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이름하여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이 산후조리 마치고 서점에 배포되었습니다.

책은 서점으로 갔지만, 이놈이 잉태된 곳, 싱크대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이런 아이(책)로 자라면 좋겠습니다. 


늘 싱크대 앞에 서는 주부가 읽습니다.

(어머, 이건 함께 읽어야 해)
평생 술로 사신 아버님을 천국에 보내 드린 후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건넵니다.

(나만 읽을 책이 아닌걸)
목사의 특권의식, 복음은커녕 상식과도 멀어진 교회에 대한 환멸로

가나안 성도가 될까 고민이 깊은 친구에게 선물합니다.

(아내가 좋아하겠는걸)
깊은 기도와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 하는 아내에게 권합니다.

(세상에, 내 친구가 읽어야 할 책이야)
목사의 아내로 남모르는 눈물 흘리며 사는 대학 동창에게 보냅니다,

(이걸 읽히면 되겠네)
어제 상담했던, 아이 교육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 교우에게 선물합니다.

(우와, 나 책 잘 안 읽는데 줄줄 읽힌다)
동네 커피 친구 엄마들과 돌려 읽습니다.

(저자가 일기쓰기로 필력을 키웠다고?)

문화센터 글쓰기 교실에 등록할까 고민하는 동생에게 보냅니다.

(어머, 그 애가 까칠함이 잘못된 게 아니구나)

말이 닿지 않는 목사님의 설교, 청년부 수련회 강사 특강에 도통 동의할 수 없고 까칠한 질문만 올라온다며, 넙죽넙죽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이 잘못된 것 같다고 자책하는 친구에게 권합니다.

(엇, 그 친구도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겠는걸)

주일성수에 목을 매는 청년부 친구, 바리새인 같아 보여서 자주 비난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선사합니다.

.

.

.

.


이런 가능성을 가진 아이입니다.

지켜봐 주시

지만 마시고 함께 키워 주십시오. 케케.


그러면 꼼꼼하게 이런 안내까지 드리고 마칩니다.


알라딘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YES24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인터파크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갓피플몰에 있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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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항상 행복해보여. 그런 너가 참 부러

이 말이 어쩐지 잊히질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받은 쪽지에 적혀 있었지요. 당시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버지를 잃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사춘기 여자아이였거든요. 친구들 앞에서 찧고 까불며 지었던 웃음은 슬프고 누추한 나를 감추는 위장술이었을 텐데. 친구는 제대로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실은 밤마다 아버지가 그리워 울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비빌 언덕이 없어지자 하루아침에 돌변한 세상은 낮도 밤처럼 어두웠고요. 친구가 본 제 모습이 진실이었으면 싶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가 계시고, 가난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항상 행복한나였다면요.

 

항상 행복해 보이는 나와 이른 나이에 생의 무게를 알아버린 실제의 나사이 불화를 중재한 것은 밤마다 쓰는 일기였습니다. 삶의 짐을 글로 옮기고 나면 묘하게도 무게감이 달라집니다. 이 희한한 경험은 저로 하여금 일상쓰기를 멈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경험에 세월이 더해지니 순환 고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루의 번뇌는 글이 되고, 써놓은 글은 하루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선형 선순환의 고리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것 같더군요. 어머나, 그 지점은 영원에 잇댄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로 빛이 들어올 틈 없는 일상의 숲에서 만나는 빈터였습니다. 거기로 갑자기 들이치는 천상의 빛이었습니다. 내 일상보다 더 큰 실재를 향해 눈이 열리고 사유의 지평이 열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설거지감이 쌓인 싱크대 앞에서도 순간이동으로 다다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아내이며 엄마로 사는 것, 딸이며 며느리이며 동시에 이 시대 부끄러운 이름 목회자의 아내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나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 모두 사라지고 항상 행복한날이 있으려나요. 다행히도 저의 선생님, 상담자, 구세주 그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저를 부르셨어요. 쉬운 멍에, 가벼운 짐을 함께 메고 같이 지고 가자고요. 수고하고 무거운 제 일상의 짐들, 그분께 나아갈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랄 게 아니더군요. , 이제 저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보따리 일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무거운 짐이 쉽고 가벼워지는 신공을 보실 수도 있어요. 비밀인데요. 제게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기예가 있답니다. 일단 저의 성소(聖所) 싱크대 앞으로 오세요. 거기서 뵈어요!



----

그래서 책은 언제 나오냐는 문의가 쇄도하지는 않지만,
굳이 알려드립니다.

제가 오는 주일에 미주 코스타 참석 차 출국하게 됩니다.
코스타에서는 컨퍼런스 기간 내내 서점을 운영하는데요.
그곳에 뜨끈뜨끈한 이 책 깔아 놓으려고요.
저의 편집사님께서 마지막 일정에 박차를 가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30일 쯤 인쇄가 되고, 저는 '앗 뜨... 앗 뜨거' 하면서 들고 갈 것입니다.
어쩌면 여기보다 미쿡에서 먼저 출시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나란 저자! 뭐 이렇게 글로벌한 거야? ㅍㅎㅎㅎㅎㅎㅎㅎ)

서문입니다.
역시 블로그에만 공개합니다.
비밀입니다.
비밀은 새어 나가라고 있는 것이니께요.
막 발설하고, SNS에 퍼나르시고.... 그러시면 제가 뭐 막을 방도가 있어야 말이죠.
(소근소근) 이거 너한테만 보여주는 건데 아직 나오지도 않는 책의 서문이래.
너만 딱 알고 있어.' 이러고 소근소근 공유하시면 제가 알 도리가 있남유?


뽐뿌질은 계속 됩니다.
가진 건 블로그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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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출산이 아니고 네 번째 책 출간입니다.

아기의 이름 아니고 책의 제목은 <나의 성소 싱크대 앞>입니다.

편집장님과 톡을 주고받다가 '저를 가장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 같아요'

라고 했습니다.

앞의 세 책이 저의 '어떤 면'을 재료로 하여 쓴 글이라면,

이번 책은 저라는 사람의 거의 모든 면을 다 취합하여 엮은 글이기 때문에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일상'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성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저만의 답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오늘을 착한 마음으로, 가장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상이 영성입니다.

그리 살고 싶으나 마음 같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백이며 성찰이며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로 '싱크대 앞'은 영성이 현현하는 중요한 장소.

싱크대 앞 영성이라고 해서 주부들만을 위한 책은 아닙니다.

이 글을 보시는 누구라도 주 독차층에서 피해갈 수 없으니 한 권씩 사주실 생각,

단단히 하고 계셔야 합니다. 케케.


저는 책 제목을 조금 더 선정적으로 가자고 제안했는데요.

<모태 바리새인의 회심 일상> 요런 거요.

편집장님의 선택이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이었답니다.

(물론 둘 다 글의 제목입니다.) 정하고 보니 참으로 마음에 드는 책 제목이네요.

당분간 뽐뿌질이 이어질 예정이옵니다.

아, 아직 서점에 나오진 않았구요. 여기서만 살짝 공개입니다.  


본문의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오늘의 뽐뿌질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엄마, 강의 끝났어? 잘 했어? 어디야? 그런데 우리 저녁 뭐 먹을 거야?" '우리 저녁 뭐 먹을 거야?' 이것은 강사님, 강사님, 강의 너무 좋았습니다.’에 취해서 비행기 타고 있던 나를 현실의 나락으로 뚝 떨어지게 하는 주문이다.


