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큐티진 > 8월호, '藥이 된 冊' _ 래리크랩의 <파파기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화벨이 울려 ‘여보세요’하고 받기가 무섭게 ‘엄마다’ 하면서 친정 엄마의 거룩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너 기도 해야겄다. 니 외숙모 말이다. 지난 번이(에) 넘어졌잖냐. 그려(래)서 허리를 아주 못 쓰게 됐단다. 니 외삼촌 어쩐다냐. 그려(래)서 다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구 전화혔(했)다. 내가 지금 이모들이랑 다 전화혔(했)는디(데) 아무튼지 간에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 니 외숙모 화장실 출입 정도는 허(하)게 혀(해)달라고 기도혀(해). 그려(래)야 니 외삼촌이 살지, 꼼짝도 못허구 누워 있으면 워쩌~어. 너 어렸을 적부터 니 기도는 잘 들어주시 잖여~ 알었지. 꼭 기도혀(해)라. 나는 오늘 저녁이(에) 철야 간다. 끊는다.’ 딸깍!

매 주 금요일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철야기도를 하시고, 매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에는 아예 한 달 내내 철야기도로 헌신하시는 80을 넘기신 노 권사님의 기도이다. 오늘도 엄마는 밤을 지새우면 외숙모와 외삼촌의 성함을 부르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화장실 출입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리가 회복되게 해주시라’고 애타게 기도하실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명령을 하달 받은 권사님의 교만한 딸은 ‘하나님! 외숙모가 화장실 출입 정도는 하도록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주님 뜻대로 인도하옵소서.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외숙모를 회복시켜 주시고 외삼촌을 위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고상을 떨 확률이 많다.


기도! 특히, 기도의 응답!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소망을 안겨주는 말이다.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이 마음에 차오르면 당장 돈이 없지만 내일이면 밀린 월급을 받을 사람처럼 답답한 마음에 소망의 빛이 반짝하고 비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소망을 품고 기도한다. 또 ‘기도응답의 조건’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될 줄로 믿쓉니다’를 빼 먹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했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 아닌 ‘거절’ 판정을 받았다고 느껴졌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입사원서를 내고 기도했던 회사에서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모시겠습니다’하는 답신을 받거나, 찍어두고 기도했던 형제나 자매로부터 ‘미안한데 사귀는 사람 있어요’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이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기도로 사시는 분이다. 매일 새벽기도와 일주일에 한 번 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기도, 1년에 두 달은 아예 매일매일 철야기도를 하시며 한평생을 살아오셨다. ‘나는 기도 안하면 죽는다’라고 고백하시는 분이다. 이런 어머니조차 많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표현하면 응답된 기도만큼이나 기각 내지는 미결인 기도제목도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될 줄로 믿고 기도했으나 딸이 대입에서 낙방을 하기도 했고, 당신의 혈압이 떨어지기를 기도했으나, 허리의 통증이 나아지길 기도하셨으나 여전히 고통을 지닌 채 기도로 밤을 지새우신다.


이렇듯 기도에 대한 깊은 갈망과 더불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일말의 의혹을 품고 나는 늘 기도한다.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만난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분명하게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지니 요정을 불러내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맞다. 간청하는 기도는 기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내 마음에 사는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싫어. 나는 아빠가 날 사랑한다는 것보다 지금은 사탕이 더 좋아. 당장 지금 사탕을 사 줘. 그래야 날 사랑하는 아빠가 의미가 있어. 사탕 사 줘’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당장 눈앞에 산적한 나와 이웃의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되는 기도가 더 좋다고 솔직하게 아주 은밀히 나는 고백한다. 아니, 최소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하는, ‘기도할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거야’ 라는 말이 피차에게 궁색하거나 공허한 위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 손에 들려진 쇼핑백 안에 있는 선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운동이든 어떤 기능이든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초보자에게는 아주 능숙한 전문가보다는 나보다 조금 먼저 시작한 선배의 코치가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 분야의 대가가 된 사람은 이제 시작하는 내가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너무 멀리 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르치는’ 것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를 펼치고 초반부부터 안심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가 목사님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닌 상담심리학자라는 것,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점 중에 하나가 ‘기도’라며 기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기도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안심시키고 무장해제 시켰다. 안심을 하다못해 ‘이런이런... 래리 크랩이 젊은 시절에 이랬다면 지금의 나보다도 못한 거 아냐?’ 하며 은근 자만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래리 크랩 특유의 마음을 읽어내는 전술에 휘말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파파기도’를 입게 달고 살았다. 운전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심지어 남편과 갈등에 휩싸일 때조차도 바로 ‘나의 파파’를 부르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파파기도는 너무 쉬운 기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나를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기도이다. 그러나 파파기도는 아주 어려운 기도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안다는 건 얼마나 긴 영적여정인가? 이렇게 되면 기도는 단지 기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구이신 것과 내가 누구인 것을 규명하는 문제는 믿음의 본질을 꿰뚫는 문제가 아닌가?

PAPA기도를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서 단지 기도가 아닌 ‘나’와 ‘그 분’이 계신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붉은 동그라미를 칠 수 있게 된다.


Present : 내 안에 어떤 일이든 간에 파악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Attend :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예의 주시하기.
Purge :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놓기.

Approach : 하나님을 나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기.


이 순서에 따라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비로소 PAPA의 손에 들려진 쇼핑백이 아니라 PAPA와 눈과 눈을 마주대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응답받지 못했던 기도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말이다. 무엇보다 좋은 이 책의 효능은 책을 읽다말고 기도하기 위해 책을 내려놓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연애를 잘 하기 위한 책을 들고 아무리 공부한들 연애를 잘 하게 되겠는가. 기도는 결국 그 분과 더불어 대화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할 수 있는 한 다 열어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는, 기도 그 자체로 배워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잠이 빨리 깬 새벽에,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날에, 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열심히 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껴지고 삶의 모든 것이 공허해질 때,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로 꽝꽝거리며 설거지를 하다가도 바로 그 순간에 파파를 부를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파파에게로 가 진실하게 내 상황을 보고하고, 왜 더 빨리 파파에게 올 수 없었는지를 고백하고, 그 순간 무엇이 내게 1순위였는지를 고백한 후에 귀 기울여 파파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다. 그렇게 기도하는 날이 오랠 때 나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돌려서 다른 사람 얘기하듯 말하는데 그게 딱 자신의 얘기인 것을 감으로 알겠는 때가 있다. ‘아니야, 아닐거야. 정말 다른 사람 얘기일거야’라고 애써 믿고 싶었는데 결국 그것이 그 애의 일이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통화할 때 K는 ‘언니 제 학교 친구 얘긴데요...그 애 교회도 나름대로 열심히 다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임신을 하고, 수술을 했어요. 죄의식 때문에 교회도 못 나가겠다 하고 너무 힘들어 하는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 지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줘야 하나요?’ 하고 말했다. 어쩌면 핸드폰의 통화품질 때문인가도 했었지만 그 목소리에 뭔지 모를 긴장과 떨림이 베여 있었다. 결국 오늘 만나서 얘기하면서 그 애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여울 정도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내게는 청년부 후배로 보다는 몇 년 전 중등부 교사를 할 때 중등부 찬양팀에서 봉사하던 수줍음 많던 여중생의 모습으로 더 각인 되어 있는 아이다.

대학 때 친구 Y를 따라서 산부인과를 갔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잠시 우리 교회를 나오기도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교회와는 발을 끊었고, 유일하게 나에게만 연락을 했었다. 가끔씩 만나도 자기 속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곤 했었다. 하긴 속내랄 것도 없지. 속내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삶을 마구 쏟아놓곤 했었으니까. 그 친구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하는 얘기가 내게는 사사건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러 남자와 동시다발적으로 교제를 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육체관계는 기본적이 것으로 보였었다. 때문에 그 친구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병원에 중절수술을 하러 가는 파트너로 내가 선택된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으로 당혹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 세대에 정말 비일비재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교회에서 너무 ‘성’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고들 한다. 너무 터부시 하면서 교육은커녕 대화의 주제가 되지도 못하니 성은 크리스챤 청년들의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 것 같다. 어른들이 너무들 안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 청년들에게는 이성교제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모두에게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성에 대해서 말이다. 교역자든 선배든 누구하나 잘 가르쳐주는 이 없는 것 같다. 각개전투 하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는 신실하게 훈련받고 봉사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인 것 같은데, 그런 청년이 어쩌다 보면 혼전임신을 하고 있는 상황이 각개전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단지 교회에서 우리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들 안에 있는 다양한 성적인 문제들에 대한 온전한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통제할 수도,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소위 말하는 성인이 아닌가? 그렇다. 책.임.전.가.를 할 수는 없다.

K의 얘기를 듣고 도움을 받아 볼까 해서 데이트에 관한 책을 몇 권 훑어보았다. ‘남성들은 여성보다 더 충동적이니 여성들이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남성들은 시각적 자극에 약하기 때문에 자매들은 데이트 할 때 노출이 심해서 자극할 수 있는 의상을 피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이 여러 번 눈에 띈다. 저자가 모두 남성이었다. 비슷한 표현들을 계속 보면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K의 얘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느낌이기도 하다. ‘나는 안 된다고 했는데....나는 정말 안 될 것 같았는데....오빠가....’ 결국 책.임.전.가.다.

