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듯 말 듯한 돌멩이 하나가 마음 우물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돌멩이인가?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기분 탓인가?

아, 그래도 뭔가 묵직하고 불편한 게 있어.

 

손으로는 청소기를 돌리고 머리는 머리대로 돌아가고 있는 아침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뭐지? 아, 수영장 접수한 거 취소하기!'

몇 달 수영을 쉬다가 현승이 수영 재접수 하러 간 김에 충동적으로 접수했다.

(운동하라는 내 말은 죽어도 안 들으면서) '당신 수영 다시 해, 수영 다시 해'하는 

남편의 잔소리도 있고, 정말 수영이 좋고, 운동을 안 하니 허리며 목이 삐그덕 대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6월에 오전 강의들이 잡히고 있는데 모두 확정되면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 갈 수도 있겠다 싶다.

어머, 안 되겠네. 취소해야겠다.

이리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확 가벼워지는 것이 돌멩이가 있긴 있었나 보다.

 

100 미터 21초 기록을 가진 내가,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 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수영을 그렇게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신대륙 발견에 견줄 일이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전환한 이후 10여 년 가까이 꾸준히 아침 수영을 해왔다.

그간에 이사가 다섯 번이었으니 수영장 다섯 군데를 옮기면서도 용케 지속해왔다.

그런데 작년 여름 이후부터 아침 주부수영교실 가기가 점점 싫어지는 것.

수영은 좋은데 언니와 형님들이 계시는 주부 수영교실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저녁 시간으로 바꿔봤더니 주부수영 10 년 차 몸으로 직장인 마스터 반에 적응이 안 됐다.

이래저래 하다가 끊어버렸다.

 

가끔 현승이 데리러 가서 수영장을 내려다보노라면 발목이 힘이 발끈 들어가면서 접영 발차기가 하고 싶어지고, 어깨도 근질거렸다.

그런데도 왠지 아침 주부수영에 나가기는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많이 싫었다.

수영장을 그리워하는 몸이 마음의 거부감을 이겨서 갑자기 접수하게 만든 것 같다.

 

접수취소 하고 가벼워진 마음을 들여다보니 이제야 알아차려 졌다.

작년 4월 16일 이후로 아줌마들의 탈의실 토크가 진저리나도록 싫어졌다.

사실 그전에도 형님들의 탈의실 토크(아, 그 다양한 주제들!!) 듣기가 편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여 년 견딘 노하우가 있다.

입 꾹 다물고 내 할 일을 하다, 형님들이 동의를 요구하시면 한 번 웃어 드리면 되는 것.

 

세월호 침몰 뉴스를 처음 들은 건 수영장 형님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다 구출했대! 라고 했다.

그날 이후 한동안 수영을 마치고 나와 샤워실이며 탈의실에서는

선장 그 XX를  때려 XX야 한다, 로 시작해서 뉴스 보다 우느라고 시간 다 보낸다.

형님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선장의 팬티 차림 화면보다 

속옷 입고 입에 거품 무는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탈의실 토크의 주제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이들 학원 얘기, 매실 담그는 얘기, 미친 동서 얘기, 바람난 친구 남편 얘기 등.

전에는 그럭저럭 참아졌던 형님들의 일상 토크가 듣기 싫어서 드라이도 안 하고 나오기 일쑤.

그리고 얼마 후,

보상금이 한 애 당 얼마라며? 거 단원고 애들 대학 그냥 보내준다며? 

그때 그 언니들의 야릇한 표정.....

탈의실 민심은 확실히 그즈음을 기점으로 세월호에 대해 냉담해졌다. 

 

조금만 늦거나 핑계가 생겨도 수영장 가는 걸 빼 먹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한 번 빠지고 두 번 빠지고 끊어 버리기.

이제야 몇 달 전의 마음이 정리되어 보인다.

돌멩이의 정체는 그거였구나.

더 가벼운 마음으로 취소하기로 했다.

수영을 다시 해야 하는데.... 운동 해야 하는데....괜한 부담감도 내려놓기로 했다.

나, 다시 주부 수영교실 가기 싫어. 아무튼 지금은 싫어. 안 할 거야!

라고 내가 나한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나에게 그러라고 했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 다시 대림절에  (0) 2015.12.16
노란 칠월, 불 기도  (2) 2015.07.11
노란 사월, 걷는 기도  (2) 2015.04.25
노란 사월  (2) 2015.04.22
투사, 치유자  (2) 2014.09.26

 

 

2015년 4월 25일 오후 3시, 홍대 정문 앞

 

 

 

혼자 갔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또 다른 '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아기띠를 매고 노란 나비를 든, 또 다른 나.

 

 

 

말 없이 걷고 또 걸어 산울림 소극장을 지나고

신촌을 지나고 이대 앞을 지난다.

커다란 노란 리본 붙인 휴대폰을 가진 또 다른 나.

 

 

양복 입고 구두 신고 정장 가방을 든 또 다른 남자, 나.

 

 

 

 

아현을 지나 충정로로 향한다.

노란 선글라스 쓴 예쁜 아이를 안고 걷는 팔이 아픈 엄마, 나.

 

 

 

두 시간을 걸어 광화문에 도착할 즈음에는 맞은 편에서

수많은 '나'들이 깃발을 들고, 노란 스카프를 매고 몰려왔다.

 

 

 

광화문 광장 '기억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수많은 '나'들이 아이를 잃은 영문도 모른 채

슬픔 대신 억울함으로 1년을 보낸

또 다른 '나'와 합류하였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 명료한 노래를 반복하여 불렀다.

내 기도가 되었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란 칠월, 불 기도  (2) 2015.07.11
주부수영 끊은 사연  (6) 2015.05.29
노란 사월  (2) 2015.04.22
투사, 치유자  (2) 2014.09.26
수줍은 아이 광장에 서다  (4) 2014.08.25

 

 

 

이른 아침 채윤이를 지하철에 태워주고 들어오는 길. 며칠 마음으론 땡겼지만 눈으로는 쉭쉭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이름 모를 노란 꽃 앞에 멈추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꽃봉우리를 줍고 몇 송이는 나무에 붙은 걸 따서 손에 한가득 들고 주차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여러 개의 노란 리본을 만들었다 지우면서 다리가 저리도록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 보면 마음 쪽 어디가 아픈 여자인 줄 알았을 것 같아요.

 

골목 담장 너머로 삐죽 피어있던 저 꽃과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울컥하고 말았었는데요. 앞두고 있는 몇 개의 중요한 강의 준비로 약간 수험생 모드였습니다. 시험 끝나면, 시험만 끝나면, 하는 심정으로 모든 에너지를 강의에만 쏟으면 지내고 있었던 터라서요. 오늘 아침 다가가 보니 시들어 떨어진 꽃잎이 나무 아래 흩어져 있었습니다. 분분한 낙화. 가야할 때는 아는 이의 뒷모습처럼요.

