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환경에 맞춰 욕구가 바뀌는 사람이었다. 가장 흔한 엄마들의 그것처럼 '엄마는 생선살 안 좋아한다. 대가리만 좋아한다' 이런 것 말이다. 어릴 적에 동생과 내가 결코 먹지 않았던 과자가 젤리였는데 엄마는 젤리를 좋아했다. 그러니 나랑 좋아하는 게 겹칠 리 없고, 돈이 들어가는 음식은 아예 엄마가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생선 중에 제일 싼 동태, 깍두기 국물 같은 것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었다. 당연히 고기는 입에 대지도 못하셨다. 그러던 엄마가 최근 몇 년 고기사랑에 빠졌다. 소고기 샤브샤브는 물론이거니와 생전 입에 대지도 않았던 후라이드치킨 등등. 처음엔 당황도 했지만 평생 억누르던 욕구를 이제라도 맘껏 느끼고 채우시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도 했다.



아마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꽃게나 대하인 것 같다. 병원에 입원만 하면 은근 또는 대놓고 찾으시는 게 꽃게찜이다. 이번에도 입원 당일에 뭐 드시고 싶은 거 없냐는 내 말에 '꽃게찜...' 하는데 슬쩍 짜증이 올라왔다. 일단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꽤 의미있고 상당히 긴장이 되는 강의를 앞두고 있는 탓이었다. 강의 전날, (아직도 엄마가 좋아한다고 믿고 싶은) 애호박 새우젓국을 만들고 꽃게찜 대신 그나마 손질이 쉬운 대하를 사서 찜을 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하루였다. 왠지 마음이 불안했고 불안한 이상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강의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자꾸 스쳐갔지만 망쳐도 할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를 달랬다.
 



강의는 무사히 마쳤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엄마에게 가야하는데 도저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내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뭔지 모른 우울감 또는 분노 같은 것이 먹구름처럼 영혼을 덮는 것 같았다. 괜한 우회전, 괜한 직진을 거듭하며 헤매다 집 앞까지 왔다가 다시 괜한 직진을 해서 동네를 돌다가 주차 가능한 카페에 들어갔다. 몸이 힘든 탓일까? 긴장했던 강의를 마친 허탈감일까? 내 마음 나도 몰라! 였다.



어제 월요일. 엄마랑 통화를 하다보니 입맛이 없어서 새우찜 국물에만 식사를 하셨단다. 국물이 다 떨어졌단다. 국물을 많이 잡아서 해오란다. 그러겠다고 끊었지만 속에서 자꾸 분노가 올라왔다. 엄마의 욕구를 분명하게 밝히고 요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나는 내 욕구가 부끄럽다. 무엇을 먹고 싶어하거나 갖고 싶어할 때마다 수치심이 올라온다.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욕구를 철저하게 통제하며 사는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 가지고 싶은 걸 늘 쓸 데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엄마의 돈은 오로지 동생과 나를 대학까지 보내는 것에만 쓸 작정인 것처럼 그 외의 모든 소비는 '악'처럼 여겼던 것 같다.



그로 인해서 느끼는 결핍으로 나는 정말 엄한 곳에서 과소비를 하고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시 수치심을 느끼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아직도 일정 정도 그러고 살고 있는 중이다) 나를 이렇게 만든 엄마가 이제 와서 당신의 욕구에 저렇게 당당해지고,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럽고 버겁다. 게다가 엄마의 그 원초적이고 간절한 욕구를 알아주는 것을 물론이고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 물론 몸이 힘들어서 힘든 것 역시 당연하다. 지난 금요일 강의를 앞두고 음식을 할 때 올라왔던 그 복잡한 마음의 실체는 그런 것들이었다.



어제 오랜만에 남편과 점심, 커피 데이트를 했다. 오후가 되어 장을 보고 들어와 새우찜과 당근 나물과 양배추 나물을 했다. 전날에도 나 대신 병원에 다녀왔기도 했거니와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컸을텐데 남편이 기꺼이 동행해주었다. 힘든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배려임을 알기에 힘이 났다. 엄마가 반찬을 보고 반색을 하면서 좋아했다. 고맙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딸 안 낳았으면 큰일 날 뻔 했지? 누가 엄마 이런 거 해다 줘' 했더니 '암, 그렇고 말고' 란다. 골절된 다리를 주물러 주며 엄마 얼굴 가까이 보며 얘기하고 농담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제 엄마 음식을 다 한 후에 식구들에게는 저녁으로 콩불을 해주었다. 냉동실에 양념된 돼지고기가 있었는데 엄마 새우찜 하고 남은 콩나물을 얹어서 팬에 구웠다. 세 식구가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니 조금 과장해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아한다는 것, 그것을 맛있게 먹어줄 때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맞다. 내가 내 나름의 창작행위를 참 좋아한다. 창작행위는 내가 나를 믿어줘야 가능한 것이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힘, 이것은 원래 내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그 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사랑과 믿음의 원천은 끊임없는 잔소리와 비난으로 내 영혼에 수치심을 채워넣은 엄마 목소리의 이면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엄마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다. 다만 내 마음 조금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가볍운 마음으로 새우찜, 꽃게찜을 해다 나를 수 있게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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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절 골절 후 수술, 재활을 기적처럼 극복하신 엄마.
행여 또 넘어질세라 고이고이 다니시며 1년 넘게 잘 지내셨는데 오늘 1년 반 전 그날의 데자뷰입니다.
아침에 집에서 넘어지셔서 나머지 한 쪽 고관절이 골절되어 입원하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처럼 당황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이진 않았지만 엄마의 침상을 지키는 밤. 밀려드는 슬픔과 복잡한 심경은 다시 새롭습니다. 그때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해피앤딩으로 끝났다고 느꼈던 엄마의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 것 같군요. 우리 모두의 이 기적없는 일상의 고통, 언제까지 일까요?