자매들이 옷을 야하게 입어서가 아니라, 오빠가 너무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결과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 우리들 성문제의 열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나의 연애와 그 연애의 실패 경험으로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솔직해야 한다. 책임전가할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대화가 없으면 사랑하는 사람끼리 몸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도를 나가게 마련인 것 같다. ‘나는 당신을 만날 때 손을 잡고 싶고 뽀뽀를 하고 싶다’ 라고 상대방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정직하게 인정하고 말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쉽게 건강한 방식들이 찾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선배에게 들었던 잊혀 지지 않는 얘기 하나.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때마다 스킨쉽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시도한 방법이라고 했다. 둘이 데이트하기 위해서 만나자 마자 그 날의 데이트를 위해서 함께 기도한단다. 기도하되 구체적으로 스킨쉽을 잘 제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참 아름다운 장면일 것 같다. 그 어떤 낭만적인 데이트의 모습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상대방에게도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고자 하며 무엇보다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다시 내게 데이트의 기회가 온다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K를 위해서 기도한다. 어서 빨리 죄책감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단지 혼전 임신을 하고 낙태를 했다는 것만을 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경적으로 데이트하는 것을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한다. 미혼의 날 동안 성적인 외로움으로 인해 삶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이성에 대해서 맑은 눈을 잃지 않기를 위해서.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나의 배우자 역시 그렇게 맑은 눈으로 젊음의 날을 지켜가고 있기를..... 그 배우자를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기를 ㅜ.ㅜ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즐겁게 안식할 날> 린 바압, 윤인숙 옮김, IVP


안식일이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


그 옛날 청년시절부터 나의 교회생활은 ‘봉사의 생활’이었다. 봉사라는 의미가 교회에서 사용될 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 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찬양팀을 하고, 소그룹의 리더를 하고....이런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다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가끔 교회봉사와 신앙생활,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삐 움직이는 그 봉사의 현장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것도 있었다. 주일 이른 아침부터 끼니도 거르면서 밤이 맞도록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는 주일,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 뭔가 할 도리를 다 한 듯 뿌듯한 자족감.  또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돈 되는 일도 아니고 그저 희생뿐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열심히 봉사를 할 때 교회 어르신들과 동료들로부터 받는 ‘입 마르는 칭찬의 달콤함’ 맛보지 않으면 모르는 은근한 맛이렷다.

때로 힘에 부치는 봉사를 하며 주일을 너무 빡세게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두 가지 메리트가 나를 쉬지 못하게 한다. 내가 이래 뵈도 구원을 공짜로 받았는데 하나님께 뭔가 도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뼈 빠지게 봉사할 때 나를 어여삐 보아주시는 그 많은 따스한 눈길들.

그렇다. 내게 있어 안식일이 ‘안식일’ 되지 못하고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는 내 자체로는 하나님도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존재만으로는 안 된다. 뭔가 성과를 내줘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나는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행위 없이 내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나는 과감히 안식할 수 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닌 이유


시간이 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찾는다.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한다. 관계의 존재로 말이다. 내 속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내가 털어놓는 만큼 내게도 자신을 드러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좀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친밀해지고 단짝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나는 뜬금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떤 친구가 내가 거북해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하다. 역시 예상치 못했던 감정, 배신감 같은 것이 고개를 든다. 가끔은 내가 친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과시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오버하며 친한 척을 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어떻게든 연결되고 걸쳐져야만 안심이 되는 내 본성은 내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조차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마음과 시간의 모든 공간을 그냥 텅 빈 상태로 두지를 못하고 어떻게든 사람들로 채워보려는 욕구 말이다. 시간이 나면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전화 통화를 한다. 그 정도의 여유조차도 나지 않는다면 늦은 시간 사이버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미니홈피, 블로그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일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그러나 결코 진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설거지 다 하고 뭐 할거야? 쉴 거야? 컴퓨터 하면서 쉴거야?” 컴퓨터 앞에 앉은 엄마에게 또 묻는다. “엄마! 지금 일하는 거야 쉬는 거야? 어? 이건 누구 홈피야?”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빠르게 타닥타닥 날 때는 엄마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의자에 약간 기대앉은 상태로 느리게 따닥따닥 클릭하는 소리가 나는 건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사실은 엄마는 지금 쉬는 게 아니고 엄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쉼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야’라고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겠다.


모든 것 내려놓고 안식하기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안식함’을 통해 거룩한 삶의 리듬 속에 살고 있는 <즐겁게 안식할 날-Sabbath Keeping>의 저자 린 바압, 그녀의 결단과 그에 따른 열매가 부럽다. 도통 삶에서 여백두기를 못견뎌하는 내게, 여백이 생기면 그 여백을 뭔가로 채우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내게 그녀는 조용하지만 따끔한 일깨움을 준다. 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으로 채워야할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충대충 일과 사람으로 틀어막아 수습하려했던 공허함은 바로 나를 만드신 분께로 가서 다시 튜닝이 필요하다는 싸인 이라고 말이다. 튜닝 되지 않은 악기는 합주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독주를 할 때도 스스로의 귀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만다. 줄이 다 풀어져서 삶의 연주가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뒤늦은 수습에 나설 것이 아니라, 저자 책에서 보여주는 삶처럼, 아니 하나님께서 보이신 방법대로 여섯째 날에는 정확하게 쉬는 자리로 가는 리듬을 회복해야겠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나만의 시간을 무엇엔가 걸쳐지는 것으로 얄팍한 위안을 삼을 것이 아니라 비워두고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 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 해야겠다.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중동에서 2년 동안의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우연히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 살게 되고, 거기서 전혀 새로운 문화경험을 하면서 발견한 보물이 오늘 이 책을 통해서 내게 전해졌다. 그 간에도 나의 하나님은 수도 없이 내 귀에 속삭이셨을 텐데....‘얘야! 일은 그만하고 내게 안겨 그냥 쉬거라. 뭘 그리 다른 쉼과 위안을 찾아다니는 것이냐? 그냥 나를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너와 함께 산책하고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단다. 내게로 와서 쉬거라. 지쳐서 파김치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휴가를 떠나자는 말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단다.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너다워지고 너의 영이 충만해진단다. 내게로 오렴. 내게와 와서 쉬렴’ 그렇게도 안타깝게 속삭이셔도 도통 못 알아듣는, 도대체 ‘참된 쉼’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분의 딸을 사용하셨다. 가 가장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처방이 되는 ‘책’을 써서 내 손에 들려지게 하는 이 방식으로 말이다.

 

감기 몸살과 함께 끙끙 앓으면서 쓴 글.

감기가 와서 앓은 것인지,

글의 무게 때문에 앓은 것인지...

 

================================================================================

 

<마음의 혁명> - 클리포드 윌리엄스 지음, 최규택 옮김, 그루터기 하우스



오버가 필요한 찬양 인도자

애써 좀 무덤덤해지려 노력하는 편인데도 나는 ‘찬양 인도자’에 대한 취향이 좀 까칠한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기 때문에 직업상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까다로울 수 있다고 스스로 진단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걸려서 넘어가지 못하는 문제는 단지 음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적으로 찬양 인도자나 싱어들의 ‘표정’ 이다. 아마도 찬양하며 받는 은혜가 충만하다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감격에 넘치는 표정을 감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찬양 인도자의 멘트나 표정이 ‘오버다’ 싶을 만큼 심하게 홀리하거나 가사와 상관없이 한결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찬양을 할 때는 오히려 낫다. 내 맘 하나 잘 추슬러서 찬양에 집중하면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인도자와 싱어를 씹어대던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설 때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찬양의 가사에 마음을 쏟자’라고 다잡아먹지만 역시나 회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결국 어느 새 표,정.관.리.에 들어간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의 난감함이란.

게다가 찬양팀의 윗분이나 교회의 어르신들이 ‘아놔~ 앞에 서 있는 싱어들 좀 웃으라고. 표정 좀 밝게 하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찬양을 좀 하란 말이지. 그래야 보는 사람도 찬양할 맛이 나는 거 아닌가?’ 이러실 때 정말 난감하다. 개그맨도 아닌데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는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무대에 선 희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연기를 보여 달라는 것인가?


고상한 행동, 불순한 동기

교회 주일학교 게시판에 초등부 아이가 글을 하나 올린 걸 보았다. 내용이라곤 별로 없는 짧은 글이었다. 그 내용도 없는 글을 올린 이유를 밝혀 놓은 것이 재미있다. ‘제가 이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요… 1번 달란트 받고 싶어서, 2번 칭찬받고 싶어서…예요’ 아이니까 가능한 자기표현이 아닐까 싶다. 보다 현명한(?) 방법이라면 달란트(이걸 모으면 나중에 큰 선물과 바꾸게 된다)와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아니었겠나? 이렇게 바로 오토매틱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의 처세와는 달리 아이들의 꼼수는 치밀하지가 못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어른인 내게는 어떻게나 빠른 시간에 어떻게나 교묘한 방식으로 자동화되어있는지… 나 역시 칭찬 받고 싶어서, 내가 하는 훌륭한 생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이런 멋진 나를 사람들이 좀 부러워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에 ‘바울을 괴롭힐 요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해야하는 그 살벌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 사람들은 뭐라 하며 복음을 전했을까?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1번 바울보다 더 유능한 전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2번 바울의 속을 최대한 뒤집어 놓기 위해서 입니다’ 라 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기에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


분열된 마음의 통합혁명

내 속에서 결코 드러내고 싶지도, 나 스스로 인식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불순한 동기들이 숨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그 방에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물어보는 선한 행동과 짝을 이루어 ‘예수님을 닮은 자’처럼 보이고 싶은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었고, 찬양을 하면서 짓는 은혜에 취한 표정을 통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도록 해야겠다는 발칙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방을 발견하고 영 마음이 찝찝해 어쩔 줄을 모를 때 내 손에 들려진 책이 『마음의 혁명』이다. 그렇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숨은 이기적인 동기를 인식하고 내 마음의 분열성을 인식하는 일은 ‘혁명’같은 경험이다. 감기 정도의 자각증상을 느끼며 藥이 되려니 하고 펼쳐든 이 책은 내게 ‘암’을 선고했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면 됐지 뭐 숨은 동기 까지 이 잡듯 뒤져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바로 그거란다. 선한 행동으로 끼치는 유익과 그로 인해 오는 반대급부에 중독이 되어 있는 내 영혼의 엑스레이 사진을 내미는 것이다. 영원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살다가는 영혼이 죽는다며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처방전을 내주었다. 정말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나쁜 뜻을 가지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 아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헌데 그 뜻이 딱히 나쁘다기보다 불.순.하.다.면 그것은 날이 갈수록 나를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혁명’을 통과하며 나는 결심했다. 분열된 마음, 다중성 속에 빠진 마음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빠져나와 ‘마음의 투명함’을 위해 매일 매일 내 속의 숨을 동기를 들춰보겠다고 말이다. 마음의 단일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도 사람도 내 이기적인 동기를 위해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과 다르지 않다. 찬양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칭찬일 뿐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은혜 충만한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설령 그것을 드러냄으로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겠다는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을 돌아보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지 ‘내가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찬양하는 찬양 인도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04장)’ 찬양인도를 위해 앞에 설 때마다 끊임없이 이 찬양을 되뇌인다. 찬양 인도자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그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자기중심적 단편 영화들의 필름을 잘라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저 찬양 시간에 투명한 마음으로 서서 찬양하는 것으로 인해 ‘자아’도 간 곳 없고, 영향력을 끼치고픈 ‘사람들’도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록 말이다.

