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미주 코스타 참석하고 얼마간 여행 일정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전체집회 말씀 전하던 화요일 밤(한국은 수요일 아침)에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도 덕분에 사명 완수했습니다. 사명이란,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명' 같은 거창한 단어는 떠올려보지도 못하고, 순간순간 감정의 파도에 떠밀려 다녔을 뿐입니다.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올린 글에 애정하고 존경하는 신소희 수녀님이 남기신 댓글로 관점이 전환된 것입니다.

"신실 샘, 사명 완수 후 NY에 계시다니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마음에 가득하여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것. 그것이 사명의 전부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감동을 주는 것, 돌아오는 인정과 칭찬, 그 반대의 것들까지 '사명 완수'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블로그로 연결되어 기도해주신 벗님들께 깊은 감사드리고, 기도에 부응하여 사명 완수했음을 보고 드립니다.

 

그리고 아래는 코람데오닷컴에 실린 기사이고요.

 

2022 미주 코스타, 역사상 처음으로 평신도 여성을 저녁집회 강사로 - 코람데오닷컴

2022 미주 코스타가 \'오늘 여기 함께 Let Us Feast\'라는 주제로 7월 4일(월) - 7일(목) Wheaton College, IL에서 개최되었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수련회가 진행되었으나, 올해에는 상황이

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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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 참석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에 갑니다. 탑승하고 휴대폰 끄며 온라인 연결이 끊어진 이후 새벽 2시에 맞춰 포스팅되도록 예약 걸어두겠습니다. 이후 30 시간 쯤 후에는 가장 멀게 지구를 돌아 시카고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을 게요.

전체집회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출국 한 주를 앞두고 가장 어려운 시간, 남편이 코로나 확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앓고 지나왔지만, 재감염 우려 때문에 집에서 격리하지 않고 밖을 돌고 있습니다. 하필 이때 확진이라니! 좀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설교문을 완성해서 보냈는데. 징징거리고 싶은 입에 자물쇠 채우고 로봇처럼 글을 썼습니다. 몸이 근질거려서 보니 다리부터 발진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문을 보내고 난 다음 날에는 발진이 얼굴까지 올라왔습니다.

막막한 마음으로 아침 기도 하는 중 누가복음 2장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기도가 영혼 깊은 곳에 들어와 메시지성경 버전의 본문을 써서 책상 옆 창에 붙이고 기도합니다. 인간 이성으로 1도 이해되지 않는 일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수동성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신부님께서는 ‘창조적 수동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력하거나 게으른 수동성이 아니라 ‘창조적’ 수동성, 구원을 잉태하는 수동성입니다.

머리는 준비하지만 몸과 마음으로는 계속 도망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시는데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비천한 나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제 마음에 하나님 외 누구도 '갑'으로 세우지 않겠습니다. 지난 코스타에서 만났던 청년들의 눈만 생각하겠습니다. 저의 이 작고 비천한 존재 안에서 그분이 길어 올리실 것이 있으면 길어 올리시라고. 주의 여종이오니 마음대로 쓰시라고 드리고. 제 영혼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목요일에는 지도자과정 종강이 있었습니다. 포트락 파티로 먹을 것이 풍성하고, 먹을 것만큼이나 한 학기 지나온 선생님들의 나눔이 아프고 기쁘고 고맙고 자랑스럽게 풍성하고요. 마치고는 연구원들이 깔아준 "환송의 수다" 멍석에서 온몸 열꽃이 피었어도 다 빠져나가지 못한 것들을 말로 내놓았습니다. 연구원들, 나음터에 연결된 벗들, 동생들, 교회 집사님들이 보내오는 따스한 격려, "기도하겠다"라고 굳게 다짐해주는 마음들로 힘을 얻습니다. 어제 아침엔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었습니다. 좋은 날씨에 사야 할 것들을 사러 다닐 수 있었습니다. 밤에 채윤이랑 올리브영에 다녀오는데, 하늘 빛깔 하며 눈썹 같은 달이 조화롭습니다. 사진 찍고 나중에 보니 하늘에는 달, 땅에는 그린라이트 이것도 조화롭고요.

************

탑승 직전입니다. 오늘 아침 예상치 못한 일로 안팎의 조화가 깨져버렸습니다. 미리 써둔 이 글 다시 읽으니 사람 마음 하룻밤 사이 이렇게 멀리 올 수 있는 건가 싶습니다. 막막함의 끝입니다. 아직도 끝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도망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몫을 하겠습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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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밀도 있게 시간을 썼던 적이 없고, 요즘처럼 주어진 오늘의 일에 집중하며 살아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연구소 강의와 연구소 외의 강의, 대학원 공부와 사람을 만나 마음을 나누는 일. 어느 것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살아내고 있습니다. 학기말이라 과제가 몰려 있고, 어느 과제 하나 허투루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완벽주의 같은 건 아니고, 과제마다 연구하고 써내는 일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장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드라인에 맞춰 하나 씩 미션 클리어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7월 코스타 강의만 없다면 “바쁘다" 정도로 이즈음의 나날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이 모든 일을 잘 끝낸다 해도 '자유'가 먼 곳에 있습니다. 코스타 준비에 비하면 하나만으로도 죽겠다고 설레발쳤을 학교 과제는 껌입니다. 껌 씹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3년 만에 대면으로 열리는 미주 코스타에 갈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D-7, D-19, D-22는 코스타 관련 각각 의미 있게 부담되는 카운팅입니다.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그대로입니다. 블로그 친구들께 기도 부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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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회자, 여성

 

코스타 간사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올해 코스타는 대면으로 시카고에서 열린다고요. 이어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미주 코스타 사상 처음으로 전체집회 강사에 비목회자, 여성이 서게 되었다고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감탄사 말고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잘 하셨네요! 정말 좋은 결정이에요!” 37번째 코스타라니 37년 만의 일이네요. 이게 37년 걸릴 일이었군요! 지구의 반이 여자이고, 목회자와 비목회자의 비율은 헤아려지지도 않는데. 이제야 비목회자, 여성 주강사라니요! 너무 늦은 일이라 더 놀랍고, 용기 있는 아름다운 선택입니다. 기립박수에 엄지 척. 감동이 쉬 가시지 않아 심장박동이 채 정상으로 회귀하기 전

 

'그 자리에 올 수 있겠냐’' 하셨습니다.

"? 누가요?"

 

세미나 강사로 초대를 받을 때마다 '나 같은 무지랭이 강사를' 하는 심정인데 전체집회 강사라니요? 가당치 않은 일이라 마음으로 당장에 거절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 갑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첫 번째 비목회자 여성 주강사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지랭이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확신은 없지만, 코스타 간사님들이 강사 인선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거든요. (또 솔까말, 무지랭이 강사지만 결국 가서 하고 나면 인기 강사 되고 말더라고요오.... 흠, 내가 코스타 간사님들과 페친이던가 아니던가)

 

당연한 거절의 이유 중 중요한 것은 주제였습니다. 주제가 무려 잔치입니다. 벌써 올해 주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잔치라니, 올해는 온라인으로 코스타를 한다 해도 세미나 강의도 할 수 없겠구나! 잔치, 파티, 축제는 나와는 얼마나 동떨어진 일인가 싶거든요. ‘신앙 사춘기를 빌미로 무기력과 냉소를 표방하며 살아왔고, <슬픔을 쓰는 일>의 저자로 죽음, 상실, 슬픔의 페르소나로 글 쓰고 강의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제 안에 잔치에 합당한 감정이 있나 싶습니다.

 

시간, 아니 시간 속에서 들리는 어떤 목소리에 스스로 설득되었습니다. 초대장을 들고도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마음을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갑니다. 알리고 싶었습니다.