<엄마의 미안한 육체>

            * 2012년 9월 17일 <크로스로>에 썼던 글.



아흔을 바라보시는 친정엄마가 고관절 골절로 병상에 누우셨다. 이미 수년 전부터 골다공증이 심해 걸음걸이며 앉고 일어서는 일이 늘 위태위태했었다. 엄마의 조심스런 걸음걸이를 바라보면서 유리로 된 등뼈를 생각했다. 칼슘이 빠져나간 엄마의 뼈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깨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45세의 늦은 나이에 늦둥이로 나를 낳으시고 연이어 동생을 낳으셨다. 늦은 출산으로 인해서 이미 몸속의 칼슘은 충분히 고갈되었을 것이다. 목사였던 남편이 일찍 부르심을 받으면서 어린 남매와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지셨다. 남매를 기르는데 노년을 바친 엄마는 칼슘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의 마지막 남은 양분이란 양분은 다 쏟아 부으셨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나마 삶을 구축하고 채우며 살고 있는 것은 텅 비어가는 엄마의 생명의 이면이 아니겠나.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시는 엄마 곁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먹고 화장실 가는 기본적인 욕구의 해결은 물론 옆에 있는 손수건 하나도 남의 도움 없이 손에 쥘 수 없는 엄마를 지켜보아야 했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그 정도는 ‘사치스런’ 고통이다. 그 모든 것 혼자 할 수 없는 엄마를 간호하는 것은 처절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이동할라 치면 엄마의 작은 몸이 그렇게나 육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몇 시간 만에 손목이 시큰거리고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그 와중에 들리는 “아이구, 어쩐댜. 미안혀서 어쩐댜. 너도 약헌 몸인디……. 미안허다. 미안허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귀로 들어와 가슴을 후벼 판다. 엄마가 내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발적 행동이 ‘말’이라는 듯, 엄마가 고통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근육이 성대인 것처럼 끊임없이 “미안허다. 미안허다” 했다. 늘 나보다 힘이 셌고, 더 강했던 엄마가 어쩌다 이렇게 미안한 존재가 되었을까? 이제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미안한 육체’가 된 엄마 몰래 소리 없는 눈물이 자꾸 흘렀다.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엄마의 몸은 막상 만져보면 전혀 다르다. 오랫만에 만져보는 엄마의 살들은 긴장이라곤 없는 근육들로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다.

병원을 나와 주일 마지막 예배인 청년 예배에 참석했다. 청년 성가대의 맑은 소리가 유난히 생소하게 귀에 꽂혔다. 바이브레이션 없는 투명한 목소리를 듣자니 젊고 탱탱한 피부와 긴장감 넘치는 근육으로 덮인 저들의 육체가 느껴진다. 아, 늘어질 대로 늘어진 엄마의 살들이 오버랩 되었다. 저런 탱탱한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의 ‘미안한 육체’에 사로잡힌 탓이었나 보다. 젊음과 생명력이 생소하고 낯설어짐이었다. 우리 엄마도 젊어서 노래를 잘했다고 했다. 성가대에서 찬송을 부르면 “목청 좋다고 칭찬이 늘어섰었어” 라고 말하곤 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찬송은 항상 바이브레이션 그 자체다. 엄마도 저 청년들처럼 흔들림 없는 직선 같은 소리로 노래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어정쩡하게 맑거나 투박한 소리로 찬송하던 시기를 지나 어느 덧 지금의 노인네가 되었을 것이다.

청년 성가대의 찬양 소리는 좋다. 음악적 완성도는 상관없이 듣기에 좋은 구석이 있다.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 따먹기를 할 때는 평소보다 시계가 빨리 돌아가는 느낌이다. 늘씬한 종아리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무리가 지나가면 그들로부터 눈길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젊음과 생명력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반면 쇠잔해가는 엄마의 몸, ‘미안한 육체’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생명력이 빠져 나가 흔들거리고 너덜너덜해진 노인의 피부는 죽음, 곧 바로 죽음을 연상시킨다. ‘이러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것 아닐까?’ 병원에서의 하룻밤이 그리도 힘겨운 이유가 여기 있다. 어찌 됐든 엄마의 육체는 말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어디 엄마의 육체뿐인가? 나는 그렇지 않은가? 투명하고 싱그러운 소리로 노래하던 청년들은 또 어떤가? 우리 모두 하루 씩 삶을 지우고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안의 근본적인 두려움, 죽음 그 자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나 자신’ 을 맞닥뜨리는 일은 두렵고 거북하고 회피하고 싶은 일이다. 쇠잔해가는 엄마의 몸은 ‘죽음’으로 인한 온갖 두려움에 대한 나의 감각을 일깨운다. 환자보다 보호자가 먼저 쓰러진다는 말은 두려움에 눌려 지레 지쳐버리는 나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 아닐까.

인간의 처음과 끝은 어찌 이렇게도 닮았단 말인가? 엄마의 아기로 처음 이 땅에 왔던 나는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였다. 엄마가 젖을 물려줘야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엄마의 손길이 있어야만 내가 내놓은 배설물로부터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전적으로 나를 돌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성대를 울려 ‘응애응애’ 우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처음 왔을 때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 엄마는 다시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로 앉고 일어섬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약하디 약한 내 몸에 기대어 있다. 생각해보면 언젠들 우리가 독립적인 존재였던가? 젊음의 열정으로 생명력이 충만한 순간에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었던가? 활력이 넘치는 몸, 틀림없는 기억력, 탱탱한 피부와 떨림 없는 목소리로 인해서 ‘내 삶은 내가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었나? 그렇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는 의존하는 존재, 내어맡기는 존재 그 곳이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인 것이다.

