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원고, 강의 이런 얘기로 징징거리는 포스팅은 안 하기로 작정했다.


강의도 글쓰기도 '듣거나 배우기'가 아니라 '드러내거나 가르치기'것이다.
결국 마이크 잡은 놈의 힘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갑'으로 간주한다.
독자 또는 청중이라 불리는 허다한 '을'들을 세워놓고
'갑'이 징징거리는 것이 웃기는 '지적(知的) 된장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면 쓰지 마! 누가 너한테 쓰라고 했냐고?
강의를 다니며 좋았네 힘들었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로 얻은 알량한 유명세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징징거리기까지.....
라며, 내 무의식의 욕망이 남들을 빗대어 자아비판을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래서 징징거리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징징거리는 건 아닌데.....


5월에 원고만 네 개를 썼다.
이렇게 살다간 얻는 것도 없이 미추어버리겠다며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을 '절필'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네 개의 원고를 다 써냈고,
5월의 대미를 장식하는 강의까지 끝내고 내 사랑하는 거실 소파에 널부러진 것이다.


아닌 척 하지만 지적 된장질에 목을 매는 나,
더 많은 '을'들에게 추앙받고 싶어하는 추한 욕망을 맞닥뜨리면 마음이 복잡다단해진다.


뜬금없는 얘긴데, 아까 집에 오다가 뜬금없는 전화,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자기도사춘기 있었어? 그런데, 자기 사춘기 때도 그렇게 웃겼어?'
아, 진짜 온갖 욕망과 좌절로 붕 뜬 나를 끄잡아 내려 '나'로 돌아오게 하는 질문이었다.
나, 진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웃겨주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여하튼, 잠을 이기며 날 기다려준 남편이 '수고했어. 수고했어. 피곤한데 어서 씻고 자' 했지만
어떻게 지낸 오월인데 이 밤에 내가 잠이 오겠냐고.
이 책 <갈림길>을 붙들고 이 밤을 불태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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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고개를 넘으면서
그림자가 그리는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림자에 눈을 맞추면서 마음 구석의 찌글찌글한 것들이
그럭저럭 괜찮게 여겨졌다.
못났다고 내가 먼저 손가락질했던 내가 그럭저럭 봐줄 만 해졌다.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다행이다.
한 살 두 살 나이 먹는 것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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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어느 날, 가로수가 붉게 물든 날이었습니다.
단풍 든 가로수의 유혹에 넘어가 퇴근길 핸들을 틀어 들어 간 카페에서 찍은 것입니다.
헌데 어쩌자고 그 곱던 색을 찍지 않고 모노톤의 그림자만 카메라에 담았을까요?


이 사진을 자주 들여다 봅니다.
자주 들여다보다 한 겨울에 이 가을 사진을 여기 저기에 걸어 둡니다.


나를 설명하고 치장하는 깨알 같은 디테일을 지우고,
모노톤의 투박한 그림자 하나로 남을 때,
그 때 그 고요함 속에 티끌 만큼이라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담긴 삶이었으면 싶습니
.



내게 덧씌워지는 현란한 색깔들에 취해서 존재의 축이 흔들리지 않으며,
흩날리지 않으며,
그림자처럼 소리나지 않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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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언제나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사실에 근거한 비난,
혹은 사실에 가장 근접한 비난을 제기한다.
그것이 상처가 더 깊다.
- C.S 루이스 -



'사랑(agape)'의 균열이 시작되는 지점을 배웠습니다.
그렇게나 익숙하여 무덤덤한 진리,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서  말입니다.
사랑의 소극적 정의를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시작합니다.
시기는 그릇된 경쟁심을 낳고 그릇된 경쟁심은 그릇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낳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한탄합니다.
자신이 어떤 댓가를 치르든 경쟁자들을 해롭게 하는 것, 시기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그릇된 경쟁심에 사로잡혀 시기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목마르게 됩니다.
그 열망으로 자신에 대한 허풍선, 과장을 날립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부풀리는 것이 '자랑'이라면 '교만'은 자기 존재애 대한 과장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장은 반드시 존재에 대한 팽창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입니다.


상대를 합당하게 대하지 않는 것,
다땅히 돌아가야 할 존중과 명예를 지켜주지 않는 것,
축하할 사람에게 축하하고 수고한 사람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지 않는 것은
'무례히 행함' 입니다.
내가 가장 크다고 믿을 때 다른 사람을 합당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에 대한 칭찬을 보류합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할 경우 자신의 칭찬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시기하고 교만하여 무례한 사람은 '자기의 것'만을 구하게 됩니다.
내 기분, 내 감정, 내 몫, 내 판단 집요하게 구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입니다.


자기의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것이 침해당할 때 성을 냅니다.
헬라어 원어 그대로 '발작적 성냄'이라고 합니다.
또 '날카롭게 갈다'라는 뜻이기도 하답니다.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갈아서 흉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입니다.