찬양 시간에 찬양만을 목적으로 진실하게 찬양하는 인도자, 삶에서 사람과 사랑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여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통합된 마음과 자아로 이슬처럼 맑고 투명해지기를….

QTzine 4월호 원고랍니다.

책에 관한 얘기를 쓰는 것이긴 하지만 책얘기 보단 제 삶의 얘기가 더 많죠.

이번 글은 너무 힘들고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라서 클럽에도 쓰지 못했던 얘기를 썼네요.


글의 제목은 달지를 못해서 아직 없어요.


========================================================================





<용서의 기술> - 루이즈 스미디스, 배응준 옮김, 규장

<용서의 미학> - 루이스 스미디스, 이여진 옮김, 이레서원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거예요?

여덟 살 다섯 살 두 아이가 토닥토닥 싸우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눈여겨 볼 때가 있다. 엄마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개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고 지켜보면 두 사람(아이)간의 갈등의 생성과 진행과 해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부가 된다.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는 결론은 ‘누가 누구보다 더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싸움의 빌미를 어느 한 편이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최소한 그것 보다는 더 때리려 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걸 보면 결국 사소한 싸움을 갈등으로 갈등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책임인 것 같다. 맨 처음 싸우게 된 원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고 비난하다가 피차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극에 달하면 결국 ‘누나랑 안 놀아’ ‘나두 너랑 다시는 안 놀아’하고 파국을 맞는다. 비단 애들 싸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양상이 더 복잡하고 좀 더 고상하고 세련된 언어로 표현될지 모르나 성인이 된 이 엄마도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갈등을 겪고 심화시키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하게 일방적인 과실에 의한 갈등은 없다’라는 생각의 전제 때문인지 나는 관계 문제 에 있어서 ‘용서’를 해결로 들고 나올 때 머리로 수긍이 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하는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라고 할까?  ‘용서’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무고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죽인 사람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쌍방과실인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쌍방과실이면 그 과실의 정도를 드러내고 보험처리를 해야지 말이지.


제가요? 제가 용서하라구요?

몇 년을 두고 화해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화해는커녕 더 꼬여만 가는 가족 중 한 사람과의 관계문제가 있었다. 마음먹고 그 관계를 해결해 보자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래 된 갈등이 한 번의 대화로 미끈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상상된 일이었다.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사건부터 시작해서 상대방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은 같지 않았다.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그 무게 또한 동일한 저울로 측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대화나 해명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인 사과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나의 논리를 포기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였다. 나에 대한 비난을 ‘맞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유야무야 그 대화의 장은 파장이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정당화하며 항변할 많은 말이 있지만 화해를 위해서 그것을 포기했다. 같이 화를 내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것보다 잘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마음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으며 화해를 청하는 내게 끝까지 고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분노가 마음속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받은 상처의 기억이 새롭게 각인되면서 분노의 끈은 나를 꽁꽁 묶는 것 같았다. 내팽개쳐진 자존심이 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밟히고 또 밟히며 뒹구는 듯하였고 그 날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용서의 미.학.이라구요?

루이스 스미디스가 <용서의 미학>이라는 처방전을 주었다. 처방전의 제목을 보고는 ‘용서? 또 용서야? 여태 용서했는데 또 용서? 나 자신만 괴롭히는 용서?’ 하고는 심드렁하게 처방전을 펼쳐보았다. 루이스 스미디스는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용서한 적이 없는 것 같소’ 그랬다. 용서가 무엇인지 새로 배워야 했다. 내가 했던 것들은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고 그저 좀 이해하려고 애쓰고 때로는 용서의 모양만 빌려서 예수님 닮은 척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용서라는 처방전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그 날보다 더 아픈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용서를 통해서 그 고통의 순간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와 나를 꽁꽁 묶어서 결코 멈추지 않는 고통의 엘리베이터 안에 갇아 두게 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맞춤 처방전이었기에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꼭꼭 씹어서 먹고 조금씩 원기가 회복되어 갔다. 용서가 시작되었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용서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에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의 회복이 지고지순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로잡혀 있던 내 자신도 보게 되었다. 과연 필립 얀시가 평한 대로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 전문가’였다.


용서의 종착역은요?

그렇게 용서의 바다에 헤엄치며 은혜를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오래 준비하던 시험에 1차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평온을 되찾았던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비록 내가 용서했을지언정 그 사람이 잘돼서는 안 된다는 유치한 시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나는 용서했으니까 내 대신 하나님께서 보복을 하셔야죠. 그러니까 제 앞에서 잘 되게 하지 마세요’ 요나처럼 울부짖었다. 그러자 또 다시 그 날의 기억이 아로새겨지면서 고통이 되살아났다. 용서의 마지막 단계는,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잘 되도 괜찮다는,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이라고 책에 씌여 있었다. 웬만큼 용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다다르지 못할 목표를 두고 애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좌절이 되었다. 현명한 용서 전문가는 이런 염려까지도 놓치지 않고 위로하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했다면 용서의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라고. 또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는 더디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될 것이니 서두르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주일 예배에서 나는 찬양을 하고 있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그렇다.용서라면 도가 튼 분이 있지 않은가? ‘용서를 위해서 여기 태어났다!’ 라며 머나 먼 여행을 떠나오신 분이 있지 않은가? ‘내가 했던 방식 그대로를 다 가르쳐줄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갔던 그 길을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용서의 여정을 걸어보자. 내가 있잖니’하며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손잡아 주시는 그 분이 느껴졌다. 그래. 진짜 용서 전문가와 함께 가는 거야!

        
조기옥 글 참 잘 읽었어요. 굉장히 힘들게 쓰여진 것 같아요...
제가 용서라는 단어를 받아들인 건 성경을 통해서 였어요.
그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더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더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였어요.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대상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내가 더 나이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나이가 어린 상대에게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그가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용서를 하는 사람은 상대보다 더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일 거예요.
아마도 용서해줄 상대가 도저히 납득, 이해 불가, 불가, 불가한 상대일지라도 용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는 건 내 마음 안에 더많은 사랑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지요.
상대가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건 내 몫이 아니라는 것.
사랑이 이미 상대에게 넘어간 것이니까요.

다만 사랑이란 언젠가 봄눈 녹듯 강팍한 마음을 녹여낸다는 진실만은 버리지 않은채
서서히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용서인 것 같아요.
용서를 한다는 건 어찌보면 신의 영역이었던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 흉내라고 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에구 열심히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거이 참 힘들지요...

저도 한동안 무지무지 힘들때 성경에서 그걸 깨닫고 펑펑~ 펑펑펑펑~ 울었답니다...^^ (07.03.03 00:03) 댓글삭제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  정혜신, 개마고원



>>호감 vs 비호감


중학교 1학년 때 일기장에 그런 짓을 했었다. 일기장 한 페이지 가운데 줄을 그어 영역을 나누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분류해서 적었다. 막 자기 정체성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춘기에 관계중심적인, 관계지향적인 기질에 어쩌면 그리도 충실한 놀이를 하였는지…. 호감이냐, 비호감이냐. 요즘 들어 많이 듣게 되는 이 용어는 자주 써 먹게 된다. 쓰면서 ‘아~ 참 쓰기 좋은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누구는 좋아. 누구누구는 싫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저런 스타일 완전 비호감이야’라고 표현하면 어쩐지 좀 덜 유아적으로, 보다 세련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딱 두 집단으로 나눠서 ‘호감, 비호감’으로 분류할 수는 없어도 성인이 된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호감, 비호감’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른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조차도 그 분류의 절차며 결과를 뚜렷하게 표명하지는 않는다. 특히 ‘호감’이라면 몰라도 어떤 사람을 ‘비호감이다. 싫다’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격적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이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알고 있다. 성인이 된 나는 알고 있다. ‘좋은 사람(good object)’ 과 ‘나쁜 사람(bad object)’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좋음과 그렇지 않음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있어서 내게 비호감이면 ‘나쁜 사람’일 확률이 많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건너편


몇 년에 한 번, 마음먹고 시작한 어떤 사람과의 대화에서 죽사발이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최근에 ‘대화로 죽사발 되기’를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마음먹고 어떤 대화를 할 때는 ‘내가 이 정도 표현해 주면 이 정도 반응이 나오겠지’ 하는 식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것이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대화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예상치 못하는 반응을 보일 때, 그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흔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이런 당혹스러운 대화를 만들어낸 주범은 대부분 ‘나의 시나리오’ 상의 문제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상대방과 대화의 장에 나가기까지 내 머릿속에서 그려졌던 그림이 상당히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어떤 행동에 대한 ‘나 중심적인 해석’이 잘못된 시나리오를 제작하게 되고, 그 시나리오를 들고 대화를 시작하면 성공할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는 ‘사람은 참으로 다르다. 내 맘 같은 사람이 없다’라며 무성의하게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내 맘 바꿔 넘(남) 맘 생각혀 봐라”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께 많이 들었던 얘기다. 내 맘을 바꿔서, 그대로 온전히 바꿔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산의 이쪽에 서 있는 내가 산등성이 저 쪽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산세를 그리고 있는 상대방과 같은 산모양을 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말이다. 나는 나를 뛰어넘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고 하지만 ‘객관화’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님을 관계나 대화의 실패를 통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서른여덟 명, 남의 속마음


나는 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추측한다. 추측하면서 대부분의 경우 ‘내 추측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내 추측이 오답임이 밝혀질 때, 그리고 그 판단착오에 대한 벌을 고스란히 ‘관계의 삐걱거림, 관계의 틀어짐’으로 받아야 할 때 나는 정말 당혹스럽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의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두 권의 책을 읽으면 총 38명 남자와 여자들의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름 하여 ‘심리평전’이다. 저자 자신의 사람에 대한 ‘호감/비호감’의 취향을 온전히 뛰어 넘을 수는 없다 하여도 읽다보면 ‘전문가의 손길(눈길?)’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38명의 사람들, 대충 알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는 사람이라 할 수도 없는 유명인사의 행동과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내가 그렇게도 다다르고 싶었던 산등성이 저 쪽으로 다가가는 느낌이다. 서른여덟 명의 타인을 이렇게 저렇게 씹어(?)보면서 소화를 시키고 나니 완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 덩어리가 남았다.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드는 호감, 비호감의 정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게 비호감이면 더 생각해 볼 여지없이 ‘안 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내 유아적인 버릇을 딱 짚어주고 있다. 저자는 ‘현실감각’이라고 정의하며 설명하는 이것이 내게는 ‘성숙한 관계 맺기를 위한 1단계 과제’라고 여겨진다.


