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둘에 대박이 난다는 얘길 들었다. 내 사주가 그렇단다. 임상 심리학 교수로 은퇴하신 선생님께서 취미 삼아 배운 역학으로 사주를 봐주셨다. "너는 진즉에 박사를 했어야 하는데..." 하시다가 "이제라도 해볼까 봐요" 하며 이 학교 저 학교 얘기를 하면 "추천할 곳이 없어." 하셨었다. 그런 얘기 끝에 "정 선생, 생년월일시 알아?" 하시더니 백지에 알 수 없는 한자를 쭉 쓰셨다. 다시 남편 생년월일시를 물으시고 또 이 얘기 저 얘기하시다 "남편하고 아주 잘 맞는구먼! 니가 지금 몇 살이야? 쉰둘에 활짝 펴겠다."라고 하셨다.

 

쉰둘의 한 해가 간다. '활짝 펴겠다'(정확하게 이 표현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를 내 방식대로 '대박이 난다'로 들었고, 바로 잊었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 한동안 4년 단위로 인생이 달라졌다. 직업, 전공, 연애, 실연, 결혼, 출산.... 4년 단위로 인생의 그래프가 꺾였다. 언젠가 한 번 꼽아보니 그랬다. 전공과 직업(본업)이 바뀌고 바뀌는 인생이다. 집도 계속 바뀌어 열두 번째 이사를 했으니 변화무쌍한 인생이다. 가끔 쉰둘에 정말 어떤 내 인생 한 방 터지는 것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쉰둘의 해 2020년, 엄마가 떠났다. 대박 사건이긴 하다. 설마 이걸로 내가 활짝 피어나겠는가.  대박 사건이 터져야 할 쉰둘에 팬더믹 세상을 사느라 '사건'이 일어날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그가 보인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평생 알았던 엄마가 아닌 사람 '이옥금'이 보였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엄마를 다시 보게 된 쉰둘의 한 해였다. 시간도 그럴 것이다. 도통 이름 붙여지지 않을 2020년의 낯선 시간은 지나고 나면 다시 보일 것이다. 그러니 쉰둘 2020년이 대박인지 한 해 두 해 지나며 두고 볼 일이고 아직 몇 시간이 남았으니 기다려 볼 일이다. 안팎으로 쉽지 않았던 2020년을 살아 냈다는 것, 엄마 따라 죽지 않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12월 31일을 맞았다는 것은 장하고 장한 일이다. 

 

읽고 쓰고 기도하며 살아 남았다. 쓰기의 흔적은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엄마 애도 일기는 출간 예정이라 비공개로 전환해 둔 상태) 알라딘 서점 통계를 보니 130여 권의 책을 구매했다. 선물한 책도 있으니 100여 권의 책을 읽었나 보다. 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애도'에 관한 책 외에는 읽히지 않았다. 읽기의 정상성을 회복한 후에도 어떤 편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 몇 년의 경향이긴 하다. 리처드 로어, 이현주 목사, 앤서니 드 맬로, 이승우, 엔도 슈사쿠, 엘리 위젤 등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저자들이다. 한 권의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저자의 전작을 읽는 습관이 있다. 올해의 저자는 마사 C. 너스바움과 앤 윌슨 섀프이다. 몇 년 전  『혐오와 수치심』로 만났던 마사 너스바움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만나기 시작했다. 더디게 읽히는 책이지만, 전작 독서가 될 때까지 만남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앤 윌슨 섀프의 『중독 사회』는 여성들의 치유 공동체를 일구며 사는 내 손에 들려진 지침서 같았다.

 

무엇보다 소중한 만남은 노르위치의 줄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타리나 중세 여성 신비가들을 원저로 만난 것이었다. 전에도 한두 번 들어 읽고 밑줄을 긋곤 했지만 만남이라 하긴 어려웠다. 그냥 어려웠다. 뜻은 알아 들었지만 다른 언어로 읽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아침마다 몇 페이지 씩 읽으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딱 하루 분량의 사랑이 한 챕터에 담겨 있었다. 『계시』와 『완덕의 길』은 말라가는 영혼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였다. 무언가 그리워 다시 손에 잡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박완서 선생님과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젊은 날에 좋다고 읽었는데, 쉰둘에 다시 읽으니 책 속에 들어가 앉아 있게 된다. 

 

이렇듯 읽으며 살았고, 또 쓰며 힘을 얻었다.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치유 글쓰기 모임을 여러 번 가졌다. 쉰둘에 있을 거라던 대박사건이 이것이었을까. 이 시간은 누구보다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 떠난 빈자리에 서서 여성들의 글을 읽다 여성들과 함께 글을 썼다. 텅 빈 엄마의 자리가 꽉 채워진 것 같다. 아, 아니다. 엄마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채워진 거지? 가득 찬 상실, 따스하게 이어진 고립이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 하나님'을 만났다. 아버지이며 동시에 어머니이신, 어머니이며 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난 덕에 기도 시간이 얼마나 포근해졌는지. 쓰고 말하는 여성들과의 연결 덕에 내 생애 가장 큰 여자인 엄마 떠난 자리에서 '하나님 어머니'를 만났으니 쉰둘, 2020년은 대박이다. 

 

글쓰기 모임 후기들이다. 읽어도 읽어도 좋다.  

 

평생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풀어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수용하고 용납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살았다. 나도 수용 받고 싶고, 용납받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호칭을 바꾸며 만난 하나님... 그간 만났던 하나님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봤다고 해야 할까? 6주간 글쓰기 역시 그렇다. 나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 것 같다. 처음에 가졌던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다 사라진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끝이라는 게 아쉽다. 길을 걷는데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씀으로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신실 샘이 늘 말했던 글쓰기가 주체적 행동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들어졌다.❞.❞
나도 몰랐던 내 상처와 교만으로 정신없이 살았다. 내 안을 박박 긁어오며 살아오다가, 너무 힘들 때 우연처럼 이곳을 만났다. 하나님은 뜻하신 대로 이곳에 불러주신 것 같다. 다른 분들의 글, 용기를 보며 같이 깊이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마중물 같은 시간이었다.
이렇듯 깊게 털어놓은 게 처음이다. 6주 마치면서 나이스 한 끝을 만날 걸로 기대했다. 중년, 노년 가볍게 준비하겠지 싶었다. 오늘 마지막 시간 하나님 어머니에 대해 쓸 때 가슴에 통증이 왔다. 갑자기 부정적인 것들이 나와 마음이 무겁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새롭게 뛰어넘어야 할 벽으로 느껴진다. 갑갑하다. 이 벽을 어떻게 허물까, 숙제를 안고 끝나는 것 같다.
너무 많이 울어서 쑥스럽다. 모임 마치고 나가면 눈과 코가 시뻘개서 딸들이 눈치를 본다. 이 시간에 너무 몰입되어 있었고, 전에 하지 못한 경험을 했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영역에 첫발을 디딘 것 같은 느낌이다.