 

한 교회 교인인듯, 한 교회가 아닌 듯, 한 교회 교인인 우리 교회 청년들과 긴 시간 연애강의로 함께 했구요. 에로스 사랑은 모든 개인사를 압도하는 힘이 있기에 연애 강의는 세상의 모든 사랑을 얘기하게 되지요. 다섯 번의 강의를 통해 뚜둡뚭뚜 로맨틱 러브를 논하고, 남편과 함께 강의하며 결혼생활을 통해 농익은 우리 사랑을 돌아보았고, 우리와 다른 부부들의 러브스토리를 들으며 전혀 다른 옷을 입은 사랑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사랑은 내게 와 '그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되곤 합니다. 이번 여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구요.

 

의대생들의 1학점 짜리 필수과목으로 한 타임 연애 강의도 했습니다. 연애 강의에서 사랑 얘기 안 할 수 없고, 내게 있어 사랑이란 한 곳으로 통하는 사랑인데 '그 사랑' 빼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의미와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완벽주의로 몇 날 며칠 여러 권의 책을 쌓아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 사랑' 빼고, 의미와 재미는 고스란히! 강의를 마치고 며칠을 보내고 나니 돌아보니 내가 던진 말 한 문장 내 마음에 남아 있네요. '한 사람을 향한 오롯한 헌신'으로서의 사랑. 비신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것있었었었었어요.

 

'학부모와의 상담'을 주제로 어린이집 선생님들 교사교육을 했지요. 어린이집에, 학교에 상담하러 가면서 엄마들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라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결국 '나는 어떤 교사인가?'라는 질문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장점과 약점을 읽어내는 눈, 그것을 아이 엄마에게 어떻게 안전하게(엄마가 상처받지 않게, 빡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아이, 우리 아이'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아이가 이런 점으로 친구들과 저를 힘들게 해요' 가 아니라 '우리 아이가 이런 점이 있어서 어머니도 힘드시죠? 저도 힘든데 이렇게 품고 지도하고 있어요.' 라는.

 

4주 에니어그램 집단여정을 한 주 남기고 있습니다. 몰려 있는 강의 중에 정서적 보상이 제일 큰 시간입니다. 자발적으로 오셨고, 목말라서 오셨고,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며 오신 분들이라 준비된 수강자들이고요. 이분들의 갈망이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서 그냥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공명이 좋네요. 마음으로 만나는 만남이 참 좋군요.

 

그렇게 석 자나 길어진 내 코를 수습하면서 담벼락의 노란꽃을 흘려 보며 지냈습니다.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내 앞가림만 하며 사는 건가? 광화문에서 몸으로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맞는 죄인이 된 유족들, 그 자리에 있는 벗들 생각으로 지난 목요일 밤부터는 깊은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웃옷에 노란 리본 하나 덜렁 달고 마이크 잡고 있는 내 모습이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강의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지난 얼마 간 마이크를 침으로 적시며 내가 던졌던 모든 말들이 '내 사랑'을 묻는 메아리로 되돌아 옵니다.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처럼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2015년 4월, 사랑과 진실이 가장 필요한 곳은 아이를 잃은 엄마들의 가슴 속입니다. 1년이 지났건만 차거운 바닷속에서 아이를 건져 올리지 못한 엄마들, 1년 전 그 아이들처럼 차거운 아스팔트에 갇혀 버린 엄마들 가슴 속입니다. 핑계 삼을 폭풍 일정들이 끝났으니 주말에는 광화문에 가겠습니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부수영 끊은 사연  (6) 2015.05.29
노란 사월, 걷는 기도  (2) 2015.04.25
투사, 치유자  (2) 2014.09.26
수줍은 아이 광장에 서다  (4) 2014.08.25
눈물의 빗줄기  (0) 2014.08.21

 

벌써 한참 전에 베란다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도통 시위에도 나가지 못하고 마음만 저릿하다.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내 마음을 내걸면 미안함이 가실까?
순전히 내 마음 편하자고 내걸었는데, 젠장! 4층이라서 보이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면 수시로 풀어지는 끈을 다시 묶어줘야 한다.
4월 16일 이후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유족들의 억울한 궁금증과 정당한 요구가
이제는 그냥 낫지 않을 상처처럼 아프기만 하다.
여전히 그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으나,
이젠 돌아갈 명분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아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깊은 빡침과 좌절의 늪에서 난 내 지병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행동하지 않고 읽어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 슬픔 앞에서, 상식적 물음 앞에서 어쩌면  이렇게들 무심해질 수 있을까?
자신의 안위가 직결된 정치가도 아는데,
유가족들을 향해서 어쩌면 이렇게 날조된 유언비어를 여과없이 받아들일까?
그 유언비어가 보상금 운운하는 '돈'과 직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것은 악!'이라고 밖에 다른 말로 정리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며 게으른,
진실을 보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고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짓'과 '악'에 관련된 책들을 다시 꺼내 읽는다.
결국 내 지병으로 돌아온 나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으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도 게으름이니까.


투사로 살고 싶지 않다.
투사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편 가르는 것에 지칠대로 지치고 상처받을 만큼 받았는데
삼팔선을 긋고 싸우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를 적으로 규정하고,
조금 다르다고 제외시키는  진영 싸움은 현기증이 난다. ,
당장 세월호 유가족의 편을 들며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 박수치며 어깨동무 하는,
일부러 식별하지 않고 눈감아 버리는 게으름 또한 동조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나만이 옳다'면서 내 편 만들기 위해 선동하는 것도 사람을 수단 삼는 일이다.
지상에서 가장 편협하고 까칠한 인간이라는 오명을 스스로 달도록 하겠다.
우짜든지, 욕이 나오면 욕을 할지언정 싸움꾼이 아닌 치유자로 살겠다.
그럴 깜냥이 되지 못하는 것 알지만, 그래도지향하는 바이다.

언제까지 일까?
악이 성하고 약자들이 끝없지 짓밟히는 삶은 언제까지 일까?
나는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유난히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다 
페이스북에서 정혜신 박사의 글을 보고 크게 위로가 되었다.
정혜신 박사의 글을  페북 담벼락에 공유하면서 아래 파란 글씨를 덧붙였다.
딱 이 마음이다.


울어야 할 사람 아무 걱정 없이 울게 해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 치유란 이런 것이다. 치유의 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 듯' 거침없이 흘러가 이웃을 치유하고 심지어 치유자를 치유한다. 이 시대의 치유자, 정혜신 박사님, 고맙습니다.

(주님, 울어야 할 엄마들, 더 이상 광장에서 싸우지 않고 그냥 울게해주세요. 슬픔 밖엔 없는 엄마들이 악에 받친 투쟁으로 말라 비틀어져가지 않도록 여기 대한민국 서울의 광화문을 봐주세요)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469992516600634&id=100007696989041&fref=nf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란 사월, 걷는 기도  (2) 2015.04.25
노란 사월  (2) 2015.04.22
수줍은 아이 광장에 서다  (4) 2014.08.25
눈물의 빗줄기  (0) 2014.08.21
파파, 여기로 와 주세요  (2) 2014.08.16

 



현승이와 함께 1인 시위(2인 시위)를 나갔다. 한 번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고 있던 차에 현승이가 "엄마, 나도 거기 광화문에 엄마가 시위하러 가는 데 한 번 갈게" 했다. '왓? 시위하러 나간다구? 사람 많은 곳에 서 있는 건데? 설마 김현승이?' 싶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정말? 좋은 생각이네. 엄마랑 같이 피켓 만들어 나가자" 했다.