‘감이 없다는 게 별거 아니다. 다른 현실이란 있을 수 없고 내가 알고 있고 좋아하는 것만 현실이라고 우기다 보면 필연적으로 현실감각을 잃게 된다. 현실감각을 유지하려면 타인의 행위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현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싶은 상황만 보지 말고 나와 타인의 전체적 현실을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다’<사람vs사람>에서.


>> 참고서를 참고하고, 교과서 저자에게 가기


예수님은 우리를 관계 속으로 부르셨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라고 배웠다. 나날이 기도가 뜨거워지고, 전도에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믿음의 진보가 느껴지는데 ‘관계’는 제자리걸음이라면 한 번 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성숙한 관계는 정혜신의 말처럼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현상학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행동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는 인지력’이 전제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책은 신앙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정신과 의사의 심리비평에 그치지 않는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를 때 첫 걸음을 떼기 위한 도입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가 척척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대충 나와 어떻게 다른 것도 알겠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선의의 해석’을 하도록 하자. 이 책의 행간에서 건져 올린 또 하나의 처방이다. 선의의 해석을 해도 여전히 용납되지 않는 비호감의 문제는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으신’ 그 분께 가져간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그 산을 만드시고, 그 산 위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시는 그 분의 손에 궁극적 열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 파산 그리고 망상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을 쏟아 부었던 공동체와 사람들로부터 내침 당했다고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 깜깜한 절망의 벽이었다. 청년부의 대모(大母)로 온갖 궂은 일 마다 않고 사람들 섬기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소그룹 모임의 교재가 마르고 닳도록 읽고 요약하고 또 정리하며 주일을 맞는 리더였으며, 조원들의 생일을 하나하나 정성으로 챙겼으며, 수련회 때는 20여 명 청년들의 식사를 도맡아 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후배들과 밤이 깊도록 기나긴 전화로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어 주었다. 아~ 그만하면 정말 완벽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아니었던가.


나와는 직접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 문제에 휘말렸다. 그리고 서서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 신화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돕겠다는 의도로 누군가에게 했던 어떤 말들이 오해와 곡해가 덧붙여져서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한 번 봇물이 터지자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내게 들리는 나에 대한 얘기는 그저 악한 것뿐이었다. 그 때가 되도록 신앙의 위기라고는 별로 겪어보지 못했던 범생이 크리스천이었기에 내게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이제 남은 건 '최종 부도 처리' 이것뿐인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교제하던 형제와 짧은 교제 후 헤어져서 질퍽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범생이 크리스천에게는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안 나가거나 청년회를 당분간 쉬는 선택은 없다. 주일마다 나가서 예전처럼 모든 걸 다 하지만 내 영혼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주일 모임을 마치고 사람들이 에프터로 우~ 몰려가면 혼자 집으로 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망상에 빠졌다. '모두 모여서 내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그 자리에 따라 가지 못한 나를 보면서 고소해 할 거야….' 망상은 말 그대로 망상! 근거 없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심화되고 확대 되었다. 공동체의 그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망상과 고립감이 짝을 이루어 나를 공동체 밖으로 더 멀리 더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 두려움과 두려움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책이 손에 잡힌다는 것이 내게는 큰 은혜다. 바로 그러한 영적 파산의 위기에서 래리 크랩의 『격려 상담』(두란노)을 손에 들게 되었다. 특별한 기대 없이 차오르는 고통을 잊어보자는 생각에 아무 거나 골라잡은 것이 제목도 고리타분한 이 책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개의 단어가 내 시각과 지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관.계. 그리고 두.려.움. 이 두 단어가 주일은 물론 매일 시시각각 공동체 사람들을 향해서 망상에 사로잡힌 나의 심리적 영적 상태를 명쾌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동체의 친구들과 후배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빠져 혼미해져 있었고, 이제껏 내게는 따뜻한 둥지 같은 '안전한 관계'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모든 것을 잃었다 느끼고 있었다.


래리 크랩은 조근조근 내 자존심을 한 올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진단해주고 치료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가득 차 있다고.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만 그 두려움을 가장하기 위해서 농담, 때론 침묵, 논리적인 토론, 속이는 눈물 같은 것들을 고안해 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실은 영적인 위기를 느끼면서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지금의 나'만이 두려움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나'도 그러했고, 지금 나를 빼놓고 에프터 하고 있는 '그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힌트를 주었다. 그렇구나!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핵심적인 감정이 두려움이라니…. 그렇다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두려움 덩어리, 나 외의 모든 '너'도 두려움 덩어리.


>>> 출발지 사랑, 도착지 두려움


이 책은 내내 '다른 사람을 어떻게 격려할까?' 하는 내용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비결을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격려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책에 빠져 내 문제가 잊혀지는 것인지 모를 진통제 같은 효과가 있었다. 읽고 곱씹어 보니 그것은 단지 진통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끝없는 두려움의 분명한 해결책과 해결 책임자를 찾아내니 진통제 아닌 치료제가 거기 있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두려움은 누구의 몫인가? 바로 나의 몫이다. 사람들의 농담과, 경직된 말투와, 지나친 친절함과, 헛웃음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발견해 격려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것을 위해서 '관계'로 부르셨다. 그렇다면 내 두려움은 누구의 몫인가? 그것은 내 이웃의 몫인가?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을 향해 내 두려움을 감당해 달라고 해야 하는가? No! 내 두려움은 하나님 몫이다.


이런 통찰을 얻고 난 후에 나는 부도 직전의 영적인 상태를 털고 일어났다. 마음의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던 이불을 털어 개켜놓고, 커튼을 열어 햇볕을 맞아들이고, 창문을 열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고립됐다고 느끼던 내 고통과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이제껏 날 위협하는 존재로 느껴서 두려웠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보는 투시력(^^)이 생겼고, 그것을 터치할 방법을 알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커지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팁을 얻었다.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섬겼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나를 배신했는지 말이다. 이 일을 경험하기 전에도 나는 사람들을 격려한다고 말을 하고 많은 액션을 취했었다. 그런데 그 말과 액션들이 많은 경우 격려의 모양은 입고 있었지만 진정한 격려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두려움을 겨냥하기는 했으나 나의 두려움에서 출발한 격려는 진정한 격려가 되어 사람의 영혼을 만질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소명으로 나눠주신 이 '격려'는 내게서는 '사랑'이라는 활에서 쏘아져서 내 형제의 '두려움'을 겨냥하여 다다라야 하는 것이다.


다시 나는 새로운 액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불성실한, 사랑이 없는 리더라는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맡겨진 사람들에 대한 솟아오르는 사랑으로 조원들에게 전화를 하고, 엽서를 보내고 성경공부를 준비하게 되었다. 내 부족한 사랑으로 그들의 두려움에 닿기를 기도하면서….

2006/12/29
        
정신실 내년 1월호 부터 <큐티진>에 '藥이 된 冊'이라는 꼭지로 쓰는 글.
쓸 때는 늘 고통스럽지만 결국 글은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을 정리하고 자라는 과정이 된다.
'쓸 게 없어요' 하고 엄살을 하는데 늘 멍석을 깔아주시며 격려해 주시는 서목자님 덕에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자라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서목짠님! 감사합니다! (06.12.29 17:30) 댓글수정삭제
정신실 2월호 글을 쓰다가 진도가 안나가서 이러구 있음. (06.12.29 17:30) 댓글수정삭제
정운형 잘썼음. 2월호도 기대 됨. (06.12.30 13:14) 댓글삭제

지난여름에 결혼한 K 선배의 집들이를 갔다 왔다. 서로 시간이 맞질 않아서 미루고 미루다 해를 넘긴 집들이가 되었다. 청년부의 수석 권사님 격인 Y 언니의 결혼인데다가, 그 상대가 농담 삼아서도 연결해 보지 않았던 K 선배라서 두 배로 충격을 주었던 커플이다. Y 언니가 연상이라는 것 역시 두 사람을 연결시켜 그림이 나오지 않았던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었다. K 선배는 회장, Y 언니는 부회장, 나는 회계로 함께 봉사하던 생각을 해 보면 부부가 되어 저렇게 한 집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낯설기도, 민망하기도, 결국... 부럽기도 하다. 지금이야 포기한 지 오래지만죚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말이다TT 죚 그래도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그리던 모습은 같은 공동체 안에서 만나 교제하고 결혼하는 것이었으니까.


부러우면 얼렁들 결혼해!


신혼냄새 폴폴 나는 인테리어에, 깔끔하고 감각적인 식사 메뉴에, 연예인 같은 결혼 앨범에.... 이런 것들은 이제 하도 많이 봐서 식상할 때도 됐건만 여전히 볼 때마다 부러운 것이다. 이런 신혼집에 초대받는 일은 늘 유익한 것 같다. 닭살 부부가 서로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시집가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 '염장질'을 당해주는 것도 그렇고.... (슬프도다, 브리짓 인생이여!)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가정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냔 말이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꾸밀 가정에 대한 소망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하니 말이다. 함께 공동체를 섬기다 결혼을 한 Y 언니의 집들이는 그런 저런 기대로 약간은 들뜨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신혼부부를 가운데 앉혀 놓고 인터뷰를 하는 시간까지는 충분히 내 예상과 각본대로 진행되어 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밝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를 보면서 “아우∼ 너무 예쁘다.”로 시작하여 자매들은 끊임없이 “너무 예쁘다”, “너무 예쁘다”를 연발했으니까. Y 언니는 만족스러운 듯 “호호호호, 부러우면 얼렁들 결혼해!” 아∼ 나도 저런 대사를 날릴 날이 올 것인가?TT “부러우면 빨리 결혼해!”