스물세 살 겨울, 성탄절을 꽉 채웠던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는다. 매년 성탄절마다 들었지만 귀와 마음을 온전히 열고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사연이 있다. 스물세 살 성탄절에 성가대에서 저 곡을 노래했고, 나는 알토 솔로를 맡았었다. 내가 부르기엔, 당시 몸담고 있던 성가대가 소화하기엔 어려운 곡이었다. 전적으로 지휘자의 열정과 실력으로 가능했던 연주였다. 지휘자님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나 하면, 솔리스트에게 각각 파트를 녹음해주었다. 나는 또 얼마나 열심이었나. 길지도 않은 레시타티브를 마르고 닳도록 부르며 연습했다. 마이마이에 끼우고 다니며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듣고 또 들었다. 듣고 불렀으면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가사들이 입에서 줄줄 나온다. 

 

진정 나는 간직하리라
내게 있었던 축복의 날 축복의 말씀을
결코 나는 간직하리라

 

그해를 마지막으로 아름답고 찬란했던 젊은 날 신앙의 봄날이 갔다. 다음 해 새로운 담임 목사 청빙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함께 노래했던, 존경했던, 사랑했던 분들과 마음이 나뉘었고 처절한 실망 끝에 교회를 나왔다. '나온 것'으로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아픈 기억은 내 마음에 들어 있으니 끌어안고 나온 셈이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사람 관계는 이후로 더 추락하였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어떤 그리움 너머 아픔이 되었다. 그 아름다웠던 시절, 그 노래들은 '합창'이었다.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노래는 함께 불렀던 사람들과 분리하여 떠올릴 수 없는데, 음악은 영원하건만 내 마음속 사람들의 얼굴은 달라졌다. 존경했던 만큼 실망으로, 사랑했던 만큼 분노로 떠오르니 어쩔 것인가. 참으로 오랜 세월 저 노래를 마주하지 못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쩔 수 없이 CD에 손이 가곤 했지만, 귀로만 듣지 마음으로 들지는 못했다. 

내 맘 속에 누우소서
좋은 방은 아닙니다.

 

이사 준비와 정리로 분주하여 CD를 고를 여유없이 라디오가 선곡해주는 음악을 들으며 성탄 시즌을 보냈다. 어쩌자고 낮이나 밤이나 틀기만 하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나오는 것이냐. 아니, 그것만 들리는 것인가.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음악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마음으로 들어와 그립고 아픈데, 그리움 사이사이 낀 분노가 어디로 가고 없다. 어, 어딨지? 어디 갔지? 분노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슬픔과 연민이다. 그 좋은 나날들을 오롯한 그리움과 감사로 떠올릴 수 없는 우리 모두가 슬프고 안쓰럽니다. 심지어 조금 감사한 마음도 든다. 그토록 아름다운 성가대 찬양의 기억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기억은 모두 내 것이니. 무엇보다 그때 부른 노래의 가사를 나는 내 영혼에 새겼다. 입으로 부르지 않았고 단지 마음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부르고 또 부르는 동안 내 존재 깊은 곳에 새겨진 것이 분명하다. 

 

주님이 다스린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주께 맡긴 마음
주께서 다스린다

 

'마음'에 대한 이 레시타티브들을 나는 얼마나 간절하게 읊조렸는가. 어둡고 비좁은 마음의 방, 그분이 거하시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방이지만 "내 맘 속에 누우소서" 노래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믿었다. "좋은 방은 아니지만" 반드시 찾아오시고 살아주실 것을 믿었다. 그럴수록 부끄러웠지만 그럴수록 더욱 믿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으니까. "주님이 다스린다 /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 온전히 주께 맡긴 마음 / 주께서 다스린다" 그때 그 오라토리오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마음'을 생각했다. 비좁은 내 마음 때문에 힘겨웠고, 이 부끄러운 공간이지만 어쩐지 그분이 기꺼이 찾아와 주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를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촉촉한 성탄절이다. 자꾸 눈물이 난다. 한껏 성장했으면서 자신이 성장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 '이만 하면 됐다, 나만큼만 하라고 해' 같은 자만심을 가질 수 없는 가난한 마음들에 고마워 눈물이 난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눈물이 난다. 지독히도 나를 혐오하며 확신 없이 사는 나를 구원해준 눈길들이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과 세상 때문에 눈물이 난다. 연결됨이 기뻐서 눈물이 나고 외로워서 눈물이 난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좋아서 눈물이 나고, 빛이 오셨는데 여전히 어두운 세상에 눈물이 난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좁고 어두운 내 마음이라 눈물 나고, 여전히 그곳으로 오시는 분을 사랑하기에 눈물이 난다. 빛으로 오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눈물이 난다. 

 

성탄절 아침에 블루투스 스피커 볼륨을 높이고, 큰 화면으로 영상을 보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는다. 마음으로 듣는다. 

 

이제 참 빛을 보리로다
구원을 나타내리로다
내 구세주는 빛이시라
이방을 밝게 비추시나
허나 그들은 주님을 아직도 알지 못하도다
진정 참빛이시로다
사랑의 예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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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베란다 앞 풍경을 두고 가야 한다니. 봄이 오는 아침, 깊어지는 가을날의 아침을 경탄으로 시작한 2년이었다. 주인이 갑자기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주인 마음을 바꿔주시지 않을까? 허튼 희망도 가져봤었다. 허튼 희망이었구나! 받아들인 다음 날부터 아침에 눈뜨고 바라보는 저 풍경이 그렇게나 슬플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벌써부터 몰려왔다. 얼마나 더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려야 이 슬픈 생이 끝날까?


어느 아침, "이렇게 남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싶었다. 주어진 시간만큼 최대한 누리고 떠나자! 내 생애 가장 좋았던 집, 집이 아니라 집 앞의 산에게 아침마다 고마움을 표 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이틀 지나서 이사할 집이 정해졌다. 하도 귀해서 전셋집이 하나 나오면 몇 사람이 달려들어 줄을 서서 집을 보고, 제비를 뽑아 계약을 한다는데. 집이 구해졌으니 다행이다.


