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으니 이때다! 싶어 온종일 죄책감 없이 침대에서 뒹굴었다. 읽다 자다 읽다 자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다 읽었다. 분량으로 치면 두어 시간이면 끝나겠지만, 양으로 가늠되는 책이 아니다. 제목과 표지, 작가 정보 때문에 벌써 사놓고 펼쳐보질 못했다. 교회 여성모임에서 여행 가시는 집사님께 마음을 딸려 보내고 싶어서 사놓고 펼쳐보지 못한 책을 드렸다. 그리고 바로 다시 주문했다. 같은 책을 읽으며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첫 문장이 이러니 읽어나갈 엄두가 났겠는가.
 
조금 아픈 몸으로 읽다 쉬다 하며 하루를 몽땅 들이는 방식으로 읽기를 잘했다. 나이가 들어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소설을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을 쓰고 싶어서이다. 내가 경험한 일들을 낱낱이 쓰고 싶은데, 그 낱낱의 사실들이 사실이 아닌 척, 특히 내가 경험한 사실이 아닌 척하고 싶어서이다. 《부끄러움》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철학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하여 (언감생심 이루지도 못할) 내 생각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책을 한 권 내놓을 때마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징징거리는 나는 부끄러움으로 부끄러움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읽다 보니 아, 부끄러움은 관념이 아닐뿐더러 형용 가능한 감정도 아니지 않은가 싶다. '은유나 상징을 배제한, 밋밋한 글쓰기'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그 해의 기억을 묘사하는 덤덤한 글을 따라가다 내 어떤 기억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 부끄러움은 '장면', 이미지이다. 덧붙여지는 심리분석이 아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

 
책의 마지막 몇 단락을 여러 번 읽었다. 두고두고 읽고 또 읽을 생각이다. 책이 나온 뒤에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을 쓰겠다는... 사실? 아니 진실을 향한 갈망과 용기라니!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내 기억의 장면들을 나는 쓸 수 있을까? 은유, 상징, 심리분석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1996년의 여름이 끝났다.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무렵 사라예보의 시장 바닥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몇몇 작가들이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라고 신문에 썼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이란 하루아침에 생겼다가 그다음 날이면 떨쳐버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는(보스니아 내전) 적용되지만 다른 상황에는(르완다 내전)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이었다. 사라예보 시장의 피바다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 같은 표현을 나는 얼마나 자주 내뱉었던가. 내가 말하던 부끄러움이 현학적이었다고까지 느껴진다. 강의와 집단 여정 중에 '수치심'이란 말을 얼마나 자주 입에 올리는지. 인간 마음 맨바닥에 있는 감정이 수치심이며, 영성적 치유는 수치심의 치유라는 설명을 입에 달고 있는데. 내 말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진다. 이 부분을 해설한 작품 설명을 그대로 옮겨봐야겠다. "그녀에 따르면 그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부끄러움이란 하루아침에 생겨났다가 그다음 날이면 떨쳐버릴 수도 있고, 어떤 상황, 즉 보스니아 내전에는 적용되고 다른 상황, 예컨대 르완다 내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인 반면, 자신의 그것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없거니와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적용되고 그럼으로써 영원하게 살아 있는 실체와 같다."

 

이 책을 쓰고 있었던 지난 몇 달 동안 어떤 영화가 개봉했든 어떤 책이 발간됐든, 혹은 어떤 예술가가 죽었든 그것이 1952년에 일어난 사건이면 대뜸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일들이 까마득히 먼 그해의 현실, 어린아이였던 내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1952년 일본에서 출간된 오오카 쇼헤이의 《불》이란 책에서 나는 이런 글귀를 읽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말하기 싫은 기억의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이 부끄러움이고, 부끄러움이란 내 기억 속의 장면들인데... 의심할 수 없는 바는 이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 
 
이로써 나는 아니 에르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알라딘 보관함 한 페이지가 아니 에르노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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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과 써야 할 원고, 연구소 지도자 과정을 위해 "읽어야만 하는 책"이 늘 쌓여 있지만, "읽고 싶은 책" 없이 지내기는 어렵다. "읽어야만 하는 책" 역시 알고 보면 다 좋아서 읽는 것이긴 한데, 성격 상 '의무'의 흔적만 있어도 못 견디는 그런 취약함이 있다. 신형철의 시화詩話집 『인생의 역사』는 얼마나 꿀 같은지. 숨 쉴 틈으로 한 편씩 읽기 딱 좋은 시와 짧은 글로 적잖이 위로를 얻고 있다.

여기에 더해 2년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눈풀꽃>이란 시로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던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 세 권을 한꺼번에 사기는 그렇고 『야생 붓꽃』을 먼저 주문했다. 주문하려고 보니 추천사를 신형철 선생이 썼네. 올 가을은 신형철인가 보다! 길고 길었던 화요일 늦은 밤, 아프고 텅 빈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야생 붓꽃』이 도착해 있을 테니까. 한가닥 위안의 빛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뭐가 묻었나? 설마... 한 귀퉁이가 훼손된 책이 왔다. 혹 종이 조각이 붙은 것일지도 몰라, 괜한 희망을 걸고 비닐포장을 뜯었으나 역시였다. 하루 종일 참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 고통을 본다. 고통을 유발한 악도 본다. 그 부조리함이 형언되지 않아서 말도 못 하고 울지도 못했다. 가해자는 오늘도 강단에 서서 마이크를 흔들며 권력의 춤을 추고 있다.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학교에 간다. 

어쩌자고 저녁 학교 가는 길이, 학교 식당의 저녁 식사가, 스치는 사람들이, 자아도취에 빠진 작은 권력들이... 자꾸 나를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 꾹 참고 집에 왔건만, 마지막 소소한 절망 하나가 남아 있었다. 냉정하고 무심하게 쪼인트를 날려 애써 버티던 다리를 꺾어버렸다. 파본 『야생 붓꽃』. 파손된 모양 자체가, 오늘 밤 펼쳐 읽을 수 없다는 이 소소한 절망 하나가 견딜 수 없게 서러웠다. 얼마 전, 가슴뼈가 빠개질 것 같은 꿈을 꾼 날이 있었다. 잠을 깨고 나서도 가슴 언저리가 아팠었다. 하고픈 말을 할 수 없는 서러움에 벽을 붙들고, 그러다 가슴을 쥐어짜며 울던(아니 울지도 못했던) 꿈이었다. 치유 글쓰기를 시작한 어간이었다. 그때 그 꿈속의 통증 비슷한 통증, 또는 서러움을 안고 잠에 들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하나님, 난 공평하신 하나님이 싫어요. 실수 없으신 하나님도요. 그냥 제 편 돼 주세요. 저를 좋아한다면 제 편이 되셔야죠. 편 들어준다고 저 버릇 나빠지고 그러지 않아요. 그냥 다짜고짜 편들어 주세요. 가진 것 없고 억울한 자매들 편 들어주세요. 불공평하고 치우친 하나님 말이에요..."라는 말이(어쩌면 기도가) 툭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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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휴가의 책은 래리 크랩의 『천국을 향한 기다림』과 전경린의 소설 『굿바이 R』이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래리 크랩 선생님께서 작년 2월에 돌아가셨는데, 마땅한 환송식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7개월 전에 쓰셨다는 책이 나온 걸 보고 환송식은 무슨 환송식이냐, 내 마음에 계속 살아 있는데 싶었다. 그렇게 따지면 마르바 던, 토마스 키팅, 유진 피터슨 같은 분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 사이 책으로 만난 선생님들이 많이들 돌아가셨다. 브레넌 매닝의 소천 소식은 마침 주일 아침이어서 그날 예배가 천국 환송예배되었던 기억이 있다. 같은 책도 몇 년이 지나면 달리 읽히곤 하니, 다시 읽으며 두고두고 환송하기로 하자.