염장질-외적 매력으로가 아니라 삶의 내용으로


'부러우면 결혼해!' 시리즈의 백미, 신혼부부의 얘기를 듣는 시간이 되었다. 둘 다 워낙 찬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둘이 함께 집에서 찬양도 하고 그러냐?” 하는 질문이 나왔다. “허허허허, 찬양? 결혼들 해보세요. 결혼하고 기타를 꺼내 보지도 못했네요. 하긴 이러면 안 되는데.... 사실 결혼하고 큐티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공동체에서 매주 하던 모임이 없어지니까 흐트러지는 것 같아요. 결혼은 일상이거든요. 다들 결혼하기 전에 열심히 큐티하고 열심히 찬양하고 열심히 봉사들 하고 그래요. 결혼해서는 뭐 그냥 열심히 사는 거죠. 이런 저런 여유가 별로 안 생겨요.”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 속에서 처음 집에 들어서며 집안의 인테리어며 연예인 같은 사진들에 연발했던 감탄사는 점점 사그라져 갔다. 단지 함께 찬양하거나 말씀 묵상을 나누는 일이 없다는 얘기 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의 사는 모습은 그냥 그렇고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별로 염장질이 되지 않았다. 얘기를 듣다 보니 이 선배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던 우리 오빠 죚자타가 공인하는 그저 교회를 댕기는, 나이롱 신자 죚 부부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같이 훈련을 받으며 교제를 시작하고 일군 가정이 아닌가? 함께 했던 뜨거운 찬양, 그 바쁜 와중에도 타오르던 기도에 대한 열정, '특새'의 시간들, 빼먹는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말씀대로 살아보자고 힘겹게 붙들고 있던 묵상의 훈련, 단기선교로 뜨거웠던 여름.... 그런 공감대를 가지고 시작한 선배 부부는 단지 결혼의 외적인 매력으로가 아니라 결혼한 삶의 내용으로 후배들에게 염장질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청년의 때에 전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사람처럼, 오직 취직시험 합격과 그로 인한 삶의 풍요가 인생의 목적인양 살았던 우리 오빠 가정하고는 다른 결혼의 그림을 보여 주길 기대하는 건 나 혼자 너무 터무니없는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믿는 남자 만나서 결혼했다?


선배 집에서 나와서 H와 차 마시며 이런 얘길 했더니 “나도 좀 실망스러운 점이 없는 건 아냐. 그런데 뭐, 결혼이 다 그런 거라잖아. 야! 브리짓! 너 너무 이상이 높아. 그러니까 결혼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려면 아예 목사님하고 결혼을 해라. 1년 내내 둘이 같이 GBS하고, 결혼에 관한 책 펴놓고 교과서대로 대화하면서 그렇게 살면 되겠네. 니네 엄마 너 얘기 들으시며 그러시겠다. '아따, 별 걱정 다 하고 앉었네. 결혼이나 하구 그런 걱정을 해라. 이 화상아!' 네가 이 나이에 그런 것까지 따지면 결혼할 수 있겠냐?” 한다. H의 진단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내 이상이 너무 높은지도. 그래서 내게는 결혼이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 Y 언니 부부를 보면서 결심했다. 결혼식 자체나 결혼의 외형과 결혼의 내용을 헷갈리지 않기로 말이다. 형제들의 수가 자매들에 비해서 현격하게 적은 현실 속에서 '그래도 믿는 남자 만나서 결.혼.했.다.'는 정도를 가지고 부러워하지 않기로.... 결혼의 내용에 대해서, 즉 바로 내 손으로 만들 가정의 모습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그림을 그려 보기로 하자. 신혼집 인테리어에 신경 쓰는 만큼이라도 그 안에서 만들 가정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 본다면 형식보다 내용으로 감동을 주는(아니, 스스로 감동이 되는) 결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이런 준비를 결혼할 사람을 만나서 함께할 수 있으면 얼매나 좋을까? 그럴 날이 올 것이다! 브리짓! 힘내자! 언젠가 나도 목에 힘주고 이렇게 말할 날이 있을 것이다. '부러우면 결혼해∼' 남들과 똑같은 결혼의 겉모양으로 사는 부러움이 아니라 삶으로 부러움을 사는 그런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비록 오늘은 '꿈꾸는 자가 오도다' 하면서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오랜만에 엄마랑 한판했다. 며칠 전 “토요일에 엄마 친구 딸내미 쭛쭛 있지? 걔 결혼한다드라. 걔가 나이가 몇이더라…너보다 한참 어리지? 에휴∼” 이러실 때부터 이미 예고된 한.판.이었다. 엄마 나름대로 참고 참으시던 불안이 결혼식만 보고 오시면 폭발하게 되는 것 같다. 결혼식 음식이 어떻더라, 신부 인물이 신랑한테 빠지더라는 둥 하시며 결혼식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리포트하시다 결국 불똥이 튈 곳으로 튀는 것이다.


오늘은 내 기분도 말이 아니었다. 뭐 초반전에는 그럭저럭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 귀는 열어서 흘려보내며 듣고 있었다. “니 나이가 몇이냐? 이놈, 저놈 다 싫다고 콧대 높게 굴어봐야 뾰족한 수 있는 줄 아냐? 결혼해서 살면 다 마찬가지다….” 이런 정도의 얘기는 곧장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러구 앉었다 좋은 놈들 다 놓친다. 봐라. 니 친구 그 누구냐? 그놈도 알쩡댈 때 얼른 잡지. 결국 놓치고 말었잖어. 참∼너는 속두 편해서 좋겄다. 나는 그런 저런 생각하면 불안해서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난다.” 이 부분에서 진정 나의 안전핀은 뽑히고 말았다.



'너는 참 속두 편해 좋겄다'


오늘 내가 바로 '그놈'과 '그놈이 결혼할 여자'를 만나고 들어온 것 아닌가! 수년간 내 주위를 맴돌면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친구. 어떻게 해서든 내 마음을 사 보려고 끊임없이 친절하게, 따뜻하게, 때로 비굴하게 내 곁을 서성이던 친구. 그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여자를 소개시키겠단다.


사실 그 자리가 썩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뭐 딱히 불편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으로 느껴지는 불편함보다 훨씬 강도 높게 표현되는 내 표정언어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다정한 두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 줘야 할지…. 아무튼 나는 마음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불안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그 친구가 은근히 기대했을 소기의 정서적 복수를 충분히 당해 준 셈이다.


돌아오는 길, '나는 정말 당당한가?'라고 자문해 보았다. 어쩌면 나는 많이 불안한지도 모른다. 내 나이 계란 한 판인데 이러다 정말 하나 둘, 괜찮은 남자들은 다 가버리는 건 아닐까? 단순하게 이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에 불안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다. 괜찮다. '하나님의 때와 내 때가 다르다고 했다' 하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말씀을 되뇌면서 애써 마음을 달랜 토요일 밤이었다. 거기다 대고 엄마가 불을 댕긴 것이다. '너는 참 속두 편해 좋겠다.


' 엄마가 비아냥거리듯 말씀하신 것처럼 뭐 내가 결혼에 대해서 그렇게 느긋하고 속이 편한 건 아니지만서도…그렇다고 맘이 편하고 느긋한 것이 잘못일까? '나는 왜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아직 남친이 없을까?'를 매일 묵상하고 성찰하며, 우는 사자와 같이 남친을 찾아 헤매는 것이 계란 한 판 되어 여전히 싱글인 나의 마땅히 할 바란 말인가?


엄마의 염려와 불안(사실 이 불안은 내 것이기도 하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 모든 일을 전폐하고 소개팅만 하고 다니면 맘에 드는 남자가 찾아질까? 아니면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남자들을 향해 오로지 '이성(異性)의 안경'을 끼고 들여다보면 찾아질까? 아니면 앞뒤 가리지 말고 단지 싱글을 벗어나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누구하고든 교제를 하고, 아무하고든 결혼을 해 버리는 것이 능사인가?



'브리짓, 염려하지 마!'


이렇게 생각해 보면 너무도 자명해지는 답을 두고 엄마는(아니, 사실은 나는) 왜 그리 흔들리고 있을까? 얼마 전에 묵상했던 잠언 말씀을 떠올려 본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슬기로운 아내는, 즉 '좋은 배우자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


굳이 구별을 지어 보자면 결국 배우자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배우자를 얻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차라리 잘 기.다.리.는.일. 이것뿐이지 않을까? 기다림의 시간을 '남친이 없어서 2% 더 불행한 하루'가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은 남친을 기대하는 소망 있는 하루'로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싶다. 온갖 불안함을 유발하려는 세상의 잣대들을 좀 더 정신 차리고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오늘처럼 엄마의 애정 어린 걱정의 옷을 입고 찾아오기도 하는, 그러나 결국 마음의 불안과 패배감만을 남기는 것들에 대비해 마음을 무장할 필요가 있겠다.


엄마를 비롯한 인생의(신앙의) 선배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브리짓, 염려하지 마! 결혼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잖니? 단지 싱글을 탈피하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 아니란다. 행복한 결혼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해. 너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시겠니? 주변의 멋진 남자들이 하나씩, 둘씩 다 결혼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도 너의 배우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것 잊지 마!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즐겁게 살렴!”


이렇게 말이다. 선배들에게 들을 수 없다면 내가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내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리라.


벌써 거리는 성탄 분위기다. 거리는 온통 노아의 방주처럼 쌍쌍이 걷는 커플들로 가득 차 있다. 노아의 방주 같은 거리에서 저주 받은(?) 한 마리처럼 홀로 걷는 순간에도 쓸데없는 불안이 나를 덮지 못하게 하리라.


<QTzine 12월호>

<QTzine>에 11월호부터 '브리짓 자매의 미혼일기'라는 꼭지의 글을 씁니다. 교회생활에 열심인, 아직 결혼계획도 남친도 없는 브리짓이라는 30세 자매의 입을 빌어서 크리스챤 미혼청년들의 문제를 애기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글이고, 두 번째 원고를 며칠 전에 넘겼습니다. 실은, 제가 스물일곱 되는 해부터 '싱글일기'를 썼더랬습니다. 대학노트 한 권을 거의 다 채우고 결혼을 했지요. 그 때 솔직하게 써놨던 것들이 이 글을 쓰는데 효자노릇하고 있네요.



---------------------------------------------------------------

 

이 우울하고 허탈한 감정은 또 뭐지?