목회자라고 다 이렇듯 자주 이사 다니는 것 아닌데, 남편을 원망해볼까 싶기도 했었다. 마음 고쳐 먹으니 아침 저 풍경이 새롭게 보인다. 아직은 여기 있지 않은가. 오늘 아침은 저 풍경을 보고, 신선한 산 공기을 마실 수 있지 않은가. 지긋지긋한 이사도 또 어떻게 되겠지.

아침마다 달라지는 빛깔이다.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마침 연구소에서 아침마다 '읽는 기도'로 나누고 있는 앤서니 드 맬로 신부님의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어 크게 위로받는다.

삶이란 언제나 흐르고 있는 것, 항상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기를 원한다면 영주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머리 둘 곳이 있어서는 안 돼요. 삶과 더불어 흘러야 합니다. 위대한 공자가 “항상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주 변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흐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잖아요?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것들에 매여 있습니다. “쟁기를 손에 얹고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선율을 즐기고 싶습니까? 교향곡을 즐기고 싶습니까? 곡의 몇 대목에, 한두 음절에 매이지 마십시오. 지나가고 흘러가게 하십시오. 음들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교향곡을 온전히 즐기게 됩니다. 특정한 대목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교향악단에게 “그 대목을 계속 연주해요. 계속, 계속”하고 외친다면 그 연주는 교향곡이 될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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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떨군 줄도 모르고 걷고 걸었다. 어느새 단지 안에 들어섰다. 평소 같으면 하늘 올려다 보길 여러 번, 주저앉아서 '꽃 검색' 카메라로 들꽃 찍기도 한참 했을 것이다. 한낮에 걷는 것은 오랜만이니까. 그런데 하늘도 안 보고, 들꽃도 안 보고, 바람도 느낄 줄 모르고 땅만 보며 걸었다. 똑똑똑똑, 딱딱딱딱. 무슨 소리지? 작은 새 한 마리가 내는 소리라니! 내 마음에 노크하는 소리였다. 똑똑똑, 거기 사람 있나요? 사람 마음 있나요? 

 

세상에! 저 작은 부리로 저렇듯 우렁찬 소리를 낸다.

 

어이, 여기 좀 봐요. 고개를 들어 여기 좀 보라구요. 뭐 잃어버렸나요? 마음을요? 그렇군요. 어쩐지 발걸음이 헛헛하더라구요.

금세 휘릭 날아올라 푸르름 속으로 사라졌다. 내 시선을 낚아 하늘로, 구름으로, 바람으로 꽂아 놓고서. 덕분에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다시 장착하고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색의 향연이 눈에 들어온다. 저 예쁜 보랏빛이라니! 새소리 풀벌레 소리도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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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우울증 환자 맞나?

 

연구소 카페에 올라온 글의 마지막 문장, "나, 우울증 환자 맞나?" 마음인지 귓가인지 어딘가에서 맴돈다. 그러더니 오늘 저녁엔 "나, 우울증이 아닌 게 맞나?" 하는 이상한 말로 바뀌었다. 잠깐 일어났다 주저앉고, 잠시 힘이 들어갔다 금세 푹 가라앉는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긍정'의 말들이 그렇게 거슬렸다. 잘해요, 좋아요, 훌륭해요, 멋져요. 긍정의 캐치볼이 오가는 걸 유난히 견딜 수 없었다. 잠시 혼자인 저녁 시간, 클래식 FM은 전기현의 세음이다. 무기력하게 앉았는데 들리는 기타 연주의 익숙한, 익숙하게 아픈 멜로디. 정태춘 박은옥의 <봉숭아>라니! 떨며 우는 소리 같은 하모니카 소리다. 하모니카 소리에서 가사가 들린다.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 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대학 1학년 1학기에 과대표를 했는데, 선거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선배들이 노래를 시켰다. 그때 부른 노래가 저 <봉숭아>. 앙코르곡으로 역시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를 불렀다. 그렇게 시작해서 총학 대의원 엠티에 가서 부르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 짝사랑으로 힘든 친구가 불러달라면 불러주고, 정태춘 박은옥 노래 플레이어가 되었었다. 그 많은 노래 중 가슴에서 나오던 노래가 <봉숭아>였는데, 왜 그리 저 가사가 절절했을까. 친구들도 선배들도 사연 있는 여자의 노래로 들어주었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실연의 경험도 없던 때였는데. 

 

하모니카 연주가 끝나고 전기현 아저씨의 목소리가 나오도록 꼼짝 않고 들었다. 그 끝에 "나, 우울증 아닌 게 맞아?"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좀 우울하구나." 내 마음이 알아졌다. 요 며칠 마음이 한없이 협소해지고, 견딜 수 없는 말들이 많았던 건 우울이었구나. 이왕 플레이 버튼 누른 김에 더 서글픈 <봉숭아>도 들어보자. 송소희 노래보다 박은옥 님의 긴장되어 무표정한 표정, 정태춘 님의 깊은 주름이 더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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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일박 여행 중.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 앞 대나무 숲 산책에 나섰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옆구리 쪽 어딘가를 맴돌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참 발길을 붙들었다. 언제부턴가 노랑, 나비, 노랑나비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냥 아쉽고 안타깝고 그리운 모든 존재들이다. 한참을 놀다 헤어졌다.


섬진강가에 서서 화장실 간 남편을 기다리는데 다시 나타났다. 작은 노랑나비가 "안녕, 여기 있었네" 하는 것처럼 다가와 팔락거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비 따라 옮겨 다니며 한참을 놀았다. 


차밭 사이를 걷는데 또 그 노랑나비다. 이쯤 되니 예사 나비가 아니지 싶다. 자꾸 따라오는 걸 보니 나비 쪽에서도 영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모양. 이렇듯 나를 그리워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엄마? 엄마인가 보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가녀린 양쪽 날개는 하나는 그리움, 하나는 아쉬움. 내 마음에 있던 엄마가 나비 되어 함께 걷고 있다. 습기 가득한 산책 길이, 안개에 싸인 지리산 능선이 더욱 아련해졌다. 엄마가 보고 싶다. 많이 보고 싶다.


짧은 여행 동안 이상하리만큼 '초록 사이 노랑'이 눈에 띄었다. 초록 풀잎 사이 노랑나비는 물론이고, 섬진강변 가로수들은 초록 사이사이 노랗게 변한 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동네 텃밭에서는 참깨 꽃을 처음 봤는데 초록잎 사이 노란 꽃이었다. 내내 가는 곳마다 초록과 노랑만 눈에 보인다. 


