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0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 하는 청년들에게 가정예배에 대한 로망을 자주 듣는다. 결혼 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이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좋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며 특히 부모님의 믿음이 열정적인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다. 내게 가정예배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저녁 먹고 숙제도 다 하고 마음 편히 TV에 빠져들 시간이면 영락없이 들리는 소리, ‘성경 찬송 가져와라.’ 매일 밤 새롭게 귀찮고 짜증나고 지겨운 것이 가정예배였다. 교회 저녁 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은 해방의 시간이었다. “고귀한 시간, ‘낭비예배”(마르바 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를 고통스럽게 허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으니 어머니의 성경책은 나를 괴롭게 하는 율법책에 지나지 않았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솔직히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하나님 이야기는 기쁜 소식, 복음보다는 고된 소식에 가까웠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은 월요일에 학교 가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고, 주일성수라는 미명하에 일체의 매매 행위는 금지였다. 과자 하나도 사먹을 수 없었다. 꼭 필요한 학교 준비물도 주일에는 살 수 없었다. 교만하지 마라, 친구를 미워하지 마라, 동생을 사랑해라, 주일 성수해라, 순종해라. 지켜야할 목록은 한이 없는데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신다니 고된 복음일 수밖에. 부모님을 통해 소개받는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를 깨알 같이 적고 있는 까다로운 기록관 같은 분, 잠복근무 하며 죄 짓기를 기다리다 걸려 넘어지는 순간 잡았다, 요놈!’ 하는 경찰관 같은 분이었다. 철이 들고 사유가 깊어지며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가게 되었다.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가 변하기도 했지만 어릴 적 새겨진 하나님 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그로 인해 사랑의 하나님께 온전히 안기고 내어맡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는 가정예배며 부모님의 종교교육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이 그립고 아름답고 재밌는 분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정예배가 기다려지고 자발적으로 함께 하고 싶은 시간이었다면. 그 예배에서 읽는 성경 말씀이 달고 오묘하였다면. 텔레비전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내 젊은 날 하나님은 내가 뭔가를 해드려야 보상으로 복을 주시는 분이었고, 예배는 그 중 가장 큰 의무조항이었다. 고된 소식에 부응하여 늘 뭔가를 해야만 하는, 지킬 것투성이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앙생활 했다. 이런 유산을 남긴 어머니의 헤어진 성경책은 내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가계를 흐르는 슬픈 하나님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그렇지 않다. 사춘기, 청년시절을 지나며 어머니가 소개한 하나님을 의심하며 신앙은 자라게 된다. 뭘 모르던 때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두려워 무작정 순종했는데, 교회 봉사 열심히 해야 좋은 배우자도 주시고 직장도 열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님을 깨달아 가며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제목,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심통이 아니라는 것, 그분과 나의 생각이 동급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가게 되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소개받은 하나님 이미지가 걸림돌인 줄 알았는데 거기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지고 무릎 까지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디딤돌이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성경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주시는 법은 잘 몰랐다. 그저 읽으라 했고, 기도하라 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목에선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목이 메어 울먹이곤 하셨다. 내 어릴 적에도 그러시더니 노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신다. , 이 순진한 십자가 사랑이 엄마의 힘이구나. 기복적 신앙이라고, 왜곡된 신앙교육에 해로운 신학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이렇게 믿음에 서 있는 것은 저 순진한 사랑과 기도 때문이구나. 수십 년 동안 일 년 일독을 지켜 온 어머니의 성경책은 나달나달 헤어져있다. 철없이 반항하고 방황하던 시절에 비하면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한결 찬송 가사에 가까워져있다. 귀하고 귀한 성경책이다. 내게도 다른 선택이 없다.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일 외에는.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9

 


세상에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듯 사람마다 생각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안다. 내 생각 있듯이 네 생각 또한 분명하고, 그 차이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신비라는 것도 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내 주업이고, 고유한 자기다움 찾는 여정 안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더라. 머리로는 그렇게 다 아는데 차이는 늘 힘겹고 두렵더라. 내 생각과 다른 친구의 입장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다. 그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마음 한 구석 휘~잉 찬바람이 일기도 한다. 셋이 친한데 나를 뺀 두 사람이 나만 모르는 것을 공유하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렇다. 숨기는 기술이 좋아서 당황한 마음 잘 들키진 않지만 역시나 휘~잉 마음을 쓸고 지나가는 찬바람 한 줄기는 어쩔 수 없다. 스치는 그 바람, 순간포착 하여 일시정지 버튼 누르고 확대해 들여다보면 이렇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관계가 끊어지고 외톨이가 될까 지레 겁먹음이다. 어렸을 적 왕따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관계 지향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이러하기에 찬송가 406장의 2절 가사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거절당함 또는 버려짐,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필자의 관계 집착이 과하다 느껴지시는가?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한 홈즈-라헤 척도라는 것이 있다.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의 위기는 100점으로 환산되는 사별이라고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랭킹 5위까지의 공통점이다. 이혼, 별거, 수감,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 관계의 끊어짐이다. 그렇다. 아무리 독립적인 듯 보이고 강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따스한 연길이 필요하다. 그것을 상실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함께 춤추시는 하나님을 본떠 창조된 존재이다. 어우러지고 연결되어 있을 때 인간답고, 본성에 부합하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 행복의 극단에 있는 불행감은 단절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감정 중 하나가 끊어져 고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을 잃고,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 단절된 그때로부터 시작된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이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는 찬양한다. 조금 지질해보여도 살짝 과한 자위의 노래 같지만 당당하게 부르련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그러고 보니 369죄짐 맡은 우리 구주도 있다. 3절이 이러하다.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에서 참된 위로 받겠네비슷한 내용이지만 이 곡의 예수님은 대놓고 좋은 친구라니 한결 더 편안하다.

 

관계에 연연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또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같은 말씀이 주는 부담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 같고, 누구와도 화평을 이루어야 예수님의 제자 인증 받을 것만 같다. 이러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초인적 자아상을 만들어낸다. 사랑스러운 그 사람에게도 한결같은 순도 100%의 사랑을 줄 수 없음을 안다. 하물며 밉상 그 친구까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니!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앞에서 나는 늘 죄책감에 허덕인다. 사랑이라곤 없는 죄인이다. 허튼 애를 써본다. 그러나 죄책감으론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며

위태할 때도 안보하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연약한 믿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자리, 늘 부족한 사랑이어도 괜찮겠다. 대체로 연약하고 흔들리며 아주 가끔 큰 믿음 보이는 나를 위해 이미 예비 된 힘이 있단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펄럭펄럭 하다 꺼져가는 위태위태한 믿음이라도 그분이 붙드는 손은 차원이 다르다. 유한한 우리를 붙드는 영원한 팔이다. 이 대목에선 405장의 또 다른 주의 팔이 떠오른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친절한 팔이다! 영원하며 동시에 친절하고 따스한 팔이다. ‘으이그, 도대체 언제 철이 들래? 언제 나를 닮아 완전한 사랑 장착하고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평할 거냐고, 네가 그렇듯 사랑이 없으니 친구들이 너를 멀리하지. 제발 좀 완벽한 사랑의 사람이 되거라!’ 다그치고 타박하며 팔 빠지도록 끌어당기는 우리 엄마의 손과 다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친절한 팔이다. 그 팔이 영원하다. , 주님 당신 그 팔, 팔 배게 삼아 쉬고 싶어요.

