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송년 글쓰기의 '좋았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순간적으론 그리 강렬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힘으로 올해를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2021년에는 30여 명의 수강자들과 함께 했었다. 줌을 켜고 그냥 쓰면 된다 여겨 인원이 중요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작은 그룹이어야겠구나, 싶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괜히 12가 아닌 걸 실감한다. 한 분 한 분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눈을 맞추려면 12가 적당하다. 2021년에는 연구원과 나까지 포함 12명으로 제한해 버렸다. 대신 이틀에 걸쳐 두 번 진행했다. 대기하며 아쉬워하는 분들을 모두 받아드릴까, 유혹도 있었으나 참길 잘했다.


괜히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 주간 나는 기도 피정을 다녀왔고, 다녀온 당일 밤에 바로였으니 그 여운도 있지 않았을까. 유난히 극적 경험이 없는 기도였지만, 돌아보면 그래서 더 낮아진 마음이 되었었다. 한 주간이 아니다. 그 한 달 전부터 연구소 카페에 <별이 빛난다>라는 대림 묵상집으로 아침마다 묵상 글을 나누었다. 그 여운일지도 모른다. 전에 없던 대림 시기를 보냈다. 그 한 달이 아니다. 한 학기 대학원 공부하며 마음의 부침이 심했었다.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리고... 경계를 넘어간 자의 아픔을 지질하게 경험했다. 그 여운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글로 마음 다스리는 선물을 누린 내 전 생애의 여운일지 모른다. 글쓰기 시작으로 거슬로 올라가면 중학교 1학년 아버지 돌아가신 때였으니, 아버지 상실의 여운인지 모른다. 아버지 추도식이 12월이어서 내게 12월은 모든 상실과 상실로 인한 갈망과 갈망을 따라 만나는 하나님의 계절이다. 화면을 통해 가만히 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따스해지고 눈물이 자꾸 났다. 자신 안에 머물러, 주제에 따라 쓰는 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고마웠다. 일 년 돌아보며 고마운 분들, "별이 되어준 당신"에게 나도 글을 쓰고 메시지도 보내고 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글로 함께 보낸 이 분들, 작년 송년 글쓰기에서 보고 일 년 만에 만난 분도 있지만, 이 분들이 내게는 "별이 되어준 당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호모 스크리벤스(라고 한다.), 글 쓰는 인간으로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송년 글쓰기가 남긴 여운은 감사, 그것이다.

이 여운을 더듬다 생각나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의 서문을 꺼내 읽어본다.

‘너는 항상 행복해보여. 그런 너가 참 부러워’

이 말이 어쩐지 잊히질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받은 쪽지에 적혀 있었지요. 당시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버지를 잃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사춘기 여자아이였거든요. 친구들 앞에서 찧고 까불며 지었던 웃음은 슬프고 누추한 나를 감추는 위장술이었을 텐데. 친구는 제대로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실은 밤마다 아버지가 그리워 울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비빌 언덕이 없어지자 하루아침에 돌변한 세상은 낮도 밤처럼 어두웠고요. 친구가 본 제 모습이 진실이었으면 싶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가 계시고, 가난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항상 행복한’ 나였다면요.

‘항상 행복해 보이는 나’와 이른 나이에 생의 무게를 알아버린 ‘실제의 나’ 사이 불화를 중재한 것은 밤마다 쓰는 일기였습니다. 삶의 짐을 글로 옮기고 나면 묘하게도 무게감이 달라집니다. 이 희한한 경험은 저로 하여금 일상쓰기를 멈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경험에 세월이 더해지니 순환 고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루의 번뇌는 글이 되고, 써놓은 글은 하루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선형 선순환의 고리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것 같더군요. 어머나, 그 지점은 영원에 잇댄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로 빛이 들어올 틈 없는 일상의 숲에서 만나는 빈터였습니다. 거기로 갑자기 들이치는 천상의 빛이었습니다. 내 일상보다 더 큰 실재를 향해 눈이 열리고 사유의 지평이 열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설거지감이 쌓인 싱크대 앞에서도 순간이동으로 다다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아내이며 엄마로 사는 것, 딸이며 며느리이며 동시에 이 시대 부끄러운 이름 목회자의 아내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나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 모두 사라지고 ‘항상 행복한’ 날이 있으려나요. 다행히도 저의 선생님, 상담자, 구세주 그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저를 부르셨어요. 쉬운 멍에, 가벼운 짐을 함께 메고 같이 지고 가자고요. 수고하고 무거운 제 일상의 짐, 그분께 나아갈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랄 게 아니더군요. 자, 이제 저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보따리 일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무거운 짐이 쉽고 가벼워지는 신공을 보실 수도 있어요. 비밀인데요. 제게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기예가 있답니다. 일단 저의 성소() 싱크대 앞으로 오세요. 거기서 뵈어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서문