 

_202253, 정신실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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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짠 계획이 아니라 흐르는 대로 따르다 좋은 하루를 보냈다. 조금 차분히 말하고 싶어서 '좋은 하루'라고 했다. 쉽게 들뜨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평소의 나대로 말한다면, 대박 신기한 사랑의 하루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점심 약속이 있었다. 초5, 초4의 어린이 성가대로 만난 제자 둘이다. 그때 내 나이는 27세. 그러니까 얘네들은 몇 살이냐. 자축인묘진사... 모르겠다. '울고 웃고'가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단톡이든, (언제 적) 마이피플이든, 라인이든. 개그 코드가 맞고, 선생님이고 뭐고 격의 없이 서로 놀리는 게 쉬워서 "웃고"이다. 웃다 말고 급하게 진실이 튀어나와 울기도 해서 "울고"다. 갑자기 들어온 전화 한 통으로 대단한 계획 없이 성사된 모임이다. 

 

십수 년 전, 얘네들과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을 함께 읽고 기도도 가르치고, 메시지 성경읽기도 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기가 막힌 일이다. 당시 나는 신앙 사춘기 절정이었다.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그 캄캄한 시절에도 할 것은 다 했다고 했는데. 할 것을 다 한 게 아니라 살자고 하는 짓은 했었구나. 마음 잘 맞는 제자들 데리고 <영성 수업>을 했었구나! 집에서 떡볶이 해서 먹이고 커피 내려서 마시고 하면서. 그 시간이 얘네들에게 어떤 씨앗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나를 살게 하는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정말 나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구나. 그 메마른 시간에도 살아 있는 시간을 찾아냈었다.

 

"우리 어제 만난 것 같지 않아요?" 라는 말에 격한 공감. 본 지가 몇 년인데 어제 명일동 LG 아파트나 그 동네 어느 카페에서 만난 느낌이다. 길지도 않은 시간, 별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느낌이 가득하다.

 

돌아오는 길, 죽전에서 '고봉삼계탕' 간판을 보았다. 바로 핸들을 꺾어 들어가서 삼계탕 포장 주문을 했다. 주일 예배에서 만났는데 안색이 썩 좋지 않은 Y 생각이 났다. 코로나를 앓고 몸이 썩 괜찮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포장하고 집 앞으로 갔다. 잠깐 내려오라 했더니 괜찮으시면 잠깐 올라오셔도 된다 해서 계획 없는 침입을 했다. 남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이 무례한 행각, 내가 해본 적이 있던가? 내 사랑 일곱 살, 다섯 살 두 남매가 토끼처럼 뛰면서 반기고. "사모님, 이리 와봐요." "사모님, 이거 봐바요." "사모님, 내가 사진기 만들어 줄까요?" "사모님, 국기 퀴즈 내봐요." "사모님 이제부터 나랑 책 파는 집을 만들어요." "사모님, 이제부터 우리 자요. 눈을 뜨면 지는 거예요." 그러다 헷갈려서, 목사님... 목사님... 전도사님... ㅎㅎㅎ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사모 정체성이란 거의 없는데, 사모님, 사모님, 이 말이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남매의 엄마인 Y는 내가 코로나를 앓을 때 집 앞 현관에 간식을 두고 갔었다. 워킹맘으로 시간을 어떻게 쪼개 쓰고 있는지 잘 아는데, 바쁜 퇴근길에 들렀을 생각하니 뭉클했다. 그런 배려를 받았는데, 한참 언니인 나는 이후 Y 가족이 모두 확진받았단 소식을 듣고도 챙기고 돌아보질 못했다. 참 고마운 가족이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뒷부분 가사 "나 피곤치 아니하며"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메마른 땅, 메마른 땅"을 헤매던 시절, 이 가족이 없었으면 더욱 메마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먼지 나는 시간을 걸을 때 "어쩌면 내가, 우리가 좋은 사람인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줬었다. 

 

우리 깨어진 본성이란, 사랑을 향해 가지 않는다. 사랑 받을 곳을 향하기보다는 "누가 날 싫어하나, 누가 날 비난하나" 그 소리를 향해서 귀가 커진다. SNS 어디서 누가 내 욕을 하는가, 거기에 골몰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백 번 들어도, 그 반대의 메시지 한 번이면 그거 하나만 붙들고 며칠이고 잠을 못 이루는 우리이다. 사랑받을 곳으로 가야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기도 어떤 때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필요하다. 자아 팽창을 유발하는, 고래나 춤추게 하는 허튼 칭찬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음'을 확인해주는 곳을 부러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은 애써 찾고자 하지 않았는데, 흐르는 대로 따르다 선물 폭탄을 받은 날이다. 깊이 감사한다. 오늘 이 온기를 오래 간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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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우리'학교라고 써보니 참으로 낯선 표현이다. 장난스럽게 굴 때 말고는 '우리'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카톡에서 무심코 '우리 00 샘'이라 써놓고 살짝 오글거렸었다. 낯설고 오글거리지만 진심이 담긴 것 같다. 장난스러움만은 아니다. 우리 학교. 대학원 들어가서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으로 캠퍼스를 밟게 되었다. 첫 학기 전면 비대면 수업. 이번 학기에는 그대로 첫 수업은 모두 대면이었는데 마침 그 주에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 수감 생활이었다.

카카오톡과 줌이 학교와 연결되는 유일한 라인인데. 그것만 가지고도 끌리는 사람 끌리고, 이어질 사람 이어지는 것이 희한하다. 내게도 호감이었던 선배 한 분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을 잡았는데 다른 선배 한 분까지 합류하여 셋이서 캠퍼스에서 만나 학식으로 점심을 했다. 학교에 처음이라고 하니 식당, 도서관, 학과 사무실, 자신만의 비밀 공간으로 투어를 시켜주시니 나이 오십 넘어 신입생 실감이 제대로 났다. 신나고 즐겁고 설레서 왼쪽 가슴에 손수건 매달고 싶은 심정.

장례식 조문으로 다니던 곳이었는데. 학식을 먹고, 학생증 찍고 도서관에 들어가니 여기가 늘 다니던 거기였던가 싶다. '같은 장소 다른 느낌'이란 정녕 이런 것이구나! 장례식 육개장 아니고 그 옆 건물에 학식이라니. 공부 시작했다고 하니 여러 사람이 박사과정이냐고 묻는데,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짜릿하다. 박사 석사 아니고 초등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일이다. 건물 이쪽저쪽으로 뷰가 다 좋은데, 야경을 더 끝내준다는데, 내가 꼽은 최고는 화장실이다. 정사각형 유리창에 가득 담긴 숲 풍경이 최고였다. 비대면 수업이라지만, 괜히 학교 가야지. 학식 먹고 어슬렁거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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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거절을 연이어 두 번을 했다. 때늦은 거절이라 민폐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니,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하자. 쓰기로 약속한 글을 기한이 다 되어 포기했다. (거절, 어긴 약속, 포기, 실패... 어떤 표현이든 달게 받겠다.) 하나는 엄마 잃은 딸이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 돌아가신 엄마를 새롭게 만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딸을 잃은 아빠의 애가이다. 하나는 서평이고 하나는 추천평이었다. <슬픔을 쓰는 일>이 연결시킨 일이 분명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부담은 됐지만 두 분 저자에게 위로든 무엇이든 건네고 싶었다. 마감이 다 되도록 끙끙거리다 둘을 다 포기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못 쓰겠어요."하는데, 몸이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거절한 원고는 있었지만, 약속하고 쓰지 못한 글은 없었던 것 같은데. 

 

**

MBTI로 P가 높지만 강의 약속에 늦는 일은 거의 없다. 30분 전 도착을 목표로 하지만 15분 전, 10분 전에 도착하는 경우는 있지만. 1월 초, 강의 시간에 30분을 늦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내가 유발했다.) 지하 서부간선도로에서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걸 한 번 놓치고. 성산대교까지 가서 돌아와야 하는데, 도통 네비가 해독이 되지 않아 근처 한강공원, 양평동을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강의하는 교회까지 가서는 건너편에 두고 막히는 길 유턴하러 갔다가 또 몇 바퀴. 딱 무엇에 씐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갖 감정이 식은땀과 함께 지나가고. "나는 늦었다. 늦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것 외에는 없다." 받아들였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온몸으로 견뎠다.