 

능치 못한 것 주께 없으니 나의 일생을 주께 맡기면

나의 모든 짐 대신 지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QTzine] 7월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8

 



기도제목이란 이름으로 일상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흔하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 해도 안 해도 어려운 연애, 어려운 처지의 친구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하다못해 계속 실패하는 다이어트 얘기까지. 누군가 내밀한 어려움을 내놓았을 때 하지 말아야할 것이 충고, 조언, 평가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내 얘기 꺼냈다 다시는 여기서 나누나봐라!’ 결심한 적이 있다. 여러 번 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그러려니 해, 친구를 돕다 네가 우울해지면 그건 돕는 게 아니야, 경계를 지켜야지, 하나님이 다 좋은 사람 예비하셨을 거야, 일단 살을 빼, 저녁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마. 이래라 저래라, 일해라 절해라......” 교회만큼 사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간섭과 판단이 흔한 곳도 드물 것이다. 답을 몰라서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애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갈등이다. 여친(또는 남친)이 침을 튀기며 쏟아놓은 말끝에 그러면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말을 했어야지. 뒤에 와서 이러지 말고 처음부터 거절해야 하는 거야.” “, 내가 앞에서 딱 거절할 수 있으면 뒤에 와서 이러겠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저 공감해달라고!”

 

우리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어떤 말과 행동에도 판단 받지 않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관계적 존재인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그런 안전한 곳이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가 말이다. 문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심리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하는 말은 어설픈 충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그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알려주려는 거야.” 단지 도우려는 뜻, 사랑의 발로라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딱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 사랑의 발로에다 기도의 권위까지 더해진 충고와 조언은 가히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정작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나눈 고통에 충고 어택이 들어오면 어떨까? ‘내가 몰라서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우면 기도제목으로 내놓겠어? 제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야야. 차라리 입을 다물자.’ 결국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어렵게 꺼내놓은 기도제목에 그저 손잡아 주고 조용히 같이 기도해주면 안 돼?’ 그저 들어주고, 생색내지 않고 기도해주는 사람 찾기 어렵다. 충고와 판단이 난무하는 위험한 인간관계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찬송 214장의 1절이다. 참된 도움이신 예수님께 간다. 내 모습 이대로 다 받아주실 것 같은 예수님께...... 라 하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생각해보니 예수님도 뭐라 하실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이기적이고 쎈 면도 있고 신앙도 예전보다 못하다. 꼭 직장상사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 믿는 내가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했어야 하는데 좁은 내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안 되겠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면 안 되겠다. 일단 주일성수를 다시 확실하게 회복하고, 부장을 사랑하는 마음 장착한 후에, 술 담배 끊고 예수님께 가야겠다. 아직은 일러, 아직은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말이 다 맞다. 스트레스 받는 것도 내 성격 탓이고, 친구를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 내려놓으려는 건 내 이기심이지. 여기서 몇 킬로는 더 빼야 소개팅도 나가고 연애도 할 수 있지, 늘 다이어트 실패하면서 연애는 무슨!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실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못하는 것은 소그룹 멤버도, 친구도, 예수님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이 내 안에 크게 울리는 것은 마주쳐야 소리 나는 손뼉과도 같다. 내 마음 안에 항시 대기 중인 자기비판의 손바닥이여. 스스로를 때리는 비난의 손바닥이 밖에서 들어온 충고의 손바닥과 만나 짝! 하고 큰 소리를 낸다. 사랑의 주님께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선언된 내가 여전히 거절감의 늪을 헤매는 이유이다.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죄로 만신창이 되어 돌아오는 탕자가 이 찬송을 부른다면 어떨까. 제가 아버지라도 자기 같은 인간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굶어죽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진 탕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받아들여짐의 기준은 아버지께 있구나! 내 모습 이대로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탕자 체험이 필요하다.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아버지께 가겠노라, 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돌아가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분께 가야겠다고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럴 때 나 스스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며, 나 먼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돌아섬이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어릴 적 명절 아침 예배에선 늘 이 찬송을 불렀다. 앞집 친구네서는 제사가 한창인 시간이었을 테고. 목사인 아버지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참된 복의 근원을 천명하고자함이었을까. 조상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다! 하지만 어린 내게 이 찬송은 그저 떡국이나 세뱃돈, 명절에 모인 가족들의 분위기 같은 것을 연상시킬 뿐이다. 음악은 흔히 경험과 함께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바로 그 기억을 소환해내는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찬송가 28장을 부르면 어렴풋이 설날 아침을 떠올린다. 내게는 가족의 노래, 명절의 노래이다. 결혼 하고 명절 노래 한 곡을 더 얻었다. 시댁의 명절 아침 찬송은 559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내게는 생소한 가정예배였다.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분이 대부분인 예배였다. 거의 어머니 한 분이 대표로 드리는 것 같았고, 다른 친척들은 구경 내지 그저 비참여의 태도로 자리만 지키셨다. 어머니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힘을 내어 찬송을 불러보지만 어쩐지 민망하고 어색하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장손 며느리인 어머님이 일찍이 홀로 신앙을 갖게 되셨다. 제사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으신 것은 당연한 일. 어떤 계기로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겠노라 선언 하시고, 이 일로 친척들과 풀리지 않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자리에 합류한 시점은 오랜 갈등이 일상이 된 어느 명절이었다. 형식상 예배를 드리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앉아 있어주는 형식, 그것도 감지덕지인 분위기였다. 무언의 저항 속에서 고마워라 임마누엘힘주어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은 안타까움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렀던 찬송의 가사를 보라. 부조화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율배반이다.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즐거운 하루하루, 차라리 다른 찬송이면 어땠을까? 어쩌다 이 찬송이 명절 18번이 되었을까.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라는데 갈등에 휩싸인 동기들이 민망한 노래 속에 어정쩡하게 마주하고 있다. 조상의 복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근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 모셔서 믿음의 반석이 든든하다노래하고 있다. 어서 이 예배가 끝나 식사시간이 오길, 아니 이 불편한 명절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한 발 물러 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조차 그러했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찬송의 가사를 일말의 아픔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부르던 나의 원가정 역시 말 못할 갈등과 사연을 배경처럼 깔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늘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명절 아침 복의 근원은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가 되었다. ‘산에서 10마일쯤 떨어져 있을 때만 그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가정도 그 사정을 모를 때만 평..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C.S 루이스가 어느 편지에 썼다는 말이다. 친구가 정말 믿을 만 할 때, 충분히 친해졌다 싶을 때 보통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실은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아픈 형제자매가 있어, 부모님이 힘드셔서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 부모님과 소통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크고 작은 아픈 가족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 먹는 가족은, 그런 거실은 없다.