(중략)


하이힐과 정장을 벗어 던지고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싱크대 앞에 서니 손바닥만 한 다육이 화분이 나를 반긴다. 그리고는 존재 깊은 곳까지 닿을 듯한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몸은 피곤한데 몸 너머의 또 다른 내가 새로운 에너지를 주입받는 느낌이었다. 이 편안한 자리에 서서 무슨 음식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어떤 찬사도, 깍듯한 의전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는 이 솥뚜껑 운전수의 자리. 사실 나는 이 자리를 사랑한다. 공들여 준비해도 한 번 먹어 치우면 끝이어서 오래 공로'를 붙들고 있을 수 없는 자리, 그래서 억울하다고 징징거리고 화내는 날도 많지만 실은 내가 이 하찮은 자리를 깊이 사랑한다. 강사님도 선생님도 아닌, 그저 밥 하는 아줌마로 돌아올 싱크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노동 또는 노력이 '공로'가 될 수 없는 곳일수록 본래의 나와 더 가까운 자리라고 생각한다. '주부' 역시 페르조나이지만 말과 글로만 평가받고, 칭찬받고, 돈을 받는 ''보다는 훨씬 더 가벼운 사회적 가면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서기만 해도 업적과 공로로 박수 받는 나로부터 물러서서 보잘 것 없지만 사랑받는 존재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싱크대 앞은 나의 성소(聖所)이다. 투덜거림과 피곤함으로 서는 날이 많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곳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복음성가 하나가 개사가 되어 입가에 맴돈다. ‘다시 싱크대 앞에 내 영혼 서네.’ 평생 부엌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구하고 경험했던 로렌스 형제를 내 감히 떠올린다.


(중략)


그리하여, 내게 가사노동은 ', 여자만?'하며 한 없이 툴툴거리면서도 그 앞에 서면 주님의 현존을 가까이 마주하는 자리이다. 툴툴대며 서는 거룩한 자리이다. 아침에 식구들을 내보내고나면 '빨리 설거지와 청소를 해치우고 커피 한 잔 내려서 메시지 묵상에 들어가야지.' 조바심을 치는 때도 있었다. 요즘은 가장 느릿느릿 하는 일이 아침 설거지이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서 이 여유로운 시간을 놓치면 오히려 아쉽다. 손으로 느껴지는 차거운 수돗물의 느낌, 물에 불은 밥그릇이 수세미에 닿으며 후루룩 씻겨나갈 때의 느낌, 뽀드득뽀드득 헹굼질 할 때 나는 소리, 이 모든 것을 그 분의 현존으로 들어오라는 초대로 알아듣는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아침 묵상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고급스런 컬러에 얼음 나오는 냉장고와 반짝거리는 싱크대는 없어도, 풀 메이크업에 드레스 입은 세련된 주부가 아니라도 누구 못지않게 느낌 살려서 이 대사를 읊조릴 수 있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 나의 성소 싱크대 앞 中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이 책 선물인데요.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다면 일단 읽히는 책을 줘야 한다~

,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 시즌에 부조금 끼워서 주기 딱 좋은 결혼 책 <와우결혼>.

꽃피는 결혼 시즌에 정장 빼입고 남의 결혼식 다니느라

영혼 탈탈 털린 친구나 후배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건네줄 책 <오우연애>입니다.

선물하시면 고맙다, 잘 읽었단 말 꼭 듣습니다!

  

<와우결혼>은 가정의 기초를 놓던 신혼 시절,

매달 남편과 투닥거리며 썼던 '부부가 함께 쓴 신혼일기'입니다.

<오우연애>는 결혼의 과업을 이룬 30대의 내가 20대의 나인 '은혜'에게 들려주는

애정어린 연애상담 이야기입니다.

  

글쓰기에서 원칙이 있다면,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되 오래오래 되새김질 하여 책 안 읽는 독자들도 읽게 만드는 글을 쓰자! 입니다. 책 덕후들이 모으는 책 말고, 책 안 읽는 애들이 ', 이 책 읽어봐.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돼' 하는 책이요.

 

그래서 선물하기 좋은 책입니다.

제 입으로 이렇게 말하자니

........

이제는 민망스럽지도 않습니다.

뻔뻔해졌거나 당당해졌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일 대구의 어느 교회에 가서 1교시에는 청년들 대상으로 연애 강의,

2교시에는 신혼부부 대상으로 결혼 강의하거든요.

강의 준비하며 내친김에 자작 뽐뿌질(문법 검사기가 부적절한 표현이라며 '구매 욕구 자극'이라고 수정하랍니다. 캬캬, 바로 이 말입니다.) 한 번 갑니다.

다시 사랑해 주십쇼. 오우연애! 와우결혼!

 

이쯤에서 [와우결혼] 서문 한 조각 읽어볼까요?

 

와서 보라! 는 이 자신감은 출처는 저희들 안에 있지 않음을 밝힙니다. 일단 와서 보시면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 결혼생활은 아니란 것을 금방 아시게 될 것입니다. 싸우고 두려워하고 비난하며 상처받기도 하는 결혼생활이지만 이것이 세워진 주춧돌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을 흉내내보는 부부의 사랑만으로도 감히 행복한데, 그 분의 사랑은 어떠할지를 가늠해봅니다. 진짜 사랑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 손가락 같은 결혼을 와서 보십시오.

 

[오우연애]에도 남부럽지 않은 서문 쯤은 있지요. 이것도 한 조각.

 

돌이켜보면 저 역시 연애 문제에 관한 좋은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래서 펼쳐 든 하늘 아버지의 말씀 성경에선 도통 힌트조차 찾기 어려웠습니다. 수 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하나님 말씀 속에 내 질문에 맞아 떨어지는 모범답안 하나가 없다니요. 이 지점에서 저는 성경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라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창조주께서 주신 인생사용설명서인 성경에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명료한 답을 적어 주지 않으시고, 생뚱맞게도 그 많은 사람들의 길고 긴 이야기들을 주신 하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본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맞닥뜨린 기로에서 뭔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자꾸자꾸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를 빗대어 보게 됩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이 질문에 이르러 저는 수많은 이야기에 담긴 그 분의 배려와 사랑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 제 고민과 갈등을 포개며 하루하루의 산을 넘다 뒤돌아보니 어느 새 저 만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이야기를 빙자한 연애 훈수두기입니다. 성경적 데이트와 결혼을 꿈꾸는 은혜 자매의 연애이야기이지요.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은혜의 첫사랑부터 결혼에 이르는 이야기를 함께 훔쳐보게 되는 겁니다. 사실 은혜의 이야기는 필자인 저의 이야기이고, 제가 만난 많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남의 연애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때로 공감하고 때로 의문을 품으며 여러분만의 연애사를 써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다보면 여러분만의 답안도 찾아질 것입니다. 조금 먼저 살았다거나, 스스로 만족하는 결혼에 골인했다고 해서 제가 찾은 답이 여러분에게 모범답안이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외롭고 허접한 연애일상에서 이야기 라인을 읽어내는 눈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눈은 소망의 눈이고 믿음의 눈입니다.

  








선한목자교회 코이노리 카페에서 '나자연' 토크쇼를 합니다.

블로그 대문에 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요.

20대는 안 받음. 연령제한 있는 강의랍니다.

큐티진에 '유브갓메일_목적이 이끄는 연애'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글이

단행본 [오우연애]가 된 것 아시나요?

'목적이 이끄는 연애'가 저의 첫 번째 연애 칼럼이 아닌 것도 아실랑가?

'브리짓 자매의 미혼 일기'라는 꼭지로 짧게 연재했던 글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한 번 봐야겠습니다.)

제목을 무척이나 애정했습니다.

나이 든 교회 언니의 넋두리 컨셉의 글이었죠.

사실 제 관심은 브리짓 자매님들.

토크쇼를 기획하는 자매님과 마음이 딱 맞아서 기분 좋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애서적 밑줄 치며 읽고, 배우자기도 열심히 하면 사랑이 올 것 같았는데....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친구들은 하나 둘 유부가 되고,

청년부 수련회, 단기선교, 특새..... 도 다 식상해진,

연애강의도, 배우자기도도 다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들 만납니다.

유토피아적 연애 망상을 걷어내고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강의 준비가 아니라 창의적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갑갑한 일, 갑갑한 뉴스로 마음의 봄은 언제 오나? 싶은데

봄봄, 연애연애스러운 포스터에 토요일 아침 산뜻산뜻하네요.









