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하고, 똑같은 갈등을 반복하는 명절 수십 년이다. 명절만 없었다면, 저 사람만 없었다면 하던 시간들이었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명절도 힘을 잃었다. 어머니의 명절 이야기이다. 몸의 한 부분으로 기울어 수십 년 살아와 틀어져 고착된 관절 같은 명절이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음식을 하며 같을 갈등을 겪느라 마음 어디가 기울어 틀어져 버렸지만 명절이 사라졌다. 명절과 함께 사람들도...

명절 전날 여자들이 모이는 시간, 만드는 음식, 일이 끝나는 시간, 명절 당일 아침에 모이는 풍경, 어정쩡한 예배, 식사, 그리도 점심, 또 저녁 손님... 어쩌면 그렇게 어느 해 명절을 따로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찾아왔었다. 명절 전후의 걱정 근심, 그리고 분노와 피해의식도. 매 명절마다 같았다. 그런데 이제 매 명절마다 "어떻게 모이지? 뭘 먹지?"를 아주 새롭게 고민하고 창의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채윤이 현승이가 각각 공부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특별한 상황을 백분 활용하여 또 다른 모양의 추석이다. 어머니 모시고 셋이 비싼 식사하고, 걷고, 차 마시는 추석 전야를 보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북적대는 식구가 싫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어머니, 조용히 단출한 음식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에게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고 단출해도 너무 단출한 노년의 시간이 왔다. 혼자 지내시는 것이 외롭고도 외로우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도 어머니 일생의 서사가 담긴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해결할 수 없으니 근심이 쌓여가고. 그래도 힘을 내어 할 줄 모르는 너스레를 떨고, 농담을 하여 웃겨 드리고, 토닥여드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야야, 나는 먹기 싫으면 안 먹고, 그냥 바나나랑 견과류 넣어서 휘리릭 갈아서 먹으면 아침 땡이야. 혼자 밥 먹기가 너무 싫어. 어머니, 저는 아침 세 번을 차려요. 각각 시간대 별로 일어나서 먹는 것도 다 달라요. 현승이는 꼭 국에 밥 말아먹어야 하고요....(셋 다 각자 알아서 먹는 편이지만 과장해 봄) 그렇지, 세 식구 따로따로 먹으면 힘들지... 그렇지...

젊은 부부들이 육아전쟁으로 부부전쟁도 치르고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을 들으면 "그래도 다시 안 올 아름다운 시간인데. 힘들어도 지금이 제일 예뻐..."라고 가닿지 않을 말을 하(거나 삼키)곤 한다. 돌아보면 육아로 힘들 때 "언제 우아하게 외식 한 번 해보지?" 막막했던 어떤 날이 있었는데. 그 힘겨웠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될 줄이야. 우리 어머니는 수십 명 모여 북적이던 그 명절의 시간이 그리우실까? 여전히 지긋지긋하셔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실까? 그런 회한이 좀 있으시면 좋겠다. 약간의 회한 끝에 단출하여 외로운 오늘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발견하셨으면... 이렇게 단 한 번의 새로운 추석이 가고 있다.

현승이가 일어났다. 단 한 번의 아침 식사를 챙겨줘야지.

명절은 죄가 없다

2년 여 모이지 못했던 시가의 명절 모임을 했다. 어머님만 모시고 와 하루 함께 식사하고 놀아드리려 했는데. 어쩌다 다 함께 모이게 되었다. 기꺼이 식사 준비하려고 마음먹었다. 메뉴 조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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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작년 추석에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추석, 설 명절에 흔하디 흔했던 장면들, 꿈만 같다. 생후 10개월 증손자와 95세 할머니가 눈을 맞췄다. 한 세기 가까운 나이 차이다. 사람을 알게 되면 이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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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러 서울 갈 계획은 오지도 않은 태풍과 굵은 빗방울로 접어 버렸다. 서울 가는 길은 멀다. 분당으로 처음 왔을 때 교회 집사님들이 "서울 갔다 왔어요. 서울 갔다 와서 피곤해요?" 하시면, 여기서 서울은 서울에서 서울보다 가까울 수도 있는데 저러시나 싶었었다. 살다 보니 알겠네. 서울 가는 먼 길을... 합정동 살 때 참 좋았는데. 씨네큐브, 아트하우스 모모, 상상마당, 필름포럼이 죄다 버스 한 번에 30분 거리였었다니! 여하튼 이러다 포기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네이버에서 봐야지, 잠깐의 위안을 위한 결심을 해보지만 노트북 작은 화면으로 보게 되질 않는다.

