛 받고 싶다'고 버럭했고 남편은 막 미안해 했는데... 알고보니 여자가 주는 날이었긔.


암튼, 그러한데....
남편의 새 여자. 요즘 아주 미모에 여성미까지 돋는 여자 김채윤은 현재로선 주변에서 젤 맘에 드는 남자인 아빠에게 사탕을 받아야겠다 싶었나보다. 이미 사전 주문은 되어 있었던 것 같고.
퇴근 길에 아빠가 새여자 챈을 위한 색색이 예쁜 사탕을 포장까지 해왔다. 새여자에 대해 그닥 질투 같은 건 안하는데다 사탕엔 관심도 없는 내게도 깡통에 든 사탕을, 삶이 질투 그 자체인 현승이에겐 그 녀석을 꼭 닮은 곰돌이 빵 하나를 안겼다.


엄마를 질투하며 아빠를 차지하고 싶은 딸, 질투는 안한다지만 은근히 딸을 견제하는 엄마, 그 엄마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며 아빠를 갈구는 아들. 각각의 기대에 맞게 선택한 아이템이라 여겨져 별 다섯 개를 준다.







그리고 시큰둥하며 별로 반갑지도 않았었는데 좀 전에 내 몫의 레몬캔디를 까서 하나 먹고 있는데 의외로 맛있네.ㅎㅎㅎ 아주 오랜만에 사탕맛을 느껴보는 듯 하다. 이런 맛....어른이 되고서 처음인가???? ^ㅡ^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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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님은 한 때 시인이었다. 시를 지어 노래를 만드는 노래하는 시인이었다.그의 마지막 작곡은 내 기억으로 한영교회 청년회 주제곡이었다. 참 좋은 노래였다. 기타를 들고 눈을 지긋이 감고 허공을 향해 고개를 살짝 든 채 노래하는, 그리고 노래를 만들고,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한 끼 금식을 하여 점심값을 보내는....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하는 그런 매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누가? 라고 하는 사람이.
나를 만난 이후로 남편이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 남편의 더 젊은 시절을 알고 보낸 친구들은 우리가 교제하고 결혼할 즈음에 '어떻게 종필이 오빠 얼굴이 저렇게 밝아질 수가 있냐?'고 놀라곤 했었다. 나 역시 남편을 본 첫인상이 '거참 사람 참 젊은 사람이 되게 칙칙하네' 이런 느낌이었으니까.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위 사진은 신혼 초에 찍은 사진이고 저 사진에선 정신실에 물든 밝아진 김종필이 느껴진다.






맞다. 시를 쓰던 김종필은 여깄다.
시를 쓰던 JP는 칙칙했고, 쓸쓸해보였고, 좀 무서웠고, 멀게만 느껴지는.....
좀처럼 그에게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고독한 청년이었다.
어쩌면 시를 쓰는 김종필의 마음에 시를 길어올리는 우물이나 웅덩이 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우물의 깊이를 느꼈고 매력에 빠져들었고 연민을 가지게 되었다.






가끔씩 '당신 전처럼 시도 쓰고 노래도 만들고 그래봐. 애들 위해서 예쁜 노래도 좀 만들어주고... 당신이 만든 동요 가지고 채윤이 창작동요제 내보내면 좋겠다' 이런 말을 별 기대없이 하곤 했었다.
'이젠 시가 써지질 않아' 라는 대답을 해왔다.
남편도 나도 결혼생활을 통해서 정말 많이 변했다. 남편 얘기만 하자면 남편은 밝아졌고, 더 행동하게 되었고.... 또...... 또 있나?






요즘 문득 시를 쓰던 남편의 영혼의 우물을 내가 메워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고독과 외로움을 풀어내고자 애쓰던 흔적이기도 할테니까 외로움의 웅덩이가 어느 정도 메워졌을 때 더 이상 그 때 그 시가 나오니 않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나무꾼이 선녀옷을 감추듯 나는 남편의 시의 샘을 감춰버린 건 아닐까? 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본다. 





남편이 다시 시를 쓰고 노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 문득 남편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불렀던 노래와 다르겠지만 그 다른 노래를 부를 수있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예술적이고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남편이 자신만의 노래를 찾아내서 다시 한 번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독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고독한 누군가들을 위해서 불러주는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어떨까?
그 노래는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설교가 될 수도 있고,  영혼을 돌보는 만남이 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사진을 찍으면 남편의 웃음에 어색함이 없다. 언젠가부터 남편의 웃음이 자연스럽고 해맑단 얘길 많이 듣는다. 그 해맑은 웃음에서 건져올리는 김종필의 새로운 시와 노래가 듣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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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
엄마 중독에 아내 중독인 중독자 두 남자 모습.

