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기도 시간, 마음은 자꾸 저 길 위에 있었다. 8시에 나가 저 길을 걷고 있을까? 전날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길이다. 다섯 시간 정도 함께 있었을까? 다섯 시간이 번개 같이 지나가니, 저 오솔길을 걸었던 시간은 또 얼마나 짧은가? 그런데도 마음은 자꾸 저 길 위를 걷는다. 오후에 친구가 산책을 나왔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사진을 보자마자 가슴이 뜨끈했는데, 어제 함께 걸을 때 우리를 웃겨주던 두 마리 새소리, 그리고 우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메시지와 함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셋이 한 마음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흘리지는 않았다고 친구가 말했고. 나도 그렇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이다. 내내.

 

단톡에는 만남 이후 식사 메뉴 사진이 속속 올라오는데. 시골 아지매, 도시 아지매 식단이 바뀌었다고. 도시 아지매 둘은 끼니마다 꿀 같은 묵은지에 밥 먹느라 과식이고. 제천 아지매는 보정동 카페골목 브런치 부럽지 않은 연어 샌드위치다. 바뀐 식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토요일 점심, 나는 호박잎을 쪄서 강된장에 먹었다. "그려, 이 맛이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애들은 삼겹살과 함께 주었다. 배트맨(얼마만인가, 배트맨. 맛없는 건 넣자마자 뱉어내는 배트맨) 현승이가 "와, 호박잎 맛있다."라고! 바리바리 싸 온 것이 호박잎만이 아니다.

호박잎
상추
겨자채
청경채
비타민
부추
토마토
방울토마토
애호박
늙은 호박
(vvip에게만 주는)파
(향이 살아있는)풋 아삭이고추
(3년 된) 도라지
대추
묵은지
사과

교회에 붙어 있는 사택 텃밭에 남편 목사님이 키운 것들이다. 농사(지어 나눠주는?) 재미에 빠지신 목사님이 뜯어주고 퍼주고 하셨다. 목사님이 재차 확인해주신 바, 이 농작물 100% 목사님 수고임! 친구는 이 과정에 1도 개입하지 않았고,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넌 원래 좀 도회적인 여자니까! ㅎㅎ) 친밀한 사람들의 뇌는 서로 연결되고 자연스레 교류한다고 한다.(이건 남편이 짐 와일더 책에서 읽고 했던 말인데, 내 말처럼 한다고 뭐라 하겠지만, 친밀한 뇌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한 번 만나고 와서 세 집의 식탁이 바뀌어 버린 건, 뇌가 연결되고 삶이 연결되어 교차한다는 것의 증거다. 아, 그러면 농사지은 목사님의 뇌와 친구의 뇌도 교차하고 있으니 세 집의 색다른 식탁은 그냥 우리 모두의 것인 걸로!

셋이 참 다른데,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른가 싶다. 50여 년 인생, 각자 다르게 고군분투하며 산다 싶은데, 그 고군분투가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를까 싶기도. 이 긴 세월 서로의 친구로 곁에 있어주는 것, 연결되고 교류하는 뇌라서 가능한 일이라면 우리는 갈수록 비슷해져 가는 것 아닐까. 말이 쉽지, 30여 년 친구인데.

목사관 화단에 분꽃이 여기저기 많이 피어 있다. 친구가 분꽃이 좋단다. 분꽃은 내게 귀걸이 꽃이다. 꽃을 따서 씨방 쪽과 꽃을 살짝 떼어 쭉 빼고, 귀에 꽂으면 달랑달랑 귀걸이가 된다. 어릴 적에 저러고 참 많이 놀았는데... 얘네들이 이걸 모른다. 찐 시골 출신은 나다! 옆에서 도라지 캐서 흙 털고 있을 때 혼자 귀걸이 놀이를 했다. 나는 꼭 내려갈 것이다. 산과 논이 있는 동네로 가서 살려고. 지금은 전셋값 압박에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밀려나고 있지만, 언젠가 주도적으로 아래로 가려고! '은퇴'라는 기회가 우리를 좀 바꿔주면 좋겠다. 도회적인 선은 이제 좀 도시로 나오고, 찐 시골 아이인 나는 내려가고. 도회적인지 시골적인지 잘 모르겠는 정, 너는 그냥 큰집 지어서 언니들 한 집에 살 수 있게 해 주든지. ㅎㅎ 많은 날 홀로 외롭게, 가끔 이렇듯 함께 걸으며 가는 인생길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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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가 있다. 나 포함 셋이 1년에 한두 번 만난다. 친구 J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을 하는 덕에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 아프리카에 있어서 자주 본다. 미국이나 캐나다가 아니라 아프리카니까. 한 번 들어올 때면 꼭 봐야 할 것 같은 이심전심이다. 실은 아프리카가 아니어도 만남을 도모하는 친구는 꼭 J였다. 어릴 적 친구들 정보도 죄다 꿰고 있다. 여전히 연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친구인데 말이다. 잊지 않고 잇고 마는 역할은 늘 J의 몫이다. 사람을 향한 남다른 감각, 따스한 마음이 탁월한 친구이다. 고마운 친구다.

친구 W는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싸개에 싸여서 만났을 것이다. 엄마 등에 업혀서 같은 예배를 드렸을 테고. 아버지 목회하던 교회의 젊은 집사님의 아들이었다. 대여섯 살 즈음에는 장로님 딸 의정이까지 해서 어린 삼총사였다. W의 부모님이 의상실을 하셨는데 거기서 셋이 놀던 기억이 아련하다. 마네킹 보관해둔 곳에서 숨바꼭질하며 무서워하며 동시에 깔깔거렸던 기억들. W의 아버지는 빼어난 테너 목소리셨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잘하셨고, 이번에 만나고 문득 떠올랐는데 우리 아버지 장례 예배 때 특별 찬송을 부르셨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영원히 쉬일 곳 아주 없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찬송을 부르고 예배당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으셨던 모습이 인생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셋이 친구가 된 건 고등학교 때이다. 서울의 교회에서 만났다. 한 교회를 다니게 된 건 엄마와 W 부모님의 친분이다. J는 고등학교 때 전도되어 온 친구이고. 대학에 가서 함께 중창단을 만들고 죽이 맞아 같이 돌아다녔다. J가 군대 가기 며칠 전, 모란시장의 겨울이 생각난다. J가 모란시장의 순대국밥이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난생처음 모란시장이란 곳에 갔고, 난생처음 순대국밥도 먹어봤다. 눈발도 날렸던 것 같다. 하나 씩 떠올려보니 강렬한 감정은 없지만 함께 한 소소한 것들이 잊히지 않는 이미지들로 남아 있다. 이 소소함이 어쩐지 새롭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라서 참 좋구나!

만나도 별 것 없다. 르완다에서 가져온 커피를 건네고, 또 "이거 원두야? 어떻게 먹어?" 매번 물었던 걸 또 묻고. 그러면 나와 J가 동시에 "커터기에 갈아도 돼"라고 말하고. "아, 사무실에 기계 있어." 비슷한 얘기를 다시 하는 것 같다. 부모님 안부를 묻고, 그 사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다음에도 곱창을 먹자, 다른 맛집을 찾자, 하고. 바람 좋은 야외 카페에 앉아 오가는 그 맹맹한 대화가 편하고 좋았다. 친구라서 참 좋구나!

지하철 역까지 가는 길에 내가 물었다. "너희는 나이 드는 게 어때?" 마주 앉아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나이를 많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얼굴이 내 얼굴 아닌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나는 어떠냐고 내게 되물어 와서 "나는 나이 드는 게 참 좋아"라고 했다. "너는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럴 거야." 하더니 W는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젊을 때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 음악을 하고 싶냐 물었다. 아버지에게서 온 것일 텐데 W도 음악에 관한 탁월성을 타고난 친구이다. 대학가요제 나갈 준비를 했었는데, 하지 못했던 것 아쉽다고 했다. 대학 졸업하고 입사하여 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이다. 약한 몸으로 태어난 아이를 묵묵히 키우고 돌보는 일을 한결같이 해 온 세월이기도 하다. 친구의 한결같은 인생이, 아니 어떻게 인생이 한결같겠나. 질곡 많은 인생을 한결같이 살아온 친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60이면 은퇴니,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이후의 삶이 걱정이라고 했다. 걱정하며 준비하고 있다고. 돌아오는 길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다. 음악이든 무엇이든 젊은 시절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하고 남을 인생 후반을 살기를.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취향을 존중하는 시간을 살 수 있기를. 그런 기도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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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편도 전도 잡채도 없는 추석을 보냈다.

어머님 모시고 와 점심식사하고 율동공원 한 바퀴 돌았다. 

걷는데 힘들단 소리도 안 하고, 

할머니 어설픈 농담에 맞장구 쳐드리고,

와하하하 웃어 드리는 아이들이 참 예뻤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많이 드시지도 못하고, 소화력은 약하신지라

샤브샤브 하나 딱 준비했다.