초록은 (나와) '동색'이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알기 훨씬 전부터 나는 초록이었다. 초록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초록 잔디를 보면 그저 눕고 싶었다. 초록을 보면 살 것 같았다. 특히 봄의 연둣빛을 보면 그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연두 안에 숨은 '노랑'이 아픔과 슬픔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길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좋던 한여름의 신록에도 전 같은 환호가 나오질 않았다. 그때가 언제냐 물으면 딱히 답할 수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노랑을 곁들이 초록, 또는 초록 사이의 노랑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엽록소가 빠져나간 헐거워진 느낌의 초록이랄까.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흔들거리는 내 뱃살과 닮았다. 빛바랜 초록이 추레해 보이기도 한다. 그 사이 노랑나비가 어른거리니 얼핏 구별이 안된다. 내 노안 탓일 수도 있고. 빛바랜 초록과 연약한 노랑의 조화가 마음 깊은 곳을 툭툭 건드린다.


하동을 출발해서 섬진강변 드라이브가 끝나고 산청에 이르렀는데 차창 밖으로 또 노랑나비! 여기까지 따라왔어? 동영상과 함께 이 얘기를 연구소 단톡에 올렸는데. 안동으로 여행 가신 선생님이 동영상을 보내셨다. "소장님 따라다니던 갸가 여기까지 왔어요." "갸가 아니고요, 저희 엄마예요. 정중하게 인사드리세요." 했다. "어이쿠, 결례를... 용서하세요." 하하. 내겐 엄마고, 선생님에겐 또 누군가이거나 무엇이겠지.  


초록은 나와 동색이다. 초록이 나이고 내가 초록인, 상징색이다. 집착에 가까운 애착물로서의 작은 화분들이 그러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휘를 그만두었던 때, 의식에선 모든 상황을 쿨하게 받아들였던 그때 꾼 꿈이 아직 생생하다. 다른 사람 눈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내 딴에는 정성을 다해 키우던 화분을 누군가가 싹 치워버렸다. 꿈에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며칠 몸에 두드러기가 나며 앓고 난 후에 그 상실을 받아들였었다. '지휘' 역시 내가 지나치게 동일시하던 나와 동색인 무엇이었다. 


빛바랜 초록과 한 마리 나비가 쓸쓸하다. 텅 비어 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텅 빈 곳이 어쩐지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상징은 설명할 수 없다. 느끼고 간직할 뿐이다. 선물 같은 천년차밭길 산책 끝에 숙소 앞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마음을 뺏는 컵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꽃 한 송이 핀 컵에 딱 꽂혔다. 너다! 빛바랜 초록을 만난 2020년 휴가는 너로 간직하겠다! 이런 경우 흔쾌히 지갑을 열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채윤 현승 사다 주려고 보던 팔찌 옆에 머리끈이 또 바짓가랑이를 잡네. "여기도 노랑 초록 있습니다!" 그것까지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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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럴까? 각자 집에 유배되어 하는 일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밀린 독서, 밀린 빨래, 밀린 냉장고 정리, 밀린 화분 정리.... 나는 그렇다. 그 어떤 일보다 보람찬 일이 화분들 매만져준 일이다. 시들어 죽은 아이들 퇴출시키고, 훌쩍 자란 아이들 분갈이. 한 놈 한 놈 다 사연 있는 녀석들이라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냥 화분인 것이 하나도 없다. 성질머리도 다 다르다. 까칠한 놈, 무던한 놈, 예쁜 놈, 듬직한 놈. 

 

 

생일 선물로 채윤 현승에게 받은 화분이 들어오는 바람에 급 일제정리기간을 맞게 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던 날, 처음 집, 엄마 자궁에서 나오던 그 새벽에 많이 울었겠지. 그 첫 생일 이후로 가장 많이 운 생일이 아닌가 싶다. 점심으로 미역국 전문 식당에 가서 근사한 생일상을 받고나서, 엄마 보고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더 보고싶고, 침대 홀로 얼마나 아프고 외로울까 싶으니 견딜 수 없었다. 엄마가 '나'라는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날이다. 내 몸에서 나온 두 생명, 채윤이와 현승이가 근사한 초록 생명체를 선사해주었다. 그 어느 생일보다 생명을-나의 생명,내게 잇대어진 생명들을-실존적으로 경험한 날이다.

 

 

병들어 격리되어 치료 중인 녀석이다. 화분 가득 무성한 잎들이 어찌 하나 씩 누렇게 뜨다 말라버리나 했더니 전염병이었다. 안방 베란다에 격리되어 투약 중이다. 수시로 들여다보며 힘을 북둗우고 있다. 서두르지 않을게. 천천히 회복되기만 해.  약한 생명에 더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사랑의 속성 때문인지 모른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말처럼 사랑의 속성은 물과 같아서 낮은 곳으로, 아래로, 약한 곳으로 흐른다. 처음 사랑, 처음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더듬어보면 딱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생명에, 사랑에, 낮고 약한 존재들 곁에 있으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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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이든 집단여정을 마치고나면 이미지로 남는 것이 눈빛인 경우가 많다. 눈빛보다 더 동적인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대화 도중 수시로 변하는 눈의 언어 같은 것이다.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아도 이미 가슴에 흐르는 눈물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대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미 젖은 눈도 있다. 집단여정에서 내 눈의 초점을 비켜가는 눈도 본다. 부러 초점을 다른 곳에 두어 마주침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실은 나는 입으로 나오는 말보다 눈가에 고인 말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믿는다.

 

복음서를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예수님의 눈길, 눈빛이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어제 마가복음 3장을 읽다 심장 쿵, 그분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인간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팔레스타인의 흔한 남자 얼굴이었겠지만 눈빛만큼은 남달랐으리라. 비슷비슷한 팔레스타인 남자들 중 예수님을 찾기는 쉬울 것 같다. 눈을 보면, 눈을 들여다보면 금방 그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안식일 위반으로 예수를 잡을까하여, 그 사람을 고쳐 주나 보려고 그분을 주시했다. '

 

 

이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덫을 놓고 걸리기만 걸려라 번득이며 흠을 찾아내는 눈. 관음하는 눈. 어디 니가 잘 되나 보자, 며 예의주시 하는 눈. 너희끼리 무슨 짓을 하는지 보자며 하루가 멀다 하고 클릭하여 확인하는 눈. 비겁한 눈, 거짓된 눈. 비겁하게 관음하고 안 본 척 하며 악을 도모하기 때문에 사악한 눈.