엄마이며 아내가 기운이 좀 없어보이자 앞 다투어 설거지 하고 커피 내릴 준비하는 중독자들.

저러고 있다가 아내 중독자가 엄마 중독자에게 한 마디 한다.

"야, 너는 내가 결혼하고 몇 년 있다 터득한 걸 어떻게 벌써 깨달았냐...."
(하면서 행여 이 놈에게 질세라 그라인더 돌리는 손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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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요리를 하든,
요리책을 찾아서 하든,
어디서 한 번 먹어보고 하든,
생전 처음 듣도 보도 못한 요리를 만들어보든....
닥치고 요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냄이다. 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오늘 저녁 무렵까지 거실에는 저런 풍경이었다.
상이 깔리고 상보가 덮이고 '자 이제 채우보라구!' 하면서 떡 버티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막막했다. 저녁 6시 까지 뭔가를 먹게 해놓아야 한다! 미션, 미션 파써플!!






몇 해 전 내 생일에 어머니께서 안마기를 선물로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더랬다.

'에미 선물이고 애비 피곤하고 근육이 뭉치고 그럴 때 하라고 해라'
일정 정도 섭섭하고 한편 이해도 되는 선물과 선물의 변에 대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어머니 생신을 집에서 차려드렸다.

생각해보면 그 때 어머님 말씀을 그대로 돌려치기 해도 좋으리라.
'어머니, 어머니 생신상이구요.... 애비를 위해서 준비했어요'
텅 비어 식탁보만 깔린 허전한 상처럼 내 마음도 그랬다.
10년 넘는 결혼생활 동안 내게 '사랑'을 새로 가르쳐준 시어머니와의 관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시어머니께 드릴 것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드릴 사랑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드린 사랑이 많다는 자부심만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요즘에는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그 간의 내 행적도 알아주고 말할 수 없이 고마워했던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 텅 비어버린 내 마음에 섭섭해할 만도 한데
'당신이 그 동안 내 몫 까지 다 하느라 애썼지. 당신한테만 맡겨놓고 난 부모님께 너무 무심했지. 내가 잘 할께. 당신은 마음으로 자유롭게 해'
이러는 남편을 위해서 어머니 생신상을 차렸다.


검은 비닐봉지에, 스치로플 팩에, 여기 저기 담겨진 야채와 재료들이 어느 새 먹을 수 있는 모양을 갖춰가는 게 신기하다. 바로 내 손이 닿아 그렇게 되다니 과연 마이더스의 손이 아니던가.
접시에 처음 담기는 것들은 밋밋하다. 그저 두부일 뿐이고, 그저 볶아놓은 버섯일 뿐이다.







식사시간이 임박해오면 밋밋하던 접시들에 소스가 얹어지고 짝을 이루는 재료들이 더해져 색과 맛의 조화로움이 생긴다. 그렇게 음식에도 생기가 돈다.
오래 끓인 미역국이 뽀얗게 진국으로 우러나고,
무르익은 고기가 후두두두 먹기 좋게 부서진다.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빈 접시에 생기 나는 음식이 놓여지고,
상이 차려져 풍성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길도 그랬으면 좋겠다.

손목이 아프도록 재료을 씻고 썰고 준비하고 익히기만 하면 금새 풍성함을 채워져 내 사람들과 나눌 것이 넉넉해졌음 좋겠다. 허나, 마음의 길은 그러하지가 않다.





맛있게 식사를 하셨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은 다잡아 먹은 내 마음에 다시 한 번 생채기를 내고 가셨다. 아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애써 생일상 차린 사랑하는 막내 며느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신 적이 없으시다. 어머님은 그런 삶을 살지를 않으셨다.
내 안에 부딪혀 올라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유물들이 내 자신에게 상처를 냈다. 아니다. 상처 준 사람 없이 받은 사람만 있을 수 있나?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모르겠다. 요리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 지는 몰라도  결혼 13년 차 며느리 나는 오늘 마음의 잔치에서는 아무것도 요리해내질 못한 것 같다.


그래도 필요 이상의 자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음식은 한 번 해서 먹어치우면 끝이지만, 기껏해야 '그 날 그거 맛있었어'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주면 최고지만 마음의 길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길은 느리고 길어서 단 번에 해치울 수 일이 아니니까.





다른 어떤 날보다 기도가 하고 싶어진다.

어머니와,
어머니와 나를 동시에 사랑하는 남편과,
나와 동병상련의 또 다른 며느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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