 

설날이 주일 예배는 빈자리가 많았다. 아름다운 일이다. 예배 시작 인사처럼, 노인들만 계시던 시골의 어느 작은 교회의 주일예배가 꽉 차서 풍성할 것이니까. J&W 목사님 부부가 기습적으로 우리 교회에 예배에 함께 했다. 교인이 주로 젊은 사람들이어서 설날 예배를 아예 흩어지는 예배로 정했다고. 형님네 찾아온 동생 가족이다. 내적여정과 오랜 꿈여정으로 W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작년에는 남편 J 목사님까지 내적여정, 꿈여정의 벗이 되었다. 이 만남은 남편에까지 닿아 JP과 함께 <마음의 혁신> 책모임도 하시고, 신소희 수녀님의 기도 강의를 함께 들으며 여정의 동반자가 되었다. 내적여정 동생 가족과 예배 마치고 명절 식사로 파스타를 먹었다. 설날 한 나절 짧은 만남이었다. 어쩐지 진짜 가족을 만난 명절인 듯 마음의 여운이 길다. 보이지 않는 갈등을 감추고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포장된, 흔히 떠올리는 정상 가족, 정상 명절의 모습은 아니지만. 아니어서 더욱 찐인!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
이토록 마음에 드는 꼭지 이름, 으로 두 달에 한 번 글을 쓴다.

주일 예배를 축으로 일주일이 돌고, 내적여정과 대학원 학기를 따라서 반년이 돌고, 지도자과정으로 일 년이 굴러가고...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 시간으로 구획 짓는 일들이다. 그중 특별한 주기가 두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원고 마감의 시간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즈음 며칠은 수도자 같은 마음이 된다. 일단 원고를 위해 두어 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책을 읽고, 북마크 포스트잇을 붙이고, 메모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중요한 글을 위해서 사전에 조금 읽지 않으면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효율을 고려하면 굳이 새로 읽지 않아도 된다. 이미 쓰고자 하는 내용이며 구조는 나와 있어서, 사실 쓰자면 그냥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쓰기 위해서는 읽기 의례를 통과해야만 한다. 주제에 닿고 마음에 드는 신간을 찾아 읽노라면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쓰기 위해 읽는 것인데,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원고는 까맣게 잊고 빠져들기도 한다. 2년 여 기고글을 쓰면서 중년, 노년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기획 단계에서 이미 나온 틀이 있고 쓸 말도 내 안에 다 있는데 말이다. 쓰기 전에 읽기, 최 신간 찾아 읽기에의 집착으로 이미 나온 틀이 세분화되고 약간의 깊이까지 생겼다. 원고 쓰고 돈 벌고, 공부하고, 이 모든 과정이 즐겁(기만한 것은 아니지만)고... 일석 몇 조인지 모르겠다.

원고 마감 즈음이 되면 남편을 위시하여 아이들까지 조심 모드를 자처해준다. 그러니 나는 더욱 수도자 코스프레를 하게 된다. 코스프레는 아니다. 정말 마음이 차분해지고, 오직 원고 주제만 생각한다. 책을 읽고, 해 질 녘엔 산책을 하고, 글이 써지면 새벽까지 앉아 있고, 오늘 글렀다 싶으면 어느 때보다 일찍 잠에 든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무덤덤해지면서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선다. 그렇다고 글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몇 개씩 블로그 포스팅을 한다든가(요 며칠 그랬다.), 연구소의 자잘한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한다. 연구소 단톡에 한 마디 올라오면 득달같이 답톡을 보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응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한 방향을 향하는 수도자의 그것이다. 이런 시간이 고통스러운데 즐겁다. 전에는 탈고하는 그 순간을 즐겼다면, 갈수록 이 고통스러운 과정으로서의 시간이 소중하고 좋다. 심지어 아깝다. 고통스러운데 아깝다. 작년 연말에 했던 송년 글쓰기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글쓰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이렇게 소개하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글을 쓰는 내가 참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을 쓸 때 가장 나답다 여겨지며,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삶의 모든 시름을 글로 다스린다. 쓰기 위해 읽고, 읽다 보니 또 쓰고 싶어지고... 끝나지 않을 탈고와 알라딘 주문 넣기와 독서를 오가는 시간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는 노래 영상이다. 교회 주일 예배에서 젊은 부부들이 드린 찬양이다. 작년 하반기에 했던  '육아 세미나'를 마친 후 일종의 간증 또는 종강 감사의 의식이었다. 이런 맑은 목소리, 남녀 두 파트 화음의 조화로 듣기 좋은 특송이 오랜만이다. 맑고 조화로운 목소리보다 더 좋은 것은 가사에 담긴 이들의 마음이다. 지난 몇 개월 느슨하고 진솔하게 함께 걸으며 발견한 이들 안에 있는 빛이다. 무엇보다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BGM으로 깔고 등장하는 아기들 얼굴이다. 보고 또 돌려보고, 듣고 또다시 듣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간질거리고 내 안의 좋은 것이 꿈틀거린다.