주일이다. 몸과 마음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들어온 듯 하다. 이 시간이면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깊은 밤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긴 극단적인 감정 교차에 대해 더 이상 그러려니 넘어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는 주일은 사실 내게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아침에 유년부 아이들과 드리는 예배로 시작해서 청년예배, GBS, 그리고 나서 리더모임과 중보기도모임까지…. 하다못해 유년부 예배를 마치고 잠깐 갖는 교사들의 티타임조차도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인가. 매주 열정을 다해 피를 쏟듯 선포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는 또 얼마나 도전을 주면서 은혜와 감동의 도가니탕을 만드느냐 말이다.


그런데 주일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이 우울하고 허탈한 감정은 또 뭐지? 나는 왜 주일마다 그렇게 황홀한 천국의 하루를 보내고 나서는 이 시간쯤에는 허전한 마음으로 지옥에 내려온 듯한 무거움 속에 빠지는 걸까? 내 믿음에 문제가 있는 건가? 사실 이건 한두 주 겪는 문제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주일 저녁은 늘 이런 마음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로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가게가 떠나가라 웃고 떠들었다. 그러고는 지하철역 앞에서 사람들과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스멀스멀 어두워지고 무거워지는 마음이라니…. 이렇게 심하게 정서가 오락가락 하다니…. 혹시 나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주일 저녁에 느끼는 외.로.움.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이 허전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생각했다.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직면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뭘까? 주일 저녁마다 혼자 있기 힘든, 견디기 힘든 이 느낌말이다. 아! 그렇다. 이건 단지 허전함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가끔은 이 외로움에 대해 한두 사람에게 '혹시 너도 주일 저녁에 이런 느낌이 드니?' 하고 묻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뜻 물을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이것이 '외로움'의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주일 내내 교사로, 리더로, 청년부의 선배로 성도의 교제에서 핵심에 서 있었던 내가 '외로움'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고백한다면? 그 화려했던 성도의 교제는 도대체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아니 솔직하게 자존심이 상해서 할 수 없는 것이지, 이게 외로움이라면 일단 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게 내 마음이다. 누구에게 대고 '나 외로워. 주일날 저녁이면 유난히 더 외로워.'라고 고백할 수 있겠나.


혼란스럽다. 정말 이 외로움의 문제는 나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 공동체 모두의 문제일까?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오늘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돌아간 다른 리더들도 느낄까?


'독처'로부터 오는 외로움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에 작년에 결혼한 K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슬쩍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언니 혹시 예전에 청년부에서 리더할 때요…주일 날 같은 때 집에 혼자 가면서 뭐 허탈감이나 그런 감정 안 느꼈어요?' 했더니 '허탈감? 허탈감은 무슨, 외로움이겠지!' 하는 것이었다. '외로움? 언니도 그랬어요? 주일 저녁이 되면 유난히 더 마음이 쓸쓸하고 외롭고 그랬어요?' '당연하지.' '그러면 지금은요?''지금? 지금은 외로울 새도 없다∼야. 한 번 외로워봤으면 좋겠다야. 근데 지금 애기 젖 줘야 하거든 담에 통화하자.


' 딸깍! 정작 본론은 얘기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순간 한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독처! 혹시 이 외로움이 창세기에 나온 '독처(獨處)',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 우리 공동체의 교제가 공허함 때문도 아니고, 내가 진실하게 마음을 다하여 교제하지 못함도 아니며,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온전히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함이 아니라 '독처' 즉 '싱글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 그 감정이 아니겠냐 말이다. 가끔 교회 내에서 새로 생긴 커플들이 커밍아웃 하거나, 유비통신으로 커플탄생의 얘기를 듣는 주일저녁은 유난히 더 마음이 무거웠었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런 일에 진심으로 기뻐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괜한 죄책감에 이중으로 힘들었던…결국 '독처'로부터 오는 외로움과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감정의 혼란스러움 아니었었나?


아∼ 이렇게 쉽고 단순한 진리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이 감정,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 이것이 이 밤에 나를 무겁게 누르는 감정 그것인가보다. 그래! 풍성한 교제를 맛보고 돌아온 주일 저녁에 유난히 더 싱글의 외로움이 찾아드는 것도 당연하겠구나. 그렇다면 쓸데없는 죄책감들을 먼저 털어버려야겠다. 예배를 잘 드리고 왔는데 왜 마음이 어두울까? 열심히 섬기고 삶을 나누고 기도했는데 왜 외로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는 식의 생각을 떨쳐 버리는 것이 좋겠다.


싱글의 외로움과 맞짱 뜨기


막연하던 실체에 대해서 분명히 규명을 했으니 맞짱을 떠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멀스멀 주일 저녁 신드롬이 고개를 들면서 마음을 좀먹기 시작할 때 자기연민에 빠져 질퍽거리지 말아야겠다. 늘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독처의 외로움'으로 정의한 이 감정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자. 오히려 이것이 결혼을 위해 주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 그리고 이 '독처의 외로움'으로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를 하고 싶을 때면 일기를 쓰자. 외로움에 직면해서 미혼일기를 써보자. 오늘처럼 끝까지 생각하다 보면 미혼의 삶에 대해서 좀 더 잘 정리될 것이고, 잘 정리되는 미혼의 삶은 좋은 결혼 준비가 될 것이다.


오늘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서 나처럼 '독처하는 외로움'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 놓으셨을 '돕는 배필'을 기대하며 맞짱 뜨는 거다. 싱글의 외로움과 맞짱 뜨는 거다.



>>> 브리짓 자매가 다시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 왔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올 초여름까지 란 인기 연재글로 QTzine의 지가(紙價)를 올려놓았던 브리짓 자매는, 유아교육과 음악치료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이곳저곳에서 아이들과 음악으로 신나게 놀아주고 있으며, 교회에서는 악보를 잘 모르던 50대 어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찬양대 지휘자로 즐겁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우리 부부가 결혼 한 후 처음으로 같이 읽은 책이 성에 관한 책이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았으니 뭐라도 읽지 않았겠는가! 그 이후 조심스럽게 시작된 부부간의 ‘성’에 관한 대화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수준에 까지 이른 것 같다. 놀이로서의 성, 일상으로서의 성 그리고 그 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까지 이젠 막힘없이 대화가 오고간다.
그렇지만 과연 부부의 성을 공개적으로 타인에게 드러내고 말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과연 독자들에게 의미 있고 유익하게 읽혀질 여지가 있을까? 여러 논의 끝에 우리 두 사람은 기독교세계관에 흠뻑 젖은 부부의 성 얘기를 공개하기로 했다. 남편이 설득하고 아내가 수용한 형국이라 아내에게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성을 말하기 :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

JP
결혼을 몇 주 앞둔 즈음에 장모님께서 우스개 소리로 하신 말씀이 있었다.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얼른 해야 되는디... 왜냐하면 남자가 힘들거든. 어이구~ 김서방 얼굴에 살빠진 것 좀 봐!” “? ...” 정말 그랬다. 보는 사람들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안됐냐고 한마디들 했었으니까.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친구, 선,후배 할 것 없이 죄다 하는 말이 “야~ 얼굴 좋아진 것 좀 봐라!” “형! 결혼하고 나니 굉장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데?” “아니! 칙칙한 예전의 오빠의 모습이 어디 갔지?” 하며 결혼의 위대함을 찬미하곤 했었다. 아내도 그런 내 변화를 두고 지금도 종종 놀려대곤 한다. 아니! 도대체 내 이미지가 어땠길래?
총각 때 모습을, 기억을 거슬러 더듬어 보니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다. 소심국의 황태자라고나 할까? 나는 큰 키에 비해 몸매는 참 못났다. 비쩍 마른 상체에 비해 허벅지는 꼭 운동선수 같았고 게다가 자존심은 또 얼마나 강했던지, ‘매력 없음’으로 인한 콤플렉스에 적잖이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가슴이 떡 벌어진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었던지! (그건 뒤집어 보면 성적 자신감의 결여와 다를 바 없다!)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한 갈망과 매력 없음이라는 현실적 자가진단의 아슬아슬한 불협화음은 사실 ‘성의 은폐와 성의 승화’ 사이에서 엇갈리는 부조화의 소음과도 같았다. 그리고 성적 욕구의 분출과 신앙적 교훈의 검열이라는 치열한 싸움과 부조화는 내게 있어서 ‘칙칙한 삶의 양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칙칙한 남자들’은 대개 성적으로 소심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내 모습은 결혼 초에 ‘과연 아내가 나에게서 성적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갖게끔 했다. 이제 욕구는 원할 때마다 대개는 충족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욕구 뒷면에 붙어있는 또 다른 욕구인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인정’이 사뭇 궁금해졌다. 육체적 매력 없음과 그로 인해 꼬여버린 내 자아상 모두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말로 나오던가! 성적 욕구는 대책 없이 때가 되면 솟아나건만 어째서 ‘그 일’은 늘 미완의 아쉬움으로 남는 것인지... 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어찌하여 영화(와 소설) 속 장면들만이 끊임없이 나를 속이려고만 하는 것인지... 나는 왜 아내 앞에서 나를 위장하는 일로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답답한 것은 대화의 물꼬를 틀 방법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다가 아내가 우연한 기회에 목사님 댁 서재에서 책 한권을 발견했는데, 우리는 지체없이 그 책을 구입했고 즉시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책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은 기독서적들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과는 달리 추상적 원리가 아닌 실제적 지침을, 거룩한 설교가 아닌 뜨거운 경험담을, 절제로서의 성 의식이 아닌 즐거움으로서의 성 놀이를, 그 밖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 책을 함께 읽는 것을 계기로 성생활에 대해 서로가 기대하던 바를 조금씩 진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꼬가 터진 대화는 마침내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두려움과 거절과 불신의 담들을 휩쓸어 갔고 우리는 성생활이라는 바다를 즐.겁.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SS
신혼 초 얼마 안 됐던 기간 동안 나는 꽤 답답함을 느끼며 지냈던 것 같다. 남편에게 하고픈 말은 가슴에 많이 쌓여 있는데 그게 말로 잘 나오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어떤 말들은 남편을 비난하는 말이 될 것 같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 될 것 같고, 어설피 말하면 내게 되돌아 올 화살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을 꺼내서 솔직한 대화의 장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하는 것’이 여성으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문화로부터 알게 모르게 배운) 의식과 더불어 생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들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다는 자체로 죄의식을 가지게끔 자라왔으니까. 거기다가 결혼 전 교제시절 ‘스킨십’에 대한 고민과 죄의식(?)의 기억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그런 답답함과 숙제들을 안고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책을 읽을 때는 한 사람이 먼저 읽고 기다렸다 다음 사람이 읽는 방식이 보통인데 이 책은 침대에 누워 한 권을 가지고 함께 읽는 방식을 택했다.(이 대목에서 독자들 혀를 차겠군요. 신혼부부가 침.실.에.서 독.서.를 하다니!!!!) 이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 자체의 탁월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사람이 ‘성’에 대한 한 권의 텍스트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본다는 방식에 있어서 말이다. 책의 내용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독서방식 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비닐로 싸인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책이다. ‘기독교서적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책이 있다니?’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19세 미만의 모든 책은 불온서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준 책이기도 했다. 또 이것의 의미는 ‘결혼’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성적 자유’를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용 자체가 그리 새롭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책은 우리부부의 성에 대한 대화에 ‘자연스러움’이라는 선물을 준 것 같다.
책에서 주는 정보를 가지고 시작한 대화는 점점 그 주어가 ‘나는’으로 명확해 지면서 우리 자신의 두려움, 답답함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작 남편이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 씩 내게 말했을 때 내게 아무런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었고, 나 역시 두려움을 가지고 남편에게 건넨 말들이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에 관한 정보가 얼마나 보잘것 없고, 때로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었던지를 알게 되었다.
구성애의 아우성이 아무리 명강의라 한들 자발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참여하는 세미나식 수업만 하겠나? 세미나식 성교육! 그거였다. 돌이켜 보면 신혼 초 책읽기를 통한 ‘성’에 대한 정면돌파는 우리 부부에게 단지 성문제에 국한 되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언제든 진실한 대화로 풀어가기’의 원칙을 세우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것 같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습은 내게는 참 필요한 훈련이다. 이 때의 대화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솔직하게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가시게 해 준 것 같다. 침실에서는 물론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부부되기를 추구해 갈 수 있도록 구체적 방식들을 보너스로 얻기도 했던 것 같다.