 

가정의 달이 되어 이 찬송을 부르게 될 때 뭔가 조금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스캇펙의 그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가정은 따스하고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의 문제가 특별하고, 우리 집만이 갈등과 어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위축되거나 불평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문제 많고 아픔 있는 우리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 현실감 없는 찬송은 소망의 노래가 된다. 비록 지금 믿지 않는 가족으로 가슴 아프고, 갈라진 마음으로 얼굴 마주하기 힘든 시절이라 할지라도. 예수만 섬기는, 예수만 닮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사랑이며 소망이다. 우리 인생, 우리 가정의 현실은 사철 찬바람 부는 날이지만 사철 봄바람의 나날을 그린다. 이것은 고해와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소명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6

 


내 마음에 있는 이 노래로 고백록을 써본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계 지으며 살아온 세월이 길다. 뚜렷한 경계를 세워놓고 나는 불가침의 선 안쪽, 안전한 이쪽에 서 있다고 자신했다. 그것은 흡사 홍수로 떠밀려 내려가는 세상을 방주 안 창문으로 내다보는 안도감이며 다른 말로 하면 선민의식이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던 이런 속내가 오늘의 찬송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를 부를 때 유독 또렷하게 느껴지곤 했다. (예전 찬송 가사는 물 건.. 생명줄이었다) 후렴의 반복되는 가사는 은근히 선동적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방주의 안팎을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무모한 확신이 부끄럽다.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그 누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누가 저 형제 구원하랴이런 가사에 몰입할 때는 나 아니면 안 된다며 앞장서다 정작 함께 힘을 모아 줄을 당겨야 할 배 안의 친구를 외면한 적도 있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 떠내려가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먹 꽉 쥐고 부르던 찬송. 그때 흘린 눈물, 떠밀려 가는 영혼을 품고 미어지는 가슴으로 드렸던 기도,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그 기도와 눈물들이 부끄럽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히 차고 넘쳤던 그 시절은 오히려 그립기도 하니 말이다. 한동안은 이 찬송을 부르지도 못했고, 입을 열어 내 안의 예수님 이야기 전하는 일에도 움츠러들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질 상 전도지 들고 노방전도를 하거나 대놓고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은 잘 못한다. 대신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는 물론 냉담한 시절을 보내는 교회 후배를 위한 기도만큼은 꾸준히 했다. 특히 냉담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며 관심을 끈을 놓지 않았고 힘든 일상을 지나는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했다. 나름 보이지 않는 정성을 많이 들였다. 그러는 사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러고 있는 나는 참 좋은 선배지, 예수님의 제자의 면모란 이런 것일 거야.’ 죄가 틈입한 것이다. 생명줄 던지는 나의 마음, 위쪽으로 갈수록 높아진 것이다. 자아도취 병은 으레 치명적이 죄로 나를 이끈다.

 

너 어서 생명줄 던지어라 저 형제 지쳐서 허덕인다

시험과 근심의 거센 풍파 저 형제를 휩쓸어 몰아간다

 

시험과 근심의 풍파로 떠밀려 가는 형제자매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답이라는 고귀한 진실을 알리고픈 열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선한 일을 통해 오직 나를 높이는 수단 삼고자 하는 죄의 본성에 민감하지 못한 탓이었다. ‘민감은커녕 오랜 시간 알아채지도 못하고 신앙생활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찬송이다. ,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자기성찰만 하며 입 다물고 있겠다는 것은 아니다. 요 며칠 운전 하며, 걸으며, 설거지 하며 흥얼흥얼 많이 불렀다. 다시 이 찬송을 부른다.

 

너 빨리 생명줄 던지어라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랴

보아라 저 형제 빠져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 가라

 

내 노력으로 얻은 보상으로 생명줄 잡았다고 자신한다면 그 줄은 생명줄 아닌 썩은 동아줄임에 틀림없다. 물에 빠져 허덕이는 것은 예수님 모르는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왜곡된 특권의식에 허덕이는 나의 현주소일 것이다. 나도 저 형제, 빠져가는 형제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모태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원 방주 자동 탑승이 아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 소중한 생명줄을 붙들어야 함을(2:12). 방주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하나님 놀이는 그만두고 속히 손 내밀어 형제의 손을 잡을 일이다. 나를 스치는 공허한 눈빛, 근심어린 표정의 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생명으로 연결되고 연대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위험한 풍파는 빨리 지나고 곧 건너편 언덕에 이를 것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게 주어진, 그들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은 지금 여기이다!

 

위험한 풍파가 곧 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나 곧 생명줄 던져서 구원하라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5

 


제목이 내가 매일 기쁘게(찬송가 191)’이다. 이런 제목의 찬양을 부르면서 울 수 있을까? 빠른 템포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온몸 들썩들썩 손뼉 치며 찬양하면서 말이다. 물론 너무 기뻐서 울기도 하니까 당연히 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내가 매일 기쁘게찬양을 하면서 아픈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내가 해봐서 안다. 이 찬송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 콕 찍어 정해준 나의 찬송이다. 밝은 성격에 익살 떨며 깔깔거리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이기에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같은 가사와 딱 들어맞는 캐릭터라는 것. 동의한다. 내게 가장 쉬운 감정이 기쁨이다. 그러니 찬송가 191내가 매일 기쁘게는 나의 찬송이 맞다.

 

그러나 내 아무리 긍정의 사람이지만 늘 기쁘게 수는 없는 일이다. 지탱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로 어깨가 축 쳐지고 마음의 생기가 바짝 말라버린 어느 날이었다. 기쁘게 찬양하자는 인도자의 템포와 따라 손뼉 짝짝 치면서 찬송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전주가 끝나고 저 가사를 입에 담는 순간 눈물 둑이 터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가슴이 딩딩 울리는 통증이다. 한때 내가 숲의 새처럼 이 노래 하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묘지 사이를 휘파람 불며 걸어갈 기세로 소망과 긍정의 날을 살았는데. 그 기쁨의 날과 메마른 순간의 간극이 너무 크다. 슬픔이라고도, 막막함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이고 아픔이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여기서 노래하는 기쁨은 외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의 감정만은 아니다.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나를 알아주는 말이 무성하고, 몸은 건강하여 활기가 넘칠 때 흘러나오는 콧노래가 아니다. 순례의 길, 좁은 길이다. 성공하고 인정받는 것에 취해서 기뻐 그 자리에 안주한다면 순례의 길이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제치고 달려야 하는 길, 성공을 위해 사랑과 진실을 유보하고 달리는 길을 좁은 길이 아니다. 그 순례의 길, 좁은 길에서 밤낮 기뻐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의 감정이거나 노래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타고난 밝고 명랑한 성품에 힘입어 좋아라 손뼉 치며 부르는 찬송, 피상적인 기쁨 그 이상의 고백일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바, 기쁨이 사라진 메마른 땅을 밟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행복과 기쁨이 꼭 좋은 것, 그 반대는 피해야할 것도 아니다.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1),

