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 받으며 책을 앞에 두고 앉았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허공을 헤매고 다니던 시선이 커피장의 빨간색 원두 봉투에 꽂혀 머문다. 폰을 꺼내어 커피봉투를 찍었다. 그 옆엔 빨간색 카플라노가 있다. 그래, 너도 찰칵! 소파 옆 빨간 스탠드, 마주보는 책꽂이의 어스시 전집, 그릇장의 빨간 나비 커피잔. 빨강에 홀려 왔다갔다 찰칵찰칵했다. <자기 결정>, <아니마와 아니무스>, 알랭드보통의 <불안>,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빨간 책들만 골라 뽑아 읽어본다. <신이 된 심리학>의 빨간색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벽에 걸린 액자 <탕자의 귀향> 속 아버지의 겉옷으로 빨간 색 마침표를 찍는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찬양연습을 위해 교회에 있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단다. 아는 얼굴조차도 아직 낯선 이곳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이 애매한 시간에, 이 낯선 곳으로? 멍한 표정으로 '찾아온 이'를 맞았다. 하도 멍한 상태라 빨리 알아보지도 못했다. 코스타 K간사님이시다! 아, 맞다. 이 근처에 사신다고 했었다. 그렇다 해도 이 얼마나 상상 밖의 시간과 공간인가. 교회 건물의 약국에 오셨다 혹시나 하고 들르셨단다. 나로서는 주일 아닌 날 낮에 처음으로 교회 있어본 것이었다. 어쩌면 이 시간에 찾아오셨나요! 찰나 같은 만남, 반가움에 감탄사만 연발하다 짧은 몇 마디 나누고 끝났다. [사모님, 올해는 못 오신다고요./네. 간사님은 올해도요?/네, 저는 물론...... 아, 그렇군요.] 이 짧은 만남이 추억의 빨간색을 소환해냈다.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는 K간사님 입고 오신 옷이 빨간색 조끼라고 저장했다. 그리고 집에 와 거실 탁자에 앉아 책을 읽지 못하고 집안의 빨강들을 찾아 헤맨 것이다. 작년 코스타 준비를 위해 K간사님께 연락이 왔을 때, 당연히 미국에서 온 메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계시다기에 잠시 다니러 나오셨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컨퍼런스 기간마다 휴가를 내어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간사님들이 그러하듯 일 년 내내 코스타에 연루되어 보이지 않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 코스타 다녀올 때마다 한 번 제대로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제대로 소회를 남기지 못한 이야기가 빨간 조끼 간사님들에 관한 것이다. 갈때마다 강렬한 질문으로 안고 돌아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간 내내 느껴지는 저들의 헌신인데, '헌신' 앞에 붙일 형용사가 마땅치 않다. 열정적인? 수준 높은? 보이지 않는? 전문적인? 어떤 말도 20% 부족하다. 


강사가 자비로 항공료를 부담하고 날아왔다고 하면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코스타가 비난을 받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강사의 자비량보다 더 놀라운 것은, 비할 수도 없는 것은 간사의 자비량이다. 솔직히 강사들이야 '코스타 강사'라는 타이틀 하나 얻는 것만으로도 크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교계에서 청년 상대로 강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기관이나 교회에 속해 있지도 않는 나같은 강사는 무리데쓰네 하면서, 남편 상에게 아리가또 스미마생 스미마생 하면서 다녀오게 된다. 남모르는 엄청난 희생이라 여기며 참석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은 얻는 것이 훨씬 많다. 내가 굳이 강사 이력에 쓰지 않아도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인지라, 알아서 알아주기도 하며, 일주일 진하게 유학생들과 부대끼고 오면 일 년 울궈먹을 강의 컨텐츠를 득템하는 것이 사실. (영업비밀 다 밝힘) 그런데, 간사님들은 무엇을 얻을까? 도대체 무엇을 얻기에 저렇게 앞뒤 안 가리고 가진 것을 내어놓는 것일까?


K 간사님은 단지 코스타를 섬기기 위해서 여름마다 휴가를 내어 날아간다니!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는 내 명분이 부끄러웠다. 코스타의 빨간 조끼는 나의 이런 자기기만을 일깨우는 레드카드이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재의 입을 빌어 안도현 시인이 묻는 것처럼 빨간 조끼는 내게 묻는다. '너는 한 번이라도 사심 없이 너를 내어준 적이 있었느냐' 희생이라는 포장지 뒤에 감춘 내 사심을 묻는다. 여기까지가 빨간 조끼에 대해 풀어 놓지 못한 그간의 이야기이다.


헌데 K 간사님이 잠시 교회에 다녀가신 오후, 빨간색과 더불어 '열정'이란 말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열정이란 말에 애증의 감정이 있다. 강의를 하거나 특히 지휘를 하고나서 '열정적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많았다. 왜 그렇게들 말하는지 알지만 나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자기비난으로 가져오곤 했다. 사람들을 몰아부친다, 에너지가 과하다..... 이런 평으로 듣기 때문이었다. 내가 열정적인 것을 스스로 잘 안다.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는 방법을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열정이 클수록 그림자가 짙고 크다는 것을 알기에 갈수록 머뭇거리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러하다. K 간사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빨간 조끼 간사님들을 향해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 없지만 그저 나를 내어줄 (사람이든 일이든)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열정의 강사, 열정의 지휘자가 타인의 열정을 부러워하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새로운 열정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앞뒤 안 가리던 젋은 날의 열정이 아니라 불을 향해 날개짓 하는 열정이 아니라 말이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을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가 가졌을 열정, 메마른 땅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 어제 엄마에게 다녀왔다. 총기는 여전하지만 많은 것이 가물가물해지는 엄마가 '신실이가 나이 몇이여. 니가 마흔 둘이여?' 해서 한참 웃었다. '엄마, 이제 신실이가 오십이여' 하니까 '얼라, 오십이여?' 하신다. 우리 엄마 입으로 듣는 내 나이가 새삼스럽다. 추억의 열정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나이에 맞는 오늘의 열정을 매일 새롭게 배우고 일깨워야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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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좋아하지만 맛집을 찾아 줄을 서는 열정은 없고, 뭘 맛있게 먹더라도 또 먹고 싶어 애써 찾아가거나 하지 않는다. 벌써 일주일 전에 먹었던 것들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입맛을 쩍쩍 다시게 되니 내게는 드문 경험이다. 지난 주에 광주로 1박 2일의 에니어그램 강의를 다녀왔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수련회 풍경, 청년부 수련회에 식사팀 권사님들이 함께 하신 것이다. 기대 이상의 맛, 기대 이상의 정성에 더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1박 2일의 먹강(먹으러 강의 간 것)이었다.  첫 식사, 첫술을 뜨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끼니 때마다 기본 일식 오찬, 내지는 육찬. 가짓수의 많음보다 감동은 반찬의 다양함이요, 그보다 더한 감동은 모든 반찬이 다 맛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풍성한 밥상인데, 식사 중에 탱탱한 생굴에 갖은 양념으로 만든 초고추장까지 곁들여 내오신다. 강사 특별대접. 옆에 앉은 청년들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셨는지, 권사님께서 "내일 아침 메뉴여. 내일 다 줄 건디 강사님 먼저 드리는 거여." 하신다. (그 굴은 다음 날 아침 굴 떡국으로 변신. 세상에나, 수련회 아침 식사가 반찬 다섯 가지에 굴 떡국이라니!) 마지막 식사에는 "이따 저녁 반찬인디 못 드시고 가싱께" 하시며 피꼬막 한 접시가 추가. (키보드 두드리며 침 고인긴 처음이다)


권사님들께 일부러 찾아가 배꼽 인사를 여러 번 드렸다. "강사 인생 십몇 년 만의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두 번째 식사시간이던가, 식사팀 대장 권사님 옆에 앉게 되었다. 역시나 '권사님, 정말 맛있습니다. 맛있습니다'를 연발했더니 특유의 사투리로 '내 반찬이 맛있는 줄 아시면 강사님 입맛이 보통 수준이 아닌디'하신다. 그리고 짧은 간증을 하셨다.


"내가 중등부 교사를 한 지 30년이 되얐어요. 어떻게 처음 교회에서 밥을 하게 되었냐면. 지금이야 안 그렇지만 그때는 수련회 강사 전도사님, 목사님들에게 강사비가 없었어요. 여름에 땀 흘려 가며 고생하시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내가 밥을 해야겄다, 식비를 남겨서 강사비를 드려야겄다 했어요. 사 먹는 밥 대신에 직접 장을 봐서 했는디, 좋은 재료 싸게 사서 맛있게 먹고도 돈이 남은 겨. 그렇게 강사비를 드리고, 교회에 뭔일 있으면 또 장 봐서 밥하고......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30년이 된 거여. 나는 음식하는 게 즐겁고, 잘하는디 아무나 다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한때 내가 은혜받아서 마음이 뜨거울 때는 집안 살림, 밥하는 거, 이런 거는 다 하찮은 줄 알었어. 그저 교회마~안, 열심히 댕기고 이러는 게 잘하는 것인 줄 알었더니. 나중에 믿음이 조금 자라고 봉게, 그게 아니더라고. 내가 솜씨가 있고 음식하는 거 좋아하는디 그거 열심히 혀서 먹이는 것이 중요하더라고."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수백 페이지 주절거린 일상영성을 3분 토크로 요약해주시는 것 아닌가. 음식만 맛있던 것은 아니다. 청년부 목사님의 극진한 환대, 강의에 집중하는 청년들 태도의 배려와 어우러져 더욱 잊지 못할 1박 2일이었다. 청년부, 특히 대학부나 어린 청년부에서 오는 에니어그램 강의요청은 거절하곤 했었다. MBTI로도 충분하다 설득하여 주제를 바꾸기도 했었고. 헌데 이번엔 어쩐지 거절하질 못했다. 할 수 없지, 어려워해도 할 수 없다. 하며 갔는데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광주였고, 게다가 수련회 장소는 무등산 자락이었다. 광주, 내 마음 속 광주 말이다.


같은 주제로 여러 곳에 강의 다니면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것들로 큰 배움을 얻게 된다. 이방인으로 공동체 체험하기. 맞이하는 교회들이야 늘 하던 방식이겠지만 내게는 새로움이니 말이다. 맞으시는 무심코, 평소대로 손님을 맞는 태도를 경험하는 나로서는 '비교체험 극과 극' 수준일 때도 있다. 때로 내가 이러려고 강의하러 이 먼 곳까지 왔나, 자괴감으로 하며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는가 그 정반대의 날도 있다. 낯선 자의 눈으로 바라보기, 체험하기의 유익은 얼마나 큰지! 아무튼 이 예기치 않았던 광주 먹강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강사랍시고 특별대접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권의식으로 못된 태도와 마음의 습관이 들까 경계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진심 어린 환대란 누구라도 특별하게 대하는 것 아닌가. 창의적인 배려로 드러나는 환대로서의 특별대우는 강사도, 직장 마치고 파트타음 참석자로 수련회장에 들어온 청년이라도, 누구라도 춤추게 하는 일이다. 추가로 나온 생굴 한 접시의 특별대우는 따뜻한 환대로 다가왔다. 