야채 많이 드시고, 국물 뜨뜻한 것 드시면 딱이다.

우리 식구는 남은 국물에 칼국수, 또 남은 국물에 죽까지 가야 딱이고.

뜨뜻한 국물에 녹으셨는지, 분위기에 취하셨는지

허밍으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를 부르신다.

 

그렇게 노래 자아에 불이 들어오셔서는,

공원까지 가는 차 안에서 무반주로 몇 곡을 뽑으셨다.

아, 그런데!

음정이 좋으심, 아주 좋으심. 

같이 노래방도 갔었고, 예배도 많이 드렸는데 처음 발견이다.

아름답다, 어머니 목소리.

 

결혼 생활 22년은 어머니와 함께 한 세월이기도 하다.

여기도 또 책 한 권인데,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닌 건 분명하다.

착한 며느리 안 하기로 선언하고 벌써 몇 년이다.

예전이 그리운 어머니는 이렇게 찌르고 저렇게 어르고 하시지만

되돌릴 수 없는 날들이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작지만 큰 발견,

어머니의 음악성이다.

남편에게도 채윤이에게도 흘러왔겠구나 싶다.

몇 년 만에 어머니와 둘이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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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회상'이라니!
'지금'의 김성호라니!
지금 김성호가 부르는 '회상'이라니!


내 첫 차 티코의 사물함엔 보물처럼, 유물처럼 카세트 테이프가 한가득이었다. 김성호의 앨범은 베스트 탑 5 안에 들었다. 그 차, 사물함의 카세트 테이프에 젊은 날의 꿈과 사랑과 고민과 외로움이 다 담겨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거기 담겼던 곡들을 이제 다시 들어도 살아오는 것들이 있다.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 그 시절의 장소, 시간, 사람, 감정이 그대로 떠오른다. 티코가 가고, 여러 차들이 가고, 테이프와 CD가 지나갔다. 육아와 시가 살이 시간 동안 서서히 잊히기도 하였다. 벅스를 알고부터 잃어버린 음악이 살아 돌아왔다. 벅스에 없으면 유튜브를 뒤졌고, 웬만한 곡을 다 찾아졌다. 그런 방법으로 아무리 뒤져도 전곡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쉬운 김성호였다. 아쉬움에 사람 검색으로 뒤져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좋은, 아껴서 듣는 곡이다. 그냥 회상이 아니라 '김성호의 회상'이라니. 김성호의 회상을 회상하는 정신실의 회상이다.

남편이 유투브 영상을 하나 보내왔는데, 지금의 김성호가 부르는 '김성호의 회상'이었다. 찾아보니 출연한 방송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그대로'라 할 수는 없지만... 참 좋았다. 아니 좋았단 말 대신 고맙다 하고 싶다. 무엇보다 얼굴이 참 좋았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는 "나이 마흔이면 누구나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는데. 단지 얼굴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같은 친절한 표정이라도,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라도 내면의 얼굴과 괴리가 크지 않아야 편안하다. 드러나는 표정이 어떻든 머물러 바라보고 싶은 얼굴은 그런 얼굴이다. 김성호의 얼굴이 그랬다. 목소리도 물론 아직(?) 팽팽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월과는 조금 달랐다. 가만 서서 노래하는 걸 여러 번 돌려보니, 느슨해진 성대의 긴장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팔로우잉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페친 한 분이 김성호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짧은 글이 생각과 감성을 함께 자극했다. 공감하며 읽다보니 김성호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기독교인인 것 같은데, 그래서 가스펠도 꽤 작곡했다. 신앙이 뜨거워져 가스펠을 만들었어도 가사가 적나라한 게토 언어가 아니었음이 좋았었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시인과 촌장 노래의 이런 가사가 있다.

당신의 눈썹처럼 여윈 초승달 숲 사이로 지고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밑둥아리애 붙어서 밤새워 새벽

시인이 믿음 뜨거워져 집사님으로 많이 불리면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다. "GNP가 오르고 당신의 아이들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이 거리를 달려도... 당신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허무할 거예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아쉽고 아까웠다. 저 '새벽' 노래를 함께 좋아하던 친구에게 뭔가 부끄러웠다.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러워졌었다. 전도지에 인쇄된 글귀처럼 보이는 가사를 보면서 좋아하던 가수를 잃을 상실감에 슬펐던 기억. 김성호가 좋았던 건, (몇 곡 알지도 못하지만) 가스펠도 시처럼 다가와서였다.

이 모든 것, 내 취향에 불과한 것을 알지만 소중히 여기고 싶다. 나를 존중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 사소한 취향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김성호의 회상을 좋아하는 나를 새롭게 회상해보는 중이다. 방송을 다 보고나니, 내 사소한 취향들이 멋지게 느껴진다. 그렇게 느끼게 해준 김성호 님에게 고맙다. 한때 좋아하고, 존경했던 내 취향들이 부끄럽게 되는 일이, 심지어 혐오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 편히 이런 말 할 나이는 아니다만. 누군가의 취향의 대상이 되어 실망시킬 일이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앉아 있으니) 여하튼 마흔이 훨씬 넘은 김성호 님의 얼굴, 목소리가 좋아서 고마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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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던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초저녁,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걷는 길. 걷는 건 참 좋은 일이라, 아파트 큰 나무 사이를 걸으니 절로 마음의 생기가 차올랐다. 놀이터 옆을 지나는데, 지나는데... 아하, 말랑말랑한 생명체들 귀여운 만행의 현장 발견. 슬슬 차오르던 생기의 포텐이 터짐! 오동통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르고 만지고 주무르고 했을, 재잘거렸을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 같은 잔여물이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게 아름다운 작품인가. 발을 뗄 수 없었다.

어느 큰 교회 강의에 갔다. 소개하신 목사님의 사모님과 아이들이 본당 저 끝에 앉았다. 엄마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더니 강의 마치고 나오는데 이 그림카드를 건네주었다. 사모님 "한테" 쓴 것이고. 의상이 포인트다. 내 여름 강의복이라 할 수 있는 검정 원피스에 흰 재킷을 그대로 살렸고. 내 트레이드마크인 '열정'을 그대로 담아냈다. 어찌나 열정이 넘치는지, 강의하는데 겨드랑이에서 하트가 뿜어져 나온다. '사모' '느낌표' '감사'는 쫌 중요하니 별표. "드림"의 디귿을 뒤집어써주는 미적 감각! 발을 뗄 수 없었다. 다시 돌이켜 이 아름다운 존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오후에 있었던 지도자 과정에서 들은 아픈 이야기로 마음에 고인 슬픔이, 밤에 유튜브 강의라 1500명 본당에 청중 몇 명 앉아 계신 어려운 환경에서 강의하느라 경직된 몸과 마음이, 늦은 밤 빗길 운전하느라 쌓인 피로가 한 방에 풀렸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게 귀엽고 아름다운 작품인가.

참 아름다우신 분들, 참 고마우신 분들.
아이들 여러분들.
아이들이 있는 세상,
아이들이 있어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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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을 등지고 앉은 내게 채윤이가 말했다. "엄마, 해가 나오고 있는 거 알아?" 채윤이는 주방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환해진다. 해가 질 시간인데 환해진다. "밥 먹고 한 바퀴 돌고 올까?" "그래" 잠깐 얼굴을 보여준 해가 이내 지고 어두워졌다. 늦은 밤 산책을 나갔다.

일명 '남의 아파트 돌아다니기'로 밤 산책 콘셉트를 정했다. 이 동네, 오래된 여러 단지가 모여 있어서 좋은 점이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많고, 나무 사이사이 새가 많고, 그 나무 아래를 걷는 즐거움이다. 온종일 내린 비에 젖은 큰 나무 사이를 걷는다. 개코 채윤이가 그런다. "아, 이 냄새! 수련회에서 집회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냄새. 이 냄새 맡으며 숙소로 가서 치킨 먹을 시간이야! " 나도 아는 그 냄새를 채윤이가 느낀다니! "글치, 글치. 수련회 중에 하루는 꼭 비가 오지. 비가 그친 다음에 나는 숲의 냄새!" 남의 아파트 캄캄한 둘레길을 스마트폰 조명을 의지해서 걷는데 "어, 이건 천로역정 마지막 코스 느낌인데!" 한다.