십자가 앞에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도(2),

기쁜 마음으로 주의 뜻을 행함(3)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음(벗을 날에 대한 소망, 4)

 

이유는 한 하나! 주의 영, 성령이 함께 하심이다. 평안과 기쁨은 성령 충만의 중요한 지표라고 한다.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진 것도 서글퍼 눈물이 흐르는데, 성령 충만의 부재라고? ,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든 스미스 목사님은 저서 <예수의 음성>에서 우리 마음의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한다. 기쁨과 평화는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주는 시금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성령의 임재에 대한 중요한 지표로서 기쁨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기쁨이나 평화가 유일하게 정당한 정서적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노, 두려움, 슬픔, 절망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불안정한 세상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부르기로 한다. 찔찔 짜면서 나는 숲에 새와 같이 기쁘다노래할 것이다. 깨어진 세상을 살며 때로 슬픔과 분노가 기쁨을 향한 정직한 발돋움이 될 수 있기에. 내가 주님 안의 참된 평화를 맛보았던 그 어느 날에도, 그 다른 어느 날 죄에 빠져 평안함이 없을 때에도, 그 어느 기쁨의 날을 그리워하며 상실감에 젖어 눈물 흘릴 때에도 주의 영은 함께 하시니 말이다. 기쁨의 근원이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4

 


말보다 표정과 눈동자가 더 크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수심 가득한 눈동자에 펴지지 않는 표정이 이미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아냐, 별일 없어, 잘 지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히려 별일 없다는 말이 더 큰 어려움 속에 있다는 뜻일 터이다. 답도 없는 내 얘기 해봐야 상대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거나,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다. 괜히 나 혼자 힘들어 하는 것이다자기최면의 말일지도.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우리 어머니의 찬송이기도 하다. 엄마가 낮고 작은 소리를 읊조리듯 저 찬송을 부르고 있다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딴 근심이 무지 많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져야할 때 기도하듯 노래하셨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눈으로 전하는 메시지와 말이 다른 경우와 같다. 내 마음에도 이 찬송이 크게 울릴 때가 있다. 삶의 무게에 무릎이 꺾이며 휘청거리는 순간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미소 짓고 괜찮아요, 잘 지내요, 견딜 만 해요하고 돌아서서 눈물지으며 부르는 노래이다.

 

단 한 사람,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그 한 사람만 있다면 결국 삶을 등지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마주 앉아 실은 조금 힘들어라고 말하는 순간 대개 근심의 보따리가 봉인해제 된다. 풀어 놓다보면 조금 힘든 게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이 찬송이 그러하다. 딴 근심 없다며 시작한 찬송의 나머지 가사들은 오히려 딴 근심들의 나열이다. 흥얼흥얼 따라 불러 그 짐 보따리에서 풀려 나온 것들은 우리 모두의 핵심적 고통이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한숨(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늦어지는 결혼, 쉽게 찾아지지 않는 진로로 오지 않은 내일은 희망보다 두려움이다. 누구를 사랑한다 해도 나 같은 사람 누가 좋아해주겠나싶어 스스로 거절당해버리고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끼리는 좋은 관계로 잘 지내는 것 같아 스스로 외톨이 됨이다. 이 모든 압박과 두려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 친구들은 흔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내게는 도달하지 못할 삶이다. 그 이유가 단지 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더욱 작아지고 누추해질 뿐이다. 돈이 있다면 이 불안과 가족의 불화까지도 싹 해결될 것 같다. 돈만 많이 준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두려움과 한숨과 궁핍함을 담아 꽁꽁 싸맨 우리의 짐보따리여.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찬송을 입에 붙이고 사시던 우리 어머니는 기도응답 체험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산 증인이다. 소중한 재봉틀을 도둑맞았는데 기도로 찾았다든가, 오직 기도로 분열되어 무너져가는 교회가 봉합되었다든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맨주먹으로 아이들을 키웠지만 훌륭하게 잘 키워냈다는 식의 이야기가 끝도 없다. 그렇게 따지면 딴 근심 없다며 슬쩍 꺼낸 얘기는 알고 보면 여러 근심 얘기이고, 결국의 근심은 기도제목이 되었고 그 기도제목은 모두 응답되었다는 그 흔한 은혜의 깔때기이다.

 

과연 그 내용이 팩트일까 아닐까를 가지고 괜한 트집을 잡아 엄마에게 싸움을 걸어본 적도 있다. 하나님께 마음이 삐뚤어지면 괜히 엄마의 찬송을 신파조라 홀대하며 귀를 막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찬송보다 기도의 본질을 더 잘 담을 수 있을까 싶다. 표정에, 눈빛에 가득한 근심을 알아봐주는 이에게 속 시원히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의 고통. 그것을 쏟아놓는 장소와 대상이 십자가 그늘 밑이 되는 것이다. 산 같이 버티고 있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쓉니다, 포인트쌓는 것만이 기도가 아닐 것이다. 두려움과 가난함, 무기력의 한숨. 보따리 안에 꾸겨 넣은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진실한 기도의 시작이다. 진솔한 고백을 어떻게 시작하지, 무슨 말로 시작하지 하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에둘러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주님, 제가 당신 안에 있는데 뭐 딴 근심이 있겠습니까그 말 너머에 담긴 두려움과 무수한 딴 근심을 이미 보아주시는 분이 금방 나를 무장해제 시키실 것이다. “실은 두렵고 한숨만 나는 저의 궁핍함이 부끄럽고 화가 나요.” 그러면 그분과의 진짜 만남이 시작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간증이 하나둘 쌓여갈 것이다. 내 어머니의 믿기지 않는 기도의 여정처럼.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3

 


습관을 따라 기계적으로 부르거나 은혜 충만하여 자아를 잃고 찬양하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안전하다. 한 마디 한 마디 정직하게 곱씹으며 노래하다가 결국 속이 불편해지는 찬송이 많다. 메마른 마음에 이성만 날카로운 상태로 이 찬송을 부르다 살짝 얹히고 말았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찬송가 449)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 늘 함께 해주신다고? 안위해 주신다고? 항상 복 내려주신다고? 순종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헌신의 요구 아닌가. 예예 순종하는 반주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온 교회 기도회, 찬양연습 반주 도맡아 하는 복이다. 어깨가 뭉치도록 쉴 틈 없이 피아노 치는 일이다. 거절 못하는 착한 청년은 주일학교에서는 교사로, 청년부에서는 임원으로, 교회 행사 때마다 스태프로 쉬지 않고 일한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이 몰린다.