 

 

 

우리 교회, 남편이 섬기고 있는 청년부에서 나자연 데이트스쿨을 열었답니다.

수강하는 청년들이 내내 듣기만 하는 강의가 아니라

들으면서 멈추고,

멈춰서 스스로 돌아보는,

돌아보고 표현하는,

결국 오래 간직할 질문을 남기는 스쿨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늘 그런 마음으로 강의, 특히 연애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헌데 시간의 제약으로 일단 다 쏟아부은 후에

멈춰 생각하는 것은 집에 가서 혼자 하게 만드는 형국이었습니다.

 

일을 잘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목사님과 함께 준비했습니다.

시간도 충분하진 않지만 넉넉하게 확보했구요.

4강까지 마친 후에 청년부 담당 목사님 부부 네 커플과 함께 토크쇼도 한답니다.

이런 거 참 좋아하는데요.

남의 교회 강의 가서는 할 수 없는 프로젝트가 성사되었습니다.

연애나 인간사에 관한 한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큰 배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커플 쇼윈도우.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는 목회자의 가정을 투명한 쇼윈도우 비친 모습에

비유하여 설명하시곤 하죠.

 

준비하면서 부담도 컸지만 기대도 못지 않았습니다.

담당 목사님께 저 포스터를 전송해 받고는

'핑크색 하트 없는 연애강의 포스터 너무 좋다!' 했는데요.

포스터를 담긴 뜻이 있었더랍니다.

강의도 들어보지 않고 강사의 뜻을 헤아려 담아냈더랍니다.

작은 꽃들이 저마다 자기 빛깔을 내고 있어요.

생긴 모양대로 활짝 꽃피우는 것, 꽃의 소명이겠지요.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할 청년들 역시 저렇듯 자기를 꽃피워야겠지요.

 

다섯 번의 강의로 사람이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나 이 과정이 모두 마칠 즈음에는 저마다의 가슴에 꽃봉우리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긴 인생 여정을 통해서 그 꽃을 활짝 피워가겠다고 마음 먹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애와 결혼이 그 꽃을 피우는 흙과 바람과 비가 되어야겠지요.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여정이겠지만요.

 

저의 숙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어' 이 과정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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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단 한 번도 똑같은 강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어제 오늘 비슷한 연령의 청년부 수련회에 똑같은 연애강의를 했다고 해도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강의안과 ppt의 순서를 완벽하게 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매번 조금씩 바꾸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듣는 사람은 달라졌는데 나는 똑같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읊어대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강의와 강의 사이에 텀이 있다면 그간에 공부한 것을 보충하여 강의안을 업데이트하고, 연일 같은 강의를 하게 된다면 구조를 바꿔서 ppt 순서를 뒤섞거나 정 바꿀 것이 없으면 폰트라도 바꿉니다. 엄마가 어려서부터 제게 그랬습니다. '너는 새 것 흔(헌) 것이 없다. 옷을 새로 사주면 아껴서 입어야지 새 것만 그렇게 입느냐' 저는 새 것을 좋아합니다. 내 강의 한 번 듣는 청년들에게 나 역시 그들을 한 번의 소중한 만남으로 대하자는 고귀한 마음도 있지만 일단 제가 뭐든 새로워야 재미나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파는 장사꾼이라면 적어도 기계로 찍어내는 기성복이 아니라 단 한 벌의 맞춤옷을 팔자는 자부심 같은 것도 조금 있습니다.

 

때문에 강의하러 가는 길, 그 어떤 때보다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늘 떨리고요. 강의하러 가는 심장이 떨리지 않을 때가 강의를 접을 때일 것이다, 생각도 합니다. 경건이라기 보다는 '가난'이라고 해야겠네요. 마음이 한 없이 가난해집니다. 한 번의 연애강의가 도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는 책임 없어요. 한 번 막 쏟아놓는 강의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요. 당신이 하세요. 당신이 내 영혼도 데우고 저 사람들의 영혼도 데워서 뭐든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그리고 사랑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소망의 불을 붙이세요. 그게 내 몫이 아니라서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낙심이 되고 슬프고 한없이 가난해집니다. 내 책임 아닙니다. 당신 책임입니다.' 설상가상, 평소 듣는 일이 없는데 강의갈 때 찾아 듣게 되는 찬양이 뜬금포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은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주시리

 

왜 이 찬양이 강의 갈 때마다 영혼에서 울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찬양 하다보면 자연스레 '하늘 소망'이 연이어 나옵니다. '나 지금은 비로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얼굴들 많이 생각나 때로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너른 품 날 안으시는....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연애강의 하러 가면서 이렇듯 비장한 찬양을 흥얼거리는 거 참 우습죠? 어쩔 수가 없습니다. 찬양하다보면 천국에 가 있는 그리운 얼굴들이 늘 생각나고, 이 길 끝에서 모두 만나 기쁘게 웃게 될 날을 그려보고. 왜 이러는 걸까요? 연애강의에서 만나는 청년들의 슬프고 외로운 눈빛, 좌절이 가득한 눈빛에 마음이 늘 아픕니다. 두어 시간 소망도 주고 위로도 하고 따끔한 질책도 하고 가끔 웃겨주고 오면 이들의 삶이 무엇이 달라질까요? 설령 애인이 생기고 결혼을 한다한들 갑갑하던 생이 행복으로 돌아서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연애강의 한답시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걸까요? 생각이 여기 쯤 닿으면 아프고 외로운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자동차 앞 유리에 등장하며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강의안이 있지만 강의안의 순서를 못 외우고, 못 외우기 때문에 강의안 없이 절대로 강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강의안을 보고 강의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갔던 강의에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 제 가슴에 다시 박혔어요.  "제가 뭐라고 여러분께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제가 하는 말이 정답도 아니고요" 강의 준비하는 제가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 '여보, 나이 서른이 되면 다 알아. 모르는 게 없어. 그러니 함부로 가르치지 않아야 해' 이 말에 세뇌된 탓일까요? 어쨌든 툭 나온 말을 다시 가슴에 담아 강의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유난히 강의하면서 눈빛과 마음이 통하는 때가 있는데요. 오늘 강의가 그랬습니다. <큐티진> 독자들이기도 하고, 강의 요청을 해 온 자매 얼굴을 보기 전에도 마음에 들더니 오늘 보니 더 마음에 들더군요. 강의 마치고 담당 목사님, 부장 집사님 배웅을 받으며 주차장에 나왔고 출발하는데 이 예쁜 자매가 뛰어 나왔습니다. 쇼핑백에 간식을 가득 담아서 가시는 길에 드시라고 하면서요. 수련회 주제가 '응답하라 1994'라서 추억의 간식이 준비되었다네요.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울먹이며 갔던 길, 두 시간 만에 반대방향으로 운전하는데 아폴로 찍찍 빼먹으며 쫀대기 찢어 먹으면서 설탕가루 치마에 흘리고 난리났습니다. 하나님 목소리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야, 너 진짜 인간이 강의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진짜 너 인간이....' 예, 제가 상당히 분열적인 인간이구요. 며칠 후 다시 강의 가는 길엔 언제 쫀대기를 질겅질겅 했냐는듯, 그대로 천국 가서 하나님 만날 것처럼 감정에 복받쳐 '저 망망한 바다 위에.....'를 부르며 어느 수련회 장소로 갈 겁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이런 제가 뭐라고요..... 

 

 

 

 

 

 

 

 

 

 

 

1. 빵 터지지 않아도 괜찮아.

2. 끼리 서먹해도 괜찮아.

3. 매칭 프로그램이라도 괜찮아.

 

'나자연_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연애강의 하면서

강사로서 나 자신이 되기 어려운 지병들을 하나 씩 치우는 중이다.