마음이 추운 날이 오래 간다. 자꾸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움츠리고, 껴입고 그럭저럭 잘 지내다 한 번씩 한기에 휘말릴 때가 있다. 봄의 훈풍은 언제쯤 불어오려나. 1박 2일 광주 일정 마치고 올라와서는 바로 다른 일정이 있었다. 밤까지 대중교통으로 다녀야 해서 여러 겹 옷으로 무장하고 내려갔다. 광주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겹쳐 입은 카디건이 거추장스럽고 무거웠다. 예상치 못한 따뜻한 날이었다. 일기예보를 빗나가는 따뜻한 날이 언제 불쑥 끼어들지 모르는 일이다. 무등산의 아침을 맞으며 후루룩후루룩 먹었던 굴떡국. 아직 마음에 남은 떡국 국물의 온기를 꺼내보며 하늘의 메시지 하나를 읽어낸다. 


봄이 오고 있다.

아직 겨울이라도 어느 날 훅 들어오는 따뜻한 날도 있을 테다.

오늘 추위 걱정은 오늘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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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서 가져온 팔뚝만 한 고구마가 있었다.

벌써 한참 전이다.

'보기는 이래도 맛있어. 잘라서 삶아 먹어 봐'

잘라서 삶으라는데....

칼을 집어 넣어야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아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그 사이 속이 노란 해남 고구마 한 박스를 선사 받았다.

속이 노란 고구마가 어찌나 맛있는지 아침 식사 단골메뉴가 되었다.

팔뚝만 한 고구마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삶은 고구마 되는 건 진즉에 포기, 삶을 포기한 고구마가 진정한 생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싹을 틔운 것이다!

스케일 있는 이 녀석, 흡사 무슨 분재 같도다.

이제야 칼을 집어 실랑이 한 끝에 싹이 난 부분을 뚝 잘라냈다.

그리고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영예의 전당에 모시었다.


가을 겨울 지내며 거실 창 앞의 작은 화분들이 초토화 되었다.

한 놈 두 놈 시들해져 가더니 강한 놈 몇이 살아 남았다.

가을, 겨울이 아니라 여름의 에어컨 바람에 든 냉방병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 같다.

사그라든 생명의 빈 자리를 대림절 초와 성탄 트리로 메꿨는데......

이제 그마저도 을씨년스럽다.

연휴 동안에 박스에 넣어 정리하고 올 대림절을 기약해야 할 것이고,

햇살 드는 거실 창 앞이 텅 비게 될 것이다.

전 같으면 벌써 분갈이를 하고 작은 화분들로 다시 줄을 세웠을 터. 

어쩐지 의욕을 상실하고 손을 놓고 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11)


이번 달 주일 예배로 초대하는 말씀으로 매주일 듣고 있다.  

전 같으면 '물 댄 동산'만 빼고 다 귓등으로 들어 흘려 보냈을 것이다.

어쩐지 '메마른 곳'에서 턱 막혀서 한 걸음 나가질 못한다. 

먼지 폴폴 날리는 메마른 땅을 걷고 또 걷는 느낌이다.  

갑자기 시니컬해져서가 아니라 이제야 철 든 마음의 눈을 가진 것 아닐까 싶다.


주인 엄마 마음이 이런데, 이런 시국에 분재 코스프레를 하며 싹이 난 고구마순이라니!

어린 생명을 향한 과도한 감수성 탓에 당근이나 무를 자르다가도 손톱만 한 싹을 지나치지 못한다.

자주색의 고구마순은 왠지 더 사랑스러운 것!

이런 매의 눈을 피하여 이토록 무성히 자랐다니. 너 뭐냐?

채윤이의 놀림을 받으며 아침마다 저 녀석을 모델 삼아 사진을 찍어댄다.

무심한 주인 아줌마에 아랑곳 하지 않고 틔워낸 생명.

기특하고 짠하지 아니한가.


풍성한 명절, 행복한 설 보내세요~

(도대체) 어떤 이들에게는 행복하고 풍성한 명절인지 모르겠으나.

외롭던 사람 더 외롭고,

슬프던 사람 더욱 슬프고,

가난한 이들이 더욱 추운 명절의 시작이다.

명절이라 이름한 특별한 날들, 그 며칠 잘 견뎌내자.

특별할 것 없어 비교할 것도 없는 진짜 나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명절 끝이 되면 저 고구마순이 한층 자라고 억세어져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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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가 만화책은 허락하질 않았다.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만화는 <소년중앙> <새소년> 같은 것이었다.

교사였던 오빠가 방학마다 집에 오며 서점엘 데리고가 책을 사줬는데

<동물농장> <솔로몬의 동굴> <소공녀> 같은 책에 얹어 나름 교양 만화라고 얻은 것이다.

아, 교회에서 정기구독하던 <새벗> <교사의 벗> 같은 교회용 잡지에 있는 만화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만화책 수십 권 쌓아 놓고 아랫목에서 뒹구는 낭만을 모른다.

그 결핍은 나의 독서 놀이에 치명적인 악습을, 그 습관은 상상력 결여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시간 죽이기' 식의 독서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소설, 특히 여러 권으로 된 소설 읽는 일이 드물다.

드물게 장편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면 무언가 도피할 현실에 맞닥뜨린 때이다.

남편과 사귀다 헤어졌을 때 방에 틀어박혀 읽었던 임철우의 <봄날> 다섯 권을 잊을 수 없다.

나보다 더 큰 고통, 더 긴 이야기에 빠져 현재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함이었다.

실연으로 죽을 것 같지만 <봄날>의 현실로 들어가는 순간 내 고통은 고통 축에도 들지 못했으니.

채윤이를 품고 입덧이 심해서 숨쉬기도 어려웠던 시절의 진통제는 김산의 <아리랑>이었다.


작년 12월부터 판타지 소설 <어스시 전집>을 읽고 있다.

어느 날 남편이 뜬금없는 링크를 보내면서 추천을 했었고,

읽던 책 한두 권에서 인용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두 애들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을 때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읽을 책이 수두룩한데 판타지 소설 전집 읽을 시간이 어딨냐.

헌데 이 어스시 전집은 왠지 끌렸다. 호기롭게 전집으로 딱 구매 해놓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독서 중독자라서 한 권만 읽지는 못한다.

이 책 읽다 보면 저 책이 신경 쓰이고, 저 책 붙들고 있자니 그 책이 궁금해지고.


성탄절 즈음에 남편이 입원하여 금식 치료를 하였다.

마음으론 안됐지만, 일부러 음식 사진 보여주며 놀리곤 했는데..... 바로 죄 받았다.

엊그제 우리 가족 중요한 행사 'Big Family Day'로 정한 날이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새해 기도제목을 나누며 기도하는 시간.

물론 맛있는 식사에, 맛있는 케이크 먹는 순서가 먼저이다.

맛있는 해물탕을 먹고, 맛있는 케이크 집에 가 앉았다가 친한 친구 아버님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순간 마음이 쿵하고, 충격이 됐는데 그 탓인지 어쩐지 얼마 후부터 장이 꼬이기 시작.

최악의 화장실 게이트에 휘말려서 피를 보는 사태까지.

결국, 병원에 가서 금식 처방과 함께 링거를 맞았다.

낭군님 지신 십자가, 와잎은 안 질까. ㅠㅠ 놀렸던 그대로 벌 받고 말았다.

기침 감기 기본으로 깔고 복통을 앓는 통에 기침하면 배가 더 아픈 것까지 똑같이.


허리 아프도록 침대에 누워 조금 정신이 차려지면 어스시 전집을 읽는다.

웬만하면 빠져들어 한 시간 쯤은 금방 죽여버릴 만도 한데,

제길, 체력이 딸리니 눈이 잘 안 보인다. (노안 때문은 아닐 거야. 누워 읽는 자세 문제일 거야)

그 어느 때보다 판타지 소설에 빠져들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머리를 쓰고 걱정을 해봐도 각이 안 나오는 일상으로부터 도피하고픈 마음.

각이 안 나오는 현실에, 나의 일상에는 지금 환각제가 필요하다. 판타지가 필요하다. 


하하, 그런데 리처드 로어 님은 <불멸의 다이아몬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은유만이 신비에 관해 정직하기 때문에, 은유는 종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상징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핵심적 의미를 다시 새로운 틀 속에 넣고 재구성하고 재조정하게 만든다'

라고도 하셨다.


아, 실은 만화 결핍증으로 인해 판타지 소설 울렁증 있는 내가 기꺼이 어스시를 선택한 이유였다.

단지 막막한 현실에의 도피가 아니라 뭔가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나의 이야기를 재구성 하고 싶어서.

판타지에 담긴 '은유(meta-phore)'들은 우리를 저 너머로 인도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고 보면, 진통제 삼아 책을 먹었던 것은 단지 진통제만은 아니었던 듯.

나의 일상보다 더 큰 이야기를 책 속에서 만나며

나의 지질한 아픔과 걱정이 큰 세상, 더 광활한 이야기와 연결되고,

한 챕터가 종결될 때마다 좁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면 또 다른 경계가 떡 허니 앞을 막고 서 있을 테지만.



* 예, 이제 몸은 괜찮습니다.

세트로 아파가며 이래저래 가오도 안 서고,

되는 일 없는 부부이지만 그럭저럭 잘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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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앞두고 응급실을 경유하여 입원했던 남편이 퇴원했다. 퇴원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남편을 차에 남겨 두고 부랴부랴 장을 봤다. 집에 오자마자 죽, 밥, 나물 한 가지를 하는데 진땀이 나면서 주저앉을 듯 힘이 없더니만 바로 침대행이 되었다. 지난주에 응급실에서 함께 밤샘하면서 이미 감기도 오고 몸도 안 좋았었다. 오직 보호자 정신으로 버텼으나 퇴원과 함께 다리 힘이 풀리며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겨우 일어나 나보다 더한 환자의 끼니를 챙기고 나서는 침대로 가 끙끙 앓는 시간을 보냈다. 엄마 아빠 함께 거실에 누워 콜록콜록 골골 하니(남편은 거의 한 달 가까이 감기 중) 식탁에 앉았던 채윤이가 현승에게 말했다. '이러다 우리 고아가 되는 건 아니겠지?' 둘이 알아서 설거지도 하고 재활용 쓰레기도 버리고, 청소기도 돌리고 짐을 나누려 하는 흉내라도 내니 기특하고 고맙다.