 

찬송가 노랫말이 진실 아닌 것을 말하진 않을 텐데, 어찌 우리의 순종 끝에는 갈수록 즐거움 대신 탈진과 원망만 남을까. <의식의 혁명>이란 책에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에 기쁨이 차오르게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사랑대신 순종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순종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에 기쁨이 차오른다. 바꿔 말하면 순종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조건이 달라붙은 탓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순종에 무슨 조건이 있을까? 언뜻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뭔가를 찾아보기 위해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담되는 일을 떠맡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 부탁하는 이를 민망하게 할 수 없다는 한 발 앞선 배려심도 있다. 무엇보다 거절했을 경우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이미지가 손상될까 무섭다. 거절의 대상이 사람이어도 두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순종에 달린 조건이 많다. 예수님 따라, 복음을 따르는 길은 결코 강압의 길이 아닐진대, 어찌 우리는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무거운 짐을 진단 말이다. 마음에서 동의가 되지 않고, 몸의 에너지가 한참 부족함에도 착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으로 순종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탈진이다. ‘헌신 페이라는 신조어가 적실한 표현이다. 그러면 아무 헤아림 없는, 두려움도 없는 순도 100%의 순종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 따라가며, 예수 따라가며, 예수 따라가며

 

이 찬송의 제목이기도 한 첫 부분을 여러 번 불러본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말고, 심리학에서 보는 인간 예수님이 있다. 한 인간이 성숙해져서 가장 아름다운 인격으로 꽃피운다면 어떤 사람이겠는가. 가장 고상한 인격을 가진 인간상으로 꼽는 분이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여 가장 아름답게 꽃피웠을 때의 열매는 무엇일까? ‘자발적 희생이라고 한다. 인간이 드러내는 가장 고상한 미덕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최고의 인간상으로 꼽는 이유는 그분이 보여주신 자발적 희생때문이다. 십자가야말로 자발적 희생의 극한이 아닌가. ‘자발적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매와 벌이 두려워 순종하고, 뭐라도 해야 복을 주실 것 같아서 억지로 짐을 지는 것과 다르다.

 

그런데 솔까말, 예수님도 그렇게 쿨하게 십자가의 길로 가지는 않으셨다.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의 그 처절한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땀에서 피가 배어나올 만큼 혼신을 다해 물으신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14:36, 메시지 성경).”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예,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께 묻고 또 물으신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그 고통스런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신 후 마침내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신다. 자발적 희생은 주체적인 성찰과 사유를 통한 선택으로 다다르는 덕의 경지이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는 길이 끝내 즐겁고 복된 길인 이유는 자발적 순종이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예스, 예스를 남발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순종의 길이 아니다. ‘내가 과연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진지하게 묻고 얻은 내적 확신 속에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길이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고 복음에 순종하는 자, 정녕 이런 복을 누리게 되리라. 해를 당하거나 고생할 때 주가 위로해주시고,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할 때 상급을 주시리라!




길을 가다 우연히 듣는 노래에 옛사랑의 추억이 소환되는 경우가 있다. 연애하던 시절 함께 들었던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애써 찾아 들은 것도 아닌데) 그 즈음 유행했던 노래들이 그러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 저장된 기억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농간인데, 그중 갑은 크리스마스캐럴이다. 한 두 마디 말로 짚어내기 어려운 크리스마스 느낌을 살려내는 것은 시즌이 되면 가는 곳마다 귀에 걸려드는 캐럴메들리이다. 어릴 적 산타클로스를 소환하고, ‘올해도 솔크(솔로 크리스마스)외로운 감정에 부채질하고, ‘벌써 한 해가……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을 일깨운다.

 

뭔가 들뜨고 한 편으로 차분해지는 크리스마스 느낌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본말이 바뀐 것은 분명하다. 성탄절의 주인공을 찾아볼 길은 없다. 돌잔치에 가서 보는 주인공 아기의 딱한 신세 같다. 불편한 한복, 낯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흥청망청 시끄러운 분위기에 울고불고 하다 지쳐 잠든 아기 말이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의 근황 나누는 목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 이벤트 회사에서 나온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마이크 울림만 요란하다. 아기는, 주인공은 어느 구석 유모차 안에서 불편한 잠으로 이 피곤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친 줄 너 어찌 모르나(찬송가 1201)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던 날, 세상은 잠들어 있었다. 단지 생물학적 잠이 아니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심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가난한 부부의 아들로, 그것도 혼전임신이라는 소문 속에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 영적으로 깊이 잠 든 사람들의 눈에는 그러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던 별들만이 이 엄청난 출생을 알아채고 경이로움으로 더 밝고 높게 빛났을 것.

 

2017, 다시 돌아온 성탄절. 백화점 건물 외벽에, 교회의 높은 십자가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화려하다. 아파트 입구에 서있는 소나무까지 번쩍번쩍 반짝반짝 조명 옷을 칭칭 감고 있다. 이렇게나 화려하고 캐럴이 장르별로 울려대며 시끌벅적하지만 2017년 성탄절에도 영적 수면상태는 여전한 것 같다. 아니 영적 어두움의 깊이는 화려함과 요란함에 정비례하는 듯하다. 베들레헴이니 마구간이니 하는 가난하고 낮고 천한 것들은 이제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다. 누구도 되길 원치 않는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 갑의 갑, 갑 위의 갑으로 가길 욕망한다. 여전히 세상은 죄의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평화와 생명은 주목받지 못한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잠자는 동안에 평화의 왕이 세상에 탄생하셨도다

저 새벽별이 홀로 그 일을 아는 듯 밤새껏 귀한 그 일을 말없이 지켰네(2)

 

율동과 연극 연습을 하고 선물교환용 선물 준비에 분주하지만 이 날이 기리는 바로 그것에 눈 뜨지 못한 사람은 선물받지 못한 사람이다. 돌잔치의 들뜬 분위기를 즐기며 먹고 마시지만 나는 누구이고 여긴 또 어디인가자기 인식과 현존 감각이 없다. 3절 가사의 주 오심을 모르는사람은 자기 동네 마구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태어나셨는데 잠이나 쿨쿨 자는 사람이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거니는 동안 그 곁을 바삐 지나쳤을 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다. 캐럴에 흔들거리고, 그러다 조금 쓸쓸함에 젖어 성탄절 보내나 정작 그 주인공의 마음에는 관심 없는 우리이다.