현승이가 누군가? 선생님께 칭찬도 받고 싶지만 칭찬받으면 친구들이 다 쳐다보게 되니까 차라리 칭찬받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는 아이이다. 그저 칭찬도 받지 않고 혼나지도 않고 주목만 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아이이다. 1,2 학년 운동회에서 선두로 달리다 1등 할까봐 결승선에 멈춰 선 적도, 계주 대표로 뽑힐까봐 결승선 다 가서 천천히 달린 적도 있었다. 정말 현승이에겐 튀는 것, 튀어서 시선을 받는 것이 못 견디게 싫은 일이다. 심지어 가족 아닌 어느 한 사람이 잠시만 자기를 응시해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른다. 어쩔 줄 모르겠는데 표현할 수도 없으니 어색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나 좀 살려줘'하는 눈 신호만 조용히 보낼 뿐이다.

이런 현승이가 광화문 네거리에 서겠다고 하니 엄마가 당황스러울 밖에. 엄마가 시위 나가 서있던 사진도 봤고, 아빠랑 한 번 나가서 시위현장을 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최근 단식을 하시며 하루하루 야위어 가는 유민이 아버지 근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긴 했다. 무슨 마음으로 나가겠다는 건지 재차 물으면 분명히 짜증을 내거나 '나 안 나가' 할까봐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을 내놓은 이후 순탄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오락가락 하면서 나가네 안 나가네 했고, 손피켓을 만들면서도 사이즈가 맘에 안 들어서 불평, 글씨가 안 써져서 짜증. 여러 번 판을 엎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다 만들어 놓으니 아빠가 '어, 글씨가 귀엽다. 아우 귀여워' 했다. 무엇보다 피아노 연습하고 늦게 온 중2 누나가 진심어린 감탄을 쏟아낸 것이다. "김현승, 너 정말 대단하다. 너는 내 동생이지만.... 넌 정말 괜찮은 애야" 입만 열면 '나가. 빨리 안 나가? 어우, 진짜 짜증나. 김현승 넌 정말 짜증나는 애야. 엄마, 얘 좀 어디다 갖다 버려' 이러던 누나의 칭찬이라니. 현승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중간에 꺾일 뻔한 마음을 붙잡아 준 것은 함께 하는 형아들과 동생이었다. 좋아하는 지언이 형아, 귀여워하는 의진이가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고 기분좋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형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서있으며 힘이 되었다. 아이들이 저러고 서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볼 뿐 아니라 사진도 많이 찍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먼저 묻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시라고 하면 옆에 있던 현승이 조용히 발을 구르고 눈을 부라리고 침묵 시위를 했다. '왜 엄마 마음대로 허락을 하냐? 나도 싫고, 무엇보다 형아랑 의진이도 싫을 수 있는데 왜 묻지도 않고 대답을 하냐?' 조용히 따졌다. 헌데 옆에 있던 의진이가 사진이 찍힐 때마다 '어, 또 찍었다. 히히' 하면서 좋아하는 걸? 시간이 갈수록 '와, 디게 많이 찍혔다' 하면서 더 좋아하는 걸? 지언이 형아도 물어보니 사진 찍히는 것 좋다고 한다. '아이고, 민망하여라' 김현승~ ㅎㅎ

 


현승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광화문 광장에는 카메라에 '용기'을 장전하고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었다. 전에도, 어렸을 적에도 자주 현승이에게  용기, 자유 이런 것들을  쏴주시곤 하시던 털보 아저씨. 이날 양평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일부러 현승일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에 나오신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사진을 남길 수 있었고, 털보 아저씨와 광화문에서 양평까지 전철여행을 함께 하며 즐거웠다. 매주 한결같이 광화문의 한 구석을 지키며 1인 시위 하고 있는 두 이모, 그리고 또 하나의 이모. 형아 둘, 동생 하나. 이렇게 함께 따로 또 같이 하는 시간이었다.   


다녀와서 쓴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 뭉클하다.'나는 그곳을 가서 가장 많이 본 것은 노란 리본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세월호 유가족들에 비하면 손피켓 들고 서 있는 건 힘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승이와 이런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이 단순히 '교육적 차원'은 아니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가르친다기보다 그저 지금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을 함께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저러는 것이 보상금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언론과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현승이가 어어없어 하며 그랬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돈으로 바꾸려는 부모가 어딨어.' 현승이는 자신이 속한 대한민국이라는 큰 집단 안에서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함께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현승이에게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을 들이대지 않아도 정직하게 듣고 정직하게 의문을 품는 이 아이는 자신의 눈길과 마음과 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오늘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현승이에게 고맙다. 더도 덜도 아닌 현승이의 진실한 마음이 피켓에 담겨 있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란 사월  (2) 2015.04.22
투사, 치유자  (2) 2014.09.26
눈물의 빗줄기  (0) 2014.08.21
파파, 여기로 와 주세요  (2) 2014.08.16
Behold the man!  (4) 2014.08.11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자녀를 위하여 오래 흐느껴온 저 음성 저 음성
우리 위하여 죽으신 아기 예수께 우리는 무얼 배웠나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사, 치유자  (2) 2014.09.26
수줍은 아이 광장에 서다  (4) 2014.08.25
파파, 여기로 와 주세요  (2) 2014.08.16
Behold the man!  (4) 2014.08.11
나와 우리 새끼와 우리나라가 운다  (2) 2014.07.30


*
어젯밤 꿈에 박완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의 방에 들락날락할 일이 있었는데 책꽂이에 꽂힌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먹었을까>가 눈에 들어왔다. 꿈에 그 책은 내가 오래전에 선물한 책이었다.(저자한테 내가 그 책을 왜 선물한담?) 암튼, 그 책꽂이의 책을 여러 번 보면서 '어, 저 책 내가 선물한 책인데 선생님은 기억하실까? 나를 아실까?'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유치원 교사를 할 때 박완서 선생님의 외손주가 우리 유치원엘 다녔었고, 그래서 행사에 참여하느라 유치원에 오신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 콩닥콩닥하는 가슴을 안고 맴돌다 어렵사리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먹었을까>는  그 즈음 내가 가르치던 아이의 엄마에게 선물했던 책이다. 꿈에서 박완서 선생님이 나를 다정히 부르셔서는 '이 책, 오래전에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사 준 건데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둘이 마주 누워서 얘기를 했다. '아직도 아이들 가르치고 있냐? 지금은 뭐하냐?' 물었다. 다시 공부해서 음악치료사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제가 유치원에 있을 때도 음악을 좋아했거든요' 라고 말하다가 울음이 터져버렸다. 복받친 눈물이 그쳐지질 않아 민망해 하면서 '아이고, 선생님!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다가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요' 했다.