두려움으로 눈을 가리고 ‘안볼란다. 안볼라다’ 하며 회피하지 말아야지 싶다. 엄마의 미안한 육체가 누운 자리는 머잖아 나의 자리가 될 것이다. 사춘기 딸의 신경질을 받아내던 엄마가 저리 노쇠해지고, 엄마에게 대들고 신경질 부리던 딸이 어느 새 사춘기 딸의 엄마가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듯. 아직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 육체라 하여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깨어날 때다. 나와 가족들과 주변의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하나님 놀이가 하고 싶어 질 때마다 엄마의 미안한 육체를 떠올리려 한다. 한 때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로 인생의 역정을 돌파해내던 엄마가 배변까지도 간병인에게 내어맡기곤 묵묵히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회피하고만 싶은 병약한 엄마에게 더욱 내 삶을 밀착시켜야겠다. 엄마의 딸인 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엄마에게 받은 상처, 믿음이란 이름으로 물려받은 바리새적인 신앙과 싸우느라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엄마의 미안한 육체와 화해하며, 나의 과거와도 더 깊이 화해할 시간이다.

내가 이 땅에 무력한 아기로 오던 그 순간부터 내게 생명줄이었던 엄마 대신 진정한 생명줄인 그 분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인생을 사는 것이 오늘 엄마가 몸으로 전해주는 마지막 지혜이고 훈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를 뵐 때마다 지혜의 신비 가득한 ‘미안한 육체’를 만지고 쓰다듬으리라.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엄마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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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내가 중1, 동생이 초등4학년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디서든 이런 얘길 하면 '그렇게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냐' 놀라시며 아버지 없는 불쌍한 아이로 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것이지 원래부터 아버지가 없지 않았답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지만 그게 같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답니다. (제게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


동생과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1학년 때였으니 꼭 우리 채윤이 현승이 나이입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마흔 다섯에 나를 낳았는데 올해 제 나이 마흔 다섯이구요. 그래서인지 아버지 올해 추도식은 감회가 유난합니다. 그리고 실은 아버지 추도식이니 엄마 생신이니 하는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늘 '마지막'을 연습합니다. 연로하신 엄마는 천국행 표를 사놓고 대기중인 것만 같아서요. 아니, 아버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는 늘 마음 한 켠 두렵고 불안했지요. 엄마도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몰라.  


풀타임 직장생활 시절,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워주셨습니다. 퇴근해서 들어가면 "껍데기 왔네. 울 애기 인자 니 껍데기한티루 가라." 하시며 아이를 넘겨주셨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내 껍데기는 엄마이고, 이렇게 많은 알맹이들이 울 엄마로부터 왔습니다. 엄만 정말 속을 다 빼준 껍데기 같습니다. 오래 전 어느 추운 날에 어린 남매와 덩그러니 남겨진 엄마, 그 황망함 말로 다할 수 없었겠지요. 알맹이 빼주며 키워 이 만큼 사람 만들어놓았으니 천국 가 아버지 만나면 어깨 힘줘도 되겠어요.


예배를 인도했던 남편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으로 설교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중년이 되어 비로소 어린 아이의 일을 조금씩 버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제 발로 든든히 서는 어른이 되려고 합니다. 남편의 설교처럼 죽음이라는 문을 열고 나가서 만날 새로운 곳, 거기서는 이 희미한 것들이 벗겨지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 주님을 알게 되겠지요. 우리 인생의 수많은 의문과 신비들이 벗겨지겠지요. 그리운 아버지도, 시아버님도 만나고 용서하기 싫은 고모도 만나 손잡고 웃을테지요. 올해 음악치료에서 만난 H,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아이인데 가정불화로 엄마가 집을 떠나신 이후로 목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노래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으나 쉽지 않습니다. 치료 종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에는 결코 소리내지 않는 아이를 마주하고 혼자 노래하다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천국에서 이 아이를 만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함께 노래할 날이 있겠지요. 우리의 모든 일그러진 것들이 펴지고 회복되는 그곳에서 이 아이와 만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모두 천국에서 만날 거예요. 


아버지를 잃고 살아온 세월이 참 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그때 내 나이의 딸을 둔 엄마가 되었으니 현승이 말대로 세월이 빨리 갑니다. 김창옥 교수의 강의에서 들은 말을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여기까지 잘 왔다!' 내 껍데기 우리 엄마, 나, 동생. 여기까지 참 잘 왔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그 나라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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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의 88세 생신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도 아깝고 고맙운 착한 어린 올케와 합작으로 엄마 생신상을 차렸습니다.
식탁 앞의 엄마를 보면서, 아들 손주 며느리에게 둘러싸인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나도 나중에 엄마 같았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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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여기 저기 글에서 많이 징징거렸다시피 엄마는 기적의 시간을 살아냈습니다.
이렇게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시겠구나 싶었는데 기적처럼 다시 걷게 된 엄마.