아픈 건 그저 나 혼자 앓으면 되는데, 어제 목요일엔 강의 약속이 있었었다. 몸 상태로 보면 운전하고 강의 장소인 평택까지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두어 시간 서서 강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끙끙 앓으면서도 머리 한 편에서는 강의 준비가 돌아가고, '나 죽겠으니 강의 같이 가자' 운전 부탁할 친구까지 섭외했다. 평소 같았으면 열 너덧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강의안을 새로 만들고 손 보고 했을 텐지만. 열에 들떠 누워 맥락도 닿지 않는 계획을 세워보다 하루 전날 잠시 약 기운을 빌어 일어나 앉아 짧은 시간 정리를 했다. 다행히 혼자 운전하고 갈 힘 정도는 생겼고 일찍 집에서 나와 강변북로를 달린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찬란한 햇빛이 들이닥치는데 지금 내 몸과 마음과 상황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라 '뜬금없는 찬란함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한 피아노로 친 찬송가가 듣고 싶어 신상우의 곡들을 검색하여 연주에 걸어 놓았다. 과장 없는 심플한 피아노 연주가 이어지다 역시 뜬금없이 노래하는 목소리가 끼어든다. '창조의 생기'라는 곡. (제목도 참 얼척 없군! 이 상황에 말이지)


눈물 골짜기를 지나 메마른 땅에 거하여도 주가 나를 창조의 생기로 일으키시네


내가 조금만 착한 모드였어도 은혜가 됐을 텐데. 아니 실은 '메마른 땅'에서 살짝 콧등이 시큰했으나 무시했다. 그리고 내달려 IVF 수련회 장소로 갔다. '여성의 성'이라는 주제 강의이다. 요청받은 제목은 그러했지만 내 강의안에는 '여성의 성과 영성'이란 제목이 달려 있다. 힘을 뺀, 아니 힘을 넣을 수 없는 강의였다. 차마 취소할 수는 없으니 쓰러지지만 말자.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잘할래야 잘할 수도 없어.) 강의 하다 보면 촉이라는 게 온다. 뭔가 오가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 오가는 느낌이 내 안의 무엇을 자꾸 건드린다. 여성, 사랑, 여성의 사랑과 성. 오래 공부하고 생각했던 주제이다. 특히 올해,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도록 나를 붙들어 매는 만남들이 있었다. 그냥 대한민국의 청년으로 사는 것에도 지옥'이라는 말이 붙는데. 기독청년으로 사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가. 기독청년의 성생활이란. 하물며 기독청년이며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가. 저쪽의 혐오와 비난을 안고 자기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강의 전에 불렀던 찬양이 뜨겁게 마음으로 다가왔다. 강의 중간 쉬는 시간을 마치고 다시 한번 부르자고 했다. 가사 한 부분을 바꿔서 부르자고. '여자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반복하여 부르면서 어떤 힘이 여자인 우리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인 우리가 마음의 손을 잡아 서로 일으키는 생기, 같은 것일까? 적잖이 은혜가 되었고, 아픈 내 몸까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강의 좋았단 인사가 인사치레가 아님을 안다. 강의 중에 주고받은 눈빛이 이미 말했던 바. 

이렇게 메마른 몸과 영혼임에도 학생들에게 나눠줄 위로와 생기, 생명의 기운, 창조의 생기가 솟아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강의 다녀온 사이 남편은 입원했던 병원에 갔다 왔다. 죽돌이에서 해방되어 '일반식' 허가를 받았다면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신보다 내가 더 좋다! 내가 해방이다!) 강의도 마치고 죽돌이 해방도 되고. 몸은 쇠약하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택뱁니다~' 주문한 일 없는 택배가 하나 왔다. 잘못 왔나 했더니 남편이 '어, 헌혈....' 하면서 아는 집사님이라 한다. 100주년에 있을 때 80이 넘은 집사님께서 무릎 수술하시는 중에 수혈 문제로 위급한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 병원 측 실수로 충분한 혈액을 구비하지 않고 수술을 시작했고, 혈액을 구하는 빠른 방법이 같은 혈액형의 헌혈자를 찾는 것이었다. 구역 권찰님이 급한 대로 교회로 연락하였는데 마침 남편이 같은 혈액형이어서 바로 헌혈하러 달려갔다고 한다. 사실 이 일은 그렇게 지나간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남편이 헌혈을 했다는 사실조차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수혈받은 집사님께서 택배로 멸치와 김을 보내오신 것이다. 각각의 상자를 하나 하나 포장지로 포장하여 큰 택배 상자에 다시 담으신 정성. 기대에 차서 포장지를 벗겼는데 상자에 가득 멸치떼를 확인하고 실망한 현승. ㅎㅎㅎㅎ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남편이 일어나 상황 설명을 한다. '아, 그때! 전화가 그렇게 왔길래, 제가 O형인데요. 제가 가서 헌혈하겠습니다, 하고 갔는데.... 어르신께는 의미가 크셨나 봐. 아무에게나 피를 주는 게 아닌데, 하시면서 그러시더라고. 어이쿠, 참. 우리가 이사했으면 어쩌실려고....' 남편 목소리와 얼굴에 발그레 생기가 돈다. '멸치가 참 좋다. 멸치 필요했는데' 하며 살짝 오버 하면 반겼더니 더욱 의기양양해져 테일한 설명이 길어진다. (순진한 사람 ㅋㅋ) 많은 양의 멸치를 보자 멸치볶음을 몹시도 애정하는 모 군이 떠올라 바로 덜어 지퍼백에 담았다. 밑반찬은 해는대로 동이 나는, 돼지 세 마리 키우는 동생네 몫도 챙겨 담았다. 넉넉하게 담으며 마음이 풍성해진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사인을 할 때 '보잘것없어 거룩하고 가난하여 부요한 우리의 일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러나 굳이 거룩하기 위해 늘 보잘 것 없거나 항상 가난할 필요가 있겠는가. 넉넉하게 나눌 것이 있는 풍성한 일상의 위안이 이러한데! 무력한 목회자이지만 급하게 나줘 줄 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이웃과 넉넉히 나눌 멸치 떼가 들이닥치니 이래저래 생기, 생명의 기운이다.


차 안에 들이닥친 찬란한 햇빛과 어쩌다 울려 퍼진 노래는 뜬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생기, 생명의 기운, 창조의 생기는 이미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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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기독교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로 나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책 관련 프로그램에 저자와의 만남 같은 것이었습니다. 9월 즈음에 약속이 되었고 지난 화요일이었죠. 전날에도 담당 작가로부터 연락이 없어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라디오인데다 방송 시간도 짧으니 방송 전에 입을 맞추려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 쪽으로 섭외가 된 것이라 진즉에 받은 공문도 있어서 당일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주차를 하고 공문에 있는 전화로 연락을 했으나 딱히 방송국 담당자가 아닌 것 같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헤매다 지나가는 분께 물어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프로그램은 프리랜서 아나운서 분이 작가 겸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방식이었는데 통화를 해보니 지금 부산에 계시다고! 녹음 시간이 확정될 때까지 출판사 본부장님과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았고, 일시가 명시된 공문을 받았으니 확실하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담당 아나운서가 제 번호를 잘못 입력할 탓에 통화를 시도 했으나 안 되었다고 하고요. 친절한 직원 한 분(제 가방에 달린 노란리본으로 바로 공감대 형성이 되었습니다)이 아나운서께 전화 연락도 해주고, 배웅도 나오면서 '다시 연락되어 꼭 나오시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실은 제가 마음이 상해서 다시 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하고 나왔습니다.


출판사 본부장님께 상황을 알리고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청취자 증정용으로 보낸 책(나의 성소 싱크대 앞) 몇 권을 꼭 회수해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어버버버 하면서 방송국 입구를 헤매던 나처럼 갈 곳 잃은 내 책들이 방송국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까, 그것이 싫어서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 연결자인 출판협회 사무국장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방송국 담당자인 줄 알고 내가 전화했던 분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사과하시고 담당 아나운서 분도 무척 미안해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상황 알겠지만 다시 방송에 나가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마음 푸시고 다시 시간 잡으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담당 아나운서가 계속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로 확고해졌습니다. 단지 삐져서 안 나가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길게 설명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제게 말했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너를 함부로 사용하지 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순서에 역행하는 거야" 


실은 방송국에서 나와 주차장까지 걸으며, 운전하고 나오면서 화가 난다기 보다는 슬펐습니다. 슬픔을 가장한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있는데 존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나운서는 일처리에 실수했을 지언정 나라는 존재를 함부로 대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어중간하게 알려진 작가로서 괜한 피해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다 밝히기 어렵지만 더 고질적인 쓴뿌리도 있습니다. 물론 맡은 일을 꼼꼼히,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은 이미 이웃에 대한 존중인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해, 고마워 백 마디 말보다 약속을 지켜 일을 챙기는 동료가 진짜 배려심의 사람일 수 있고요. 가족적인 분위기로 기분 내키는대로 비싼 밥 사주는 사장보다  합리적인 월급을 제때 챙겨주는 사장이 직원의 자존감에 더 기여할 거구요. 저도 남부럽지 않은 헐랭이로서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반성하곤 합니다. 내 작은 실수가 누군가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생각이 여기 미치면 더욱 슬퍼집니다. 실수를 실수로 받지 못하는 우리들의 상처난 마음. 아니, 제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가사처럼요.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딪히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든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운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그러게요. 그저 늘 부는 바람이 지나갔을 뿐인데, 그 바람에 내 마음의 가시들이 흔들려 서로 찌르고 울어댑니다. '나를 해하려 하는 거야,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나를 싫어하는 거야'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이 집에 와 채윤이에게 터져버렸습니다. 농담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분노 폭발하는 엄마에 당황한 채윤이. 채윤이를 희생양 삼아 감정의 에너지가 한 김 빠져나갔습니다. 조금 평상심을 찾고는 희생양 채윤이에게 사과하고,  희생양을 신부님 삼아 고해성사 했습니다. '엄마가 다시 나가지 않겠다고 한 거 잘한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허허 하고 이해하는 척 할 수도 있었거든. 그러면 좋은 사람 같아 보이잖아. 처음엔 좋은 사람, 나이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던 것 같아. 그래도 작가라 불리며 조금은 알려진 사람인데.... 그렇게 마음이 복잡했었던 거야.' 채윤이도 '착한 애 코스프레'에 지쳐서 요즘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얘길 했습니다. 모녀 함께 훈훈, 지질한 결론을 냅니다. '어쩌겠어. 착하지 않은데..... 그래도 착하지 않은 나를 내가 편들어 줘야지.' 저녁에 아나운서 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시고 다음에 꼭 다시 나오시면 좋겠다, 했습니다.  방송에 나가진 않겠지만 마음이 안 풀린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어디서 만나든 좋은 마음으로 볼 수 있다고요. 이 얘기를 들은 친구가 농담으로 '갑질 했네'라고 했지만 진심 갑질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다시 출연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편해졌지만 지질한 나의 곁을 내가 끝까지 지키줘야지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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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다녀온 채윤이가 코가 빨개가지고 '엄마, 디게 추워. 살을 에이는 추위야!' 하기에 차를 타고 나갈까 싶었지만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다. 대신 옷을 든든히 입고 모자와 장갑까지 챙겼다. 약속 장소를 화력발전소 앞 B카페로 잡았다. 강변 길을 통해 절두산 성지로 가 기도의 길을 걸은 다음 대림절 초를 사야지. 내처 걸어서 상수동 M 커피 로스팅 가게에 들러 원두를 사야겠다. 그러고나면 걷는 거리, 시간을 계산하여 B카페가 딱이다. 강변을 걷다보니 이곳에 이사 와 처음 강변에 나갔던 그날이 생각난다. 오늘과 똑같은 복장이었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이삿짐이 대충 정리되었고, 동네는 낯설고, 날씨는 추웠다. 심심해 심심달, 하면서 빈둥거리는 현승이를 꼬여서 나갔었다. 이 을씨년스러운 동네가 아주 조금 예뻐 보인 첫날이기도 했다. 한강과 강변 길이 있어서 지난 5년의 삶이 얼마나 윤택했던가! 최고의 코스, 나만의 걷기 코스는 강변을 통해 절두산 성지 찍고, 상수동까지 걸어가 M 로스팅 가게에 들르는 것이다.