 

오 놀라우신 하나님 큰 선물 주시니 주 믿는 사람 마음에 큰 은혜 받도다

이 죄악 세상사람 주 오심 모르나 주 영접하는 사람들 그 맘에 오시네(3)

 

성탄으로 시작한 성육신은 십자가와 부활로 향해간다. 그것은 사함을 위한 예수님 희생의 여정이니 간절함으로 4절을 노래할 수밖에 없다. ‘오 베들레헴 예수님 내 맘에 오셔서 내 죄를 모두 사하고 늘 함께 하소서내 마음, 그 마구간보다 더 비좁고 악취로 가득한 곳일지언정 그분을 모셔야겠다. 반짝이는 성탄 트리와 흥겨운 캐럴 메들리에 취해 잠든 영혼을 깨워 조금 다른 성탄 노래를 불러보자. 보일 듯 말 듯 높게 빛나는 별빛처럼 고요하게 성탄 찬송을 불러보자. 성탄 찬송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진지하게 부르다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될지 모른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1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소개 받을 때가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무얼까. 친절한 사람, 합리적인 사람, 잘 돕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유연한 사람 등. 나는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부를까 생각해보니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에 둘러싸인 삶은 행복하다. 위선적인 사람, 위협적인 사람, 비열한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산다면 불안이고 불행일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꿈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좋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눈동자를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을까? 민망함도 두려움도 없이 오래오래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연민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다 알고, 이미 받아주는 듯한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눈빛 교환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또한 세상의 모든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다 담은 소리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 대답을 기다린다. 재촉도 추궁도 없이 내가 준비되어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 말을 다 들은 후 말없이 자기 몸의 일부를 보여준다. 처참한 상처의 흔적이다. 놀란 내게 그 목소리가 말한다. ‘당신을 위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듯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옥죄던 사슬이 풀어졌다. 내 영혼을 꽁꽁 묶어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가던 그 사슬, 죄의 사슬이 말이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1)

 

그 사랑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이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는 말

네 지은 죄 사했다 하시니 나의 죄짐이 풀렸네 (2)

 

찬송가 134장은 나를 꿈꾸게 한다. 그리하여 2000년 전 갈릴리로 이끈다. 거기서 어떤 사람, 어떤 남자, 참 좋은 사람을 만난다. 그렇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난한 동네의 한 남자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좋은 남자, 한 좋은 사람으로! 일상의 언어로 쓴 하나님 말씀이라 일컫는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그 사람예수를 읽어본다. ‘둘러앉은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보며 말씀하셨다(3:34).’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3:5)’ 사람 예수님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손으로 병자의 몸에 손을 대며 스킨십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앞에 앉아 거짓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르침 받은 사람들은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메시지 속으로 들어간 나도,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찬송 가사에 잠긴 나도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역사 속으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는 자주 사람의 몸을 입고오셨다고 말하면서 잠시 사람으로 둔갑하신 신화 속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사나운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 했네

그 파도가 주 말씀 따라서 아주 잔잔케 되었네

 

그렇게 사람 좋은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는 능력, 병을 고치는 치유력,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까지 보여주신다. 게다가 가난한 백성을 율법의 짐으로 옭아매는 종교 지도자들을 도통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눈 똑바로 뜨고 하실 말씀을 하셨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 천하다 멸시받는 이방 여인까지 일일이 눈 맞추던 따스한 사람 예수님은 풍랑 앞에서, 종교 권력 앞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물러섬 없는 사람이었다.

 

꿈이 아니다. 한 밤의 꿈일 수 없다. 그 만남은 꿈을 깨서 2017년 가을을 걷는 나의 일상에서 오히려 생생하다. ‘좋은 사람의 기준을 몸소 제시하셨기에 그에 따라 오늘을 살고자 한다. 갈릴리 사람처럼 살고자 하는 나의 오늘에 그분은 살아 계신다.


나 주께서 명하신 복음을 힘써 전하며 살 동안 그 갈릴리 오신 이 내 맘에 항상 계시기 원하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통일 찬송가 번역) 곧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4)

 


< QTzine> 11월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0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남자)의 신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면 내 쪽에서 막 켜지기 시작한 그린라이트인 경우가 많다. 알고 싶어 하는 것, 더욱 자세한 내용이 듣고 싶다고 몸을 바짝 기울이는 것은 호감의 표현이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이것은 사랑의 그린라이트이다. 알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 다가가게 되는 것, 혼자 있을 때도 어느 새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린라이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알았어. 알겠다고!”하는 말은 그에 반하는 뉘앙스이다. 대화나 관계의 단절을 알리는 사인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는 궁금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엔 가능성이 느껴지나 네가 말하는 거 다 알겠어.’라며 쌩 돌아선 사람은 다시 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네 얘기를 들려줘.’ 신비로 남겨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실히 알겠어!’ 이 얼마나 교만에 찬 위험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시작하는 찬송가 310장은 강렬한 메타포를 가진 찬송 중 하나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뜨겁게 불러 본 기억 있을 법한 찬송이다. ‘은혜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을 인간의 경험이란 없으니 말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한 소절 신파조로 부르고 이어지는 후렴의 음악적 반전이 유발하는 감정의 폭발과 감동도 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의 멜로디는 점핑판을 딛고 솟아오르듯 높이, 멀리, 확신 있게 튀어 오른다. 주먹을 꽉 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를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한 옥타브 높은 종결음이다. ‘나는 화~악 씰히~ 아 네에에에에!’ 이것은 아멘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피날레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주일 예배에서 이 찬송을 부르던 중, 나는 (박차고 나오는) 후렴이 아니라 그 바로 앞의 가사, 그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난 알 수 없도다.’가 좋겠다. 단지 멜로디 진행의 기술로 감정이 불러일으켜진 것이 아니다.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시시때때 성령의 감동으로 나를 만지시지만, 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음. 조금은 알 것 같지도 하지만 온전히 알 수는 없음. 더 명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의 고백이 확실히 아는믿음의 진정한 시작이다. [난 알 수 없도다 - 나는 확실히 아네] 이 급진적인 도약의 점핑판은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기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소망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간절히 찾을수록 그분의 부재가 더욱 크게 다가올 뿐이어서 당혹스러운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예수님 당신 스스로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6:6, 새번역)이라 칭하셨으니 그분은 인간 앞에 부재로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주님, 나는 당신에 대해 오직 모를 뿐입니다!) 불가지(不可知)의 실존을 겸허히 인정하고 얻는 신적인 확신, 이것이 은혜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우리 국토 구석구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운 책이 있다. 그 책 서문에 나온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고 가 본 변산의 내소사에서는 보이는 것이 많아 감동이었다. 반면 우리는 아는 만큼 무시한다. 문화재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감동받을 수도 있지만, 아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경멸을 할 수도 있다. 역시 안다는 것, 아니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랑과 성장으로 가는 문을 닫는 일이다. 문화재도, 사랑하는 너도, 심지어 나 자신도, 신앙에 관해서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여전히 다가가고 귀를 기울이며 숙고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며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이들을 경계할 일이다. 내가 기도해보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확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인간은 모를 뿐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날이 많지만 술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숨은 곳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것만은 화악~씰히 안다!




* 월간 [빛과 소금]  7월호, '하지 못한 말, 미안해'라는 꼭지에 쓴 글입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마치고 맞은 겨울방학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친구가 집에서 축하모임을 한다고 초대를 해왔다. 교회 동기들이었고 예닐곱 명의 남자아이들과 함께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시험 결과야 어떻든 자유로움으로 붕붕 뜬 시간을 보내는 중에 한바탕 놀 기회라니. 신나게 달려갔을 것이다. 친구 어머니께서 떡 벌어지게 차려 내놓으셨다. 기분 좋게 떠들며 식사를 하려던 찰나, 상 밑에서였는지 아니면 밖에서였는지 맥주병과 잔이 함께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이미 주()를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깽판을 치고 나온 것이다. 센 여자 하나에 착한 남자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라 당시 내 별명은 꼬맹이였으나 영향력이 작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밥맛, 술맛, 놀맛이 싹 다 떨어졌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기도 부끄러운 바리새인 같은 짓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다른 친구도 아니고 교회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당시 회심이 필요한 모태 바리새인이었다.