 

그 다음 예수님의 태도에 감동하고 말았다. 비겁하고 거짓되고 사악한 눈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라.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여기 서거라."

 

숨어서 보는 자들에게 감추지 않고, 덫을 놓고 책잡으려는 자들의 덫에 공개적으로 걸림으로 맞선다. 거짓에 대면하여 투명함으로 맞선다. 숨어서 보는 자들 앞에 모두 잘 볼 수 있도록 환히 드러내신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종교와 사랑, 선과 악 사이 무엇을 선택하시는지 분명하게 언어화 한 후에 눈으로 말씀하신다. 강력한 진실을 말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

 

예수님의 진실하여 강한, 분노로 발사하는 사랑의 눈빛을 받은 비열한 눈들이 어땠을까? 하나씩 하나씩 눈을 맞출 때 그들의 영혼이 어떠했을까. 심장 멈출 듯 한 눈빛 교환을 통해 어떤 이들은 회개를, 어떤 이들은 더 큰 악을 도모하는 것을 선택한다. 결국 그들은 다른 무리까지 합세 시켜 그분을 파멸시킬 계획에 흥분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은 몹쓸 눈빛 발사로 당신의 죽음을 자초하셨으나, 그 몹쓸 아름다운 눈빛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막3:1-6 메시지성경)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안식일 위반으로 예수를 잡을까하여, 그 사람을 고쳐 주나 보려고 그분을 주시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여기 서거라.” 예수께서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행동이 안식일에 가장 합당하냐? 선을 행하는 것이냐, 악을 행하는 것이냐? 사람을 돕는 것이냐, 무력한 상태로 버려두는 것이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새 손과 같이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 어떻게 하면 헤롯의 당원들과 합세하여 그분을 파멸시킬 것인지 흥분하며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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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을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씁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며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새해 선물로 받은 시이다. 지나온 1년, 3년, 10년, 30년 더듬어 걸어온 내 등 뒤의 길은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이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걸어서는 안 될 길을 걸어왔다고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는 것이 밥 먹고 하는 일이지만. 알고 보면, 그 높은 시선과 깊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일뿐이었다. 이 시를 보내준 이는 내적 여정 세미나 역사 상 강사인 나를 가장 크게 뒤흔든 수강자였다. 울다, 함께 울다 길을 잃어 강의안 포기하고 속에서 나오는 얘기를 그저 쏟아놓게 한 장본인이다. 그렇게 내적 여정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가족 여행을 떠난 그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더니 '피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답이 왔었다. '피'가 상징하는 것들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도울 수 없는 무력감에 마음이 너무 아팠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치유자'는 타고나는 것 아닐까 싶게 성품에 치유인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피의 크리스마스'를 메시지에서 확인했을 때, 1년 후 이런 동역의 벗이 될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그도 나도 우리 모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더듬어 여기까지 왔다. 또 2020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을 더듬어 가야 할 것이다. 부조리와 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악을 이기게 하는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고, 고립과 상처를 유발하는 이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준 것이 없는데 많은 것을 되돌려주는 사람을 만나고, 많이 애를 써서 가꾸었는데 도리어 헤집고 망치는 이도 피할 수 없다. 나 역시 누군가의 길에 꽃 한 송이가 되기도, 누군가 가꾼 정원을 망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길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길임을 안다. 기꺼이 걷는 길이다. 2020년, 기꺼이 걷는 길을 다시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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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2주간이 시작된 날,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 '크리스마스 선인장'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정말 이름이 그렇다. 해마다 이 즈음, 핀다고 하여 그리 불린단다. 우리 집에선 '대림 선인장'이라 부른다. 대림절 끝이 성탄절이니 그 말이 그 말이다. 일 년 내내 시들시들 맥아리 없이 보여 꽃 볼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딱 한 송이가 슬쩍 피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웃음이 난다. 아, 진짜 이 주님.... 진짜.


오실 주님, 

오시는 주님,

오신 주님, 

딱 한 송이면 족하다 하시는 거지요?




2년 전 이때, 크리스마스 선인장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어느 날 화분에서 붉은 꽃이 만발 했는데, 너무 놀라 신비체험인 줄 알았다. 대림절 기간이었다. 추운 거실, 노트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발견했다. 어머, 어머, 어머, 이게 뭐야!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이 만발하니, 영락없이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신비체험인 줄 알았다. 자칭 신비주의자, 타칭 이성주의자 남편이 검색하고 알려주었다.  '크리스마스 선인장이래!'


오십견으로 팔을 잘 들지 못하던 즈음이다. 다 접었던 음악치료를 다시 시작해야 했고, 시집살이 하듯 삼시세끼 밥을 했다. 4,5년 일에서 놓여 쓰고 싶은 글이나 쓰고, 젊은 사모님들 집에 불러 책모임 하고, 영성모임 하고, 간간이 강의나 하며 좋은 세월을 지내고 난 뒤였다. 편한 맛을 본 후라 몇 배 더 힘들었다. 하나님, 이 양반이 나를 편하게 두실 리 없지! 내가 편히 지내는 꼴은 못 보신다고! 


난생 처음 '페이 좀 올려주세요'란 말도 하고, 다시 내 몸보다 큰 키보드 끌고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다. 삼식이가 된 남편의 삼식을 챙겨야 하는 일이 키보드 무게보다 더 무거웠다. 신앙 사춘기는 끝난 걸로 스스로 정리한 뒤라 마음대로 침 뱉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안 나는 힘을 내어 무거운 짐 번쩍번쩍 들고 다녔더니 기어코 오십견이 왔다. 등도 못 긁고, 옷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는 중 대림시기가 되었다.


아니, 자기 몸보다 더 크고 무거운 키보드를? 하면, 괜찮아요! 이래 보여도 힘은 쎄요! 번쩍번쩍 들고 다니며 1년, 어깨는 짖눌렸다. 내가 괜찮지 않으면 도미노로 무너질 것들이 많아서(많다 여겨서) 늘 그랬듯 체중에 넘치는 짐을 지고 다녔다. 짐보다 더 무거웠던 건 바닥에 깔린 자존감이었다. 꼭 짐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위축이어서 굽은 어깨 더 굽히고 다닌 1년. 오십견 증상으로 더 짐을 들 수도 없던 대림 시기였다. 그 어간 어느 날, 죽은 것 같은 선인장에서 꽃이 만발했던 것. 누가 뭐라든 나는 아기 예수님 그 분이 피운 위로의 꽃이라고 믿는다. 사실.