자신을 날카로운 무기로 만든 사람은 오직 '악한 것'을 숙고합니다.
그리고 불의를 저지릅니다. 아니, 불의를 '기뻐'합니다.
불의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기에 내어준 몸과 마음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됩니다.


때로 그 무기에 찔리고,
더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찌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찔리고 또 찌르고.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멈춰야 세상이 멈춥니다.


2013년 사랑은 '시기하지 않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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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밥 먹고 피아노만 치던 채윤이가 입시를 마치고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된 첫 날 현승이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덕소의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엄마가 해방되는 것입니다.
두 녀석이 커플 조끼 입고, 등에 잠옷 든 가방 하나 씩 매고 현관문을 나가자마자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동네 골목 안에 주택을 개조한 카페가 생겼습니다.
자전거 타던 두 망아지가 발견하고 '엄마, 한 번 가봐' 라고 알려줬더랬죠.
어제 교회의 중요한 행사 치루고 안식이 필요한 남편이 간만에 정시 퇴근하였습니다.
남편인들 해방된 거실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산책 겸 새로 생긴 카페에 다녀왔습니다.


인테리어에 신경도 많이 쓰고('신경'이라고 쓰고 '돈'이라고 읽는다) 커피 맛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한 개도 없어서 쓸쓸했습니다.
바짝 긴장한 젊은 사장님을 보니 괜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장사가 잘 돼야 할텐데......


사실 입시에서 해방되어 좋다고 할머니댁으로 간 덕에 엄마에게 까지 해방된 채윤이가 덕소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것은 입시결과 발표였습니다. 오후 10시 이후에 발표가 난다고 했었는데 챈이는 계속 확인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안 되어 '엄마, 나 떨어졌어' 하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아픕니다) 에이, 덕소 보내지 말 걸.....
곁에서 안아줘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챈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입니다.
잠시 느낀 해방감의 기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채윤이 역시 그럴 것입니다.

잠시 해방되었다가 바로 실패, 좌절의 '덫'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알지만
아픈 건 아픈 겁니다.
일단 합격한다 해도 맘 편히 보낼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 형편이지마 그렇다고
'떨어져서 잘 됐네'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잘 되는 나'가 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것이 꼭 좋은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므니지 않습니까.


카페에 가면 야박한 평점을 주는 편입니다. 보통은 질투심 때문이지요.
(언젠간 카페를 하고야 말겠습니다.)

이 집은 인테리어가 아니네. 커피 맛이 아니네. 주인의 태도가 아니네... 하면서요.
오늘 간 카페에선 그런 것들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냥 주인의 긴장된 표정을 보면서 '장사가 잘됐으면... 잘됐으면 좋겠네'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나를 향한 마음일 것입니다.
잘됐으면 좋겠는 마음. 실패나 아픔 같은 건 내 삶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 여정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스캇펙이 말했습니다. '모든 축복은 저주를 품고 있다'고.
그걸 알면서도 일단은 눈 앞의 축복이 좋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현실임을 아픈 만큼 아파하겠습니다.
실패는 실패니까요.


충분히 아파한 후에는 스캇펙의 말을 뒤집어서
'모든 저주는 축복을 품고 있다' 를 가식없이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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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 얘긴 100% 리얼.
요즘 주일 오후가 되면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

1. 막혔던 글이나 강의에 대한 생각이 뚫리고 아이디어가 막 떠오른다.
2. 식욕이 기분좋게 상승한다.
3. 시들해진 페북질이며 SNS 본능도 살아난다.
(요즘 블로그를 제외한 SNS들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는 중)

결론적으로,
예배 자체로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주입되는 느낌이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어디 세상살이가,
교회살이가,
신앙살이가
맘 같이, 말씀 같이 되어야 말이지 말이다.)


여하튼, 이런 현상들은
성령충만의 징후인가? 설교에 은혜받은 예표인가?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이 날에 하늘에서 새 양식 내리네~
이 주일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

이 찬양의 가사를 불타는 신라면과 며칠 전 담근 알타리에 담아!
음~ 마시이~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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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주일이라면 새벽 같이 일어나 교회로 가서,
성가대와 주일학교, 성경공부 모임.....
그것도 아니면 커피라도 내려 나눠주기.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날이었다.
예배 드리러 가는 마음이 가장 컸었지만,
예배에 관한 마음이 가장 미미했었을 수도 있다.


주일 아침 현승이와 자전거를 타고 한강엘 갔다.
네 바퀴 자전거를 버리고 기아 자전거로 갈아 탄 현승이의 첫 라이딩이다.
나 역시 청년 때 하이킹을 가 본 적도 있지만 최근 20여 년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사실 조차 잊고 살았기에
거의 생애 첫 라이딩과 다름 없다.


겁쟁이 엄마와 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벌벌거리며 한강 까지 나갔다.
주일 아침 신선한 놀이였다.
아니, 신성한 놀이였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하고,
서로 격려하고,
함께 기뻐하고,
마치고 나서는 조금 더 큰 엄마와 아들이 되었으니....