하도 내가 래리 크랩, 래리 크랩 하니까 주변에 따라 읽는 이들이 많은데, 당장의 호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 책이 왜 이러냐, 어렵다, 말이 왜 이리 돌려서 하냐... 뭔가 얘기를 할 듯 말 듯, 다음 장에서 그 말을 하려나? 없고, 또 그 다음 장? 없고.. 그러다 책이 끝난다고. 인정이다! 이 분의 글쓰기 스타일을 잘 알겠고, 왜 그런 방식으로 쓸 수밖에 없는지 나름대로 추측하는 바도 있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너무나 잘 알겠다. 이번 책 『천국을 향한 기다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꺼내놓지 않거나 결국 하지 않고 책이 끝나는 듯 싶은 이유가 이것일지 모른다. 바로 그 얘기를 먼저 내놓았다면 당신은 거기서 책을 덮어 버릴 것이다. "다 아는 얘기네! 뻔한 얘기잖아! 이런 얘기 말고 더 신박한 거!"

하지만 분명히 해 두자. 복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복음을 거절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환히 드러내 주셔서 진리가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나 있으므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조가 나타난다고 말한다.(롬 1:18-20) 복음을 거절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애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당찮은 용서를 구하는 애원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래리 크랩은 평생 이 말을 했다. 훤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진리가 너무나 깊고 아프고 소중해서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텍스트로서의 진리를 냅다 정답으로 내놓기에 우리의 콘텍스트가 너무나 복잡하고, 부조리하고, 아프기 때문이다. 래리 크랩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임을 안다. 진리는 훤히 드러나 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기에 눈앞의 고통이 너무 크거나, 그것이 전부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리 다 필요 없고,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나 해결해 주셨으면 싶은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욕망을 포장하는 사람들을 "영적 가면"을 쓴 존재라고 쓴 책, 그것을 조장하는 교회를 향한 분노와 소망을 쓴 책... 평생 그 욕망과 싸운 분이고, 그의 모든 책은 이 한 가지 주제를 담았다고 나는 본다.

선명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은 그 모든 책에서 겨누고 있는 칼 끝이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쉽게 '진리로 선포' 하지 못하는 것이다. 훤히 드러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신을 알기에, "영적 가면"을 쓴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하기에 그렇게 돌려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평생 그렇게 살았던 래리 크랩의 유언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으로 알아들었던 착실한 독자인 나는 유언도 잘 알아들었다. 처음 래리 크랩을 만난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훤히 드러난 진리를 조금 더 겸손하게 받들게 되어서일 수도 있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한 (이 훤하고 뻔한) 내용을 내게 주는 래리 크랩의 신박한 유언으로 알아듣고 받아 적는다.


1. 지금 있는 자리에 있어라!

어둠, 혼란, 씨름, 실패 가운데 살아라.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최고의 기회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척하거나, 있고 싶어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2.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
한 명이면 된다. 여러분이 정직한 투사라고 믿는 사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잘난 체하거나 비판하길 좋아할 가능성이 낮은 사람, 도와주거나 동정하거나 바로잡거나 꾸짖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 줄 사람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라.

3. 기도하며 하나님과 계속 대화하라.
악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추악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라. 여러분보다 더 확실하게 실패한 사람을 생각하며 극악한 현실을 외면하지 마라. 대신, 죄의 구렁텅이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4. 귀를 기울여라.
귀 기울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여러분이 한 모든 말에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어질 때 그때가 바로 귀를 기울일 때다.

5. 절박하고 겸손한 영혼에 복음 진리가 활활 타오르게 하라.
여러분이 가장 못난 순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할 것이다. 매일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 대신에 구원, 거듭남, 화해, 즉 경이로운 은혜가 죄인이자 성도인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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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 다녀와 바로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여러 모로 이례적인 일이다.

'좋은 강사'들과의 만남을 코스타의 유익으로 꼽는 강사들 얘길 많이 들었는데, 나는 별로 누려보지 못한 유익이다. 올해는 전체 집회 메시지를 맡은 탓에 첫날 둘째 날 시간을 텅 비웠다. 덕분에 잠시나마 강사들과 대화할 여백이 있었다. 두 분 강사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서 돌아와서 바로 책을 주문하여 읽었다. 코스탄 아닌 강사에게 끌린 것이 이례적인 것이고, 두 강사 모두 남성이라는 것이 이례적인 것이다. 코스타와 상관없이 개신교인 남성 저자의 책을 읽어본 지가 언제던가.

결론은 사람 못지 않게 두 책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책으로 감동받고 실물영접한 저자에게 실망하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그리고 사람 만나서 좋았으면 그만이지, 사석에서 만난 사람의 책이 궁금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헌데 사석에서 만나 인간적으로 끌린 사람의 책이 궁금했고, 읽고 나니 사람이 더 좋아 보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기꺼이 불편한 예배>의 저자 김재우 선교사님은 코스타 준비하며 전체 집회 강사 모임에서 처음 봤다. 아, 그전에 페이스북에 <슬픔을 쓰는 일> 리뷰를 올리신 것을 친구가 공유해줘서 본 적이 있다. "진짜 괜찮은 분"이라는 소개를 들었다. 전제 집회 강사 모임에서 잠시 만났는데 친구의 말이 뭔 말인지 알겠는 첫인상이었다. 코스타에서 실물 영접하고 보니, 더욱 그러했다. 곡절 많았던 코스타였는데, 함께 참석했던 채윤이와 연구소의 다슬 샘이 "시카고 천사"라고 부르는 분이다. 내게는 물론 다슬 샘과 채윤에게도 천사였다. 저자를 알기 전 <기꺼이 불편한 예배>라는 책 표지를 여러 번 보았었다. 제목이 "예배"라서 '기꺼이' 패스했었다. 남성 저자라니 더욱 '불편하여 기꺼이' 패스할 이유였고... 읽어보니 예배가 아니라 환대, 사역이 아니라 사랑을 사는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괜히 "시카고 천사"가 아니었구나 싶었고. 편견과 오만을 회개한다.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의 저자 최종원 교수님은 몇 년 전에 성서한국 강사실에서 마주한 일이 있다. 이후 근거리 남성 목회자들이 하도 책에 대해 왈가왈부 하고, 요란스러워서 진즉에 패스했었다. 남성 신학자의 책은 거르고 보는 나만의 루틴도 있었고. 이번에 만나고 알았다. 신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라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했다. 프로필 한 번 제대로 읽지 않고 신학자로 낙인(?) 찍었다니!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인간적으로 끌려 책을 봐야지 싶었다. 페이지마다 공감하며 읽었다. 코스타 세미나 강의 파일을 받아 들다 끌린 이유를 깨달았다. 자기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학자의 글과 태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이 쓴 책을 구매한 독자층을 분석하며 2,30대 여성 독자를 품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인식할 뿐 아니라 인정까지! 역사학자를 신학자로 오해했던 무지, 남성 신학자라 낙인찍고 패스한  편견, 그리고 오만을 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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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준비(대학 강의 아님), 논문 준비(박사 논문 아님)로 책 산성을 쌓아두고 있는데. 산성을 쌓은 벽돌 같은 책 틈에 저 두 권이 끼어 있었고 동시에 읽기를 마쳤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대학 들어가던 그 3월, 의식화 세미나 첫 책으로 읽은 것이다. 가끔 젊어서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면 "뭘 알고 이걸 읽었을까? 이해나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문득 이 책 생각이 났다. 대선 지나고 며칠 안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욕먹고 또 먹고, 또 다시 먹어도 싼 우리 세대는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 시절 민주주의는... 그런 생각을 하다 주문했던 것 같다. "뭘 알고 읽었을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시 읽어보니 대학 1학년 그 시절, 정말 숄 남매의 열정과 용기에 온전히 감정이입하며 읽었던 것 같다. 그때와 같은 피 끓는 심정은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지만, 왜 다시 읽고 싶었을까, 하는 마음이 알아지긴 했다. <컬러 퍼플>은 또 왜 갑자기 읽게 되었을까? 아, 벨 훅스의 부고 뉴스를 듣고 그의 책들을 다시 들춰보다 앨리스 워커에 이르렀고, 영화 <컬러 피플>을 보았었지.