밥 먹고 카페 가서 공부나 하자! 그래서 간 집 근처 유명 카페다. 유명 카페라서 낮에 가면 도떼기시장이라 테이크 아웃 한 잔으로 만족하고 빠져나오기 바빴었다. 소문만 무성한 태풍과 굵을 빗방울로 어째 여기가 다 한산하네. 논 한가운데 있는 카페라 창밖 뷰가 저렇다. 비 오는 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비멍' 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뷰가 저러니 정말 감동이다. 막 모내기 마친 논, 초록 벼로 빽빽한 논,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논, 텅 빈 겨울 논... 다 좋아한다. 어릴 적 익숙한 풍경이라서인가. 이거 정말 경치가 유혹이네!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것.

 

남편도 영화 좋아하지만, 합정동이 아니어서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 서현, 오리, 동백... 근처에 멀티 영화관이 쎄고 쎘으니까. 취향 존중의 미덕을 발휘하여 내 영화를 함께 봐주곤 한다. 취향과 취향이 충돌할 때 그는 이기는 법이 없다. 영화도, 점심 메뉴도, 카페도 그의 선택은 하나다.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세요!" (온전히 나, 오직 내) 취향 저격 카페에 앉아 각자 읽을 책을 펼쳤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펼치고 마주 앉았다. 이번 주 수업 주제이기도 하고, 책을 읽다 궁금하기도 하여 조직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질문을 던졌다. 남편 입의 봉인이 풀렸다. 술술술술, 네버앤딩, 네버앤딩, 술술술술.... 우이씨, 아는 것도 많아! (나는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책에서 본 한 마디를 한 거였다고오....) 그냥 인신공격 전술로 판을 엎어 버릴까?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싸움 붙으면 이기고 지는 편이 뻔하다고오! 영화 <헌트>와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흥행으로 싸움이 되냐고. (라고 비유하면 블친 둥절인가요?) 보편적 개념들로 견고한 틀을 갖춘 '조직' 신학과 개인의 '체험'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신비(영성)' 신학이 싸움으로 붙으면 되겠느냐고!

남편이 연구소의 가을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주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이다. 달라스 윌라드 덕후로서 전작을 읽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혁신>은 여러 차례 읽었고, 책모임도 한 번 했었다. 저작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글 맵으로 달라스 윌라드가 나고 자란 곳, 살았던 곳 골목까지 따라다닌 '광' 덕후이다. 내가 <내적 여정 세미나>를 이끄는 방식은 다소 직관적이고 영성적이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다. 조직신학에 익숙한 목회자들에게는 '내적 여정'을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목사님, 전도사님, 선교사님이 많았던 작년 지도자 과정에선 여름방학 모임으로 <마음의 혁신>을 읽었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개신교 안에서 '영성 형성'을 꾸준히 연구하고 틀을 세운 분이다. 그러니까 영성을 풀어내는 그의 언어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다. 김종필과 찰떡이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을 마주 펼쳐놓고 약간의 논쟁을 하다 김종필의 이 말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실은 꺼내지도 못했다.)심지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마음의 혁신>의 결론은 결국 사랑이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한 해설이야.


많은 싸움이 취향과 취향의 대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누가 이길까? 취향을 존중하는 자? 존중받는 자? 나는 '조폭신실'이고 항상 승자이다. 현상적으론... 그런데 늘 어딘가 모르게 진 느낌이 있다는 건 그냥 없는 느낌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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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텀블러를 선물했다. 카페에 갔는데 “텀블러 예쁘다.” 하며 만지작거리는 걸 봤다. 그런가 보다 하고 나왔는데, 아까 그 텀블러가 예쁘지 않았냐 묻는다. 어머, 이건 사줘야 해! 다음 날 그 카페에 가서 바로 그 텀블러를 샀다. 물욕이라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냐만)이라 자신을 위해 뭘 살 줄을 모른다. 소유하려 하질 않아서 그렇지 미적 감각은 있다. 예뻐라, 하는 걸 가지도록 하고 싶었다.

