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지의 장소, 그리고 밤이었다. 나는 세찬 폭풍을 받으며 힘들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나는 작은 등불을 들고 양손으로 그것을 보호하며 걸어갔는데 그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내가 이 작은 등불을 살리는 데 달려 있었다. 별안간 나는 무엇인가가 나를 뒤따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뒤돌아보니 거기에 내 뒤로 다가오는 거대한 검은 형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놀랐음에도 불구하고-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이 불빛을 이 밤이 새도록 폭풍 가운데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카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에 나오는 융 자신의 꿈이다. 이 꿈을 통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꿈을 꾸었던 시절의 삶에 대한 성찰로 융은 '인격의 그림자(제2호 인격)'을 발견하게 된다. '살고 싶은 삶'과 '살아야 하는 삶' 사이의 갈등에 놓여 있었고, 나는 이 구절에서 "그러나 모든 것은 내가 이 작은 등불을 살리는 데 있었다"와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이 불빛을 이 밤이 새도록 폭풍 가운데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라는 부분이 참으로 좋다. 나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는 것, 나의 빛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나를 이끄시는 온유한 빛”
(Lead, Kindly, Light Amid encircling gloom)

인도 하소서. 온유한 빛이시여,
저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저를 이끌어주소서!
밤은 어둡고 저는 집에서 멀리 떠나왔으니,
저를 이끄소서!
저의 발을 지켜주소서.
나는 먼 곳을 보기를 원하지 않나이다,
다만 한 걸음이면 족하나이다.

 

존 헨리 뉴먼의 시이다. 찬송가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의 원 가사이기도하다. 성공회 사제였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추기경까지 되었고 최근에 성인 품에 올랐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쓸 수 있지만, 이 한 문장을 실제로 살았다고 상상하면 얼마나 고독하고 막막한 인생이었을까. 그 인생을 떠올리며 이 시를 읽으면 한 구절에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인도하소서, 온유한 빛이시여" 밤은 어둡고 집을 떠나왔으니, 다만 한 걸음을 내디딜 빛을 주옵소서... 구하는 기도의 막막함과 절절함이란. 
 
<인생의 빛 학교>라는 이름의 모임을 해왔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지은 이름인데, 아주 마음에 든다. 결혼으로 가정을 막 이룬 때부터 황혼에 이르기까지의 인생, 그 인생을 이끄는 '빛'을 구하는 공부라는 뜻이다. 생애 주기마다 '빛'을 찾는 구체적인 정황이 있다. 연애, 육아, 중년의 위기, 노화와 죽음. 일상의 구체적 어려움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그 너머에서 비추는 참된 빛을 찾자는 뜻이기도 하고... '육아 일상'과 '중년'을 사는 두 그룹을 진행하다 마지막에는 다 함께 내적 여정 일부분을 나누는 것으로 끝을 냈다. 그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고맙게도 자연스럽게 '자기 성찰'로 마음이 모아져서 여차저차하다 그리 되었다. '빛' 학교라는 말에 적절한 마무리인 것 같기도 하고. 
 
산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고(To live means to grow), 성장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To grow neans to change), 변화하는 것은 결심하는 것이다(To change means to decide).'  나 역시 성장을 위해서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을 바꾸어야 했기에, 내 안의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분이 비추시는 단 한 걸음을 위한 빛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걷는 길이다. 성장하고 변화하려는 분들과 함께 하는 체험의 교회였다. 교회를 확신하는 순간들이었다.  
 

산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고(To live means to grow), 
성장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To grow neans to change),
변화하는 것은 결심하는 것이다(To change means to decide). 

라는 삶의 원리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적인 삶을 키우는 것이다. 이 내적인 삶은 신앙생활의 방식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신앙생활의 변화를 위하여 지금 상황(here and now)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의 자세를 과감하게 바꾸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성격유형과 그리스도인의 영성』 중

 
 
 

 

두어 달쯤 전인가. 연구소 선생님들과 내 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만 기차역에 남겨진 꿈이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내가 선택한 방은 독거노인이 살다 죽어서 생긴 방이었다.  이런저런 흥미진진한 질문과 대답 끝에 이런 질문이 왔다. "가족들이 없고 혼자라면 어떻게 살고 싶어요?" "수도자로 살고 싶어요." 툭 튀어나온 답이었다.
 
남편에게 꿈나눔 얘길 했더니 "당신 지금도 거의 수도자로 살고 있잖아."라고 했다.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 꿈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초대인가. 지난주 며칠 수도원 피정에 다녀왔다. "일하고 기도하라"는 문장 그대로 살고 있는 베네딕도회 수사님들의 하루 일곱 번 기도에 함께 했다. 밥 챙겨 먹고 뒤돌아 서면 금세 기도 시간이 되어 버려서 나는 "밥 먹고 기도하고"가 되었다. 수도원 진입로의 짧은 메타세쿼이아 길을 수십 번 오가며 걸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길, 이제는 내 마음에 난 길! 그 와중에 장화 신고 나란히 걷는 노 수녀님들은 씬 스틸러였다.  
 

'영성 신학'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 10여 년은 이 학교 저 학교 신학교들 홈페이지를 검색하며 보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대단한 '영성'이 아니라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의 검색질이었다. 영성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에 관련된 것이고, 하나님을 찾는 인간 편에서의 행위는 '기도'이다. 기도하지 않으며 '영성'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에게 '영성'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고. 그래서 오래 찾고 머뭇거렸지 싶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영성사" 수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기도하는 교수님께 영성사를 배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수업 마지막 날이 팀 발표 날이었고, 나는 토론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날 주제와 상관없는 '나를 위한 질문'을 끼워 넣었다. 한 학기(내게는 4학기) '문화와 영성'을 공부하며 얻은 것에 대한 자문자답이었다. 영성은 "생활과 증거"체험을 다룬다. 영성신학은 사변 신학이 아니다. 영성사(History of Spirituality)는 기도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 기도의 역사이다. 나는 이렇게 나의 배움을 정리한다. '성인'이라 불리는 분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기도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모두 영성사 교과서 서문에 나온 말이다.) 기도하는 교수님께서는 종강 후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초대하여 '시편 성무일도 피정'을 경험하도록 해주셨다. 
 