왜, 지금 이 책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읽으면, 읽다 보면 찾아진다.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아, 이 문장을 만나려고!" 하게 된다. 바로 지금 만나야 할 문장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

이 모든 일에도 한스에게는 쉽게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애착이 있었습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삶에 대한 애착은 점점 더 강력하게 그의 안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삶은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광휘를 부둥켜안았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p. 52

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 이 모든 것은 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요. <아.미.죽> p.149

네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줘, 셀리. 좋아, 내가 말했어. 그는 덩치가 크고, 나이가 많고, 키도 크고, 턱수염이 희끗희끗한 백인이야. 하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녀. (중략) 백인들의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이 그런 모습이잖아. 슈그! 내가 말했어. 성경은 하느님이 쓴 거고, 백인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그런데 왜 하느님이 그 사람들처럼 생긴 거지? 그녀가 말했어. 덩치만 더 클 뿐이잖아? 털이 좀 더 많고. 왜 성경도 백인들이 만드는 다른 것들하고 똑같은 거지? 어째서 자기들은 온갖 짓을 다 하는데 흑인이 하는 일은 저주만 받는 거야? (중략) 우리는 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난 아직도 모르겠어. 어쨌건 나는 머릿속에서 나이 든 백인 남자를 몰아내려고 노력중이야. 그 남자를 신경쓰느라 신이 만드는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 <컬러 퍼플> p. 257,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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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사랑하는

여행의 추억은 책 한 권의 추억이다. 여행 며칠 입을 옷을 구색 맞춰 챙기는 것은 조금 귀찮지만 설레는 일이다. 귀찮지도 않으면서 그보다 더 설레는 것은 여행 중 읽을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보다 짜릿한 것은 여행지 어느 서점에 불쑥 들어가 충동적으로 고른 책과의 만남. 1월 경주 여행 중 황리단길의 작은 책방에서 <오즈의 마법사>를 샀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마음속 책 리스트는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데. 그중 하나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책 한 권을 만나는 일도 여사로 여길 일이 아니다. 마음에 찰랑거리는 그 주제가 어떤 책을 불러들이는 것 아닌가 싶다.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이유는 주인공의 넷의 심경을 자주 떠올리기 때문이겠고. 오즈를 향하는 네 개의 절실함을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도로시, 두뇌를 가지고 싶은 허수아비, 심장을 원하는 양철나무꾼과 용기가 필요한 사자는 오즈로 가는 노란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한 갈망의 소유자들이다.

 

갈망은 결핍감에서 비롯한다. 이 여행은 내적 결핍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여행, 일종의 성배 신화일 지 모르겠다. 무언가 치명적으로 결핍되었다 느끼는 '결핍감'의 존재들의 찾고자 하는 갈망의 여정이다. 지혜와 좋은 생각의 소유자로 여행에서 만나는 문제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허수아비가 없는 것이 '뇌'라니. 심장을 잃어버렸다는 양철나무꾼은 사랑과 연민의 존재이다. 기쁨과 슬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느낄 줄 아는 인물이다. 사자 역시 '없다는 느낌'에 매여 있을 뿐 필요할 때 빛을 발하는 용기 이미 가진 것이다. 여행단의 리더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란 길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여정이다. 내가 그러하듯, 영적 여정을 걷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집을 향한 그리움이 이끄는 여행이다. 집을 잃었다는 느낌, 그 결핍감.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는 도로시 안의 결핍감의 총체 인지 모르겠다. 힘(용기), 사랑, 지성은 에니어그램 3 중심(장, 가슴, 머리)의 결핍과 그대로 포개진다. 결핍감으로 고착되어 그것만 발달시키게 되어 장형, 가슴형, 머리형으로만 사는 인간이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난 경주 여행은 결핍감의 소산이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지 않아서 생긴 구멍을 메우려 가고 또 가고 또 가게 되는 것 같다. 주일 끼어서 가는 수학여행 일정이라 '주일 성수' 하겠다고 않았다. <신앙 사춘기>에서 썼고, 그 이후 강의에서 (지난주 금요일 중쇄 기념 강연에서도) 여러 번 떠들었으니 구구절절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하튼 이번이 세 번째다. 불국사 앞에서 찍은 반 친구들 사진에 내가 없다는 느낌 그 결핍감으로 갈 때마다 찍어서 얻게 된 '세월 담은 가족사진'이다. 결핍, 결핍감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 결핍감을 인식하고 마주하는 태도가 한 존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많이 생각한다. 어떤 결핍은 파괴적인 중독에 닿고, 어떤 결핍은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힘과 사랑과 지혜를 발견하여 자기 자신이 되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노란 길로 이끌게 되는지. 결핍, 결핍감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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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마지막 날을 아무 걱정 없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몸을 파묻고 보냈다. 어제 오후 백신 부스터 샷 접종을 하고, 밤에 연구소 송년 글쓰기를 했다. 강의할 때만 해도 주사 맞은 부위가 조금 뻐근하다 싶었는데, 2차 때 왔던 불면증 후유증이 와서 말똥말똥한 밤을 보냈다. 잠깐 잤지만 새벽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밤에 손해 본 잠이 억울해서, 어쩌면 몸이 무거워서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줄 읽다가 졸고, 다시 일어나 조금 읽다가 자고.... 그렇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 읽고 나니 거짓말처럼 일어날 힘이 생겼다.