내가 철이 들었을 때 우리 엄마는 이미 할머니였고,
이미 할아버지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의 죽음은 늘 내 상상 속에 현실처럼 존재했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나와 동생을 돌봐야 해.'
철이 들면서 늘 의식 한 켠에 자리하고 있던 이 강박같은 가정으로
누구보다 피터팬증후군이 심한 철부지 같은 나였지만 어설픈 책임감도 있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최근 몇 년 동안은 엄마 생신을 지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라고 생각합니다.
멀리 충청도에 계신 막내 이모는 엄마 생신 때마다 굽은 허리를 하고 올라오십니다.
'언니 언니' 하면 '동상 동상' 하며 대화를 하시면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모노 드라마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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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곁에 둘러 앉은 오빠, 동생, 남편을 바라보니 든든합니다.
막내 이모는 어제 전화를 하셔서 '얼라, 우리 언니는 참 축복 받은 사람여. 늦게 느히들 낳아서 키웠는디 오짜만(어쩌면) 그르케 착헌 신랑 착헌 각시 만나서.... 사위 며느리 효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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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헌 사람, 김서방이 김목사 되어서 예배 인도하니 온 가족 둘러 앉아 찬송합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그 사랑은 성경에도 쓰여있고 엄마의 88년 인생에도 새겨져 있지요.
마지막 그 날 까지 그 사랑을 사세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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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만나러 갔다.
기분도 몸도 한결 좋아지신 것 같다.
엄마가 좋아졌다는 건 삐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한참 힘드실 때는 감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병실에서 나와 휠체를 밀고 병원 입고 유리창 앞에 앉게해 드리면 좋아하신다.
밖이 훤히 내다보여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비가 그친 저녁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갔다.
노을에 때문인지, 엄마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처럼 보여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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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계시면서 드시고 싶은 음식은 오직 하나.
꽃게찜 뿐이다.
이미 여러 번 꽃게찜을 해다 날랐기에 질릴 때도 됐다 싶었다.
오늘 병원 가기 전에 뭐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게 없냐고 했더니 말씀을 못하시고 우물쭈물.
거시기.....  비싼 거만 먹고 싶응게 미안혀서..... 꽃게만 자꾸 먹고싶지.
요즘 게 철이라 그리 비싸지도 않다. 게다가 일 주일에 한 번 씩 만들다 보니 라면 끓이 듯 뚝딱 꽃게찜을 만들게 됐다.(진짜임)
돈 아끼느라고 스스로 싼 입맛을 만들어버린 엄마가 평생 제일 좋아하는 새우젓 애호박국.
이것도 해봤다. 엄마의 손 맛! 고향의 맛! 다시다 팍팍 넣어서.(엄마 입맛엔 최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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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금 마음이 뭉클하고 짠하다.
입덧이 심할 때 엄마가 만든 가지나물이 땡기면 세상 어떤 좋은 음식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엄마만이 채워줄 수 있는 내 욕구였다.
이제 내가 엄마의 입맛과 식욕을 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손맛이 된 내 손을 인식하니 그렇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도리도리 짝짜꿍..... 우리 엄마가 웃는다. 우리 아빠가 웃는다.'
짝짜꿍 노래처럼 짝짜꿍하며 엄마를 기쁘게 했을 손이 엄마의 입맛을 돋우는 손맛으로 자랐으니.... 이 느낌을 한 두 마디로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어쨌든 엄마가 웃는다. 그러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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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미안한 육체  (4) 201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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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세 개의 글을 포스팅했던 어제는 블로그 개설 후 최다 기록의 날입니다. 어제 같은 날에는 '글'이 일종의 '중독'기능을 한 것입니다.(심한 고통 즉, 불안, 공허감, 두려움....을 마주하기 싫어서 매달리는 것이었으니까요. 확실히) 밤 늦게 꽃게찜을 해가지고 엄마 병원에 갔다왔습니다. 다들 주무시니 살짝 놓고만 가라고 하셔서 불도 안켜고 살짝 놓고 왔지요. 더 일찍 갈 수도 있었는데 미적미적 미루고 또 미루고 했습니다.

엄마에 관한 글을 써서 내놓고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증이 심한 것 같습니다. 글에 대한 반응이 와도 불편하고 반응이 없어도 불편하고......  밤에 써놓은 편지를 부쳐놓고 후회하는 형국입니다. 딱히 그것도 아닙니다. 밤에 써놓은 편지가 불편한 것은 '감정이 넘쳤다.'는 자괴감일 터. 감정이 넘쳤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찌 그리 덤덤히 차겁게 썼을까' 하는 쪽에 기울어 있으니까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실은 엄마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나의 고통, 형제들의 고통을 팔아 글을 내놓았다는 죄책감 같은 것에 눌려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엄마를 향한 근심과 연민과 그로인한 슬픔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 머리로 정리만 하고 있어서 가슴이 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고요.

징징거리지 않겠노라고 어느 시점 다짐을 했더랬지요. 내가 지금 엄마의 '어린 딸'이 아니라 엄마와 동생 내외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어른이 된 딸'임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울고, 난 안 아픈 걸로 하자고 결심했나 봅니다. 헌데, 실은 여전히 내가 '어린 딸'입니다. 엄마 대신 내가 엄마의 먹을 것을 요리하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참 좋은 가을 날 아침에 밤에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듯 어제의 감정을 되짚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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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실의 일상愛> 오래 준비한 글을 쓰다가 생각지 않았던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엄마 이야기 연작'도 아니고 게다가 효도한 얘기도 아닌데 무슨 자랑이라고 이렇게요.
바로 지금의 나와 유리된 글을 쓰는 게 점점 어려워지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온통 이 생각 뿐인데 다른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오지도 않구요.


최근 엄마를 통해 '누가 봐주지 않아도 혼자 우는 법'을 처음 배워갑니다.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싶기도 하고요.

이렇게 빨리 글이 되어 나올 수 있는 이유일 것 같기도 해요.