돌아보면 신앙 사춘기의 시작은 '기도의 메마름'이었다. 더 깊은 기도를 하고 싶은데, 더 깊은 기도의 길이 있을 텐데 내 앞은 막다른 길이었다. 더욱 막막한 것은 마침 목회자로 위치가 바뀐 남편 덕에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새벽기도 출석"을 강요받으면서 어떤 무너짐이 시작되었었다. 영혼의 숨이 콱 막혀버린 상태로 어쩌다 만난 에니어그램, 그래서 알게 된 Centering Prayer, 그리고 내가 몰랐던 오랜 기도의 전통들, 기도의 대가들, 그리고 담을 넘어가 만난 오랜 영성의 전통, 그 끝에서 수도원의 기도 피정이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세운 치밀한 계획 같다.  기도 찾아 삼만 리, 수도원 찾아 삼만 리... 이제 신앙 사춘기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보다.
 

 

머물던 기간 중, 은퇴하신 노(老) 수녀님들이 피정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老 수녀님들이라... 아마도 장화 신고 우산 쓰고 메타세콰이아 길을 걷던 그분들이다. 또 한 분, 수도원 입회가 내 나이와 비슷한 수사님 한 분의 뒷모습이 자꾸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도회 입회한 때가 내가 태어나던 즈음이었고, 평생 한 곳에서 매일 "일하고 기도하는" 똑같은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 수사님이 입장할 때마다, 그 뒷모습을 볼 때마다 뭉클하고 뜨거워졌다. 피정비를 내는 봉투에 이렇게 썼다. "한 곳에 머물러 기도하는 수사님들의 정주(定住) 덕에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끝없이 헤매는 세상과 거기 사는 저 같은 사람이 그나마 하나님을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수사님들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딱 이 마음이다.
 
* 봉쇄 구역을 지키는 저 귀여운 청솔모, 까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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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화분 선반은 내게는 설교단이다. 언제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 같은 성령의 목소리 또는 마음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성인의 말로 하면 "창조(자연)의 책"이다. 작년 여름 무엇인가를 심었던 긴 네모 화분이 겨우내 바깥 선반에서 노숙을 했다.  가끔 새를 유인하는 먹이 담는 먹이통이 되어주기도 했고. 그러다 날아든 직박구리로 반가운 날도 있었지.

 

1층 산딸나무를 내려다보려고 베란다 창에 매달렸다 화분 가득 수북한 괭이밥을 발견했다. 큰 감흥 없이 지나쳤는데... 며칠 후 별처럼 피어난 두 송이 괭이밥꽃이 피어있는 것 아닌가! 예쁘고 뭉클하여 잠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JP을 불러 감동을 나누고, 사진을 찍고, 한참을 들였다보고, 딴 일 하다 또 들여다 또 들여다 보고... 그러자 마음에서 올라오는 한 말씀이 있었으니...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마 6:28)

 

들꽃이 들꽃 되어 그저 피어 있는 아름다움.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저 자기로 피어있는 자유를 생각하게 된다.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핀 괭이밥꽃은 제 할 일을 온전히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제 할 일을 할 뿐인데, 저를 지으신 하나님의 질서에 복종할 뿐인데, 오늘 내게 큰 선물이 되고 있다. "되어야 할 내가 되는 것"이 자신을 위해,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을 위해, 인류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가장 훌륭하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 말을 위해 굳이 Carl Jung을 끌어오지 않겠다.

 

괭이밥꽃이 저렇듯 자기로 피어나 인류에 이바지하듯, "너도 너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허튼 힘을 쓰지 말라"라고, 베란다 화분 선반 위에 설교 한 편이 내려와 있었다.    

 

 

 

 

 

 

 

 

어느 새

모든 새는 어떤 새다. 산책길마다 깜빡이 없이 난입하여 내 정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갔다 사라지는 새가 있는데. 오늘 그 새는 며칠 전 그 새가 아니고, 며칠 전 나를 만나줬던 그 새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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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아든 어느 새

오전 줌 강의를 마치고 혼자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대추 맛집, 대추 맛집, 여기가 대추 맛집." 영혼으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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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례

대추 말리던 바구니가 텅 빈 지 오래다. 한 바구니 가득했던 대추를 새 친구들이 죄 먹어 치웠다. 씨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 바구니는 어쩐지 치우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곡물을 좀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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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크리에이션 성경 퀴즈대회

지난 주일 예배 마치고 성경퀴즈대회 했다. 진행을 맡음! 작년 추수감사절에 퀴즈대회를 한 번 했는데, 오랜만에 주일학교 선생님 시절 2부 순서 진행하던 느낌 살렸더니 재밌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또 재밌었다. 생각보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두툼한 예상문제지가 막 돌고, "우리 남편 진짜 열심히 했다. 수에 강하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숫자 다 외웠다. 아들이 한 문제는 맞히고 오라고 했는데..." 은근 귀여운 청탁도 들어왔다. 카톡으로 답하기, 같은 신메뉴도 도입해 보았다. 한 문제 맞히고 틀리는 데 순간의 목숨을 걸어주시는 60대 집사님들의 몰입, 참 즐겁다. 그야말로 교회가 '친교'의 장이었다. 

 

* 인생학교 에니어그램

퀴즈대회 마치고, 뷔페로 점심 먹고는  젊은 부부, 중년 부부 여러 커플과 함께 에니어그램 강의를 했다. 각각 육아와 부부 세미나를 진행했던 두 그룹이 함께 했다. 한 교회에 있지만 서로 말 한 마디 해보지 않은 분들도 있다. 이런 계기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 부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참 좋다. 두 그룹을 묶어서 진행하기로 한 사심이기도 하다. 마주 앉아 내적 자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친교'다. 