그렇다, 카이사르는 분명히 필멸의 인간이니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한다. 그렇지만 나, 바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에게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올해의 키워드는 '죽음'과 '비극'이다. 죽음에 대해 말할 자리, 강의할 자리가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내 마음 속 죽음은 업데이트를 거듭했다. 여전히 견딜 수 없이 그리운 엄마이지만, 내 마음속 죽음은 작년 3월 엄마의 죽음이 아니다. 40년 전 아버지의 죽음도 아니다. 그냥 죽음이다. 세상의 모든 죽음이다. 인생의 끝에서 만날, 궁극의 비극인 죽음이다. 죽음이 끝이 아닌 것에의 믿음으로 오늘의 시간에 죽음을 받아들이면 열리는 새로운 오늘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을 받아들이지 못함이 인간의 비극이다. 올해의 키워드는 죽음과 비극과 더불어 '성장'이다. 송년 글쓰기를 거듭하면서 돌아보니 그렇다. 나와 다른 사람의 성장이 가장 기쁜 일이었고, 그 반대가 가장 아픈 일이었다. 몸은 노화하여 필멸할 것이나, 정신적 성장은 끝이 없다. 늘 자라야 하고, 성장의 궁극은 죽음 앞에서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머리 식힐 겸 소설을 하나 읽자, 는 마음으로 아침에 침대에 파고들며 붙들었는데 2021년 마지막 날 읽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도대체 왜, 내가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라며 죽음에 저항하는 이반 일리치는 잘못 살아왔다. 다른 잘못은 모르겠고, '죽지 않을 존재'처럼 살아온 것이다. 이미 그의 생은 메마르고 비극적이었는데, 비극성을 마주하지 않았던 것. 이미 아픈 몸인데,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다 병을 키운 것과 같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죽음'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는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이반 일리치는 죽기 한 시간 전에 그 강한 에고의 힘을 빼고 기꺼이 죽는다. 죽기 한 시간 전이지만, 한 시간 전에라도 죽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그는 생각했다. <다들 불쌍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힘이 없었다. <아니야, 뭣 하러 말을 해. 그냥 보여 주면 돼.>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눈짓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데리고 가…… 안쓰러워...... 그리고 당신도......」 그는 <용서해 줘>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가게 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쳐 말할 힘조차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겠지.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증은?> 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통증은 어디로 갔지? 이봐, 너, 어디로 간 거야?>
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에 있었군. 그래, 뭐, 거기 있으라고 해.>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로 갔지?> 그는 그동한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중략)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죽음, 죽음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 그러니까 실패, 실망, 구겨짐, 쓰라림...... 이런 것들과 친해지고 받아들이는 연습이야 말로 죽기 전에 죽어 지금 여기서 자유를 사는 것이 된다. 죽기 전에 죽으면,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이 없어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진다. 오늘, 계획 세운 바 없이 2021년 마지막 날로서 적절한 하루를 보냈다. 마치 올해의 배움을 총정리하듯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시간과 함께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줌으로 드리는 교회 송구영신 예배에서 짧은 묵상을 인도할 준비를 한다. 죽기 전에 죽어서 얻는 선물을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음이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이다. 2021년 내면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나를 이렇게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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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도 단 한 번의 인생 밖에 살지 못한다. 그런데 마치 다른 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으로 산다.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은 내일이 올 거야, 같은 희망이든. 언젠가 로또 같은 한 방이 터질 걸 기대하는 환상이든. 심지어 '이생망이야!' 하는 말조차 애초 다른 좋은 삶이 있었는데 뭔가 잘못됐다고 하는 것 같다. 희망이든, 환상이든, 지레 뒤집어쓰는 절망이든 변하지 않는 진리는 나는 단 하나의 생 밖에 살지 못한다.

 

자기 앞의 생.

 

1일 1영화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영화 제목과 정보, 목록만 훑어보다 영화 한 편 볼 시간 다 버린다는 '넷플릭스 증후군'에 있단다. '증후군'에 지기 싫은 마음에 빠르게 선택하려고 한다. 대략 장르 정하고 직관적으로 탁 찍어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 웬만하면 좋다. <자기 앞의 생> 제목에 끌려서 보았다. 그렇고 말고. 자기 앞의 생!이다. 누구나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갈 뿐이다. 타인 앞에 놓은 생을 살게 되진 않는다. 영화가 그런 건지,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1일 1영화 하면서 1일 1눈물까지 패키지다. 요즘 보는 영화마다 그렇다. 

 

 

 

 

 

"내 머릿속에서 그 일을 지워달라고, 그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제발 그 사건을 기억 속에서 지워주세요." 한참 전에 글쓰기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다. 고통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절절하지만 그럴수록 그 기억이 또렷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난 날 겪은 그것들을 가지고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살아야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마담 로사도, 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엄마를 그리는 난민 소년 모모도. 지나간 고통이 크고 또렷하여 오늘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생망은 아니다. 그 뻔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희망이 자기 앞의 생을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된다. 고유하게 아픈 어떤 인생들이 교차하고, 거기서 살아야 할 어떤 이유가 발견될 때 생은 다른 길로 접어든다.

 

 

 

 

 

아침에 눈을 떠 그대로 누운 채로 남편에게 말했다. "마음이 괴로워. 이유 없이 마음이 괴로운지 모르겠어." 어젯밤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며칠 이런 상태였던 것 같기도. 결국 아침 먹은 걸 체하고 말았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 말고 먹은 것도 없어 텅 빈 구역질을 했다. 오후에도 맥을 놓고 누워 있다 "선생님, 글을 써서 올리고 밤새 체한 것처럼 아파서 잠을 못 잤어요." 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어젯밤 그 글을 읽고 가슴이 콱 막혔었다. 그의 이야기인데, 아니 그가 치료하는 아이 이야기인데, 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오래전에 다 정리된 '나의 이야기'라 여겼는데 무슨 일이지? 이유 없이 괴로운 게 아니었다. 요 며칠 뭔가 죽도록 욕을 먹은 느낌도 있었다. 뒤가 아니라 앞에 놓인 생에 관한 것이다. 내 앞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몸살이다. 갑자기 일어나 책꽂이로 가서 브레넌 매닝의 <신뢰>를 꺼냈다. 필요한 책, 약이 되는 책이 꼭 이렇게 갑작스런 처방전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다.

 

영화도 그렇다. 오늘 본 <자기 앞의 생>이 그렇다. 고통이든 행복이든 비교가 불가한 자기 앞의 인생들이 있음을, 인생과 인생의 교차점에서 생기는 화학반응 같은 삶의 의미와 희망 같은 것들을 영화가 일깨워주었다. 약이 된 영화였다. 지난 날을 끌어안고, 다가오는 생을 마주하며, 오늘 내 인생과 겹쳐진 벗들을 위한 기도로 이 밤을 마무리하면 이 체기가 온전히 가실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두 교황>,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미국, 2019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가 따로 있소?❞

영화 <두 교황>을 선택한 이유다. 이유를 따져가며 영화를 고르진 않는데. 관람하다 대사 한 문장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 나도 이게 참 궁금했지!’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의 안소니 홉킨스가 교황 프란치스코 역의 조나단 프라이스에게 묻는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비결, 나도 그게 궁금했다. 매력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다. 매력은 자석의 성질 같은 것이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 건네고 싶은 끌림 같은 것. 한 번쯤 만나서 내 얘기를 해보고 싶은 사람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게 그런 분이다. 역대 가장 존경받는 교황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은 존경심 반 팬심 반이다. 안소니 홉킨스 분의 베네딕토 16세가 묻는 ‘인기 있는 이유’를 찾아 런닝타임 2시간을 함께 달렸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찾았다. 이 글은 그것을 찾는 보물지도다.