상황이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 어쩌면 더 무거운 날들이었다. 그 사이 오십견은 갔고, 최근엔 '테니스 엘보'라는 인대염이 와 있다. 이 역시 키보드 무게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소를 시작했고,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연대를 맛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작년 12월 7일에 이사를 했고, 12월 8일에 연구소 첫 개소식을 했다. 딱 일 년이다. 어느 덧 다시 대림시기이다. 단 한 송이의 대림 꽃이 피었다. 심술쟁이 하늘 영감님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더 불평할 힘도 없어 위로의 붉은 꽃 같은 것은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다. 오십견에 오십 송이라면, 테니스 엘보는 한 송이면 된다는 처방입니꽈? 


오신 주님, 

오시는 주님, 

오실 주님,

딱 한 송이로도 당신 마음 알아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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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알지만.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살다살다 내가 후원 요청하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더 놀라운 것은 이렇듯 떳떳하고 당당하게 요청하게 될 줄이야. 몸에 흐르는 지역감정의 피, 충청도의 피 같다. 굶어 죽어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겠다는 왜곡된 기질 같은 것. 곧 죽어도 수염 쓰다듬으며 팔자걸음 걸으며 내 속의 양반 어디 가고 기쁘고 당당하게 후원 요청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 말은 이명박이 쓰던 말이라 왠지 코미디 같지만. 확실히 해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후원자 명단을 보며 매번 새롭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후원하시는 분들이 여러 모로 내 예상을 빗나간다는 것, 더불어 적은 금액의 후원일수록 더욱 감동이 되며, 돈이 자본주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엑셀 시트의 정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


말 그대로 후원, 後援, 뒤에서 도와줌이구나 싶다. 한 분 한 분에게 황송하고 송구한 감동이다! 조용히 후원신청 하신 한 분 한 분, 무슨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어 고심했다. 내담자들의 변화와 집단여정에서의 감동을 미주알고주알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 “저희가 뭐라고, 저희를 믿고 이렇게...” 머리 숙여 인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조용히 ‘이체’로만 말씀하시는 분들께 어떻게 연결될까? 고민 끝에 마음 품 많이 들여 선물 제작했다. 달랑 책갈피 하나이지만, 다섯 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맞대고 깊은 애정과 의미 갈아 넣었다. 제가 한 음식 제일 맛있다고 누구보다 많이 먹는 느낌으로, 우리가 만든 걸 보고 보고 또 들여다보며 '예쁘다, 참 잘 만들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셀프 감동이다. 카드까지 따로 제작하여 꾹꾹 눌러 쓴 손편지와 함께 발송했다.


이 과정에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기억 저편으로 쫓아냈던(그렇다, 아마도 쫓아냈을 것이다.) 후원에 대한 기억이다. 중고등 시절 장학금 또는 후원금 명목의 돈을 몇 군데에서 받았었다. 학교에서 선생님 추천을 받기도, 이북 출신 아버지 덕에 이북 5도청의 장학회와 연결되기도 하였다. 선정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을 것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가 공부도 웬만큼 하고 모범생이기도 했으니.


한 달에 한 번 직접 가서 받기도, 일 년에 두어 번 등록금 내는 때 받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성적증명을 내야 하거나 가끔은 후원자게 보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사진, 바로 그 사진을 찍힐 때의 감정이다. 저 먼 곳으로 쫓아내고 숨겨뒀던,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수치심의 기억이다. 연구소 후원자들과 어떻게 연결될까 고민하며 생각했다. 


냉장고에 붙은 아프리카 어린이 사진 같은 걸로 연결되지는 말자. 아, 나 정말 그런 것 싫어하는 구나, 알게 되었다. 빈곤 포르노라고 한다. 후원받는 사람들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사진 같은 것들. 지인의 집 냉장고에 붙은 아프리카 어린이 사진이나 선교사 가족 사진을 딱히 빈곤 포르노라 할 수 없지만, 생각해보니 참 불편했다. 


생각해보니 이 역시 내가 해봐서 아는 것이다. 후원자에게 보낼 사진 찍히는 심정을, 그 수치심을 안다. 나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될 것 같은, 동정심을 이끌어낼 불쌍한 표정에다 감사의 표정까지 담아야 하는, 그리하여 후원자의 후원하는 손에 자부심을 불어 넣어줘야 할 것 같은 부담. 청소년기의 나는 사회복지사의 나는 카메라 앞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걸 고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 수치스러웠다.


후원의 혜택 드려야 하는 내담자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혜택의 방식과 모든 것도 우가 아니라 수혜자 자신이 선택하게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대상화 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후원의 혜택을 입으시는 분도, 후원하시는 분도 불필요한 수치심과도 우월감도 느끼지 않고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하게 되는 플랫폼이 될 수 없을까. 사람에 관한 일은 시스템화 할 수 없음을 알기에 한 분 한 분 사려 깊게 분별하여 도우려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숨겨뒀던 수치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 감정을 다시 경험하며 잠시 휘청했지만 결국 사랑의 뜰채로 건져 올려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중고등 때 학생증 사진을 보면 상상이 된다.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후원금 받으러 가던 내 모습, 후원자에게 보낼 사진을 찍고 감사의 편지를 쓰던 표정과 마음이. 치유자로 사는 내가 명확하게 이름 붙여주고 안아주고, 보호하며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게 되었다. 


어릴 적 증명사진 첨부할까 하고, 들여다보다 다시 한참 울었다. 슬퍼서 안되겠다. 그 사진의 아이는 내가 혼자 더 들여다보고 만나주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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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possible Dream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bear with unbearable sorrow
To run where the brave dare not go

To right the unrightable wrong
To love pure and chaste from afar
To try when your arms are too weary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r pause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And I know if I'll only be true
To this glorious quest
That my heart will lay peaceful and calm
When I'm laid to my rest