 

1. 대학에서 음악치료 강의를 할 때도 제일 힘든 순간은 '웃기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안고 돌아올 때였다. 웃기지 않은 강의나 설교는 심지어 죄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물며 연애강의 할 때의 압박이라니. 많이 좋아지고 있다. 빵빵 터지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하나라도 가슴에 담아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겠고. 빵빵 터질 때 수강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에는 도움되겠지만 내가 가슴으로 전하고 싶은 것까지 함께 날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좋은 치료제가 되었다.

 

2. 최악의 강의로 기억되는 강의는 3000명 청년부의 수련회 강의. 청년이 3000명, 수련회 참석자 200여 명, 내 강의에 들어온 사람 20여 명. 강의 끝날 때까지 아이스 브레이킹이 안 되어 죽는 줄 알았다. 끝까지 서먹하고야 말았다. 지나고 따져보니 대형교회 청년부 내의 역동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한 교회 청년부'라고 할 때 느껴지는 젊은이들 끼리의 상콤한 연대감이 전혀 없었던 것. 말하자면 같은 교회 다니는데 거의 서로들 모르는 사이라는 것. (오메!) 사실 20~80 명 모이는 청년부 강의가 제일 재미있다. 서로들 편안하게 때문에 리액션이 자연스럽고 청년스럽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서먹한 강의의 기억은 두고두고 생각할 꺼리를 던지며 치유효과를 내고 있다. 그래, 서먹해도 괜찮아. 강사 탓이 아닐 때도 있어.

 

3. 또 하나의 최악의 강의는 매칭프로그램 강의이다. 뭐야뭐야, 나만 사람이고 내 앞에 앉은 이들은 다 정장으로 예쁘고 멋지게 꾸며놓은 밀랍인형들인 줄 알았아. 한두 번 더 경험하면서 긴장할 수밖에 없겠구나,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어도 표정이며 행동 하나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겠다는 것을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처음의 당혹감은 오히려 공감과 연민으로 바뀌어 더욱 기도하는 마음으로 강의에 임하게 했으니, 이 병도 호전되고 있는 중이다.

 

 

어제는 어마무시한 시간 운전을 하며 영월에 다녀왔다. 영월군의 남남(南男) 30명, 새터민 여성(北女) 30명의 매칭 프로그램 강의였다. 이름하여 통일 데이트. 매칭 프로그램에 긴장과 서먹은 기본일 것이고. 게다가 남남 북녀라니! 문화의 차이를 어떻게 뛰어넘어 공감을 끌어낼 것인가. 게다가 주최측에서 요구하는 단 한 가지는 '웃겨주면 된다' 다 갖췄네, 다 갖췄어. 나란 강사, 취약함의 종합 선물세트가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남편한테 '개 망하고 올게' 유언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었다. 결론은, 개 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망하지도 않았지만.  

 

 

**************

 

복잡한 하루였다. 지난 주 토요일에 콩쿨 나갔던 채윤이가 기대 밖의 수상을 해서 전국 결선에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콩쿨 장소에 혼자 떨궈놓고 영월로 간 것이었다. 결과는 둘째 치고 다들 엄마와 함께 하는데 짐 맡길 곳도 없이 혼자 대기하고, 추첨하고, 연주해야 했던 채윤이. 음악 시켜놓고 경제적 지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몸으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엄마라서 마음이 한없이 짠했다. 영월 가는 길에 제천에 들러 친구 민맘을 만났고, 채윤이랑 동갑인 민이를 잠시 만났는데 그냥 위로가 많이 되었다. 나는 늘 민이에게 마음이 쓰이고 민맘은 우리 채윤이 걱정을 해준다. '기도할게' 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 마음이 꽉 들어찬 말임을 알기에 그냥 힘이 된다. 잠시 만나 점심 먹는데 그 짧은 시간이라도 편히 쉬라고 의자가 편한 곳으로 데려갔다. 하고 싶은 얘기를 반도 못 하고(반이 뭐야! 10% 못 하고) 헤어졌지만 커다란 쉼과 위로가 되었다. 강의에 대한 총평, '개 망하지 않았음'은 순전히 민맘과의 만남과 기도 덕이다. 제천 찍고 영월 고고씽 한 덕에 채윤이에게 지은 죄로 인해서 괴로웠을 마음에 마데카솔 바르고 온 느낌이다. 최악이 될 뻔한 하루가 좋은 날 된 긴 사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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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인가? 가상의 청년들 모임에서 있을 법한 보이지 않는 사랑의 작대기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그려본 것입니다. 연애강의 할 때 쓰는 ppt의 한 페이지입니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바라볼 때는 동그라미와 화살표에 불과하지만 저 안에 씌여진 이름들은 아주 그냥 몸살을 하며 삶의 많은 에너지를 막 흘려보내고 있겠지요. 몇 달 전에 청년들의 성에 관한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진행하시는 분의 클로징 멘트로 그럽디다. '여기 나오신 패널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기혼자다. 우리는 집에 가면 배우자가 있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 문제는 아니다. 너희의 문제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었겠지요.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라는 뜻이었겠구요. 이렇게 이해를 하면서도 순간 속에서 욱하고 올라왔어요. 아직 저 화살표를 온전히 전지적 시점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닌 게 아니라 제 강의와 글의 최대 취약점은 '과도한 공감'이라지요.

 

 

 

 

한 20여 년 만에 폴투르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그 이후 나의 모험은 상담과 여행, 회합, 의학회의, 저술의 경험을 통해 전개되었다. 그리고 지금 출판사에서는 책을 또 한 권 쓰라고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다. 나는 책을 더 씀으로써 지금처럼 아마추어가 아닌 저술을 직업으로 하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대중을 즐겁게 하는 그런 저술의 기법을 익히라고 할까봐 염려된다. 지금처럼 단순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저 내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을 아무런 꾸밈없이 기술하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다 깜짝 놀랐습니다. 강의와 글쓰기를 하면서 늘 소심하게 서성거리는 저의 마음을 그대로 써놓으신 것 같잖아요.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또 어떤 독자는 내가 늘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고, 그렇게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나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고 나무랄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것은 생생한 체험이 이론보다 더 사람의 관심을 끌고 더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내 평생의 일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메, 이거슨 나으 두려움! 폴 슨상님, 커피 한 잔 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천국에 계시죠. ㅠㅠ 그럼, 나중에.

 

 

 

주제

내용

강사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연애

싱글, 외로움, 연애, 헤어짐,

스킨십과 성

정신실

2

기질을 넘어 사랑을 찾다

MBTI로 보는 나와 그(그녀)

정신실

3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기

연애와 자아상 :

부모를 떠나 나 자신이 되기

정신실

4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결혼 이야기

김종필

정신실

 

 

 

연애강사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손가락 끝이 살짝 말려들어가는 것은 어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말려들어가기로 작정한 것도 있습니다. 연애 '전문' 강사가 아니라는 자의식 때문이죠.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연(然) 하다보면 저 자신의 중심이 흔들려 행복하지 않을 것 같구요. 그러자! 폴 슨상님, 또 한 말씀. "또 내가 모든 영역에서 아마추어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는 내 개인적인 문제-특히 열등감과 자신감의 결핍-도 한 몫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 까닭은 프로가 아마추어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 지식이 훨씬 못 미치더라도 철학, 신학, 심리학의 영역을 부담 없이 산보할 수 있다. 이런 무지는 프로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중략) 아마추어는 무엇을 좋아해서 하는 사람이다. 아마추어의 매력이자 장점은 그저 좋아서 하는 그것에 있다. 아마추어가 하는 일은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이기 때문이다." 내내.....내 말이..... 아 진짜 미쵸! 폴 슨상님, 진짜 저랑 맥..... 아... 아닙니다. 하이튼 나중에 천국에서 뵈어요.