❝로마에서는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답니다❞

제목이 <두 교황>이다. 한 교황이 아니고, 여러 교황들이 아닌 두 교황. ‘2’는 선택을 종용하는 숫자다. 2, 둘 앞에 서면 둘 중 한 편을 선택하고 하나는 버려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인다.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정, 진보와 보수, 심지어 성과 속. 두 개의 바구니에 칼 같이 나눠담고 중간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원론이다. 둘 사이는 넘나들 수 없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의 딱지를 각각의 바구니에 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 있으면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틀린 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이원론자인지, 생활형 이원론자인지 늘 확인한다. 제목 <두 교황>을 보는 순간 이미 한 교황 편을 들기로 작정했다. 무의식적인 작정이다. 영화 역시 나 같은 이원론자 관객의 심리를 잘 부추겨 교황선출 투표에 참여시킨다. 물론 나는 주저함 없는 한 표를 행사했다.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 턱슨 추기경에게 기꺼이 설득 당했다.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이 되기를 정말 원하고, 게다가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에 차있다. 벌써 편은 나뉘었고, 나는 호르헤(교황 프란치스코) 편이다. 내 편을 정하고 나니 자기 확신 뚜렷한 보수주의자 라칭거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은퇴허락을 받으려는 추기경 호르헤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만난다. 교황의 여름별장 정원에서 만난다. 언뜻 봐도 많이 다른 두 사람이니,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사사건건 부딪치고 만다. 교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강한 담을 치려는 교황과 예수의 자비로 담을 헐어야 한다는 추기경. 지키려는 보수와 변화시켜 앞으로 나아가려는 진보는 동성애, 이혼, 피임, 성직자의 삶 어느 것 하나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교회를 향한 비판이 거세지는 이유를 교황은 담 밖에서 찾는다. 서구의 상대주의, 방임주의. 추기경은 그 반대, 내부에 원인이 있다며 치명타를 날린다. 신부의 아동 성추행과 그것을 묵인한 교황! 분노와 슬픔으로 벌게진 눈을 하고 당장 그 성직자를 해임하고 교회법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한다. 고해신부의 몇 마디 마법 같은 말로 죄를 용서해주는 것으로는 안 된다면서. 죄는 얼룩이 아니라 치료받고 아물어야 하는 상처라며. 가장 몰입해서 관람한 장면이다. 두 사람의 논쟁을 숨 가쁘게 따라갔다.

 

초유의 사태 코로나19 정국이다. 온 나라와 개인의 일상을 멈춰 세운 바이러스를 부르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이분되어 있다. 우한폐렴으로 부르는 사람, 코로나로 부르는 사람 사이에 견고한 담장이 서 있는 듯하다. 저쪽 편 사람이라고 느껴지면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아도 벌써 분노 섞인 피로감이 밀려온다. 분단된 남쪽에서 정치 정서적으로 다시 한 번 나뉘어 오갈 수 없는 땅에 사는 느낌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담을 세우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인 줄 알면서도 나 역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때로 드러내고, 때로 흥분한다. 두 교황의 물러섬 없는 입장차를 관객의 객관, 객관적 관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골수팬이며, 호르헤 추기경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어쩐지 영화초반 콘클라베의 투표 때처럼 확실하게 마음이 기울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한 말 중 어느 것도 동의할 수 없소”라는 말로 대화는 끝났다. 기시감이 드는 슬픈 단절감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정원에서 교황을 기다리던 호르헤 추기경에게 수녀가 우산을 하나 주었었다. 비가 오지 않으니 필요 없다는 말에 수녀가 복선을 깐다. “로마에서는 뭐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렇다. 이제 영화의 시작이고, 두 사람 사이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은가. 게다가 잊을 만하면 교황이 찬 심박조율기가 소리를 낸다. 정신을 일깨운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커피 드시겠소?❞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된다. 밤이다. 낮이 가고 밤이 왔고, 쉼의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용건이 있는 호르헤 추기경이 은퇴서류를 꺼내자 교황은 그냥 조용히 쉬자고 한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차나 커피 드시겠소?”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대화로는 날씨 얘기가 딱이다. 아니면 차나 커피를 권하는 것. 뻔하고 흔한 이 제안이 좋았다. “아니요, 밤늦게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서요.” “나도 그렇소.” 두 사람 대화가 처음으로 교차한다. 낮의 정원에서 평행선을 달리던 두 교황이, 각각 와인과 환타를 마시며 혼밥 했던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오늘 밤은 형제처럼 있고 싶소.” 그리고 밤의 대화가 시작된다. 환한 낮에 내놓기 어려운 속내 드러낼 용기가 생기는 시간이다.
확신의 아이콘과도 같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아니 라칭거 형제가 불확실함과 모호함에 대한 두려움을 꺼내놓는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호르헤 추기경의 이야기 역시 불확실 아니, 확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호르헤는 신부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위해 오래 기다렸다. 이렇다 할 확신 또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얄궂게도 신은 청혼하러 가는 길에 호르헤를 부르신다. 청혼의 아름다운 시간을 기대하고 나온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감의 상처를 남기고 신과 결혼한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러브스토리이다. “커피 한 잔 할래요?”로 시작한 밤의 대화는 좋아하는 음악, 텔레비전 프로그램, 점점 가벼워지다 농담으로 끝난다. 늘 혼자였던, 인기 없는 라칭거가 호르헤에게 말한다. “같이 있으니 좋군요.” 형제처럼 함께 보낸 시간이다.

❝당신이 신이 아닌 것을 용서합니다❞

호르헤 추기경에게는 용건이 있었고, 베네딕토16세 교황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두 교황의 세 번째 만남 장소는 바티칸 교황청의 중심이다. 교황의 계획은 종신직인 교황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교황으로 적절한 사람은, 아니 꼭 필요한 사람이 베르골리오라는 확신이다. 말, 행동, 생각 등 어떤 것에도 동의가 되지 않는 사람, 자신과 너무나 다른 베르골리오가 말이다. 전통의 수호자, 보수의 아이콘인 라칭거가 스스로 전통을 허물어 종신직에서 물러나겠다니.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충격적인 선언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호르헤의 용건이 아니라 라칭거의 계획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정원에서의 날 선 논쟁도, 형제처럼 함께 한 밤의 대화도 다 라칭거 계획의 일부였다. 라칭거의 파격 선언과 제안대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면 넘어야 할 산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산은 물론 담장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호르헤 자신 안에.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 시절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예수회 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많은 신부와 수녀들이 군사정권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베르고글리오는 정권에 저항하던 예수회 사제들과 친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십자가처럼 지고 있다. 죄책감에 그치지 않고, ‘독재자의 친구’라는 오명을 주홍글씨처럼 가지게 되었다. 진보의 아이콘, 가난한 이들의 신부, 소박한 삶을 사는 인기쟁이 추기경에겐 이런 흑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호르헤를 선택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겐 계획이 있었고, 또 호르헤 추기경에 대한 파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비밀처럼 품은 부끄러움을 누군가 이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괜찮다고 말해줄 때는 치유가 일어난다. 파일을 가지고 있는 교황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차기 교황에 적합하다 인정해준다. 그런데 은밀한 부끄러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교황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호르헤 스스로 자기를 받아주어야 했다. 젊은 날의 자신과 화해해야 했다. 아니 용서해야 했다. 여름별장 정원의 첫 대화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값싼 용서를 비판했던 호르헤 추기경. 그 날선 비판의 칼끝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죄를 씻을 수 없고,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를 겨눈 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그것은 자신과의 화해이며 무엇보다 용서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정신적 자만심에 시달린다오.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형제인 라칭거가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일깨워준다. 그리고 교황으로서 추기경의 죄를 용서한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교황의 용서가 바로 신의 그것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선언은 얼마나 중요한가. 가톨릭의 전통이 가진 고해성사의 힘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들렸다. “당신이 신이 아닌 것을 용서합니다.” 호르헤도 나도 우리 모두는 신이 아닌데,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신적인 완벽함, 결벽을 요구하며 비난하는가. 나도 그 선언을 듣고 싶다. “당신은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합니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인기의 비결을 묻는 교황 베네딕토16세에게 호르헤 추기경이 답했다. “그냥 나 자신으로 살려고 할 뿐입니다.” 그냥 자신으로 사는 거라…. 질문보다 더 어려운 답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황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나답게 살려고 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군요.” 자기다워진다는 것, 얼마나 막막하여 어려운 일인가. 인기의 비결을 찾아 여기까지 왔건만 싱거운 답이다. 보물이 이렇게 쉽게 숨겨져 있을 리 없지! 이번에는 교황이 추기경에게 고해성사를 청한다. ‘삶을 즐기는 용기가 없었다’ 고백한다. 나름대로 자기다움에 충실한 라칭거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즐길 수 있는 용기’인 듯하다. 성추행 범죄를 덮어준 것보다 본질적인 죄인지 모른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 수많은 당위의 담을 쌓아 자신을 가두는 것. 라칭거 역시 용서받음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즐기지 못하던 자기와의 화해라고 할까.