이 얘기를 들은 채윤이는 "촴나, 뭐 운전해 줘서 대가로 주는 거야? 자기 휴가에 무슨 운전을 해주고 그래." 했다. 남해 여행 후 이틀이 남았었고, 그 이틀 저녁 모두 나는 강의 약속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 비가 오고 운전할 길은 멀어서 부담이 컸는데 남편이 운전해서 같이 가주겠단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도 "또 같이 가면 안 돼?" 했더니 선뜻 그러겠단다. 휴가엔 늘 하루 이틀을 남겨 자기만의 시간을 갖곤 하는 JP이다. 은사님을 찾아뵙든지, 다니던 신학교 도서관에 가 앉아 있다 오든지, 혼자 드라이브를 가든지. 하반기 목회를 위해 나름의 골방 시간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생긴 피부 발진으로 여의치가 않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밥 먹고 책 좀 보다 자고... 이렇게 보내다 저녁 시간은 김기사를 자처한 것이다. 고마웠다. 큰 힘이 되었다. 정말 고마웠는데, 단지 그 때문에 텀블러 선물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책을 보며 기다리곤 하는데, 둘째 날 강의 마치고 만났는데 양손에 검은 봉지가 한 가득이다. 뭣인가 했더니... 작은 시장이 있어서 장을 봤단다. 와, 김종필이 스스로 장을 봤다고? "당신한테 혼날 수도 있어. 수박이고 뭐고 다 너무 싸서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안 좋아도 좋아할 거다!!! 내가 좋아하는 수박, 체질 식단 하느라 본인이 먹을 단호박... 등을 알.아.서. 사다니. 어떤 남편들에겐 흔한 일일 수 있으나, 김종필에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집안을 휩쓸었던 페미니즘 논쟁, 집안일 논쟁 때가 생각난다. 아침 식사, 장 봐서 식재료 준비하는 일 같은 걸로 시작하여 속초 1박 여행을 갔다 싸우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일이 구별 없다는 원칙에 100% 동의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나도 그건 100% 인정), 몸에 밴 것은 원칙과 상충하니 본인도 답답하고 나는 화가 났었다. 이제야 이렇게 몇 문장으로 할 수 있지만 보통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었다. 눈앞의 시장을 놓치지 않고, 싼 가격에 장 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정신! 이것은 정말 엄청난 변화이며 성장이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묵은지를 주문했는데, 내가 1박으로 어디 다녀오는 날에 택배 도착 문자를 받았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왔을 텐데, 내가 집에 가야 냉장고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조바심이 났다.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 생각해 보니 김치 택배가 안 온 것이다. 뭐야? "낮에 택배 온 것 없어? 스티로폼 박스!" "김치 택배 와서 내가 통에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었는데..." 와, 거기서도 한 번 감동! 어려운 철학 책 읽는 지적 감각은 뛰어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생활의 감각으로 내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끓이다 끓이다 남편를 볶아대고… 아, 끓이고 볶던 시간들이여. 이 역시 사소하지만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함께 쓴 책 『와우결혼: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함께 했었다. 결혼 5, 6년 차 때였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의 시작이다. 변하지 않으면 사랑이 사람 죽이는 사달이 난다. "내가 줄 수 있고, 주고 싶은 것"에서 "네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으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 안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감지되고 측정되는 양과 질이 있는 것이다. 남편의 성장에 감사한다. 쓰다 보니 텀블러 하나에 이런 마음,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여자에게 괴롭힘 당한 한 남자의 성장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려 23년 동안.



저녁 먹고 zoom 모임 전까지 걸을 시간이 있었다.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걷기로 했다. 식탁에 앉아 노닥거리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붉다. "어, 지금이야. 지금 나가야 돼." 하고 일어났다. "아, 지금? 개와 늑대의 시간! 빨리 나가." 아침 설거지도 했다며 저녁 설거지는 아빠가 하라던 채윤이가 말했다. 투덜투덜, 기꺼이 저녁 설거지 당번을 맡아 주면서.

해가 지는 시간, 해지고 어두워지며 개와 늑대가 구분이 안 가는 시간이라고 한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기도, 밤으로 가는 시간이기도. 참 좋아하는 때이다. 단지를 빠져나가는데, 저 녀석! 개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고양이가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다. 성원, 금호, LG 아파트의 귀여움을 관활하는 놈이다. 번듯한 집을 짓고, 오가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살이 디룩디룩이다. 팬서비스도 수준급이라 사진 포즈 기가 막히게 잡아준다. 개와 늑대와 고양이의 시간.

탄천에는 아무렇게 피어있는 개망초가 한창이다. 오늘은 개망초가 참 예뻐 보인다. 어스름한 빛이라 흰색이 도드라져서 인 듯하고. 무더기 무더기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참 예쁘다. 개와 늑대와 개망초의 시간이다. 두툼하고 뭉툭한 JP의 손을 잡고 개망초 옆을 걷는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우리라서 좋다. 개와 늑대와 JP&SS의 시간이다.

벚꽃이 예쁘다는 은이 성지를 찾았다.
말로도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빛깔의 봄 산,
그 배경의 흰 건물인 성당이다.

벚꽃 엔딩 즈음이라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흩날리는 벚꽃 잎.
그 배경의 십자가 길이다.

십자가 길을 천천히 한 바퀴 걷고 근처 카페에 갔다.
벚꽃 아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독서의 시간.

마음에 드는 근사한 사진을 여러 장 건졌다.

