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친구 엄마들과의 만남을 안 좋아한다. 시간이 안 되기도 하거니와 영어 뭐해요?수학 어느 학원 다녀요? 깔대기 대화에 어디 낄 자리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끔 현승이 수영하는 걸 기다리느라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서 흘려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된다. 언젠가 2월 말 어느 날 수영장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엄마들 수다 주제는 다음 학년 담임 선생님 얘기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몇 반에 어느 선생님 정보는 물론, 선생님의 스타일이며, 좋아하는 아이 유형까지 꿰고 정보를 나누고 있는데 기겁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애 키우면서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너는 뭐 그리 고상을 떨었쌌냐? 돌이 날아올 수도 있게지만 어쨌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리가 학교 엄마들과의 만남이다.


그런데 솔까말.


신앙 좋은 여자들 모여서 '하나님, 은혜, 축복, 기도, 감사...' 이런 몇 단어만 가지고 얘기하는 모임보다는 학교 엄마들 수다가 차라리 낫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무조건 감사에다 성령은 충만한 나눔이면 여기 역시 낄 자리 없다고 느낀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삶이 진정 말과 같아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분들이라면 모를까. 말과 삶의 괴리를 피차에 아는데도 공식 나눔 시간만 되면 은혜, 감사, 축복 이럴 때 참 듣고 있기가 어렵다. 한 두 사람이 그럴 수 있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거룩해지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믿음은 없는데다 까칠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의 늪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무소부재한 하나님라지만 우리 일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자주 힘겹고 막막하다. 은혜의 하나님이지만 그 은혜를 삶에서 몸으로 느끼기엔 얼마나 막연한 것인가.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만 정말 내가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니 차라리  학교 엄마들처럼 있는 말과 욕구가 일치하는 얘길 듣는 걸 참아내는 것이 더 쉽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솔까말.


균형잡힌,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자신의 거친 욕구와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을까?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서 메마른 나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나는 경험해 보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마치 이것을 진하게 경험해 본 사람처럼,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이름 붙이고 나는 갈망한다. 진실로 갈망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갖춰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 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시절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온전한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도, 불가능성도 각각 100%라는 생각이다. 너무 어려운 일지만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래리크랩이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 초반에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어쩌면 나란히 앉아 있던 사람들끼리 의자를 돌려 마주보고 앉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선택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규명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래리크랩 식으로 표현해보자. 인간 마음에는 윗방도 있고 아랫방도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내 영혼의 윗방도 분명 존재하지만 뱀이 기어다니고 구정물이 이는 내 아랫방에 대한 직면하고 통과하지 않고 내 윗방으로 올라갈 수 없다. 아니, 윗방을 사는 것과 누리는 것은 아랫방에서 뒹굴고 있는 나를 인정하면서 '내게는 윗방도 있는데 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라고 묻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참된 공동체는 자신의 아랫방의 욕구들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이고, 드러내고 받아들여졌을 때 비로소 함께 꿈꾸고 누릴 수 있는 곳이 윗방이다. 그러면 모두 누가 누구를 안전하게 받아줘야 하는가? 나를 거절하지 않고 수용해줄 안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라도 자신 안의 선함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다. 사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것이어서 아주 작은 한 방울이 떨어져 적시면 이내 흥건해지고 이리저리 흐를 만큼 불어난다. 때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상대에게서 더 선한 것이 더 많이 흘러나오는 것을 맛본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대한 꿈을 놓을 수 없다. 설마 내게서 이렇게 좋은 것이 나갔을 리가? 라고 물으며 다시 한 번 자기를 포기하고 한 방울 떨어뜨리기를 시도했을 때 우리들의 의자가 서로를 향해 돌려지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부부관계에서 그렇고 사춘기 아이와 그렇고, 소그룹 공동체에서도 그렇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신앙적 가면을 쓰고 은혜 축복을 반복하는 모임에서 편치 않은 나 자신이 까칠하고 약간 재수없는 아줌마라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은근한 불안이 밀려올 때가 많다. 불안하지만 이대로의 나를 옳다 여기며 살기로 한다. 래리크랩의 책 속 세상에서는 불안한 나의 정체성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꿈꾸는 아줌마가 이렇듯 까칠한 캐릭터라는 적에게 알리지 말라! 그러나 포기하진 않는다. 그 어디나 가장 안전한 곳 되도록 깨진 나를 드러내고 깨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노력 만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까.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사이드 신실  (8) 2014.04.12
이현주 목사의 꿈 일기  (5) 2014.04.08
래리 크랩, 여기는 안전합니다  (4) 2013.11.24
비판은 '예술'이다  (2) 2013.11.18
몸에 밴 어린시절  (10) 2013.11.14


 


래리 크랩의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라는 새 이름을 달고 재출간 되어 나왔다.
이 블로그의 간판이기도 한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 내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철들고 시작된 자아, 신앙, 행복, 교회, 소명에 관한 고민들에 총체적인 답을 얻은 책이다.
나는 다분히 에피쿠로스적이라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일을 어떤 명분을 갖다대도 살지 못한다.
내가 '공동체'에 꽂히는 이유는 제자도로서의 당위가 아니라 내 행복을 찾고자 함이다.
때문에 가정교회 목장을 하면서,
남편이 청년부 사역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서 밥을 하며 모임하는 일이
정말 힘들었지만, 힘들지 않았었다.
공동체는 내게 당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행복의 근거이다.
이런 나 자신에 대해서 인식하게 해줬고,
통합해 정리해준 책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 저자와 함께 여정을 같이하는 것은 행복이다.
이 땅의 여정을 끝내고 천국으로 이사가신 나우웬 신부님과 브레넌 매닝님, 스캇 펙 박사님.
이 나이에 그 훌륭한 분들의 삶의 여정은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경험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래리크랩의 저술은 나의 여정과 기가 막히게 맞물리면서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다.
정직하고 정답을 던지지 않는,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고민을 드러내되
전문가인 척 하지 않는,
나의 래리 크랩이다.


<결혼 건축가>는 그의 초기작이다.
젊은 시절, 결혼을 통해 관계의 단맛 쓴맛을 맛보며 쓰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을 것이다.

<영적 가면을 벗어라
>는 내게 충격적인 책이었다.

에니어그램을 만날 때가 아니라 이 책을 만났던 그때 내 내면여정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남편과 처음 교제하다 헤어졌던 청년부 시절,

헤어짐의 고통에 더하여 청년부에서 어떤 일로 관계가 다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죽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때 읽은 <격려 상담>이 나를 살렸다.

래래크랩이 아들과의 갈등을 겪으며 상담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을 바닥에 팽개치고 써 낸 책이

<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신이 이뤄온 저술과 강의에 누가 될지 모르는 고백을 담아 썼다는 것이 감동이었다.

<내 영혼은 이런 대화를 원한다>
암선고를 받고나서 그 경험으로부터 시작한 책이다.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이, 영혼이 원하는 대화는 무엇이겠는가.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 내 존재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내가 기도에 목말라하고 있을 때 기도에 관해 가장 정직한 책, <파파기도>가 나왔다. 거창한 관상기도, 렉티오 디비나... 이런 거 아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지도 위에 빨간 압정 꽂듯 정직하게 짚고 기도로 가라는 얘기다.


교회에 대해서 미치도록 회의하고 있을 때 <교회를 교회되게>가 나왔다. 이 책을 손에 넣은 시기, 노 신앙이 그 연세에 교회에 대해에 대해서 쏟아놓는 고민. 둘 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성경에 대한 새로운 눈이 떠졌을 때

<하나님의 러브레터>가 나왔다. 이 책과 함께 메시지를 읽으며 나눈 벗이 있었다. 그 시간이 참 귀했다.