 

***

무의식의 힘이 세다. 정말 가기 싫은 강의였다. 늘 말하던 주제였지만, 입을 떼면 줄줄 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마음의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30분 전에 도착하려 했는데 30분 지각을 했으니 1시간을 늦은 셈이다. 마음이 한 일이다. 무의식이 작정하고 뺑뺑이 돌린 것이었다. 무의식을 탓할 일은 아니다. 강의에 지각한 것도, 약속한 원고를 쓰지 못한 것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빠르게 바르게 분별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분별에 앞서는 것은 '인정'이어야 하겠고. 한계를 가진 나, 한계를 가지고 사는 삶의 구멍들과 구멍에 빠지는 날들의 아픔을.

 

****

지난 학기 내내 붙들고 씨름하던 주제가 '비극'이었다. 그리스 비극부터 오늘 여기 일상의 비극까지. 슬픔은 '애도'를 통해서만 치유된다고 마르고 닳도록 말하고 써왔다. <슬픔을 쓰는 일>이 그 결정판이다.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지혜를 가져와 좌절의 기술을 가르치는 어느 철학자의 책이다. 슬픔과 애도에 대해 쓰고 강의하면서 역시나 마르고 닳도록 인용하는 퀴블로 로스의 애도 단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슬픔의 다섯 단계 목록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처음 네 단계, 즉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건너뛰어서 곧장 다섯 번째 단계인 수용으로 갈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되살려내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므로 그들의 죽음을 과도하게 슬퍼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덧붙일 것이다. 가능한 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슬픔을 쓰는 일> 한 권을 통째로 반론으로 들이밀 수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인정한다. 삶에 널린 수많은 좌절, 어떤 좌절, 내가 유발한 어떤 위기들은 곧장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건너뛰고 수용! 어떤 날, 어떤 일은. 수용하고 겪어내야 한다. 결국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퀴블로 로스 여사의 5단계는 기계적 순서가 아니라 결국 잘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고. 더 나은 날까지는 아니어도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 외에 다른 선택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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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말 과제를 제출하고, 후련함 대신 뭉글한 뭉클함의 하루를 보낸다. 다시 석사를 시작했다. 스물아홉에 학부 전공 버리고 대학원을 시작했을 때, 신생 학과 '음악치료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가 떠오른다. 이게 공부구나! 하고 싶은 공부는 이렇게 재미있구나! 했었는데. 쉰셋에 학부 전공, 대학원 전공 버리고 또 새로운 전공에 들어서서 한 학기를 보냈다. 이게 공부구나! 공부는 늙어서 하는 거구나! 하면서 한 학기를 마쳤다. 급하게 진행된 진학의 과정이지만, 실은 10여 년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정말 공부하고 싶었는데, 학위 과정을 하고 싶었는데 갈 학교가 없었다.

가을학기 전형에 응시하여 석사과정에 편입했다. 물 흐르듯, 그러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이루어진 일이다. 입시요강 페이지 열어놓고 고민하는 엄마를 발견한 채윤이 질문에, 저간의 상황을 말했다. "응시해, 응시해, 당장! 내가 해줄까?" 그 말 끝에 온라인으로 응시, 필요한 서류 준비까지 다 해줬다. 편입이 불가하면 안 가야지, 했는데 편입 허락이 되고. 면접을 보면서는 "내가 가서 공부할 만한지 교수들 면접 좀 보고 올게."하고 갔는데 마음이 스르르 녹아서 끌렸고.

네, 저는 그렇게 쉰셋에 다시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영성 공부합니다. 전통적 영성에 관심이 많아서, 특히 중세 영성에 관심이 많아서 가톨릭 대학입니다.

예상된 결말이란 생각이 든다. 이 결말을 빠르게 끌어낸 것은 엄마 상실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뭐랄까 뱃심이 생겼달까. 하고 싶은 거 하고, 하기 싫은 거 안 하는 삶을 사는데 더욱 두려움이 없어졌다. 미움받을 용기는 물론이고, 왕따 당하는 것도 그리 무섭지 않다, 라는 것은 지금 막 쓰면서 알았다. <슬픔을 쓰는 일>에는 '허무의 강'에 떠오르는 것들을 뜰채로 떠서 갖다 버린다는 표현을 썼는데. 오랜만에 책을 들춰 보면서 아, 내가 이런 말도 했구나! 심지어 이것이 책의 결론이었구나! 놀랐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6개월 전 떠나신 엄마가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도 이것 아닐까. 삶을 살아라, 네 삶을 살아라. 내 딸아, 이제 죽음에의 두려움을 벗어나 상복을 벗고 '현재'라는 선물을 살아라. 반드시 죽을 너의 운명을 기억하되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아라!


그렇게 알아들었다. 나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돈은 되지만 하기 싫은 일은 접었고, 코 앞의 이익은 주지만 내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일들은 피하며 산다. 성장에 도움도 안 되고, 힘만 드는 관계는 애써 붙들지 않는다. 부러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모두 엄마가 떠나고 남긴 선물이다. 그 선물이 나를 다시 공부로 이끌었다. 엄마가 그렇게 싫어하던 공부. "책 그만 읽어. 시집 못 가. 여자가 공부 많이 허믄 마음만 높아져서 안 되는 거여. 아이구, 시집 못 가." 엄마가 진심을 담아 하던 말이다. 엄마의 진심을 보란 듯이 팽개치고 대학원에 갔었지. 오직 결혼에 목숨 걸고 있던 엄마는 하늘이 무너졌었다. 진짜 시집은 다 갔구나!

엄마가 죽음으로 전해준 사랑의 메시지에 힘입어 엄마의 뜻을 거스른다. 천국에 있는 엄마가 잔소리 할까? "니가 지금 니 공부 헐 때여? 현승이가 고3이여. 채윤이도 아직 뒷바라지 헐 일이 많은디... 에미라는 년이 지 공부헌다고 돈을 쓰고 시간을 들여? 너어, 그르케 교만허믄 안 뒤어. 배울 만큼 배운 거 감사허고, 애들 잘 돌보고, 김서방 목회 위혀서 기도허고 그러야지. 예이, 이년아!" 이런 잔소리도 이젠 기분 좋게 듣겠지만. 낡은 정신과 몸을 다 벗은 빛나는 엄마의 영혼이 저리 말할 리가 없다. "잘혔다, 우리 딸! 우리 딸 공부 좋아허는 딸인디, 진즉 그르케 공부혀서 유학도 가고 그렸어야 허는디... 장허다. 평생 포기하지 않고 배우고 또 배우는 거 장혀. 허세로 공부허지 말고, 진실헌 공부를 혀. 우리 신실이 장허다."라고 말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첫 학기 강의들이 의도한 바가 하나도 없는데 고대 철학, 그리스 비극에서 만났다. 한 학기 동안 그리스 철학, 그리스 비극에 머물렀다. 그리고 기말 과제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들이며 '비극'에 머물렀다. 그리스 비극을 읽고 에세이를 쓰며 필멸의 존재로 불멸의 환상을 꿈꾸는 지점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이야기를 마주하고 또 마주했다. 마지막 과제는아우구스티누스의 <교사론>을 읽고 쓰는 것이었다. 거기 나오는 '내면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이었다. 이 역시 참 신기한 것이 <슬픔을 쓰는 일> 마지막을 또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삶의 비극성은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희망이 생기면 마음 깊은 곳에서 먼저 절망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버림받을 걱정이 앞섰다. (중략) 엄마 떠나고 시작한 애도 일기는 다시금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을 있는대로 세우고 머무는 시간이었다. 내 인생 가장 치명적인 두 슬픔, 두 죽음이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새로운 죽음에 이끌린다. 저항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죽음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비로소 든다. (중략) 나는 이제 이 신비 앞에서 상복이 필요 없는 죽음을 생각한다. 나의 죽음이다. 언젠가 마주할 나의 죽음을 가슴으로 안으려고 한다. 결국 다다를 비극 또는 신비인 나의 죽음을 부드럽게 사귀어 보겠다.