'마기꾼'이라는 말이 있단다. 마스크 사기꾼이라고. 마스크 벗은 얼굴에 실망하여 붙인 이름인 것 같은데. 마스크 낀 얼굴로 사귀기 시작했다면 나중에 실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싶다. 보이는 눈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코와 입과 턱을 가장 조화롭게 상상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운동하는 곳에서 물 먹느라 잠깐 마스크 벗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내린 결론이다. 보이는 것을 근거로 주변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채워 넣어 완전체로 상상할 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마기꾼이라는 말이 딱 맞고. 멋진 사진 한 장도 그와 다르지 않다. 앵글 밖은 상상과 다르다. 일단 저 카페, 커피 맛이 너무나 좋지 않아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책 보는 게 설정은 아니지만, 셔터 누르는 소리에 살짝 얼음 상태를 유지했던 것 사실이고. 주변의 지저분한 곳은 이렇게 자르고 저렇게 잘라서 멋진 부분만 남긴다는 건 선수끼리 다 아는 거고. 앵글 밖은 다르다. 앵글 밖은 심지어 위험하다. 사순 기간이라 십자가 길을 걸으며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참 좋았다. 한껏 고양되고 경건해진 마음으로 동산을 내려오다, 아아아아아악!!!!! 나는 소리 질렀고, 남편은 그 소리에 더 놀라 펄쩍 뛰며 나를 마크하려 들었다. 유유자적 꼬불거리며 가는 뱀 한 마리 발견! 십자가 밑에 뱀 한 마리.

앵글 밖은 이렇다.

벚꽃 머리에 이고 걸을 수 있는 나날이다. 월요일로 치면 두 번 정도 될까. 여기저기 벚꽃 길 검색을 하다 동네 보정동으로 정했다. 산책하며 지나는 길이지만, 벚꽃 명소로 치고 가 보기로. 여러 아파트를 통과하고 작은 언덕 같은 산을 넘어 3,40 분 걸으면 보정동 카페 거리다. 인도 카레 좋아하고, 따뜻한 난을 특히 좋아하는데, 활짝 열어젖힌 창문을 좋아하고, 노천카페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을 다 갖춘 식당에서 기분 좋게 식사했다. 날이 뜨거워서 해가 나는 쪽으론 걸을 수가 없다.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해서 정자 벤치에 앉았다. 

 

월요일 밤에 나는 거실에서 대학원 수업하고, 남편은 안방에서 <마음의 혁신> 책모임을 한다. <마음의 혁신>은 내 인생의 카타콤 안에서 만난 인생 책 중 한 권이다. 신앙 사춘기의 숲이 아직 캄캄할 때, 카를 융과 안셀름 그륀, 아빌라의 데레사를 시각 장애인 수준으로 더듬던 때였다. 우레와 같은 깨달음을 주지만 너무나 낯선 저자들이라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었다. 그 시절 유일하게 익숙한 세계 안의 저자가 달라스 윌라드였다. 이제 읽어보면 그렇듯 철학적이고 신학적이고 딱딱한 책인데, 그 책을 읽고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졌으니, 참 신비한 일이었다. 작년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 여름 방학 중에 <마음의 혁신>을 함께 읽었다. 감개무량했지. 나는 <마음의 혁신> 한 권이지만, 달라스 윌라드의 전작을 읽고 제대로 빠져 있는 남편이 최근 목사님 집사님 세 분과 월요일 저녁 책모임을 하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의 인생은 물론 살았던 동네나 집(구글 지도로 다 찾아감)까지 꿰고 있는 김종필이다. 달라스& 종필, 어쩐지 성향과 기질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나란히 앉아 벚꽃 흩날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 얘기 저 얘기 경유하다 '달라스 윌라드' 역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머리를 감다가! 내 영혼을 느꼈어. 달라스 윌라드가 말하는 그 영혼, 내 영혼의 상태 같은 걸 느꼈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물론 알아들어진다. 관상기도나 침묵의 시간이 아니라 머리를 감다가인 것은 조금 의외이지만, 충분히 끄덕끄덕. 또 <무지의 구름>이나 <영혼의 성>이 아니라 그 철학적이고 딱딱한 <마음의 혁신>을 읽다가 자기 영혼을 '느꼈다'니! 그건 좀 갸우뚱... 이지만 김종필이니까! 아, 나도 오래 전에 그랬었었었었지!!! 

 

같은 걸 같이 읽고, 같은 생각을 하고, 모든 생각을 나누되 깊이 나누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불행을 달리던 때가 있었다. (있었다, 아니고... 지금 이 순간만 빼고 늘 그렇다.) 말하자면 영적 여정에서 내가 큰 덕을 보고 있는 신비신학이나 기도를 남편도 똑같이 알아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것이다. 내게 좋은 것은 좋고 옳은 것이니, 남편도 나와 같아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페미니즘이고, 어떤 때는 심지어 수영이나 PT 같은 운동일 때도 있다.) 그의 길이 있는 걸. 그와 나의 다름을 평생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면서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이다. 너의 길과 나의 길이 다름을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모처럼, 아니 난생처음인가? 네 길을 버리고 나의 길로 오르라고 얼마나 강요하고 압박을 주었던가. 동네 정자 벤치에 앉아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설교 논평을 하고, 말투를 트집 잡으며 나의 길을 강요하고 말 것을 알지만, 피고 금세 지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깐 착한 마음을 가져보는 것으로! 잠깐 왔다 가는 마음이지만, 내게 있는 마음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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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쉬며 걷는 날 월요일. '박두진 둘레길'을 걸었다. 박두진 시가 구석구석 '이발소 그림' 버전으로 걸려 있다. 박두진 시를 읽으며 걷다 윤동주 시가 입에서 나왔다. 시 낭송 놀이를 하며 걸어봤다. 한 시간을 걸어도 요즘은 거의 말없이 각자 자기 길을 걷게 되는데, 새로운 놀이 재미있다.