수련회의 추억을 걷다 넓은 길로 나왔는데, "엄마, 나 쫑알쫑알거려도 돼?" 하더니 대답 필요없는 말을 쏟아낸다. 친구 이야기,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저렇게 어렵다는 이야기. 문득 내 친구가 떠오른다. 요즘 자꾸 꿈에 등장하는 친구다. 중 3때 만나서 결혼 전까지 심하게 붙어 다녔던 친구. 친구는 엄마가 없고 나는 아버지가 없었다. 나는 그것 하나로 이 친구가 좋았는데, 돌아보면 정말 좋은 친구를 얻은 것이었다. 요즘 꿈에 자꾸 나와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아니겠구나, 싶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가만히 들어주었고, 머리가 무척 좋았고(천재일지도 모른다. 한때 서로를 천재라고 생각했고,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KFC에서 치킨을 먹다 운 적도 있었네.), 시, 음악, 소설...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나와 치명적으로 다른 것이 자기 과시를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십 대 중반부터 20대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사람이다. 수련회 가서 뜨거워져 돌아와서도 이 친구와 후기를 나눴다. 교회 안에서 어려운 얘기도 죄다 이 친구에게 쏟아냈다. 교회 안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래서 얻은 유익이 컸겠다. 말이 많지 않은 친구지만, 말의 영향력이 컸다. 둘만의 표현법이 있었고, 둘만의 언어 세계가 있었다. 친구와 끝없는 대화, 주고받는 편지가 준 가장 큰 선물은 교회 죽순이였던 나를 기독교 게토 언어에서 구원한 것 아닐까 싶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광화문 교보문고, 종로서적, 청계천 헌 책방에 가고. 고등학교 때 학교가 갈라졌는데 야자 끝나고 10시 반에 되어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호떡 먹고 헤어졌다. 친구가 재수하던 시절에도 재수학원 앞 분식점에서, 음악다방에서 꼬박꼬박 만나 놀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가 달랐는데 시간표를 같이 짰다. 교양과목 시간표를 서로 잘 짜서 걔네 학교 우리 학교 오가며 같이 강의를 들었다. 직장 다닐 때도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났다. 내가 기타 치고 노래하면 그걸 가만히 앉아서 들어주었다. 같이 옷을 사서 바꿔 입기도 했다. 같이 하지 않은 게 없었던 것 같다. 싸울 법도 한데, 크고 작은 갈등의 기억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이 없는 것은 정말 특별한 그 친구의 성품 탓이다.

친구네 집에 자주 가서 자곤 했는데.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친구가 알려주길 그 아주머니는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나이가 한참 많았는데... 40 정도 되었나? 멋지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40에 편지를 주고받자! 그런 말 했었는데... 40이면 많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그 40보다 한참 지난 나이가 되었다. 친구가 왜 자꾸 꿈에 나오는지 알 듯하다.

산책 길 끝에 종일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넝쿨 장미를 만났다. 쫑알쫑알 떠드는 채윤이의 친구들 같다고 느껴졌다. 찬란하다. 제 딴에는 구질구질하다고 느끼겠지만 20대 찬란한 날들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친구들 이야기. 나의 20대도 찬란했었지. 그 친구가 있어서 특별히 찬란했다는 것이 문득 깨달아진다.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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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산타 할아버지 루돌프 할머니가 되어 교회 아기들을 찾았다. 깜짝 방문이었다. 성탄절 이브 계획이었는데 이사로 정신이 없는 데다 '5인 이하 모임 금지' 지침에 주춤했다. 교회 성탄예배를 영상으로 드리는데 아가들이 등장했다. 영상으로 짧게 만나니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고, 뒤늦은 성탄 선물을 전하기로 했다. 실은 무엇보다 질투심의 발로! 영상 예배 드리면서 갑자기 남편이 아기들에게 스타가 되었다.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 녀석이 "목사님 보고싶다"라고 하질 않나, 자기 아빠가 양복을 입고 나서면 "아빠 멋있다, 목사님 같아."라고 한다니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러다 사모님은 잊히고 말겠네, 위기감이 드는 것. 아가들 꼭 닮은 케이크를 찾아 주문하고, 한 명 한 명에게 카드를 썼다. 한 카드에 남편과 번갈아 한 줄씩 써서 완성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면 이렇게 신이 날까. 

 

예고 없이 들이닥쳐 깜짝 놀라게 하는 맛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주소만 들고 찾아간 집이라, 제대로 찾은 건가, 현관 앞에서 초인종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긴장하며 눌렀는데 안에서 들리는 소리 "누구세요?.... 어머, 목사님이야!" 우당탕탕탕. 엄마 아빠 어른들은 놀라고 당황하고 "아니, 웬일이세요.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 하는데 아가들은 어안이 벙벙. 목욕하러 들어갔다 얼른 내복 한 벌 다시 빼입고 현관으로 달려나온 친구도 있다. ㅎㅎ 사모님 손에 든 케이크에 눈이 간다. 자꾸 눈이 간다. 백일이 안 된 아기와 엄마 뱃속에서 태명으로 존재하는 아기까지 만나고 11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성탄절은 며칠 지났지만 새벽송을 돈 것 같다. 집집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찍고 돌아다닌 터라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남편 말마따나 나는 아기들만 만나면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간다. 현관에서 짧게 만나고 나오는데 심장이 콩콩 뛴다. 엔돌핀 주사를 한 대 맞고 나오는 느낌이랄까. 아이들은 그렇다. 그냥 생명의 에너지를 흘린다. 20여 년 아이들 음악치료를 했지만, 돌아보면 내가 치유되고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오래 함께 한 시간 덕에 사람들이 치유되고 성장하여 온전해질 때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아이의 모습니다. 영성치유에서는 wonderful child, 신성한 내면 아이라고 한다. 장애 비장애 할 것 없이 아이들은 그냥 생명과 신성의 존재이다. 한 살 두 살 나이 먹고 자라 가며, 지구별에서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흐릿해져 갈 뿐이다. 나도, 연구소를 찾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런 생명 덩어리였다. 그것이 치유 가능성이다. 생명이고 신비인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따스한 돌봄을 박탈당하는 세상, 얼마나 아픈가. 아기들은 정말 내게 기쁨이고, 가능성이고 아픔이다. 곁에 이렇게 귀여운 아기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명의 신비를, 세상에 대한 책무감을 일깨우니 말이다. 하룻 저녁 이벤트로 많이 행복했다. 행복한 만큼 기도한다. 우리 아가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오시되 서른 살의 성인이 아니라 아기로 오신 것. 얼마나 심장 뛰는 경이로움인가. 성탄절 찬송 중 '그 어린 주 예수'가 어릴 적부터 참 좋았다. 특히 3절은.

 

주 예수 내 곁에 가까이 계셔 그 한없는 사랑 늘 베푸시고
온 세상 아기들 다 품어주사 주 품 안에 안겨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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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고가 강하고 고집이 센 편이라(같은 말이군) 남의 말을 잘 믿거나 듣지 않는 편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긴 하지만 믿고자 하는 사람, 또는 상황은 거침없이 무한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운동이라곤 수영밖에 모르는 바보가 그나마 어렵게 친해진 수영도 연을 끊은 지 몇 년이 되어 남의 말 듣고 필라테스를 하게 된 얘기다. 누가 뭘 하라고 해서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이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말하면 그냥 무조건 들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남편 김종필 류의 사람들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쉽게 추천하지 않는 사람, 강요는 더더욱 못하는 사람, 웬만해서는 두 번 이상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두 번 정도 말하거나, 한 번 하는 말인데 힘이 들어가 있다면 가급적 듣는 편이 좋다. 동의가 되지 않아도 듣는 편이다.  

 

H가 허리 통증 달랠 요량으로 수개월 전,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허리 통증이 나아졌을뿐 아니라 몸과 가까워지는 좋은 운동이라고 했다. 요통은 아니지만 일찍 오십견에 테니스 엘보 같은 갱년기 질환을 겪은 내게 "언니도 해 봐"라고 했다. 한 번 아니고 여러 번 말했다. H가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하면 그냥 이유 묻지 않고 듣는 게 좋다, 여기기 때문에 꼭 해봐야지 싶었다. 시간, 비용, 무엇보다 몸치로서 새로운 운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백 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집 근처에 생긴 대형 헬스클럽에서 오픈 행사로 저렴하게 회원 모집하는 데 힘입어 등록을 했다. "해보고 안되면 그만두기!"용으로 시험 삼아 해보기 딱 좋은 시간과 비용의 3개월 도전이었다. 

 

수영을 제대로 즐기기 전까지 내 몸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정신만 가지고 살지, 몸은 왜 데리고 살까 싶었다. 학창 시절 체육은 내 몸을 혐오하라고 주어진 시간이었다. 체육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몸, 실기 성적 안 나오는 몸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몸이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것은. 어쩐지 수영만큼은 꼭 해보고 싶어서 젊은 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역시 어려웠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뭘 해도 우습기만 한 부적절한 몸의 재확인이다. 자유형 호흡에서 막혀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다. 채윤이를 품고 임산부 수영교실을 다니며 다시 시도.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까지 진도를 빼고 출산했다. 한 생명이 들어서서 두 생명의 에너지가 된 것인지, 그저 부풀어가는 포궁의 부력 때문인지 수영이 잘 배워졌다. 그렇게 극복하고, 채윤이 낳고 현승이 낳고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 다니던 즈음부터 꾸준히 하여 수영人으로 거듭났다. 수영은 내게 영적 훈련이었다. 내 몸에 가까워지고, 조금씩 화해하며, 믿어주게 되었으니.