**
꿈에서의 느낌은 그런 것이었다. 마음 깊이 존경하는 어떤 분을 뵈었을 때, 그분의 아름다운 아우라에 내 마음이 비추어져 슬픔이 슬픔 그대로 아픔이 아픔 그대로  흘러나오는 느낌. 현실에서도 드물게 만난다. 평소 아픈 줄도 슬픈 줄도 몰랐던 나 자신을 그대로 비춰주는 맑은 거울 같은 사람. 아무 것 하지 않고 그저 눈빛 하나로 무장해제 시키는 사람. 
젊은 시절부터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앙의 멘토이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는데 청년 시절 위장이 좋지 않았다. 청년부 주보에 지체근황 이런 부분에 위장이 좋지 않아 치료받는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평소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라, 전화하라, 여러 번 말씀하셨던 어른 한 분이 나를 부르셨다. 위장이 안 좋냐?  신경성이냐? 물으셨는데 그 후에는 대화라기 보다는 긴 설교 한 편을 들었다. 내용은 '신앙인이 신경성 질병을 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보니까 니가 항상 웃는 낯이더라. 그렇게 겉으로  웃고 다니니까 속으로 신경성 병을 앓는 것이다. 절대 신앙인이게 신경성이란 없다' 이런 내용이었다. 어리기도 했고, 맞는 말씀이기도 했고 아무 말 못하고 자리를 떴지만 그 순간 결심한 것이 있다. '당신을 존경하지 않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상담자 멘토를 자처하시며 동시에 존경받는 걸 상당히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분에게 일말의 존경심도 갖지 않는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절대 상담받지 말아야 할 선배나 어른이 있다면 '그런 문제라면 나한테 와서 상담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진심의 존경을 받는 어른은 무엇을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존재로 살 때, 자연스럽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복미사를 위해 광화문으로 가는 길가에 유민이 아빠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었다. '파파, 파파'를 목놓아 외치면서. 그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파파'에 담긴 피 울음에 나도 같이 울어버렸다. 차가 바로 앞에 오자 '파파, 파파'하는 소리는 절규에 가까워졌다. '파파 여기 봐주세요. 여기로 와주세요' 차가 멈추고 교황이 내리고 유민이 아빠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셨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함께 올라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파파' 하고 부르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꼭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소리 같이 들렸다. 그 '파파' 소리에는 나의 기도와 외침도 담겨 있다.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의 우는 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자식 잃은 아비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곡기를 끊고 바라는 오직 한 가지, 진실을 알려달라는 피 울음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자식을 잃은 저들, 저 힘 없는 자들이 거짓과 모함에 두 번 죽는 것을 언제까지 두고 보시렵니까? 파파, 파파, 나의 아버지' 예수님이 2014년 8월 15일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가장 슬프고, 가난하고, 상처받고 외면당한 유민이 아버지 손을 잡아주시지 않았겠나. 저 잡은 손이 교황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아, 정말 우리 예수님의 손이라면.  
교황을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이 참사 이후 처음으로 위로 받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교황의 손을 잡은 유민이 아버지 마음이 짐작 되었다. 어쩌면 유민이 아버지는 신앙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꿈에 박완서 선생님께 내 얘길 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울음이 터져나왔던 것처럼, 생면부지의 교황과의 짧은 만남에 그 인품과 신앙의 향기에 저절로 젖어들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면서 깊은 슬픔이 만져지는 느낌에 속울음을 울며 위로받았을 것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것이 단지 교황이라는 높은 권위 때문이겠는가?   


****
사람인 교황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라며 격노하는 개신교인들이 있다. 열정있고 믿음이 출중한 분들일 것이다. 맞다. 교황님이 하나님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껌벅 죽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개신교 믿음 좋은 분들이 목사님이 하나님도 아닌데 목사님 앞에 껌벅 죽기는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이다. 상식있는 비신자도 하지 않을 일을 해도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면서 비호하는 교인들이 있다. 교회가 어떻게 되든, 교인들이 실족하여 나가떨어지든 말든 자신의 안위만을 지키는 목사님들이 허다한데 그분들 곁에도 '사랑합니다. 목사님' 하는 분들이 있다. 목사님에 관한 한 상식적인 판단을 다 넣어두고 '주의 종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며 목사님의 거짓을 확인하고도 침묵하며, 침묵을 강요하는 지도자들. 목사님 하나 자리보전 시키기 위해서 자신은 물론 교우들의 영혼까지 말라 비틀어져 가는 것을 외면하는  하는 사람들이 '목사님 우상숭배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닌가? '오직 은혜로만' 일을 처리하는 고상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우상숭배자'인가? (아이고, 의미없다) 대놓고 '파파'라 부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 차라리 페어 플레이다.  
교황님의 행보에 여러분 눈시울이 붉어졌다. 숙소에 도착하여 드린 첫 미사에서는 당신을 돌볼 요리사, 청소부 등 10 명을 초대하여 함께 드렸다고 한다. 내가 믿는 개신교에도 그렇게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나 허리를 숙여 고통받는 자의 손을 잡고, 울음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분이 계시면 좋겠다. 부럽다. 가톨릭 신자들이. 하지만 나는 안다. 프란치스코 교황만이 낼 수 있는 존재의 향기라는 것을. 가톨릭 역시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은 종교인의 풍모는 풍길지 몰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높이는 분들이 개신교 못지 않게 흔하다는 것을. 그 앞에만 서도 눈물을 주르르 흐르는 성스러운 아우라, 거역할 수 없는 포근함은 '자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앞에 서 본 약자는 적어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세리와 창녀처럼 말이다.  

부디 유민이 아버지와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번에 받은 깊은 위로로 삶과 인간에 대한 소망을 다시 붙들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나의 파파, 지금 여기로 와주세요. 광화문 시멘트 바닥 위로요.'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줍은 아이 광장에 서다  (4) 2014.08.25
눈물의 빗줄기  (0) 2014.08.21
Behold the man!  (4) 2014.08.11
나와 우리 새끼와 우리나라가 운다  (2) 2014.07.30
세월호 100 일  (0) 2014.07.24

 

 

*
연애와 결혼에 관한 강의를 한다. 강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연재하고 있는 글처럼 '너 자신이 되어 연애하라'이다. MBTI를 통한 자녀양육, 의사소통, 공동체 세우기 강의도 한다. '당신 자신을 아는 만큼 자녀(타인)를 알 수 있다. 당신 자신을 잘 알도록 해라. 저울에 달면 지구보다 무거울 수도 있는 당신이라는 자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알아도 알아도 알 수 없다. 다만, 나 밖으로 나가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기를 아는 시작이다. 그 시작을 도울 수 있는 것이 MBTI이다.' 에니어그램 강의를 한다. 성격이 '나'인 줄 알고 '눈에 흙이 들어와도 나는 안 바뀔 테야. 이게 나야!' 고집하며 '에고'의 짐을 지고 사는 우리를 보자고 권한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세상에 적응하며 만든 내가 있는가 하면 진짜 내가 있다고. '진짜 나'는 '하나님 형상'이라고. 그러니 더는 내가 만든 거짓자아에 휘둘려 타인과 하나님, 또 진짜 나로부터 단절되어 살지 말자고.