새로운 길_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저녁에 대학원 수업이 있어서 여유 있게 먼 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월요일 아침이면 JP가 검색 기술 발휘해서 적절한 곳을 찾는다. 어디든 좋다. 요즘은 계속 숲과 물이 함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물이 있고, 조금씩 오르고 내리는 길이 있다. 어디든 그렇게 비슷한 것들이 있지만 똑같은 길은 없다. 계속 걷는 그날의 길조차도 순간순간 새롭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마음에서 튀어 오른 이유일 것이다. 나무 사이 한 그루 나무처럼 섰는 사진도 참 좋네.

밤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발표를 위한 스터디 모임까지 마치니 11시가 다 되었다. 기나김 월요일 하루다. 20대 끝자락에 음악치료 공부할 때도 참 좋았는데, "대학원은 이렇게 절실할 때, 꼭 하고 싶은 걸로 해야 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20년 훌쩍 뛰어넘어 공부하면서 "대학원은 살만큼 살고, 혼자 공부할 만큼 하고, 이럴 때 해야 해."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월요일 수업이 참 좋았고, 그 기분을 안고 잠에 들었다. 화요일 아침, 오랜만에 꿈을 기억하며 잠에서 깼다. 어서 적어야지! 꿈일기장을 펼치니 와핫! 맞아, 노트 다 썼지. 새 노트다!!!! 꿈일기장으로 쓰려고 간직한 '나리 노트' 드디어 개시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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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까지는 아니라도 아주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각자 책을 사랑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함께 다니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함께 다니되 각자 읽고, 또 나란히 걷되 각자 걸을 수 있기에 독립적이지만 외롭지는 않은 시간이 된달까.

여행지에 가면 독립서점 찾는 일도 즐겁다. 내 알라딘의 알고리즘으로는 만날 수 없는 책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작은 서점들은 흔히 주인의 취향이 꽉꽉 채워져 있는데, 목포에서 만난 책방 주인은 미술에 조예가 있는 분인가 싶다. 고흐, 에곤 쉴레에 마음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살 책이 있지는 않겠다 싶었는데. 웬걸.  내 알리딘 알고리즘 밖의 좋은 책들이 한둘이 아니고. 에릭 프롬의 미발간 작품집을 만나서 여행 내내 맛있게 읽었다. 취향이 뚜렷한, 취향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참 좋아 보인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교차할 때 예기치 못한 책을 만나고 기쁨을 만난다. 자기로 사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다.  

아침에 서점에 들러 산 책을 가방에 넣고 하루 종일 걷는데, 등 뒤 가방에서 아우성이 들렸다. 읽어줘, 읽어줘, 나 좀 읽어줘. 춥고 어스름한 저녁 시간에 들어간 카페도 꾸민 이의 정체성을 바로 알겠는 멋진 곳이었다. 구석구석 테이블과 의자 배치며 장식들이 정성스러워서 앉고 싶은 자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읽고 읽고 또 읽을 삶을 돕고 격려하는, 자기로 사는 이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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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하고

참하고

조신하고...

 

천상 남자가 깎아 담은 과일

 

만다라 모양이라 더욱 치유적이다.

 

그리고

저 곱디 고운 과일 만다라를 만드는 섬섬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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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때문이야! 종끼아빠!

윤채김!

으, 종끼아빠!

윤채김!

 

아빠와 딸이 사랑과 신뢰와 애정을 확인하는 소리. 하루에 열 번은 맥락 없이 하는 소리. 저녁 안 먹고 늦게 들어온 아빠와 딸이 야식을 두고 마주 앉았다. "윤채김! 너는 왜 니 꺼만 가져와. 아빠도 챙겨줘." "으으... 종끼 아빠...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그리고 뭔가 조화로운 듯 아닌 듯 이어지는 저들의 대화.

 

아빠가 달라스 윌라드 다시 읽거든. 이번이 세 번째야. 아, 아빠는 영어를 못하는 게 너무 한이 돼.

왜애?

유튜브에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영상이 많거든... 잘 들렸으면 좋겠어.

아빠는 우리말도 잘 못 알아듣잖아. 

맞아... ㅠㅠ 그렇지. 그래도 영어 잘하고 싶다.

(엄마 난입) 내가 그 마음 알지. 나 코스타에서 마르바 던이 바로 앞에 계신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심장 뛰고 그러는데...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당신은 표정으로 다 말하잖아. 표정으로 하지 그랬어? 암튼 난 그래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

뭐라고? 아빠! 영어를 못해서 빨리 죽고 싶다고?????? 