이러니, 내 아이디 larinari에 래리 크랩을 모셔들인 것이 오버는 아닐 것이다.
나의 래리 크랩이 페북에서 조롱당하는 것을 보았다.
신간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어떤 이들의 대화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래리 크랩이 정신실도 아니고. 어쩌다 블로그질 열심히 하고, 여기 저기 연재 좀 하다가 운 좋게 책 한 권을 낸 정신실도 아닌데..... 그런 모욕을 당하시다니.
그 대화를 읽고 밤잠을 설쳤다. 정작 거기에 한 마디도 못했다. 래래 크랩, 지못미! ㅠㅠ


유진 피터슨이 쓰신 서문 일부이다.
'하지만 의외로 래리 크랩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이것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충고일 것이다. 순식간에 친밀해지는 경우는 없다. 지름길도 없다. 혼란과 실망을 피할 수도 없다. 오히려 우리처럼 허둥대거나 절뚝거리는 깨어진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힘겨운 모험을 평생 동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인 정직함과 절박함은 공동체를 상품화하는 우리 시대의 상업주의 정신과 대비된다.'


래리 크랩 특유의 정직함과 절박함이 독자연(讀者然) 하는 이들의 눈에 차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온전히 다독여지질 않아서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이 곳에서 뒷담화 하는 바이다. 나의 래리 크랩, 그분의 친구인 댄 알렌더의 책 한 권 한 권에 눈을 맞추면서 이런 저런 마음을 달래본다. 그리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그분이 계신 콜로라도 덴버를 향해 띄워본다. 천국에 가서 만나면 한국식으로다가 제대로 큰절 한 번 올리고 말 것이다.

 


 

 

 


 


삶과 신앙에 대한 고민이 사뭇 진지해져 풋내기 구도자가 되어가던 여고생 시절이었다. 어쩌다 손에 든 루이제 린저의 <고독한 당신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 한 장의 사진처럼 마음에 남았다. 수녀 두 분이 기차 안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한 여자를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라는 이야기이다. 여자는 화려한 복장과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마주앉은 수녀님들과는 다른 차림새였다. 그 여자의 외모와 두 수녀의 눈빛을 길게 구체적으로 묘사해놓았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심플한 정의를 내렸다.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제 막 신앙의 눈을 뜨기 시작한 여고생은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낯선 여자를 향한 두 수녀의 공격적 시선이 클로즈업 되고 그 위로 사랑이란?’ 하는 자막이 올라오며 화면이 정지된다. 이 화면 그대로 액자가 되어 내 의식의 한 벽면에 걸려있다.

 

오래 된 숙제

이것은 내게 막 베어 문 선악과 한 입이 되었다. 그로부터 눈이 밝아져서 내 안의 수녀님 시선을 알아채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사랑에 반하는 것이라 하니 당장 떼어내고 싶었지만 안경을 벗듯 휙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수녀님 눈빛 제거하기신앙 여정에 가장 부담이 되는 숙제가 되었다. 여고생 때 받은 숙제를 중년이 된 지금까지 붙들고 있음에도 딱히 큰 진전이 없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차마 내보이지 못하고 온유함의 선글라스같은 걸로 위장하는 기술만 늘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는 여과 없이 비아냥과 경멸의 시선을 쏘고 지나친다. 그런 나를 의식하는 순간 느끼는 고통은 매우 크다. 그 시선은 다름 아닌 나와 다른 모든 것을 향한 비판 또는 비난의 태도이다. 그리하여 비판이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 맞닥뜨려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며, 내게 죄책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나는 또 한편으로 비판의 화살을 맞고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잠정적 피해자로서의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이렇듯 내 안에 충만한 비판주의오랜 시간 학습한 과제이지만, 안팎으로 오가면복잡하게 얽혀버려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비판의 기술,
or 예술

이런 내가 <비판의 기술>이라는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일단 카트에 담고 볼 일이다. 물론 기술이란 말이 목에 걸려 잠시 주춤하긴 했다. 한때 논쟁에서 이기는 법류의 책에 목을 매던 적이 있었다. 예의 그 수녀님 시선을 벗어나보자는 노력이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내가 쏟아내는 비판에 대해서,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논리적 근거를 만들어 낸다고 해서 수녀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고도의 세련된 기술을 제대로 익혀보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비판을 잘 하는 기술이라면 더 배우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대화의 기술, 용서의 기술, 비판의 기술.....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지난한 일에 따라붙은 기술이란 말은 빠르게 달리는 달팽이라는 말처럼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편치 않은 마음으로 책을 살피던 중 원제에 눈이 꽂혔다.

“Making Judgments Without Being Judgmental”

그렇지! 딱 좋네. 그러고 나니 책 표지의 부제, ‘정죄를 벗어나 분별에 이르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펼쳐 몇 페이지 읽어나가니 기술때문에 가졌던 부정적 혐의는 금세 사라졌다 

비판주의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비판주의가 얼마나 미묘한 문제인지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덜 비판적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혀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비판주의라는 주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비판적인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p24)”  


수녀님 눈빛 치유하기

책의 미덕은 끝까지 이 전제에 충실하게 풀어간다는 것이다. 미묘한 비판주의를 신중하게 다루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비판주의에 겸허하게 접근한다. 그러면서 비판주의의 그늘에 숨어 있는 것들을-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죄스럽게 느끼는 수치심, 나르시시즘- 하나하나 드러내 보여준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비판주의의 원고석에서 피고석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며 좌불안석이었다. 진실로 비판주의로부터 자유롭기 원한다면 감수해야할 불편함일 것이다. 내 안의 수녀님 눈빛치유하기는 참된 빛을 마주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벗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자면 강렬한 태양빛으로 인한 아픔과, 암흑의 고통을 견뎌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판주의의 그늘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과 권위적이고 경직된 태도가 모두 내 것임을 머리 아닌 가슴으로 인정해야 하는 고통이다. 그러자니 정죄를 벗어나 분별에 이르는 길은 한두 가지 기술을 익힌다고 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정은 내 은밀한 내면을 깊이 성찰하며 나의 중심에 거하시는 그분께로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는 길이었다.


1
1초가 멀다하고 접속하여 마음을 뺏기는 SNS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은 크고 작은 비판의 향연 같다. 선한 가치를 위한 꼭 필요한 비판, 예의바른 언어에 포장된 독기 가득한 비판, 혼잣말 같으나 누군가 들으라는 비아냥조의 비판. 이 모든 비판에서 주어이기도 목적어이기도 한 우리에게 한 발 물러나 독을 빼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럴 때 좋은 안내가 되어줄 책이 <비판의 기술>이다. 물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판 기술자를 만들어주는 비법은 없다.

 

IVP 북뉴스 2013 11-12월 호

 

 


 


내가 중학교 1학년,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 우리 채윤이가 중하교 1학녀, 현승이가 4학년.
중학교 1학년 여자 아이에게,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에게
아버지를 갑자기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올 가을엔 우리 아이들 보면서 그때 나와 동생을 떠올려보게 된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당한 이 인생의 테러에 슬퍼하지도 못할 나이이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 그저 시간을 보내고 어른이 된 것이다.
그날로부터 그냥 얼어붙은 채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추도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 추도식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만큼이나 엄마 걱정을 하며 자랐다.
그렇잖아도 나이가 많은 엄마, 엄마마저 돌아가시면 어쩌나.
요즘도 아버지 추도식마다 엄마 걱정을 더 많이 한다.
내년에도 엄마랑 같이 추도예배를 같이 드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 들었던 그 12월,
그때 얼어붙은 중학교 1학년 나는 늘 갑자기 들이닥칠 죽음에 두려워 떨고 있다.
죽음이 갑자기 들아닥쳐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늘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상상하곤 했었다.


이번 주 어느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참 좋은 기억을 떠올렸다.
질문의 아름다움이 기억의 아름다움을 꺼내게 만든 것이다
힘들었을텐데 어쩌면 그렇게 꿋꿋하게 잘 지내고, 이렇게 잘 자랐어요?
그 질문에 나도 모르게
사랑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 사랑 듬뿍 받았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를 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진 속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 적의 상실감이나 사랑이나 이제 와 생각하면 그리움이다.
여전히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만날 때마다 보듬어 안아주듯
내 곁의 두 어린아이 채윤이와 현승이를 더 따뜻하게 보듬어야지 결심하게 된다.