 

 

 

 

이율배반적으로 이 포스팅은 아마추어 연애강사 정신실의 10년 역작. 4 데이트 강의 홍보입니다. 어느새 10여 년이 되었어요.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찔끔찔끔 강의하고 글쓰고 책낸 것을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라는 타이틀로 정신실 표 데이트 강의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마추어이고, 늘 비슷한 얘기를 하고, 제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철학, 신학, 심리학을 얕게 산보하며 다니는, 덜 책임지고 싶어하는, 지나치게 공감하는 정신실 표 연애강의입니다. 연애 고민은 연애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로스에만 머물러서는 오래 가는 사랑은 불가능하기에 반드시 '나 자신'이 되는 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따로 따로 했던 강의들을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라는 한 줄에 꿰었습니다. 1강~3강 까지는 제가 강의하고 4강의 결혼 강의는 남편과 더블 강의로 진행합니다. 필요한 곳에서 불러도 주시고, 소개도 부탁드려요.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열심히 하고 쫌 잘 할 때도 있습니다.

 

 

 

 

쭉 나열한 그림들은 3강에서 쓰는 ppt들인데 매우 애정하는 강의입니다. 저의 10년 공부와 마음의 여정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방법이 따로 있나? 에 대한 답을 10여 년 지난한 삶으로 얻은 것을 담았습니다. 답이 뭐냐구요? 여기서는 안 알랴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이 포스팅을 시작으로 앞으로 제가 하는 강의를 정리해서 블로그 공지란에 걸어두려고요. 강사헌팅 차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최소한의 정보를 드려야 할 것도 같구요. 차제에 대놓고 홍보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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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에니어그램'이란 제목으로 책의 마지막에 들어간 글의 원문입니다. 에니어그램의 역사와 더불어 에니어그램과 커피가 콜라보 된 이유 등을 밝혔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에니어그램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에니어그램의 기원에 대한 의구심,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인 의심증 같은 것으로 에니어그램이 찜찜하신 분들께 드리는 글이기도 한데요.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블로그에 걸어 놓습니다.


********


본인이 하는 설교와 눈에 띄도록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목사님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청년들이 있었다
. 그 청년들을 위로하고 다독이기 위해 어느 선배가 이렇게 조언을 했다는 얘길 들었다. ‘목사님의 삶은 보지 마. 우린 설교만 들으면 돼. 설교에 은혜 받으면 되는 거지. 그분은 우리에게 설교하기 위해 계시는 분이야.’ 이 얘길 들었던 몇 년 전, 분노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느꼈다. 설교만 듣고 삶은 보지 말라고 조언하는 선배. 과연 설교만 듣고 설교대로 살아서 좋은 신앙인이 될까? 그 선배의 조언을 듣는 후배들은? 이 말이 아프게 가슴에 남아 농익으면서 그 선배라는 친구의 두려움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설교와 상충하는 목사님의 삶을 보고 통합해낼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먼저 눈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목사님의 설교와 삶이 아니라 자신 안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주어진 신앙의 규율을 그대로 지키는 삶은 일차적으로는 안전하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성장은 반드시 내면의 삶으로부터 시작되고, 어느 시점이든 우리는 그 삶으로 초대받게 되어있다. 그 초대는 피하고 싶은 고난을 통해서 갑자기 들이닥치듯 올 수도,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목마름의 모양으로 올 수도 있겠지만 분명 내면으로 오라는 초대장이다.

설교는 좋은데 설교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목사님, 신앙은 좋은데 비도덕적이고 편협한 인격을 가진 신자를 찾는 일은 서울 야경에서 십자가를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신앙의 열심과 인격적 건강함의 부조화는 목사님도 인간인데,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하지하는 말로 쉽게 면죄부를 받곤 한다. 높다란 강단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세속의 범부조차도 죄라고 생각하여 하지 않을 일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며, 그것이 드러나는 경우에도 당당한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당황한다. 그러나 마냥 비난하고 비아냥거릴 수만은 없는 것은자가 자로 바뀐 기독교인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 당신, 설교가 유창한 목사님, 누구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 권사님, 탈세한 돈으로 건축과 선교에 공헌하는 장로님. 우리 모두 말이다. 전대미문의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 그리하여 눈에 띄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 한국교회를 향해서 감히 안티 크리스천들이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들로 조롱을 해댄다. 그 야유와 비난 속에 담긴 초대를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채움이 아니라 비움으로 고지가 아니라 낮은 곳으로, 뼈아픈 성찰의 자리로 나오라는 주님의 초대로 읽을 수는 없을까.

연금술에서 바스 헤르메티스’(‘vas hermetis’ 라틴어로 헤르메스의 그릇’)라고 불리는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그릇이 있다. 그 안에 납을 담고 그릇을 밀봉한 뒤 열을 가하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행여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서 열기가 새어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릇을 테메노스’(Temenos) 즉 심리적 그릇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나만의 비밀이 있는 장소이다. 새어나가는 비밀이 없이 고요히 침잠한 심리적 에너지가 쌓일 때 납이 금이 되듯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이 테메노스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비밀스런 장소이며 그 안에 담긴 은밀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중심, 속사람.

한국 개신교와 더불어 우리들 자신의 영적인 위기는 속사람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림이 아닐까. 목사님은 설교만 잘 하면 되고, 성도들은 주일 성수나 십일조 여러 가지 봉사를 통해서 믿음을 입증해내면 되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아온 탓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성찰을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는 방법,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 책은 내면의 삶을 돌아보기로 결심하고 그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지도 한 장과 같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내면, 즉 자신의 속사람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지도이다.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의 동기, 나조차도 속고 있었던 왜곡된 동기를 알려주는 아홉 개의 성격유형은 영적인 의미로는 아홉 개의 옛 자아또는 거짓자아’(4:22)이다. 구원과 회개, 성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아성찰은 이러한 거짓된 자아를 날것으로 들여다보고 그에 직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에니어그램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두려운 작업을 수행하는데 더없이 적합한 도구이다.

 

지금 여기서 에니어그램을 만나기까지

에니어그램의 기원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고, 사막의 교부들로부터라고도 하지만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일대일로만 비밀스럽게 전해졌다고 하니 기원을 정확하게 추측할 방법은 없다. 현대에 이르러 구르지예프(Geargei Ivanovitch Gurdjieff)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알려진 에니어그램은 1970년대, 깊은 연구와 분별을 통해 미국 가톨릭의 예수회 신부회 영성수련의 도구로 채택되었다. 국내에는 역시 가톨릭의 성심수녀회 박정자 수녀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소속 한국에니어그램 연구소를 통해서 수도자 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기도와 성찰을 돕기 위한 성찰의 도구로 가르쳐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인 내가 인생의 오후가 시작되는 중년 즈음에 가톨릭 영성의 에니어그램을 만난 것은 큰 은총이었다. 철이 들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성화는 내게 풀지는 못하지만 꼭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믿음과 더불어 인격이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갈망이 컸지만 그럴수록 그 간극이 더 커져가는 것만 같아 좌절할 뿐이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믿음이 좋다는 주변의 사람을 둘러보아도 성화는 애초부터 도달하지 못할 목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고 자란 개신교의 화려한 교회당 뒤에 무너져버린 도덕성, 뒤틀려버린 성품과 인격에 깊은 좌절에 빠져있을 때 에니어그램을 만났고 성화의 길은 내면의 여정임을 비로소 마음으로 알아듣게 되었다. 에니어그램이 나를 직접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해 견인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막혀있는 것 같은 벽에서 내면으로 가는 문이 되어준 것이다. 이걸 발견한 게 어딘가! 그러나 가톨릭 영성의 전통 안에서 배우는 에니어그램은 쉽지 않았다.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서 쉬운 얘기도 더욱 어렵게 들렸고 무엇보다 보수적인 개신교인인 나로서는 담을 넘나들며 배움을 갖는다는 것이 늘 두려운 일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왜 이런 자기성찰을 안내하고 돕는 것들이 없을까? 심리학을 빌어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계발을 권하든가 아니면 심리학 자체를 악한 것으로 여겨 배척하는 입장들만 난무하는 것 같은 우리 교회, 우리 개신교하는 생각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심리학과 영성 사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외롭게 때로 모험적으로 수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책은 가톨릭 영성의 에니어그램에 개신교 신학의 옷을 입혀보자는 바람으로 개신교 목회자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걸음마 하듯 시작한 연재 글(<QTzine> 20111~ 201212)의 산물이다.