내 개인사의 비극을 넘어 실존적 비극에 머물고, 거기서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는 한 학기 공부였다. 이런 공부를 하는데... 예수님 좋아하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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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선생님이 이끄는 송년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한 해를 돌아보며 2021년에 이름을 붙여보니 "사선(死線)을 넘어"였다. 죽을 고생 했다는 뜻은 아니다. 돌아보니 올해의 키워드도 '엄마'였다. 은근하게, 더 진득하게 엄마였다. "아직도 더 울고 싶구나!" 알게 되었다. 1월부터 차근차근 돌아보는데, 6월 말 <슬픔을 쓰는 일> 출간을 기점으로 희한하게 눈물이 잦아들었다. '사선을 넘었다'는 표현은 어떤 경계를 넘어 죽음에 한 발 다가갔다는 뜻일 수도 있고, 비로소 한 발 떨어져 죽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출간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 그리고 출간 이후의 시간은 엄마의 죽음, 아니 죽음 자체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과도한 두려움으로 차마 정신 똑바로 차리고는 마주하지 못할 것이 죽음이었다. 다시 '죽음을 짊어진 삶'이란 언표를 꺼내야 하나보다. 등 뒤에 죽음의 흔적을 딱 붙이고 평생 살면서, 심지어 잘도 살아내면서 죽을 만큼 죽음을 두려워 하며 살았다. 엄마를 보내 드리고, 흑백의 나날을 살며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면서 이제 조금 죽음과 친숙해졌다.

내가 준비되자 부르는 곳이 생겨났다. 가을에는 죽음에 대한 의미있는 강의도 했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치유와 소망의 말이 되었다. '진실한 나'에게서 나오는 말이라, 그저 전한 것으로 족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들리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는 느낌의 강의는 흔치 않다. 쓸 수 있어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고 나니 다시 내 안에 새로운 것이 일렁이고, 그것들을 다시 써 내려갔다. 그러면서 사선을 넘었다.

오늘은 아버지 추도식이다. 30주기야, 30주기야. 했는데 동생과 통화하다 40주기라는 것을 알았다. 30 년이 아니고 40년이라고? 어떻게 난 아직도 40년 된 죽음에 매여 있을까? 라고 말했더니 동생도 그렇단다. "나도 그래" 내 현재 생각과 감정의 습관의 많은 것들이 아버지 죽음에 가 닿는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며(극복일까?) 사느라 생긴 어떤 것들이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다,라고 한다면. 내 존재의 가장 선명한 무늬니까.

엄마의 죽음이 아버지 죽음까지 치유하고 있다. 모든 죽음을 치유하고 있다. 겨울(아버지 돌아가신 12월 16일이 있는 겨울)이 다가오면 괜히 두렵고, 더 슬펐던 그런 느낌도 흐릿해졌다. 슬프고 아파서 가지만 앙상한 겨울 나무를 쳐다보지도 못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텅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여백의 아름다움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다. 40년이다. 죽을 때까지 아버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안다. 내 존재의 가장 큰 무늬니까. 이제는 조금 그 무늬가 사랑스럽다. 아버지 있는 아이인 척, 아무리 잘 연기를 해내더라고 나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는 걸... <슬픔을 쓰는 일> 후반부에서 '고아 의식'이라 이름 붙이고 충분히 머무르며 할 만큼 했더니 생긴 힘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이제는 아이도 아니지!)로 산 40년. 괜찮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움과 슬픔이 바짝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건 또 다른 마음의 길인 듯한데. 슬프고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괜찮았다. 엄마 아버지가 슬프고 그리울수록 죽음이 친밀하게 다가오고, 삶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니 말이다.

박미라 선생님의 송년 글쓰기에 참여한 것은 내 나름의 12월 리추얼이다. 해마다 12월이 다가오면 "피정 갈 때가 됐네"하는 소리가 마음에서 들렸다. 일상에서 물러나 침묵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 역시 12월, 아버지 떠난 자리의 흔적이었다. 알 수 없는 슬픔, 외로움이 밀려와 기도하러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던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갈 수 있는 피정이 없었다. 영혼은 메말라 울부짖는데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송년 글쓰기'이다. 피정 대신 선택했다. 좋은 선택이었다.

사선을 넘어 온 1년이다. 40년 전의 죽음, 1년 몇 개월 된 치명적인 죽음을 마주하고 어떻게 이렇게 잘 살아왔는지 내가 대견하다. 잘 살아오느라 참은 눈물이 많아서 아직도 한참 더 울어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평생 울어야 할지도. 아버지 추도식에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 사진에서 눈만 편집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엄마야?" 했다. "그래, 엄마야. 우리 엄마야." 내가 봐도 내 눈 같으니... 내 눈 같은 엄마 눈과 눈을 맞추고...

엄마, 아버지 추도식인데... 엄마가 보고싶어.

 

 

2007.11.13 - [정신실의 내적여정] - 겨울나무 똑바로 보기

 

겨울나무 똑바로 보기

잎이 떨어져가는 겨울나무가 유난히 싫다. 베란다 창 앞에서 지난 여름 나를 행복하게 해줬던 대추나무 잎이 하나 둘 지고 있다. 이 가을 지내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겨울나무를 싫어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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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8 - [JP&SS 영혼의 친구] - Sabbath diary8_쓸쓸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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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 여보, 저기 봐. 멋지지? 수묵화 같은 모노톤의 산이 좋다. 나는 약간 쓸쓸함이 있는 느낌이 좋아. 나 : 나는 쓸쓸한 산 안 좋아해. 특히 막 시작되는 쓸쓸함은 더더욱...... (몇 년의 내적작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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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고3은 고등학교 3학년이란 뜻인데, 고등학교보다는 대학에 딱 달라붙은 시간이다. 현승이가 이제 고3이 된다. 일반학교에서는 진학상담, 현승이 학교에서는 '연합 멘토링'이란 이름으로 상담을 했다. 연합 멘토링이 있던 날, 일찍 학교 앞으로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지상에서 가장 맛없는 돈가스를 먹고 울렁거려서,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찾아 카페에 들어갔다. 돈가스가 맛이 없었던 것인지, 마음에 음식 받아낼 공간이 없었던 것인지... 돈가스는 맛이 없고, 마음엔 여백이 없었나 보다.

 

현승이 진로가 갑자기 걱정 덩어리로 다가온다. 대학은 안 가도 좋다. 가고 싶다면 어디든 가도 좋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차차 정해도 된다. 장래희망을 정하고 거기 맞는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른다고 '꿈이 없는 아이'로 볼 일도 아니다. 제 속도대로 자기 길을 찾아가면 된다...

 

라고 진심 생각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걷는 일이 드물어서 말이다. 고3을 코 앞에 두고, 대학을 가야겠다는 현승이를 보자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파도를 친다. 카페에 앉아 체한 돈가스를, 아니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실은 무척 걱정이 되고 마음이 자꾸만 어두워진다고 말했다. 바로 '걱정근심주식회사'가 차려졌다. 걱정 하나가 걱정 둘을 끌어내고, 둘은 넷이 되고, 넷은 여덟이 되면서 현승이, 나, 남편, 내년... 이 회사의 경영방식이 문어발 식이라. 여기저기 숨어 있던 걱정이 다 커밍아웃이다. 

 

그때! 바로 그때!

 

감정 추스르고 맛있는 커피 한 모금 하려고 잔을 드는데... 이게 무엇인가! 천장 조명이 커피잔에 비쳤고, 요리조리 각도를 바꾸다 보니 노란 리본이 딱 뜬다. 메시지구나! 이건 메시지야! 기억하라고 한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때 그 시간을 지내며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하며 했던 결심들을 떠올리라고 한다. 어떻게 살기로 했는지, 진도 앞바다에서 잃어버린 생명들이 살지 못한 삶과 세상을 어떻게 감당하기로 했는지 기억하라고 한다.