 
**
모든 강의와 글이 '나됨'이라는 깔때기에 모아져 드립 되고 있다. 강의나 글은 목적지가 아니다. 내 삶과 신앙의 버거움에서 시작된 질문의 간이역들이 강사로서 서 있는 지점이다. 사는 게,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게 어려워서 던진 질문에서 도달한 지점이 '나는 누구인가'였다. 물론 그 질문은 사춘기,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연애, 결혼, 관계, 신앙생활, 영적인 여정. 이 모든 것이 그래서 한 줄로 이어져 있다. '나는 누구인가?' 에니어그램 강의를 마칠 즈음에 반드시 나오는 (또는 속으로 생각하지만 묻지는 못하는) 질문이 '그렇다면 하나님 형상을 닮은 진짜 자아는 무엇인가?'이다. 거짓자아를 벗고 남은 참 자아는 과연 무엇인가? 어, 적어도 '무엇'은 아닐 것 같다. '어떠한가?'가 더 적절한 질문이 될 것이다. 처음엔 답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명확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제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몰라요.'


***
모르지만 아주 추측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하나님이 진짜 인간으로 살아가신 그 이야기이다. 성경의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 있다. 보통은 '사대 성인 중 하나'이라 믿는, 나는 '신(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으로 사셨던 분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다. 내가 정말 그리고 또 그리는 분이다. 삶이 답답하고 막막할 때 더욱 그립고 보고 싶은 분이다. 그분의 행적은 내가 그렇게도 궁금했던 '하나님 형상'이 사람에게 드러날 때의 모습이다. 모호하지 않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정서, 그분의 행동이 살아있다. 그래서 <메시지>의 요한복음을 늘 끼고 산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로 답답하거나 빡돌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요한복음의 예수님께로 가서 읽으며 만난다.


***
오래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창세기 공부를 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가 질문을 해왔다. '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왜 닭은 막 죽여서 치킨으로 먹는데 사람은 죽이면 안 돼요?' 창세기 성경 구절을 찾아가며 닭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가 다르다는 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람은 하나님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얘길 했던 것 같다. 윤 일병 사건을 보면서, 세월호 유민이 아버지와 여러분들의 단식 소식을 들으면서 한 주간 몸으로 사는 삶과 생각으로 사는 삶이 다르다. 휴가라고 갔지만 커피를 마시다 어느새 남편과 대화가 끊어졌다 싶으면 둘 다 스마트폰의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단식 중인 세월호 가족들에게 '제대로 했으면 벌써 실려 나갔어야지' 하는 말에 예은이 아빠 유경식 씨가 소금과 물까지 끊은 단식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정치도 뭣도 다 떠나서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걸까? 윤 일병과 세월호 유가족들, 가자지구의 뭇 민간인들 안의 하나님 형상이 짓밟히고 있다.

 


*****
어제는 남편 피정주간이라 나들목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렸다. 시리즈 설교를 하시는 모양인데 <우리는 왜 예수를 따르는가?> 첫 번째 시간으로 이승장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빌라도가 했던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e man)'는 본인이 말하고도 의미를 몰랐지만 '보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다!' 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 성육신 하신 예수님,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불의한 권세자의 발에 짓밟히고 또 짓밟히셨던 예수님을 생각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무력한 짓밟힘에 마음이 닿아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 집에 와서 혼자 기타를 들고 찬양을 했다. '샤론의 꽃 예수 모든 질병을 한이 없는 능력으로 고치사 고통하며 근심하는 자에게 크신 힘과 소망 내려주소서' 그분의 오늘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실까? 누구의 손을 잡아주실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 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
나답게 연애하고, 나다워야 제대로 사랑하며 결혼생활 할 수 있고, 나다워야 건강한 엄마 될 수 있고, 나답게 하나님 만나는 길이 있다고 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하는 드립이다. 내가 나다움을 찾는 방법은 이 땅을 오셨다 가셨던, 아니 그 이후 내 맘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과 행동으로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여정이다. 알량한 헤아림일 뿐이다. 그 알량한 헤아림에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치는 행동이다. 그래서 다시 그분께로 간다. 사랑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사람들로 메마른 마음도 가지고, 생각할수록 꼬이는 생각도 가지고 나의 예수님께로 간다. 내게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요즘의 이 무정한 세상을 그대로 살아낼 수가 없다.

 

<사진 : 영화 'Son of God>에서 가져옴>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의 빗줄기  (0) 2014.08.21
파파, 여기로 와 주세요  (2) 2014.08.16
나와 우리 새끼와 우리나라가 운다  (2) 2014.07.30
세월호 100 일  (0) 2014.07.24
'슬픔에서 벗어나라' 쉽게 말하지 마라  (3) 2014.06.20


본격 방학이 시작되면서 아침부터 나사가 풀려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단원고 박예슬 학생 전시회에 다녀왔다. 벌써부터 마음은 있었으나 가보질 못했고, 어차피 곧 방학인데 아이들과 함께 가야겠다 싶어서 미뤄두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집에 있는 것보단 낫겠다 싶었는지 두 녀석 다 흔쾌히 따라나섰다. 그렇다 해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한두 번 당해봤나. 아이들과 이런 곳에 가면 좋은 마음으로 갔다가 결국 마음이 꼬부라져서 들어오게 된다. 하도 여러 번 겪어서 이젠 출발할 때부터 미리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예슬이 언니 작품 옆에 채윤이을 세워 놓고 사진을 찍으려니 다시 울컥한다. 저렇게 때론 이쁘고 때론 얄미우며, 가끔 허황된 꿈을 꾸고 가끔 과하게 자기를 비하하고, 머리를 감으면 하루 종일 머리 드라이를 하며 헤어 미스트를 뿌리고 살랑거리고 나가는, 그리고 방에 들어가보면 '돼지우리' 소리가 절로 나오는 여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런 딸내미를 엄마 아빠가, 전국민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면서 그대로 차거운 바닷물에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사람이 우주에 갔다오는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런 생각에 미쳐 눈물이 나다가 심드렁한 표정의 우리 아이들을 보면 속이 상해서 눈물이 쏙 들어가 대신  불이 나오려 한다. 눈물도 불 레이져도 꾹꾹 참아 집어넣고 관람을 하고 나왔다.