 

* 기도 깊은 수다_연구소 동반자 모임
밤에는 줌으로 연구소 동반자 모임을 했다. 지도자 과정 1, 2, 3기 선생님들의 모임이다. '청원기도와 관상기도, 기도에서 욕구의 문제' 라는 주제로 강의를 나눴다. 강의 반, 나눔 반인데. 현재 나의 기도 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주는 동반자 선생님들의 나눔 속에서 깊은 친밀감(intimcy)을 느꼈다. 현재 나의 '청원 기도'를 나누는 동안 내가 지금 갈망하는 것을 그대로 열어 보이고, 썩 자랑스럽지는 않은 기도 생활을 노출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만남이 참 좋았다. 나는 성경퀴즈대회 진행을 하기 싫었던 마음, 떠들썩하게 진행하고 오는 공허감이나 수치심 같은 것을 고백하고 부끄러웠지만 참 좋았다.

 

* 친교의 그러데이션

빡센 주일 하루, 빡센 친교의 그러데이션을 경험한 것 같다. 밤으로 갈수록 깊어졌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 말할 수는 없다.  각각 좋은 친교였다.  강의 네 시간, 퀴즈대회 진행 한 시간으로 밤에는 기침과 함께 목이 좀 아팠지만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이었고, 한 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정도였다. 세 번의 친교 모두 나다운 시간이었다. 나다움을 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레크리에이션에 가까운 성경퀴즈 진행자일 때와 내면의 이야기를 나누고 영성을 강의할 때, 보이는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나를 숨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운 것이다. 마침 그다음 월요일에 연구소 '읽는 기도'의 주제는 '친교'였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자기 자신, 적어도 한 사람에게서 숨는 것을 멈출 때, 그때 그것은 숨겨지지 않는다. 우리 참 자아의 출현은 사실 비밀의 큰 폭로이다. 그 위험한 자기 노출이 내가 말하는 친교(intimacy)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이 내부 또는 내면을 뜻하는 라틴어 '인티무스'(intimus)에서 왔다고 한다. '인 티모르'(in timor) 또는 "두려움 속으로"(into fear)에서 그보다 오랜 의미가 발견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요점은 분명하다. 

친교는 자기 속을 드러낼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겁나는 일이다. 자기가 노출한 것을 상대방이 받아 주고 존중할지 아니면 반대쪽으로 달아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거절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건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자기를 노출시켰다가 거절당한 데서 오는 고통이 너무나 커서 그 일을 다시 시도하는 데 한평생이 걸리는 수도 있다.

- Immortal Diamond: The Search for Our True Self, 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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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 기혼 비혼자가 함께 있는 장년부에 강의가 있었다. 강의 주제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을 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에 빨간 압정 꽂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방식의 강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결혼여부가 일상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상상컨대, 육아 버텨내기의 일상을 사는 사람과 혼자서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려는 비혼의 일상 고민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신앙 일상의 본질을 얘기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강의 후 나눔 질문 중 하나로 "나의 리즈시절"을 떠올려보자는 나눠보자고 했다.

질문하려면 나도 답을 해야 하니까. 내 리즈시절을 떠올렸다.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뭐니뭐니 해도 내 어린이 성가대 지휘하던 정신실 선생님일 때지!" 싶어 잠시 기분 좋은 회한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하고 갔는데... 갔는데... 교회 도착해서 강의 장소로 들어가는데 어린애들 찬양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막... 그, 박새나 그런 작은 새들이 맑은 소리로 귀에 딱딱 꽂히게 지저귀는 그런 소리로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게 언제 적 주의 발자취야! 한 공간을 여러 기관이 시간대 별로, 빡빡하게 나눠 쓰는 그런 교회도 오랜만이다. 아이들 연습 끝나길 기다리며 기도하고 앉았다가 참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었다. 순간의 예기치 않은 기쁨이었다.

마침 스승의 날이라고, 어른이 된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보니 이날 수강자였던 30, 40 장년들 나이가 되어 있겠구나! 나의 리즈시절, 너희들의 리즈시절... 나도 너희들도 늘 새로 갱신되는 리즈시절을 살기를 기도한다. 바쁘지만 의미 없고, 바쁘지만 심심한 빡센 시간을 지나면서도 잠시 잠깐 기쁨과 생명을 발견하는, 리즈시절을 새롭게 경험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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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담아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젊은 시절에 유치부 설교로 봉사한 적이 있다. 그때 경험으로 알아낸 것이 있다.  "귀담아 듣는 아이가 있구나!" 지능도 아니고, 성격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듣는 아이가 따로 있었다. 그랬던 아이 얼굴이며 이름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어쩌면 그렇게 진지하게 듣는가.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들은 대로 해보려는 하는데, 그 아이들이 꼭 그랬다. 
 
청년 시절부터 평생 '소그룹'이란 것을 하며 살았나보다. 주어지는 소그룹이 없을 때는 조용히 만들어내곤 했다. 그때그때 내 일상의 갈망과 닿는 작은 모임을 어떻게든 만들었다. ("내 인생의 소그룹"으로 따로 글을 하나 써야지 싶네.) 교회가 가정교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젊은 부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모여서 밥 먹고, 얘기하고, 기도하던 시절은 여러 모로 찐이었다. 그때 결혼 후 잠시 머물다 네팔로 떠난 태훈 윤선을 보내며 남편과 나눴던 말이 생각난다. "아깝다, 정말 같이 하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들을 줄 알지? 우리 모임에 함께 있으면 참 좋겠다. 아깝다, 아쉽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소그룹을 하는 연구소를 차렸다. 내적 여정, 꿈 모임, 글쓰기 모임... 모두 영성생활을 배우고 나누는 소그룹이다. 이쯤되면 "내 인생의 소그룹"으로 글 한 편이 아니라 책을 한 권 써야 하는 것인가. 연구소의 모든 영성 그룹은 '서로 잘 듣는 그룹'이다. 결국 잘 듣는 수련을 통해 치유되고 성장하는 것 아닌가 싶다.  들어주는 척, 말고. 진심으로 듣는 것은 '존재'의 문제라서 존재 안에 여백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듣는 훈련은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훈련이다. 눈동자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랬구나...." 정도의 공감 그 이상이고. 좋은 말 대잔치는 더더욱 아니다. 
 