 

 

언어로 막힌 담이 허물어져 모든 영혼과 프리 토킹 하는 천국에 가고 싶다는 뜻인데...

일단 거기 가면 아빠와 딸의 소통부터 막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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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초입의 어느 월요일.
이틀 전 토요일에 심방 다녀온 횡성에 가자고 했다.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 있다고.
무엇을 선택하기가 제일 귀찮은 요즘, 누가 나를 어디든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 요즘,
기대도 저항도 없이 따라나섰다.

막국수나 두부냐. 점심을 놓고 고민하다 막국수로 정했다.
JP이 토요일 심방 갔다 먹은 점심은 두부였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고.
아무리 맛있어도 토요일에 먹은 걸 월요일에 또 먹게 하기는 그래서 막국수로 정했다가.
또 먹을 수 있어, 또 먹을 수 있어, 라는 말에 힘입어

과감히 두부로 전향하여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먹고 싶어' 아니고 '먹을 수 있어'가 영 찜찜하긴 했지만)

걷고 싶은 길, 횡성호수길에 도착했는데...
걷고 싶은데,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걸을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다.
비가 쏟아질 것 같았고, 바람은 무지 불었고, 추웠고...
일단 들어가 보자는 말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50m 정도만 걷고
"추워서 못 걷겠어"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당당하게 걸을 것 같은 표정으로 사진은 찍어주었다.

A코스 1시간 30분, B코스 1시간 30분 걸린단다.
바람은 장난 아닌 찬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맞으며 걷자니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얼얼했다.
적당히 뒷걸음질 치려고 했는데,
얼른 도망가서 호수 바라뵈는 카페에 앉아 책 보고 놀 생각에 설렜는데..
뚜벅뚜벅 전진하며 JP가 말했다.
한 시간 삼십 분 알 걸려! A코스 금방 끝날 거야.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JP의 말이 아니라 눈앞의 풍경들 말이다.
잠바에 달린 모자를 꽉 졸라매 쓰고 나도 전진했다.

돌아갔으면 어쩔 뻔!
이런 식상한 표현은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놓치면 안 되었을 멋진 풍경들이 구비구비 펼쳐졌다.
좌江우山.
이렇듯 신비로운 풍경이라니!

도망갈 마음이 싹 달아난 내 마음을 알아채고 비로소 앉아서 쉴 수도 있게 된 JP.
A코스를 다 걸었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찬 바람에 적응도 되었다.
가즈아~ B코스.

B코스에서는 더 멋진 장면을 눈에 담았고.
마지막에 빛을 만나고야 말았다.
JP은 빛을 이렇게 담고 저렇게 담으면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

A, B 코스 다 도는데 두 시간쯤 걸렸을까?
우리가 생각보다 잘 걷는 중년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생각보다 즐겁게, 더 멀리 걸었다.
후유증은 있었다.
찬바람을 직통으로 맞은 탓인지 JP은 이석증이 재발했고, 감기도 걸렸다.
그래도, 그러나 즐겁게 멀리 걸었으니까.

그 주간에는 연구소 지도자과정 마침 피정이 있었다.
남편이 와서 마침 예배 성찬식을 이끌어 주었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기 안에 고인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목사인 김종필이 아니라 김종필인 목사라서 고맙고 자랑스럽다.
목회의 찬바람을 맞으며 후유증도 있지만,
후유증에 지지 않고 선善으로 후유증을 이겨나가는 JP라 고맙다.
성찬식 사진처럼 딱 저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함께 걷는 인생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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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 피아노, 현승이 기타에 맞춰 노래하는 일이 있었다. 집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다. 둘이서 피아노와 기타로 노는 일이 흔하고, 가끔 거기 끼어 노래를 한다. 전문가 채윤이, 나름대로 실력 있는 현승이가 많은 걸 포기하고 옛날 스타일에 맞춰주는 방식으로. 교회 추수감사 주일 행사에 가족이 함께 노래를 했다. 종필, 나의 기타 맨 종필이 기타를 매는 게 가장 익숙한 그림인데. 아이들이 반주를 하고 우리 둘은 에그 셰이커를 흔들었다. 같이 노래한다 해도 어차피 목소리 크기나 기운으로나 내가 솔로 하는 느낌이 된다.

20년도 더 된 어느 감사주일 전날 밤, 그리고 그 감사주일이 생각난다. 그때도 교회에서 찬양제가 있었고 청년부도 한 팀으로 무대에 서야 했다. 청년부는 토요일에 평택에 있는 집사님 별장에 가서 고기 먹고 놀고 찬양 연습을 하며 거의 밤을 지새웠다. 모닥불 앞에 모여 하염없이 노래하고 수다 떨며 시간 보냈을 텐데. 기타 맨은 김종필이었다. 우리는 사귀는 중이었고, 거의 헤어지는 중이었다. 한 공간에 마주 앉아 있는데 마음의 거리는 천 리 만 리. 그 쓸쓸하고 아픈 공기는 여전히 어렴풋 살아온다. 그 감사주일 행사에서 불렀던 찬양은 지금 불러도 그 느낌을 소환해낸다.  