마음이 뻥 뚫려서 오갈 곳을 알지 못하는 날에 절두산 성지를 향한다. 가끔은 언어를 잃은 기도를, 소리없는 분노의 외침을 담고 걷는다. 가라앉거나 폭풍 치는 마음이 제자리를 찾곤 하는 곳은 기도초가 있는 곳이다. 값싼 양초가 활활 타오르고, 그 앞 긴 나무 의자에 앉거나 서서 묵주를 돌리며 기도 드리는 여인들을 보면 속에서부터 싸한 아픔이 올라온다. 기도제목도 알 수 없는 그들의 기도에 내 마음을 합하고, 흔들리는 수많은 기도초 앞에 나를 세운다.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는 저 기도들이 결코 쉽게 응답되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오히려 겸허해진다. 나오는 길엔 성지 입구에 있는 서점에 들러 책이나 액자 같은 것을 만지작거린다.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니께 드릴 책을 샀다. 그리고 대림초를 샀다. 그 다음 코스가 상수동 M 가게. 최고로 맛있는 로스팅은 아니지만 넉넉하게 주는 마음, 얼굴을 기억해주는 것이 좋아서 아끼는 집이다. 커피 공장 같은 곳이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로스팅 기계, 초콜릿 만드는 기계로 사람을 부르려면 유리창을 두드리고, 저기요! 여기요!를 여러 번 외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사하면 제일 아쉬울 곳이 절두산과 M 가게이지 싶다.



B카페를 처음 알았을 때는 인생 카페가 될 줄 알았다. 하도 많아 책꽂이에 다 꽂히지도 못하고 쌓인 시집이며 소설을 보면 주인의 독서 내공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출입문에 붙은 노란리본이며, 카페 트위터에 올라오는 사색적인 글은 정말이지 있어 보인다. 합정 시절 초기에는 주로 여기서 원두를 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리 다녀도 정이 붙질 않았다. 주인 아저씨가 문학을 애정하시느라 사람에 별 관심이 없나 싶었다(이런 건 사실 좀 매력적인 것). 언젠가 블로그에서 뒷담화 한 기억이 있는데. 원두 사러 갔는데 저울에 원두 달면서 조금 넘쳤는지 몇 알을 다시 꺼내는 걸 보고는 정이 뚝 떨어져버렸다. 낯가림이 심한 건 오히려 매력이라 여겨서 먼저 인사하는 법도 없고, 자주 커피를 사러 가도 아는 척 해주는 법 없는 것도 괜찮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괜찮지가 않았었다. (커피 몇 알에 빈정 상해서 ㅋㅋ) 부침개 부쳐 지인과 막걸리 마시다 커피 내려주던 것도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커피 로스팅은 늘 조금씩 과했던 것도 같고. 그냥 아웃시키는 걸로! 아무튼 문학이든 신앙이든 개혁이든 무엇이든 맹목이 되고, 충천한 자의식이 되는 건 치명적이다. 그런 B카페인데 오늘 약속 장소를 여기로 했다. 순전히 동선 때문이다.


양화진이 아니라 절두산 성지를 성스럽게 여기든, B카페가 아니라 M가게를 애정하든 내 취향이다. 아무도 모르는 내 취향이다. 누군가 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내 취향이다. '존중입니다. 취향 부탁이요' 이런 강렬한 부탁의 말이 있지만 세상 그 누구가 타인의 (것이기에 사소한) 취향 따위를 존중할 것인가. 모두 자신의 존중을 취향할 뿐이다. 시집을 모으고, 멋진 인용문을 날리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카톡 프사에 촛불집회 사진을 올리며 남모르게 어깨를 으쓱인다.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B카페 아저씨는 내 취향에 맞지 않아 아웃당한 걸 알면 꽤나 억울할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다. 내가 주어가 되어 아웃시켰지만 어딘가에선 나도 목적어가 되었었고, 되고 있을 것이다. 어쩌겠나. 각자 자기 취향의 세계에서 자뻑하며 허덕이며 사는 것이 사람일진대. 그래도 가끔 B카페에 간다. 오늘같은 동선에선 B카페가 딱이니까. 취향은 취향일 뿐이니까. 문득 이사 후에 M 가게보다 B 카페가 더 그리워지는 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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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주일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에 구역모임을 위해 커피 도구와 기타를 챙겨 일찍 집을 나섰다. 같은 자리를 오래 지키다 보면 '감'이 생긴다. 오늘은 결석과 지각이 많을 예정이야, 라고 감이 말했다. 구역모임 장소가 제대로 지하실, 컴컴한 지하 1층이다. 모임 공간이 부족하여 교회 주변의 여러 공간을 주일마다 대여하는데, 우리들의 둥지는 가톨릭 관련 건물이다. 깜깜한 지하 1층의 벙커 같은, 성모님(상)이 계신 곳이다. 약간 으스스하고 습한​ 기운을 커피 향으로 맞서보려 한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네, 할렐루야 아~아멘. 노래를 불러서 계단 위쪽까지 커피 향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다. 요새 예수 향기는 커피 향기 아니던가? 커피를 내리고 사람들을 기다리는 시간, 참 좋았다. 성모님상 때문인지, 성화 때문인지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공간의 을씨년스러움이 내 안의 충만함을 이기지 못했다고 하자. 구역원 단톡에 저 사진을 띄우며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썼다. 오는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오지 않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뜻은 없었다. 진심을 담아 커피 한 잔 내려놓고 '당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 마음으로 이미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난 주일, 남편은 교회에 사임 인사를 했다. 벌써 5년이다. 먹고 살 일이 아니라, 믿고 살 일이 캄캄했던 5년 전의 나날이 떠오른다. 먹고 살 걱정보다 믿고 살 걱정에 영혼이 바싹 말라서 슬쩍 밟아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었다. 목회 하지 마라, 당신도 죽고 나도 죽는다. 이런 말을 했었다. 아무 대책없이 하남시에 집만 떡허니 구해놓은 상태로 20여 년 다닌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 농담처럼 '*** 목사님 교회에 부교역자로 간다면 나는 동의함!' 했던 얘기가 씨가 되었는지 *** 목사님의 교회에 극적으로 오게 되었다. 부임하여 들은 충격적인 몇 마디는 아직도 내 마음에 살아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결혼식, 장례식을 집도하고 목사님이 따로 감사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받을 경우 바로 사임입니다'라고 신임 교역자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었다는 얘기. 또 하나는 목회자 부부 송년회에서 담임 목사님의 말씀. '부인들 수요예배 나오려고 애쓰지 마세요. 아이들 저녁 챙겨주고 가정을 잘 돌보는 것이 당신들의 역할입니다.' 설교 중 고난주간 특새에 대해 하신 말씀. '교회로부터 20분 이상 걸리는 곳에서 특새 나오려 하지 마십시오. 새벽에 먼 길 운전하며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믿음을 보여주는 척도가 아닙니다. 있는 곳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그 전 한두 해, 죽네 사네 하면서 바싹바싹 말라갔던 내 마음의 숙제를 다 해결해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한 해 두 해가 흘러 다섯 해가 되었다. 그사이 내 주님과 나 사이 오간 수많은 밀어를 공개할 수는 없다. 그분이 얼마나 디테일하게 나를 위로하셨고, 선하고 아름다우며 아픈 길로 이끄셨는지 차마 말할 수 없다. 그 디테일함은 여러분들의 귀에는 유치함일 테니 말이다. 위로도 감동도 배움도, 반면 배움도 '많이 무웃따 아이가' 하는 순간이 왔다. 그 시점, 잠시의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원하고 나서서 구역장을 맡게 되었다.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잔이어서 아버지의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잔을 마시던 올해는 지난 5년, 아니 남편이 사역자가 되면서 패키지로 묶여 살아야했던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상처 받았고 고난 당했다며 괜스레 당당했었다. 그 '근당감(근거 없는 당당한 자신감?)'이 어느 새 근월감(근거 없는 우월감)이 되었다는 것을 직면해야 했다. 아팠고, 부끄러웠지만 1년의 시간을 지내며 알 수 없는 훈기가 마음을 채우고 있다. 상대에게 알아달라고 우기는 진정성이란 이미 진정성이 아님을, 진정한 진정성은 이미 상대에게 가 닿아있는 것임을 배웠다.





소중한 것을 배우는 교실은 주방이었다. 자발적인 시작이 아니었으나 이미 주어진 일, 타발이고 자발이고 할 수 없다. 일단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한 주 한 주 미션 클리어 하면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분열되었던 마음,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내 마음은 그랬다.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만드는 일이기에 말이다. 현학적 사변 같은 것들이 아니라 눈물 흘리며 양파를 썰고,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고기를 볶고, 내 몸집보다 큰 국솥을 씻으면서 서로의 몸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저 풍성하고 아름다운 음식들! 맛있게 먹고 진심으로 서로 감사하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단톡에 올려 낄낄거리고, 많은 짐 진 자에게 특별히 감사하고, 간을 본다는 명목으로 음식을 마구 줏어 먹고, 농담하고 놀리고 낄낄거리고. 이런 시간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꿈꾼다 한들, 운명 같은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한다 한들, 어떤 경우에도 나와 같은 너를 가질 수는 없다. 내 맘 같은 당신은 없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어서 서로에게 고통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 실존인 것 같으나,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한 도마 위에서 같은 칼질로 만날 때, 우리 사이 많은 차이가 지워지고 잠시 하나가 된다. 놀라운 발견이고 경험이었다. 주방에서 배웠다. 구역 주방봉사에서 나이가 나보다 많고 적은 사모님들에게 배웠다.  