 

에두르지 않는 의 고발

 에니어그램에 접근하는 방식이 여럿 있다. 크게는 뉴에이지적인 접근, 심리유형론적인 접근, 그리고 영성적 접근이다. ‘거짓 나를 알고 벗어버리면 참 나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뉴에이지적인 접근이고, 내 유형을 발견하고 옆 번호인 날개를 펼쳐 잠재력을 극대화하라는 것은 심리유형론적 접근이다. 이 책의 에니어그램은 기독교 영성적 접근임을 밝혀둔다. 앞에서 언급한 성심수녀회의 박정자 수녀와 한국에니어그램 연구소를 통해 보급된 에니어그램을 말한다. 유형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자기계발의 도구로 에니어그램을 사용하는 것도 유익이 있을 것이다. 다만, 신앙의 여정에서 에니어그램을 심리유형론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치명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에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단지 진통제로만 그 약을 다 소비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성적 에니어그램이 가진 최대의 강점은 에 대한 에두르지 않는 진단이다. 위로받고, 받아들여지는 말랑말랑한 내적치유를 바라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이며 심리학과 영성의 다리를 놓는 지점이기도 하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아홉 가지 성격유형이 가지는 타고난 재능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근원적인 죄라 이름 하는 그림자가 된다. 우리의 강점과 약점, 달란트와 죄 짓는 지점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궁술에서 온 말로 표식을 놓치다.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죄란, 하나님이라는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열정적인 봉사, 섬김... 이런 것들이 좋은 것이되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빗나가면 죄가 된다. 선물로 주신 재능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오직 그것으로만 살아보고자 할 때,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분노, 교만, 거짓, 질투, 탐욕, 공포, 방종, 파렴치, 게으름. 이것은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유형이 각각 지고 있는 근원적인 죄이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

기독교 전통에서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 또는 칠죄종(七罪宗)’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이 목록과 에니어그램의 근원적인 죄가 일치한다는 것이 매우 신비롭다. 일곱 가지 죄에 거짓과 공포를 포함시키면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근원적인 죄가 된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이 ‘7대죄목록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4세기 사막의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에바그리우스에 의해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이 가장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여덟 가지의 죄를 구별하여 ‘8가지 악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에니어그램의 기원을 사막의 교부들로까지 올라가 추측하는 것은 바로 이 에바그리우스의 죄 목록 때문이다.

 그 기원이 어떠하든지 구원의 여정에서 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를 지은 신원하 교수는 진정한 의미의 영적인 삶이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본래 지음 받은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는 삶이기에,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죄의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거저 받은 구원이나 성화가 관념적으로 들린다. 그러다보니 무감동의 식상한 교리 용어가 된 것처럼 역시 관념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기도를 시작할 때 인사말처럼 회개의 말이 나열되지만, 말이 화려할수록 내용이 공허함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안다.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윤리적인 죄,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열심히 읽지 않은 죄, 누군가를 미워한 죄.... 등을 제외하면 지금 당장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을 것 같지 않고, 떠오르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뭐 그렇게 죽을죄를 졌다고!’ 늘 속에서 맴도는 억울한 중얼거림 아닌가. 에니어그램의 근원적인 죄는 우리 인격에 새겨진, 뼈 속까지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벗어나 있는 죄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말하자면 내가 원래 나라고 알고 있는 성격 자체가 죄 된 모습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흔히 성격이라 불리는 우리의 내적인 페르조나’(perzona)가 우리 자신인 줄 알고 살 때 어떻게 치명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벗어나는지를 에니어그램 아홉 가지 유형이 보여준다.

 

당신은 유형이 아니라 인격 : 대화로 푸는 에니어그램

 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에니어그램은 위험한 도구이다.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역동, 동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인 접근방식은 듣는 사람을 당황케 할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이제껏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잘했다고 박수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거짓자아라고 말하기 때문에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당혹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에니어그램을 타인을 향해 적용하려 할 때는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네가 몇 유형인지 알겠어.’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어떤 가면을 쓰고 어떤 치명적인 죄를 일삼는지 알고 있어.’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뉘라서 감히 타인의 동기를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에니어그램은 철저하게 나 자신을 보는 도구로 사용해야한다. 사람을 번호의 틀에 가두고, 그들의 동기를 다 안다고 하는 순간 그 좋은 에니어그램은 나와 이웃을 살상하는 무기가 된다.

 하물며 에니어그램을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에니어그램을 알고 가르친다고 하는 순간 내가 모든 사람의 동기를 다 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옥을 헤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고심 끝에 이 책에서 유형설명을 대화체로 구성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끼는 제자 하나와 우리 집 거실에서 마주앉아 유형이야기를 하는 설정은 유형이 아니라 인격임을 잊지 말고 글을 쓰자는 마음이 담긴 장치였다. 어려운 에니어그램을 어떻게든 재밌고 쉽게 전달해보자는, ‘재미에 집착하고 지루함을 악덕으로 여기는 7유형적 집착이기도 하다. 각 유형과의 대화에서는 그들이 내는 감탄사 하나에도 느낌을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독자들께 하나하나 다 감지되지는 않겠지만 직관적으로라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에니어그램의 깊이와 넓이는 무궁무진한데가 우리 모두 자기 유형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는 장님 코끼리 다리만지는 식일 것이다. 7유형이 전달하는 아홉 가지 유형 이야기가 독자들께 어떤 식으로든 유형 이해의 한 측면을 열어 드렸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유형이야기 사이사이에 내적 여정에서 들 수 있는 의문과 답도 끼워 넣었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 경험에서 길어 올려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방식의 접근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설명이 필요한 독자들은 리처드 로어, 안드레아스 에베르트 공저의 <내 안에 접힌 날개>를 읽어보길 권한다. 영성적 에니어그램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모님의 커피와 에니어그램

 햇살이 들어 따스한 거실에서 제자와 마주 앉아 커피 한 잔과 함께 에니어그램 이야기를 나누는 설정. 글을 위한 설정이라기보다는 사실 내게는 흔한 일상이었다. 나의 제자들은 사모님이는 호칭 대신 모님이라는 고유명사 같은 호칭으로 부르며 찾아와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곤 했다. 커피를 볶고 핸드드립을 하여 함께 나누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커피와 함께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적여정을 나누는 일은 더더욱 그러하였다. 에니어그램이 오랜 시간 스승과 제자 간에 일대일로만, 비밀스럽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런 느낌이었을까. 여하튼 나는 커피를 마시며 에니어그램과을 도구로 삼아 두려움 없이 마음을 열어 보이는 대화가 좋다. 커피, 에니어그램, 대화는 궁합이 딱 잘 어울리는 삼합이다.

커피, 특히 핸드드립 커피와 에니어그램은 의외의 공통점이 많다. 커피와 에니어그램은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다는 것도 같다. 또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슬람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같다. 커피의 기원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커피 열매를 따먹은 염소이야기이다. 에디오피아의 아바시니아에 사는 칼디라는 목동은 자신이 치던 염소들이 빨간색 열매를 따 먹은 후에 잠을 자지 않고, 벌게진 눈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빨간 열매를 근처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가져갔고 수도사들은 이것을 악마의 열매라 여겨 불에 던졌는데 매혹적이고 좋은 향을 내더라는 것이다. 이후 커피의 각성 효과를 알게 되었고 수도 중에 졸음을 이길 수 없을 때 음용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예멘의 이슬람교도들을 통해서 커피가 아라비아의 전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이슬람의 와인이라 불리는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이다. 유럽으로 전해진 커피는 특유의 각성성분으로 인해 탄압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1605년에는 커피는 사단의 음료라며 음용 금지청원서가 교황에게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직접 마셔보고는 홀딱 반하여 커피에 세례를 준 후 가톨릭의 음료로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그랬던 커피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국민음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큰 교회마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카페교회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수피교의 수도자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에니어그램이 우리의 영적 여정에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커피와 에니어그램을 엮어 넣은 본문 속 비유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누리시기 바란다.