 

 


 

 


주제가 있는 책소개 - 소명 <QTzine> 10월호

 

고든 스미스 <소명과 용기> 생명의 말씀사

 

프레드릭 뷰크너의 소명에 관한 정의를 처음 접했을 때 , 이거다!’ 무릎을 쳤다. ‘소명이란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세상의 가장 큰 필요가 서로 만나는 자리를 말한다.’ 지지부진한 고민들이 단칼에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소명을 찾아 갈림길에 선 사람들,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친구들에 의해서 흔히 인용되는 교과서적 정의로 자리 잡은 듯하다. 문제는 이 명문(名文)이 어떻게 하여 나만의 문()이 되어 밝은 내일을 열어주겠냐 하는 것. ‘나의 기쁨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것과 조우할 세상의 필요는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과연 자신의 소명(좁은 의미의 직업)을 통해서 기쁨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게다가 그것이 세상을 위한다는 확신까지 품은 사람은 또 얼마나 있겠나. 세상의 필요는 둘째 치고 내가 무엇을 기뻐하는지도 모르는 것이 소명 앞에 선 우리의 막막함일지도. 또 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안다한들 그 기쁨을 누릴 소명의 자리가 떡 하니 나타나거나, 나타나더라도 덥석 내 것이 되어준단 말인가? 한창 진로를 고민하는 제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막막함에 나까지 빨려드는 느낌이다. 대졸자 실업률이 고공행진이라느니 비정규직이 어떻다느니 하는 세대에 소명을 생각하다니 너무 잉여로운 고민이나 하고 있는 것인가.

 

고든 스미스의 <소명과 용기>는 이 막막한 시대의 위기를 진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자리가 부족하여 원할 때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고용의 위기, 그 와중에 능력부족을 절감하며 겪는 자신감의 위기는 직업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는 보편적인 불안이다. 여기에 더하여 초점 없는 분주한 일상을 반복하는 의미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우리의 세대이다. 현실감각 충만한 신학자인 저자는 위기에 맞선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을 들려준다.

구인광고를 찾아 부지런히 인터넷 사이트를 서핑하고, 멘토를 만나 조언을 듣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를 알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모름지기 무엇을 찾는 자의 자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마음 에너지의 방향을 밖에서 안으로, 급진적으로 선회하라는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읽혀진다. 저자는 로마서 12:3-5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소명을 주셨으며,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요구하시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답으로 두 가지 명령을 주신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문제에 대한 이 아니라 숙제같은 명령을 주신다. , 답은 그 명령을 이행할 때 각자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존경하는 목사님이 기도해보셨더니 딱 이 길이다.’가 아니라 자신을 깊이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어렵지만 흥미진진한 인생의 보물찾기 일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는 소명 발견을 위해서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한 친절 안내가, 후반부에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에 대한 독려가 담겨 있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헨리 나우웬의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은 차분히 읽어야 하는 책이다. 구인 사이트를 닫을 뿐 아니라 컴퓨터를 끄고 기도하듯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 울리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세상의 길이냐, 그리스도의 길이냐. 고지를 향해 올라가는 상향성의 삶이냐, 십자가를 향해서 끝없이 내려가는 하향성의 삶이냐. 중간지대는 없다. 고지를 선점한 후에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이끌겠다는 식의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명, 그 다음은 용기일 수밖에. 하향으로의 부르심에 따라 캐나다의 장애인 공동체에서 생을 마감한 저자의 삶이 그대로 글이고 책이 된 셈이다. 때문에 침묵처럼 고요한 그의 말은 영혼의 깊은 갈망을 일깨운다. 고든 스미스가 소명을 찾기 위해 안으로의 방향 선회를 제안하듯 헨리 나우웬은 아래로의 방향지시등을 조용히 밝혀준다.

가을이 깊어간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저절로 읊조려진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나를 가꾸기 좋은 비옥한 시간이다. 비상등을 켜고 멈춰 서서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를 점검하기 좋은 날들이다. 두 권의 책을 네비게이션 삼아, 두 분의 목소리를 따라 소명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시작해 보자.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판은 '예술'이다  (2) 2013.11.18
몸에 밴 어린시절  (10) 2013.11.14
니 연애의 모든 것  (8) 2013.08.22
2013 여름, Kosta 생각  (2) 2013.08.03
능력충만이 아닌 성령충만  (0) 2013.06.27

 

 

연애소설을 읽는다. 소설, 특히 연애소설은 젊었을 때도 거의 눈길을 주지 않던 분야이다. 중년의 아줌마가 카페에서 연애소설을 읽고 있는 풍경이라니.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양 갈래로 묶은 머리처럼 부조화하지 않은가. 그래도 읽는다. 재미도 있다. <내 연애의 모든 것> 대한민국 보수정당 남자 국회의원과 진보정당 대표인 여자 국회의원이 사랑에 빠지는 얘기다. 중반까지 아주 재밌었다. 연애라인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집중적으로 연애 얘기만 나오기 시작하니 급 재미가 없어졌다. 연애는 주변인들, 다양한 정황들과 맞물려서 흐릿한 스토리 라인일 때가 제 맛이다.


연애 상담을 하면 길게 잡아 10분 안에 그 친구가 가장 힘들어하는 관계문제, 자아상, 의존문제, 부모와의 관계 등 본질적인 문제로 다가갈 수가 있다.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흘러간다. 연애 문제는 단지 로맨틱 러브에 그치지 않고 싱글들의 삶 자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박동 같은 것이다. (연애 하든 안 하든, 스스로 인식하든 못 하든) 그래서 연애는 전인격적이다. 인생이 문제는 결국 '궁극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넓은 의미에서 로맨틱 러브 역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전인격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박원순 시장님과 스쳐 지나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몇 년 전에 연대 앞 창천 교회에서 '데이트 코칭 스쿨'인가? 하는 스쿨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몇 주 과정이었는데 나는 두 번의 강의를 맡아서 했다. 그분의 블로그에 갔는데 창천 교회 앞에 내걸린 '데이트 코칭 스쿨' 플래카드를 찍은 사진에 '요새는 데이트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군요.'라는 조금 어이없다는 멘트를 날리셨다. 댓글에 '제가 거기 강사예요.'라고 밝히고 주절거렸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데이트란 전인격적인 문제다. 자아상, 소명과 진로 등 젊은 날의 총체적인 고민과 맞붙어 있는 것이 연애 문젠데 다면적인 접근으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블라블라....  했더니 역시 원순님답게 '아, 그럴 수 있겠다'며 수용을 하셨더랬다. 


'연애 강의'라 하면 어떻게 좀 남자(여자)를 잘 꼬셔보는 꼼수나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교회 안팎의 연애 강사들이 뿌린 걸 스스로 거두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연애 강의를 하는 나 자신조차 '연애 강의는 기술이거나 설교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누워서 침뱉기식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니. 상대방을 특히 여성을 대상화하는 연애강의, 나이 많은 자매들을 희화하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연애강의에는 분노에 가까운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엄밀히 따져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이기에 피로감이 아니라 책임감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책에 다 나와 있는데 왜 고민을 할까?'라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독서로 풀고자 하는 강박 같은 것이 내게 있다. 사람들이 다 나 같은 줄 알고 대화 중에 엄청 책소개를 하고 흥분하는 적이 많다. 청년들과 더 가까이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대부분 청년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생각보다 더 읽지 않는다. 어려운 책은 아예 읽지 않는다!

<오우연애>나 <와우결혼>을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다 읽어 버렸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이라고 하는 말씀들이지만 살짝 내 마음엔 팔자 주름이 생긴다. 쉽게 읽힌다? 내용이 없다는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책 읽지 않는 청년들에게 읽히는 책을 써서 어쨌든 읽게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내가 싱글일 때와 달리 지금은 모든 좋은 것이 과잉인 시대라 연애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매우 많다. 청년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더 많이 읽어서 내 강의에 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에 시달린다. 어려운 책들을 읽어서 쉬운 말로, 말랑말랑한 말로 전해주는 것이 내 소명일까.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에 양 갈래 머리처럼 어울리지 않는 책을 붙들고 '아이구, 내 팔자야' 한다. 좋으면서 싫은 척.