일상으로서의 성, 놀이로서의 성 : <야야툰>

SS
나는 늘 유머를 추구하며 수시로 낄낄거리고 깔깔거리길 좋아한다. 근엄하게 드리는 예배시간에도 내 뇌의 한 영역은 유머를 찾아 활발히 활동한다. 그러나 솔직한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고는 하지만 순식간에 ‘성’에 대한 부담감이나 두려움, 막연한 죄책감 등에서 완전한 자유로 옮아가지는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여유가 생겨갈 무렵 손에 넣게 된 책이 홍승우의 <야야툰>이라는 만화책이다.
이건 적나라한 그림의 만화다. 한겨레신문에 <비빔툰>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홍승우가 신문에 그릴 수 없는 부부간의 성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작가 홍승우의 <비빔툰>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30대 부부의 일상이 덜함도 더함도 없이 드러나는 만화다. 더도 덜도 아닌 일상이 그렇게도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 매번 보면서 놀라운 만화이기도 하다. <야야툰>은 주인공 정보통과 생활미의 성생활 이야기이다. 처음 만화를 펼쳤을 때, 그걸 보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 그림이 적나라하고 충격적이었다.(이 글 나가면 <야야툰> 잘 팔리겠는걸...)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신문에서 <비빔툰>을 보는 정도의 감흥 이상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좀 신선한 점이라 하면 다른 부부의 침실을 훔쳐보는 짜릿함 정도일까? 왜일까? 그렇게도 적나라한 그림들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은 작가 자신이 <야야툰>에 그리는 성은 <비빔툰>에서 그리고 있는 일상의 연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만화를 보는 우리 부부 역시 ‘일상의 미학’의 범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30대 부부의 침실을 엿보고 나서는 나는 훨씬 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부부가 함께 하는 재미있는 ‘공부하던 성’에서 ‘놀이로서의 성’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폴 스티븐스는 <영혼의 친구 부부>에서 ‘성’을 ‘부부놀이’라고 표현 했나보다.

JP
익살녀인 당신이 진지남인 내게 그 책을 들이밀던 날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요? 아니 돈 주고 이런 책을 사오다니... 글쎄, 남의 부부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거,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어느새 손은 슬쩍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소리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배꼽 움켜쥐고 눈물도 닦으면서 낄낄거리며 책을 읽었던 게 생각나요. 공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심지어 놀이와 성도 늘 진지하고 의미 있게 하려고만 드는 내게 당신과 당신이 권한 <야야툰>은 오늘 여기서 일상을 즐기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군요. 비록 집에 TV는 없지만 TV보다 재밌는 당신이 있어서 난 정말 일상이 즐거워요.



성찬예배와 성 : <영혼의 친구 부부>

JP
허무개그 하나 :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시던 전도사님과 선배누님이 결혼했다.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겼던 두 분이 폭탄선언을 한 후 일사천리로 결혼식이 거행됐다. 축복 속에 결혼식을 마친 두 분은 청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이제 두 분은 청년들 앞에 앉아 청문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핵심질문을 누군가 터트린다. “신혼 첫날 밤 얘기해 주세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전도사님의 입이 열린다. “손잡고 기도하고 그냥 잤어” “뜨아~” “그럼, 둘째 날 밤 얘기해 주세요!” “성?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도 재미없더군. 결혼하면 다 알게 돼. 자, 오늘의 본문은...” “에에~”
대한민국의 모든 전도사님들이 모두 이럴 리야 없겠지만 성을 너무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첫 날 밤을 손만 잡고 기도만 한 후 그냥 잠드는 부부도 있다고 들었다. 아님 아예 신혼여행을 기도원으로 가서 철야기도 하면서 첫날밤을 보냈다든지...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그 이후로도 성을 건강하게 여기지 못했다는 증거는 내게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 일화들을 여기에서 다 밝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어째서 나는 성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을까? 워낙 스스로 성을 금기시 여기려는 태도가 우선 문제였겠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학교에서건 교회에서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성은 부부가 침실에서 서로 지속적인 실습을 통해 자연 섭리로 알게 되는 것일까? 혹 목사님들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가르침의 목록에서 성을 생략하는 것인가?
결혼 후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자주 골몰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결혼생활도 더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화두의 해결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과 상식에만 머물 뿐 오래 묵혀 있다가 이제야 천방지축 나대는 이 놈의 성에 대해 혼자만의 해석 가지고는 도무지 그 신비를 풀어낼 재간이 없었다. 그 누구한테 물어봐야 식상한 대답만 나올 뿐이지 정말 내겐 새로운 해석이 절실히 필요했다.
최근 폴 스티븐스의 <영혼의 친구 부부>를 읽던 중 ‘성과 한 몸’의 신비로운 함수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는 장 바니에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부 성관계’를 감.히. ‘성찬 예배’에 비유하려 했는데, 이게 무지 흥미롭고 새로운 자극이 됐던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에서 하는 성만찬의 본연의 위치는 원래 가정이었고 집례자는 부부였다 한다. 부부는 각각 서로에게 지은 죄, 예컨대 마음에 쌓아두었던 분노와 불신들, 부당한 권리 행사와 배우자의 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지 않은 불성실 등을 서로서로 고백하고 용납한다. 그렇게 진실한 대화가 오간 후에 거행하는 헌신과 애정의 일치로서의 성관계는 고백과 용서를 축하하는 증표요 잔치이다. 그 시간은 두 사람이 한 몸이요 한 마음이 될 뿐 아니라 한 영이 되는 시간이니 그것이 곧 성찬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부부의 침실이 이와 같다면 “ 이것은 당신을 위한 내 몸입니다” 라고 말하며 기꺼이 드릴 수 있고, 또 그 연합 안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터이니 예배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폴 스티븐스의 글을 읽는 순간 나는 회한과 감동으로 가슴과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간 용납과 받아들임, 고백과 기댐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채, 곧장 욕구만을 채우려고 했던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확인시켜준 폴 스티븐스 목사님에 대한 감사, 그리고 비록 꼬여있고 틀어진 채 음지에서만 활동하던 성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받아주실 수 있는 길, 그것도 예배로 받아주실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 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부부 성관계 후 둘이 꼬옥 안고 가지런히 꿇고 앉아 기도했던 것이 생각난다. 돌이켜 보니 그 날은 폴 스티븐스의 말처럼 우린 ‘한 몸’이 되어 성찬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선물로 지금의 배우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식 날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듯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부부되길 원합니다. 아멘”

SS
동감이예요~ <영혼의 친구 부부>는 우리에게 ‘몸과 영혼이 하나됨’을 더 진지하고 즐겁게 추구하도록 격려하고 꿈을 준 것 같아요. 근데, 여보! 나 사실 처음에 당신이 기도하자고 했을 때 엄청 황당했어요. 평소에 기도 별로 안 하는 사람이 이런 순간에 웬 기도? 그러니까 그게 성찬예배를 끝내는 기도였군요?

====================================================

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권명달 역, 보이스사
홍승우 , <야야툰>, 문학과 지성사
폴 스티븐스, <영혼의 친구 부부>, IVP
 
보물 Level 1 자유로움을 경험하다

MBTI와의 첫 만남 이후, 짧지 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서 흔히 말하는 나의 유형(true type)을 찾았다. 자타가 함께 인정하는 나의 유형을 찾은 이후에, 말하고 행동하는데 전에 알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았을 때, 내 마음에 충실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이 나를 한 없이 자유롭게 한다. 부모님이나 주일학교 교육의 요구에 의해 ‘나’인줄만 알고 살았던 버거움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MBTI와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보물 Level 2 장점을 은혜로 알게 되다

나는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한다. 고로 나처럼 공동체에 필요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챙긴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달리 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해주고 칭찬을 잘 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나는 융통성이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수용을 잘 해준다. 고로 나는 인격이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했다. F인 나로서는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는 것. SF인 나로서는 도대체 정보라는 것은 사람들에 관한 사소한 것들 외에는 잘 입력되지도 오래 기억되지도 않는다는 것. P인 나로서는 상황상황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공동체에서 분위기를 좀 띄울 줄 아는 것은 ‘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ESFP인 내 자신에 충실하며 나 자신이 재미있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것.
점차로 이런 것들이 깨달아져 갔다. 예전에 나 스스로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유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니, 내 장점 안에서 ‘나의 공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내 본성 안에 숨기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다. 이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제껏 내 것이라고 생각한 내 인격의 부분들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었음을 MBTI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보물 Level 3 나도 모르던 속마음을 알게 되다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은(T) 무조건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I) 대부분 내숭떠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고 늘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N)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얘기할 맛이 안 난다. 시간 좀 안 지켰다고 열 받고 화내는 사람들은(J) 인격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사람들이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 깊숙한 곳에 있었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들이었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듯,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 대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렇듯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밀어내고 있었다. MBTI는 내가 형제 자매들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고 정죄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였다.