 

두렵고 떨리는 마무리

커피 한 잔과 함께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갈 때 독자들의 영혼이 사랑에 각성되는 은총이 있기를 기도한다. 이 글을 쓰는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열 너댓 권의 참고도서가 쌓여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나의 내면 성찰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장이 놓여 있다. 여러 권의 책을 다시 펼쳐 읽고, 일기장을 뒤적이며 지난 몇 년의 마음의 여정을 반추하며 느린 속도로 썼다. 일기장 옆에는 메시지 신약성경이 요한복음에 책갈피를 끼운 채로 어느 책보다 무게감을 가지고 놓여있다. 영적인 여정에서 길을 잃을 때나, 거짓자아인 내 유형을 벗고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의문이 들 때는 요한복음의 예수님께로 가곤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도 마음도 막혀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메시지를 펼쳐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분은 자의(自意)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하시는 분이다.(12:49-50) 거짓자아를 벗고 만나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노트북을 마주 하고 앉은 정면 왼편에 내가 자주 들여다보는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이 놓여 있다. 그 그림 속에서 탕자의 맨발과 벗겨진 신발을 본다. 그리고 아들의 더럽고 부끄러운 등에 따스하게 얹어진 아버지의 손을 바라본다. 이 영적 여정은 바로 사랑의 아버지 그분께로 가는 여정이다. 이 길의 끝에서 나를 맞으시는 저 따스한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신학자도 영성가도 아닌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 아닌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이 생각에 압도될 때는 너 따위가 무슨 내면에 관한 글을 쓰냐. 너 자신이나 잘 해라. 심리학도 신학도 아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네가 자격이 있는가.’는 목소리가 거세진다. 그럴 때는 내 안에 예수의 음성으로 살아계시는 성령님을 다시 초청한다. 그러면 그분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적시며 한 자 한 자 다시 써내려 갈 힘을 주셨다. 이렇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은혜가 있었음에도, 부족한 필력과 알량한 지식이 장애가 되어 아쉬운 글이 되고 말았다.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은 욕심인 것 같으니, 이제 여러 날 작업으로 뜨거워진 노트북을 덮기로 한다. 그저 이 책을 읽는 분들의 테메노스가 은총으로 달구어지기를, 그 거룩한 온기가 새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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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화가 홀워드는 자신이 그린 도리언그레이의 초상화를 전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 그림 속에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그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 헨리경이 어이없다 하면서 초상화의 잘생긴 젊은이와 우둘투둘하게 생긴 홀워드가 비슷한 구석도 없다고 합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이 책으로 출간되는 걸 몹시 고대했었지요. 그렇게 나를 드러내고 싶은 조바심은 얼마나 천박하고 지질한지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간이 임박했을 때,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다는 담당 간사님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얹어진 것 같았습니다. 내내 무거웠고, 아플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이 순간에 위의 홀워드의 말이 생각났지만, 그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나를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않았습니다. 이미 세상에 내보냈던 글이니까요. 여태 기고했던 것이고 블로그에도 떡하니 걸려있을 뿐 아니라 단행본 출간을 고대했으면서. '이 글 속에 나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책으로 만들어 서점에 깔아놓을 수가 없네요.' 라니요.


저는 천성적으로 저를 오픈하고 사는 것이 쉬운 것 같아요. 끝까지 속일 수 있는 것이 없구요. 그래서 남편에게 엽기적인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몰라도 오래 비밀리에 준비하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해준 적이 없습니다. 저의 내면이니 심지어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제 기질의 소산입니다. 그 때문에 기고를 하는 동안에도 블로그에 걸어놓고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기고할 때를 생각하면 몸으로 많이 앓으면서 썼던 것 같아요. 제 내면의 어둠을 드러내지 않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요. 그러고는 또 금세 고통은 잊어버리고 이내 써냈다는 것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칠렐레팔렐레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이 되어 나올 날이 임박하자 제 안에서 의외의 반응이 꿈틀거렸습니다. 정말 나오는 거구나? 어.... 어떡하지? 인쇄되어 나온다는 날은 가라앉는 마음이 극에 달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찾아와 읽어주는 여기 블로그도 아니고, 정기구독하는 분들이 정해진 매체도 아닌 저잣거리에 내보내며 새삼스레 안절부절하는 이 심정을 어찌 하오리까. 비록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을 강점 삼아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지만요. 내 속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드러낸 내 내면을 저잣거리에 내놓고 그 누군가가 읽고 있을 상상을 하면 마음은 벌써 지옥입니다. 그런데 그때 들은 소식이 인쇄사고로 이미 찍은 2,000부를 버리고 다시 찍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출간을 두려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내 부정적인 마음 탓인가, 괜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루한 기다림 속에 저자도 받지 못한 책(죠이 간사님들이 잘못 인쇄된 책을 미리 받으시고)을 읽고 쓰신 서평이 속속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리며 약간 불편심이 생겼습니다.


고상하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은 누군가가 맨 얼굴에 옷도 제대로 안 걸친 누더기 같은 내 속을 드러낸  책을 들고 읽으면서 '니가 그럴 줄 알았다. 니 속이 그렇지' 할 것만 같은 소설이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애써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나의 글이든 삶이든 무엇이든 그로인한 찬사도 비아냥도 내 것입니다. 아니 사실 찬사도 비아냥도 글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의 것입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에 비추어 나를 읽는것이고, 엄밀히 말하면 읽고 감동받거나 비판하는 것도 투사입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때 페북에서 자신의 책을 대놓고 홍보하는 저자들을 비아냥거렸었는데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운운하며 시작한 맥락과는 닿지 않는 분열인데 제 나름은 통합입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그래서 정말 미치도록 부끄럽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열심히  홍보도 합니다. 책 출간과 함께 죠이에서 기획하는 에니어그램 강의도 할 거구요. 다음 주 토요일에는 팟캐스트로 내보낼 강의도 녹음합니다. (이 부분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드러나고 감추는 것 사이에서 마음의 균형을 잘 잡기 위해 더욱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나를 너무 많이 집어넣은 글'을 내놓은 책임으로 더 투명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쓰는데 뜬금없는 눈물이 나네요. 어쨌든 책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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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죠이출판부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입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에니어그램"


잔뜩 기대하던 책이 어제(1월 27일 오전) 입고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짝 인쇄 사고가 있었습니다.
출판부 스텝들이 긴급히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사고의 내용은 일반 독자들 보시기에는 잘 모르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000부의 이 책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 끝에 결국 전량 폐기하고 다시 찍기로 했습니다.
도무지 책 만드는 이의 자존심으로 허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2월 13일 경에 서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다리시던 분들께 송구함을 전합니다.


이렇다네요.
여기에 쓴 저의 댓글이고요. 그제 제 마음입니다.


어제 연락받고 처음엔 아쉬움만 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곳에서 뭉클함 같은 것이 올라왔어요. 날짜를 지키는 약속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것을 지켜내는 결정이 귀하다는 생각에서요. 2000부가 서점에 나오자마자 팔렸다는 소식보다 2000부를 파기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더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죠이편집부 간사님들과 작업하는 과정 자체가 선물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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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좋아하세요? 사람 마음에 관심 많으시죠?

(뽐뿌질입니다. )

알려고 치면 한 없어 어려워지는 사람의 마음,
제대로 배우려면 한 없이 어려운 에니어그램을 커피와 엮었습니다.
출산 아니고 출간 임박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 본문의 일부입니다.