 

내 인생 운동은 수영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H의 간증에 힘입어 시작한 필라테스다. "뭘 해도 웃긴 몸"으로 새로운 운동을 하면 또 얼마나 웃긴 몸이 될까, 시작도 하기 전에 수치심이 올라오지만 그냥 열심히 했다. 전자동으로 "어떻게 보일까, 얼마나 웃기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럴수록 더욱 내 몸에 집중했다. 다행히 편안한 선생님을 만났다. 분명 잘 못 따라가고 있는데 기다려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갈수록 재미가 붙어 50분이 어떻게 지나갔나 싶게 끝나곤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몸인 나로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참말로 좋았다.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걱정은 저 너머로. 

 

이사가 결정되고 가장 아쉬운 것은 앞산이 아니라 모처럼 적응한 필라테스였다. 어디든 가서 다시 할 수 있겠지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끌어주는 선생님이었다. 3개월 수강권이 끝나고 이사까지 애매하게 한 달 정도가 남았다. 원래 한 달 수강권이 있지도 않지만 굳이 등록하자면 할인된 3개월 비용과 비슷하다니, 그렇게까진 할 수 없어서 마음을 접었다. 이사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니 선생님도 많이 아쉬워했다. "어, 저 이제 오전 수업 허전해서 어떻게 해요? 신실님 늦게 오시면 막 기다리는데..." 채윤이보다 몇 살쯤 더 보이는 앳된 선생님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그저 하는 말이려니 했지만, 슬픈 만큼 따뜻하기도 했고. 마지막 수업 마쳤는데 선생님이 내 팔을 잡아끌어 라커룸으로 가더니 선물 봉투 하나를 내밀어 깜짝 놀랐다. "신실님 정말 열심히 하셨는데 너무 아쉬워요. 처음부터 영상을 찍어 놓았을 걸... 했어요." 학생이 선생에게 고맙다고 선물 주는 것은 흔하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그것도 필라테스 강사가 3개월 반짝 운동하고 그만두는 학생에게 선물이라니! 실은 나도 선생님에게 줄 기프트 카드를 준비해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선생님, 실은 저도요...." 하고 내미는데 주책맞게 안구에 습기가 차올랐다. 

 

남편이 "셀카라도 하나 찍지 그랬어?" 했다. 그러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연락처도 없고,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3개월의 만남이다. 기억에만 남은 따뜻한 만남이다. 아쉬울 것은 없다. 몸에 남은 기억은 스마트폰의 사진 한 장보다 더 선명하다. 간간이 그 시간에 배운 스트레칭을 한다. 앳되고 차분한 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짧고 흐릿하여 더 선명한 만남, 따뜻한 만남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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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옴

 

 

박광혜 권사님 떠나신 지 벌써 일 년이다.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헤아려 보면 권사님과의 만남이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구나! 그러나 어쩐지 권사님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다. 운을 떼어 놓고 보니 일 년 내내 그랬던 것 같다. 3년 여의 시간, 함께 한 시간이 권사님의 70년 넘는 이 땅의 시간의 마지막 시간이었다니.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게 된다. 처음 뵈었을 때는 이렇게 빨리 이별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사님은 떠나셨지만, 그래서 생긴 텅 빈 자리로부터 새로운 권사님을 만난다. 엄마 애도일기를 쓰고 마무리하며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배웠다. 누군가에 대해 쓰는 것은 그분의 아니라 나를, 그분의 삶에 비친 나를 해석하는 것이다. 떠난 이가 남긴 존재의 빈 자리를 응시하며 보이는 것은 그분이 내게 남긴 사랑이며 가르침이다. 그것을 알기에 쓰려고 한다. 무엇이든 쓰려고 한다. 쓰고 싶다. 써서 알아내고 싶다. 내게 남기신 권사님의 흔적을. 삶과 죽음에 관한 설교 묵상이라는 부제를 단 김영봉 목사님의 책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제목과 같다.

 

추도예배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던 중, 권사님 며느님께서 "어머님이 사모님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했다. 남편이 거들면서 "맞습니다. 권사님이 저보다 제 아내를 더 좋아하셨어요."라고 했다. 나도 안다. 아니 돌아보니 확실히 알겠다. 권사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다. 내 커피를 좋아하셨고, 내가 꾸며놓은 거실을 '북카페 같다'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시며 칭찬하셨다. 아이들 키우는 것을 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 가정이 있구나! 실제로 이렇게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봤다."라고 하셨다. 교회에 처음 오던 날,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까지 어깨가 움츠러들어 내내 긴장이었다. 그날이 한참 지나고 권사님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니, 잘 모르는 학생인데 내가 뒤따라 들어가는 걸 알고는 교회 출입문을 한참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착한가 봤더니 현승이였어. 마음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에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말씀하셨다. 현승이는 이 말씀을 듣고 좋아서 콧구멍이 벌렁벌렁. "엄마, 봤지? 나 그런 사람이야." 추운 날의 따뜻한 기억이다. 

 

채윤이에게 특별히 마음을 쓰셨다. 한창 대입 실기 시험 중이었다. 1차 발표가 속속 나고 있었고. 시험을 잘보기도 하고, 못 보기도 했다. 한두 번 실수한 것으로 크게 낙심하고 있는데, 기대했던 학교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망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재수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채윤이 모르게 남편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권사님께서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으셨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권사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사모님. 우리 채윤이 꼭 합격할 거예요. 하나님이 꼭 붙여 주실 거예요!" 정말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다. 교회 처음 부임했을 때, 권사님이 사랑하는 손녀딸이 한창 입시 중이었다. 권사님이 어렸을 적부터 혼신을 다해 뒷바라지하신 손녀이고, 서울대에 합격을 했다. 손녀딸을 위해 기도하시던 절절함과 비슷하며 다른 절절함 같았다. 결국 채윤이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을 했고, 그 소식을 들으신 권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셨다. "사모님, 내가 된다고 했죠? 하나님이 채윤이 같은 아이를 안 붙여주시면 누구를 붙여주시겠어요?" 눈물이 왈칵났다. 그리고 손녀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요즘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 색깔이라며 화장품을 사서 선물로 주셨다. 곱고 고운 필체로 정성스레 쓰신 카드와 함께.

 

돌아보면 이렇게 따뜻한 기억이다. 실은 돌아보니 비로소 이렇듯 따뜻한 것이다. 권사님은 사실 '칼같음, 철저함' 같은 형용사가 어울리는 분이다. 완벽하고 빈틈이 없으며 모든 것을 다 가진(갖춘) 분 같았고, 특유의 자부심도 충만하셨다. 아나운서 같은 낭랑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우아한 말투셨다. 그런 말투로 돌려 말하기보다 직설로 꽂으셨다. 실은 그래서 권사님이 조금 무서웠다. 부임한 첫 해, 내적 여정 세미나를 길게 진행했는데 쉽지 않은 동반이었다.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내적 여정 참여자들은 자발성 100%에 목마름 200% 정도를 장착하고 온다. 톡 건들면 그저 마음을 활짝 여는 분이 대부분이다. 교회 내적 여정은 자발성보다는 관성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 여정의 목표인데, 웬만큼 준비되지 않으면 마음의 여정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동반하고 이끄는데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권사님은 교회 에니어그램 포함, 내가 이끈 내적 여정 집단을 통틀어 최고령 수강자이시다. 정말 열심히 듣고 필기하셨고, 매주 철저하게 복습하셨다. 그리고 매 시간 "너무 어렵다."라고 하셨다. 가장 열심히 하시면서 가장 어려워하시는 모범생이었다. 상담이나 마음의 여정에서 "모르겠다"는 반응은 "마주하기 힘들다"로 받아들이곤 한다. 내적인 부침이 있다는 뜻이다. '저항'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상담자 또는 여정 동반자로서 분별이 필요하고, 버티는 힘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질문이 많으시고, 그만큼 어려워하셨다. 왜 아니겠는가?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정직하게 내면을 마주하는 작업인데. 아무튼 권사님 뿐 아니라 전통 교회 신앙생활에 익숙한 분들과의 여정은 내게 참 어려운 시간이었다. 