라이딩 다녀와 유년부 과제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 현승이.
로마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했다.
<메세지> 신약으로 읽어보라고 주었다.
다 읽고나서 '율법이 뭐냐? 십계명인냐?'고 물어왔다.
율법에 대해서 한참 얘기했다.
'아, 뭐는 하지마라. 또 뭐도 하지마라.... 이런 거?' 하더니 조금 있다 이런다.
'그런데 율법을 다 합치면 사랑이래. 로마서에 그랬어. 사도바울이 한 말이야? 꼭 하나님이 한 말 같애.'란다.


모든 율법을 합치면 사랑!
아침 라이딩부터 마지막 5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기다리며 스타벅스에 앉은 이 시간 까지. 바로 그 사랑 안에 있다.
사랑 안에서 아무 것에도 애쓰지 않고,
스스로 짐도 지지 않고,
굳이 져야한다면 사랑의 짐만을 지는 주일.
일 주일.
매일.
이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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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교회 소그룹(당시 '목장'이라 불리던)에서 제대로 망가지며 맘 먹고 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창 재밌게 모이던 모임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였고 새로 만난 분들과의 어색한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눔이라고 한 마디 내놓으면 설교나 훈시가 돌아오곤 해서 점점 모임에 대한 기대도 떨어져 갈 즈음이었다. 인도하시는 리더부부(당시 '목자'라 불리심)를 돕겠다는 마음,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지 않아서 솔직한 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주 중에 겪은 예상치 못한 어려운 경험을 나누면서 스타일 무너지는 것을 각오하고 속 얘기를 했다.



그로 인해서 모임이 어떻게 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우아하고 진솔한 나눔은 없다.' 이걸 배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 고상한 이미지도 지키고, 적당히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도 유지하는 이야기로는 안될거라는 교훈이었다. 적어도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 내놓으면 상처받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그렇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만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공동체를 얻을 수 있다고 표현해도 될까?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될 때 까지 기다리는 지혜도 필요하겠지만 무장해제를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


블로그는 물론이고 밖으로 내보내는 글에도 내 이야기를 많이 드러내는 편이다. 오래 전 목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들을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피드백은 내게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꼭 이런 식으로 밖에는 쓸 수 없는 나의 한계를 가끔은 탓하기도 한다. 진실게임 하기로 해놓고(언제 하기로 한 적도 없으면서) 나만 진실을 까발렸는데 그 누구도 자기 얘기를 하지 않을 때 느끼는 손해본 느낌도 없지 않다. 약간의 전문용어를 섞어서 내 얘기가 삐져나오는 것을 희석시켜볼까 하는 노력을 한 적도 있다. 그럴 때 마다 글이 죽사발이 되는 경험을 했다.ㅠㅠ


내 한계이며 강점이라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나와, 나의 이야기, 나의 일상을 드러내지 않고는 글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말이다. 이 바닥에서 (이 바닥은 어느 바닥인가?) 여성의 글, 일상을 담은 글, 쉬운 말로 씌여진 글은 대접받지 못한다는 생각과, 그래서 약간이 피해의식 같은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젠 좀 당당해지려고 한다. 나의 한계와 강점이 공존하는 그 곳에 내 글이 있고, 한계와 강점이 한 지점에 있기에 내가 '사람'이지 않겠다. 남달리 애정이 가는 저자들이 있다. 유난히 자기의 이야기를, 자기의 실패담을 많이 들려주는 사람들이다. 얼마 전 회고록으로 만난 브레넌 매닝이 그렇고, 댄 알렌더가 그렇고, 도널드 밀러가 그렇다.


남편이 톰라이트를 읽을 때 나는 댄알렌더를 읽는다. 부부를 한 몸으로 부르셨으니 톰라이트도 내 꺼다. 남편이 <배제와 포용>을 붙들고 있을 때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붙들고 씨름한다. 필요하면 톰라이트와 미로슬라브 볼프가 들어있는 남편의 머리를 잠시 빌려쓰면 된다. 물론 남편 역시 내면아이가 들려준 인간의 마음에 접속된 내 마음을 설교에 갖다 쓰기도 한다. 나의 지성과 글쓰기의 한계를 인정하며 자족하며 감사(하려고)한다. 내 곁에 '인간의 얼굴을 한 지식'인 남편을 주셨으니 그를 질투하지 않고 진정한 나의 반쪽으로 인정해드린다.


묻지 않는 얘기 꺼내길 좋아하는 오지랖쟁이로 태어난 내가 어쩌겠나. '내 얘기를 해볼께' 하며 속을 드러낼 밖에.....