 

원칙주의자 라칭거, 자부심에 찬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실패를 인정한다. 호르헤 신부가 젊은 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을 보상하는 삶을 살고 있듯이. 자기다움이란 실패, 또는 실패에 대한 아픈 성찰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실패자에 머무르지 않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떠안는 태도를 두 교황에게서 본다. 자기 안에 갇혀 성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해성사를 봐줄 신부, 죄를 사해줄 신의 대리자, 아니 그저 함께 해주는 형제가 필요하다. 자기다움으로 가는 길엔 분명 나를 비춰주는 거울인 누군가가 필요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대화는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두 형제의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보물을 찾았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 또는 둘을 넘어 제 3의 자리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실패한 나에 멈춰 있지 않고 화해라는 신발을 신고 계속 움직이는 것. 생각이 다른 너와 나 사이 옳고 그름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정작 답은 라칭거의 입에서 나왔다. “당신은 권력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고 특별하게도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추기경님은 달라졌어요.”

 

호르헤는 호르헤대로 라칭거는 라칭거대로 나는 나대로 내가 살아온 방식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패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화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건’ 아닌 ‘계획’을 가지고 내내 대화를 이끌어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마음이 끌린다. 프란치스코 교황만큼이나. ‘둘’을 보면 꼭 하나로 기울고 싶은, 편을 나누고 싶은 이 버릇을 좀 고치고 싶다. 아니, 이런 나와 화해하는 쪽으로 멈추지 말고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커피 아니고, 와인도 환타도 아닌 맥주로 음료수 통일한 두 교황이 월드컵을 관람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다. 물론 같은 편을 응원하지는 않는다. 이겨야 맛이고 지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승리만이 옳고, 진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독일이 이겨도 아르헨티나가 이겨도 상관없다. 양쪽 모두를 기분 좋게 응원할 뿐이다. 두 교황이 다 좋고, 우리에겐 두 교황 모두 필요하다.

- 격월간지 <민들레> Vo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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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가 그리 불렸다고 하고, 그 이야기를 재밌게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만 보는 바보> 가끔 조롱하듯, 안쓰러움을 담아 내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보, 책만 보는 바보" 그렇다고 비하나 연민은 아니다. 물론 이도 저도 못하고 책이나 보는 내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력감이 싫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 10년 전 그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오직 무력한 무력감이었으나 요즘은 아니다. 이런 나라도 스스로 받아주는 마음 자락이 한 뼘은 생겼다. 그리하여 무력함이 마냥 무력하지만은 않다.

동시에 평균 일곱 권 정도의 책을 읽는 것 같다. 원고나 강의를 위해 읽는 책이 두어 권. 한 권 정도는 필사하며 읽고, 두어 권은 연구소 스터디를 위해 읽고, 그냥 좋아서 읽는 책이 한 권에서 세 권 정도. 그냥 좋아서 읽은 책이 동시에 끝이 났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책은 신간 알림을 신청해놓고 누구보다 먼저 따끈한 상태로 구입하여 받아보곤 하는데, 이번에 나온 『보편적 그리스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달음에 읽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아껴 읽느라 혼났다. 새로운 원고에 몰입하기 위해서 기를 모으는 중 롤로 메이의  『창조를 위한 용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역시 빨리 읽고 끝내기가 아까워 조금 읽고 딴짓, 몇 페이지 읽고 스마트폰 보게 하는 책이었다.

두 저자가 내게 같은 말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는 나날, 연결들이 끊어지는 듯하고, 폐렴의 바이러스보다 혐오의 바이러스로 더 숨이 막히는 시간을 보낸다. 갑작스런 사고로 요양병원에 간 엄마를 면회할 수 없는 안타까움. 예정된 모든 강의가 취소되며 코가 석 자, 넉 자가 되는 현실이다. 이렇게 얻은 불안한 시간, 텅 빈 시간을 책만 보는 바보로 지내는데 저자들이 말한다. 절망할 만큼 절망하라고, 그래도 죽지 않는다고. 창의성은 불안에서 나오고, 불안을 맞서는 용기 없이 새로운 통찰은 얻어지지 않는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무엇도 쉽게 초월하지 말라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어설픈 순진함에 머무르지 말라고. 어쩌면 두 책이 같은 말을 한다.

유아적인 순진함에 머무르지 말고 정직하게 무질서의 세계로 발을 내딛어 두 번째 순진함이라는 깨우침의 단계, 재질서의 단계에 이르라는 격려를 들으며 『보편적 그리스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책만 보는 바보를 기다리는 다음 책은 『권력과 거짓순수』이다. 첫 장 첫 문장이 이렇다. 

젊은 시절 나는 순수를 소중히 여겼다. 권력을 나쁘게 생각했고 싫어했으며 폭력을 혐오했다.

젊은 시절 그랬던 롤로 메이가 책을 쓰는 나이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궁금함과 호기심 폭발이다. 일단 달려보려고 한다. 릴레이를. 독서 릴레이를. 알 수 없는 시절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영화 <토이 스토리>에 대한 애틋한 정은 일단은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3편에서 대학생이 된 앤디가 우디 일행을 떠나는 장면, 어마어마한 상실감으로 보았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망각의 심연으로 떠밀려 내려갈 때의 안타까움과도 비슷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채윤이 현승이가 어렸을 적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와우와우 수건, 곰돌이 이불에 대한 감정이다. 아이들은 잊지만 엄마는 잊을 수 없는, 아기 적 아이들의 애착에 대한 애착 같은 것. 쓰다보니 단지 아이들 유년만은 아니구나 싶다.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내 유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여하튼 현승이 어릴 적, 엄마 중독증상이 심하던 시절에 "너는 내 친구야. 영원한 친구야" <토이 스토리> 주제가를 어깨동무 하고 부르던 날이 있었다.


가령 이런 -> 무촌에 가까운 일촌끼리의 우정 


개봉 하자마자 <토이 스토리4>를 가족들과 함께 봤다. 보니에게 간 토이들이 어찌 되는가, 아련한 설렘으로 남몰래 두근두근. 사전 정보 없이 약간 넋을 놓고 보다 목에 가시가 하나 걸렸다. "쓰레기" 폐품으로 만든 토이 '포키'가 등장한다. 보니가 현재 시점 가장 사랑하는 토이 등극이다. 사랑받는 토이로서 자신을 인식하질 못하는 포키이다. '사랑받는'은 고사하고 '토이' 정체성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쓰레기, 쓰레기라며 틈만 나면 쓰레기통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 건 '쓰레기'인데, 영화 때문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식도 부근에 걸려 소화되지 못하는 단어이다. 어쩌다 귀에 꽂힌 '쓰레기'라는 말이 목에 걸려 다른 무엇도 섭취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통 먹질 못하니 마음의 힘이 다 빠져나가 이것도 저것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점점 쓰레기가 되어 가는 찰나. 영화가 무슨 작정이나 한듯 쓰레기, 쓰레기... 한다.