연애는 전인적인 문제라 심리학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이성과의 관계맺기를 말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울지 않는 연애는 없다>는 딱 정신분석적인 연애상담이다. 필요하다. 이런 접근.
모든 연애가 다 개인사기인 하지만 '사랑'은 단지 심리학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연애와 사랑을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볼 때 나이 먹은 자매들은 늘 '내려놓겠다'고 한다. '눈을 낮추겠다'고 한다. 어디서 연애강의만 듣고 오면 내려놓겠다는데 뭘 얼마나 더 내려놓아야, 얼마나 더 자신을 바꿔야 애인이 생긴다는 말이다. 사랑이 아픈 이유를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도 이해하게 해주는 <사랑은 왜 아픈가>는 고마운 책이다.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설명 해도 '사랑이 왜 아픈지'에 대한 답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니까. 사랑의 존재인 우리는 사랑의 근원과 단절되어 있을 때 아플 수밖에 없다. 사랑의 근원으로 연결되는 길은 '고독, 홀로 있음'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 배웠다. 기독교의 언어가 아니라 정신분석학자의 목소리로 듣는 '홀로있어 자기 자신이 됨'에 관한 통찰이 내게는 신선하다. <고독의 위로> 좋다.


연애에 관한 수 많은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된다. '연애'는 내게 재미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연애를 빙자한 올 카인즈 오브 존재론적 고민은 흥미진진진진진. 연애 강의라는 낚시밥을 던지고 룰루랄라 강의하러 다니며 이 나이에 연애계를 못 떠나는 이유일 것이다.

 

 

 

 

'SET FREE INTO FULLNESS'의 빨간 플래카드로 남을 2013년 시카고 코스타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다녀온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일상의 모든 경험과 묵상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 없다. 헌데 코스타 이야기는 내게 '쓰고 가라, 쓰고 가~아라' 하며 지친 내 어깨를 떠민다. 밀쳐뒀던 원고 약속을 지키려면 뭔 얘기가 됐든 코스타를 끄집어내 정리해야 그 밑에 있는 글이고 말이고 나올 길을 찾을 것 같다.

 



1.

수년간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오면서 이번처럼 맘에 든 적이 없었다. 같은 강의를 세 번에 걸쳐서 했다. 세 번이 다 좋았고,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거두절미하고 잘 들어서 좋았다. 특히 수련회 같은 데 강의를 가면 나는 그렇게 힘든 것이 안 듣는 아이들이다. (물론 전혀 개의치 않고 강의하는 척은 잘 하고 있다) 딱 봐도 얼굴에 '엄마가 강제로 보내서 왔어요. 조장 형한테 끌려 왔어요.' 쓰여있다. 맨 뒤 벽에 기대고 앉았는 그가 강사인 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수월찮이 신경이 쓰인다. 코스타에서 세 번 강의를 하는 동안 정말 진지하게 듣는 눈동자들이 강의를 밤무대 삼아 뛰는 내 강사생활 동안 최고라 할 수 있는 감동을 남겼다.

2.
개별 상담도 좋았지만 한 조를 함께 만나는 그룹 상담이 참 즐거웠다. 즐겁다는 표현이 살짝 부적절한 것은 오고 간 이야기가 가슴이 미어지는 얘기도 있었고, 나도 그들도 울컥하는 장면이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즐거웠던 건 그야말로 '오고 가는' 말의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숨기지 않았다. 나는 어쭙잖은 설교할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애매하게 돌려 말하기로 자기 문제 포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케케묵은 내 연애사까지 꺼내놓게 되었고 그 와중에 20년이나 된 내 상처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도 했다. 중요한 건 여럿이 함께 한 자리에서 누구의 눈치도, 강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툭툭 내뱉는 질문들이 우리를 무장해제 시켰다는 것이다.

 

 

3.
주변에서 '난 코스타 안 좋아해요.' 이런 직접적인 표현도 들었고, 코스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 코스타 강사로 가는 일이 무슨 몹쓸 권력과의 타협을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말하기가 꺼려지기도 하였다. 반면에 확인된 바는 없지만, 강사로서의 네임 벨류를 높이기 위해서 코스타에 목을 매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미확인 소문 역시 내 자유를 앗아간 또 다른 미확인 비행물체이다. 그저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가보니까 목마른 젊은이들이 있더이다. 말씀, 좋은 특강, 멘토, 혹여나 있을 이성과의 만남.... 등을 기대하면서 몇 시간 씩 비행기 타고 모여든 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있더이다. 미확인 비행물체를 붙들고 좋다 나쁘다 대단하다 아니다 하시지 마시고요. 코스타는 잘 준비된, 유학생들을 위한 수련회입디다.

4.
코스타를 불편해하는 분들에게 내가 유일하게 공감이 되는 것은 그것이다. '고지론의 산실'이라는 것. 이것은 내 표현이고 내가 가진 선입관이다. 근거는 코스타가 사랑하는 주강사들의 면면이다. 안타깝게 몰락한 전**, 오** 두 분과 페이스북을 통해서 서서히 몰락해가시는 김** 목사님들 말이다. 이 분들이 마이크를 잡고 침을 튀기며 말씀을 전하고 청년들을 헌신시키는 그 뜨거운 자리에서 '고지론' 말고 무엇이 선포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는 그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 고지론이 어떻게 어떤 모양일지도 모르면서 단단히 결심을 했다. 소신 있는 강의를 하자. 비록 이성 교제 강의지만 '축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전인적인 성숙'을 전하기로 하자. 허무하게도 '고지론'과 제대로 맞짱 뜰 일은 없었다.

5.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코스타가 사랑한 고지론 주강사들의 몰락으로 시카고 코스타는 과도기 같은 걸 겪고 있는 것 같다. 리더십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리더십이 세워지지 못한 탓일까?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집회 주강사들의 메시지 때문인 것 같다. 매우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도통 '자유케 하는 복음'의 힘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나의 삐딱하고 눈만(귀만?) 높은 교만'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고지론이 실패한 자리에 확실한 방향 선회(이게 회심인데)이 없는 것 아닐까. 대놓고 '고지론'만 아니면 되는 복음이어서일까? 도통 이 어그러진 세상에서 자유케 되는 참된 능력이 무엇이라는 것인지, 열심히 들어도 나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아, 물론 그럼에도 100여 명의 참가자가 선교사로 헌신 했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한 사람도 꽤 됐다. 그런 결실들을 보며 감사했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청년들은, 아니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기본적으로 무슨 설교를 들어도 은혜받을 태세가 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더더욱 말씀을 전하는 분들은 진지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 청중이 청년이니까,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저 몇 번 빵빵 터뜨려주고,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깊은 성찰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설교'는 들을 만큼 들었다 아이가. 