올초부터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참여하고 있다. 아침마다 들으려고 한다. 난생 처음 보는 성경말씀으로 여기며, 내게 하는 말씀으로 들으려고 한다. '말씀묵상 밴드 참여의 변'은 또 한 편의 글로 쓸 계획이고. (나는 말이 많고, 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다.) 들은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포스트잇에 적어서 휴대폰 뒷면에 붙이고 다닌다. 이것은 렉시오 디비나를 사랑하시는 학교 교수 신부님께 전수받은 방법이다.
 
유치부 아이들에게 설교하던 때를 자주 떠올린다. 그때 그 아이들의 표정과 눈동자를 떠올리며 지금 여기서 새롭게 배운다. 하나님 앞에 선 내가 그 아이들 같은 태도여야 하겠구나, 매일 아침 마음의 창을 닦는다. 잘 들어주는 사람, 존재로 들어주는 치유자가 되고 싶은데. 잘 듣기 위해 내 마음에 투명한 여백을 만드는 일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구나... 이미 알았던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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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부부 세미나, '오후의 빛 학교'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다. 마지막은 12일 피정이었는데, 일주일을 그 여운에 잠겨 지낸 것 같다. 집사님 한 분이 이 짧은 순간을 이렇게 멋지게 영상으로 남겨 놓았다. 자꾸 입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가 맴돈다. 그러다 소리 내서 불렀더니 채윤이가 "그거 뭐야? 또 찬송가 같이 불러어~"어 한다. 뭘 불러도 찬송가 같다는 말은 기분 나쁘지만, 어쩐이 이 영상 속 짧은 노래는 찬송가 그 이상인 것도 같고.

 

 

확신 없이 시작한 세미나이다.  여기저기 다니며 했던 중년, 부부, 영성 강의를 성글게 정리했다. 카를 융, 안셀름 그륀, 리처드 로어... 쉽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평이한 말로 녹여낼 수 있을까, 어쨌든 목표는 "강의 조금, 나눔 많이!"였다. 썩 흡족하진 않지만,  6시간 강의하는 에니어그램을 50분에 끊기도 했으니, 나름 선방했다남편이 예배 시간에 정리하며 보고하기를 많이 웃고 많이 운 시간이라고 했는데 4주 세미나, 1박 2일 피정을 여덟 글자로 요약하면 그렇게 되겠다.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목사는 양복을 벗고 설교 마이크 대신 기타를 들었고, 나는 강의 대신 커피를 내리고 또 내렸다. 기타를 든 목사, 커피를 내리는 강사. 그 자리가 내게는 교회였다. 아, 우리가 공동체지. 이분들과 내가 한 교회 한 몸이지! 많이 웃고 많이 울었던 그 자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교회를 느꼈다.

 

 

제도적 교회가 필요하고, 이제껏 해오던 신앙행위들 역시 소중하다. 그런데 탈종교 시대, 더는 제도와 종교적 언어로 채워지지 않는 갈망들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리처드 로어 신부의 말처럼 체험하는 앎, 세포로 경험하는 앎과 교회가 필요하다. 사변과 관념 너머 그리스도의 '몸'을 느끼는 교회가 필요하다. 내겐. 우리에겐. 

 

 

모닥불 피워놓고 흥얼흥얼, 떼창이 된 생감자로 만든 포테이토칩으로 다같이 까르르 웃던 10, 세포로 경험하는 찰나의 교회였다. 시간을 가늠할 수 깊은 눈물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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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게 간직한 '전작 작가'들이 있는데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은 최근에 맺은 인연이다. 그래서 전작을 가지고 있지만, 다 읽지는 못했고. 이분이 한국에 오신다니, 현장 강의에 가고 싶지만 시간은 없고. 유일한 서울 강의는 휴일 어린이날이었다. '어린이 없는 집'이니 JP만 혼자 놀도록 잘 떼어놓으면 되겠네. 여차저차 현승이 올라오고, 채윤이는 "오랜만에 넷이 차 타고 어딘가 가고 싶다"하고. 그 분위기에 또 빨리 마음을 접었다. "그래, 놀자! 넷이 같이 놀자. 엄마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었는데 포기할게. 모처럼 넷이 놀자."  
  

 

5월5일 비 예보가 뜨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영화 얘기가 슬슬 나오고, 나는 생각할수록 토마시 할리크 실물영접이 아쉽고... 그래서 제안하고 확정된 것이 "어린이날, 합정동 프리덤!"이다. 강의 장소가 합정동이었다. 우리의 추억 합정동 메세나폴리스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셋은 영화를 보고 나는 강의를 듣고. 저녁 약속, 연주 일정이 있는 아이들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빗길을 달려 합정까지 가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자동차 안 수다가 좋았다. 참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혼자 걷는 합정동 길도 참 좋았고. 오래만에 빈브라더스 커피까지 테이크 아웃했다.
 

강연회는 안 좋았다. 70이 넘은 강사님을 혹사시킨 것 같았다. 여러 기관 합동 초청이니 '혹사시키다'의 주체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이 너무했다. 주일 도착, 월-화 피정, 수, 목, 금 강연이 전주, 광주, 왜관, 서울이라니. 강사를 배려하지 못하는데 수강자에 대한 배려까지 기대할 것은 아니었지만. 환대나 배려 같은 단어가 마음 어디서 오락가락 했다. 모처럼 몸으로 영접하는 좋은 선생님 만나는 자리가 많이 아쉬웠다. 이미 책이 나와 있고, 유튜브로도 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세상인데. 이미 교재에 나온 강의안, 신부님은 그걸 그대로 읽고,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번역된 걸 그대로 읽는 강의였는데.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는 시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배려, 강사에 대한 배려, 빗속을 뚫고 모여든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정성 없이 깔쌈한 것도 문제지만… 환대와 배려는 대상을 향한 열린 감각의 문제이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소통하는 강의가 될까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더욱 갑갑하고 마음이 조금 민망해져서 중간에 나왔다.
 