헤어진 후 가장 아프게 남은 이미지는 평택의 그 밤 기타 맨 그의 모습이었다. 무슨 노래를 시작해도 척척 반주해내는 실력. 오직 기타 소리로 드리우는 무거운 존재감. 과묵한 겸손함이 참 아름다웠는데, 그 사람이 더는 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었고 슬픔이었다. 곡절 끝에 다시 만나 결혼했으니 "놓치지 않을 거예요!" 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남편과 결혼식 축가에 많이 불려 다녔다. 그게 아니라도 마음 울적한 날에 둘이 앉아 기타 치고 노래하는 날이 많았다. '금영 노래방, 아리랑 반주 기계'라 불리는 기타 맨 김종필이 내 인생의 반주자라 참 좋았다.

채윤이야 이제 전문 음악인이고, 현승이 기타 소리도 꽤 들을 만하다. 세련된 주법과 기술로는 아빠를 능가한지 오래다. 그런데 둘 다 방구석 음악인이라 교회고 어디고 무대에 서는 것엔 질색 팔색이다. 언젠가 둘이 건반과 기타로 놀고 있기에 "엄마빠 추억 담긴 노래다"하고 던져줬다. 며칠 지났는데 현승이가 기타 소리를 똑같이 카피해서 연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다 추수감사절 가족 찬양까지 하게 되었다. 아빠도 기타를 치네 마네 했는데, 프로듀싱 감각 탁월한 채윤이 지도에 따랐다. 엄마 아빤 에그 셰이커 챡챡!

기타 맨 김종필만으로도 내 인생의 반주자는 충분하고 과분했는데. 반주자가 셋이다. 게다가 셋 모두 실력파. 내가 이렇게나 복이 많다. 2021년 감사주일의 감사. 주님, 제 인생에 반주자를 셋이나 주셨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일상을 뮤지컬로 살게 해주셨네요! 사실 노래 반주만 해주는 게 아니다. 나이 탓인지, 부실한 몸 때문인지 집안의 사건사고가 거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약약약 강! 약약약 강! 이런 식으로 한 번씩 강력사고도 저지른다. 그 구구절절한 사고의 디테일은 차마 글로 내놓을 수가 없다. 반주자 셋이 바로 캐릭터 바꿔 사고처리 요원이 되기도 한다. 내 인생 반주자가 셋, 사고처리 요원이 셋. 고마움도 세 개, 미안함도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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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던 길이야?

이런 길 원했어?

원하던 길이야?

 

세 번을 물었다.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작나무들이 섰는 길을 지나며 한 번, 좁은 오솔길에서 다시 한 번, 산을 내려와서 한 번, 그렇게 세 번을 물었다. "이 정도면 까다로운 정신실이 만족했겠지" 세 번 다 남편 딴에는 흡족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답이 있을 수 없다. '원하던 길'이 애초 있었던가.

 

오늘은 뭐 하고 싶어? 

음, 숲을 조금 걷다가 카페 가서 원고를 쓸까?

 

이게 전부였다. 숲과 카페를 함께 엮었으니까, 식물원 같은 곳을 상상했던 것 같다. 걷고도 싶고, 원고도 써야 하니까. 조금 걷고 원고는 많이 쓰는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 걸었는데 몸은 많이 가벼워지고, 잠깐 앉아서 썼는데 원고는 완성을 해버리는 그런 상상을 했던 것 같기도. 폭풍 검색을 하더니 집 근처 걷기 좋은 숲을 찾아냈고, 언제나처럼 지도를 보며 요기조기 이끌었다. 남편은 늘 선택해 놓고 욕먹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안에서 언제든 눌리길 기다리는 불평불만 버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이 아니었다, 내가 걷는다고 했지 등산한다 했냐, 그늘이라고 하지 않았냐, 한 시간만 걸을 거였는데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된 거냐... 충만히 장착되어 있다.

 

원하던 길이야?

 

물을 때는 아마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을 때일 것이다. 자신도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했던 그 길이라는 뜻이다. 걸으면서 나도 가만히 내게 물었다. 원했던 길인가? 원했던 길은 늘 막연하다. 대충 좋을 것이라는 불성실한 상상, 좋아야 한다는 환상을 섞어 그리게 된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 원했던 길이다, 아니다,를 정해버린다.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고 기분이 좋지 않다면 '남(편) 탓' 하기까지 가야 풀코스다. 산에서 내려와서 주차한 곳까지 땡볕을 걷는 게 고역이었는데, 그 길 중간에 해바라기가 저렇게 그림처럼 피어 있었다. 두어 시간 걸었던 산길의 기억이 싹 지워졌다. 환하게 피어난 해바라기 한 송이로 남은 길이 되었다.