 


 

이느무 시키들. 여기서 런닝맨 촬영이라도 했어야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래? 남편에게 사진을 보내면서 '애들 때문에 힘들어' 했더니 분위기 파악하고 '우리 애들은 왜 그럴까?' 라고 했다. '사실 애들은 다 그래'라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나니 '맞아, 그러니까 애들이지. 애들이 그럼 애를 낳아 키워 본 엄마처럼 반응하면 애들인가?'싶어서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적극적으로 포스트잇에 적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느 메시지 앞에서 한참 서서 읽기도 했었다. (나도 참! 애들에게 뭘 강요하는 거야) 집에 오자마자 현승이는 일기를 썼는데, 점심을 뭘 먹을까? 얼마나 걸어야 하나? 팥빙수냐 망고빙수냐?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는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비장하기도 했었단다.


 


굳이 아이들에게 욕심을 내자면 이 일이 '남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느꼈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다지 감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예기치 않은 고통은 언제든 찾아온다. 누구에게든 찾아온다.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없다. 스캇펙이 그리 말하고 래래크랩은 늘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사고를 당하고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기도 한다. 그 예기치 않은 고통이 갈수록 악한 사람들에 의한 악한 선택이 쌓이고 쌓이며, 교차하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고 있다. 누구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까 이해타산적인 관점에서 타인이 고통당할 때 내가 울어줘야 내가 고통당할 때 남도 나와 울어줄 것 아니냐, 는 의미가 아니다. 악과 악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냥 나다. 우리이고 우리 아이들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그렇고 가자에서 죽어가는 아이들, 피투성이 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피울음을 토하는 부모들이 바로 나다.

 

최근에 본 정말 소름끼치는 두 장의 사진과 기사였다. 왼쪽은 팔레스타인 아이를 낳는 엄마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 이스라엘 국회의원이다. 오른 쪽 사진은 광화문에서 단식 중인 단원고 엄마 아빠를 찾아가 서명대를 부수고 난동을 부린 어버이 연합과 엄마 부대 봉사단이다. '집회 막으면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서 고발하겠다'며 미소 짓고 사진 찍는 엄.마. 그리고 이 분들이 한 얘기는 떠올릴 때마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누가 배타고 가라고 했냐, 누가 죽으라고 했냐' 털썩!이다. 정말 털썩!이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절대 타자화 하여 저렇게도 무정할 수 있을까. 무섭도록 잔인한 무정함이다. 내 새끼,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 참 좋은 말인데 '우리'가 그 '우리'에서만 끝나면 우리에 갇혀 꼼짝 못하는 짐승이 되는 길이다.

나는 나를 뛰어넘는 '우리'를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부부, 우리 채윤이, 우리 현승이... 나라는 인간, 누구보다 '우리'라는 우리에 자주 매이는 것 인정이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키우지 않아야겠다는 꿈 또는 욕심을 내보는 것이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1인 시위를 몇 번 나갔었다. 집에서 혼자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엄마들 중 용기있고 행동이 빠른 엄마가 시작했고, 그 좋은 뜻에 '그냥' 엄마 몇이 함께 하는데 나도 기회를 얻었다. 이 일이 언론에 나가고 알려지면서 많은 엄마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사람이 많아지다보니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하고, 자연스레 조직을 위한 관리가 필요하게 되는 것 같다. 모임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런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모임 밴드에서 탈퇴하고 나왔다.  좋은 뜻이고 필요한 일인 줄 안다. 그런 줄 알지만 나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우리'의 명분이나 권익을 애써 지켜야 하는 모임의 회원이 되고 싶지가 않다. 까칠한 나를 탓한다. 탓하지만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든 끝까지 저 그림의 손 하나가 될 것이다. 초딩의 손목처럼 얇고 보잘 것 없는 손목이지만서도. 아픈 나를 위하는 일이니까.


광화문에서, 국회 앞에서 단식하며 단장의 고통으로 이 밤을 보내고 있을 엄마 아빠들이 더는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상금도, 대학 특례 입학도 그들의 입에서 발설된 바가 없다. 저 엄마 아빠들은 오직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내 새끼가 죽은 일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아,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어떤 할머니가 그랬단다. '애들은 이미 다 죽은 거고, 이제 와서 저 사람들이 저러고 데모하는 거, 뭘 바라서 저러는 거겠냐. 돈 아니냐. 보상금. 그것 아니고 뭐 바랄 것이 뭐 있어서 저러겠냐' 그 말에 아이를 잃은 아빠가 그렇게 페북에 썼다. '할머니의 손주가 세월호 안에 있다고 생각해보시면 아실 거예요' 남의 아이 아니다. 남의 일 아니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파, 여기로 와 주세요  (2) 2014.08.16
Behold the man!  (4) 2014.08.11
세월호 100 일  (0) 2014.07.24
'슬픔에서 벗어나라' 쉽게 말하지 마라  (3) 2014.06.20
엄마라서  (4) 2014.06.11

 

 


신생아를 키우며 낮밤이 바뀌거나 손타서 늘 안으라고 하는 아이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초보 엄마에게 "백일 지나면 바뀌어"하는 선배 어머니들의 말은 희망이지요. 실제로 아이가 그즈음에 달라지기도 하고요.


백일 하루 전날 광화문에 나갔습니다. 백일을 지내며 제발 낮과 밤이 바뀌고 못된 마음으로 엄마들 눈에서 눈물 빼는 사람들이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좋겠네요.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바닷물에 아이를 뺏긴 엄마 아빠들이 빗속에서 이밤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밤 나의 하나님이 '백일의 기적' 같은 걸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Behold the man!  (4) 2014.08.11
나와 우리 새끼와 우리나라가 운다  (2) 2014.07.30
'슬픔에서 벗어나라' 쉽게 말하지 마라  (3) 2014.06.20
엄마라서  (4) 2014.06.11
여호와여  (2) 2014.06.03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얘기하지 마라. ‘괜찮다’고도 마라. 그들은 절대 괜찮치 않다. 괜찮을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2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82) 예일대 신학대학 명예교수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리본 아래서 힘줘 말했다.


이 시대 대표적인 기독교철학자인 그는 31년 전 등반사고로 아들을 잃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 체험을 담아 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미국에서도 고통을 당할 때 고통을 빨리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러나 고통을 떨쳐내버리는 게 불가능하다. 그것을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남들이 보기엔 슬픔을 계속 갖고 있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전혀 아니다. 화가 나면 때리고, 두려우면 도망치면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만큼 슬플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버리기 때문에 그런 채로 살아가는
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니, 괜찮다고 얘기하지 말고 그 분들이 앉은 슬픔의 벤치에 함께 앉아 슬퍼하라”고 권했다. 그는 책도 위로도 별 도움이 안됐던, 아픈 경험을 더 들려주었다.


“서점에 가니, 슬픔을 극복하는 7단계 전략이니, 9단계 전략이니 하는 책이 많았다. 그런
데 그 책들은 온통 나에 대해서만 얘기해 아무런 도움이 안됐다. 죽어버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죽은 내 아들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종교란 답을 주고, 삶의 의문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것이 종교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고 이후 어떤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며 “인간이란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도 대답 없는 질문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고 말했다.