오늘 마지막 주방봉사를 했다. 지난 주일 남편이 이미 사임인사를 했기 때문에 봉사하러 나가는 게 조금 민망스럽기도했다. 하지만 어쩐지 나가고 싶었다. 5년의 마무리를 주방에서 하고 싶었다. 남모르는 먹먹함으로 양파를 까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는 오징어볶음과 감자조림 간을 보다 기분이 좋아졌고 맛있게 만들어내고 맛있게 먹고 으쌰으쌰 설거지를 하고 잘 마쳤다. 다시 마음이 먹먹해졌지만.....

5년 전 가을. 스물 여섯 때부터 다녔던, 남편을 만났고 두 아이를 낳았던, 평신도에서 목회자가 되었던, 고향이라는 말도 가벼운 교회를 사임하고 무턱대고 하남 서해 아파트 계약을 했던 날이 있었다. 그날 집을 보러 다니는 동안 뺨을 스쳤던 가을 바람이 기억날 듯 하다. 그때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시간, 나를 기다리던 5년은 이러하였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나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상상을 넘어선다. 상상보다 아름답고, 상상치 못한 아픔이 있기에 나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나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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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째 듣고 있는 '영성과 철학상담'이라는 강의 중 있었던 일이다. 강의와 집단상담으로 진행되는데 집단상담 첫날이었다. '한계상황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K.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으로 배우고 나누는데 내게는 정말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집단상담에서 어느 분이 자신이 경험한 한계상황을 얘기했다. 믿고 존경했던 성직자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 금액은 본인이 30년을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란다. 그분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희망이 있을 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는 내용이었다. 그 성직자가 마음을 돌이켜 나타나줄 것이다,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다, 이런 희망이 온전히 무너진 순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는 얘기. 


분위기가 술렁술렁했다. 어머, 어머, 세상에! 내 옆에 옆에 앉은 나이든 여자분이 내 옆에 앉은 분에게 뭐라뭐라 끊임없이 속삭였다. 속삭임인지 투덜거림인지. 내 자리에선 그분의 눈썹이 보였는데 기본적으로 3단 정도 꺾여 있는, 짙고 강한 눈썹이었다. 얼핏 '신부, 목사, 목사, 신부' 하는 것으로 들렸다. 아, 이 그룹의 멤버는 주로 가톨릭 신자들이다. 강사가 철학과 교수이며 예수회 신부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삼단 눈썹이 자꾸 거슬렸다. 자신의 한계 상황을 고백했던 분의 말이 끝나고 '한계상황과 실존'에 대해 한 말씀을 기다리며 인도하는 신부님을 고양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님 말씀 '아니, 당사자를 찾아가든지, 도망가서 없으면 주교님 찾아가야죠. 가서 신부 못하게 만들어야죠.' 라고 말했다. 한계 상황녀께서 주저주저 말씀하셨다. '아..... 그..... 저는 개신교 신자라..... 신부님이 아니라 모.... 목사님이.....'  그러자 바로 삼단 눈썹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신부님은 그럴 리가 없어. 신부님이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사기를 쳐' 짙은 삼단 눈썹이 씰룩씰룩 요동을 쳤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분은 '나는 딱 듣자마자 목산줄 알았는데요' 한다. 여기저기 그럴 줄 알았다, 그럴 리 없다, 가 릴레이로 터져 나왔다. 


나는 혼자 얼굴이 벌개지고,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부여잡고 소외감도 아닌 분노도 아닌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삼단 눈썹녀가 눈썹으로 말하는 그 소리들이 견딜 수 없었다. 엄마, 아니 남편이 보고싶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이후 시간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쿵쾅쿵쾅 내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렸다. 마지막 발언자는 예수회 수사님이었다.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한계상황은 역시 예수회 입회 직전이었지요'라는 말로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컴퓨터를 좋아했단다. 운이 좋게도(라고 표현했다) 관련 전공으로 대학엘 가고, 쉽게 취업을 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돈 받고 하게 되다니, 행복할 줄 알았단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하는데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더란다. 오히려 공허함이 차올랐다고 했다. 가장 공허했던 순간은 첫월급을 받던 날이었다고.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면서 지냈는데. 어느 날 퇴근하려고 일어서다 건너편에 앉아 일하는 부장님인지 팀장님인지의 뒷모습을 주시하게 되었단다. 그 모습이 10년, 20년 뒤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확들었다고 했다. 


아, 이 공허함을 어디서 채움받을 수 있을까? 하느님께 가면 될까? 피정을 다니곤 했단다. 곡절 끝에 '다행히 아직 결혼도 안했으니 하느님께로 가자' 하고 예수회에 입회를 하고 사제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그런데 이것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었다며, 여기에도 행복은 없다며, 한계상황은 늘 새로움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끌어 가신다는 희망 때문에 행복하다고 훈훈하게 마무리 하였다. 몰입해서 듣다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비약적 희망에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 찰나, 강사 신부님께서 '희망에 대한 회의'라는 말로 뼈 있는 코멘트 하셔서 좋았다.


2주가 다 되어가는 일이다. 내내 이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몰래 파견된) 개신교 대표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낯이 뜨겁도록 (몰래 혼자서) 모욕감을 느껴다. 내가 목사도 아니고, 사기 친 목사는 더더욱 아닌데 말이다. 동일시 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목사와 신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마지막 발언했던 수사님의 얘기를 들으며 '소명 확인, 실존적 고민'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다. 기도해보니 확신이 들었다!' 이런 게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진리를 찾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도자의 몸부림 말이다. 


나도 사기꾼 목사들이 무지 싫다. 내가 몸담은 개신교, 개신교의 목회자들에 대한 환멸로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목회자의 아내이며, 목회자의 딸이고 목회자의 누나이다. 목회자와 나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목사들을 보며 최전선에 서서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실은 추락하는 그들은 나의 교회이며 나 자신이다. 돌을 던지는 측이 아니라 돌을 맞는 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아 혼란스럽다. 이것이 나의 고통스런 실존이다.


남의 집 밥이고 김치라 색다르게 보일 뿐, 우리집 밥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좋은 목사님은 좋고 이상한 목사님은 이상하고, 신부님들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날 그 순간 조용조용 와글와글 '신부님이 그럴 리 없다'는 이견 없는 여론은 참 부러웠다. 그나마 신부님들은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음일까. 구도자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여전히 찾고 구하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다 자신이 예수님인 줄 착각하여 '아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어! 암만. 암만. 그렇고 말고!' 자아팽창과 어리석은 자기확신에 빠진 목회자와 성도들과 교회가 함께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든 목사든 길을 잃은 자가 길을 안내할 수는 없다. 높고 높으신 하나님, God을 찬양하기 전에 god의 이 노래를 함께 불러볼 일이다. 진리를 찾고 따르는 길은 두려움과 떨림, 역설로 가득찬 것 아닌가. 길찾기의 시작은 현위치 설정이니 지오디의 노래 <길>, 이 가사 만큼만이라도 정직하게 우리의 실존을 마주하려 한다면....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 명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오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우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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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아주 많은 일을 했다. 밤 10시,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려고 종로 5가를 걷다 문득 깨달았다. 불금이구나! 인도를 걷는 사람 중에 제정상(채윤이적 표현. 제정신과 정상을 콜라보하여 의미 그 이상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반지성적 언어표현 말이다. )인 분이 거의 없었고, 동문회를 마쳤는지 인도에 동그랗게 서서 비틀비틀 교가를 불러대는 아저씨들을 보고 확신했다. 불금이야. 불금! 종로와 광화문, 신촌과 홍대를 지나는 동안 막히는 도로, 비틀거리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며 확신은 광신이 되었다. 불금, 불금입니다. 제게도 화끈한 불금을 내려 주~우쒸옵소서! 같은 시간 10시 쯤, 용인에서 차로 출발한 남편이 서강대교를 지날 즈음 나는 합정동에서 하차했다. 도착 시간이 딱 맞아 골목에서 남편 차에 픽업당했다. 오빠, 달려! 이대로 달리자구! 나도 이 남자와 함께 불금을 보내고 싶...... 지만 하루 종일 심방을 하고 들어온 남편은 빨리 자고 내일 새벽기도 나가야 하는 것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은 것 같다. 그래, 더 이상 이런 걸로 삐치진 않기로 했다. 남편도, 꼬치너 채윤이도, 정신줄을 놨다 잡았다 하는 사춘기 현승이도 잠든 밤. 사실 내가 바라던 불금이다. 나는 오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방식의 불금을 보낼 것이다.


그러자 나는 오늘 갑자기 풀타임 근무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금요일 밤에는 '앗싸, 내일 늦잠!' 하는 마음으로 자정을 넘기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싸이 클럽에 밀린 글도 쓰고, 댓글 놀이도 하고, 좋은 글도 읽고..... 아, 컴퓨터 책상과 옷걸이 하나로 꽉 찼던, 하남 그 좁은 빌라의 벙커 같았던 방! 그것이 나의 불타는 금요일이었다. (아, 물론 잠탱이 남편은 토요일의 늦잠을 기대하며..... 이미 잠들어 있었다) 채윤이는 아기였고 우리 셋은 행복했고, 행복했던 어느 날 기쁨이라는 현승이가 생겼고, 우리 넷은 행복했다. 풀타임의 직장맘 생활이 어렵지 않았던 것은 초기에는 우리 엄마가, 엄마의 허리가 무너져내린 후에는 (시)아버님께서 채윤이를 돌봐주셨기 때문이었고, 나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치료사라는 직업도 생소했던 시절, 풀타임 음악치료사로 일하던 나는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니! 이게 가능하다니! 그 감동의 회사 식당을 떠올리다..... 나는 오늘 (급기야) 내가 좋아하는 일과 돈에 관한 개인신화적인 고찰을 하기에 이르른다.