 

 

 

 

마지막 시간 소감문을 써 제출하시도록 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권사님스럽게, 활자 같은 필체의 소감문을 반듯하게 접어 깨끗한 봉투에 담아 스티커로 밀봉해 건네주셨다. 역시나 권사님스러운 정직한 소감문이었다. 여정에 참여하며 겪으신 내적 갈등을 그대로 고백하셨다. 그럼에도 여정이 지향하는 지점을 명확히 알고 계셨다. 마지막 문장 '쿵쿵 울림'이란 두 단어는 내 마음에 남아 아직도 쿵쿵, 울리고 있다. 그 연세에 살아오신 세월을 돌아보며 '잘못 살았구나' 하신다. 권사님 정말 오롯이 에고의 그림자를 마주하셨었구나! 누구보다 내적 여정을 진실하게 걸으셨구나! 이제와 다시 보인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삶과 신앙을 '고민하고 후회하며 다시 부끄러움'으로 마주하며 성찰하셨던 시간은 어떠했을까. 더 헤아려드릴 걸, 아쉽고 아쉽다. 쓰다 보니 더욱 아쉽고 텅 빈 마음에 아픈 바람이 스친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을 시작할 때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워낙 나의 뇌세포는 더 이상 지식이나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이 평생 쓸데없는 것까지 차곡차곡 싸여 있었기에. 슬프고도 부끄러운 1강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중에 어떤 날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뭔지 모를 충만함에 2강이 듣고 싶어서 '기도하며, 고민하며 후회하며 다시 부끄러움에...... 여기 저기 다 있는 나. 아직도 정확한 내 유형을 못 찾고 있긴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됨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여전히 난 잘못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십자가, 예수님의 와전한 사랑이 나를 회복시키심을 믿는다. 있는 그대로. 모든 학습에서 낙제였지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말 그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 기울이고 싶다. 

시간 시간 마음으로 쿵쿵 울림이 있었던 내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권사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멀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멀다고 생각했기에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권사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는데 바싹 다가가 "권사님, 내면 마주하는 일이 참 힘드시죠? 권사님, 여기까지 정말 잘 살아오셨어요."라고 말씀 드릴 용기가 없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얘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아들들 시험기간에는 열심히 하던 에어로빅도 쉬셨다고 했다. 엄마가 몸을 흔들고 있으면 공부하는 아이 정신 산란할까 봐 그랬다며 회한에 잠긴 표정으로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이런 면에서 나는 권사님의 반대쪽 끝에 있는 엄마가 아닌가. 내 또래 엄마가 같은 말을 했다면 단칼에 정죄하고 말았을 텐데. 권사님께는 조심스러웠다. 내 소신이 권사님을 아프게 할까, 회한 가득한 권사님의 눈동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곳에 처음 이사오고 며칠 안 지나서였다. 며칠이 지나도 집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오래된 집의 좁은 주방은 많지도 않은 그릇을 다 받아내질 못했고, 대충 지어지고 무성의하게 증축되어 생긴 방과 구조에는 아귀가 맞게 들어가는 가구가 없었다. 쓰던 가스오븐레인지는 들어올 수 없었고, 휴대용 버너로 최소한의 식사를 하며 지냈다. 춥기는 또 왜 그리 추웠는지. 바닥에 앉아 배달음식 먹으며 두 아이 중 누군가가 말했다. "꼭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아. 아빠가 망해서 이사 온 집 같아."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아직 가스 연결이 안 됐다는 소식을 들으신 권사님이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셨다. 뭘 해도 완벽하게 하시는 분이다. 손수 만드신 듣도 보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네 식구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미술을 전공하신 권사님의 동양자수 작품이 갤러리처럼 걸려 있는 거실과 칼같이 정리된 주방 서랍까지. 머나먼 세계 같았다. 맛있게 먹고 돌아와 우리의 새집에 앉아 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누구나 자기 세계, 자기 우주를 산다. 사람 사람 지문이 다르듯,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 세계가 다르다. 두 세계를 각각의 고유함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려면 갈등이 불가피하다. 갈등을 피하기 좋은 방법은 마주하는 세계를 없는 것처럼 지우는 것이다. 마주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먹고 사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차피 내가 알 수 없으니 환상으로 치부하면 불편할 것이 없다. 나는 조금 그렇게 차단했다. 그래서 권사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돌아보면 권사님은 그 세계의 경계를 넘어 내 세계로 들어오셨다. 채윤이 대입 즈음에 보여주셨던 확신은 내 가슴에 와닿은 진정성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키운 권사님의 손녀딸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키워진 채윤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망해서 이사 온 집 같은 우리 집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 와중에 북카페처럼 꾸며놓은 거실을 그렇게나 좋아하셨다. "어떻게든 살겠지, 내 알 바 아니다." 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마음을 쓰며 나의 세계에 침투하셨다.

 

1, 2학기에 걸쳐 내적 여정을 마친 늦가을. 권사님께서 몇 번 입지 않았다면 빨간색 트렌치 코트를 주셨다. 이름만 들어본 다른 세계의 브랜드였다. 내 몸에 꼭 맞게 수선을 해야 한다시며 수선비용까지 내셨다. 다시 새로운 세계였다. 수선비가 내가 몇 년째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 가격보다 훨씬 더 비쌌다. 장롱 안에 그 코트가 있다. 권사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입고 나갔던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 코트의 가격이 대충 어떻다는 것을 알고는 입어지지가 않는다. '나 이거 입는 사람이야' 보여주기 위해 명품을 입는 마음이나 그것을 입지 못하는 나나 옷을 돈으로 보며 타인의 시선에 매여있기는 매 한 가지다. 암튼, 그 코트를 입고 권사님께 데이트 신청을 했다. 단풍 끝자락의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내 최애 점심과 커피로 함께 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셨다. 참 좋아하셨다. 봄에 한 번 또 모시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스치듯 하셨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아 있다. "미안해요. 목사님과 사모님께 참 미안해요.” 개인적 관계에서 미안함은 아니었다.  그 순간엔 몰랐는데, 복기할수록 그 한 마디가 내 깊은 어떤 것을 건드렸다. 그때 당시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어쩌면 하나님께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 한 마디 들으면 훨씬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던 바로 그 말이었다. 바로 그 말을 권사님이 해주셨다.

 

권사님 장례식을 마친 자리에서 하신 아드님의 부탁이 있었다. 1년 후 추도예배를 꼭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남편에게 하셨다고 한다. 권사님 사셨던, 흐드러지는 벚꽃이 뵈는 창이 있는 집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그 거실에서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 1년을 기다린 것이다. 추도예배를 드리며 마음이 울렁거렸다. 권사님께 하고픈 말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많은 것이 감사했다. '우리 사모님'의 커피를 특별하게 여겨주셨던 것, 나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와 주셨던 것. 무엇보다 권사님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3년을 함께 하게 해 주신 것. 인생 마지막 인사, 장례예배 집례를 남편 김종필 목사가 해드릴 수 있었다는 것. 완벽한 자기 관리로 일궈내신 삶과 신앙이 생애 마지막 10여 년, '교회 사태'라는 이름의 풍랑을 겪으시며 어떻게 흔들렸는지 잘 알고 있다. 울며 울며 걸으셨다는 탄천 길을 내가 함께 걸었던 느낌으로 생생하게 여러 번 들었다. 교회와 목회자로 인해 겪은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치지 않으셨다는 것에 깊이 안도하며 감사한다. 권사님 투병 중에 '목사'라는 사람과 쉬지 않고 소통하며 두려움을 내비치시고 거침없이 기도 부탁을 하실 수 있으셔서 감사하다. 권사님은 당신 큰 아들과 나이가 같은 데다, 청빙위원에 소속되어 있었던 책임감으로 김종필 목사를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열정을 뿜어내며 선동하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흠결 많아 마음 놓이지 않은 김종필 목사가 투병 기간 내내, 임종 직전까지 권사님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어서 나는 감사했다.

 

남편이 목사인 것이 나는 늘 부끄럽다. 목사가 쓸모 없는 시대에 목사로 사는 것이 안쓰럽다. '목사의 쓸모없음'을 전제로 세워진 교회에서 목사 노릇하는 것이 안타깝고 민망하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늘 의문하고, 기준도 높은 사람이라 더욱 그렇다. 박광혜 권사님의 투병기간과 장례식, 그 이후 일 년을 지내고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남편이 목사여서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목사의 아름다운 권위로, 거기에 권사님을 향한 사랑을 담아 그 시간을 함께 해드리는 것이 좋았다. 목사들에게 받은 치명적인 상처로 아직 분노와 슬픔이 가시지 않은 권사님 곁에 그저 조용히 손잡아 드리는 목사로 함께 해드릴 수 있어서. 카리스마는 없지만 대신 속 깊은 진심을 가진 사람인 걸 권사님도 아시겠지. 추도예배를 마치고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에서 아드님들과 대화하는 남편이 참 보기 좋았다. 처음으로 목사의 쓸모를 생각했다. 쓸모없음으로 깊이 좌절하고 자주 흔들리는 남편이(내가?)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것, 이 역시 권사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뭔가 쓰고 싶은 마음으로 일 년을 보냈다. 권사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쓰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기나긴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 쓰다보니 죄송함과 감사함, 그리움과 슬픔으로 마음이 쿵쿵 울린다.