 

6.
오프닝 특강으로 김근주 교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코스타에 실망하고 삐칠 뻔 했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자유케 되는 복음을 그 강의를 통해서 확실히 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어쩌면 첫 강의가 너무 좋아서 기대가 한껏 높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자유'는 자기 발로 서서 걷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붙들려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선착순 세상, 기회균등이라고 하지만 그 기회란 결국 돈과 능력을 이미 선점한 사람들에게 일착으로 주어지는 세상 말이다. 이렇게 어그러진 세상에서 너도나도 유일한 '고지'(김 교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으로 표현했다)를 향해 달려가며 '욕망'과 '두려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자유의 발목을 잡는 이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진단, 그리고 베데스다 따위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신 예수님이 메시지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어그러진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지 않고 진정한 '자유'란 없다. 어그러진 세상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선회하지 않는 이상 자유란 없다. 개인적으로 코스타 주제에 부합하는 가장 힘 있는 메시지였다. (고지론이 무너지고 난 자리에서 전해져야 할 진짜 복음은 이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내년에는 이런 분들이 집회의 주강사 되시길)

 

 

7.
아, 어메리카에 가니 난 정말 작아도 너무 작은 사람이더라. 어디 앉아 있어도 보이지도 않는 사이즈. 초딩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얼굴만 안 보여준다면 못 골라낼 사이즈. 몸 뿐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사이즈 자체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작은 나 자신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나 자신에 걸맞은 삶 그 이상을 욕망하거나 그 욕망을 붙드느라 두려움에 발목 잡히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주는 청년들을 대상화하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강의하거나 글을 쓸 때마다 '작은 나'를 인식하고 또 인식하려고 한다. 코스타를 경험하고 한 달 동안 곱씹어서 남은 것이 그것이다. 자유. 하루하루 더욱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불같은 성령 임하소서. 지금 임하소서. 태우소서. 역사하소서이런 가사의 찬양을 애타게 부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수련회나 기도회에서 이런 류의 찬양을 부를 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에 엄청난 방점을 찍는다. 갈급한 마음으로 그야말로 목마른 심정으로 지금, 바로 지금이요!’를 목 놓아 외쳤었다. 첫 기억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중학교 1학년 여름 수련회 때였다. 여전히 나는 멍석만 깔린다면 성령이여. 임하소서. 지금, 바로 지금 임하소서라고 부르짖을 태세가 되어있다.


유난히 성령 하나님을 구할 때의 목소리는 애가 타고 시급한 것 같다
. 이렇게 급하게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구하다가 오늘날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턱턱 사람을 쓰러뜨리고, 방언이 터지게 하고, 불치병을 치유하시되 이 모든 일을 순간적으로 처리하시는 분, 심지어 한 사람의 인격조차도 순간적으로 전혀 다르게 바꿔놓으시는 분으로 성령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믿음이 이렇듯 바로 지금, 눈에 보이는 복을 따라 부유하는 가벼움인 것은 그 오해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 즉, 예수쟁이 된 우리는 예수의 음성을 사모한다. 고든 스미스는 그의 책 <예수의 음성>에서 말한다.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라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께 응답하고, 인도함 받고, 그분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한다. 성령께 응답한다고? 매년 수련회 때마다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또렷한 답이 없으셨던 성령님에게 내가 도리어 응답을 한다고? 그렇다. 오순절 사건의 매우 큰 의미는 모든 신자가 각.. ... . ...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우리의 속사람에 대한 성령님의 직접적인 감화에 대한 균형 잡힌 분별에 대해 안내한다. 그 안내에 마음의 귀를 열어 젖어들다가 어느새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성령 충만을 받는다? 내게는 가물어 메마른 땅에 폴폴 먼지만 날리던 날이 있었다. 영혼의 메마른 나날이 오래 지속되었다. 방언을 주시던가, 하다못해 능력 있는 사역자의 터치를 통해 기름부음을 주시던가 어떻게든 좀 해달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그 때 손에 들려진 이 책을 통해 인격이신 성령님이 나의 감정과 지성이 교차하는 속사람 안에 아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고 느..게 되었다. 독서라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 내게 아주 가까이 계시는 성령님을 느끼게 되었다니 기적이라면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니겠나? 성령을 통한 예수의 음성은 양철 지붕에 소낙비 떨어지듯이 아니라 스펀지가 물에 젖듯임하는 것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느끼게 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그 여름의 수련회 때 시작된 긴 목마름이 그렇게 해갈된 것 같았다. 능력을 행하는 성령사역자가 아니라 영성 깊은 신학자의 차분한 가르침으로 말이다.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의 저자 박영돈 교수는 존 오웬을 인용하여 말한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이 성자 하나님을 배척했다면, 교회시대의 신자들은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수천 년을 기다리던 메시아가 갈릴리 빈민촌의 무력한 목수의 아들일리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능력주의 시대에 세미한 음성으로 일하는 성령님이라니 가당키나? 질병과 인생의 문제들을 꾸짖어 떨쳐내는 왕의 권세가 필요할 뿐이다. 사랑을 확증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님? ‘하나님 아냐, 눈앞에서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은 좀 그래이렇게 우리는 성령하나님을 거부한다. 이러한 세대를 향해서 불을 뿜어내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시들게 하고 쇠하게 하는 성령의 후폭풍을 설파하는 신학자의 뜨거움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 성령 충만에 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긴 글의 행간에서는 한국교회를 향한 저자의 아프도록 절절한 애정이 읽혀진다. 성령의 은사를 도구삼아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자칭 성령사역자들과 목회자들이 들어야 하고, 영적 조급증에 허덕이며 그런 지도자들의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우리들이 들어야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야 할 때이다. 배우고 깨닫다가 느껴지고 들리는 참된 기적이 있기를.

 

* <QTzine> 7월호, 주제가 있는 책 소개 - 성령충만

 

 

 

브레넌 매닝의 <아바의 자녀>를 만난 것은 에니어그램에 빠져서 꿀을 빨던 시기였다.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을 마치고 뜻밖에 연구소 강사 제안을 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을 하고 가톨릭 단체인 연구소에 몸 담고 있던 기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수련을 받으면서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교회에 대한 희망이 메말라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숙, 그리고 영적인 성숙에 대해서 풀지 못한 의문으로 살아온 내게 매일 매일 무릎을 치는 답이 주어지는 나날이기도 했다. 개신교 모태신앙으로 자란 내가 가톨릭 단체에 가서 지내면서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은 또 다른 과제였다. '같은 예수님이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었는데 왜 이걸 교회에서 배우지 못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하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는 아이처럼 주눅들고 긴장되었었다. 그때 브레넌 매닝을 만난 것이다. 사제서품을 받았던 그가 프란체스코회를 탈퇴하고 결혼을 했다는 것, 개신교의 (특히 나의 래래크랩!) 영성작가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저자소개만 보고 <신뢰>라는 그의 저서를 집어 들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넘너드는 저자라는 것만으로 꽂혔다. 그리고 <신뢰>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저서 <모든 것이 은혜다>까지, 어린이를 위한 책 <아바를 사랑한 아이>까지 읽고 또 읽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오가며 혼란스러운 내게, 한편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게 <아바의 자녀>는 꼼꼼하게 답해주었다. 놀랍도록 필요한 말을 내 마음에 넣어주었다.


사람의 내적동기를 살핀다는 에니어그램을 좀 배우고 나서 '남의 동기가 다 보인다'며 자만하고 판단하고 정신 못차리던 내게 브레넌은 말했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중 누구도 한번이라도 남의 동기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 이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아니었으면 나는 에니어그램이라는 그 좋은 도구를 가지고 사람을 난도질 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을까? 나를 구원시킨 말이었다.


진정성이란 느껴지지 않는 설교, 공허한 기도 소리, 은혜를 가장한 영적 게으름과 완고함 등으로 환멸이 깊어질 즈음이었다. 종교적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종교의 권위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우리 내면의 바리새인은 거짓자아의 종교적 얼굴이라고 그가 가르쳐 주었다. 내 안에 타오르던 분노와 환멸이 다른 사람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충격적 깨달음으로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다. 내 거짓자아는 싸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끌어 안아야 하는 진리를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거짓자아의 이런 저런 면을 끌어안지 않을 때 그것은 적이 되어 우리를 방어적 자세로 몰아간다. (중략) 자신의 죄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신의 참 자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베드로는 내면의 거짓 자아와 친구가 됐으나 유다는 자신의 거짓자아에 격분했다.