 

원하던 길이야?

열흘 넘게 이 말이 가슴에서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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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결혼 :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 이런 책을 공저로 낸 부부이다. 서로 사랑하는데, 각각 괜찮은 사람인데, 이 지점만 가면 같은 패턴으로 맞서다 어설픈 화해, 돌아서서 깊은 좌절로 끝나곤 했었다.

남편은 판단하지 않는 사람,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사람,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자신이 변화되고자 돌아보고 돌아보는 사람...이지만 마음으로 늘 계획표가 있고, 시간이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지만 끝날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대화가 힘든 사람이다. 그런 남편을 나는 '인색'이라고 부르며 자주 좌절했다.

나는 나름대로 눈치가 있고 웬만큼 낄끼빠빠도 잘 하지만, 뭐 하나에 꽂히면, 특히 부정적 감정에 꽂히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잘 들어주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으면 끝도 없이 말을 하는 지나친 '열정'의 소유자다.

'열정'이라 불리는 끝이 없는 말과 '절제와 인색'이라 불리는 끝을 정한 시간 사이에 교차점을 찾을 수 없었고, 가장 큰 갈등은 늘 여기서 시작했다. 시작은 같지만, 불똥은 어디로든 튈 수 있었다. 육아, 가사 분담, 진로, 시어머니를 비롯한 복잡한 인간관계... 어떤 주제로든 튀어 옮겨 붙어 가끔은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이 되기도 했다. 사소한 줄 알면서 쉽게 넘어서 지지 않고 극복되지 않아서 더 깊이 좌절했는지 모른다. 어떤 관계에서든 '선의의 해석'을 하고 보는 남편에겐 사소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남편이 늘 먼저 사과했다. 사소한 생각 하나로 가지를 쳐 최악까지 가곤 하는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남편을 몰아세웠다. '끝'이 어디인지, 영혼을 담아 듣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그래서 당신이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 다 큰 애들의 관전평은 '엄마의 가스 라이팅'이었지만, 내 열정은 포기를 몰랐다.

얼마 전 남편과 저런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변했다. 진심 어린 문자이다. 남편은 끝까지 충분히 들어주었고, 심지어 따뜻하게 공감해 주었다. 어느 커플에게는 가장 쉬운 일일 텐데 말이다. 우리는 22년이 걸렸다.

22년 포기하지 않고 남편을 압박한 나의 끈질김을 스스로 칭찬한다. 순한데다 성찰적이기까지 한 남편에게 감사한다. 대충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성장을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의 아팠던 시간들을 소중히 새긴다. "오늘은 기도하지 않을 거야!" 내게 아픔을 준 남편을 용서하게 될까 두려워 기도하지 않겠다 결심한 '유치한 기도'들이 떠오른다. 유치하여 정직한 기도였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좌절하지 않기 위해, 선의의 해석을 위해 혼자 성찰 일기를 쓰고 고통스러워했을 남편만의 정직한 기도 또한 알겠다. 22년 기도의 열매다. 저 문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분께서 원하시는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될 수 없듯이 우리 삶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줄조차 모른다고 말한다(롬 8:26).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말아야 할까? 절대 아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26절) 하시기 때문이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대인관계 속으로 들어오신다. 우리가 그분을 모셔들이고 바라보며 계속 최선을 다한다면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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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일 늦잠 자.
나 내일 학교 가는 날인데, 알아서 아침 먹고 나갈게.
미역국 데워서 밥 말아먹으면 되잖아.
일찍 일어날게.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늦잠 자. 알았지?”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왔는데 마스크도 벗기 전 내
눈만 보고 (가슴형) 현승이가 말했다. 나도 모르는 내 맘 알아줘 눈물이 난다.

“엄마, 손 씻었어? 빨리 손 씻어. 엄마 손 잡게…
아우, 그냥 씻어! 나갔다 왔으면 손을 먼저 씻어야지.”

마스크 벗고 뭘 좀 먹겠다고 식탁에 앉았는데
(장형, 본능형) 몸으로 사는 채윤이가 말했다.
뽀독뽀독 손을 씻자니 딸내미 사랑이 벌써 몸으로 느껴진다.

“당신 내일 늦잠 자. 울려는 거야, 참는 거야?
에고… 힘든 거다. 힘든 거야... 내일 늦잠 자.”

수요 예배 마치고 늦게 들어온 (머리형) 남편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내 넋두리 들어주곤,
이해한다는 말 대신 늦잠 자라고 한다.

 

----------


내가 너무 갖추고 산다.
이보다 더 갖추고 살 수가 없다.
뭐 부족하다 불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참으로 갖추고 산다.

주님, 감사합니다!
불평과 자기 연민은 거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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