 

바로 멈추었다. 걱정과 불안의 말들을 마음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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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 씻고 자러 들어가는 찰나, 쓱 보고도 마음을 읽어내는 현승이가 말했다. "아니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 강의 준비하는 거야." "왜애? 강의 준비가 잘 안 돼?" "아니, 준비 다 했는데... 내일은 강의가 아니라 설교야. 아, 설교가 아니라 늘 하던 강의이긴 한데, 주일 설교 시간에 하려니 좀 다르네. 부담이 많이 돼. (가끔 주일 설교 시간에 초대받아 갈 때가 있는데, 매주 설교 준비로 예민해지는 남편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현승아, 자기 전에 기도해줄래? 기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잘 들어주시는데.... 하하. 기도해 줘." 다음 날 강의 또는 설교를 하며 정말 현승이가 기도했구나, 싶었다. 알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느껴졌다. 활활 불태우고 돌아온 나를 맞으며 현승이가 말했다. "잘했어? 엄마? 나 진짜로 기도했는데." 네가 진짜로 기도한 걸 엄마는 벌써 안단다!


"그 강의 언제라고 하셨죠? 몇 시예요?" 마음으로 '루디아'라 부르는 분이 있다. 내적 여정 벗님인데, 다른 얘기하다 흘러 나온 내 일정들을 기억하고 가끔 다시 묻곤 하신다. 기도하기 위해서. 새벽기도, 일정한 시간의 향심기도, 화살기도를 일상으로 사는 분이다. "기도하겠습니다!" 닳고 닳은 영적인 인사치레다. 그래서 기도하겠다는 마음이 들어도, 기도하고 있어도 "기도하겠습니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진부한 표현에도 진정성이 담긴다는 것을 그 루디아의 말로 안다. 연구소 하며, 내적 여정 안내하며 비틀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나를 믿는 힘이 없어서 그렇다. "오늘 그 강의하시는 날이죠? 새벽에 나리(연구소에서 쓰는 내 별칭)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나를 믿는다는 격려로 들린다. 나도 못 믿어주는 나를 믿어준다는 뜻으로 들린다. 루디아의 기도는 믿어준다는 말로 들리는데, 가끔은 주님의 말씀으로도 들린다. 다리에 힘 풀려서 스텝 꼬이는 날에 힘이 되는 기도이다.


갑작스런 진단과 수술, 그리고 조바심 속에 검사 결과 기다리기. 주중에 교회 집사님 가정에 있었던 일이다. 딸에게 닥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과 동일시된 남편이 한 주 내내 초조해 보였다. 목사가 교우를 생각하며 보내는 초조한 시간은 그대로 기도니까. "하나님, 이러시면 안 돼요. 하나님, 정말 이러시면 안 돼요." 내내 그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나도 기도했는데, 나도 집사님 부부와 딸을 위해 기도했는데 남편이 했다는 기도에 눈물이 났다. 남편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강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 된다고 하는 걸 두 번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좀처럼 하지 않는 표현이라 낯설고, 낯설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주일 대표기도 하시는 집사님은 같은 상황을 놓고 "하나님, 제 베프 000 집사의 고통을 보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기도밖에 할 게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한 교회, 같은 공동체라고 하지만 하나라고 느껴지는 일이 많지 않다. 고통 앞에서는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그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고통 앞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고 서서 서로 기도할 때만 그렇다.


연구소의 여러 프로그램을 줌으로 진행한다. 내적 여정 세미나를 제외하곤 내가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다. 글쓰기도 꿈작업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울렁거리고, 아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상황이 흔하다. 그럴수록 더 몸과 마음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잡는다. 어디서도 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낭독하고, 갑자기 떠오른 아픈 경험을 내놓는 분들 앞에서 뭔가 반응해야 할 것 같은 유혹이 늘 있다. 그 유혹은 '내가 당신의 아픔에 공감합니다'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 끝은 결국 나는 당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좋은 사람입니다, 인 경우가 많다. "똑똑한 사람은 알맞게 옳은 말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때맞춰 침묵할 줄 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 나오는 말인데.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단지 똑똑한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텅 빈 시간을 갖는다. 굳이 피드백하지 않으려고. 그러다 보면 말 없음의 여백이 많이 생긴다. 그 아슬아슬한 시간, 언젠가부터 내게는 기도 시간이다. 방금 글을 낭독한 분을 위해, 말씀하신 분을 위해 가만히 기도하게 된다. 하루 그 어떤 기도 시간보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절함으로 기도한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최하층 없이 최상층이 설 수 없다. 향심기도를 하고, 관상의 상태를 꿈꾸지만 삶의 구체적 경험 없이 영성의 고매한 경지란 없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여 아름답다. 새삼 그 아픈 아름다움을 만나고 있다. 기복적 기도, 기복신앙을 혐오하고 미워하며 마음이 냉랭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의미의 복이든 복을 구하고 있었다. 기복, 祈福, 복을 기원하는 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주말 어느 교회 청년 리더들에게 '삶과 신앙의 무기력, 기쁨' 같은 것들에 대한 강의를 했다. 강의 마치고 담당 전도사님이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강의에 힘입어 중요한 결정을 했노라고. 기쁘고 충족한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상황이 많지 않다. 아프게 통화를 마치고 메시지를 보냈다. 기도하겠다고. 기도하겠다, 는 문자를 치고 있는 순간 이미 기도는 시작되었다. 기도해주세요, 기도할게요,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기도에 돌입한다.


사진은 우리집 베란다 앞 풍경이다. 집 앞에 저렇듯 교회가 있고, 커어다란 십자가가 치솟아 있다. 앞이 뻥 뚫리고 멀리 산이 보이는 시원한 뷰를 망치는 '옥에 티'라고 생각했다. 전에 명일동 살면서 명성교회 십자가를 얼마나 분열적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던가. 그때 기억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저렇듯 미학은 고려하지 않은 채 크기와 높이로만 승부하는 십자가일까, 개신교의 민낯 그대로 같다는 생각도 하고. 어느 날 남편이 "늘 옥에 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침대에 누워 저 십자가를 마주했는데 바로 기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그 말 듣고 며칠 후, 새벽 일찍 일어나 베란다 앞에 섰는데 동트는 하늘 배경의 십자가가 조금 달리 보였다. 뻥뚫려 거칠 것 없는 뷰의 걸림돌인 것은 맞지만, 눈에 띌 때마다 나도 기도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
이 글을 써서 올리고 카카오톡 열었더니, 세상에 이런 음향 편지가 와 있었다. 이건 그냥 아가 목소리를 입고 온 성령님의 피드백이다. 이 글에 달리는 성령님의 댓글이다. 소리만 올릴 수 없어서, 목소리 주인공 모자 사진에 대고 다시 녹화하여 올린다.

기도을 계톡하꾸 기도에 감타암으로 깨어 있뜨라. 골롯태서 타장 이즐 말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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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날이다. 새 만남을 준비하는데 마음이 구닥다리라... 어쩌지. 시간이 없어도 산책 한 바퀴 하고 올까,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 안 되겠다. 하늘이 어둑어둑, 비가 쏟아질 기세다. 비가 온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갈 텐데... 일기 예보를 보니 비가 곧 온단다. 우산을 들고나갔다. 바로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더, 더, 더... 더 와라, 더 와라 했는데. 오란다고 더 온다. 쏟아붓는다. 우산 버리고 맨몸으로 맞고 싶다. 흠뻑 젖고 수습할 시간이 없으니 조금 옷이 젖는 것으로 만족해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을 때 막지 말라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정작 틀어막고 있는 나를 본다. 나중에, 일 다 처리하고, 책임을 다하고 울어야지. 그렇게 나중을 기약하고 집어넣은 눈물이 뭐가 아쉬워 내 말을 듣겠냐고. 이제 옆에 아무도 없고, 망가져도 괜찮은 때가 됐으니 지금이라고. 이제 울자고. 내가 눈물이라도 다시 안 나오겠다. 복수의 칼을 갈겠지. "아~따, 있을 때 잘했어야지"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돌아오겠지. 내가 준비되지 않은 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비를 맞고 싶었던 건 틀어막은 눈물을 달래서 꺼내보려는 마음이었는지... 우산 살을 타고 떨어지는 물줄기 둘이 꼭 주르르 흐르는 눈물 같다.