마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그런 잠정적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향해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웬만한 요청들을 거절하지 못한다해도 내 마음이 외부에 영향받지 않을 딱딱한 상태이면 드러나는 것은 가짜요, 자기방어일 뿐이다. 브레넌은 이렇게 정리해 줬다. '영향을 입을 줄 모르는 심장은 인간 실존의 어두운 신비 중 하나다. 그 심장은 게으른 마음과 나른한 태도와 묵혀 둔 재능과 묻혀진 희망으로 인간 내부에서 차겁게 뛰고 있다.' 내 마음이 타인을 향하여 말랑말랑해지는 것, 무엇보다 아바의 사랑을 향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마지막 저서 <모든 것이 은혜다>에서 보여준 그의 적나라한 고백은 한 글자도 빼놓을 수 없이 '모든 것이 내게 은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제였고, 영적 지도자였고, 유능한 강사였고, 저자였던) 브레넌을 그 이름 외에 달리 부를 호칭이 없다. 별다른 호칭을 가지지 않은 그가 마지막 저서에서 보여준 것은 '언해피 앤딩의 인생'이었다. 사랑을 위해서 사제 서품을 버리고 결혼을 했으나 이혼의 아픔을 안고 외롭게 노년을 보내는 그 쓸쓸함, 유능한 강사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주께 돌아오게 한 후 잠수를 타서는 알콜에 빠져들었음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그 처절한 굴욕. 그런 적나라한 고백들은 '나는 인생 잘못 살았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그의 삶에 어찌 자랑거리가 없으며, 성공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례가 없겠는가. 말년의 그에겐 '부랑아'의 여정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고 그럴 때 비로소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는 말이 '모든 것이 은혜다'인 것이다. 온 몸으로, 전 인생으로 브레넌이 고백하는 것은 '은혜, 그렇게 값 싼 종교적 유희가 아니다' 라고 들린다.


지난 주일 아침,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단 뉴스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주일 예배에 가서는 그를 마음에 품었고, 때문에 그 예배는 '브레넌 매닝 천국 환송예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천국을 향한 소망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한 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한 없이 고마운 분이다.


브레넌,
아바의 안전한 품에서 편안하시죠?
2년 전에 먼저 그 곳에 도착하신 그리운 저희 시아버님, 청년 한솔이,
오래 전, 어린 제게 크나큰 이별의 상처를 남기고 떠나
곳에 터줏대감이 되셨을 우리 아버지. 모두 만나셨나요?

헨리 나우웬 신부님과도 기쁘게 얼굴 마주하셨겠죠?
그 분들께 안부 전해 주세요.
특히 최근에 그 곳에 가신 저희 작은 고모 좀 챙겨 주세요.
이 곳에 사실 때 저희 남매와 엄마에게 굴욕감과 상처를 많이 주신 분이에요.
입관식에서 고모한테 말했거든요. 우리 아버지 만나면 싹싹 빌고 사과하라고요.
사과한 것이 확인되시면 이 말씀 전해 주세요.
고모도 누굴 사랑하거나 다독여 줄 처지는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고요.
그렇지만 고모를 용서하는 것은 제가 나중에 가서 직접 할게요.
저 역시 그 곳에서 그립던 모든 얼굴들 만날 수 있음을 알아요.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 라고 한 당신의 말을 기억해요.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가 있는 그 곳,
그 곳을 향해 한 걸음 씩 더 가까워지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며
죽음에 용감히 마주설 수 있도록 현존하는 부활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책 <아바의 자녀>에서 전해 준 그 고백들을 제게 선물처럼 주어진
에니어그램을 가르치면서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 일을 제 남은 인생의 소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고마워요. 브레넌.
거칠 것 없는 그 곳, 아바의 품에서 잘 지내세요.
안녕.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 지도 몰라요.’(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

 

어려워진 관계를 풀어보려고 애를 써보는데 풀리기는커녕 더 골이 깊어지는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을 때 생각나는 노래다. 이 세상에서 온전한 회복이 있겠는가. 온갖 오해와 미움 벗어버리고 맑은 얼굴로 만날 날이 있으리라. 지금 여기 말고 그 나라, 그 좋은 나라 말이다. 이 노래가 주는 위로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천국은 너무 멀고, 당장 이번 주일에 ‘당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문제’는 나남이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소그룹 모임에서 반드시 피해야할 토론 주제가 있는데 ‘정치’ 라고 한다. 분명하게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맞붙어 얘기해 봐야 서로의 말에 베이고 찔려 피차 상처받는 것 외에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제랄드 싯처가 <사랑의 짐>을 통해 내놓는 해법은 ‘서로’에 방점을 찍고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 달고 나왔던 제목, <차이를 넘어선 사랑:Loving Across Our Difference>은 ‘서로의 차이 vs 서로 사랑’의 공식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첫 장을 ‘서로 반가이 맞아들이라’, 즉 ‘인사하라’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나와 달라 힘겨운 그 사람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만 봐도 심장이 쿵 내려앉지만 ‘인사’하는 정도의 ‘사랑’은 다시 해 볼 수 있겠다 싶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으니 관계 문제로 인한 분노와 죄책감의 ‘수고롭고 무거운 짐’ 을 내려놓고 대신 쉽고도 가볍다고 하는 그 분의 멍에, ‘사랑의 짐’을 지겠노라는 결심 같은 것이 선다.

 

 

 

 

살짝 틀어진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은 '그 사람은 나쁘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꼬리표를 붙여버릴 때다. 그 사람이 나쁜데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선할 수 없다. 결국 나도 같이 나빠지기로 하면 끝도 시작도 없는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심리상담가이지만 성경적 인간관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저자는 끊어진 관계가 다시 결속되는 것은 내 안의 선한 충동이 이끌어져 나올 때라고 한다. 내게 선한 충동이 있다고? 설령 있다 해도 그 선한 충동이 나에 대해 험담하는 친구, 고집대로만 사는 대화가 안 통하는 남편,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통제하는 목사님에게 풀려나가야 한다니? 래리크랩은 독자보다 먼저 이 의문을 제기하고 답한다. 그렇단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흘러갈 선한 것이 내 안에 있단다. ‘선한 충동’은 제랄드 싯처가 말하는 ‘서로 사랑’의 다른 버전이다. 그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 하니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끊어버린 페이스북 친구를 다시 구제하여 연결되는 그런 소망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좋은 나라에 가기 전에 바로 여기서 말이다.

 

 

인면수심의 범죄자 이야기에 치를 떨지언정 솔직히 말하면 그를 용서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내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 그(그녀)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는 것보다는 말이다. 아니 말 자체의 모순이다. 그 범죄자는 아무리 지은 지가 중해도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대상은 아니니까. 힘겨워진 관계를 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서 크든 작든 ‘용서’는 필수 과정이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며 쌍방과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틀어진 관계는 용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필립 얀시가 ‘용서 전문가’라고 부르는 루이스 스미디스의 <용서의 미학>은 다짜고짜 용서하라 설교하지 않는다. 용서의 ‘용’자도 떠올리기 싫은 해를 당한 우리 마음을 깊이 알아준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잘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쓰라린 마음과, 그가 나의 또 다른 지인과 아무렇지 않게 히히덕대는 걸 보면서 분노로 빨라지는 심장박동도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안내한다. 결국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하게 되는 것임을. 용서전문가의 안내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그(그녀)가 ‘정말 잘되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 용서를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잠깐의 위로나 받자고 부르는 자위의 노래가 아니라 온전히 회복되는 그 날을 기대하는 참된 소망의 노래로 말이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곳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 거예요.’

 

<큐티진> 4월호, 주제가 있는 책 소개 - 관계


itistory-photo-1




연애는 썩 추진되지 않고,
싱글의 나날이 오래간다 싶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우연애>를 읽고 또 읽고, 읽다가 낡으면 새 책으로 하나 더 사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일용할 연애가 찾아온답니다.


그러나, 연애서적을 읽는데 눈을 크게 떠보자구요.
종교코너 밖으로 한 번 나가보니 이게 웬 걸!!!
<오우연애>만 좋은 연애서가 아니라는 거죠. ㅎㅎㅎ

소 책을 잘 안 읽는다.
그리고 연애 한 지가 오래다. 이러다 연애세포 다 죽겠다. 
하는 사람들은 일단 소설을 읽읍시다.

박민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읽고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 이런 가슴 저린 사랑....꿈꿔보라구요.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도 읽어보시고.
('평소 책을 잘 안 읽는다. 게다가 난 MBTI로 S가 강하다.'
잘 안 읽힐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고 좋은 사람은 G라고도 불리는 '서해인'과 수다 한 판 떨기를 추천합니다.