 

(오늘 아침도 황금빛으로 시원하게......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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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동안 SNS를 통해서 삶을 정리하고 드러내고 소통해왔습니다. 그로 인해서 더 넓은 곳으로 글을 내보내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1년여는 특히 페이스북으로 인해서 유난히 SNS에 대한 원치 않는 묵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한 번 빠져들면 잘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독 초기증상을 지병으로 달고 사는 늘 잠정적으로 '~~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인'으로서 SNS생활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이 단초가 되어 페북탈퇴를 감행한 적도 있었어요. 그로 인해서 마음의 여정에 큰 풍랑이 있었고, 풍랑을 직면하고 잠재우면서 조금은 더 깊은 바다 같은 잠잠함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최근 동생이 페북을 탈퇴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페북이 참 좋아. 나 바보요~하고 다 드러내줘." 함께 웃었지요. 블로그든 페북이든 누군가 와서 보라고 쓰는 글이기 때문에 다양하고 재밌는 심리적 국면들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블로그와 페북의 다른 점이라면 페북은 그야말로 시장의 좌판에 다른 사람들의 '글(사진, 생각)' 옆에 나란히 내 것을 펼쳐놓는 것이 돼요. 때문에 블로그에 내놓을 때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타인의 시선'을 훨씬 더 의식하게 되는 것이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인간이겠습니까.


여하튼, 오프에서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조차도 그 사람의 담벼락을 오래 관찰하면 최소한 그 사람이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는 알 수 있더라고요. '아, 이 사람은 자기를 이런 사람으로 알리고 싶구나.' 좀 부정적인 표현을 해보자면 '가장 붙들려 있는 자아 이미지는 이거구나.'가 금방 드러나는 것이죠. 헌데, 문제는 그것만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표방하는 이미지가 일차적으로 보이고, 조금만 더 차분히 관찰하면 페북커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그 사람의 이면이 보인다는 거예요. 원래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의 한계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판단을 하는 '인간'이라는 종이니까요. 그냥 보이는 거예요. 동생이 말한 '나 바보요.'한다는 게 그 비슷한 뜻일 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니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없는 거예요. 나 역시 페친들에게 그렇게 읽혀질 테니까요. 물론, 저처럼 이렇게 언어로 정리할 수 있는 페부커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최소한 공유할 수 있는 판단은 있거든요. 페친을 오프에서 만나보면 딱 알아요. 어찌됐든 그게 큰 깨달음이 되더군요. '이래도 저래도 내 본색을 숨길 수 없다.'라는 생각이 더 커졌어요.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올릴 사진도 글도 없드라구요.ㅠㅠ 한 때 싸이 다이어리에서 어린 청년들이 '인간이 싫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 이런 식의 감정 배설을 해놓고 '누가 나 좀 알아봐줘. 나 좀 인정해주고 사랑해줘.' 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곤 했었는데.... 페북 역시 좀 더 정제된 언어로 감정을 배설하는 곳이 되고 있고요.


감정배설로 치자면 말고 글을 끝없이 늘어놓는 제가 갑인데.... 누구를 뭐라 할 수 없지요. 타인의 감정배설이 내게 카타르시스 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꼭 배설해야 하는데 방법을 몰라 묶어두고 있었는데 그걸 잘 하는 글을 보면서 감탄하며 배우기도 하지요. 헌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페북이 슬슬 재미가 없어져요. 대선이 다가오는데 페북 타임라인만 보면 죄다 우리 편 같은데, 총선 때 데인 마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구요. 대선을 이야기 하려면 페북 밖에서 전도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내는 게 진정 필요한 일이한 생각이 들면서 괜한 피로감이 앞서요. 높아진 하늘과 서늘해진 날씨와 함께 약간 페북 허무주의 같은 것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탈퇴를 한다면 너무 약한 모습이고.... 사실 지금으로선 책을 홍보하는 일에 페북만 한 것이 없어서 어정쩡하게 붙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CGNTV 영상을 SNS 여기 저기 올리면서 든 생각입니다. 카스는 그야말로 전화번호로 맺어진 관계들이라 훨씬 더 오프라인에 가깝고 주로 아줌마들이라 그야말로 '수다' 같은 편안함이 있는 곳이지요. 아기들 사진, 요리 사진, 여행 사진 등 비슷비슷한 것들이 올라와도 그리 피로감 느껴지지 않는.... 블로그는 안방이고, 페북은 정리됐다 해도 복잡한 곳이고.... 이런 저런 생각하며 설거지 하고 앉아서 감정배설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아침에 한 번 씩 황금색으로 배설하는 게 좋잖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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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의 지하 감옥을 지키는 이름 모를 간수는 밤을 지새운다. 오늘 감옥에는 이상한 도를 가르치며 군중을 선동하고 소란을 일으킨다는 죄목으로 갇힌 두 죄수가 있다. 상관들은 특별히 당부하며 '든든히 지키라.' 하였다. 이 희한한 사람들은 엄청난 매질을 당하고 살이 문드러지는 상황에서, 발에 착고까지 채워진 상황에서 노래를 부른다. 감옥이 울리도록 노래를 부른다. '이상한 사람들이군.' 하며 듣고 있노라니 어느 새 졸음이 밀려오고 잠이 들었나본다. 갑자기 큰 흔들림을 느끼면 잠이 깼다.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옥문이 열려있다. '아, 탈옥이구나! 든든히 지키라며 특별명령을 받았는데... 그 죄수를 놓쳤구나. 나는 이제 죽었구나. 불명예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자.' 하며 칼을 뽑아든 순간.