 

사랑하는 권사님, 세계와 세계의 마주침에서 한 발 더 다가가지 못한 것 죄송해요. 감사해요, 권사님. 정말 다른 세계에 계셔서 제가 사는 삶은 알지도 못하고 안중에도 없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경계를 허물고 들어와 주시고,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늦게 권사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죄송해요. 권사님이 주신 빨간 트렌치코트, 평생 간직하면서 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새길게요. 구분하고 나누고 벽을 세우는 것 없는 나라, 두려움 없이 만나고 거침 없이 연결될 좋은 나라에서 곧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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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위문공연이다. 무료하고 때로 무력하거나 우울한 내 일상의 위문공연이다. 서원이가, 작년 어느 날부터 음악수업에 나타나 내게 기쁨이 되었던 서원이가 동네로 찾아왔다. 첫 수업이 잊히지 않는다. "이거 해볼 사람? 서원이가 해볼래?" 하니 고개를 천천히 저으면 몸을 뒤로 뺐다. 눈으로는 "네넵! 해볼래요, 하고 싶어요, 저 잘해요. 뭐든지 잘해요."라고 말하면서. 눈으로 하는 말을 듣고, 살살 달래서 결국 하게 만드는 게 으막션샘미 특기인지라. 뒤로 뺀 몸 이내 앞으로 나와 연주를 했다. 그리고는 음악시간마다 기대에 찬 눈으로 앉아서 나를 맞아주곤 했었다. 일주일 중 가장 피곤한 시간, 무거운 키보드를 질질 끌다시피 들고 찾아간 교실에서 만나는 비타민C 레모나였다.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수업이 중단되고 학기가 마쳐버려서 굿바이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서원이 엄마의 제보로 음악수업 있는 목요일을 그렇게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모나 서원이와 OO님이 엄마와 아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놀랐었지)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아이들의 '추구'는 늘 그 자체에 가깝다. 그러니 아이들은 지금 추구하는 것을 얻으면 그냥 행복인 것이다. 다른 목적 없이, 아무 헤아림 없이, 좋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줄 때, 아이들이 행복한 만큼 나도 행복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뿐, 목적할 뿐이기 때문이다. 수단 아닌 목적의 존재가 된다는 것,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서원이를 만나게 되었다. 집 교도소에서 출옥하여 '기쁨' 그 자체를 만나다니.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밝은 색 니트를 입고, 귀걸이도 했다. 심장박동이 기쁨의 박자로 빨라지는 것이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기분. 일찍 집을 나서서 태재고개를 넘어 걸어가는 길, 발걸음이 이리 가벼울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공원에 잠깐 갈까? 요 앞에 길을 건너면 공원인데... 했더니. 나는요, 차를 타고 가는 공원으로 가고 싶은데요. 이 계시같은 한 마디에 율동공원으로 향했고, 걸으며 큰 소리로 카쥬를 불고, 30초 그림자 밟기, 30초 얼음땡 놀이도 했다.

헤어지는 분위기가 되자 놀이터에 가고 싶다, 집에는 장난감이 하나도 없다, 우리집은 15층이라 뛸 수가 없다, 1층에 살면 좋겠는데 1층은 집이 안 나온다.... 어설픈 (그러나 뭔가 부동산 판도를 읽고 있는 듯한 ㅎㅎㅎ 웃긴)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길거리 스탠딩 톡킹 어바웃'이 길어지고 깊어져 속내 털어놓기 타임이 되었다.

다음에 날씨 따뜻해지고 코로나도 끝나면 다시 와서 놀자. 코로나가 끝나면 좋겠다.

나는요, 코로나가 끝나는 게 좋지 않아요. 나는요 재택근무를 좋아한다구요. (6세 입에서 재택근무! ㅎㅎㅎ 코로나로 재택근무 하는 엄마랑 함께 있어서 좋다는 뜻) 

(갑자기 아빠의 일상 공개) 아빠는 새벽에 가면 늦게 오거든요. $*&^@#$%^!#$ (이 부분 깨알 재밌는데... 사생활... 큐큐)

(스물한 살 누나 체벌하는 문제를 상담까지 해줌) 어, 옷걸이로 때리지 말고요. 패트병으로 엉덩이를 때리세요. 그게 아파요. (실은 스물한 살 누나가 선생님보다 커서 때리는 게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더니 그때부터 너무 길게 자세하게 설명) 누나가 스물할 살이 될 때, 한 살이 더 먹을 때 말예요. 선생님도 또 한 살을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같이 나이를 먹으니까 선생님이 나이가 더 많은 거예요. 선생님이 더 작아도 나이는 더 많은 거니까... 때릴 수 있어요. (아, 그러면 집에 가서 누나가 또 방을 안 치우고 있으면 막 패트병으로 때려야지! 의지를 보여줬더니) 아니, 처음부터 때리는 게 아니라 일단 말로 하세요.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패트병으로 때리세요. (너무 친절한 체벌 상담 ㅎㅎㅎ)

다 옮겨 적을 수 없어서 아쉬운, 녹음하지 않아서 아쉬운 긴긴 대화였다.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간질거린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를 산다. 그리고 초대한다. 우리 역시 지금 여기에 머물도록. 그 무엇도 목적하지 않고 목적한다. 나를 목적한다. 존재를 목적한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선물을 준다. 길에 서서 나눈 그 대화, 잊지 못할 것 같다. 좋았던 과거도 아니고, 더 좋아질 미래 어느 날도 아닌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린 시간이다. 코로나로 인해 마음 놓고 숨을 쉴 수 없고, 손잡고 악수를 나눌 수 없는 나날이지만. 그 순간만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행복감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로 내 어두웠던 과거와, 으막션샘미로 행복한 현재와, 새로운 창작의 꿈꾸는 미래를 한 줄에 꿰면서 내 일상으로 다가와 깜짝 놀래킨 사람이 서원이 엄마였다. 언어로 기록하기 어려운 그런 신비이다. 그러고 보면 '신비' 역시 무엇을 목적하지 않는, 그냥 그것, 그냥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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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먹기 좋은 겉절이 김치와 함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시어머님이 주신 것이다. 처음 받아보는 편지이다.

 

글쓰기의 치유력을 익히 알고 있다. 그 힘을 삶으로 경험했고,  함께 쓰고 읽는 사람들의 글과 말로 확인했다. 수년 전에 시어머님의 자서전을 써드렸었다. 신산한 삶을 살아오신 어머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고난을 몸이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서 여러 증상을 앓으셨다. 여러 곳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상담과 영성 피정 등에도 보내드렸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신체적 심리적으로 더 허약해지셨고, 나로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낸 것이 자서전 쓰기였다. 배움에 결핍감을 가지고 계시지만 타고난 '활자 지향형'이신 어머님께 좋은 기회가 될 거라 믿었다. 한 발 물러서서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삶을 구술하시는 동안 새로운 관점이 생길 거라 믿었다. 이현주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고백하시겠지! 치유의 글쓰기의 진수를 경험하실 거라고!! 야심찬 계획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원고를 완성하고, 책으로 편집해주시던 언니가 말했다. "자기야, 이 책의 주제는 세상의 나쁜 년들아!야. 이 책에 등장하는 분들이 읽으시면 어머니 더 힘들어지실 것 같아. 자기가 서문 격으로 해명하는 글을 하나 써라" 아닌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억울함과 자기 연민의 독백이었다. 어머님 자신이 얼마나 의로웠고, 헌신했는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몰라줬고, 오히려 배은망덕했는지. 얼마나 억울하고 또 억울하신지. 결국 서문 하나를 써서 집어넣고 책을 찍었다. 어머니 예상과 달리 흥행에 실패했다. 흥행은 커녕 읽는 이마다 말을 잃고 묘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내 좌절이 더 컸다. 책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어머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이미 지쳐있었다. 성찰을 위한, 치유를 위한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성찰이 아니라 자아팽창에 일조한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끝이구나' 이때로부터 어머님 치유를 위해 애쓰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전 같지 않은 내게 대놓고 섭섭함을 표현하시고, 수시로 돌려까기 하셨지만 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어제 받은 편지이다. 어머님이 자발적으로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시는데, 편지 내용이 감사와 사랑이다. 전에 자서전의 그 어머니 글이 아니다. 내게 하시는 감사와 사랑의 말씀에 감동이지만 관점의 변화! 이것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자기 연민과 억울함의 호소가 아니라 감사와 연민이다. 자서전 작업을 통해 꿈꿨던 바로 그것!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몇 년 전 쓰신 글에서 당신 안의 어둠을 토해내길 잘하신 거다. 감사와 사랑의 진실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억울함과 분노의 늪을 정직하게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의지만으로 쉽게 초월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나 감정의 정화, 내적 성장이라는 것이. 빛으로 가는 길은 그림자에 있다. 거리를 두고 나쁜 며느리를 무릅쓴 시간 동안, 에라 모르겠다, 어머니를 포기하고 지낸 시간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의 여정을 걸으신 것이다. 각자 자기만 아는 자기 길을 가고 있다. 나도 내 길을 비틀비틀 걷고 있다. 