 

어떤 물질이, 자연이, 만물이, 사람이, 말랑하고 연할 때가 있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그 말랑한 때는 일종의 골튼타임이다. 모양과 틀을 잘 잡고 싶다면 아직 말랑할 때, 딱딱하게 굳기 전에 매만져야 한다.  막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배움과 나눔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시작' 앞에 서면 존재가 말랑해진다. 심지어 귀여워지는 것 같다. 초6이었을 때는 왕초 의식으로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뻣뻣하다가 한 살 더 먹어 중1이 되면 그렇게 귀여워지는 그 신비! 신혼부부와 결혼에 대해 공부하고, 갓 부모가 된 이들과 육아를 배우는 것이 보람이 되고 즐겁다. 몇 년 전에 신혼부부 세미나를 함께 했었고, 이번에 다시 육아 세미나로 만나니 내겐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러니까 한 존재를 영적여정으로 초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떠남으로 시작한다. 영적인 여정, 내적인 여정은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으로 형성된 나를 떠나서 하나나님 형상을 더듬어 가는 길이 내적 여정이다. 결국 인간 성장의 모든 여정은 여기에 준한다. 부모됨은 말할 것도 없다. 좋은 부모 되기 위해서는 내 부모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배운 것들을 인식해야 하고 털어내야 하고 때로는 사력을 다해 벗어나야 하는 일이다. 때문에 이 역시 내적 여정, 영적 여정이다. 그 마음으로 육아 세미나를 동반했다. 육아의 기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제의 나로부터 떠나, 내 부모와의 관계로 만들어진 나로부터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땅으로 가는 것이다. 결국은 신앙 여정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새롭게 만나고, 어머니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은 심리적 작업이 아니다. 그로 인해 생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가는 것은 영적 여정이기 때문이다. 남성인 하나님, 우리 부모와 닮아서 매정하거나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하나님을 떠나고 또 떠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다다르는 것 말이다. 한 가정 한 가정, 한 커플 한 커플을 기도의 마음 안에 품었다. 좋은 부모가 아니라, 먼저 좋은 부부가 되길, 좋은 부부가 되기 위해서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에 너그러워지기를. 무엇보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 맺기를.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말랑한 영혼으로 영롱한 목소리로 부른 저 노래대로 되기를. 아이를 통해 투사된 욕망과 두려움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고, 갈대상자에 태워 기꺼이 떠나보낼 수 있는 부모들이 되기를. 그 떠나보냄이 아이 삶의 참 주인, 참 부모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무엇보다 부모들 자신이 자기 부모로부터 떠나 참 부모이신 하나님 품을 향해 성장하기를.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이 영롱한 노래의 반주는 우리 채윤이가 맡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 깊은 곳이 흔들린다. 저들의 노래에 나를 맡겨 나도 우리 채윤이와 현승이를 떠나보내고 또 떠나보내고 그분의 손에 더욱 맡겨야 하겠기에.

 

첫째 날 : 교회를 울다(눅 19:37-42)
둘째 날 :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1-18)
셋째 날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사흘에 걸친 신년 사경회에서 말씀을 전했고, 위로와 감동(을 내가 받은 것)으로 시작하는 2023년 첫 주가 되었다. 마음의 벗인 P 목사님으로부터 조심스러운 제안, 초대가 왔을 때 "아이고, 사경회라뇨. 그것도 사흘이라니!" 가당치 않다고 했다. P 목사님이 나를 알고 나 역시 P 목사님을 알지만, 교회를 모르고, 담임목사님을 모르니까. 여기서 다시 소환되는(아니 내가 굳이 적극적으로 소환하고야 마는) '비목회자, 비남성' 강사 정체성이다. 사경회 사흘의 강단이 어느 비목회자 여성에게 주어졌다면, 박수를 치고 기뻐했겠으나, 나이고 싶진 않은 마음이다. 어떤 당연함, 당연히 '남성 목회자'의 자리라 여겨지는 곳에 여성이 선다면 그 자체가 기쁨이고 위로이겠으나... 나이기는 싫다. (이 기시감... 일 년에 한두 번 같은 말을 똑같이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군.) 그러나 결국 갔다. 내가 거절하면 다시 남성 목회자의 자리가 될까 봐.