"핸드드립 커피의 세계를 알고 내가 누리는 최고의 기쁨은 커피를 통해서 지금, 여기를 누리게 되었다는 거야. 무슨 말인가 하면,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때는 휘리릭 타서 후루룩 마시느라 심지어 내가 커피를 마셨는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때가 있었어. 내 생각은 과거와 미래를 헤매고 몸만 현재에 있었던 것이지.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시간에 나는 후각은 물론이고 내 모든 감각을 일깨워. 커피 향을 맡고 주전자를 쥔 손의 감각을 느끼고 뽀글뽀글 부풀어 올라오는 원두를 보면서 이 순간을 충실하게 느끼려고 해. 몸과 함께 생각과 정서까지도 지금 여기를 살려고 하지. 그렇게 할 때 지금 여기서 보혜사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야. 거짓자아에 이끌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근심, 걱정, 계획세우기와 후회의 단편영화 돌리기를 멈추는 일,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일 거야. 또한 자아의 힘을 빼고 멈추는 일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는 사도바울의 편지 속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거야."


“MBTI가 열어준 내면의 여행은 내겐 입에 달고 구수한 삼박자 인스턴트 커피 같았어. 지금은 신선하며 맛있고 유해 첨가물도 없는 원두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지. 그 쓴 걸 왜 마시냐 하지만 신선한 원두로 잘 뽑은 에스프레소의 크레마에는 600여 가지의 향이 난다는 거 아니? 영성적으로 접근하는 에니어그램은 내겐 당장은 입에 쓰지만 그 깊은 풍미를 한 두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에스프레소 같아. 그러나 육미야, 인스턴트든 신선한 원두든 커피는 기호식품일 뿐이야. MBTI든 에니어그램이든, 성격유형적 접근이든 영성적 접근이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돼. 우리의 목적은 ‘사랑이신 그 분’이다. 우리 육미 의문이 좀 풀리고 마음이 가벼워졌을까? 같이 있으면 예가쳬프 한 잔 내려서 나눠 마시면 좋겠구나. 더 궁금한 얘기들 또 나누자.”



“커피의 맛과 향을 구분하는 용어들이 있어. 바디감, 신맛, 와인맛, 신맛, 과일향, 넛트향, 쵸콜릿향, 매운향... 사실 처음 커피를 배울 때는 도통 모르겠더라고. 한 모금의 커피에서 이런 것들을 느끼고 감별해내는 게 장난 같았어. 그저 쌉쌀한 커피향이면 됐지 너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커피를 알아갈수록 막연하기만 했던 그 맛과 향의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알아가는 것들이 더 맛있게 마시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신비한 존재야. 그런 우리를 유형의 언어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분히 작위적이게도 느껴져. 유형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도 못하지. 신맛, 쓴맛으로 불리는 언어의 수식이 커피가 아닌 것처럼 유형의 언어로 설명된 우리가 다가 아니야. 그러나 유형의 언어로 설명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묘막측하게 창조된 신비로운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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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좋은데 비도덕적인 행동을 일삼는 목사님. 믿음은 좋은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틀어져 고립된 채로 살아가는 신앙인. 이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신앙과 인격이 겉도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 야경에서 십자가를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요. 그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드러나는 내 모습에는 관심이 지대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돌아보는 데는 취약한 현대 사회, 그 속의 교회문화, 신앙교육 때문일 것입니다. ‘성찰 없는 신앙’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위기이며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영성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기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내 바람을 쏟아내는 통성기도는 쉽지만 침묵 속에 그분의 음성을 듣는 기도는 10분을 채우기도 어렵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일상에서 물러나 고독에 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목사님은 설교만 잘 하면 되고, 성도들은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을 통해 믿음을 입증하는 외면적 삶에만 치우쳐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을까요. 우리는 자기 성찰을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는 방법,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완전히 잃은 것 같습니다.


--- 출간 임박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의 에필로그 일부분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기 성찰의 방법 하나로 에니어그램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 책은 내면을 돌아보고 내적인 삶을 살려고 그 방법을 찾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내면, 즉 자신의 속사람으로 안내하는 좋은 지도입니다. 아홉 개의 성격유형은 영적인 의미로 아홉 개의 ‘옛 자아’ 또는 ‘거짓자아’ (엡 4:22)입니다. 나의 습관적인 행동, 그 행동 아래의 동기, 나조차도 속고 있는 왜곡된 동기를 알려주며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구원과 회개, 성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아성찰’은 나의 빛과 공로가 아니라 그림자와 연약함을 날것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두려워서 바라볼 수 없는 나의 어두운 내면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한 것이 에니어그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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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하고도 몇 개월 전,
'모님, 저 언제 언제 놀러 가도 돼요? 혼.자.요.'
혼자라고라? 혼자란 말이지?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하는데.
오기로 약속한 전 날, '모님, 저 친구 하나 데려가도 되요?'
올 것이 왔군. 이럴 줄 알았어.
'누구야? 언놈이야? 빨리 불어. 나 원고 쓰는 중이니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일단 불어.'
빨리 불질 않기에 남편이랑 마주 앉아 깃수 별로 이름 써놓고 하나 씩 지워가면 추측하던 기억.
그리고 둘이 교제 중이라며 집에 왔는데 아직 미공개 데이트라 저런 비겁한 편집으로 블로그엔가 페북엔가 올렸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청첩장을 들고 찾아 왔으니!

이제는 밝힐 수 있다.  팔뚝과 넥타이의 얼굴들을.
그런데, 이것들 왜 이러는 걸까요?
웨딩촬영 후유증인지 카메라 나오면 바로 앨범용 표정과 포즈 출동이니.


 

게다가 무려 온라인 서점에서 <와우 결혼> 도서 이벤트에 당첨되는 행운까지 얻었단다.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잌권에 당첨되었는데
그 쿠폰을 가지고 저자와 그의 아그들을 먹여주는 센스까지.
'출판 축하합니다. 출판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가 오그라들어서 울고 갈 버젼으로 노래를 부르고 불도 끄는 영광을 누렸다.


내게는 여러 의미로 특별한 제자이며 후배인 윰.
축하한다.
니가 그렇게 순한 양이 되어 수줍은 웃음을 웃는 것을 보니 정말 적응은 안 되지만...ㅋ

너희 참 잘 어울려.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넘고 넘으며 보석같은 결혼의 신비를 하나 하나 찾아가 봐.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응원할게.


 

역사는 팔뚝과 넥타이 커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가장 믿음직한 오빠 형준,
가장 믿음 좋은 아가씨(아 아니구나 이젠) 정현이 커플이 함께 했다.
이들에게도 역사는 있다.
"네? 저는 교회 오빠들은 별로....." 라더니,
어느 날 늦은 밤, 믿음직한 교회 오빠를 뒤에 감추고 나타났던 이 깜찍이가 예비 엄마가 되었다.
어린이 성가대에서 삐약삐약 노래하던 정현이가 아기 엄마가 되다니!

준비된 사람들 형준이와 정현이.
너희가 있는 바로 그 곳에서 깃발이 되고, 씨앗이 되리라 믿어.
또 다른 JP와 SS가 되어줄 것만 같아 만날 때마다 설렌다.


이렇게 싱글과 커플의 역사는 흐른다.
이 네 사람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외로운 싱글이었고,
내 짝은 도대체 어디 있냐며 싱글의 나날이 영원이 될 것처럼 막막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 설레는 연애가 시작되고,
핑크빛일 것만 같은 연애에 싸움의 먹구름이 끼어 눈물을 흘리고,
그러다 알 수 없는 힘이 이끌려 결혼 청첩장을 찍고,
결혼 준비를 하다 '이 결혼 해? 말어? 나 제대로 선택한 걸까?' 반신반의 하며 흔들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입덧을 하고,
그러다 다시 모님과 도사님을 만나러 오는 날이 있나니.
오랜 나날 싱글인 너에게도 역사는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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