And the world will be better for this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휴가의 끝을 다른 시작으로 잇는 노래가 계시처럼 라디오에서 나왔다. 이룰 수 없음을 알지만, 이길 수 없음도 알기에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 꿈과 싸움을 멈추지는 말아야겠다고 노래가 노래하고 내 마음이 따라 부른다.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그 별을 찾은 이상, 몇 억 광년 전부터 그 별을 향해 걸어온 이상. 가자고, 한 발 앞은 캄캄해도 저기 멀리 별빛을 바라보며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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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창 밖 앞산의 푸르름에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짧다. 이내 고개를 숙여 창가의 화분에게 굿모닝! 기나긴 굿모닝 인사다. 한 놈 한 놈 건강을 살핀다. 제 몫의 푸르름을 유지하는지, 잎은 탱탱한지. 그러며 어느 놈이 목이 마른지 알게 된다. 핸드드립 동포트(꼭지 부분 가늘어 천천히 물주기가 딱이다!) 목은 마른 것 같진 않은데 어쩐지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녀석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원인을 모르니 대응도 할 수 없다. 그저 소성케 되길 기도한다. 앞산 푸르름을 배경으로 잘 자라는 화초들 덕에 아침마다 생명의 기운을 받는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렇게 화분을 잘 키워요' 집에 오신 분들이 빈말인지 아닌지 칭찬을 하신다. 화분이 울고 보채는 것도 아니고, 등원 하원 시간 챙겨야 하는 애들도 아니고, 세 끼 밥을 먹이거나 목욕시킬 것도 없으니 바쁘다고 돌보지 못할 애들은 아니다. 아침에 잠시 눈을 맞추고 가끔 사진을 찍어주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 화초가 잘 되는 것은 인정! 내 마음의 정원이라 여기고 싸구려 화분 몇 개라도 가까이 두고 돌보는 일상이 오래다. 어느 때부턴가 수월하다. 그다지 힘을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나, 힘도 안 들이고 화초 잘 키우는 여자!


신혼 초, 노란 벽지 집에서 처음으로 화초를 들이던 때나 지금이나 죽어 나가는 애들은 비슷하다. 조금 줄었을 수도 있겠다. 잘 돌본다고 돌보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다 결국 고개를 푹 꺾어버리고 마는, 급기야 시들고 마는 애들은 어쩔 수 없다. 화초 키우기가 수월해졌다 느끼는 지점이 분명하다. 죽어 나가는 화초에 대한 과한 죄책감을 놓으면서부터이다. '에고, 또 죽였네! 난 정말 화초를 못 키워, 다 죽여!'에서 '죽을 놈은 죽고 말더라' 하는 마음이 되니 거짓말처럼 화초 잘 키우는 여자가 되었다.


변화의 방향이 밖에서 안인지, 안에서 밖인지는 모르겠다. 화초가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젊은 날부터 '관계의 실패자다'라는 자의식으로 살았다. 알고 보면 실패한 관계 하나 둘이다. 모든 관계를 다 잘할 수는 없구나! 불가능한 목표였구나, 깨닫게 되면서 과도한 힘이 빠져나간 것 같다. 착한 크리스천 강박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고 말해도 좋다. 가장 확실한 표현은 내 한계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일 수는 없어!


이렇듯 단순한 진리를 알아듣기까지 얼마나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던가. 자기혐오의 시간이었던가. 자아팽창의 시간이었던가. 그 시간을 통과하며 관계에 대해 쓰고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의 실패자가 관계 강사가 되었다니! 관계의 실패자일 때나 관계 강사인 지금이나 실패하는 관계는 비슷할지 모른다. '에고, 또 실패했네, 역시 나는 관계의 실패자야'에서 '내가 애써도 안 되는 관계가 있더라, 잃을 사람은 잃을 수밖에 없더라'하는 마음이 되니 거짓말처럼 사람을 좀 아는 여자가 되었다. 


사람에게서 배워 화초를 잘 키우게 된 것인지, 화초를 키우다 사람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디 한 방향이겠는가. 안팎을 오가며 습득하게 되었겠지.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말라죽은 화분을 숨기고 싶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 내 안의 내가 마구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인 줄 모르는 탓이었다. 단번에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이제야 사람인 줄 안다.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가진, 희망과 절망 또한 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도 먹고 싶은 사람인 줄 안다.


창밖이 저렇듯 푸른 산인데, 창가의 화초 또한 저렇듯 싱싱한 초록이라니! 

내 눈 앞의 풍경이라니! 토요일 오전, 나의 한가한 일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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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서 공적 마당에 내놓는 것은 꽤 위험한 일입니다. 쓰는 사람은 글에 담은 자기 선의만 생각하거든요. 선의와 함께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로 그 뜻을 독자들이 읽어줄 거라 기대하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긴 시간 피 흘리며 배웠습니다. 글이 길 때는 끝까지 읽어주는 독자도 많지 않은데, 필자의 뜻까지 헤아리길 바라는 건 과욕이지요. 제목과 저자의 인상만 보고 쉽게 판단합니다. ‘나만 보기’ 설정의 글이 아닌 다음에야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악플이란 표현도 무게감으로 느껴질 만큼 쉽게 내뱉은 댓글이 가진 폭력성. 글의 맥락과 연관을 찾기 어려운 긴 댓글도 달립니다. 한 번은 기본적 맞춤법도 모르고 공적 글쓰기 하는 사람으로 단정되어 창피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일단 글이 나가면 댓글이나 반응은 안 보는데 꼭 제보해 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저는 맷집이 약해서 비난의 그림자만 스쳐도 휘청거리곤 하거든요.

하지만 역지사지로 압니다. 저도 좋은 뜻, 좋은 글을 취향 때문에 패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좋다는 글, 사람이 왠지 내겐 거북하여 안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린 페친의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취향을 보는지 모릅니다. 타자에 비친 내 마음을 보는 것이지요. 고혜경 박사의 말처럼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투사(projection)의 드라마일지 모릅니다.

이 글은 <신앙 사춘기> 연재 초기에 썼던 글입니다. 초고를 어찌어찌 완성해 놓고 매번 미루고 미루다 결국 탈고하지 못하고 연재를 끝냈습니다. 초안으로 치면 5, 6년 전에 잡았던 글입니다. 그나마 이모로 저모로 가장 괜찮은 (건강한 작은 개혁)교회 사모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문드러진 마음, 무너진 몸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어찌된 일인지 그때로부터 ‘그것은 알고 싶지 않다’ 시리즈물이 제게 상영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좋은 교회라는 자부심에 어깨가 올라간 교인들이 있고, 정작 그 교회 목사님과 가족들은 말 못할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한국교회 희망이 되는 것 같은 진보적이고 훌륭한 분 일상의 자기장 안에서 그분의 그림자에 질식하는 분들이었습니다. SNS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분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분들이 자꾸 제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신앙 사춘기’라는 언표로도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었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당장 한 영혼이 말라 비틀어져 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제 눈앞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글에 담긴 마음은 정말 복잡합니다. 연재를 마치고 책 출간을 위해 추가글을 쓰면서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글입니다. 이조차도 너무 힘겨워서 포기할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신앙 사춘기> 연재 시작하며 ‘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겠노라, 쓰고 싶다, 했습니다. 한 편 한 편, 정말 그런 마음으로 썼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통과한 연민’ 없이 찌르지 않으려고 쓰고 덜어내고, 쓰다 멈추어 울기도 했습니다. 매 글마다 각각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그를 편들기 위해 찔러야 했습니다. 그를 대신해 작정하고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뜻도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글, 탈고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은 복수의 칼날조차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도 100%의 사랑과 연민일 수는 없지만요) 이 글은 맨 처음 글의 초안을 잡게 했던 그분과 그분의 남편 목사님 헌정입니다.