 

 

자서전 <혹덩이에서 복덩이로>에 붙인 서문

 

“내 얘길 다 하려면 책 열 권을 써도 모자란다.” 황혼 어르신들께 자주 듣는 말입니다. 어느 인생인들 책 열 권 분량의 사연이 없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륜이 쌓인다는 것은 인생의 이야기 분량이 쌓여간다는 뜻일 겁니다.

 

저의 어머니도 당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열 권, 스무 권으로 다 담아내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몇 날 몇 일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70 평생의 이야기를 이 작은 책 하나에 담았습니다. 어머님이 쓰셨습니다.

 

열 권 분량의 사연이 있다고 해서 모두 책을 쓰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70을 바라보시는 어머님은 결국 이렇게 인생을 써내셨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고백처럼 평생 ‘배우지 못한 한’을 아프게 품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결국 이렇게 써내신 어머니께 박수를 드립니다. 어머님이기에 가능하신 일이었습니다.

 

상담을 하고 나면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니 후련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붙들고 아파하던 것을 어디에든 쏟아내기만 해도 견딜만해지고 가벼워집니다. 이 작은 책은 어머님의 ‘털어놓음’입니다. 어린 시절을 혹덩이로 기억하시는 어머니는 오랜 세월 마음의 병을 앓아오셨고 두통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이 털어놓음으로 인해 남은 인생에 더 밝은 이야기들이 쌓여 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일을 함께 경험하신 분들은 어머님과 다른 기억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기억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에 의해 ‘경험’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인생 이야기가 지어져가는 것일 겁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내면아이 치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치유는 다름 아닌 ‘기억의 치유’라고 합니다. 각자 기억이 다르고, 어머니의 기억 또한 세상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머님의 내면아이 치유, 기억의 치유를 위한 아픈 고백임을 기억해주시고, 따스하게 바라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표지사진을 찍던 날 어머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은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발그레 상기된 볼하며, 20여 년 가까이 어머님을 곁에서 뵈며 그렇게 예쁜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스스로 혹덩이라 여기며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님이, 오직 당신만을 사랑스럽게 따스하게 바라봐주는 눈길을 얼마나 얼마나 바라셨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험한 세월을 약하디 약한 몸으로 견뎌 오신 것은 분명 어머니 마음속엔 ‘사랑의 눈길’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믿음’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로 혹덩이 어머님이 복덩이가 되셨습니다.

 

어머님 남은 생애, 그 따스한 주님의 눈길을 더 많이 느끼고 발견해가시며 행복한 황혼을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외롭고 고독한 시간에 더욱 주님을 붙드시는 믿음의 길은 사랑의 길임을 믿습니다. 혹덩이 어머님, 복덩이 어머님을 사랑합니다.

 

막내며느리, 정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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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테이블에 놓인 핸드북을 보고 현승가 빵 터졌다.  "으헛, 사모대학? 이건 무슨 대학이야?" 지난 학기에 이어 사모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강사로서 가장 복잡한 자리'라고 표현하곤 한다. 꼬맹이 장애 아이부터, 비장애 아이들, 신자와 비신자, 부모와 아이, 청년과 노인, 무신론자와 가톨릭 신자, 또는 불교신자까지. 다양한 분들 앞에 마이크 들고 서는데 사모님들 앞에서 강의는 마음이 복잡한다. 여러 의미로 복잡한다. 얼마나 복잡했으면 엊그제 있었던 이번 학기 2회차 강의는 전날까지도 강의안을 확정하지 못했었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나를 주장할 언어를 가진 내게 ‘사모’는 여느 사모님들과 다르다. ‘글쓰기’라는 일종의 권력을 가진 나는, 글은 커녕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사모님들이 호칭되는 ‘사모’와 다르다는 걸 안다. 아프도록 다르다. 나는 '사모'라고 부르며 나를 통제하려는 후배에게 '사모라고 부르지 마라!' 할 수도 있다. '저 분이 책을 낸 작간데 왜 사모라고 부르고 그래요?' 하며 '사모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자기 주장을 위해 나를 대상화 할 때는 '사모라 불리든 작가라 불리든 부르는 사람과 나와의 관계다. 낄끼빠빠 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겐 이제 그런 힘이 생겼다. 


사모님들이 여러 면에서 힘들지만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수자 스탠스가 그러하듯. 목소리는 낼 수 없지만 은근한 주목(이라 쓰고 '감시'라 읽는다.) 엄청나게 받는다. ‘사모’라는 존재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만큼 사모님을 돕는 것도 없다.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가 목사니, 그의 삶의 동반자로 함께 걸으며 자기 삶을 살도록 신경 꺼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여자가 남편의 직업 때문에 그렇듯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단 말인가.

(자주 했던 얘기지만) 주부수영반에 들었던 적이 있다. 거기선 일반적 호칭이 ‘형님’이고, 1번 형님, 3번 형님 등으로 불린다. (번호는 수영 잘하는 순서, 말하자면 줄번호이다.) 수영 마치고 오래오래 시우나 하고, 맛집 가고 하는 형님들의 에프터엔 나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유독 혼자 다니는 한 분이 계셨다. 어느 날 2번 정도 되는 형님께서 내게 엄청난 비밀 공유하신단 태도로 귓속말을 주셨다. “야, 저기 지금 나가는 평영 잘하는 여자 있지? 걔 목사 사모래” 헉! 목사 사모가 왜요? 나도 커밍아웃 해야 하나, 잠시 심장이 쫄깃 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까지도 목사 사모에 알 수 없는 무엇을 덧씌우고 바라본다. 그러니 사모님들께 당장 ‘자기 자신이 되세요! 사람들의 기대에 휘둘리지 마세요!’라 말할 수 없다. 마치 그런 주문 같이 느껴져서다. 신혼 초에 시어머니의 과한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고 돌아와 괴로워 하는 내게 남편이 하던 말이 있다. “그렇게 싫으면 어머니한테 싫다고 하지 그랬어?” 내가 그 말 할 힘이 있었으면 이제 와 이러겠냐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해 20년 수련을 해왔다.)

사모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는 자체가 사모를 어떤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라 여겨 불편하지만 이것조차 힘이 되는 분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런 곳에 찾아올 수 있은 분은 그나마 여건이 나은 분들이다. 이 지난한 사모의 일상을 한 방에 뚫어줄 무엇을 기대하셨을지 모르나 내겐 그런 것도 없다. 강의란 이름으로 아내, 엄마, 사모로서 흠결 많은 나를 보여 드리는 것. 그나마 목회자 아내로서 형편이 나은 나, 이런 곳을 찾을 수 있는 분들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은 아니지 않나 싶다가도 그나마 이렇듯 연결되는 것이 어딘가, 하기도 한다.




사모대학 강의 다음 날엔 사모인 친구를 만나러 다녀왔다. 주어진 몇 시간, 시간 가는 것 아까워 마음 졸이며 수다를 떤다. 명목은 김치 가지러. 젊어서부터 사모란 이름으로 제 교회에 엄마 노릇에 지친 친구의 김치를 나는 또 얻어다 먹는다. 김치는 맛있다. (그 맛있는 김치에 먹으려고 일찍부터 무국을 끓여 놓고 가는 부지런한 나) 가족들도 M이모 김치야? 와와!! 겨우내 김치찜 하고 김치찌개 끓일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친구의 삶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올라오는 길에 우리들의 20대를 얘기했다. 고속도로 옆 산들은 안개에 휩싸여 묘한 분위기였다. "우리의 20대 안개 속 같았어" 그렇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 같았지. 보이지 않는 한 발 앞이 나름 희망이기도 했는데. 제각각  이런 모양의 구부러진 길을 걷고 있다. M과 나, 그리고 사모가 된 두 언니들 생각에 늘 부채감 지고 있는 H. 우리의 노년이 지금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마음으로 빌며 운전했다. 이번 주 만난 사모님들의 나름대로 구부러진(曲) 길 위에도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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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Jung은 '동시성'이라 하고 우리 동네에너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한다. 도모한 일이 흘러가다 누군가의 도모를 만나 내 통제 밖의 일이 되는 것. 그리고 일을 도모한 각각의 사람에겐 계획과 다른 생의 선물이나 배움을 얻게 되는 것. 말을 다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전처럼 '거침없이 블로깅!' 생활이었다면 신비주의자의 블로그가 되었을 것이다. 연구소를 통해 본격적으로 치유와 성장의 동반자로 많은 이들과 연결되면서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10월 마지막주에 단회 글쓰기 강의를 했다. [나찾수다:나를 찾는 수다]라는 이름으로 비정기적 사려 깊은 수다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갑작스레 결정되고 진행되었다. 내적여정이든 강의든 많은 10여 명 정도의 신청을 받는다. 공지를 올리자 금세 마감이 된다. 강의는 거의 재능기부이고, 주최하는 연구소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프로그램들이다. 그래서 그래야 할 이유가 100개이기에 기쁘게 고집하는 방식이다. 공지 올리면 금방 마감이 되는 인기에 연연하는 나로서는 기분은 참 좋다.