"당신의 몸을 해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낮에 들었던 그 죄수의 목소리다. 횃불을 들고 감옥 안으로 들어간다. 믿을 수 없다. 감옥 문이 열리고 발에 차여 있던 착고까지 풀어졌는데 죄수들은 도망가기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열린 문으로도 도망가지 않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놀라움과 안도 감동과 긴장의 해소로 간수는 두 죄수에게 납작 엎드린다. 그리고 하는 말,


"주님, 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 질문으로 죄수는 구원을 만난다. '아니, 감옥이 열려 있는데 왜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까?' 또는 '당신들 대단한 분들이군요. 아까 낮에 제가 무례하게 군 것이 있다면 용서하십쇼.' 또는 '도대체 감옥 문을 어떻게 연 것이요?' 이것도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이리이까?'를 물었다. 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의 아우라에 압도당한 죄수의 질문은 '구원'을 묻는 것이었다. 평소 이 의문을 갖고 살지 않았다면 대뜸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간수는 평소 영원에 대한 질문을, 구원에 대한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질문하는 사람만이 답을 얻을 수 있다.
질문이 진지한 만큼만 진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선지자 하박국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하박국 1:13) 라며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할 때 끝내 답을 들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솔로몬이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하며 질문하고 성전을 지었다. 성전을 건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질문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성전에 갇혔고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에 갇혔다.


(여기까지 오늘 설교를 각색 요약한 것임)


헨리나우웬 신부님도 그렇게 말했다. '의문을 품으라. 하나님 앞에서 의문을 품으라.' 거짓 선생들은 가르친다. '믿어라. 닥치고 믿어라. 의문을 품는 것은 죄다.' 묻지 못하게 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진짜 하나님을, 진리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오랜 시간 그렇게 배워온 나는 내 안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올라올 때마다 '불경하고 믿음이 없는, 삐딱한 나'라며 스스로 정죄하고 죄책감에 빠지곤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죄책감을 품고도 의문을 버리지 않았고, 질문하는 자에게 답을 주시는 하나님이 많은 문제들에 때론 명쾌하게, 때로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답을 주셨다.


진리이며 사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안다는 내가 왜 성숙해지지 않는가?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님 앞에 있는 내가 왜 마음의 변화, 성품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가?
불의한 권력은 어찌하여 끝도 없이 강해지고 가장 약한 사람들을 소리 없이 짓밟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을 행하는 자들이 어찌 위기 때마다 피할 길을 찾아 다시 일어나 활개를 치곤 하는가?
사랑의 하나님 이라 불리는 하나님께서 왜 내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가?


다 열거할 수 없는 의문을 품고 살아왔다.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올라오고 올라오지만 어느 새 하나 둘 질문에 대한 답이 삶에서 주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2012년 이 곳 양화진에서 또렷하게 주어지는 진지한 답이 있으니... 가끔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명쾌하게 주어질 때가 있으니.....


질문을 품고 살아 온 지난 세월이 이제 와 생각하니 가장 어둡지만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지금, 여기를 삶이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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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살 만큼 사셨죠. 더 아프지 않고 돌아가시면 복이죠."

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요. 곧 요양병원으로 가실 건데... 그 이후에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아요. 네, 연락 드릴께요"

라고, 요즘 자주 말하고 있다.

"다시 걸으실 수 있을까요?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에... 음.... 그리고 한 쪽이 골절되셨으면 다른 한 쪽도 골절 가능성 있습니다. 꼭 이것 때문이 아니어도 병원에 입원하고 그 날 돌아가시는 분도 있으니까 보호자께서 알아두셔야 하고요..."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원래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살 만큼 살았다구요? 도대체 얼마나 살아야 살 만큼 산 건데! 세상 어느 누구가 자기 엄마를 살 만큼 살았다며 기꺼이 죽음에 내어줄 수 있는데!!! 내 평생 살아 있는 동안에 엄마가 살아 있다해도 살 만큼 산 게 아니라구요!"

"산책도 하고, 혼자 버스 타고 교회도 가던 우리 엄마가 침대에 누워 꼼짝을 못해요. 내가 이 생각만 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혼자 화장실도 못간다구요. 그래서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잡고 일상을 살아나갈 기분이 아니라구요."