무엇보다  [크로스로]의 이 꼭지는 말 그대로 '일상' 이야기이기에
좀 다듬어진 글을 올리는 제 2의 블로그라는 생각으로 꾸미자는 생각입니다.
고심해 놓은 주제들이 있지만 이렇듯 갑작스레 치고 들어와 내면의 샘을 채우는 샘물이 있다면 길어올리겠습니다.
연속해서 빛보단 어두움, 삶보단 죽음, 해피앤딩보단 무거운 여운, 잘했단 얘기보단 못하겠단 얘기라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먼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음을 압니다. 있는 그대로의 오늘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링크 따라가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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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닦고 일어나 글을 썼습니다.
가끔 글은 그 자체로 치유의 기능을 하기도 하고,
막다른 감정의 코너에서 예상치 못한 길을 내기도 합니다.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요즘.


정신실의 일상愛, 일곱 번 째 이야기.

클릭

http://m.crosslow.com/articleView.html?idxno=642&menu=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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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정확히 말해서 중학교 1학년 이후다.
공부하는 게 힘들 때면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를 위해서,
오직 엄마의 명예를 위해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대학으로 알고 있는 서울교대에 가겠노라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고모들이 엄마를 무시했다.
무시해도 너~어무 무시했다.
아버지 추도식에 음식 많이 안차렸다고 엄마를 갈궜다.
갈궈도 너무 갈궜다.
돈을 너무 아낀다고 갈궜다.
엄마가 돈을 아끼는 유일한 이유는 나와 동생, 대학까지 가르쳐야한다는 일념이었다.


밤늦도록 공부하는 날엔
떡허니 서울교대를 간 나.
'역시 애들을 잘 키웠다.'고 엄마를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고모들을 상상했다.


어쨌거나 다 늙어 천국을 몇 정거장 앞 둔 연세가 되어서도 고모들은 우리 엄마를 무시한다.
엄마가 원인 제공하는 면이 있다.
'푼수 이옥금여사'라 불리시는 분이니까.
그랬거나 말았거나 나는 이옥금여사의 딸이니 어쩌랴.


인공관절을 넣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간 엄마를 기다린다.
수술에 대한 염려나 엄마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분노가 마구 일렁인다.
오래 묵힌 분노가 새삼스레 오르락 내리락 한다.



나는!
이 자리에서!
칼슘이 다 빠져나가 뼈가 주저 앉도록 열심히 살아온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 인생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고모들을 고발하는 바이다.
아울러!
마흔 다섯에 낳아서 곱게 길러 시집 보냈으면 그만이지.
뭔 놈의 직장생활 한다고 지 딸까지 맡겨서 늙은 엄마 허리를 망가뜨린 나 자신을 고발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뼈 속의 칼슘을 빨아다가 오장육부를 형성하고,
평생 엄마의 열정과 건강을 갉아먹으며
견고한 인생의 진을 쌓은 나.......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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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월요일 친정에 갔을 때 엄마랑 산책을 했다. "너 나허구 한 번 나가볼텨? 좋은 거 보여 줄 것이 있는디....." 새로 이사한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였다. "여기여. 여기 한 번 서 봐. 솔나무 냄새가 폴폴 나. 얼매나 좋은 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 얼매나 좋은 분인지...."

나는 엄마가 혼자 걸어 화장실에 다니실 수 있다는 게 매일 매일 얼.매.나. 좋았는지 모른다. 얼매나 감사혔는지..... 심한 골다공증과 협착증으로 엄마의 뼈가 유리같이 느껴졌다. 오래 살던 주택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하셔서 산책을 즐기실 수도 있으니.

이틀 전 비 오는 날 집 앞에서 넘어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통증이 있으셨지만 외상도 없고 붓는 곳도 없어서 타박상이려니 했다. 하루 이틀 지냈는데 상황 악화되어 거동을 못하시기에 이르렀다.

오늘 아침 눈을 떴는데 꿈자리는 뒤숭숭하고 마음은 무거웠다. 동생과 통화하니 아무래도 고관절 골절 같다고... 노인네들이 고관절 골절이 이후엔 오래 못버티신다 들었단다. 게다가 업어 모시고 화장실 가다 동생마져 허리를 다쳤다고 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절망감과 두려움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번 휴가에 그런 결심을 했는데.... '단풍이 절정일 때 설악산의 호텔로 엄마랑 단둘이 여행을 가야겠다. 전망 좋은 방에서 주무시게 하고 조식뷔페도 함께 먹고 단풍길을 산책도 해야지. 바닷가에 모시고 가고 황태구이도 사드려야지. 온천도 하고.... 엄마 생전 못누려본 걸 꼭 하시게 해야지.' 이런 계획을 했다는 게 더 슬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어려운 '김서방' 등에 업혀 두 군데 병원를 돌아 세 번째 병원에서 수술하시기로 하고 입원을 했다. 자세 하나 바꾸는데도 고통스러워 하셨다. 어렵사리 MRI 촬영까지 했다. 한 쪽 고관절이 틀어져 있었다. 실은 오랫동안 아팠었다고 하신다.

긴, 아주 긴 하루를 보내고 엄마는 옆에서 푸푸 주무신다. '비오는데 나간 내가 미쳤지.'하며 자책하시다 '김서방 힘들어서 어떤댜. 병원비 어쩐댜. 나 수술 안혀. 늙어서 다 산 사람이 무슨 수술여.' 하시더니 점점 편안해지셨다. 더불어 나도 머릿속에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 쓰기를 멈췄다.