한때 일상의 산책길이었던 절두산 성지와 한때 내 교회(어색하다...)였던 양화진 묘원을 잠깐 걸었다. 절두산 성지에는 비가 많이 오는데도 순례온 교인들로 울긋불긋(어쩐지 다들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는 느낌) 북적이고, 기도초를 밝히고 또는 성모상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울타리 너머 양화진 묘원은 정말 고요하고 깔끔했다.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느낌'의 묘원을 걷는 맛은 또 달랐다. 풀 한 포기까지 세련되게 기획된, 감각으로 치면 별 다섯 개의 정원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나는 환대를 경험했나? 환대와 배려, 배려의 감각 같은 것들을 곱씹으며 운동화와 바짓단이 젖도록 걸어서 메세나폴리스에서 영화 보고 나온 가족을 만났다.  


이래저래 양화진은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그 이야기 중,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를 모두어
양화진 책방을 열었다.

 
양화진 책방 유리에 적힌 말이다. 저 사진을 찍고, 저 글귀를 만난 때가 10년 전이다. 양화진은 이래저래 이야기가 많은 곳인데, 거기서 보낸 5년으로 내게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남긴 곳이 되었구나. 저 사진을 찍고 저 글귀에 감동할 때만 해도 상상치 못할 이야기들이다. 교회에 대한 희망과 절망, 그래고 또 새로운 희망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라는 말 역시 다소 낭만적으로 설레며 읽었는데...  '화평한 조우'라는 말에는 '전쟁같은 갈라짐과 간극'이 전제되어 있음을 뒤늦게 조용히 체험하고 있다. 어쩌면 이래저래 많은 그 모든 이야기를 내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었을 뿐이지. 무엇인가를 모르고 싶은, 모르기로 작정한 천진한 환상 덕에 오늘도 버티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강연회는 실망스럽고,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께는 실망보다는 강사 예우를 잘하지 못한 주최 측(한국사람)의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까지만 가기로 한다. 배려심은 크고 감각은 없는 한국에 오셔서 고생 많으셨겠다. 공산 정권 치하의 고통, 이후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탄압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살아야 했던 더 큰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팬심보다는 감사의 마음. 비 오는 휴일에 가족을 버리고 거기까지 찾아간 진심은 그것이었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 몸과 영혼이 더불어 건강한 노년을 보내시길 기도한다. 입구에서는 “책 구매하시고 저자 사인 받으세요!” 하더니… 줄을 섰는데 “신부님 피곤하시니 여기까지만 사인 하시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사인 하나 못 받았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제도 종교의 쇠퇴, 종교 기관의 신뢰 상실, 종교적 언어의 명료성 상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매우 다른 두 종교적 현상을 구분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영성 또는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중략)
영성에 대한 관심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삶이라는 진정한 문화 대신에, 싸구려 밀교(密敎, esotericism)를 받아들입니다. 앞으로는 영적인 삶의 문화와 시민 사회 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이 둘의 관계 모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 강연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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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고 오는 길에 '몸'에 대해 생각했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인생 어느 때보다 건강한 몸인 것 같은데(오십견으로 삐뚜름하게 올라가던 팔이 거의 곧게 펴졌다), 건강하다고 늙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몸이지만 하루하루 노화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노화로 더는 어쩔 수 없는 몸이 되더라도 건강한 몸일 수는 있지 않을까? 노인이 되더라도 말랑한 마음으로 건강한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생각에 빠져 걷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텅 빈 것 같은 백팩을 메고, 지팡이와 한 몸으로 선 채로 뭐라 말씀을 하셨다. 마스크를 끼셨고, 어느 지방인가의 사투리 억양이라 도통 리스닝이 되지 않았다. 뭘 도와드려야 하나, 네? 네? 여러 번 여쭈었는데... "장이 아이네. 장이 아이네. 허허" 허무한 웃음으로 마무리하신 말씀은 아파트 장 서는 날인 줄 생각하셨는데, 아니라는 말씀이다. "아, 벽산 장이요? 오늘 금요일이니까요. 월요일에 장이요."  

 

빠른 걸음으로 내 갈 길 걷다 살짝 뒤돌아 보았다. 맞은편 단지 장 서는 아파트 쪽을 바라보시다 천천히 몸을 돌려 걸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길을 가다 아이를 보면 영락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추게 되는데 노인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일은 거의 없다. 이 할머니의 천진한 혼잣말이 사랑스러워 발걸음을 멈추었다. 혼잣말 같은 혼잣말 아닌, 지나가는 사람 끌어들이는 허망감 가득한 혼잣말과 표정이 사랑스러워! 나무 뒤에 숨어 도촬을 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무와 꽃에 안겨 "숨은 할머니 찾기"가 되었다. 

 

사진을 들여다 보는데... 보나벤투라 성인의 말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고. "창조된 모든 것에는 신성한 지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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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한 달 "오후의 빛 학교"라는 이름으로 중년 세미나를 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중년 부부 인생 학교"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내게는 "중년의 영성 학교"이다. 교회 집사님들 여섯 커플과 가볍게 즐겁게 (나는 혼자) 깊게 가고 있다. 이름은 <시니어 매일 성경>에 연재하는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에서 따왔다. 그 연재 글은 물론 여기저기서 하고 있는 강의를 갈아 넣어 4주간의 강의와 나눔, 1박 2일 피정으로 진행한다. 포스터은 우리 연구소의 하늘 샘이자, 우리 교회 사랑스런 청년 다슬의 작품이다. 발로 만들어도 고퀄, 발로 만들어도 마음을 담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자이다. 아, 글쎄 포스터의 뒷모습 중년부부는 누가 봐도 딱 아는 그들이고! 