“자녀가 몇명이냐”는 물음에 그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시 고통스러워졌다”고 고백했다. ‘(사고 당한 아이를 빼고) 4명이라고 답해야 할지, 5명이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였단다. 그는 “사람들이 ‘자식이 4명이나 더 있지 않느냐’고 했지만 위로가 아니라 더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며 “자식은 가게에서 아무때나 구입할 수 있는 구슬이 아니다”고 말했다.


31년전 사고로 아들 잃은 경험

“세월호 가족 슬플 수밖에 없어
그분들과 함께 앉아 슬퍼해야”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잘못
사회 정의 책임지는 게 기독교


한국 최초의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의 모교인 뉴브런스윅신학교가 공동으로 24~25일 연 언더우드국제심포지엄의 주강사로 초빙받은 그는 ‘예배’에 대해 새문안교회에서 강의했다. “교회 예배가 기쁨의 찬양 일변도로 갈 때 신자들의 삶과 연관성을 찾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며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탄식기도와 이웃의 고통에 대한 중보기도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강의에서 ‘예배의 주최는 당회’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회의 권한이 목회자 한명에게 집중될 때 부패할 수 밖에 없다”면서 “개혁교회라면 교회의 모든 회중들이 (목사에게만 맡기지 않고) 그들의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구원파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구원관을 믿고 있다는 것과 관련해 “미국에도 이런 그룹들이 있는데,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건 심각하게 잘못된 견해다. 사회에 대한 정의와 평화 책임을 져야하는 게 기독교의 본질이다”고 밝혔다. 그는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의 저자답게 명쾌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상황은 자세히 모르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보니, 개혁교회라의 간판을 달고 있어도 심각하게 왜곡돼 있었다. 칼빈은 권력을 쟁취하기보다 벗어나기를 원했다. 17세기 칼빈의 개혁교회가 추구한 것은 평등이었다.”


그는 ‘정의가 왜 가장 중요한’가’에 대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정의와 평등 없이 자유만을 부르짓는 것은 ‘사자와 독수리에게 아무나 잡아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기사원문   http://m.hani.co.kr/arti/society/religious/639113.html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와 우리 새끼와 우리나라가 운다  (2) 2014.07.30
세월호 100 일  (0) 2014.07.24
엄마라서  (4) 2014.06.11
여호와여  (2) 2014.06.03
찬송가 447장, 전쟁터 같은 대한민국  (2) 2014.05.25

 

 


언제까지 세월호 얘기냐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내 아이라면.
'엄마, 갔다올께. 도착하면 전화할께' 했던 아이가
'엄마, 사랑해. 미안해' 카톡 하나 남기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로 갔다면.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꽃다운 아이들을  침몰시켜 대한민국에 기회를 주신 것'이란다.
그러나 그 침몰된 아이가 목사님 자신의 딸이거나 손녀라면.

내 아이이고, 내 손녀딸을 그렇게 잃었는데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혀주지 않고,
책임을 져야할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면피의 이유만 읊어대고,
이유를 밝혀달라 목소리를 높이면 미개하다하고,
빨갱이라고 하면,
나라면 어떨까?

 


 

어떤 다섯 아이의 엄마가 그런 절절한 심정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한 달이 넘도록 일인 시위를 하였다.
마음으로 뜻으로 똑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몇몇이 그 일을 이어간다.
머리로만 살지, 정작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내게도 기회가 와서 짧은 시간 자리를 지켰다.
마침 옆에서는 밀양 송전탑 농성장 철거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그 소식을 듣자하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집어 넣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 저 광경이다.
저 우뚝 솟은 조선일보.
두렵지는 않다.
저 무지막지한 권력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사무치게 알아간다.

저 거대한 빌딩 앞에 선 키 160도 안 되는 (반올림 하면 160, 된다)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크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도리 외에는 없다.
주님, 나의 주님!


그들이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
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6:14)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호 100 일  (0) 2014.07.24
'슬픔에서 벗어나라' 쉽게 말하지 마라  (3) 2014.06.20
여호와여  (2) 2014.06.03
찬송가 447장, 전쟁터 같은 대한민국  (2) 2014.05.25
영웅 말고 상식인(김기석)  (0) 2014.05.15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시 94:3)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7-18)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에서 벗어나라' 쉽게 말하지 마라  (3) 2014.06.20
엄마라서  (4) 2014.06.11
찬송가 447장, 전쟁터 같은 대한민국  (2) 2014.05.25
영웅 말고 상식인(김기석)  (0) 2014.05.15
여기 오소서, 내 주여  (0) 2014.05.12

 

 

예배 시간에 부른 찬송 한 장이 구구절절 지금 여기와 맞닿아 마음 속에 살아왔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1. 이 세상 끝날까지 주 섬겨 살리니 내 친구되신 주여 늘 함께 하소서
주 나와 함께 하면 전쟁도 겁없고 주 나를 인도하면 늘 안심하리라.


예수님 아니면 내 삶은 의미가 없다. 평생 주님만 섬기며 살고 싶은 마음이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라 감히 나 그분의 친구로 초대되었기에 그에 대한 수락의 의미이다. 찬송 시작부터 울컥했다. 그러다 '전쟁'에서 켁하고 제대로 목이 메이고 말았다. 왜? 요즘 전쟁같은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탓이다. 세월호 40여 일. 꽃같은 아이들을 수장시키고 피멍든 가슴으로 깊은 바닷속을 헤매고 있을 부모들. 남일 같지 않아 함께 울어주고 행동하겠다는 사람들에 빨간 표딱지가 붙었다. 빨간 잠바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향해서 빨갱이라고 하니 우스운 일인데다, 어째됐든 말이고 막걸리고 간에 뻥긋하면 색깔을 내세워 전쟁을 치르는 기세다. 막 잡아간다. 내 새끼 시신이라도 끝까지 찾아달라, 카톡으로 메지시 주고받으며 눈 앞에서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는지 속시원히 답해달라는 달라는 요구가 무슨 이적행위라도 된단 말인가. 4월 16일 이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 일을 당했다면....' 가정해보지 않는 날이 없다. 내가 그 아이들의 엄마라면..... 이 억울함을 안고 어떻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전쟁같은 나날이다. 대한 민국에서 엄마로, 국민으로 사는 것이.

 

2. 나 주를 따를 때에 주 약속하신 것 그 영광 중에 모두 이루어주소서.
나 주의 뒤를 따라 섬기며 살리니 그 크신 은혜 속에 날 인도하소서.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난 주님을 소망한다. '주님의 시간에 그의 뜻이뤄지길 기다'리고, '주의 뜻 이뤄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 아름답게 변하'리라 믿기에 믿음으로 기다린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

 




지지난 주에 광화문에 나갔다가 본,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다. 어디서 봤더라? 아, 성경! 아니 찬송가에서.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감신대 학생들의 시위 후에 저러고 지키고 있는 것이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있나. 여하튼, 감신대 학생들에게 배후를 추궁했더니 드디어 그 배후를 불었다고 한다. 그 배후는...........