 

입장 바꿔 누군가 내가 한 그 짓을 했으며, 나는 그 엉망이 된 자리에 남겨졌었다면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겨진 친구들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이후 다시 문제 삼지 않았다. 여전히 만나면 찧고 까불며 오랜 시간 좋은 친구로 지냈다. 실은 이런 진상 바리새인 짓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름 수련회 가면 숙소 뒤편 으슥한 곳에 숨어 담배 피우는 친구들을 잡아 전도사님께 고발했다. 바리새인에 어용 경찰(‘짭새라 부르는 게 제격)이었다. 한 번은 수련회 기간 중 식사시간이었는데 친구 녀석들이 보이질 않았다. 악랄한 경찰관으로서 느껴지는 촉이 있어서 수련회 장소였던 교회를 빠져나와 가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어느 식당에 모여 닭볶음탕을 시켜놓고는 희희낙락하고 있는 친구들을 현장범으로 체포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 마디에 착한 친구들은 보글보글 끓는 닭볶음탕을 입에 넣어보지도 못하고 줄줄이 수련회장으로 연행되었다. 이런 짓을 했다. 친구들아 미안했어, 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것이 아니다. 당시 믿음은 내가 일등이지.’ 하는 우월감으로 살았지만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쪽은 오히려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아, 그때의 나를 받아줘서 고마워, 못 이기는 척 당해줘서 고마워.

 

바리새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교회의 청년부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 후 장애인 시설 봉사를 마친 후였다. 선배 한 사람이 주도하고 몇 사람이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우르르 치킨 집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자연스레 치맥타임이 되었다. 걸걸한 여대에 다녔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술과 술자리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때였다. 그럼에도 고3 겨울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불편함으로 마음이 일렁거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편하게 마실 일이지 굳이 교회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하나?’부터 시작해서 믿음이 연약한 후배들이 시험 들면 어쩌려고까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결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도 아주 잘했다. 문제는 돌아와서, 그 이후 마음에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순 정죄의 모래성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향해 보이지 않는 집게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차라리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했던 폭력적 태도가 솔직하여 순수한 듯. 얼굴을 마주하고 한 마디 비난의 말을 한 적 없지만 마음이 한 짓은 어마어마하다. 겉으로는 큰 갈등 없이 그 시절을 지냈다.

 

나이를 먹었고 나도 이제 중년이다. 인생의 정오를 지나 오후로 접어든 어느 시점,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신앙하며 살아온 모든 나날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긴 터널의 끝에서 내가 다시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율법의 우산 속을 더 안전하게 느끼며 살아온 바리새인, 내가 보였다. 아픈 깨달음과 함께 두 번째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즈음 문득 청년 시절 치킨 집에 함께 둘러앉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주도했던 선배, ‘가끔 이렇게 알코올로 내장 소독을 한 번씩 해 줘야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던 후배, 그리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조목조목 따졌던 내 마음의 소리가 부끄럽고 아프게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어떤 배역으로 등장했는지 상상도 못하겠지만 이렇듯 기회가 주어졌으니 미안했어요.’ 속으로 말해본다.

 

자신을 일컬어 부랑아라 했던, 그리하여 부랑아 복음을 설파했던 브레넌 매닝은 바리새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자신에게 아무 결함도 없다는 믿음이 그의 결함이다. 그는 남을 경멸한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자기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의에 빠져 불의하게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과연 그 시절 나는 내가 옳다, 나만 옳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 씩 교회 가서 청년부, 주일학교, 성가대 등에 남다른 봉사하며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등 근거 충만한 자부심이었다. 말 그대로 나의 의에 빠져 죄책감 없이 누구든 정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어린 날의 나, 젊은 날의 나 자신인지 모르겠다. 종교적 우월감으로 자아에 도취해 있는 동안 가장 외롭고 불행한 것은 나였으니까 말이다. 대입 시험 마치고 가장 홀가분한 시절, 신나게 먹고 놀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박차고 나와 씩씩대며 걷는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마음의 법정을 열어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세우며 기소하고, 선고를 내리던 젊은 날의 나를 떠올려도 그렇다. 정작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율법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내적인 자유라고는 맛보지 못했으니 정작 못할 짓은 나 자신에게 한 것이다. 어쩌다 어린 시절부터 바리새인이 습성이 몸에 딱 붙어 그 누구보다 나를 괴롭게 했다. 친구들과 이웃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고 그것은 다시 왜곡된 우월감이 되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우월감은 내면 깊은 곳으로 감추고 겸손한 말투와 태도로 위장하는 방식은 세련되어 간다. 어린 나, 젊은 날의 나, 아니 어제의 나에게 미안하다 말해본다. 아픈 직면과 회심을 통해 다시 그러지 말자 다짐했건만 여전히 입은 줄도 모르게 이미 입고 있는 바리새인의 갑옷이다. 미안할 줄 알면 다시 하지 말아야지! 나 자신에게, 나의 이웃에게 미안할 짓 하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 나의 기도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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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9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짧고 굵은 사랑에의 항변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주인공 상우(유지태)의 대사지만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 되뇌어본 말이기에 명대사의 목록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휴대폰 광고 속 대사도 떠오른다.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지고지순한 태도, 사랑은 움직이고 변하는 거야, 솔직 당당하게 인정하는 태도. 어쩐 일인지 둘 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 간절하게 믿고 싶은 것은 결국 변하고 말 것임을 알기에 두려움으로 붙드는 썩은 동아줄인 지도 모른다. 바람기, 변심, 고무신 거꾸로 신기. 같은 연애 사담을 나누고자함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뿐이다, 설교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찬송의 이 가사가 자꾸 입에 맴도는 탓이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노년이 되기까지 열정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 비결을 묻는 말에 정원 한 구석의 고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고.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가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네. 그 이유는 저 나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살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뜨겁게 고백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어느 뜨거운 수련회 마지막 밤이었던가? 오랜 기도가 응답되어 기쁨의 눈물과 함께 흘린 말이던가. 언젠가 신앙생활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체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시간을 내는 것도, 주머니 털어 밥을 사고 선물을 챙겨주며 내 배가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모든 것이 맹숭맹숭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을 하긴 하는 건가? ‘주님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혼 없는 고백은 찬양시간의 립싱크로만 남은 것인가? 기도, 선교, 봉사, 예배에 뜨거운 주변 친구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사랑이 식었어. 사랑이 어떻게 변하지?