 

그렇게 기분좋게 마감이 된 후 연구소 카페로 쪽지가 하나 날아왔다다. 미국 뉴저지 사시는 독자였다. 언니와 함께 십몇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신다며, 연구소의 에니어그램 강의 듣는 것이 한국 가면 꼭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라고 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 일정은 맞지 않아 포기하였는데 마침 나찾수다와 시간이 맞는다며 꼭 참석하고 싶다고. 고국 떠난지 20년 넘었는데 처음으로 방문하는 엄마 같은 큰언니께 선물로 선사하고 싶다고. 


이런 부분에서 원칙을 지키는 편이지만 뒷구멍 자리를 만들었다. 이미 내 글쓰기 강의 들으신 믿을만 한 벗에게 자진 취소를 종용했고, 기꺼이 취소당해주었다.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몰랐다. 누구에겐 가까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 두 분께는 여행 속 특별한 경험이 되셨으니. 물론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마침 연구소에서 급하게 글쓰기 강의를 계획했고, 마침 두분이 한국 여행을 오셨고, 마침 강의 안내를 보시고, 마침 용기를 내어 쪽지를 보내셔서 성사된 '동시성'이 만든 만남이다.


신비하게 교차된 만남을 한 번으로 흘려 보낼 수가 없어서 여행 일정을 여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느슨하게 즐기는 여행이라니 차로 어디든 좀 모시고 가고 싶었다. 서울 외곽 드라이브 데이트 신청을 했고 성사되었다. 양평이냐, 양수리냐, 남한산성이냐.... 식사도 경치도 놓칠 수 없다, 고민했다. 언니께서 좋아하시는 메뉴를 고려하여 당첨된 곳이 남한산성. 


정말 멋진 고국의 가을 하늘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주 그냥 미세먼지가 뿌옇다. 속상해도 너무 속상해서 나도 모르게 '아이고, 파란 하늘에 단풍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말끝마다 후렴구로 반복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남한산성 도착하여 식사 하고 나왔는데 하늘이 저렇다. '사모님이 하도 파란 하늘 아쉬워 하시니 하나님이 저리 해주셨나봐요' 라고 하신다. 나도 그렇다고 믿는다.


 

큰언니께서 두부 좋아하신다 하여 손두부집에 갔는데 성공! 두부찜은 물론 들기름에 구워져 나온 두부 스테이크를 맛있게 드셨다. 여행 최고의 메뉴라고 하시니, 보람이 돋아서 어깨도 치솟고 기분도 막막 좋아졌다. 식사하고 커피 마시는 동안 길지 않은 시간 두 분의 인생, 생의 이면을 듣는 영광을. 두분은 나의 일상 하루에 함께 하신 것을, 나는 두분의 의미있는 여행에 동참한 것을 서로 감사감사 하였다.

 

<커피 에니어그램>을 보시고 커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뉴욕 커피 맛집을 찾아 원두를 사오시고, 쿠키를 사오신 마음과 정성. 어쩌다 작가 되어 써서 내놓은 글에 부끄러움도 많지만, 쓰길 얼마나 잘했나. 글쓰기 강의 하길 잘했고, 두분을 초대한 것은 또 얼마나 잘한 일인가. 나는 좋은 사람이기도 나쁜 사람이기도, 따뜻한 사람이기도 차거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나를 좋은 사람 만들어 주는 이 만남이 얼마나 고마운가. Juug의 동시성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를 잠시 좋은 사람 만들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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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막 떤댕님, 바깐놀이 가치 가자.


예쁜미소반 음악치료가 끝나고 "바깥놀이 가자"라는 담임샘의 말에 H이가 대뜸 초대했다. 평소 그리 살갑지도 않으면서. 음악치료 시간에는 부끄러워 제대로 뭘 하지도 않으면서. 넷 중에 나이도, 발달도 제일 앞섰지만 어쩐지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악기 챙겨 나오는 으막 떤댕님 바짓가랭이를 뭉클하게 잡는다. 악기를 싣고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데 바깥놀이 가는 시크한 네 친구. 인사한다.


안녀엉, 안녕! 다음 시간에 만나아~ 안녕.


오늘도 행복해 하셨습니다. ^-^


치료 마치고, 다음 일정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예쁜미소반 담임샘, 특수교사인 뮨진샘에게서 사진과 함께 메시지가 왔다. 아닌 게 아니라 행복했지. 임상 뛸 나이도 경력도 아닌데, 뮨진의 아이들이라 간다. 치료사와 특수교사가 신뢰 속 빠른 감각으로 손발이 착착 맞아서 치료할 맛이 난다. 20여 년 전, 처음 음악치료를 할 때는 수치와 기록에 목숨을 걸었었다. 이제는 치료 시간 30분의 행복에만 마음을 쏟는다. 그 때는 의욕 넘치는 젊은 엄마처럼 치료 했다면 요즘은 손주 보는 할머니 마음 같다. 특수교사로 준비하고, 되고, 성장하는 뮨진을 알고, 그의 아이들이라서일까. 그저 할머니 나이가 되어가기 때문일까. 손주 돌보는 할머니처럼 어깨, 허리, 목 안 아픈 데가 없지만 '오늘도 행복'했던 것은 맞다.





치료를 마치면 '수업'이 있다. 어린이집에 음악수업을 하러 간다. 젊을 때는 치료와 교육의 목표가 달랐고, 욕심도 달랐고, 접근도 달랐는데 갈수록 그 차이를 모르겠다. 장애/비장애, 교육/치료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굿바이송을 부르려 치면,


끝났어요? 다 끝났어요? 음막션샘미 집에 갈 거예요? 가지 마요.


아우성이다. 악기 정리하는데 터프한 남자 아이 S가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내 목을 꼬옥 끌어 안더니 볼에 쪼옥 뽀뽀를 한다. 귀에 대고 한 마디 "사랑해요" 그걸 본 사랑쟁이들이 가만 있을 리 없지. 우르르 몰려 나와 둘러싸고 안고 뽀뽀한다. 이렇듯 사랑받는 사람, 음막션샘미! 이러니, 내가 나르시시즘, 자아팽창 병, 병세가 나아지질 않지.  


류 근 시인이 페이스북에 문재인 대통령 어머님 강인옥 여사님 장례식 사진에 붙인 글에 영국의 시인 존 키츠의 묘비병을 인용했다. 


여기, 이름을 물 위에 새긴 사람 잠들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름을 물 위에 새기고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이름 뿐이랴. 우리가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물 위에 새긴 것처럼 흘러가고 사라지고 만다. 20여 년 아이들과 함께 수많은 노래를 불러왔다. 얼마나 많은 노래들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말았는지. 음악치료 프로그레스 노트나 치료평가서에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와 행복감은 산과 같다. 그러나 다 흩어지고 흘러가고 말았다. 아이들은 으막션샘미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참 좋구나, 그래서 참 좋구나 싶다. 흘러가고 흘러가는 아이들 마음에 불렀던 노래, 다 흩어졌어도 '나는 오늘도 행복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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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0개월 증손자와 95세 할머니가 눈을 맞췄다. 한 세기 가까운 나이 차이가 둘 사이에 존재한다. 사람을 알게 되면 이름부터 물어보고, 그 이름을 성경 안쪽에 적고 굳이 ‘이름’불러 기도하던 할머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외우니 적을 필요도 없다.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손녀 ‘지영이’가 낳은 ‘준우’의 이름은 듣자마자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는 귀도 눈도 어두워 정확히 들을 수 없는데다 글자를 읽을 수 없으니 새로운 단어가 입력되지 않는다. 준! 우! 준우! 주누! 고래고래 알려드려도 입력불가. 자꾸만 ‘아가, 아가~아’ 손을 내밀어 보는데 아가는 엉덩이를 뺀다. 아가는 아가대로 10개월 뇌로는 백발이 규명되지 않는다. 마주하면 무조건 좋은 우리 뭔가 엄마랑 비슷한데, 결정적으로 하얀 저건 뭐지? 못 보던 생물첸데. 아가, 아가, 손! 슬금슬금 엉덩이 빼기. 내내 그런 줄 알았는데 제 엄마 지영이 카메라에 이런 장면이 담겼다. 하얀 할머니 머리, 헤 벌리고 바라보는 준우 눈빛, 감동이다. 백발 할머니의 표정은 안보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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