우산과 풍경이, 아니 우산에 새겨진 '진실을 인양하라'와 풍경이 묘하게 조화롭다. 걸으며 마구 찍어 보았다. 진실을 인양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진실은커녕, 힘도 없는 주제에 뭘 끌어올리는 것이 쉬운 일인가 말이다. 진실이라고 낑낑거리며 끌어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뭐 해? 미친 사람 같애." 한 마디 들으면 "그러게, 나 뭐 하지? 나 지금 뭐해?" 헛갈리면서 총체적으로 스텝이 꼬이게 되고. 사력을 다해 끌어올리던 것이 진실인지, 버려진 신발 짝인지, 플라스틱 쓰레기인지 분간도 못하게 된다. 꼬여라, 꼬여라, 꼬여서 넘어져라 하던 내 안의 구닥다리 목소리가 승전가를 부르며 웃는다. 인양 따위! 진실 따위! 대충 살아아아아.... 어차피 진실 따윈 없어어어...

 

그래도 한바탕 울고, 아니 한바퀴 돌고 나니 구닥다리 마음이 조금 밀려 나갔다. 목욕재계하고 카메라 각도 맞추고 강의안 한 번 읽으려 앉았는데 창 밖이 환하다. 어느새 구름 걷히고 하늘이 하늘색이다. 새로운 시간, 새로운 진실을 인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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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 없는 생일  (0) 2021.03.04

쓰고 나면 알게 되는 내 마음이 있다. 써서 내놓고 나면 더 알아지는 마음도 있고. '책'이라는 물성을 입혀 세상에 내보내며 또 새로운 나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내놓고 보니 '감정'이 보인다. 단지 '슬픔'을 쓴 것이 아니었다. 슬픔과 함께 분노,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무엇보다 수치심. '부끄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느낌이다. 출간 이후 실상 책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블로그에 올린 몇 편의 글에 부끄럽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마음으로는 달고 살았나 보다.

이번 주 치유 글쓰기 주제는 '수치심'이었다. '수치심'은 성장과 치유에 목말라 연구소로 모여든 이들이 결국 다다르는 지점이다. 인식하든 못 하든, 인정하든 안 하든 많은 것들이 수치심에 걸려있다. 같은 강의를 하더라도 매번 강의안을 수정하는 편이지만, 중요한 책들을 다시 꺼내놓고 읽고 매만지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결국 할 얘기는 뻔하지만, 수치심을 말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웬만큼 힘이 있지 않고는, 웬만큼 안전한 자리가 아니라면 수치심은 인식되자마자 자동으로 숨거나 위장하는 독자적 생명체 같은 것이라고 느껴진다. 글로 수치심을 쓰는 일은 내놓는 일이 되는데, 발견 즉시 숨는 녀석을 쓰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치유력 또한 강력하다. 내놓기만 한다면.

책에 대한 반응이 많지 않은데, 책을 소개하는 짧은 글을 올려주신 분이 있다. 평소 존경하는 분이다. 두어 문장 짧은 글에 '재치'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애도와 재치라니! 내가 잘못 읽었겠지, 설마. 재치 있게 애도할 수 있거나, 애도하며 재치를 부릴 수 있다면 그것이 애도일까. 한 이틀 정도 마음이 쓰렸는데 흘려보냈다. 아마도 책은 읽지 않으시고 평소 가지고 계신 내 글에 대한 인상으로 쓰셨지 싶다. 책을 보낸 출판사의 뜻을 읽고 빠르게 소개글을 올려주시는 의무를 하셨을지도. 심지어 출판사에 내가 요청했는데, 그분께 보내달라고. 그만큼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이라 기대가 컸던 탓이다.

이 책은 '수치심을 쓰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내 인생의 치명적 수치, 그 뿌리가 닿은 엄마의 수치를 쓴 것이다. 수치심이 올라올 때마다 꺼내 쓰는 가면 여럿 있는데 그 하나가 재치였다. 재치와 유머 뒤에 숨었다. 그래서 재치는 내게 수치의 다른 말이다. 물론 재치 있는 나를 좋아한다. 젊을 적에 그랬다. 예쁘다는 말보다, 똑똑하단 말보다 웃기다는 말이 제일 좋다고. 재미없는 사람 될까 두려웠다. 대학에서 '음악치료 개론'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을 웃기지 못한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재치 있는 내가 되려고 했던 건 누추한 나를 지우고 싶어서였다.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지운 게 아니라 감췄을 뿐이란 것도 잘 안다.

재치와 수치 두 말은 한 구멍에서 나온다. 어쩌면 그렇게 치명적인 단어를 고르셨을까? 위에는 흘려보냈다고 썼는데 다시 마음이 아프다. 이런 위안도 있으니 다행이다. 위안의 크기가 훨씬 더 크니 다행이다. 제이언니 김용주 님이 책 후기를 보았다. 정확하게 어디를 겨냥하고 있었다. 재치와 수치가 나오는 그 구멍이다. 평생 써오던 가면 '재치'를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나는 또 얼마나 두려웠던가. 재치, 수치, 두려움, 심지어 이번 '재치 책 소개' 글로 상한 마음까지 저격당한 느낌이다. 물론 위로와 격려의 저격이다. 위로, 감동 그 이상의 무엇을 받은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글쓴이가 부담스럽겠지만, 하나님께서 이분을 통해 위로하신다고 느껴졌다.

힘을 낸다. 수치심 치유의 시작은 '드러냄'이다. 그놈의 필살기가 숨고, 고립되는 것이다. 고립되어 어둡고 축축한 동굴 안에서 저만의 세계를 꾸미고, 그럴듯한 가면을 만들어내는 일이 수치심이 하는 일이다. 그 일이 능숙해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때, 약함이 악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책을 내놓고 다시 내 수치심을 확인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읽히며 하찮게 여겨지거나, 조롱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 수치심을 들러리 세워 우월감 느끼는 사람은 없겠지? 이렇듯 다시 수치심의 향연이지만 괜찮다. 힘을 낸다. 취약함을 드러냄으로 고립의 동굴로 가는 길에 불 하나는 밝혀졌다. 다행히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진심의 감사로, 감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힘을 낸다.

 

과거에 정신실 언니와 교류하는 동안 그녀가 쓴 책을 읽으면서는, 책보다는 그녀의 '말'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공연'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한 것 같은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소리와 표정, 말투가 더 정감이 가서인지 같은 내용을 글로 읽을 때는 그런 게 축소되는 느낌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아마도 밝게 보이려는 모습이 매번 글에 투영되어서였던 것 같다. 뉴조 연재를 묶어낸 <신앙 사춘기> 책에서는 약간 스타일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더이상 보이는 모습에 연연하지 않는, 조금 어둡더라도 숨김 없이 내적 음성을 섬세하고 명료하게 쓰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또한 반갑고도 감사하게 읽었다. _제이언니 김용주 님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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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작은 것과 나를 동일시했다. 큰 것 앞에서는 위축되고, 위축되는 것은 모양 빠지니 숙이고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냥 숙이고 들어가는 것 또한 모양 빠지니 나름대로 필살기가 있다. 큰 것, 큰 사람, 권위자의 마음에 쏙 드는 말과 행동을 한다. 타고난 것 같다. 그냥 된다. 친구나 동료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디 가서 권위자에게 사랑받지 않은 기억이 없다. 나는 나를 아주 작은 존재로 생각한다.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내 인생 첫 노래다. 말도 빠르고 노래는 더 빨리 했다니까 제대로 말이 터지기 전부터 저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자라면서 교회 어른들이 나를 놀리며 부르는 노래가 저 노래였다. 생애 첫 노래이니 내 인생을 끌고 가는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늘 울리는 노래이다.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예수님 따라가고 싶은 그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예수님 그분을 따르고 싶다. 그분의 길을 살고 싶다.