번외 편 <신앙 사춘기> 올린 글을 페이스북에 링크하며 붙인 글이다.

10개월, 아니 5, 6년 묵힌 글인데도 도통 써지질 않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도 글이 한 문장도 나오지 않고, 마음에 돌덩이 하나 얹은 느낌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를 집어 들었다.


"평생 쓰던 글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한 문장에 끌렸고 첫 페이지의 제목 또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


작은 책을 손에 쥐고 거의 한달음에 다 읽고는 조금 허무해졌다.

알고도 낚이는 법이지만, 예상된 바지만 글빨을 뚫어줄 뾰족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

행간에서 나만의 답을 '자신의 은밀한 결핍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을까.

실은 엉뚱한 통찰이 내게 와 힘이 되었다.


"후지게 쓰는 것보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이 나는 가장 두렵다."


세계적인 작가로서는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워 글이 막힐 수 있겠지만,

나는 사실 후진 글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글의 후짐보다 마음의 후짐이 늘 괴로웠다.

글의 후짐으로 치면 이런 에피소드도 겪는 후진 작가이다.

"밥벌이로써의 글쓰기"를 내놓고 '로서'와 '로써'도 구분 못하는 사람으로 몰린 적이 있다.

더 부담과 상처로 남은, 

<뉴스앤조이>에서 깐깐한 편집자로 소문난 담당 편집 기자님까지 싸잡아 넘겨졌던 것.

(심지어 이분은 내가 처음 보낸 제목을 '로서'로 고쳐 글을 올리셨다.

부러 '로써'로 쓴 것이니 다시 수정해 달라는 요청 드려 '밥벌이 로써'가 된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낯이 뜨겁고, 부끄럽다.

(책 출간 때는 제목의 '로써'에 따옴표를 붙여 강조할 예정이다.

지질한 뒤끝 작렬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이 뒤끝은 평생 갈 예정이다.)


문법과 문장의 후짐은 쉽게 드러나 부끄럼 당하고 무시 당할 수 있으니 다행인지 모른다.

소설도 아니고, 내적 성찰을 담은 에세이를 쓰면서 후진 마음으로 쓴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마음의 후짐이란, 글로 나를 속이는 행위를 말한다. 

투명하지 못한 마음이 후진 것이고, 후진 마음은 후진 글이 아니라 악한 글이 된다.

내 글에 내가 속는 것, 이 얼마나 악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렇다고 내 글이 특별히 투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글을 쓰며 그 지점이 늘 부끄럽고 고통스럽단 얘기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저 책이 힘을 주었다.

나같은 무지랭이가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후지가 쓰더라도 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쓰지 않았으면 인생의 어두운 숲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글도 사람도 다소 후지지만,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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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타칭 일기 쓰다 된 작가이다.

성덕, 성공한 덕질이라고도 한다.

글쓰기의 시작은 부조리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듯 마주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일기 쓰다 작가가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일기 쓰다 치유가 되는 일이었다.

썼다. 부조리를 느낄 때마다 썼다.

목적 없이 썼다.

쓰지 않으면 달리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썼다.

달리 할 바가 없어서 선택한 그 일이 바로 고통을 치유하는 명약이 되었다.


다시 시작한 치유 글쓰기 모임이 4회기, 벌써 반이 지나간다. 

매력적인 여성을 발견했다.

상상 불가의 폭력 속에서 자란 이가 어쩌면 저렇게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마어마한 폭력 속에서 자기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저 여인은!

한 회기 한 회기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는 썼다. 

자기 고통을, 이름 붙여지지 않는 고통을 썼다. 

세상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쓰는 나를 보는 내가 들어준다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생존의 필살기는 '쓰기'였다.


아, 나도 그랬던 거구나!


공선옥 작가도 그랬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단다. 

그것도 서러운데 선생이 놀리는 아이들 편을 들며 차별하니 가난하고 무력한 아이는 무엇에 기대랴.

기댈 바 없는 아이는 결심했다

너희들 다 글로 써버릴 거야!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여성 중 하나인 록산 게이도 그랬다.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글을 썼다. 아주 많이 썼다. 어린 소녀들이 잔인한 소년과 남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내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썼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소리는 잃었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다.

                                                                                                                                                  - 헝거록산 게이

젊은 시절에 그랬었다.

한낮의 고통이 클수록 밤을 기다리는 위안이 강렬했다.

집에 가서 쓸 수 있어. 집에 가서 쓰면 돼.

그리고 집에 가 식구들이 잠든 밤에 썼다. 쓰고 또 썼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하던 <신앙 사춘기>를 책으로 엮기 위해 글을 몇 편 더 쓰고 있다.

<신앙 사춘기> 연재는 그냥 연재글이 아니었다.

10여 년의 여정을 그대로 재경험 하는 일이었다. 

오래 농익은 분노에 성찰 한 스푼이 들어가여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비로소 써지곤 했다.

분노, 억울함이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을 거쳐 연민이 되었을 때 글이 되었다.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의 지난함을 당신은 모른다.

억울함으로 금이 가고 분노로 타들어간 가슴을 당신은 모른다.

이젠 그 가슴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다.

내가 쓰고 또 쓰고 연재까지 하면서 충분히 알아줬으니.

<신앙 사춘기> 연재로 생각보다 더 많은 마음의 짐이 사라진 것 같다. 

지난 10여 년 글쓰는 힘은 '복수'였는지 모른다. 복수는 나의 힘. 

이제 더는 복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충분히 했다 아이가! 

이제 더는 복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작정한다고 될 일은 아니구나.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있다.

저격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활활 타버린 후 연민의 재가 남을 때,

그때까지 기다렸다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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