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말리던 바구니가 텅 빈 지 오래다. 한 바구니 가득했던 대추를 새 친구들이 죄 먹어 치웠다. 씨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 바구니는 어쩐지 치우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곡물을 좀 담아두면 다시 찾아올 것 같기도 하고. 비었더라도 혹시나 하고 찾아와 주지는 않을까, 하면서... 설날 아침 일어나 보니 텅 비었던 바구니에 예쁘게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다. 그때 그 새가 눈을 물어온 것도 아닐 텐데, 나는 그 친구들을 생각한다. 새 친구들이 보내준 설 선물이라고. 가슴이 저릿하고 따뜻하고 풍성하다.
이른 아침 하늘이다. 가족 중 제일 먼저 어나 베란다에 서서 저 하늘을 마주하고 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역시 씬 스틸러. 집 앞 교회의 커다란 십자가. 그리 많이 훔쳐내지는 못했다. 새벽 하늘의 고요한 장엄함에서 훔쳐낼 것이 거의 없었다. 그 하늘에 안긴 정도.
아무 때나 걸으러 나가는데. 가장 놓치기 싫은 시간은 해질녘이다. 해 지기 직전 집에서 내내 노을 지는 하늘을 왼쪽에 끼고 탄천 길을 걸을 수 있다. 어느 날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면 노을 하늘이 오른 쪽에서 따라온다. 금세 건물에 가려 보라색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포기하고 동네 길로 들어섰다. 골목골목 걷다 성당에 다다랐다. 가파른 길을 올라 성당 마당에 서니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상이 서 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오묘하다. 아니 모든 시작과 끝은 오묘하게 잇닿는다. 히브리적 시간은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새벽이 시작인지, 저녁이 시작인지 모르겠다. 창조의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내가 걷는 신앙의 길 역시 그러하다.
나가고 싶기도, 보던 책 붙들고 계속 앉아 있고 싶기도... 두 마음이 오락가락 할 때는 나가야 한다. 나가면 다시 못 볼 풍경을 만난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눈이 오지 않은 날에는 볼 수 없는, 더 많이 와도, 덜 와도 볼 수 없는 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순간이다. 순간의 아름다움, 순간을 놓치면 다시 받을 수 없는 선물이 있다. 그래서 무조건 나가 걸어야 한다.
친구야, 네가 천국에 가면 아바께서 너에게 기도를 몇 번이나 했고 영혼을 몇 명이나 구원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파히타를 맛있게 먹었느냐?’ 그분은 네가 열정을 품고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누리면서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 <아바를 사랑한 자녀> 마술사의 이야기
오전 줌 강의를 마치고 혼자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대추 맛집, 대추 맛집, 여기가 대추 맛집." 영혼으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튀어 나갔다. 베란다 밖, 어느 새들이 앉아 대추 흡입 중인 것이었다. 와, 아침에 포스팅했는데, 댓글 달러 온 거야 뭐야. 얘네들 진짜 신통방통 하네!
아침에 포스팅한 '어느 새'는 비공개로 올려 놓은지 한참 된 글이다. 블로그 놀이 본능이 꿈틀대는 "써야만 하는" 글이 산적한 그런 시즌이다. 본능에 충실하여 밀린 글들 하나 씩 올리는 중이었고, 그러다 오늘 아침 당첨 글이 '어느 새'였던 것. 포스팅하고 나가보니 대추가 더 줄었다. "언제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먹고 가는 거야?" 투덜거렸는데... 바로 이렇게 찾아주실 줄이야.
모든 새는 어떤 새다. 산책길마다 깜빡이 없이 난입하여 내 정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갔다 사라지는 새가 있는데. 오늘 그 새는 며칠 전 그 새가 아니고, 며칠 전 나를 만나줬던 그 새는 도대체 지금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연히 이름을 알 수도 없다. '어느 새'가 어느새 앞에 나타나 내 시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가는 그 순간. 우리의 만남은 순간이다. 순간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생긴 대추를 먹다 시들해진 애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말리기로 했다. 베란다 창문 밖 화분대에 체망에 담아 내놓았다. 가을 볕을 받으며 쪼글쪼글 잘 말라갔다. 어느 날! 증거가 그대로 남은 범죄 현장을 발견했다. 분명 '어느 새'의 소행이렷다. 부리로 쪼아 먹었을 테니 국과수에 의뢰하여 유전자 검사를 하면 잡아낼 수 있을 텐데. 잡을 수가 없는 게 함정이다. 하하, 맹랑한 '어느 새' 녀석 가트니라구.
하루 이틀 지나 확인하니, 먹던 그 대추가 없어졌다! 아, 그럼 그 녀석이 또 왔다간 것인가? 겁도 없이 범죄현장에 다시 나타나 다 먹지 못했던 걸 마저 먹고 갔다고? 와아, 씨!… 도 안 남겼네. 이 놈들 봐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내 이 손으로 꼭 잡고.... 싶지만. 잡는 것은 고사하고 현장 목격만 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며칠 후. 진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어느 새'들을 내 눈으로 보았다. 거실 내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나서는 간식 타임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카메라 들고 우당탕 일어나 나갔는데 어느새 다시 날아가버린 나의 '어느 새'들.