"뭐라? 다시 걸을 수 있겠냐니! 다시 걸으실려고 노인네가 수술을 했는데. 다시 걸을 수 있겠냐구요? 다시 혼자 걷기 위해 수술하고 이 먼 요양병원 까지 온 우리 엄마를 놓고 의사라는 당신이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그 날 돌아가시는 분도 있다고? 저 분이 누군줄 알아?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

오늘 엄마를 김천에 있는 노인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왔다.
누군가 나를 아이처럼 대해준다면 통곡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누구든 나를 아이처럼 대해 줄 리 없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덤덤하게 어른스럽게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나 처럼 사는 이는 나 밖에 없음을 안다.
그래서 '네, 맞아요. 사실 만큼 사셨죠.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 제가 좀 바빠요. 아, 그렇죠. 연세가 있으니 장담할 수 없겠죠." 라며 살고 있다.
나와 같은 하루를 보낸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슴 한복판이, 몸의 일부분인 가슴이 이런 방식으로 아픈 하루를 보낸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엄마와 인사하고 병원을 나왔다.
코너를 도니 유리벽을 통해서 엄마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엄마가 멍한 얼굴로 바가지를 앞에 놓고 양치질을 하고 계셨다.
내 슬픔에 겨워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지만,
오늘 하루를 엄마 처럼 산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
엄마의 외로움을, 엄마의 쓸쓸함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헤아려지지 않는 엄마의 하루라 생각하니,
엄마처럼 사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엄마의 오늘 하루는 나와 다르고 나는 거기에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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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 사이에 구전되는 '목회적 관계 맺기의 법칙'이 하나 있으니 이것이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한 두 해 목회질(?) 하신 분들의 노하우가 아닐 것이다. 교우들과 가까이 하면서 상처도 받을 만큼 받으신 분들이 후배들에게 주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며 나눠주시는 지혜일 터. 그러나 이 말처럼 교회의 본질, 예수님의 제자도를 따르는 공동체 정신과 위배되는 말도 없다 생각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보여줄 건 보여주고 숨길 건 숨기는 관계에서 어찌 신뢰와 사랑이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은, 신뢰는 친밀해져서 약점을 드러내고 상대의 찔려 피 흘리도록 아파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만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남편의 초임 목회생활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철학에 거스르는 방식이었다. 교회는 바뀌지 않고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호칭과 약간의 역할만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로 지내던 사람들이 목회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해도 선택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이제 와 돌이켜보니 젊은 부부들의 모임인 'AP목장'은 물론 청년부 TNTer들과의 만남은 진하고도 끈끈한 만남이었다.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그런 만남이었다.

특히 청년부와의 3년은 내겐 더욱 특별하다. 블로그에선 꽤나 징징거렸지만 아무리 징징거려도 다 표현되지 않을 정도로 지난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내던 3년 여였으니까. 지하 감옥 같은 마음 상태로도 이들과의 만남에선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돌이켜보니 그러하다. 이 점에 관한 한 감히 나 자신을 칭찬할 수 있으리.) 가끔 '하나님이 도대체 날 사랑하시는가?'라는 의문이 들어서 그 믿음조차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은 청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역지를 옮기면서 어떤 의미로든 의식적으로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큰 틀에서 원칙을 지키고 있다. 헌데 <오우 연애> 책을 낸 이후로 내가 지금 어디를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책으로 인한 방송출연, 인터뷰 등이 연이어 있었다. 내가 거기서 하는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TNTer들과의 이야기다. 자꾸만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처럼 해야 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 이걸 통해서도 내가 TNTer들과 얼마나 깊이 서로에게 영향받고 있었나를 확인하게 된다.

방송을 위해서 집에서 청년들과 노는 걸 촬영해야 했다. 멤버를 구성하는데 쉽지 않았고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곡절이 있었지만 갑작스레 캐스팅된 멤버들이 모여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모임이 되었다. 녹화 때 하지 못했던 꼭 필요한 말들이 얘네들 입을 통해서 나왔다. 무엇보다 내가 너무 즐거웠다. 즐겁다 못해 속으로 눈물 찔끔 나게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우연히 놀러 왔다가 인터뷰 당한 귀여운 커플과 결혼식장의 신부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는 새댁과 센스있는 동네 아가씨와 나의 커피 런닝 메이트 까지. 카메라 켜지자마자 긴장하고 벌쭘하던 모습 간 데 없고 깔깔거리고 낄낄거리는 시간이었다.

어제의 만남들이 오늘 내게 이렇게 힘이 되니 이 고마움을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관계라는 것이 어제와 오늘을 어찌 구분지을 수 있으랴 싶다. 구분지으려 했지만 최소한의 형식에서만 가능한 일이겠구나 싶다.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고, 때문에 앞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일 터이니. 더불어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이 곳에서 현재의 사랑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내일의 사랑은 없다. 교회가 크다고, 숨어 있어도 모른다고.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오늘 여기서 깊이 연루되고 소통하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되겠구나. 전에 그러했듯 사랑할 조건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일궈가야 겠구나.