 

성장하는 사랑은 변한다. 성장이라고 하니까 마냥 커지는 느낌이지만 마음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위가 아니라 깊이이고 넓이이다. 통장의 잔고가 눈에 띄게 많아지는 것처럼 온갖 긍정이 보란 듯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연애할 때 설렘의 무한충전으로 부풀어 오르던 행복함, 영화관에서 팝콘 봉투에서 손끝만 닿아도 온몸을 압도하는 찌릿하던 전율이 무한대로 커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조금 아쉽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하긴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을 뿐임을 안다. ‘,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네,’ 실망하고, 차이로 인해 아픈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사랑은 깊어진다.

 

그러니까 시인 롱펠로우의 나무처럼 죽은 듯 보이는 관계 속에서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면 다시 꽃이 피고, 작년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이다. 그러니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던 뜨거움이 사라지고, 예배를 향한 열정은 잃은 지 오래, ‘교회 안 나가를 고민하다 가나안 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 자체가 소멸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랑을 위해 메마른 겨울바람을 맞고 서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무성한 잎을 내고 열매를 맺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시간일지 모른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어요. 이런 기도 하나 빨리 안 들어주시고. 제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닌데......’ 하는 순간에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아니, 살아 있는 한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 년 전에 서른 셋 젊은 싱그러운 나무 같은 몸에서 암이 발견되어 긴 시간 투병하고, 나아지고, 희망하고, 절망하다 하나님 곁으로 간 청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동안 내내 가족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이곡이었다. 건장한 청년으로 암 선고를 받는 충격의 순간, 고쳐주실 줄 알고 희망하던 순간, 희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에도 그의 영혼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노래했었나보다. 어제와 다른 사랑, 어제보다 더 깊어진 사랑의 성장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친구였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8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의 창가, 낮은 책꽂이 위에 공들여 키운 화초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남들 눈에는,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그렇고 그런 들쑥날쑥 흔한 식물이겠으나 공들여 키우는 제게는 다릅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을 주고 매만집니다.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들이지요. 돌보는 이가 한결같지 못하여 간혹 방치될 때도 있습니다. 일이 많아 바쁘거나 마음이 메말라 화초는 물론 그 무엇도 돌볼 여유가 없는 날이 있지요. 그런 순간엔 돌보지 못한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바쁜 일이 지나고 아팠던 마음이 나아지면 비로소 잎을 축 늘어뜨린 화초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어 싱크대로 가져가 하염없이 샤워를 시켜보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회생불가 판정을 내리고 싱크대 안에 둔 채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어느 새 살아나 빳빳해진 잎을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활이구나, 싶어 조용히 쿵쿵 심장이 뜁니다.

 

한결같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주인인 제게 스파트필름이라는 화초는 딱 마음에 드는 놈입니다. 물 줄 시기가 지나면 바로 어깨, 아니 잎들을 축 늘어뜨립니다. 온몸으로 목마름을 표현하지요. 주인의 일상과 마음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도 물 달라, 제발 물을 달라온몸으로 시위하는 녀석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른 물을 떠다 바치며 흐릿해진 마음의 줄을 다잡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지요. 그래, 목마르다고 말을 해야지! 표현을 해야 알지! 꾹꾹 참고 아무 내색 안 하다 갑자기 시들어져 회생하지 못하고 떠나간 초록이들이 야속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화초가 목소리를 가졌다면 스파트필름 같은 녀석들은 주인님, 목마릅니다.’ 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 소리에 손을 움직여 물 한 바가지를 먼저 부어줍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제 마음에 단비를,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소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먼저 갈증을 느낄 수 있어야 말이든 기도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목이 마른지, 배가 고픈지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요구하고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마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목마름을 느끼는 살아 있는 감각입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자기 영혼의 메마름을 감지할 수 있다면요.

 

빈들의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찬송을 시작하는 첫 구절, 이 한 구절에 저는 마음을 빼앗깁니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진 빈들의 땅, 말라 시들어가는 위태한 풀 한 포기 같은 영혼의 상태를 간파해내는 작사자의 감각 말입니다. 우울해, 사는 게 재미가 없어, 꿀꿀해, 사람이 다 싫어, 공동체가 무슨 필요야,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 툭 내뱉어진 나의 말에서 시들은 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면요. 우울하고 외롭고 화가 나는 지금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지는 않겠지만 ,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성령의 단비로구나!’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오래 방치된 탓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지만, 회생 불가의 메마름이 아님을 알고 소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퍼뜩 일어서진 않겠으나 하룻밤 이틀 밤 지나며 다시 살아나 생명과 맞닿을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언약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에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기실 실낙원 이후의 인간은 늘 목마른 존재입니다. 연결되어 있어야할 그 무엇, 생명의 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무의식적인 결핍감은 아무 것이나 들이키게 하고 빠져들게 합니다. 애정이든, 알코올이든, 하다못해 스마트폰의 화면이든 무엇에든 사로잡혀 있고 싶게 만듭니다. 그렇게 갖고 싶던 것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상해지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도 불안하고 금세 공허해지는 이유. 무언가 더 좋은 것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입니다. 결국 애초 단절되었던 그 관계, 사랑이신 분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의 목마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보며 내 영혼이 노래합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7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긴 하지만 그러다 생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생각만하다 상대에게 청첩장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상상만 해도 아쉬움의 산사태가 밀려오는 사태네요. 좋은 생각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 이럴까요, 저럴까요? 묻고 기도합니다. 꿈에라도 주님께서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응답 주시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숙고하고 기도하되 반드시 어느 시점, 생각의 언덕을 떠나 체험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나는 젖지 않겠다, 작심을 하고 바다에 첨벙 뛰어들어 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 정경, 서로를 빠트리고 도망가고 파도를 타며 노는 친구들. 바라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몸을 하고 친구 여러 명이 내게 몰려옵니다. ‘갈아입을 옷 없어, 나는 빠트리지 마물에 빠지지 않으려 도망 다니다 결국은 잡혀 빠지고 맙니다. 에라, 이미 버린 몸! 하고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가고, 친구 목을 껴안고 물을 먹이고, 그러다 나도 짠물을 들이키고. 이것이 살아있는 체험입니다. 물가에서 앉아 바라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체험이지요.

 

왜 너 인생을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상념에 젖어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바닷물에 젖는 것이 참다운 체험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헌데 오늘 찬송은 은혜의 바다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그 바다가 바로 그 바다라고 할 때. 고통의 바다인 인생은 동시에 은혜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은혜의 체험은 다름 아닌 고통과 두려움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청첩장 받는 그 순간까지 대시할까, 말까 물가에 앉아 모래성만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절당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고 있지요. 연애든 진로든 하다못해 오늘은 뭐하지? 일상의 작은 선택이든 풍덩 뛰어들어봐야겠습니다. 고통의 바다임을 알기에 두렵지만, 바로 그 고통 속에 뛰어들어봐야 비로소 은혜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출항합시다. 지금, 바로 지금 갑시다.

 

거절당할 수도 있지, 반반의 확률이니 고백하자. 그리고 결과는 감수하는 거야!

100% 흡족한 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일단 시작해보자!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니 맡아보자, 몰랐던 부분이 드러난다고 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자. 반대의견이 있지만 어쩌겠나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면 감수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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