삼계탕에 넣을 대추는 냉동실에도 있다. 너네 먹어라. 베란다 밖에 말리던 대추는 '어느 새'들의 간식으로 봉헌하기로 했다. 소리소문 없이 조금씩 갯수가 줄어간다. 녀석들이 뒷처리가 깔끔하다. 씨를 남기는 법이 없고, 먹다 두고간 것은 결국 언젠가 와서 먹어 치우고 분리수거까지 말끔히 하고 사라진다. 어느새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있다. 산책 길마다 만나서 반갑고 고마웠던 '어느 새'들에게 간식 타임 선사할 수 있었던 내 생애 잊지 못할 가을이 가고 어떤 겨울이 오고 있다.
해 지기 직전의 빛을 받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시간 딱딱 맞추는 일이 쉽지 않다. 일이 있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집에 있는데도 그렇다. 박차고 일어나 나가면 되는 것을 이것만 하고, 이것만 하고.... 미적거리다 보면 해가 넘어간다. 역시나 골든 타임을 조금 놓친 후 집을 나섰다.
탄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분당, 왼쪽으로 가면 동백이다. 오른쪽으로 걷고 걷다보면 넓고 깨끗하게 세련되게 정비된 길과 만난다. 같은 단풍도 예사롭지 않다. 이 길을 더 좋아하고 선망한다. 시간도 얼마 없고, 어쩐지 오늘은 왼쪽으로 발길을 하게 되었다. 좁은 탄천 건너편엔 농로도 있고 논도 밭도 있다. 그다음엔 경부고속도로. 잡초가 제멋대로 우거져 말라가는 길을 걷는다. 내 일상과 닮았지. 정비되지 않는 내 일상. 그래서 편안하기도 하다.
최근에 듣고 있는 꿈강의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말레이시아 세노이족의 꿈 얘기다. "나는 꿈에서 새를 보았어."라는 말을 가지고 꿈작업하는 얘기를 생각했다. 걷는 중 새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머리 위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흰 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서 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순간 "나도 새를 보았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세노이의 꿈에 답하게 됨.
길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빼고 올려다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다 낚인다. 뭐지? 뭔데? 하고 서서 같이 고개를 빼올려 쳐다보는 것. 나처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새네, 뭐 새야?" 폰카까지 꺼내 들고 고개를 쳐들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 2, 3... 연이어 한 번씩 멈췄다 사라진다. 뭐라도 보여줘,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초점 맞추고 있었더니 홰를 한 번 쳐주는 서비스 한 번 해주었다. 자리 털고 일어나 날아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자 비디오 모드로 기다렸다. 꼭 그렇지.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자리에서 떴다. 자리 뜨는 바로 그 장면을 담고 싶었는데. 바로 그 순간은 놓쳤고 멀리 날아가는 뒷모습을 길게 잡았다.
새가 좋다. 들풀이 좋고 나무도 좋지만 새가 참 좋은 건 이것이다. 찰나로 다가오는 만남. 제 멋대로 찾아와 잠깐 마음을 맞추고 이내 사라지는 기쁨. 영원한 것, 영원한 분은 유일하니 지금 여기의 찰나만 충분히 누리라 일깨우는 천상의 편지이다. 어제와 내일이라는 환상을 떨치고 지금 여기만 살라는 메시지이다. 나는 새를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1, 2, 3...도 새를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본 그 새를 본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본 새를 보았다면 그렇게 지나치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순간이다. 나와 새만의 시간이고 기쁨이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앞으로 화분 놓는 선반이 달려 있다. 마음 같아선 선반 가득 예쁜 꽃 화분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질 않는다. 작은 화분 몇 개를 내놨다 들여놨다 하고 있다. 교회 집사님께서 지방으로 이사하며 주신 화분 중 하나가 있는데(아! 이름 모름) 신통방통이다. 어느 날 보면 살짝 기운이 빠져 있다, 비가 오고 또 어느 날 보면 생기가 가득 차 있다. 그러다 어느 아침에 보면 저렇듯 작고 예쁜 꽃을 피운다. 물론 또 돌아서서 보면 시들어 없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하며 여름 가을을 나고 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제 할 일을 한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설정 사진도 평소 하던 걸 설정하고 찍어야 설정스럽지 않은 것 같다. 설정 사진의 영업 전략은 설정인 게 최대한 티 나지 않아야 하는 건데. 몸에 익숙하지 않은 걸 설정하다 보면 어색할 수 밖에 없다. 설정한 ‘독서’ 영상이다. 그런데 일단 독서가 먼저였다. 주일 오후,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책을 보다 시원한 바람에 베란다로 나갔다. 홍순관의 노래처럼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불면 녹색 바람이다. 베란다에 부는 바람이 춤이 되어 흩날리는 것이 예뻐서 보던 책 들고 그대로 나갔다. 아, 이거 그림 된다! 싶었다. 소파에 뒹굴며 '독서' 중이던 채윤에게 사진을 찍어 달랬다. "아, 나도 독서 중이라고요~! 조금 옆으로 가서 앉아 봐. 아니, 아니 창 쪽으로..." 그렇게 설정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설정 티 많이 안 나게 잘 찍은 것 같다.