국민학교 저학년 국어책에 '해바라기와 나팔꽃' 얘기가 나왔다. 비바람이 치는 어느 밤, 바람에 날려 죽을 것 같은 나팔꽃에게 해바라기가 "내 몸을 감고 붙들고 있어." 이렇게 말했나? 비바람의 무서운 밤이 지나고 둘 다 무사하게 해님을 마주했다는 얘기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생애 첫 노래만큼이나 마음 깊은 곳에 심긴 이야기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해바라기 아닌 나팔꽃에 나를 포갰다.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예수님 따라가고 싶은데, 해바라기는 내게 너무 큰 존재가 된 것이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을 좋아했다. 영어 과목을 무지 좋아했는데 영어 선생님이었고, 기타 잘 치고 노래 잘하는 로맨티시스트였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기타 들고 들어와 조광조의 "사랑의 바람"을 불러주셨다. "바람이 불어 눈을 뜨면 텅 빈 내 가슴에 사랑이 솟네. 누구라도 곁에 있으면 사랑해 줄 텐데. 사랑이여" 이런 가사. (외워서 쓴 거임) 수험생 가슴에 불을 질러 공부에 집중을 못하게 하셨다. 일기장에 매일 선생님 얘기를 썼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신의 이상형을 말했는데, "코스모스 같은 여인"이라고 했다. 중학교 단짝 친구에게 말했더니 "너는 포기해. 너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앉은뱅이꽃이야." 제비꽃 말이다. 네이밍에 대한 인권 감각이 없을 때라 그렇게 불렀다. 제비꽃을 앉은뱅이꽃이라 불렀다. 완전 동의! 나팔꽃보다 더 작은 제비꽃이 나였다.

평생 작은 꽃과 나를 동일시하며 살아왔다. 작은 화분을 키우는 것에 집착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작고 귀여우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수년 전 처음 꿈작업을 할 때 '큰 신발' 꿈을 많이 꾸었다. 작은 정수기의 물통이 가득 차서 넘치는 꿈도. 꿈 선생님께서 자신을 믿으라고 하셨다. 270, 280은 돼 보이는 운동화가 등장, 네 신발이니 신어 보라는 꿈을 자꾸 꾸었다. 나는 225 쪼리를 신고 집 근처나 어슬렁거리고 싶었다. 그 쪼리 한 짝을 하수구에 빠트리는 꿈도 있었다. 알아 들었다. 더는 작고 어린 자아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키우던 작은 화초가 죄 죽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내 이름의 연구소를 차려 책임을 맡고 지내는 시간이다. 그때 그 꿈이 따스하게 해 주던 말을 살 수밖에 없다. 큰 신발을 신어야 한다. 꿈에 나온 신발은 정체성이다. 더는 누구에게 의존할 수 없다. 다시는 화초를 키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큰 나무를 키우는 것에 끌렸다. 어제 '마담 정의 안 비밀 정원'이란 제목의 포스팅을 하고 잤는데, 또 의미심장한 꿈을 꾸었다. '큰 대전역'에 내리는 꿈. 대전. 어린 시절의 여러 기억이 응축된 곳이다. 멀고도 가까운 곳. 그냥 대전역이 아니라 '큰 대전역'에 대책 없이 내리는 꿈을 꾸었다.

더는 작은 화초로 살 수 없다. 식탁 옆에 <큰 나무 아래 장미나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다. '장미나무'이고 싶지만 '큰 나무'여야 함을 알고 있다. 큰 나무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구입한 그림이지만,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큰 나무로 살아야 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모호함, 알 수 없음을 단지 견디는 수동적인 어른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한다. 능동적인 어른이 되려고 한다. 능동적 어른은 '기꺼이 져주는 힘'을 가진다. 지는 것이 아니라 져주는 것이다. 져주면서 겪어야 하는 외로움도 기꺼이 견뎌야 한다. 까닭 모를 고통의 실존의 한 가운데서 내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알 수 없음의 안갯속에서 책임 전가와 냉소주의로 도망치지 않음이기도 하다.

큰 나무 아래 장미 나무이고 싶지만 이제 그 반대로 살아야 할 때임을 받아들이려고. 대책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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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다. 딸 채윤이가 전날 밤 11시가 넘어 끓이기 시작했다. 11시 넘어 줌 강의를 마치고 "그럼 엄마 먼저 잘게" 하고 누웠다. 딸이 끓이는 미역국, 참기름 냄새에 취해 잠이 들었다. 아침으로 먹는 고구마나 현미 떡 대신 심심한 미역국 한 그릇을 먹었다. 아이들은 자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먹었다. 갑자기 울음이 복받쳤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꺼이꺼이 울음이 터져 나와 국물 마시는 후루룩 소리로도 숨길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울음이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울었다. 

 

1년을 뛰어 넘은 작년 생일의 여운인가. 작년 생일, 응급실에 있던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옮기고 면회가 안 되던 시간이었다. 가족들과 생일 점심을 먹고, 선물을 사면서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 슬픔으로 마음이 펴지질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김포 갈까? 면회가 안 되면 어머니 병원 앞이라도 갔다 오자." 하고 갔다가, 병원장 면회를 하며 울고불고 한 끝에 엄마를 보고 왔다. 호흡기와 콧줄을 끼고, 팔은 묶인 엄마 귀에 대고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낳아줘서 고마워." 하면서 또 울었다. "어머니, 채윤아 엄마 잘 키워줘서 감사해요. 제가 잘할게요.” 김서방이 말했다. 엄마도 울었다. 입도 코도 막힌 엄마는 눈물로 말했다. 

생일 아침 미역국에 터진 눈물은 2월 내내 고여있던 것이었다. 2월이 되고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동생과 통화하는데 "내일이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진 날이야." 했다. 2월 첫째 토요일,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에 갔다. 그날의 기억이 쓸데없이 생생하다. 병원 가는 길 동생 집 엄마 방에 갔다. 동생이 엄마 방 청소 좀 해달라고, 응급실 가느라 경황없이 나왔다고, 조카들끼리 있는데 무서워한다고... 엄마 침대 밑으로 피가 고여 말라붙어 있었다. 아득한 정신으로 그걸 닦아냈다. 2월이 됐는데 그날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내 생일이 다가와서인지, 2월의 그날 때문인지 2월은 그렇게 남모르는 슬픔과 우울로 지냈다.

 

생일이 다가오니 더욱 엄마 몸이 그리워졌다. 엄마의 포궁 안에 있었을 나, 45세 엄마의 늙은 포궁 안에서 만들어지고 자란 내 처음 몸은 어땠을까? 엄마의 몸이 미치도록 만지고 싶다. 생일 아침 미역국을 끓인 채윤이가 내 몸 속에서 자라다 나왔듯이, 나보다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었듯이 나 역시 엄마 몸을 찢고 나와 더 큰 존재로 자랐다. 채윤이 출산하고 6주 만에 풀타임 음악치료사 자리가 생겨 어플라이 하고 입사했다. 아침마다 엄마가 우리 집으로 와 채윤이를 봐줬다.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채윤일 업고 골목 어귀에 나와 서있는 날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나타나면 뚱한 채윤이보다 더 신이 나서 "하이고, 껍데기 왔네. 우리 채윤이 껍데기 왔다!" 했다.