이번 한 주는 조금 유난한 일주일이었다. 나는 오늘 이 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지난 며칠을 돌아본다. 일단 어제 목요일에 구몬 선생님들에게 미취학 아동들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적은 있지만 이렇듯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받은 일은 없었다. 말하자면 아이들과 말이 안 통하고, 돌발행동에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겠으니, 또 학부모 상담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니, 노하우를 전수해달라는 것이었다. 강의에 참고하라며 보내온 수업 동영상을 보다가는, 돕고 싶은 오지랖 에너지가 충천했다. 그리하여 몹시 힘들었지만 행복한 힘듦을 통해 강의를 준비했고, 아..... 쫌 (자랑인데) 강의를 잘한 것 같다. 마치고 오후에 담당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강하신 선생님들의 뜨거운(!!^^) 반응을 전하시며 오히려 본인이 많이 배우고 감동 받았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나 뭐라나. (먼산) 중간에서 나를 소개한 친구에게도 또 전화가 왔다. "신실아, 너 오늘 히트였다며? 바로 전화 왔더라.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고. 한 시간을 너무 알차게 준비했는데 강사료가 적다고 너무 미안하대. 그래서 내가 괜찮다고 했어. 내 친구가 나한테 빚진 것이 있으니 괜찮다고. 너는 이런 일이 맞나봐. 그치? 호호호"


이 친구가 말하는 빚이란 이것이다. 한 2년 쯤 전의 일이다. 대학 동창인 이 친구는 전공을 가장 잘 살린 친구 중 하나이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딸 수 있는 어린이집 원장 자격이 난무하는 보육 생태계에서 전공자의 자부심으로 제대로 어린이집을 운영하여 성공했고, 정치력이 아니라 실력을 인정받아 어린이집 연합회 회장을 했고, 나중엔 어린이집 평가인증(이라는 국가 차원의 인증 시스템)을 맡아 평가하는 엄청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친구이다. 가끔 대학 보육과에서 겸임교수 뽑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내게 연결시켜주고 싶어 했었다. 한 2년 전 쯤에는 정말 괜찮은 시립 어린이집 원장 자리가 났는데 대학 위탁 운영이라서 더 메리트가 있었다. 이 친구가 그 자리에 나를 추천했고, 친구의 덕망 덕에 내가 오케이 하면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알고 보니 그 자리는 그 바닥에선 치열한 자리, 쉽게 얻을 수 없는 왕좌였다. 그런 사정은 몰랐지만 일단 오케이를 했었다. 드디어 경제적 안정이란 걸 누릴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 나 혼자서 찾은 이 시대 교회의 답이라 여겼던 목회자의 자비량 목회, 남편에게 그 기회를 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결국 한 여름 밤의 꿈!이 되었다. 밥이 다 된 그 자리에 셀프로 재를 뿌리고 도망쳐 나왔다. '저, 이거 못하겠어요' 하고 나와버린 것이다. 진짜, 아주 많이 부끄러웠다. 바보같은 나를 확인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다른 선택은 없었으나.... 진실을 고백하자면 이렇다. 그 자리로 가야할 명확한 이유가 백 개인데 내키지 않는 이유 서너 개. 그 서너 개조차도 다 허접했다. 그 중 더욱 설득력 없는 이유는 이런 것. 오래 준비했던 에니어그램 2단계 강의를 론칭하는 날과 어린이집 원장이 되는 중요한 절차가 딱 맞물려 있었다. 수강 인원이 몇 명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폐강이 될 수도 있었던 그 2단계 첫 강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직원이 30여 명인 공립 어린이집 원장 자리를 거절한 이유치고는 허접한 줄 안다. 당시 여기저기서 '미쳤다'는 논평은 들을 만큼 들었으니 이제 이 얘긴 패쓰.

친구가 말하는 빚이란 이것이다. 결정이 다된 상태에서 갑자기 뒤집어진 탓에 난처해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중간에 끼인 친구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었다. 친구는 그 때문에 내가 (강사료도 적은 이) 강의를 수락한 줄 알고 생각하나? 그건 아니다. 내가 강의를 수락하거나 거절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내가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고, 말하기 좋아하는 주제인가' 이에 부합하는가. 부합한다면 새로이 강의안을 만들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도 감수할 수 있다.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강의로 얻어질 유익이 커도 (속으로 피를 흘릴지언정) 단칼에 거절하려고 한다. 헌데 소통, 그것도 유아들과의 소통이라니 내 전공에 부합할 뿐 아니라 (감히)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 관심 주제이다. 때문에 강의 준비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 쏟았지만, 강사료가 적은 줄도 알고 있었지만, 화상으로 영어수업하는 선생님들이라는 특수한 대상이라 다시 써먹을 곳도 없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많은 시간을 들여 고심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결과도 크게는 상관없다, 고 생각했는데 좋았다는 피드백에 급 기분이 업되었다. 내가 좋았고, 들은 사람이 좋았다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나다움' 관한 이야기이다.

공교롭게도 이 강의를 마친 날, 나는 이번 가을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 2단계, 심화과정을 모두 폐강하기로 했다. 수강인원 모집이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더욱 애를 쓸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니어그램 강의는 애써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아하는 강의이지만 평안한 마음으로 폐강을 결정했다. 신청 링크를 막자마자 문의 전화 두 통이 와서 '이건 뭐지?' 싶었지만 그래도 폐강이다. 전 같으면 '페강'은 곧 강사가 '폐인'이라는 뜻이야! 하면서 실패감에 빠졌을텐데. 겉으로는 쿨하게 폐강하되 내 탓은 아니라는 핑계를 백만 개 짜냈을 텐데. 기쁘게 폐강한다. (셀프 토닥토닥) 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외적인 무엇을 이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답게 사는 것이 관건이기까.

라고 간지나게 글을 맺고 싶었지만. 나는 사실 이번 주에 늘 짓는 죄를 반복해서 지었다. 죄목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다. 강의 준비가 힘들지만 깊은 차원에서 즐겁고. 즐겁지만 또 인생 쉽게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는 지점에서 줄타기 하는 중에 채윤이의 어텍이 들어왔다. 청소년 백수 채윤이가 제 방에서 처벅처벅 걸어 나와서는 '엄마, 오늘 뭐해?' 이러면 바로 뚜껑이 열렸다. '엄마 강의 준비 하는 거 안 보여? @%$$&^#@#$!@#%#^$' 그런 몇 번의 질문과 열폭이 반복되다 급기야 '뷀에에엑!!!!!! 엄마가 집에 있다고 노는 걸로 보여? 출근했다고 생각해. 엄마는 집에 있다고 노는 게 아니야. 강의 준비도 해야하고, 써야할 글도 있어. (확인사살의 의미로 다시 한 번) 뷀~~~~~~에에엑!' 청소년 백수생활 9개월에 정말 정말 심심해진 채윤이와 여유있게 수다를 떨거나 놀아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교회 주방봉사를 마치고 저녁 강의 들으러 가기 전에 채윤이와 데이트를 했다. 다음 주 꽃친 제주 여행을 위한 쇼핑을 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만천 원어치나 사가지고 집에 와서 수다 떨며 먹었다. 며칠 우울했던 채윤이가 급 '조증' 증상을 보인다. 내 죄다. 내 죄다. 내 죄값이다! 나답게 살기는 개뿔, 엄마 노릇이나 제대로 하시지. 라며 나는 오늘 불금의 기나긴 일기를 쌩뚱맞은 결론으로 맺으려고 했는데.

아, 마지막으로 나는 오늘 내 블로그 일일 방문자 수가 1000이 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 달 <나자연> 칼럼을 꽃친의 예지 쌤 결혼식을 모티브로 썼는데. 그른데.... 어제 올렸던 그 글을 예지 쌤이 페북으로 공유하자 오늘(그러니까 사실 어제 23일) 블로그 일일 방문자 수가 1000을 넘었다. 블로그 오픈 이후 최다 방문자 수가 아닐까싶다. 숫자의 크기가 대수는 아니지만(아, 1000은 大數구나. 그렇구나) 암튼, 놀라운 일이다. 나는 오늘 이렇듯 참말로 뜨거운 불타는 금요일을 혼자 보내고 있다. 나는 오늘 참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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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늙은 날  (6) 2016.06.14



자타가 공인하는 필기의 여왕이다. 정직하게 돌아보니 '여왕'이 다 뭐야. 여왕 그 이상, 거의 필기 중독에 가깝다. 이번 학기에는 두 개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어디서? 무림에서) 노트북은 머스트해브아이템이다. 강의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받아 쳐와서는 제목 달고, 글자 색깔 바꿔서 강조하고, 나중에 글이나 강의에 써먹을 것 따로 카피해서 모으는 게 일이다. 강박적으로 필기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여름 초입에 들었던 어느 강의에서는 뒤에 앉아셨던 수녀님이 몇 주를 지켜보다 어렵게 말씀하셨다. '저..... 정말 죄송한데..... 필기하시는 거 이메일로 좀 주실 수 없어요. 나도 너무 너무 좋아서 다 받아적고 싶은데 그게 어려워요' 얼씨구나 좋다고 보내드렸다. (내 중독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노트 드려요~)


이번 주에는 유아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구몬 선생님들에게 강의하는 일이 있다. 강의 주제는 '수업 중 아이들의 돌발행동에 대처하는 방법' 캬캬. 유아들이 수업 중에 하는 돌발행동이 너무 많단다.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의해달라고 하였다. (유아들의 행동 중 돌발행동이 아닌 것이 어딨어요?그 맛에 유아교사 하는 건데.ㅎㅎㅎㅎ) 아무튼 이 강의 준비하려고 행동주의에 대해 정리하다 대학원 시절 노트를 꺼내 보았다. 완전 셀프감탄! 감동! 이렇게 깔끔하고 정성스러운 노트정리라니. (노출본능 발동. 사진 찍어, 찍어, 찍어. 만방에 알리지 않을 수 없따!) 강의 시간에는 연습장에 거의 속기수준으로 받아 적고 집에 와서 다시 저렇게 노트에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그 자체가 복습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렇게 늘 우수한 성적이었군요) 대학원 시절 응용행동분석, 즉 행동주의에 관한 한 달달 외우고 섭렵했었다. 내가 배운 음악치료가 행동주의를 이론적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내 몸에 착착 붙는 이론이었다.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행동주의의 인간관이다. 가장 고전적인 실험이 파블로프의 개 실험 아닌가. (개실험! ㅎㅎ)  쉽게 말하면 원하는 행동을 했을 때 우쭈쭈쭈로 강화시키고, 원치 않는 행동을 감소시키는 전략을 찾는 것이다. 대학원 시절이나 음악치료사 초년병 시절, 회의 없이 잘 활용하였다. 장애 비장애 할 것 없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주 잘 먹히는 상담 전략이기도 하다. 헌데, 임상이 쌓여갈수록 기본적인 철학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자극과 행동, 그 이상의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마음에 커지면서 행동주의식 접근의 음악치료가 재미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기술로 쓸지언정 철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세 살 어린 아이라도, 중한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나와 다를 것 없는 무엇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경험 자체로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학습된 것이고 후속 자극의 체계적인 조작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게 되었다. 음악치료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강의요청을 받고 시간을 두고 숙고하면서 어린 아이들에게는 행동주의식 강화, 즉각적인 강화가 필요하고 효과적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대학원 시절 치료 혹독하리만큼  훈련받은 것이 지금 내게 얼마나 큰 자산이 되고 있는가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아이들의 일상 자체인 돌발행동에 즉각적으로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도 역시 그 시절 실습 때마다 받은 수퍼바이저의 지적질 덕분이다. 강의에서 해야할 얘기가 이것이구나 싶어 그 시절 노트를 꺼냈다가 '추억은 방울방울' 놀이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필기 중독자인 나를 다시 발견하고, 정말 하고싶은 공부를 만나서 난생 처음 공부의 맛을 알았던 순간들, 내 인생 가장 잊지 못할 대학원 합격을 확인해주던 전화 통화. '이것이 사는 것의 전부일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정말 좋아하는 일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 간절함을 포기하지 않을 때 전에 없던 학과가 생기고, 상상하지 못했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을 확인했던 시절.