엄마의 몸이 어떻게 쇠잔해 가는지를 보며 인생과 죽음과 거기 맞닿은 저 하늘을 다시 생각한다. 사진에서 처럼 엄마랑 다시 그 솔밭 아래 나란히 설 수 있을까? 단풍이 들 때 함께 붉게 물든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런 날이 와 멈춰 생각하면 하늘 소망은 너무 멀고 엄마에 대한 유아기적 애착과 원초적 그리움만 크다.

그나저나 엄마가 코를 점점 심하게 곤다. 옆에 계신 환자분 신경이 많이 쓰이시나본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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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목사를 그만두고 김포로 숨어들어 애들 글쓰기를 가르치는 덕분이다.
현승이를 장학생으로 받아주는 바람에 월요일 마다 친정에 가게 되어 울엄마 얼굴 일주일에 한 번 씩 꼬박 보게 되었다.


80이면 하나님이 데려가실 것이다. 아니다. 팔십 몇이다... 하시면서 그 나라 가시기만 고대 하시는 엄마. 지난 주 까지도 '삼일 금식기도를 혔다. 기도제목도 없이 기도를 혔어. 천국 갈 준비를 시키시나비다' 하셨다. 정말 그 나라를 고대하실까? 그러기도 하실 것이다.
한편, 천방지축 아들 놈 셋을 키우며 엄마를 봉양하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너무 짐이 된다 하시는 자괴감도 있으실 터이다. 천국을 그리며 기쁘다 하시지만, 막상 천국 갈 생각 하시면 이 손주 놈들 바라보며 눈물도 하염없이 흐르시는.....
부쩍 엄마가 눈물이 많아지셨다. 오늘은 가야할 시간보다 좀 늦었더니 저러구 나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엄마 모습에서 옛날 보았던 외할머니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그냥 마음이 찌릿하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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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이 사진을 보고 '어, 똑같다. 당신 어머니하고 똑같이 생겼네. 어... 당신이 어머니 닮았다는 생각 안해봤는데... 똑같다' 한다. 그러고보니, 엄마랑 똑같다. 현관 앞 까지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는 엄마한테 가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엄마랑 셀카를 찍었다. 셀카라는 걸 처음 보는 엄마가 화면을 가리키면서 '얼라, 내 머리가 하얀허네. 이 사람은 누구랴?'하면서 렌즈에 비춘 딸을 몰라봤다. 엄마 마음에 비친 딸은 더 이쁘고 더 어리고 그럴 터이다. 늙은 엄마의 또 하나의 첫사랑 수현이가 달려들어 메롱하면서 같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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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새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 모르고 살았다. 작년 이맘 때던가? 엄마를 모시고 빕스에 갔는데 혼자서 새우를 100마리는 드신 것 같다. 그 이후로 올케 선영이가 열심으로 새우 사다 삶아 드리고 했었다. 오늘 현승이 논술공부 하는 사이 장을 봐다가 새우찜을 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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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늦게 드셨다면서 시큰둥 하던 엄마가 조금 이른 저녁을 드시겠다고 식탁에 앉으셨다. 전 같으면 '힘든데 하지마라. 비싼 새우를 돈 없는데 왜 사냐?' 하실텐데 참 이쁘게도 엄마가 군소리 없이 받아 드신다. 꽃게찜 해드리리라 마음 먹고 마트에 가면서 '하나님, 물 좋고 튼실한 게를 좀 사게 해주세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는데... 볼품없는 냉동 게 뿐이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새우가 눈에 띄어 두 팩을 사고, 생전 처음 감으로 만들어 본 새우찜에 엄마가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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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우리 엄마. 손이 안 보여. 잠깐 돌아섰다 다시 보니 새우 대가리가 한 가득....ㅎㅎㅎㅎ
집에 오는데 주차장까지 굳이 따라 나오신다. 수현이 우현이 조카들이 따라나오면서 '할머니 왜 자꾸 나가요?' 하니까 '이... 이쁜 딸 가는 거 볼라구 그러지' 하시면서 현승이에게 '현승이 할머니하고 손 한 번 잡자' 하시더니 만원 짜리 한 장 손에 쥐어 주셨다. 왜 자꾸 현승이 올 때마다 돈을 주냐고 했더니 '내가 어렸을 적이 어느 오이(외)삼춘이 만날 때 매닥(다) 돈을 줬는디 그게 안 잊어져버려. 현승이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엄마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요즘은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애써 것두 귓등으로 들었다.


천국이 아무리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우리 엄마를 기꺼이 그 곳에 보낼 수 있을까?









엄마가 골다공증으로 허리가 망가지신 이후로, 
걸음걷는 게 불편해지신 이후로,
납작하고 편하고 이쁜 신발만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우리 동네 푸마 상설할인 매장에서 균일가로 나와있는 너무 이쁜 신발을 사서 엄마한테 갔다.






최근에 또 3일 금식기도를 하신 모양인데,
점심 맛있는 거 사드리러 간다고 전화를 했더니 '야이, 집이서 먹자. 집이 반찬이 많어' 하시길래
뷀!!!!
'나 안가! 지난 번에 약속해놓고 또 저런다' 했더니....
바로 순하게 '알었다. 알었어' 하시길래.
'이쁘게 하고 있어. 곧 도착해' 하고 갔더니 이쁘게 꽃단장 하고 계신 엄마.






 

복도 많은 우리 엄마.
지난 어버이날에 병준맘이 고맙게도 엄마 갖다드리라고 예쁜 블라우스 쟈켓을 챙겨주었다.
'딱 보니께 이 바지허고 입으믄 어울리겄드라고' 하면서 잘 맞춰 입으셨네.
이뻐라. 우리 엄마.