보물 Level 4 죄를 깨닫게 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주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의 시간으로 만들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서 관계를 찾아 가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이라는 피드백이 없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누군가의 칭찬에 의해서만 일을 하고 움직이기. 진지하고 지루한 얘기들은 무조건 듣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기. 충동적으로 시간을 쓰고 충동적으로 구매하며 규모 없는 삶을 살기.

결국 MBTI는 ‘나’라는 독특한 존재가 독특하게 범하는 죄를 깨닫게 하였다. 내 영성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시 바로 내 성격유형 안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깊이 회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영성의 길을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아군과 적군을 모두 알았으니 그 싸움이 손에 잡힌 것이 아니겠는가?

보물 Level 5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이렇게 MBTI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장점이 있는 그 지점에 바로 내 약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론 좌절스럽다. 저 사람과 내가 이렇게도 다르게 생겨 먹었는데 어쩔 것인가? 나와 정반대의 유형을 가진 저 사람과 대체 어느 지점에서 만나서 대화와 삶의 일치점을 찾을 것인가?

그 때 들어야 하는 한 마디가 있었다.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위해서 기질을 한 번 두 번 뛰어넘던 우리들은 주님과 더불어 MBTI 검사결과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분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는 그 날에 우리 모두의 MBTI유형은 EI-SN-TF-JP!! 이것이 되지 않을까?

<MBTI와 공동체 세우기> 마지막 글
QTzine 5월호
===========
여기서 천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NF기질

청년부 회장 L씨는 청년부의 모임과 뒤풀이가 어때도 상관없다. 때론 모임이 좀 학술적이어도 좋고, 때론 놀자판이 되어도 좋다. 출석률이 저조한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고 임원들이 좀 열심을 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모임이 쓰잘 데 없이 되는 것, 즉 모임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 L 회장은 때로 진지하게 말씀에 대해서 나눌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속이 없는 사람처럼 푼수 짓을 해서 사람들을 웃길 수도 있지만 푼수가 되는 그 순간에도 L회장의 목적은 하나다.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제껏 소개한 세 가지 유형(NT, SP, SJ)에 비해서 NF 유형에 대한 설명은 좀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NF들은 이상적인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NF들의 목적은 너무 이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조차도 그 목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세 유형들이 NF와의 대화에서 보다 더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한 SP가 NF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한 마디가 '천국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반면 좀 통하는 NF들끼리의 대화는 '쩍하면 짝이고' '어하면 아'하고 알아듣는다니 NF들은 천국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NF들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아실현 내지는 자아통합이다. 이것은 독특한 자신만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검증은 아마도 따뜻한 관계들 속에서 오는 피드백을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NF들에게는 남달리 정서적 유대 내지는 정서적 관계, NF들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말한다면 '의미 있는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NF들은 공동체 안의 따뜻한 햇살이다. 정서적인 교류에 대한 남다른 욕구와 감각이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보살피는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NF일 것이다. SJ들이 끝없는 책임감으로 공동체를 지켜나간다면 NF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무한히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을 통째로 쏟아 부을 것이다. 흔히 좀 다루기(?) 어려워서 대부분의 조장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폭탄 조원이 있다하자. 이 폭탄을 어느 NF 조장이 맘먹고 찍었다 하자. 아마도 그러면 다른 어떤 조장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 폭탄을 무장해제 시키고 공동체 안으로 정착시켜 놓고야 말 것이다.

NF들에게는 '의미'가 중요한데 그 '의미'는 NT들의 것처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의미'를 추론하는 과정과 결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진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NF들이 유형의 특성상 조목조목 따져서 잘 설명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다. NF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들이 다른 유형에게는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리더가 NF라면 자신의 의미법칙에 충실한 결정에 아랫사람들은 '일관성이 없는 결정'이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혹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쳐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진실한 자아의 통합, 진실한 관계'를 삶의 목적으로 하는 NF가 '진실하지 않다'는 평은 최악의 평이 아니겠는가? NT들에게 '무능하다'라는 평은 가급적 삼가 해야 하는 것처럼 NF에게 '진실하지 않다'라는 평도 극도로 피해야 할 말이다.

NF들이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용어들을 좀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 없이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힘겨움이 남다를 것이다. NF들에게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은 너무도 가볍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이상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될 때 더욱 빛을 발하고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QTzine 4월호 <MBTI와 공동체 세우기
 

갑자기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져 사람들이 집을 향해 걷는 걸음이 빨라지는 수요일 저녁. 이런 날 잡혀있는 기도회 모임이 그나마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SJ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한 번 맡은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SJ들이다.
SJ들이 있어서 연말이면 개근상 받을 사람들이 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의 모임은 늘 최소한의 인원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SP들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 시간은 빼 먹지 않고 시간을 채우게 될 것이며, 공작에 실패한 SP들은
결국 혼자 '땡땡이'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

SJ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를 찾으라 하면 '의무'이다. 이들의 남다른 욕구는 어딘가에 '소속' 되는 것, 그리고 그 소속된 곳에서 '의무'를 가지며 그 '의무'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충동적이기를 원하는 SP들과는 상반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SP들이 일을 해도 노는 것처럼 보인다면 SJ들은 놀아도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SJ들의 관심은 자신이 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기 원하기 때문에 전통이 지켜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련회나 특별행사를 계획하는 임원 모인에서 SJ들은 '작년에도 이렇게 했으니까, 늘 이렇게 해 왔으니까' 하면서 이제껏의 방식을 유지해 나가기를 원할 것이다. SJ들이 그렇게도 예전의 방식, 전통을 따르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NT들이 자신의 유능감을 확인하는데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SJ들은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 있고 그것이 흔들림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전함을 느낀다. 잦은 변화는 흔들림 없는 소속감을 그야말로 흔들어 놓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보배라 불린다. 결석이나 지각이 별로 없이 늘 자리를 지켜주는 SJ 구성원들이 많은 소그룹의 리더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는가!게다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SJ들은 상사나 웃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또 보호자적 기질인 SJ들은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공동체를 섬기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소그룹의 리더들이 역시 또 욕심 부릴 일이 아니다. 소그룹의 다수를 SJ로만 구성한다면 그 그룹은 때로 조금은 지루한 모임이 될 지도 모르며, 늘 일을 하듯 모임을 하고 일을 하듯 모임의 뒷풀이를 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SJ 리더라면 자신이 소그룹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다분히 일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조원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SJ의 수준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통제의 수위는 대부분의 SP들과 어떤 NT 또는 NF들에게는 보다 심한 압박(?)으로 느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SJ들에게 좋은 격려는 '일을 잘했다', 즉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수련회를 준비하고 마치고 뒤처리까지 확실하게 해내는 SJ총무를 그냥 돌려보내지 말 것이다. 그가 꼼꼼히 준비하고 진행한 수련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잘 치러졌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SJ자신들은 열심히 근면하게 노력하는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실 틈을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혹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 조차 스스로 밀어내는 것은 아닌지 자주 돌아보면 어떨까? 하나님께서는 SJ들이 맡겨진 많은 일들을 완벽하완벽하게 끝까지 책임지기 전에 이.미. SJ들을 보배롭고 가치있게 여기신다는 사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3월호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만난 두 사람 이야기. 레크레이션이면 레크레이션, 천로역정이면 천로역정 도대체 P선생이 맡는 프로그램은 대박이 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은근히 P선생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H선생. 슬쩍 P선생의 교사수첩을 들여다보았다. 프로그램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애들이 그렇게 재밌어서 난리를 친단 말인가?
'에게게!'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P선생이 들고 있던 다이어리에는
고작 게임 제목 몇 개만 달랑 적혀있다. 그렇다고 따로 자료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레크레이션을 맡을 때마다 온갖 책이란 책은 다 뒤지고 인터넷을 구석구석 뒤져서 깨알 같이 적는 준비를 하고도 별로 성공해
본 적이 없는 H선생은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자신보다 늘 불성실해 보이는 저 P선생의 성공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는 H선생…

연습 없이 실전에 강한 사람들,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연습 없이 순간의 작곡으로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SP이다. 이들에게는 순간의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다. NT들이 '능력'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다면 SP들은 '행동' 즉, '순간의 행동'에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이다. 행동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때문에 SP들은 본질적으로 충동적이다. 한 번씩 놀아줘야 삶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이들은 휴가를 미리 내서 계획을 세우고 노는 것은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한 어느 날 갑자기 오후 휴가를 내고는 마음에 떠오르는 일을 하는 것, 이런 류의 놀기가 최고의 휴식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양념이다. 모임이 지루해질 즈음에 재치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는 사람들이다. 소그룹 공동체에 SP, 특히 외향형의 SP가 한두 명 있다면 모임이 진행되는 내내 간간이 폭소가 터지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그룹의 리더들이 욕심을 부리다 보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소그룹의 다수를 SP로 구성한다면 매주 성경공부가 제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미없는 지루한 시간을 오래 버티기'에 약한 SP들이 무슨 이유를 끌어다 붙이든 결국 성경공부를 대충하고 놀러가는 분위기로 만들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SP 초신자를 수련회에 데려갔다면 너무 빡세게 굴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두는 것, 지나친 통제를 삼가는 것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혹 당신이 SP 리더라면 '내 성경공부 인도가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조원들이 지루해하면 어떡하지?'에 대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의 조원들 중에 당신만큼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NT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대해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격려가 된다면, SP들에게는 이들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이 좋은 격려가 될 수 있다.

어느 유형이든 기질이든 장점이 있는 곳에 약점이 있듯이 '기쁨과 재미'를 추구하는 SP들 역시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양념으로서의 역할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양념이 지나치면 음식 맛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행동, 일상, 재미, 충동'에 매료되어 영성의 길에 균형을 잃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