그러고 보니 버릴 것이 없다. 깨알같이 필기하고 외우고 발표하고 치료에 적용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것이라 여겼던 것들. 저급한 인간관이라 하찮게 여겼던 행동주의 심리학이 새롭게 다가오고 당장 이번 주 강의의 뼈대를 잡아주니 말이다. 그나저나 추억은 방울방울 놀이에 블로그 놀이까지, 오전을 다 보냈으니 강의 준비는 언제 하나? 에잇, 괜찮다. 노는 시간이 꼭 버리는 시간은 아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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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어린이 성가대 지휘 하던 젊은 날이 있었다. 주일 아침 6시 30분에 집에서 나가곤 했다. 심지어 전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청년부 주보를 만들고 저녁에 청년부 예배 드리고 귀가 시간은 밤 11시 이후. 현승이 서너 살 즈음엔 1부 성가대 지휘를 했는데 기저귀 가방 챙겨 두 아이 데리고 아침 7시에 출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에 대한 보상인지, 반대급부인지 한 동안 이보다 여유로울 수 없는 주일 오전을 보냈다. 강의가 있는 주일이 아니라면 바쁠 것 없는, 할 일 없는 안식의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올해는 주일 아침이 다시 분주해졌다. 7시 전에 일어나 성경공부 교안을 점검을 하고 기타 메고 핸드드립 세트 들고 8시 넘으면 출근 한다. 구역모임이다. 나 구역장이다. 다들 한 믿음, 한 신념, 한 영빨 하시는 목회자 부인들의 구역모임이다.

 

내가 구역장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단 사모님들 중에 나는 바쁜 축에 드는 사람이었고, 주일에는 다른 교회 청년부 강의 가는 날이 많았으니까. 어쩌다 자원해서 구역장을 하게 되었다. 이냐시오 성인은 마음의 움직임을 황폐함(desolation)/위안(consolation)으로 구별하며 자신의 마음 상태를 깨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황폐함의 상태는 그 자체로 합당할 수 있지만(불의를 보고 분노하거나, 개인적인 실패로 낙담하거나....) 그런 상태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삼가도록 권한다. 구역장을 하겠다고 거의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발설했을 때 내 마음은 황폐함이었다. 이냐시오 님의 말씀을 기억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한 결정으로 엄청난 심적 후폭풍을 맞았다. 다행히 폭풍 속에서 살아남았다.

 

폭풍이 지나고 고요해지자 꿈이 말을 걸어왔다. 내 안에 계신 '사랑'이라 이름하는 그분이 꿈으로 톡을 보내오셨다고 하자. 교회 밖에서 강의하고 상담할 때 사모님들을 만나면 일단 손부터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는 이런 저런 그럴 듯한 이유를 (나 자신에게) 대면서 '사모'로 만나는 만남을 피해왔다. 그렇다고 개인적 만남조차 피하지는 않았다. 사모 페르소나가 유연한 사모님들과는 나이 불문하고 마음 통하는 참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하였다. 주중에 있는 구역모임에는 시간이 안 되어 나갈 수도 없었지만 일단 마음을 내보내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100개는 있었고, 그 이유는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꿈이 말했다. 시간이 지나며 문제의 핵심은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 하고 싶었는 나의 높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내 말을 왜곡하고 내 진정성을 몰라주는 '그들'이 아니라 '나'의 진정성 그 자체를 점검해봐야 한다고.

 

올해 한 번 두 번 구역모임을 진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 조금씩 믿음이 있고, 조금씩 상처를 받았고, 조금씩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방어벽을 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끄러웠다. '나는 타교회 목사님 사모님들 대상으로 강의하는 여자'라는 자의식으로 내 곁의 동료들보다 우월한 존재라 여겼던 것이 많이 부끄럽다. 함께 구역모임을 하고, 주방봉사를 하고, 양파 까며 눈물을 흘리고, 지쳐 소진한 몸으로 마지막 국솥을 닦으며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 나도 사람, 당신도 사람! 우리는 다르지 않은 그러나 고유한 어떤 소중한 각각의 존재라는 것을. 

 

미안하다! 줄 수 있는 것은 커피와 음악 밖에 읎다! ^^ 매주일 구역모임에 핸드드립 커피를 준비하고 찬양 한 곡을 위해 기타를 싸들고 간다. 초딩 몸매에 주렁주렁 달린 짐이 자연스럽지는 않아서 괜시리 민망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모임이 거듭되며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이 생긴다. '아, 커피향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네' 이런 반응 참 좋아한다. 좋은 내색은 못하고 콧구멍만 벌렁벌렁. 지난 주일 모임에서는 첫 찬양을 부른 후 '아, 나 이 찬양 좋아하는데' 이런 말로 시작해서 떠오르는 찬양이 한 곡 씩 나오고, 악보 검색해서 바로 단톡에 올리고. 한 곡이 두 곡 되고, 복음성가가 어린이 찬양되고, 어린이 찬양이 찬송가 되어 한 시간 내내 찬양을 했다. 구역 성경공부 패스. 즉석 찬양 집회!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내 또래 음악 좋아하는 교회 오빠 언니들 모아서 모닥불 피워놓고 둘러앉아 끝없이 찬양하는 그런 꿈 말이다. 그 꿈이 비슷하게 실현되었다. 한 가지 아쉽운 것이 있다면 기타를 김종필이 잡았어야 하는데 기타 반주가 느무 촌스러웠다는 것.

 

그렇게 급조된 찬양집회를 마치고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 말씀 중 '신앙인이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라 하신다. 르완다 내전의 대학살을 추모하는 어느 성당에 써 있다는 글귀를 읽어주셨다. '네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면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당신이 나와 같은 사람이란 걸 안다면,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허튼 우월감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존재임을 안다면. 우리가 서로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안다면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그걸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살을 부대껴야 하고, 아프고 두려운 속내를 드러내야 하고, 손을 맞잡아야 한다. 너와 내가 동일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마음을 열고 몸을 부대끼며 소통할 때이다. 이번 주에도 주방봉사가 있다. 처음엔 막막하고 피하고 싶었던 일로 다가왔는데 어느 새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똑같은 장화를 신고, 같은 앞치마를 하고 척척 일을 해내는 우.리.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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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내 생애 가장 늙은 몸을 살았다.

(오늘 내 몸은 내 생애 가장 늙은 몸이라고 꽃친의 J아빠가 알려주셨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오늘 내 생애 가장 늙은 몸, 노구를 하고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냈다.


한때 존경했을 뿐 아니라 젊은 날의 내게 푯대가 되었던 어느 분, 

그러나 이제 존경 대신 연민이며 푯대 대신 반면교사가 되어가는 분의

짧은 글을 읽고 마음이 헤집어진 날이다.

(그분도 생애 가장 연로하신 날 하루를 사시며 고생이 많으신 것이지)

인천의 어느 교회에서 진행하는 3주간의 부모교육 강의 첫날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살짝 너덜거리는 상태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행사 진행을 맡으신 S(멋지게도 여성) 목사님께서 환하게 맞아주셨다.

내 책을 정말 잘 읽으셨으며, 주변에 많이 소개했노라 하셨다.

진심이 전해져왔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앉았는데 속에서 불끈 힘이 솟아났다.

너덜너덜해진 마음 예쁘게 박음질 되는 느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 중간 잠시 쉬는 시간.

한 분이 앞으로 바람같이 나오셔서 코팅된 하트 하나와 쵸콜릿을 두고 가신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실물이 더 예쁘다' 하시며

주황색 하트에 그려진 내 얼굴을 건네 주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미리 이런 준비를 다?

가슴이 콩닥거리도록 고마웠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위로라든가 격려 같은 것들은 가끔 이렇듯 기습적으로 몰려온다.


강의 마치고 S 목사님의 전도로 내 책을 읽으신 후 

에니어그램 세미나까지 오셨던 사모님과,

그 사모님의 베프 사모님들과 함께 '사모들의 수다수다'에 점심을 곁들였다.

(여기까지도 하루 일기 분량으로 충분)


(여기서부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같은 날 저녁 이야기)

꽃친 부모모임이 있는 날이었고,

참 좋아하던 꽃치너 H네가 미국으로 가게 되어 송별모임이 되는 날이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준비하겠노라고 큰소리 떵떵 쳐놓았었다.

(딴에는) 능수능란하게 핸드드립 세트를 챙기고 커피도 고이 갈아 준비했다.

보람차게도 대표님을 도와 저녁식사를 테이크아웃하고 모임 장소로 갔다.

자자, 이제 저의 핸드드립 커피를 기대하시라구요!

그렇지, 그래야 정신실이지.

드리퍼, 드립서버, 포트, 예쁘게 간 원두...... 어...... 어....... 여....... 여.......

여과지가 없다. 마지막에 챙긴 여과지는 아직 우리집 식탁에 계신 것인가.

여과지는 두고 온 주제에 오전에 했던 강의안 든 파일은 왜 또 가방에 넣어 왔냐고.

그러길래 정신실이라지. 나가서 구해보자!

을지로 입구역. 일단 편의점을 뒤졌다. 여과지를 파는 곳은 없다.

카페에 가서 구걸을 하자. 구걸할 태세를 갖췄으나 핸드드립 카페가 없다.

가까운 다이소를 검색했다. 명동이다. 다녀올 만 하다.

티맵을 켜고 을지로입구 사거리 한복판에서 입 헤 벌리고 서 있기 15분.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이 감각 설정하는데 최소 15분 소요. 

뉴욕도 아니고 파리도 아닌데. ㅠㅠ 아, 저, 저쪽이다.

중국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명동 거리에서 중국 관광객보다 더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지도 들여다보며 헤맨다. 겨우 겨우 도착이다! 없다. 다이소가 없다.

지도에 보니 근처에 하모니 마트. 여기라면 있을 거다. 가 보자.

헐, 영성강의 들으러 뻔질나게 다니던 길의 익숙한 마트이다.

부모모임 장소에서 곧장 왔으면 벌써 와서 사고 돌아가서 커피를 내렸을 시간이다.

샀다. 그래도 샀다. 모임 시작 40분이 지났으나 여과지를손에 넣었다.

성취감에 취해 꼭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툭툭 차거운게 볼을 때린다. 기쁨의 눈물이 나도 모르게 나와 내 볼을 치는구나,

가 아니라 이것은 비. 한 방울 두 방울 굵어진다.

이 상태로 비까지 쫄딱 맞으면 더 극적이겠으나 드라마에는 취미가 없으니.