 

(고맙고, 또 고맙다. 오늘의 만남이 된 어제의 너희들아....)

 


 

 

 

1991년 여름 수련회와 맞바꾼 책 한 권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여름 수련회 3박4일로 1년 영발 다 채운다.'는 생각으로 수련회에 목숨 걸던 청년이었지요. 그러나 그 해에는 정말 수련회를 가기가 싫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 해 새로 오신 대학 청년부 목사님의 설교를 3박4일 내내 들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평소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읽으면 영이 악해진다며 설교단 위에서 말씀하셨고, 그 순간 제 가방엔 시사저널이 들어 있었었죠. 일주일에 한 번 듣기도 힘든 목사님의 설교였으니까 1년의 신앙 농사를 망친다 해도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아끼던 모든 분들이 '그러면 안 된다. 그래도 가야한다' 라며 설득하셨고, 무엇보다 제 맘에는 '사실 이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선택이다.' 라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대학 청년부를 지도하시다 고등부로 내려가신 전도사님이셨죠. '그래, 그렇다면 수련회 올라가지 마라. 대신 특별한 마음으로 3박4일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특별하게 보내라는 3박4일은 성경 일독도 아니고, 금식기도도 아니고 하다못해 신앙서적 몇 권을 읽으라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논리와 비판적 사고> 바로 (이 책을 먹으라! 아니고) 읽으라 하셨습니다.

 

목사의 딸로 자란 저는 수많은 당위의 세례를 받고 자랐습니다. '해야만 한다. 옳다/틀렸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하나님 뜻이 아니다' 이런 내면의 메시지가 가득한 제 기억의 저장고에는 '온전히 받아들여진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경험이 없는 것 아니겠지요. 경험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겠지요). 1991년 여름, '그래 그러면 가지마라' 하셨던 전도사님의 말씀이 제 일생에 잊히지 않는 '지지와 격려'입니다. 제 안 밖에서 '당위'의 소리만 들를 때, 제 깊은 바람을 들어주신 기억이니까요. 이때로부터 저는 이 분의 말씀은 제게 '팥으로 쑨 메주'가 되었습니다.

 

제 이름이 새겨진 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즘 '실감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가당치 않은 일이다.' 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저보다 글 잘 쓰는 분들이 페북 친구 중에서도 수두룩합니다. 저는 말하자면... (글 쓰는 걸 좋아하기 보다는) 글쓰기에 겁을 안낸다는 것과 얄팍한 말장난 기술이 있는 정도입니다. '팥으로 쑨 메주'가 되신 전도사님의 말씀이 이런 저를 '글 잘 쓰는 제자'로 계속해서 불러주셨습니다. 정말로 제가 팥으로 쑨 메주가 된 것입니다. 주보에 쓴 어쭙잖은 글에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 같다'고 하신 칭찬이 끝없이 제 자존감을 끌어올린 세월이었습니다.

 

높은 책꽂이가 앞을 딱 막고 있던 책상 앞에서 수련회 하던 마음으로 400여 페이지의 논리학 책을 큐티하듯 읽었던 그 여름이 많이 생각납니다. 당위와 비판의 메시지가 들끓는 내면으로 겉으로는 착하고 믿음 좋은 청년으로 살던 제게 한 번의 치유가 일어났던 3박4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름이 없었다면 <오우 연애>는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것이었네요. 그래서 전도사님께 '감사'라는 말은 턱 없이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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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아닌 어느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을까?


'언젠가는 더 나아질거야.
이것만 달라진다면,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말이야'
부족한대로 미완의 상태로 지금 여기의 타인을 받아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누구보다 현재의 나를 부족한대로 용납하기란.


더 잘해야지.
더 친절해야지.
더 도움이 되어야지.
더 참았어야지.
더 현명해야지.
더 명랑해야지.
더 쿨해야지.
더 겸손해야지.


그렇지 못한 현재의 나를 받아주는 것보다 더 큰 과제가 어디 있겠는가.
나 자신 뿐 아니라 내가 발딛고 서 있는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 거룩한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여름밤 마포나루에는 언제 찾아가도 늘 '거룩한 현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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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2학기 때 쯤으로 기억된다. 매주 음악치료 실습이 있었고 그 날 그 날 점수가 나왔다. 돌이켜보면 거의 중독적으로 점수 계산을 하곤 했다. 뻔한 점수를 계산하고 또 계산하고 그랬다. 학교를 갔다와서 늦은 밤 책상에 앉으면 점수계산 먼저 했다. 상담심리 과목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대한 강의를 들은 날이었다. 이전에 전에도 무수히 들었던 '프로이드의 무의식'이 귀에, 마음에 팍 꽂혔다. 그리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점수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 그 밑에는 엄청난 경쟁심이 있다는 것, 더 밑에 있는 '과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대학원 이후로 융심리학은 내 마음의 눈을 뜨는데 (심지어 어떨 땐) 복음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내가 얼마나 '자기라는 성 안'에 갇혀서 살았는지, 그로 인해서 타인도 세상도 심지어 하나님도 내 식대로 받아들이면 나를 괴롭히고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긴 여정이었다. MBTI와의 만남을 통해 융의 분석심리학에 빠져 한 동안 전공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었다. (딴 얘긴데... 학부 때는 전공인 유아교육 대신 여성학, 대학원 이후엔 전공인 음악치료 대신 융심리학, 지금은 음악치료 대신 커피에 목숨을 거는 난 도대체 뭐냐? 뭐지?)