 

작년 2022년은 연구소 내적 여정, 꿈작업에 남성 수강자들이 대거 참여한 특별한 해였다. 더불어 내적 여정을 함께 하는 몇 커플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에 큰 감동과 보람을 맛보았다. 오랜 세월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않았던 부부 관계의 어려움이 '각자 자기를 돌보며' 서서히 다른 지점으로 가더니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그 지점은 치유와 회복이었다. 내가 요란 떨 일은 아니라 조용히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지만, 남편에겐 호들갑을 떨었다. "나 연구소 접어도 돼.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 있고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해."

 

언젠가 중년 부부 세미나를 하게 되면 연구소의 그 벗님들과 하게 될 줄 알았다. 꿈꾸던 모임이었다. 생의 정오를 넘어 오후로 향하는 부부가, 마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몸은 늙어가지만 영혼은 더 깊어지는 여정을 함께 가자고 마음의 손잡는 그런 모임. 손을 잡아도 설레는 것 하나 없지만, 스러지며 깊어질 나날을 그리는 고요한 만남. 교회 집사님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영성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영성생활을 논하는 곳이 교회여야지, 교회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니, 하시겠지만. 적어도 현재 내게 제도교회는 종교생활에 더 많이 기울어 있고, 영성생활은 연구소를 통해 연구하고 '체험으로서의 교회'로 살고 있는 편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오후의 빛 학교"가 벌써 마지막 시간이다. "오후의 빛 학교"가 있었던 4월 한 달, 교회 가는 길이 참 좋았다. 강의 부담, 모임 이끄는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부담보다 '좋음'이 훨씬 더 컸다. 아, 이렇게 가볍게도 마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지. 심지어 지난 주일에는 에니어그램 유형 설명을 50분에 끊었다. 6시간에 해야 할 강의를 말이다. 2시간으로도 부족하다고 강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데 말이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신다는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읽은 말이 큰 힘을 주었다. 저렇게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그 사이에서 무언가 화학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한다. 내 강의가 아니라, 각자 내어놓는 '물고기 둘 떡 다섯 개'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로.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들 말이다.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집사님들이 만들어낸 '좋음'이다.

 

 '사이'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돕는 최선의 방법은 강사로서 무엇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은 것 아닐까 싶다. 3주 세미나 진행하면서 나와 우리 부부의 시간을 돌아보며 얻는 유익이 더 컸다. 하긴 젊은 부부들과 함께 했던 '육아 세미나'에서도 그랬다. 어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인이 된 채윤 현승이와 나를 생각하게 되었었다. 강의 조금 내놓고, 젊은 부부들이 내놓는 소소하고 진솔한 고민을 들으며 다시 깨닫고 배우게 된 것이다. 역시나 성령은 사이에서 일하신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진행하는데(재미있는 세미나 진행을 위한 필살기이다. 목사 앉혀 놓고 디스 하면 무조건 좋아하신다!) 시작 찬양 부르는 모습을 한 집사님이 도촬 하여 보내주셨다. 오랜만의 기타 JP, 싱어 SS 투샷이다. 사진도 참 마음에 든다. 점점 스러져가는 인생 오후의 빛이 나는 참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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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선교단체 전국간사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있었다. 강사로 내부자 아닌 외부자를, 무엇보다 신학도 하지 않은 여성을 부르는 것도 의외라 여겨지기에 늘 그렇듯 부담이 컸다. 그래도 흔쾌히 수락하고 기쁘게 그 시간을 기다린 것은 몇몇 얼굴이었다. 내적 여정의 벗이라는 말로도 조금 부족한데, 어쨌든 내게 가장 소중한 얼굴은 '내적 여정, 내적으로 연결된' 이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앉았던 내게 일어날 기회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처럼 자세를 낮추고 다가와 인사를 건넨 간사님과는 그 어정쩡한 자세로 안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저렇게 아는 얼굴이 많다. 나를 단체에 자주 부르신 시니어 간사님은 "여기서 삼분의 일은 소장님이 만나셨던 얼굴일 것"이라고 하셨다. 신입 간사 훈련으로, 아니면 간사 재교육으로 내적 여정을 여러 그룹 진행했으니 그럴 만하다.

 

광고시간에 기수별 소개 시간이었는데, 죽 나와 서는 여섯 명이 지난 해 짧지 않은 '내적 여정'을 함께 했던 신입간사단이었다. 앞에 나와 섰는데 내가 왜 울컥하고,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거지? 삼분의 일을 알아도 내 마음에서 가까운 것이지,  찾아와 인사 나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몇 번 강의 들었다고, 나이 많은 강사에게 찾아가 인사하고 그러진 못한다. 그래도 나는 지난 수요일 이후로 마음이 꽉 채워진 느낌이다. 내적 여정으로 만난 분들은 많은 경우 나를 에니어그램을 가르친 '강사'로 기억하겠지만, 내 마음엔 그들이 '수강자' 이상으로 남아 있다. 나눠준 어떤 이야기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가끔은 "잘 살고 있을까?" 떠오르면 짧은 기도를 드리게 되기도 한다.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작고 작은 이 세상, 우리 사는 이 세상 아주 작고 작은 곳"이란 노래가 마음 어디서 자꾸 울린다. 내 마음이 작고 세상이 작다. 작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들은 진실한 것을 나눴거나 나눌 것 같은 사람인 것 같다. 적절하게 차려입고, 적절한 말을 주고받으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마음에 남는 만남은 포장지 걷어내고 함께 시간이다.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라고 할까?  '질'의 시간, 진실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그가 나를 기억하건 말건, 내 마음에 소중하게 담겨 있다. 생각해 보니 가사가 이렇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았네, 작고 작은 이 세상"  오, 이거였구나! 내적 여정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를 꾸미지 않고 나누는 자리이다. 