연애의 인문학 버젼,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읽고 연애의 혁명을 이뤄보시고.
그리하여, 교회오빠 교회언니의 사고 틀을 한 번 쯤 훌쩍 뛰어넘어 연애 생각을 해봅세다.

마리 루티 교수의 <하버드 사랑학 수업> 이 최상급 강추 서적입니다.
'뭐야, 사귀자마자 섹스를 하는 것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긴단 말씀?' 하면서
사단의 책이라 여기지 말고 분별하며 읽어보면 그 어떤 책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남성의 심리를 파악하는데(여성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투여하는 잉여짓을 멈추고, '나'로 눈을 돌리게 하는 책입니다. 나로 눈을 돌려서 정직하게 내 욕구를 알게되면 사랑의 실패 따위에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들을수록 사고의 폭을 좁아지게 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지게 하는 어설픈 크리스쳔 목사님이나 강사들의 강의보다(아, 나도 살짝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ㅠㅠ) 더 심오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래리크랩, 제랄드 메이, 데이비드 베너와 함께 브레넌 매닝은 신간목록을 뒤적이며 기다리게 되는 저자다. 노년의 브레넌 매닝의 회고록 <모든 것이 은혜다>를 오늘 하루 칩거하며 다 읽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사이가 된 듯 하였다. 이전의 저서들을 통해서 읽었던 이야기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노년의 할아버지가 되어 회고하는 그! 이야기들은 내가 알던 그!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유명해지면 초심을 잃고 거만해지다 망하는 뻔한 길을 자꾸만 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을까? 이미 반면교사는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명해지고도 유명세로 인해서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처절하게 정직해져야 하는 지를 노년의 브레넌 매닝이 보여준다. 구구절절 자신의 높아지고 성공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결핍되고, 학대받고, 실패한 어두움의 드러내는 일을 누구라서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은혜다.'라는 결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의 빛이 비취는 게 아니라, 아바의 자녀로 사는 것이 이렇게 철저하게 정직해지는 길이라니……. 부랑아 복음을 전하며 떠돌던 한 전도자의 인생에 숙연해질 뿐이다.


전부터 브레넌의 책을 읽으면서 냄새가 났었다. <내 안의 접힌 날개>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영적여정에 도움을 받으셨단다. 반가워라. (가슴이 떨릴 정도로 반가웠다.)


* 내게 에니어그램을 배운 TNTer에게 일독을 권함. 진심 권함.

 



 

영화란 모름지기 슬픈 여운을 너무 강하게 남기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내가 선택하는 영화의 미덕이다. 부끄럽게도 이것은 슬픔이나 고통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내 고질병이라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일천하게도 나는 짜릿함고 경쾌함, 무겁지 않은 정도의 철학적 질문 등으로 런닝타임 동안 그저 온전히 몰입하게 해주면 그만이다. 다행히 가장 영화를 같이 많이 보는 남편의 취향이 그와 반대라 원하는 만큼 편식은 못하지만 말이다.

암튼,  그런 이유로 다큐멘타리류의 영화를 나 스스로는 선택해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 지절거리려고 하는 이 영화 <신과 인간>은 일단 영화는 누구와 봤는 지가 중요하다. 40이 넘어서 만난 친구 또는 여정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K다. K는 MBTI로는 (내게 그렇게도 어려운) NF이고, 겉으로는 나랑 참으로  다른 사람같다. 그러나 깊은 속을 꺼내놓고 맞춰보면 이렇게도 나랑 비슷할 수가 있을까 싶은 사람이다. 2년 전 K를 만난 이후로 K랑 나누거나, 그녀가 찔러주는 말에 아프면서 나는 이제껏 넘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큰 산을 넘은 느낌이다. 내게 선물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난  감히 아주 신선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초대로 영화를 보았다.






(내 말이 아님)

영화 <신과 인간>은 1996년 실제 있었던 알제리의 ‘프랑스인 수도사 살해사건’을 바탕에 둔 작품이다, 당시 알제리 정부군과 무장이슬람단체(GIA)와의 내전은 최정점에 치닫고 있었다. 무장이슬람단체(GIA)가 자국 내의 모든 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최후 통첩하자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교 지역의 티브히린에서 수도원생활을 보내고 있던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에게 당장 떠날 것을 통보하지만 수도사들은 이를 거부한다. 죽음이 예견되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일곱 명의 수도사들이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영화는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에 주목하며 신의 종으로 살아온 이들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종교인이자 인간으로서의 갈림길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고뇌를 드라마틱하고 깊이 있게 담고 있다. 

                                                                                               
                                                                             (Daum  영화에서 줄거리 펌했음) 








(다시 내 말)

포스터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읽은 말의 비장함 만큼 영화는 내게 비장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잔잔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서 있던 지점이 생이냐 사냐? 하는 식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결국 이들에 의해서 납치되고 살해되는 것이지만)은 오히려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수도사들의 거룩한 삶터와 일터에 대한 경외심은 오히려 약을 뺏으러 온 테러리스트 대장에게서 느껴졌다. 반면, 수도원을 보호하겠다는 군의 독기어린 눈빛이 내겐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순찰을 하는 군의  헬리콥터가 낮게 비행하며 수도원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장면, 영화를 통틀어 내게 가장 섬뜩한 장면이었다. 수도사들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웠던 시점도 여기였던 것 같다. 죽음의 위협은 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겠다는 사람들에게서 더 피부에 와닿게 전해졌다. 그렇다면 누가 적이고, 누가 정말 위협적인 존재일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란 말인가? 


일곱 명의 수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사(死)'가 아니라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기로 함일 아닐까? 그런 의미로 돌려치자면 그저 어제처럼 사는 '생(生)'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과 이제껏 감당해 왔던 소명이라고 했던 걸 유지하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이제껏의 그 소명의 자리는 '신의 부재만이 충만한 두려운' 곳이라는 것.


굳이 영화평을 장황하게 남기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은 어디 알제리의 그 긴장감 감도는 수도원 뿐이겠는가? 조금만 정신을 차려서 둘러보아도 내 삶과 이웃의 삶은 신의 부재로 충만하다. 신을 찾는 갈망이 클수록 신의 부재는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고백하건데 늘 도망다녔고, 지금도 도망다니고 싶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나쁜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배를 채우며 약한 사람을 짓밟고 있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사람들은 온 몸에 오물이 묻든 말든 결국 고지를 꿰차고 마는..... 이런 신의 부재 충만한 곳으로부터 도망다니고 싶었다. 가장 두려운 곳은 현실이다.


내 안에서 수 년 동안 울렸고 영화가 확인해준  목소리는 이것이다. '지금 여기는 고통이고 두렵고 지겹다. 어디든 도망가라. 도망갈 수 없으면 도망갈 계획이라도 세워라. 상상해라.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상해라' 아주 희미한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 반대의 메세지를 내게 들려주곤 했다.


어찌됐든 잔잔하지만 분명한 기승전결의 (주로 내면의)갈등과 해결을 통해서 7인의 신부는 수도원에 남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흠모하는 사람도, 나랑 닮았다고 느껴지는 사람도, 이래야 한다는 사람도 만난다. 이 영화에서 난 이것을 보았다.






(내가 흠모하는 사람)

주인공처럼 보이는 수도원의 대표신부인 크리스티앙은 처음부터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고, 나이가 드신 두 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두려움들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주인공을 보면서 사실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신념같은 것을 타고난 듯 보이는 사람들 말이다. 실제 이들의 내면이 어떻든 이런 분들을 보면서 나는 도망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작아지는 느낌이 들고, 중요한 판단을 할 때 이들을 의지하여 묻어가고픈 어린이로 남고 싶어진다.


(나랑 닮은 사람)

영화 중 한 신부는 떠나는 게 맞다고 하면서 '나는.... 몸이 아픈 사람이니까... 어찌됐든 떠나야 할 것 같애' 라는 이유를 댄다. 약한 모습이다. 내가 자주 그러듯 진짜 이유를 직면하지 않은 채 둘러대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나와 많이 닮았다. 나는 대체로 이런다. 지금 여기의 고통스런 나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합리화로 말이 많아지고, 무분별한 글을 쓰게 되고, 더 많은 의견을 피력하려들기도 한다.