토이 정체성이 확실한 우디가 이걸 보아 넘길 리 없다. 그 자신 최애 장난감의 영예를 잃고 벽장에 처박히는 존재일지언정, 주인 보니의 사랑받는 토이 '포키'를 지켜내는 우디. '너는 쓰레기가 아니야, 사랑받는 장난감이야!' 토이의 존재 의미는 주인 아이의 기쁨이 되는 것. 주인의 사랑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의 행복한 유년을 지켜주는 것. 1,2,3 편은 그 정체성에 눈물겹게 충실한 우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자아'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성육신한 예수님을 향해 하늘로부터 들린 명확한 메시지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이다. 인간 예수님은 내내 이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사셨다. 사랑받는 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메시지를 전하고,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하튼, 쓰레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토이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우디의 노력은 눈물겹다.


 

1편인가, 2편인가. 버즈의 등장 스토리가 생각났다. 버즈는 '우주전사' 정체성으로 미친 애처럼 등장했다. 지구인지 우주인지를 제가 구할 수 있다며. 아, 이때도 우디는 '너는 우주전사가 아니야. 앤디의 사랑받는 최신식, 최애 장난감이야'를 일깨우려 애썼다. 물론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라인도 있었고. 이 스토리가 떠올라 넷플릭스로 혼자 <토이 스토리> 1,2,3을 정주행 하고 말았다. 


도덕적, 종교적 교훈으로 감상평 마무리 하는 것 촌스러운 줄 아는데. 아픈 영혼의 두 증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기비하와 자아팽창.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고, 칭찬 받지만 욕도 얻어 먹고, 성공하지만 실패하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마주하기 싫은 아픈 영혼이 도피하는 곳이다. 쓰레기이거나 우주전사이거나. 한 번 실패로 쓰레기가 되고, 한 번 성공으로 세상을 구원할 전능의 전사가 된다. 대부분의 일,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사이 어디를 오가는 존재임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힘, 더 큰 존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존을 모르는 토이들처럼 말이다. 고질적인 내 지병과 병증이다. 모 아니면 도, 전부 아니면 제로. 하나 실패했다 싶으면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나를 팽개치고 싶은. 강하거나 약하고, 착하거나 나쁘고,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한 열흘 우디와 포키와 버즈를 가슴에 품고 다녔더니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이 쑥 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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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처럼 다시 '책만 보는 바보'로 살고 있다. 정해진 일상을 돌리는 것은 일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고 잘 돌리고 있지만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집착하여 사는 느낌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 '오늘은 무슨 요일, 더 자도 될까'라고 생각하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식구들 일어나기 전에 조용한 '혼독(혼자 독서)' 시간을 확보해야지 싶어서다. 늦은 시간 네 식구가 다 모여 야식을 먹고, 떠들떠들 할 때도 '빨리들 들어가 자라, 빨리 들어가 자라'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역시 '조용한 혼독'의 시간에 그 중독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해야할 일을 다 하면서 책을 읽는데도 '책만 보는 바보'라고 나를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무기력감 때문이다. 그래, 내가 바보라는 느낌이 들고 뭘 잘하지 못한다는, 못할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책을 내고 책과 관련된 리워드 행사를 마치고 온 허탈감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생각보다 책이 인기를 얻지 못해서? 이유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연구소 운영에 대한 부담감, 그것도 크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낮은 자존감' 상태라 할 수 있다. 


낮은 자존감의 주증상(어쩌면 주요 원인)은 글을 쓰지 못함이다.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두어 문장 끄적이다만 비공개 글이 수두록하다. 글을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듯이 발행할 글이든 혼자 볼 글이든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그 고통보다 큰 보상을 기대할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인내하게 된다. 나는 무슨 보상을 바라고 글을 쓰지? 40여년 혼자 보는 일기를 썼고 10년도 넘게 블로그를 했으니 독자의 인정과 칭찬이 주요 보상은 아닐 텐데. 글쓰기 강의할 때는 '나를 나로 세우고, 나를 지키고, 나다운 나로 살게 하는 것'이 궁극적 보상이 되었다고 호기롭게 떠벌였다.


책만 보는 바보로 산다는 무력감에 빠진 건 글이 써지지 않아서 인가보다. 블로그 글은 물론이고 마지막 일기를 쓴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렵다"느는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와 달리 무지랭이 얼치기 작가인 나는 "후지게 쓰는 것보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라고 저저저저번 포스팅에서 말했었다. 생각해 보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멈추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일이 잘 풀릴 때도 썼다. 그러니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외적인 성공과 실패, 심지어 그에 대한 정서 상태에 영향받지 않는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상태로 살고 있다. 이것이 단서가 되지 않을까. 나 따위가! 나 따위가! 나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힘이 빠져나간 뱃속에서 이런 벌레들이 조용히 기어다니고 있나. 그래서 '낮은 자존감'이란 말이 툭 튀어나온 것인가.


어쨌든 속시원히 설명되지 않는 '바보' 상태로 살고 있다. 책만 보는 바보. 바보랑 놀아주는 책이 있어 얼마나 고마지 모른다. 바보에게 즐거움을 줬고, 주고 있는 요즘 책들을 모아 촬영을 했더니! 모두 여성 저자이다. 마리 루틴와 어슐러 르 귄 같은 분은 넘사벽 같다. 그런 글, 나도 참 쓰고 싶은데. 레이첼 에반스는 작고 후에 읽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일 년>이란 책 제목에 선입관이 생겨 더 알아보지 않았었다. 작고 후 남편 추천으로 <교회를 찾아서>를 읽었는데 와, <신앙 사춘기>는 정신실판 <교회를 찾아서>였네! 정말 멋진 크리스천 페미니스트 여성이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일 년>은 딸 채윤이가 빠져 읽고 있다. 여섯 권의 책, 모두 소중하다. 이대로 (책만 보는) 바보로 산다해도 좋을 만남이다. 





로즈 메리 도허티 수녀님의 <분별>의 마지막 장을 어젯밤에 덮었다. 단순하고 고요한 내용에다 작은 책이다. 하지만 분별의 삶을 어떻게 살아온 분의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저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차차 사귀고 배울 좋은 선생님이시구나 싶었다. 같은 얘기도 남성이 하는 것과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잔잔하게 남는 여운을 안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페이스북에서 뉴스를 본다. 바로 이 로스 메리 도허티 수녀님이 2월 28일돌아가셨단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맞다. 만나자마자 떠나셨다니.


지난 주일은 내 생일이었다. 채윤이가 끓여준 생일 미역국 사진을 꿈모임 단톡방에 올렸다. '죽음'에 관해 꿈을 꾸신 벗님 한 분이 삶과 죽음, 태어남과 죽음을 묵상했는데 카톡을 열자마자 미역국 사진을 보고 생일 이야기를 들었다고. 삶과 죽음의 근접성, 이 둘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씩 덧붙여 가면서 풍성한 단톡 나눔을 가졌다. 동시성에 놀라고 놀란다. 