 


 



 

80세 되기 한참 전부터 '나는 80되믄 하나님이 불러가실 꺼여. 내가 그르케 기도혔다.' 하셔서
동생은 79세시던 12월 마지막 날에
'엄마, 오늘 밤에 천국 가시는 거죠?
내일 아침에 늦잠 잘 거 같아서 미리 인사하는 거니까 그럼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했다는데....
일 년 일 년 미뤄지시더니 87세 지금까지 버젓이 저러고 계심.
최근에는 '인자(이제) 진짜 얼매 안 남었어. 한 4개월 남은 거 같다. 곧 불러가실 거여'
하고 계신다.
사진 찍자고 하니까 '그려, 마지막인지 사진 한 장 찍어야지' 하신다.



 



우리 엄마는 나물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동생네 식구하고 다같이 빕스를 갔었던 터.

어찌나 잘 드시는지 여태 안 모시고 다닌 게 후회가 돼었었다.
주차장에 내려서 아직도 어렵기만한 사우(사위) 김서방과도 사진 한 장.
우리 엄마 호빗 종결자!!






4개월 후에는 천국 가실 분이 입맛이 이렇게 좋아서 어쩌신댜.
다른 거 거의 안 드시고 새우만 한 100마리 쯤 드신 것으로 추정된다.
'새우 다 없어졌어. 엄마가 새우 많이 먹어서 돈 더 내야돼' 하니깐,
'내가 다 먹은 줄 저 사람들이 알간? 몰라~아' 하시면서 우구적 우구적.






커피 잠 안와서 못드신다는 거 원두커피는 카페인이 적어서 괜찮다고 꼬셔서
카푸치노 한 잔
달착지근하게, 맛있게, 짠!
올해 들어 벌써 성경1독을 하시고, 다시 시작해서 누가복음을 읽으신단다.
천국 가시기 전에 2독 완료하시려고 속력을 내시는 중이라는....






'너 참 우리 집에 피망 열리 거 아까 못 봤지. 얼매나 귀연지 몰라. 진짜 귀여워'
'내가 고추 안 매운 고추 모종을 달라고 혔더니 이게 피망이었어' 하시는데 엄마가 더 귀여움.
하루 종일 성경보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늘 기뻐서 헤죽헤죽 하시길래.
'우리 엄마는 지금도 천국이네' 했더니 그러시다며....


 

사위가 '어머니 제일 좋아하시는 찬송이 뭐세요' 하고 하니까

 '예수사랑 하심은' 이라시길래.
한 번 부르시라니깐 차 안에서 신나게 부르신다.
(아이폰에서 세로로 찍은 게 여기서는 돌려지질 않아서
본의 아니게 우리 엄마 누워서 찬송하게 됨)



남은 날이 얼마든 매일 매일 천국을 사는 엄마를 보는 게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우리 귀여운 엄마.






작년 여름부터 시작해서 주일날 잠깐 열었다 닫는 나우웬 카페에서 선풍기(ㅋㅋㅋ 뭐래니?)같은 인기를 끌었던 '마약커피'를 팔십이 넘으신 엄마에게까지 팔아먹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3 때부터 커피를 들이키기 시작한 나를 얼러도 보고, 달래도 보면서 커피 그만 마시라고 해봤지만 씨도 먹히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결혼 전에 가끔 위장이 심하게 탈이 나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는 강도가 더했었는데.... 암튼, '결국은 씨도 안먹혔다'가 결론!


10여 년 전에 지금 다니시는 교회로 옮기셔서 나쁜 친구를 많이 사귄 엄마가 그 몹쓸
커피를 배워오셨다. ㅎㅎㅎ 그래서 가끔은 아주 달착지근하게 탄 커피를 좋아하 하면서 드시는데...
이번 여름에 오셔서 지내시면서 그 마약커피에 단단히 맛을 들이신 것.


마약커피로 말하자면 커피, 프림, 설탕에 우유와 캬라멜 시럽과 향커피 등을 넣는다는 것 외에는 더 밝힐 수 없는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의 아이스커피렷다.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해외여행을 갔다온 TNTer들이 유럽에 가서도 못 잊는다는 커피가 모님의 마약커피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아니고 이건 무조건 믿어야 하는 진리! 


맛있는 건  20대고 80대고 입맛으로 통하는 법. 무더위에 얼음 띄운 캬라멜 마끼야또 풍의 아이스커피에 순간순간 행복해 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카메라에 남아 있었다. '야이~ 이거 기가 맥히게 맛있다. 야~ 나는 냉커피 이르케 맛있는 줄 몰랐댕... 왜 이냥 맛있댜~아'


걱정근심 주식회사 이사장님이신 우리 이옥금 권사님. 남은 나날 더 많이 내려놓고 평안한 나날을 지내셨으면 싶다. 커피 한 잔 들고 여유롭게 웃으시는 저 사진처럼....


비가 막 오고, 며칠 째 이어지는 두통이 가라앉질 않아서 몸이 천근만근이다. 오늘 몸 상태로는 일을 하러 나갈 수가 없었는데.... 이를 악물고 나가서 진땀 흘리며 일하고 돌아왔다. 오후 내내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 나 아퍼' 하고 싶었는데 그 한 마디에 또 걱정근심 주식회사 이옥금 이사장님 가슴이 쿵 내려앉아서 잠 못 주무실까봐 참고 있는 중.