 

채윤이가 제 껍데기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줬는데, 생일 미역국을 먹는 나는 껍데기를 잃었다. 내 껍데기, 엄마의 몸이 그립고 그립다. 놀란 토끼 같은 엄마의 눈, 함지박만 한 입, 광대뼈, 혈관이 툭툭 튀어나온 손... 어디에도 없는 엄마의 몸이  또렷하게 살아온다. 이렇듯 생생하게 살아있는 엄마 몸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생일인 수요일 밤에 교회 행사로 강의가 있었다. 북유럽 바로크 미술을 전공하신 교회 집사님이 렘브란트 그림을 읽어주시는 강의이다. 전에 한 번 교회에서 문화 강좌로  17세기 네델란드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셨는데 참 좋았었다. "탕자와 시므온으로 그린 렘브란트의 고백"이란 제목의 강의라 연구소 벗들에게도 알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들었다. 생일 선물 같았다. 익히 알던 렘브란트의 생애 이야기였는데 역시나 새롭게 들렸다. 어쩐지 렘브란트가 그린 노인들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탕자의 귀향>의 아버지, <시므온의 노래>, <야고보>, <기도하는 노인> 등. 강의는 손에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아니, 렘브란트가 그렇게 그렸다. 나이 들어 눈이 흐릿해진 아버지는 손, 손으로 그 아들을 맞는다. 시므온 역시 손으로 아기 예수를 안는다. 기도하는 노인의 손엔 대놓고 조명이 비친다. 강의 그 부분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늙은 엄마의 손이 겹쳐져서다. 주책스럽고 부끄럽지만 이제 나는 나의 눈물을 탓하지 않는다. 화면을 끄고 그냥 울었다. 

 

 

 

엄마의 그 손을 한 번만 더 잡아볼 수 있다면. 천국에서 엄마의 빛나는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알겠는데, 엄마의 몸이 아닌 엄마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기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엄마와의 스킨십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엄마 돌아가신 이후 갈수록 나는 몸에 집착하게 된다. 생일을 지내며 내가 이 땅에 처음 왔던 때가 어땠을까 생각하다 보니 내 처음 집, 엄마의 포궁, 엄마 몸이 절절해진다.

 

 

내 생애 첫 사진이다. 태어난 지 5주. 이젠 기억에서도 흐릿해진 아버지는 이렇듯 나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 자신을 남겼다. 사진을 찍고, 사진 뒤에 메모를 남긴 아버지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데 어쩐지 본 듯이 생생하다. 엄마는 내게 남긴 것이 없다. 휴대폰에는 엄마가 담긴 영상이 많지만 엄마가 남긴 건 아니다. 엄마의 모든 것은 엄마의 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아, 엄마의 몸이 남긴 것은 나다. 그래서 내 생일이 이렇듯 서럽고 슬픈 것이다. 나는, 사라져 버린 엄마가 남긴 흔적이다. 내가.  

 

여러 차례의 여성 글쓰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생일 다음 날은 또 한 번의 모임이 끝나는 날이었다. 참가자 한 분의 글 한 문장이 가슴에 남아 있다. "나는 나의 생일을 가장 싫어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 궁굼해 지고 그리워지는 날이거든요." 어릴 적 돌아가신 아빠에게 쓴 편지이다. 나는 나의 생일을 가장 싫어해요. 이 문장을 보고 휘청, 존재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참가자들의 많은 글에서 나를 본다. 아니 모든 글에서 나를 본다. 그래서 힘겹고, 그래서 좋은 글쓰기 여정이다. 이 문장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나를 흔들었다. 예언같이 느껴졌다. 앞으로 사는 날 동안 나는 내 생일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평생 아버지 부재를 끌어안고 살았지만, 내 생일에 아버지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는 것도 신기하다. 글 쓰신 분에게 비춰본다면 더더욱. 그러고 보면 나는 아버지를 몸으로 느끼지 못했다. 관념으로 느끼고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글씨체를, 지성을 선망하며 그리워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승화시켜 숭배하며 그리워했다. 엄마는 다르다. 엄마는 내 껍데기, 내 몸이다. 나다. 

 

아직 생일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엄마 떠난 지 일주일이 모자란 일 년이다. 

 

 

 

 

새벽기도 없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남편이 한 번씩 특별 새벽기도를 도모할 때는 나름 의미가 있어서(또는 받은 은혜가 있어서)이다. 신년 새벽기도를 한다고 했다. 전도사님과 단둘이 나가서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주제는 "해피 앤딩을 위한 여섯 개의 메모"란다. 교인 평균 연령이 나보다 딱 10년이 높은 교회이다. 새로 등록한 젊은 부부들을 제외하고 남자 교우 중 남편은 거의 제일 젊은 축이다. 이력으로나 성향으로나 청년 · 젊은 부부 목회에 최적화된 목사라 생각했는데, 인생이 알 수 없듯 목회자의 길도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지금 여기를 받아들인 남편은 은퇴 이후의 삶, 그리고 '좋은 죽음을 위한 좋은 삶'에 꽂혀 있었다. 남편이 말하는 해피 앤딩은 단순한 죽음이 아님을 안다.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현재이라는 뜻이다. 실존적 신앙은 실존적 죽음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는 것을 남편과 수도 없이 얘기했었다.

 

'해피 앤딩'이란 단어에 마음 머물러 신년 기도회에 끌렸다.  "J 전도사와 둘이만 나가서 할 거야." 이 말도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수요 기도회 할 때마다 "당신 와서 찬양 인도할래?" 먹히지 않을 말을 한 번씩 던지던 기억도 나서 "내가 새벽기도 찬양인도할까?" 했다. 옆에 있던 현승이는 작년 신년 새벽기도회 때 ppt를 맡아 개근하고, 아침에 먹던 해장국의 맛, 집에 와 2차로 자는 달콤한 잠의 맛을 떠올리며 "아빠, 나도 갈래." 했다. 채윤이는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지만, 엄마가 오랜만에 하는 찬양인도니 반주자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반주자 말고 일당 쳐주는 반주 알바로 섭외했다. 

 

월, 화, 수 3일 기도회 하고 폭설과 함께 한파였다. 이사한 우리 집은 교회와 꽤 멀어졌고,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 있다. 걱정하시던 운영위에서 목, 금, 토 새벽기도를 취소하고 한 주 연기하여 다시 월, 화, 수로 진행하기로. 날수로는 일주일이지만 체감은 2주의 새벽기도였다. 얼마만의 찬양인도인가. 텅 빈 교회당에서 방송용도 아니고 오프라인 용도 아닌 청중을 가늠할 수 없는 찬양을 했다. 음정 틀려, 박자 틀려, 선곡 구려. 채윤 현승에게 구박받으며 하루하루 날짜 지우듯 지나며 새벽 기도를 마쳤다. 

 

좋았다!

 

내 인생 마지막 특새의 기억이 끔찍하다. 그 특새에서 여러 번 불렀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메마른 땅에 샘물 나게 하시기를" 이 찬양은 트라우마에 가깝다. 그 2,3년의 특새, 수요기도회가 혼재되어 고통으로 남아 있다. 방언 기도를 받기 위한 특별 기도회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평신도에서 갑자기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 강요 당하고 감시 당하는 새벽기도는 고통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인생에서 깊은 기도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절절할 때였기도 하다. 아마 한국 교회에 대한 소망의 마지막 빛이 꺼져버린 나날이었지 싶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지만,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 내 마음이 캄캄해졌다고, 내 안의 소망이 무너졌다고 그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내 마음이 가장 캄캄할 때 내 하나님은 가장 환하게 다가오신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던 지도자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나의 하나님까지 망하시진 않는다는 것도. 새벽기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심지어 남편이 목회자가 된 탓이 아니라는 것도.

 

한 주, 아니 두 주간, 오전에 줌 강의 있는 날에 새벽기도 마치고 와서 눈을 붙이지도 못하고 오후 4시까지 달려야 하는 날이 있었다. 몸은 한 없이 피곤했지만 좋았다. 음정 틀려, 박자 놓쳐, 선곡 구린 찬양도 나는 좋았다. 많은 청중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매일 한 분 정도의 교우를 생각했다. 그분이 이 찬양으로 힘내시면 좋겠다, 기도할 용기 내시면 좋겠다, 이 정도의 바람밖에 없었다. 내 마음에 품은 그분이 누군지 그분 자신도 세상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좋았다. '해피 앤딩을 위한 여섯 개의 메모'로 이어지는 남편의 설교도 좋았다. 죽음을 등에 짊어지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끌어 안는 삶을 살겠다는 용기는 삶에의 열정이 되었다. 20여 분의 기도 시간이 좋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한 2021년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 그날, 트라우마로 남은 특새며 새벽기도와 화해하고, 그 시절 사람들과 화해하고, 내 하나님과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게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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