 

브레넌 매닝은 "참된 삶이란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진실하게 경험하는 것만이 진정한 삶이고 세상이라면, 세상은 작고 작은 것이 맞다. 나이 들수록 더욱 작고 작은 세상을 살아가야지, 마음먹게 된다. 그래서 자꾸 이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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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진리'를 묻고 들었던 빌라도, 그가 어떤 예수님을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한 마디가 제 마음을 울립니다. "이 사람을 보시오!" 죄 없으신 사람, 하나님이신 이 사람이 수난을 향해 한 걸음씩 가시는 것을 봅니다. 사랑으로 내어주신 주님의 몸을 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얼마나 우리를 끌어당기는 말입니까.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자유롭게 되는 것... 궁극적으로 영적인 자유이겠으나, 어쩌면 영적 자유의 한 부분일, 어쩌면 영적 자유로 가는 길에서 아주 중요한 경유지일 '정서적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정의는 간단하네요. 다른 누구에게 나를 증명할 것이 없고, 다른 누구로부터 지켜 낼(얻어 낼) 것이 없는 상태.

물론 마음을 닫고 있으면, 연결을 딱 끊으면 저런 상태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바라는 것 없다. 나도 바라지 않을 거다! 이런 마음은 자유가 아니라 차라리 감옥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영향받지 않겠다는 심장은 자유라는 착각의 고립 상태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말하는 '정서적 자유' 공간이란... 충분히 작아지고, 충분히 벌거벗고, 충분히 수치당할 수 있는 자리인데요. 벗님들은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십자가가 떠오릅니다. 누명을 뒤집어쓰고, 맞고, 모욕당하고, 벌거벗겨져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곳에 매달려 수치의 극한에 있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이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자기답게 생의 마지막 숨을 내뱉는... 정서적 자유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게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잃어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비로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 사랑하는 이들을 천국에 보내고 나서야 그분이 제대로 보였던 여러 경험이 있습니다. 상실의 공간은 얼마나 투명한 공간인지요. 예수님을 잃은 자리에서 두려워 숨어 있던 제자들이 커밍아웃 하여 그분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적막한 토요일. 예수님이 무덤에 내려가 계신 시간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의 손에서 장례가 치뤄지는 중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은 얼마나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상실감과 슬픔,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는 시간일 것 같습니다. 가장 캄캄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상상도 못 했던 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가장 부끄러운 이 시간으로 인해 남은 인생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 버리고 떠나 홀로 계시게 했던(하는) 많은 시간들이 부끄럽고 슬픕니다. 이런 저를 위해 기꺼이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당신을 더욱 사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
고난주간 한 주 간의 묵상 조각글이다. 하나는 학교 수업에서 렉시오디비나를 심플하게 가르쳐 주시는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것이고, 하나는 연구소 카페 아침 묵상으로 올린 것이고, 하나는 교회 큐티 나눔방에 댓글로 남긴 것이다. 세 공간이 어쩌면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표현의 방식이 다르고, 표현하는 태도도 조금씩 다르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조심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내 마음은 하나다. 각각 다른 공간에서 거기 적절한 옷을 입고 그 자리에 부합하는 언어를 고르는 일을 분열적으로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이 하나인 것을 나의 그분께서 알아주신다.  Behold the man! 고난을 향해 한 걸음 씩 걸어들어 가시는 예수님과 그 어느 해보다 길게 눈 맞추고 보낸 사순기간이다. 비 오는 날 산책길에서 만난 떨어진 벚꽃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쏟아진 피 같았다. 흐르는 빗물이 그렇게 보이게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면...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이 찬양에서 십자가에서 쏟으신 사랑은 콸콸 흐르는 피의 이미지로 떠올랐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인 예수님과 그 몸으로 겪어내신 고난이 감당 못할 사랑으로 나를 향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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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인문학적 통찰력과 따뜻한 목회자의 심정으로 평생 참된 제자도의 삶을 연구한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역작 『마음의 혁신』 강독 모임에 초대합니다.

『마음의 혁신』은 내적 여정, 영적 변혁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제시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과 폭넓은 신학적 지식을 밀도 있게 담긴 덕에(탓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적 여정을 신학적 언어로 이해하고 체험하기 원하는 분은 누구라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5유형 추정) 달라스 윌라드를 사랑하여, 읽고 또 읽다 영혼의 치유를 경험한 (5유형) 목사님이 동반합니다.

결석 없이 성실하게 읽으실 분, 환영입니다.

✓ 일시 : 2023년 4월 17일(월) ~ 7월10일(월) 19:30-21:30
         (12강, 6월5일 휴강)
✓ 인원 : 6명                  ✓ 수강료 : 12만 원
✓ 장소 : 온라인 zoom   ✓ 동반자 : 김종필 목사
✓ 문의 : 010-6209-0635
✓ 신청 : https://bit.ly/3JQLWoq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강독 모임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강독 모임 신청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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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인문학적 통찰력과 따뜻한 목회자의 심정"은 모임을 이끄는 김종필 목사도 웬만큼 갖추었으나, 차마 그리 소개하지는 못합니데이.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는' 성정을 가진 사람을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여 겨우 도모한 모임이네요. 달라스 윌라든 전작을 읽은 것은 물론이고, 거듭 읽은 책도 있답니다.  『마음의 혁신』은 마음 맞는 목사님들과 옹골지게 읽었고, 연구소 남성 수강생을 중심으로 파일럿 모임도 했습니다. 목회자 마인드의 지성적인 목사라 삼고초려을 불사하고 영입한 것입니다. 책은 어렵지만, 어려운 내용 잘 풀어 설명해주고, 더불어 지성의 거울에 마음을 비추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전 참여자들의 증언입니다.) 다. 