그리 잘 다듬어지지 않은 탄천이 있고, 꽤나 잘 조성된 아파트 산책길도 있고, 경부고속도로를 건너가면 시골길 느낌을 걸을 수도 있고, 조금 더 가면 얕은 산을 탈 수도 있다. 중요한 것! 몇 번 다니며 익숙해지자 새들의 아고라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아파트 숲 사이, 시골길 덤불 아래에 상시로 열리는 새들의 토론장이 있다. 그곳엔 늘 그 친구들이 모여 떠들고 있다. 휴대폰 들고 영상 촬영 해봐야 새 한 마리 제대로 담을 수 없지만. 아, 실은 이게 얘네들의 매력이다. 찰나의 만남만 허락하는 친구.
봄의 간지럽힘을 견딜 수 없어서 저녁엔 쑥국을 끓였다. 엄마가 없는 두번 째 봄, 몸의 감각이 다 살아났다.
마음이 열리면 눈이 열리고, 눈이 열리면 귀가 열린다. 일상의 모든 일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치러야 할 비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한결 가벼워진다. 이미 잘 알고 있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열두 번째 이사로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삿짐 정리로 몸이 피곤한 것은 기본, 숨겨놓은 짐들이 죄 끌려 나오고 펼쳐지고 헤집어지는 것의 두려움도 마땅히 감당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가벼워졌다. 마땅히 감당할 것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것을 멈추니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내 한계가 보이고, 쭈글한 내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 비하의 나락으로 떨어질 생각은 없다. 자기 연민에 빠진 불평이 줄고 '탓' 할 대상을 찾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탓할 대상은 결국 늘 하나님인데, 그분이 내 마음 가까이 느껴져 탓을 하기보단 "짐 정리하는 동안 옆에서 바라봐 주시는 것"도 고마운 정도가 된다. 마음이 열려 여백이 조금 생기니 눈도 귀도 더 소중한 것에 열리는 것 같다.
결혼 선물로 받은 액자가 있다. 당시 남편이 근무하던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 하시던 장로님께서 손수 써주신 글이 담긴 액자이다. 이걸 선사해주신 장로님은 이미 천국으로 가셨고, 액자는 빛이 바래 그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색하고 앉아 이 말씀을 묵상해 본 적이 없는데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벽에 걸린 액자로 늘 거기 걸려 있는 말씀이 일상의 눈 맞춤으로 스며든 것일까. 아니, 가끔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 말씀을 읽어주곤 했다. 한자를 읽어주며 말씀의 뜻을 설명하기도 했다. 식탁에 앉아 아이들이 싸울 때, 맛있는 것이 없어서 투덜거리는 마음이 들 때 한 번씩 쳐다보면 마음에 새기는 말씀이었다. 이삿짐 정리하며 "식탁 위에 걸까?" 하는데 남편이 "굳이 걸어야 하나? 그냥 세워둬도 되잖아." 하며 커피장 빈 공간에 일단 세웠다.
이사 다음 날,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정리하며 늦은 오후가 되었다. 주방 정리를 하는데 세워둔 액자 위로 또, 또 그림자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은 넘어가는 해가, 서쪽으로 스러지는 해가 주방 창틀을 가지고 하는 작품 활동.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고 말 작품이기에 멈추어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분이 보내시는 메시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멈추어 듣는다.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액자에 담긴 글이 말하는 것 너머, '창조의 책' 자연으로 말씀하시는 드넓고 신비한 그분의 존재를 느낀다. 당신, 여기 계시군요! 이 집에도 계시는군요! 아, 액자에 담긴 글도 다시 읽는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한 번도 제대로 묵상해 본 적 없지만, 결혼 22년에 열두 번 이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오늘이 이 말씀에서 얻은 힘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얄팍한 정서적 위안이 아니라 존재 깊은 곳에서 끄덕여지는 긍정이다.
잠시 머물렀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분주하게 손이 가는대로 정리하다 저녁 준비를 하러 주방에 섰다. 아, 주방 창문으로 들이닥친 일몰의 풍경이라니! 이건 뭐 환영의 인사다. 만나서 반갑다고, 같이 살게 되어 좋다고, 여기까지 잘 왔다고 말하는 진정성 담긴 인사 아니고 무엇이랴. 인사를 건네는 주체는... 모르겠다. 몰라도 괜찮다. 우주가 나서서 새 집에서의 일상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것을 충분히 느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