그러니까 오늘의 주제는 엄마가 보고싶고,
내가 캬라멜마끼야또 풍의 아이스커피를 기가 막히기 조제를 한다는 거고,
또 그런 내가 두통이 심하면서 몸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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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가 오셨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걸 해드리고 싶어도 엄마 입에 맛있는 건 애호박 새우젓국 밖에는 없답니다. 그런 엄마 마음을 잘 알지요.
'엄마는 생선살 싫어한다. 뼈만 좋아한다'는 말에 진짜로 엄마는 생선뼈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 같은 거지요. 늘 가장 싼 야채, 특히 이 계절에 가장 싼 야채가 호박이고 엄마의 입맛은 가격에 맞춰 정해졌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랬지요.
고기반찬을 해드려도, 예전부터 좋아하시던 굴비를 해드려도 '속이서 안받어서 그려. 나는 호박이 제일이여. 너 자꾸 반찬 신경쓰믄 나 빨리 간다.' 하시네요.






엄마가 오셔서 짐을 풀면서 손에 비닐로 싼 걸 하나 들고 나오시며 겸연쩍어 하셨습니다. 그걸 냉장고에 넣으시면서 '이거 다시다여. 느이 집이는 다시다 없잖여. 호박 끓일 때 다시다 좀 느야 맛있어' 하셨어요. 아침에 새우젓국 넣어 끓이면서 다시다 한 숟갈 듬뿍 넣어 드렸습니다.



전에 채윤이 어렸을 적에 이유식으로 먹일 시금치 죽에 다시다 넣으시는 시어머니를 보고 기겁을 했던 생각이 나요. 시어머니 역시 고향의 맛 다시다를 과다복용 하시지요. 물론 가족들도 함께 과다복용하고요. 그러시며 '나는 미원은 안 쓴다. 미원은 몸에 나뻐' 하셔요.ㅋㅋㅋ


아침에 요리하며 다시다 한 숟갈  팍팍 아낌없이 써줬는데, 그거 한 숟갈 쓰자마자 엄마와 시어머니가 동시에 사랑스러워지네요.
'고향의 맛. 다.시.다.' ㅋㅋㅋㅋㅋ




간장게장을 담궜다지요.
아직 살아 움직이는 알이 가득찬 암게를 누가 주셨어요.
워낙 비싼 놈이니깐(암게니까 놈이 아니구나....) 가끔 엄마생신 때나 몇 마리 사서 꽃게찜을 해봤지 우리 먹자고 사보질 않았었지요. 이런 기회에 나도 꿈에 그리던 간장게장 한 번 담아보자 했습니다.


안 해 본 요리를 할 때는 네이버님께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르고 정확하지만 웬지 이럴 때는 꼭 엄마한테 전화하고 싶지요. '엄마! 간장게장 어떻게 담궈?' 이렇게 물어볼 때 확인되는 엄마의 존재감이란... 결혼한 딸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이지요. 엄마 역시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아, 우리 딸이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하시며 내심 좋아하시고 의욕에 넘쳐 설명하시는 걸 느낄 수 있지요.

'그거, 솔로 게를 깨끗이 씻어서 진간장이다 푹 담궈. 그리고 며칠 있다가 그 간장 따라내고 끓여서 한 다시 담궈놔' 게장이 그렇게 쉬워? 하면서 디립다 진간장을 쏟아 부어놨지요.


그런데... '이거 너무 짠 거 아냐?' 아무래도 찝찝합니다. 아무래도 네이버 선생에게 확인해봐야겠다 싶어서 보니깐 그게 아니드라구요. 아, 순간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우리 엄마가 그래도 한 요리 하셨는데 이렇게 터무니 없이 가르쳐주시다니.... 엄마.....
마음을 추스리고 엄마한테 전화했습니다. '엄마 그렇게 하면 너무 짠거 아냐?' 했더니 '이~ 게가 딱딱혀서 갠찮여' 하십니다. 아! 엄마가 어렸을 적에 해준 간장게장은 꽃게가 아었어요. '독게'(충청도에서는 그렇게 불렀는데 '돌게'라는 뜻으로 추정됨)라는 아주 딱딱한 민물게 였습지요. 아주 딱딱한 게를 아주 짜게 게장 담가서 망치로 두드려 깨서 살을 발라서는 거기에 갖은 양념을 해주셨지요. 아! 맞다. 엄마는 꽃게로는 간장게장을 한 번도 안해보셨던 거예요. 꽃게로는 항상 양념게장을 하시고 독게로는 간장게장을 하셨지요. 그런거였어.
마음을 놓고 네이버 선생이 가르쳐준대로 간장에 물을 섞어 파, 마늘, 생강, 청양고추, 마른고추 넣어 팔팔 끓여서 부었습니다.


한참 요리 중에 엄마 전화가 다시 왔습니다. '야, 너 그 게가 싱싱허믄 찌게 끓여서 먹어. 된장좀 풀고 끓여서 너도 먹고 김서방도 줘라. 니가 어려서부터 게찌게를 좋아혔잖어. 알었지. 싱싱허믄 찌게를 끓여. 그리고 게는 딱쟁이가 위로 오게 넣어서 간장 부어야 헌다' '알았어. 엄마. 그런데...' 뚜우뚜우뚜....
당신 말씀만 끝나면 바로 전화 끊으시는 거 주 특기. 그 뚜우.... 하는 소리의 여운에서 나는 들었습니다. 엄마의 침 넘어가는 소리를... 엄마가 지금 게찌게를 드시고 싶은 것입니다. 싱싱하고 알이 가득찬 놈으로 끓인 걸 말이죠. 담번에 엄마한테 갈 때는 게를 사갖고 가서 찌게를 끓여드릴 참입니다. 물론 제가 처음으로 담궈본 간장게장도 한 마리 가져다 드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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