 

등경 위에 빛나는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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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가 학위논문으로 허난설헌의 시 연구를 택한 것은 허난설헌의 시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허난설헌에 감동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그 시대배경이나 집안환경에 대해서도 보통사람 수준의 상식이 전부였다. 물론 그녀의 한문실력으로 난설헌의 한시와 직관적으로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가 매혹당한 것은 시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한 뛰어난 여자를 못 알아보고 기어코 요절토록 한 시대적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논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출처가 분명한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충동질한 지도교수는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경계했다. 영주가 제일 자주 들은 듣기 싫은 충고는 논문을 쓰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거였다. 박완서 <환각의 나비> 중

 
기고글 쓰다 참고하려고 오래된 소설을 꺼내 읽다, 저 부분을 발견하고 혼자 웃겨 뒤집어졌다. 누구라도 옆에 있어야 붙들고 읽어줄 텐데. "이거 들어 봐. 지금 내 얘기야. 대애박, 내가 지금 논문 붙들고 있다 연재 원고 쓰면서 모드 전환 문제로 끙끙거리고 있었거든. 상상력 금지, 상상력 금지, 출처 밝힐 수 있는 정보만! 논문 쓸 때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뇐단 말이지.... 바로 이거라고!" 누굴 붙들고 얘기한들, 속에서부터 빵 터져서 뒤집어진 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쓰던 원고에는 1도 관련 없는 구절에 꽂혀서 낄낄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 허튼 시간만 보내.... 앤 건 맞지만,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가끔은 혼자 웃기만 해도 위안이 되니까. 게다가 실은 이번 원고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주제였는데, 어쩐지 글은 술술 쉽게 쓰였다. 이유는 분명하다. 마음의 길을 따라 쓰면 되니까! 
 
영성을 배우겠다고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던 때, 논문은 생각 밖에었다. 영성사, 중세 신비주의, 영성신학... 과목만 보고 일단 들어가자! 결정했으니까. 내게 최적화 된, 과목과 교수님들이었다. 논문학기이다. 비논문 학위도 있어서 학점만 채우면 졸업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또 지금 논문 쓰러 온 학생처럼 열심을 내고 있다. 그래서 논문이 잘 써진다거다, 좋은 논문을 쓸 거란 전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자니 너무나 재미있고, 공부만으로도 기도가 달라져서 에라 논문은 때려치우고 이대로 혼자 공부하며 기도하며 살면 되겠네! 싶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공들여 논문을 써도 누가 알아줄 리 없지만,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쓸 생각이다.
 
세월과 함께 만들어온 "정신실식의 상상력 플러스 글쓰기"와 "논문 글쓰기" 사이, 두 글쓰기 사이에서 적잖이 괴롭다. 두 세계에 끼어 괴로운 일은 하나 둘이 아니다. 끼어서 살아온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기도를 배우고 영성을 배우느라 많이 괴로운 시간은 논문과 함께 끝내야겠다. 대학원 들어가기 전, 두 세계를 은밀히 오가며 배우고 읽는 것이 은근 짜릿했었는데 말이다. 학기가 거듭될수록 쪼개진 두 교회 사이에 앉아서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이쪽도 어이없고 저쪽도 어이없는 시간을 사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다. 영성과 영성사, 신비신학과 신비주의 역사를 배울수록 "교회는 하나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데, "한 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역설적이게도 수업에 앉아 있자면 하나의 교회가 얼마나 골이 깊게 갈라져 있는지가 몸으로 느껴진다. 교회가 하나인 것을 확인하는 수업일수록 오늘 이 순간 분열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져 몸이 긴장하고 만다. 몸의 긴장을 마지막 학기나 되어서 알아차리고 있다. 이 긴장조차도 누려야지, 하며 다스리고 있다. 
 
논문, 포기하지 않고 쓸 거예요(쓰고 싶어요). 조용히 기도의 응원을 보내주소서, 벗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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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 같지 않은 일이 되어서 5년이 되었다. 내적여정 강의 전 과정 개설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연구소를 열었고 1년짜리 과정의 지도자과정(이제 '동반자'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3기까지 배출했다. 300여 명의 개인상담을 했다. 수녀님 신부님을 모신 중세 여성 공동체 베긴 특강이며 상상 그 이상의 연결을 경험했다. 이 모든 과정을 (인간적) 대책 없이 해왔다. 대책 없이, 계산 없이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대책 없이 계산 없이 하다보니 한계 앞에 섰다. 나 자신을 포함한 연구원들, 고급인력의 재능 낭비(재능 후원, 재능 기부)는 그 자체로 큰 기쁨인데, 지속가능성을 타진할 때가 된 것 같다.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재정적으로 총체적으로 소진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멈추기로 결정하니 느낌이 따라왔다.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동반자 과정)'을 한 해 쉬기로 결정하니, 쉴 때가 되었고 재정비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마침 내적 여정 수강 인원도 줄어 콤팩트 해졌다. 실패감이 없지 않은데,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은 그것대로 기쁘게 지속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내놓은 글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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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쉬어갑니다.

"상처입은 치유자_내적여정 동반자 과정" 4기 모집 공고 드렸었으나 한 해 쉬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인원이 적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열심히 달려온 나음터의 시간을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그분의 이끄심으로 저희는 알아들었습니다. 오래 기다리며 준비하신 선생님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개인의 때와 공동체의 시간이 맞을 때, 가장 좋은 때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나음터는 늘 ‘영업 중’입니다.

3기 강사 선생님들께 수료증과 강의자료 보내드리며 긴 여정에 마침표 찍었고요. 그 어느 때보다 조촐하게 [내적 여정]이 진행되고 있고, 조용히 뜨거운 [꿈과 영성생활]은 물론, 꼭 필요한 분과 연결되는 [개인 상담]의 연결은 늘 진행 중입니다. [그림책 에니어그램 연구모임]이 무르익으면서 곧 새로운 분들을 초대할 거고요. [마음의 혁신] 강독모임도 임박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나음터 되어 경제적 영적 자원의 부족으로 연결이 어려운 분들 찾아 치유와 성장을 돕는 일을 위해 후원이 필요합니다. 이런 연구소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싶은 분들, 모르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대접하는 마음을 흘려보내고 싶은 분들, 후원으로 함께 해주세요. 돈을 존재의 가치로 바꿔 연결되는 일에 잘 쓰겠습니다.

아래 링크의 후원 신청서를 작성해 주시고, 자동이체 신청해 주시면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을 보내시게 됩니다.♡

* 후원 신청 : https://bit.ly/3C0CKuL
* 후원 계좌 : 농협 301-0240-4119-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후원 신청서

정신실 마음성장 연구소 후원 신청 양식입니다. 아래 정보를 기입하셔서 제출하시면 확인 후 문자로 후원방법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연결되어 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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