뛰자! 명동에서 시청 쪽 모임 장소까지 뛴다.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간다.

숨이 자꾸 멎는다. 레이레이레이레이.... 으르렁으르렁 으르렁 대. 

지나가던 중국인 1, 중국인 2, 중국인 3과 계속 부딪히고 난리다.

(오전에 정장 쫙 빼입고 강의하던 나는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땀인지, 빈지, 눈물인지. 그러나 도오착! 컴백 꽃친 부모모임.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듯, 명동 거리 중국인들은 본 적도 없다는 듯

의연한 태도로 커피를 내렸다. 


여과지 대신 강의안을 들고 간 나를 탓하지 않는다.

5분 거리를 25분 돌아가며 명동 바닥을 헤맨 거 속상하지도 않다.

이런 일 한 두 번도 아니고. 

게다가 오늘은 내 생애 가장 늙은 몸과 정신으로 산 날 아닌가.

내 생애 가장 늙은 몸과 정신으로 이 정도면 잘 살았다.


그나저나 주황색 내 얼굴, 적당히 낯설고도 친근하여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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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끔 혈압이 떨어진다. 두통을 잘 모르고 사는데 이유 없이 두통이 오다 속이 메스껍고 어깨부터 목이 뭉치다 시야가 살짝 흐려지기도 한다. 저혈압 증상이다. 얼른 눕는 게 제일이다. 채윤이 데리고 외출하고 돌아와 이런 증상이 와 바로 소파에 누웠다. 무기력하다. 마흔다섯에 나를 낳은 엄마가 나를 설명하는데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몸이 약혀서'이다. 어렸을 적엔 그런 줄 알았는 데 살다 보니 사이즈가 작고 운동은 못 해서 그렇지 약하진 않다. 살면서 몸의 한계를 잘 느껴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요즘 저혈압 증상이 오면 몸의 한계와 바로 따라오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낀다. 누워서 살짝 잠이 들었나보다. 골목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여자 목소리에 잠이 깼다. 아이를 혼내는 소리이다. 박박 거리고 악을 쓴다. 당연히 아이는 운다. 갑자기 온 신경이 일어선다. 잠이 확 깬다. 몹시 기분이 나쁘다. 가슴이 답답하다. 막막하다.


2008년쯤일 것이다. '우리 신실이 몸이 약혀서....' 주문에 딱 맞는 시절이었다. 그때도 일하고 돌아오면 바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오늘처럼 무기력하게 누워야 했다. 당시 남편은 신대원 기숙사 생활 중이었고, 주말부부였다. 까막눈 채윤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지옥의 나날이었다. 몸은 그렇게 남편은 없고, 받아쓰기며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채윤이를 닦달하다 분노폭발 하기 일쑤였다. 골목에 쩌렁쩌렁 울리던 어느 엄마의 목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것은 그때의 내가 살아와서이다. 내 소리도 저렇게 들렸겠다. 윗집에서 뭐라고 했을까? 거의 미친 여자구나. 아이들도 그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 시절을 치유하는 클릭←이런 대화를 한 적도 있다. 위의 사진은 그 즈음 어느 월요일. 천안에 내려간 남편과 통화하던 나를 채윤이가 찍어놓은 것이다. 디카 가지고 놀다 우연히 셔터를 눌렀을 텐데 우리 집 퓰리쳐상 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즈음 몸과 마음이 그렇듯 총체적으로 무너진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 즉, 신앙적, 영적인 문제였고. 알고 보면 정말 사소한 일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 몇 년 전 다니던 교회에서 영적인 목마름이 극에 달한 우리 부부는 교회를 옮길 생각이었다. 가정교회라는 것을 도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목말랐던 것은 공동체였으니까. 눌러앉아서 가정교회의 시작을 열렬히 환영하고 신나는 가정교회 생활을 누렸다. (그때 첫 목짠님이 이 블로그 무플방지 위원 중 수석이신 iami 님과 mary 님!) 세월이 흘러 우리도 목자가 되었다. 신혼부부들과 함께.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했었다. 평신도였던 남편이 신대원에 들어갔다. 목자를 그만해야할 시점이 되었다. 초등부를 맡아 사역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쩐 일인지 목자들의 목자이신 목사님이 차일피일 미루며 전도사와 목자를 겸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는 1부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어서 남편이 천안에서 올라오는 금요일부터 주일 저녁까지 제대로 둘이 눈 한 번 맞춰보지 못한 날도 허다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면 짐을 싸서 천안으로 내려가는 남편. 월요일은 온종일 눈물바람이었다.


가정교회 사역과 관련된 많은 분들이 우리 부부가 목자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며 목사님께 제안하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전임이 될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그때 그 목장 식구들은 내 인생,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걸 계속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는 '가정교회의 성공적인 케이스'로 주목받았고 내부에서는 부작용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파트타임  전도사 따위의 일상을 고려하여 목장을 줄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요일 오후부터 장을 봐서 10 명 이상의 식구들과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밤 12가 넘어야 정리가 끝나곤 했다. 바로 그 즈음 몸도 최악이어서 결국 성대수술도 하고 그랬다. 바로 그때 목사님이 가장 힘없는 파트타임 사역자의 인권을 말없이 짓밟 듯, 나는 가장 연약한 우리 아이들에게 온갖 분노를 쏟아부었다.


돌이켜보면 상식이 아니라는 것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내게, 자발적으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내게 비상식의 굴레를 씌운다는 느낌이었다. 관련하여 다 발설하기도 어려운 무수한 비상식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허울 뒤에 비상식으로 피눈물 흘리는 부교역자 사례야 어디 한둘이겠는가. 전임사역 3년 후에 남편은 목회를 접기로 했다. 접기로 했으나 우연 같은 필연이 위로처럼 들이닥쳐 지금 여기서 또 목사로 살고 있다. 부임하고 첫 새교우 환영회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교회 소개를 하시는데 눈물이 났다. 너무 상식적이어서 눈물이 났다. 첫 교역자 부부 모임에서는 '목회자 부인들 수요예배 나오려고 애쓰지 마라. 아이들 저녁 챙기고 잘 돌보는 것이 사역을 돕는 일이다. 목회자의 가정이 쇼윈도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모델링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이런 상식 말이다. 물론 아쉬운 것도 많다. 아쉬움이 커져 마음이 힘들 때면 '상식이 통하는 게 어디냐'며 상시적인 감사를 연습한다.


지난 3월 목회멘토링 컨퍼런스에서 강의한 이후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온 사모님들이 있다. 블로그나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모님들도 있다. 모두 힘든 삶을 살고 있는데 알고 보면 다 상식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상식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교회, 하나님, 공동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좋은 것들을 표방하고 거기에 도취되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을 하는 듯 사는 분들에게 치명적으로 결여된 상식이라니! 사모님들의 고통은 그 분열적인 환경에서 늘 이중적이다. 그 고상한 가치 앞에서 개인의 고통쯤이야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결국 여전히 아픈 자신을 탓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몸이 아파 버리고, 마음이 고장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모님들에게 당장 벗어나라 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오늘 여기를 살아야 한다. 살면서, 오늘의 아픔을 다루는 것과 더불어 앞으로 더는 상처받지 않을 마음의 힘을 기르는 연습을 동시에 해야 한다. 


갑자기 찾아온 육신의 연약함에 어디선가 들리는 애기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몇 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꺼내서 다시 바라보니 상식보다 못한 신앙의 허울들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 한쪽 눈 가리고 온갖 비상식을 저지르면서도 복음에 합당한 듯 착각하며 살기란 얼마나 쉬운지. 어쩌다 우리들의 교회는 고작 상식이라는 그릇에 복음을 담아 감동을 전하는 수준이 되었나. 어찌됐든 나의 내적여정은 거기로부터 제대로 시작되었다. 찾아도 찾아도 답도 길도 보이지 않아 인간의 내면, 마음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실은 그 풍랑인하여 더 빨리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사투였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아이들이 더 커서 어른 대 어른으로 얘기할 날이 오면 정식으로 사과할 생각이다. 그때 짐승같이 굴던 엄마를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너희들 앞에서 짐승인 줄 확인하고 늘 사람이 되길 꿈꾸고 노력하며 살게 되었다고. 이 고백을 할 때는 조금 더 사람에 가까워지고, 더욱 상식인이 되어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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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거짓말을 못한다.

괜찮아요, 아 정말 괜찮아요, 하는데 벌개진 얼굴, 떨리는 목소리가 다른 말을 한다.

괜찮지 않아요.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는데

그 사람을 피해 돌아서 가고 있다면, 그 사람 곁에 앉고자 하지 않는다면

몸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

좋아하는 사람 곁에는 자꾸 가까이 가고 싶은 법이다.


'어디 암자에 들어가서 몇 달 동안 책만 읽었으면 좋겠다....'

소파와 책과 셋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겨울을 지냈다.

느느니 번뇌요, 느느니 자의식이다.


오늘 교회 주방봉사가 있었다,

무엇이든 순간에 몰입하는 편이라 열심히, 신나게 주방일을 했다.

그렇다, 신나게 했다.

종이 박스 또는 거대한 파란비닐에 들어 있던 어마무시한 식재료들이

두 시간 반만에 근대국과 고추장 불고기와 숙주나물과 달래 간장을 입은 두부가 되다니!

요리는 정말 엄청난 창작활동이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 주방용 장화를 신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주방용 장화가 중요하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주방용 장화 하나가 내 속에서 끌어낸 식당 아줌마 본능이라니!

100인분 밥솥, 국솥을 닦는 일은 허리가 끊어질 듯 힘에 부치는 일이었지만

힘이 났다. 마법의 장화를 신었으니까.


집에 와선 잠시 쉴 새도 없이 장을 보러 코스트코에 다녀왔다.

주일 저녁에 식사 손님이 있는데 내일은 강의 하나와 어머니 칠순잔치,

주일에는 구역모임(나 구역장 하는 여자!)으로 준비할 시간이 없다.

장을 보고 와서는 바로 새우를 손질하고, 양념장을 끓여서 '간장 새우'를 만들었다.


저녁엔 수영을 다녀왔다. 쉬지 않고 자유형 40개를 돌았다.

아,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세월호 이후로 밥맛이 아니라 수영맛을 잃었었다. (주부수영 끊은 사연)

지난 2월 말 팽목에 다녀온 이후 세월호 2주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아야지 싶었다.

일단 잃었던 수영맛을 되찾고 힘을 내기로 했다.

3월부터 시작했는데 열심히 하고 있다.


어푸어푸, 수영을 하며 생각하니 오늘은 책을 한 줄도,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날이다.

오직 몸을 열심히 가동시켜 하루를 살았다.

그러고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는 자괴감이 크지 않다는 것에 방점.

앞으로 더욱 많은 날을 몸으로 때우려한다.

내가 가진 가장 정직한 도구는 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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