에니어그램을 하면서 상처받은 내면아이와 만나는 작업을 오래 해오고 있다.  왜 어쩌다 이 여정에 초대되었는 지는 사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신앙과 삶이 따로 놀지 않는 나' 이길 바라며, 더 깊이 하나님에 대한 앎과 더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여정을 가야하는 것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게 영적여정은 이러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 결핍에 사로잡힌 눈으로 나를 보고, 타인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말이다. 두툼한 일기장에 수많은 나만의 상처 이야기와 치유 이야기가 쌓이고 또 쌓이고 있다.(그 이야기들이 조금씩 일기장 밖으로 삐져 나오고 있는 중)


정신분석, 아니 그렇게 거창한 것은 잘 모르고 '의식성찰'이라는 미명하에 내 마음의 동기를 파헤치고 또 파헤치다보면 많은 부작용들을 만나게 된다. 내 안에 선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고, 그것들은 바로 투사가 되어 다른 사람을 향해 비춰진다. 세상 사람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구속한 주는 간 곳 없고 죄투성이 인간'만 보이게 되는 감옥같은 순간이 온다. 거기가 끝이라면 에니어그램이며 내적여정 같은 것들은 그저 독, 맹독일 뿐이다. (말로하면 이렇게 짧은 한 단락을 몸으로 살고 머리로 정리하기 까지는 얼마나 긴 시간과 고통이 필요했었는지...)



지난 토요일 저녁, 김형경의 심리에세이 <만가지 행동>을 읽은 터였다. (남편이 전날인가, '이런 책 이제 그만 읽어 여보' 했고, 나는 '이번에 쓸 글에 참고할 게 있어서..'라고 했다) 간만에 보는 정신분석 이야기라 파바박!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투사, 시기, 전이, 역전이 등의 용어로 마음을 설명하는데 몰입이 되어 내 마음, 남의 마음을 보는 매의 눈이 간만에 날카로와진 상태였다. 퇴근해 들어온 몸과 마음이 곤고한 남편에게 살짝 불편한 마음이 생겼는데 순간적으로 정신분석적 용어로 마음이 정리되면서 불편한 마음이 증폭이 된 것이다. 아! 이 지점이다. 이 여정에서 헛갈리곤 했던 지점. 안 보이던 마음의 역동이 보여서 좋긴한데, 보여서 더 버거운 이 지점말이다.


이건 완전 괄호임. (물론 이젠 그런 역동을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약.간.의 자정능력이 생기기도 했다. 한참 이거 심할 때는 얼마나 심하게 목을 조였는지... 김종필님 고생이 많으셨었다. 마음이 넓고 점잖으시고 인격이 훌륭하시고, 온유하시고, 캐 동안이시고, 키도 크시고, 썰렁 유머도 잘 하시고, 가끔 설교도 잘 하시고, 결혼식 주례도 잘 하시고, 잠도 많으시고, 길도 잘 찾으시고, 커피 맛도 잘 아시는... 김종필님께 늘 심심한 감사를 반복하여 표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완전 괄호 닫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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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으로 맞은 주일이고, 주일예배였다. 설교제목은 '기도할 곳이 있을까' 였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팀이 도착한 빌립보. 제2의 로마라고 불렸다던 그 거대한 도시에서 빈 주먹 쥐고 들어간 일행이 할 수 있었던 건 기도할 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미약하고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 존재의 현주소를 깨달았을 때 창조주 그 분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도이다. '인간은 자기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헌신의 도약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된다'라로 말한 브레넌 매닝의 말이 다시 한 번 마음에서 속삭이고, 헌신의 도약이란 내게 있어선 다름아닌 '기도'로 해석된다.


주말에 에니어그램 강의가 두 군데 계획돼 있다. 할수록 어렵고, 이번에는 유난히 마음에 부담이 크다. 에니어그램이 너무 좋은 도구라서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잘 보여줘서 어렵다. 그걸 볼수록 나의 죄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정작 나는 그것으로 나를 높이는 도구를 삼는다. 그 지점에서 필요한 건 모든 분석을 멈추고 창조주 그 분 앞에서 무력하고 미미한 존재인 나를 인정하는 기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다시 경험한다. '기도할 곳이 있을까?' 언제 어디서든 내가 찾아야할 것은 '기도할 곳' 이라고  성령님 내 귀에 속삭여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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