(이게 맞다 싶은 사람)

여운을 가장 많이 남기는 인물은 이 사람이다. 나는 '떠나야 한다. 나는 이렇게 죽으려고 수도자가 되지 않았다'며 반항하는 허우대 멀쩡한 (이름은 모르겠는) 젊은 신부에 주목한다. 신의 부재에 대해서 가장 인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모양은 빠지지만 정직하다. 내가 이 사람에 꽂히는 것은 아마도 최근의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신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만을 부추겨 두려움도 의심도 은폐시켜 겉으로는 믿음, 속으로는 참된 불신앙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상처와 분노 때문일 것이다. 중간중간 내 생각에 빠져 놓친 장면과 대사들 때문에 이 신부 내면의 변화에 대한 걸 디테일하게 따라가질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리에 남기로 한 선택에서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부재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정직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인간 편에서는 두려움, 의심이 극에 달하는 지점이고 그 지점은 고뇌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신의 부재'로 경험되는 것 아닐까?
 
  




가장 두려운 곳은 어디인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영화에서 각각의 신부가 자신의 소임대로 밭을 갈고, 장작을 나르고, 음식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는...그림처럼 조용한 일상이 내겐 두려움이 극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가 두려워서  나는 과거로, 미래로 끝없이 보따리를 싸서 옮겨다니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 현재이다. 너무 두려운데 가장 필요한 신의 위안이 없다고 도망가면 영영 신과 만날 순간은 잃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이, 신이 보이지 않아 가장 어둡고 두려운 곳이 그를 독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아닐까? 수사들의 고뇌가 깊어질 때마다 깊게 울려퍼졌던 그레고리안 챤트에 내 마음 깊은 곳이 함께 울린다.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공명시키던 그 성스럽고 단조로운 소리가 말이다. 가득 채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김훈의 소설 <흑산>을 읽다가 한 문장이 목에 걸려 다음 장으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다.
정약현이 딸 내외를 서울로 이사시키면서 '육손이'라는 종을 딸려 보낸다.
떠나는 날에  마지막 절을 하며 우는 육손이를 보고 정약현이 사위 황사영에게 이르는 말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황사영은 이 말의 단순성에 놀랐고,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말의 깊이에 놀라며 육손이를 종의 몸에서 풀어주고 면천해준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관계가 그닥 원만하지 못한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여전히 쿨하지 못한 관계맺음으로 상처받기가 일쑤다. (상처받기는 그대로 '상처주기'로 읽어도 틀리지 않다는 걸 안다)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치명적인 관계들이 있다. 수 년 전에 그 엉킨 관계를 풀어보자 나름대로 어설픈 노력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에게 나는 이중인격자에 돈으로 관계를 따지는 사람이었고 그 오해를 풀어보고자 되도 않는 애를 많이 썼었다. 해명하고 애를 쓸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 때 내가 그 사람에게 표현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되뇌었었다.
'나는 우리 엄마 딸이고,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진짜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그것 만은 알아달라'라고. 그 사람에 의도했든지 아니든지 내가 받은 느낌은 아무리 해도 내가 이 사람에게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없겠구나 싶었었던 것 같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그 얘기일 것이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지만 결국 정약현도 황사영도 육손이도 천주귀신이 들린 자로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이 모두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들이었다. 또한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제 부모가 낳은 자식임을 인정해 주는 것은 나와 아무리 맞지 않아도, 때로 내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할찌라도 마지막 존엄성은 인정해주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 핏덩이 아이를 안아보고, 그 아이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줄 때, '엄마'라고 불러줄 때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사랑보다 더 뜨거운 경이로움을 알기에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 어떤 존재인 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그걸 잊지 말자.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늘 일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의 의미'란 내게 '일의 기쁨'이었다. 대학 후 첫 직장인 유치원 교사를 그만 둔 즈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는 좋지만(그래서 일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 일하는 여건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직장생활은 하기가 싫다는(그래서 환경이 일의 의미를 앗아가고 있었다)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 이후로 새로운 공부를 하고, 그 당시로 하늘에 별 따기인 풀타임 음악치료사가 되어서의(것두 채윤일 낳고 5주 만에 첫 출근) 감동이란... 점심 때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아 식기도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생애 식사기도 때 감사의 눈물을 그렇게 흘려본 적이 있었던고...

그 감동이 사라진 4년여 후에 퇴직을 하고, 일명 프리랜서 음악치료사로 약간의 강의와 함께 전전해 오고 있다. 작년 성대수술 이후로 음악치료사라는 명함을 내밀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종종 '10년 음악치료 했으니 이제 수명은 다 했어. 이젠 카페를 해야해' 라고 농담을 했었다.

최근 집 가까운 괜찮은 곳에서 풀타임 음악치료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잠시 맘이 흔들렸다. 내 인생 마지막으로 음악치료 한 번 더 해볼까? 이제 나이나 경력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곳도 없고.... 그렇게 맘이 흔들리면서 다시 한 번 소명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깊이있는 그 분과의 교제가 즐거운데 다시 빡빡한 현대인의 시계 속으로 들어가서도 이 알량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주께 하듯, 성가대 지휘를 하듯,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직장동료들을 대하며 직장생활 할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이 너무 힘겹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은 조금 불안해졌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이다. 그가 하는 말들과 때로 상관이 있고, 때론 상관이 없는 내 마음과 생각의 길이 그와 더불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은 가장 밑바닥의 욕구가 드러났다. 가장 깊은 욕구는 한 달에 한 번,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전문직 여성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존경 정도였다.

보통씨가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이 사람은 절대 내놓고 얘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더군.^^) 일의 기쁨을 앗아가는 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 그리고 '전문화'라는 것이었다.('전문화'에 관한 부분은 따로 포스팅해 볼 생각) 아차! 싶었다. 이런 저런 명목 좋은 이유를 대서 남편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 풀타임 자리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린 건 99.9% 따박따박 월급이었다는 것. 이러고 입사를 했으면 세 달이 가지 않아서 사직서를 못내서 안달을 할 것이었다.

그럼, 뭐 대부분 돈 때문에 일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어디 그리 흔하단 말인가?  그래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맞다. 현대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다들 월요일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고, 주말이 가는 소리에 불안증이 고조되고, 출근을 하면 주변 눈치 보면서 싸이하기에 바쁘고... 일 자체에서 기쁨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어째야 할까? 다시 소명을 생각했다. 소명은 부르심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머~얼리서 '일루와. 아니 아니.... 거기 아니다. 그 옆으루 가. 거기가 니 자리야. 이게 니 소명이다' 이러시는 분이 아님을 안다. 나와 아주 가까이, 아니 내 안에서 계시면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아시는 분이다. 나와 함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 주시는 분이다. 그걸 발견해 가는 것이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소명과 용기>의 저자 '고든 스미스'는 소명을 20대 진로 선택하면서 한 번 고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튼, 결론적으로 이력서를 낼까 말까 하던 고민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확성기를 대로 부르시는 그 어떤 거창한 부르심이 아닐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중년에 들어선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행복을 누리고 나누며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일상은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소명을 생각하는 나는 오늘 학교 다녀온 채윤이와 현승이를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고 블로거들의 댓글을 마음으로 받도 대화할 것이고, 회복되어가는 몸으로 인해서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고, 식구들을 위해 정성과 아이디어 가득한 저녁식사를 준비할 것이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고, 몇 권의 책을 조바심 내지 않고 마음으로 읽을 것이고, 간간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이 다 소명의 자리임을 순간순간 각성할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인간, 지금 여기의 두려움에서 만난다  (4) 2012.02.08
제 부모가 낳은 자식  (4) 2012.01.09
택뱁니다~  (17) 2009.09.24
사람 담금질  (8) 2009.07.16
It is written  (26) 2009.04.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