주중에 믿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그래서는 안 될, 세상 사람 다 아파도 절대 아프지 말았으면 싶은 두 분의 소식이다. 나이가 젊어도, 연세가 드셨어도 그렇다. 부질 없는 왜? 왜?가 먼저 튀어 나온다. 그리고 입맛을 잃고 무기력과 무기력이었다.


내일은 집에서 생신 식사를 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집에서 대식구 식사 준비를 하는지 모른다. 부담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고 해드리고 싶었다. 계단 무서워 딸 집에 못오시는 엄마에게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엘리베이터 연결되는 집을 보여 드려야지. 늙은 엄마의 딸인 죄로 벌써 오래 전부터 엄마 생신 때마다 '마지막 생신일지 몰라' 각오를 단단히 하며 보내곤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엄마 생신은 늘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태어남과 죽음이, 

꿈과 현실이,

죽음과 부활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이 '분별'인지 모른다. 이것을 믿는 것은 소망이지만 그 소망은 핑크빛이 아니다. 입맛을 잃음이고, 생기를 잃음이며, 무기력이고, 위장된 말과 거짓된 관계는 죄 뱉어내고 싶은 삐딱함기도 하다.


책 <분별>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말이 무기력한 내게 주는 로즈 메리 수녀님의 유언 같다.


분별하면서 사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다 명료하게, 더 많이 보기를 바란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달리 선택했을 텐데"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때로는 삶을 더 멀리 보는 비전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근시안이다. 멀리 볼 수 있음은 은총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은 그때가 되면, 그 다음이 여기에 있을 때 우리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을 기다리면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온전하게 참여해야 한다. 지금이 우리가 가진 순간이며, 생명의 전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다음 순간은 이 순간에 충실하게 집중하는 데서부터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 없다며 어떻게 될까? 이 순간이 전부라면 어떻게 될까? 이것으로 충분한가?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산 것으로 삶을 잘 살았다 생각하고 평화롭게 휴식할 수 있을까? 분별하는 삶은 우리가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을 때 시작될 것이다. 




월요일을 영화 <가버나움>으로 시작했더니 한 주간이 무겁다,

라는 말도 가볍다.


나는 왜 '자인'이 아니고 난민이 아닌가.

나는 어쩌다 (대체 뭘 잘한 게 있다고) 국적이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보장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시작한 질문은 최근 몇 달, 아니 몇 년 내 존재를 뒤흔드는 질문을 자꾸 끌고 나온다.


나는 어쩌다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뒷자리 '2'와 정체성이 충돌하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왜 성소수자가 아닌가.


나는 왜 세월호에 아이를 태워보낸 엄마가 아닌가.

나는 어쩌다 아침 저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미친 행운을 누리는가.


금요일은 여성 인권 운동가, 위안부라 불리는 김복동 할머니 발인이었다.

며칠 그분의 인터뷰를 다시 읽고 영상을 돌려 보았다.

성폭력 전문 상담가 교육을 받는 금요일 수업엔 오전 내 영화와 영상 두 편을 보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멀쩡히 승승장구 하는 가해자와 같은 세상을 사는 피해자들이,

한때 장래가 촉망 되었고 우등생이었고 매력이 넘치던 피해자들이 차마 끝맺지 못하는 물음을 던진다.

왜 하필 나죠? 왜?


그 질문 앞에 몸과 마음이 풀어 헤쳐져 바닥으로 흘렀다.

다시 나는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나는 왜 멀쩡히 살아 있고, 존엄을 지키고 있는가.


<가버나움>의 자인은, 열두 살 자인은,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있던 자인은,

출생 기록도 없고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자인은 부모를 고발한다.

죄목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이다'


나도 언젠가 그 비슷한 고발장을 쓰고 제출했던 적이 있다.

다만 부모가 아니라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내 하나님이었다.

바닥에 뒹굴고 내 몸을 자해하고, 피를 토하며 고발하던 끝에, 

응답인 듯 응답이 아닌 듯, 수용인 듯 체념인 듯 실존을 그저 끌어 안았다.


열두 살 자인은 고발장을 쓰는데 내 심장이 다시 불끈거리지만,

나는 이제 고발장 쓰기도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자인에게, 나의 아이들에게,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답을 하거나

할 수 없다면 변명이라도 둘러대야 할 것 같다. 


약자를 향해 배제와 혐오를 서슴치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열두 살의 패기가 끓기도 하지만

끓는점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화학반응이 일어나 슬픔과 무기력이 되고 만다.


그저 묻고 또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물으면 생각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정가 13,500원 짜리 책을 20,000원에 싸게 샀다.

정말이다. 싸게 산 거다.

절판된 책인데 알라딘 온라인 중고에는 없고,

회원 중고에 올라온 몇 권의 책이 29,000원에서 57,000원까지 나와있다.

누군가 꼭 갖고 싶어하는 책을 귀신 같이 알고 

이렇듯 어마어마한 웃돈 얹어 파는 사람들이 있더라. 

오프라인 중고매장에는 인천에 한 권, 대구에 한 권이 있다.

인천 정도는 마음 먹고 가볼 만 한데 시간이란 게 없다.


긴 방학을 맞아 빈둥빈둥 하는 현승이에게 기대 없이 던져봤다.

남는 게 시간인데, 시간 뒀다 뭐 할래?

엄마 책이나 한 권 사다주라.

콜!

책값에 맥도날드 햄버거 값, 차비 포한 2만 원에 퉁쳤다.

그래도 만 원은 앉아서 번 게 된다.


2008년에 나온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라는 책이다.

감정을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정혜신 박사의 최근 작 <당신이 옳다>는 당신의 '감정'은 언제나 옳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도 감정은 자신의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내적 여정, 치유 글쓰기, 꿈과 영성생활.

특별한 집단여정을 안내하면서 감정이 어떻게 '문'이 되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알고 의식화 하는 사람이다.


감정에 대해 강의에 도움 받은 책과 저자가 많다.

훌륭한 분들이고,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벽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분들이 '남자'라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의 몸으로 살며 느끼는 감정이란 남자의 그것일 수 없다,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것들이 남자와 같을 수 없다, 고 

나의 경험, 그녀들의 경험이 자꾸 말한다. 


20대 후반에 만난 '여성주의' 심리상담가 미리암 그린스팬의 

<우리 속에 숨어 있는 힘>을 다시 읽다 보니, 

20년 전 내가 도대체 뭘 읽었었나, 싶다. 

알아듣긴 하면서 밑줄을 쳤을까?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의 감정을 쓴 책이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이다.

그러니 여느 감정 공부와 같을 리 없다.


요즘 서점가에 흔한 것이 감정에 관한 책이지만,

여성의 몸에 담긴 여성의 감정을 말하는 책을 만나기는 어렵다.

여성의 몸이란 오랫동안 남성들의 욕구 대상으로서의 몸이었다.

롤로 메이가 말한 것처럼 '여성은 자기 몸에 갇힌 생물학적 죄수'이다. 

갇힌 몸에 담긴 감정이란, 겹겹이 포승줄로 묶인 감정이란.


여성이 말하는 여성의 감정을 배우려면 웃돈을 많이 얹어줘야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니 13,500원 짜리 책이 6,800원 달고 중고매장에 꽂혀 있도록 두는 것은 옳지 않고,

20,000원 아니라 30,000원 쯤 들여서라도 구해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자 딸이 아니라 남자 아들의 시간과 노동, 즉 '효도 페이'를 활용한 것,

그 아들이 기꺼이 활용 당해준 것도 어쩐지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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