"경찰들도 자꾸 우리의 배후를 묻는데, 굳이 배후를 밝히라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하나님 말씀이다." - 감신대생 이종건 전도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안다. 그분의 말씀은 또한 약속임이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죄 잡혀가고 또 빨간 잠바들로부터 빨갱이로 몰릴지라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3.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주 나를 돌보시사 내 방패되시고 내 옆에 계신 것을 늘 알게 하소서


지난 한 주간 동안 온갖 시험이 내 맘을 흔들고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서 나를 공격하였다. 주님께서 내 맘을 돌보시지 않았다면 분노와 슬픔으로 마음을 잃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한기총 임원회에서 조광작 목사라는 분이 하신 말씀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모두 백정"






 

사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하늘의 사랑은 커녕 인간적인 상식조차 읽어낼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확인하는 건 서울 하늘에 십자가 찾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그런데, 난 정말 시험들 것 같다.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가 그 자리에 참석해서 "전교조 문제만큼은 무슨 수를 쓰든 조처할 계획'이다. 교육감으로 당선되면 학교 신우회 구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이 보도되고 반향이 커지자 참석한 적이 없다고 한다. 사진도 있는데. 그리고 여전히 고승덕 후보는 지지율 1위 이다. OTL 조희연 교수와 고승덕 변호사를  '교육'이라는 링 위에 같이 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행여 조희연 교수 대신 고승덕 변호사가 교육감이 된 서울시에서 우리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난 정말 시험들 것만 같다. 전문가/비전문가 중 선택, 진실/거짓의 선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 믿음 아직 연약하여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방패되심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간절히 기도한다.



4. 저 영광 빛난 곳을 주 허락했으니 그 허락하신 곳을 늘 사모합니다.
끝까지 쉬지 않고 주 따라가리니 주 넗은 사랑으로 늘 인도하소서.


저 영광 빛난 곳, 주님 계신 그 나라, 우리 아버지도 아버님도 가 계신, 한솔이도 가 있는 그 나라. 정말 그리고 소망한다. 물론 지금 여기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그리게 된다. 세월호 침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했던 그 아이의 기도를 왜 안 들어주셨냐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나도 수없이 따져 물었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냐고, 당신의 자녀들 고통받을 때 어디 계셨냐고.

공교롭게도 고난주간 한복판에 세월호 사고가 났다. 그 한 주간 내내 새벽 설교를 통해서 만난 예수님은 처절할 정도로 모멸당하고 배신당하며 싫어 버린 바 되신 모습이었다. 사실 난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다. 꽃다운 아이들이 당신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분은 그 아이 곁에 계셨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구명조끼를 함께 묶어 나란히 수장되셨다. 2014년의 골고다 언덕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계셨던 3년 동안 한 번도 상석이 앉지 않으셨고, 가난하고 미천하고 쫓기는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가. '당신 도대체 어디 계세요?' 라는 빗발치는 비난을 자처하시며 힘없고 가난한 아이들 곁에 계셨다.



 


비록 말 뿐인 삶이지만, 끝까지 쉬지 않고 예수님 따라 살 것이다. 우는 자와 더불어 울고, 거짓에 대적하고 돈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찬송 부르며 소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비오는 밤, 잠 못 들고 있을 단원고 엄마들께 우리 주님이 따뜻한 손으로 덮어주셨으면 좋겠다.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라서  (4) 2014.06.11
여호와여  (2) 2014.06.03
영웅 말고 상식인(김기석)  (0) 2014.05.15
여기 오소서, 내 주여  (0) 2014.05.12
우리는 모를 고통  (0) 2014.04.22

 

 


이 블로그
2000여 개의 포스팅 중에서 펌글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가져와 걸어둡니다. 요즘 남편과 마주앉으면 한숨 쉬며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에서 질문도 답도 다 나와 있어서 읽고 또 읽게 됩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와 글에서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몸으로 전해옵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배웁니다. 정직하고 용기있고 긍휼이 넘치는 글. 4월 16일 이후로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과 예수님의 길이 이 글에서 보였습니다.

그림은 청파교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바이블 시론_김기석] 영웅 말고 상식인


“우리 반 아이들 잘 있겠지요? 선상에 있는 애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진심입니다. 부디 한 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수학여행) 갔다 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김시연양이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드린 기도이다.


하나님은 왜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까. 40년 가까이 연마해 온 나의 신학은 이 기도 앞에서 작동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의 무기력함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느낀 때가 없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를 물었다. 한스 요나스는 아우슈비츠 이후 절대적인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들을 절망케 한 시대의 어둠이 이 땅을 뒤덮고 있다. 든든한 줄 알았던 나의 신학은 세월호 참상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1940년대 오랑시,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는 쥐를 발로 밀어 치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며칠이 지나자 도시 도처에서 죽은 쥐들이 나타났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리유는 시청 공무원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지시가 내려와야 뭐든 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듣는다. 사람이 하나둘 죽어가자 오랑시 의사협회장 리샤르에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까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재앙은 그런 무관심과 무책임 속에서 몸집을 불려가는 법이다.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도시는 평화롭고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누군가 그 안일한 평온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균열은 그 병에 대해 정확하게 명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는 공포스럽다. 스멀스멀 틈입해 들어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낯설고도 음험한 현실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대상은 상대화된다.

조급함이 사회를 어둡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됨의 길을 한사코 외면하도록 한 그것은 무엇일까. 물질주의다. 뱃사람들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괴조 세이렌의 무기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세상 도처에서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행복과 편리의 환상을 좇는 이들에게 동료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그들이 질주하는 벌판에는 해골만이 뒹굴 뿐이다. 이제는 우리 삶의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은 바로 그런 현실을 가리키는 깃발로 펄럭이고 있다. 그런데 유족들과 국민들의 가슴에 든 피멍을 보듬어주어야 할 대통령이 재를 쓰고 앉아 참회하기보다는 이런 애도의 분위기가 사회 혼란을 낳고, 사회 혼란이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경제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차마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을 기다린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것을 다시 회복할 가능성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적 반응은 슬픔일 수밖에 없다. 터져 나오는 울음은 입을 가린다고 잦아드는 것이 아니다. 그 애도의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으려 하는 조급함이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다. 신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억울한 이들의 피가 흐른 땅은 황무지로 변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리유나 그랑 혹은 랑베르와 같은 영웅적 인물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귀히 여기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상식적인 사람들, 깨어 있는 시민들을 기다릴 뿐이다. 저들의 희생을 망각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내려 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원글은 아래 링크 겁니다.

http://m.kukinews.com/view.asp?gCode=news&sCode=opi&arcid=0008312123&code=11171370

'리멤버 04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여  (2) 2014.06.03
찬송가 447장, 전쟁터 같은 대한민국  (2) 2014.05.25
여기 오소서, 내 주여  (0) 2014.05.12
우리는 모를 고통  (0) 2014.04.22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0) 2014.04.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