교회 올해 표어에 맞춰서 "울다"에 초점을 맞췄다. 둘째 날 말씀은 부담이 많이 됐다. 여성의 하나님,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데, 연령층이 다양한 전통적(이라고 목사님은 소개하셨지만 알고 보니 '전통적'이기보단 차분하게 '진보적'인) 교회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염려가 되었다. 첫날 보니 연세 드신 어르신들도 꽤 계시고... 말씀 시작 전 연구소와 가족 단톡방에 절절한 기도부탁을 하고 강단에 섰다. 아주 편안하게, 준비할 때보다 더 아프고 뜨거운 가슴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소통된다는 느낌, 알아들어 주신다는 확신이 금방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교회 얘기를 했던 첫날보다 더 깊이 연결된 느낌으로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 날 시작 전에 목사님께서 어느 80대 권사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종이백 하나를 건네주셨다. 손편지와 함께 작은 냄비가 들어 있었다. 아, 정말 이렇게 뭉클한 편지와 선물이라니! 전날 "여성의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유독 눈에 들어온 어르신 한두 분이 계시고, 누구이실지 짐작이 가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편지와 예쁜 냄비. 이 여성적인 마음의 표현이라니! 말로 잘 형언되지 않는다. P 목사님은 "세대도 정치적인 입장과 신앙관도 다르신 권사님의 마음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졌어요.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오시며 겪은 무수한 차별과 억압에서 공감대를 경험하지 않으셨을까요." 했다. 그러셨다면... 아, 그러셨을 것이다. 이 편지가, 붉은색 냄비가 그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열정과 책무감으로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여성에게 결코 내주지 않는 마이크가 왔을 때, 피하면 안 된다는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사명감으로 서는 자리가 있다. 그런 자리일수록 부담이 크고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 내가 한 성경 해석에 대해 남편에게 묻고 또 물어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다. 여성 스피커로서 흔히 겪는 일들이 있다. 기껏 설교(강의) 잘해서 성도들 마음 데우고 내려오면, 담임목사님이든, 부목사님이든 마이크를 이어받아 내가 한 설교를 다시 요약하는 일이 흔하다. 기도 제목으로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당신 생각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단련이 될 대로 되어 있다. 단련될 대로 되었지만 부담과 두려움은 항상 있다. 그리고 작년 어느 날, 늘 가졌던 두려움을 확인받는 일을 폭풍처럼 겪기도 하였다. 몇 안 되는 교계 여성 스피커로써 가지는 책무감과 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담 가득 안고 선 자리였고, 그 일로 많이 위축되었다.

이번 사경회는, 권사님의 저 편지와 냄비 선물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작품 같다. 그분의 치유 프로젝트라는 심증이 강하게 온다. P 목사님의 조심스러운 비공식 초대를 받았을 때, 나는 어쩌자고 작년 그 일을 털어놓았다.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이유로. 특별한 말 없이 들어준 목사님의 반응에 어쩌자고 위로를 받았고. 그때 이미 하나님의 치유 프로젝트는 실행되고 있었다고 봐야겠다. 여성적인 것들이 치유되고 구원되어야 한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은 여성적인 것을 통해서 온다. 페미니즘 담은 설교를 하고, 80대 권사님께 공감을 얻는 일이 내게 일어났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내 등짝을 때리며 힘을 내고 어깨를 펴라고 해야겠다.

어릴 적 별명이 '우내미'였다. 우는 일에는 타고난 것 같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우시는 예수님을 따라 교회를 울고(교회를 위해서, 교회 때문에, 교회로 인해서, 교회를 고발하며, 교회를 희망하며.... 이 모든 말을 담아낼 적당한 조사가 없어서 문법을 파괴해야 했다.), 여성의 눈물을 보고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물어봐 주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다시 읽는다. 당신을 위해서 우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여 울고, 그 눈물로 내게 맡겨진 사람들과 연결되는 삶을 더욱 살아야 하겠나 보다. 나는 태생 '우내미'이니까.

여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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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한듯하다. 하나님과 나 자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을 봐야 한다는 말은 늘 하지만, 실제로 체험했다. 이 여정을 계속하고 싶다.❞
작년 여정에 함께 하셨던 목사님의 후기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여정을 통해 공황장애, 수면장애, 위장장애가 자연스럽게 나은 일들도 있답니다. 물론 나를 마주하는 더 아픈 과정을 용기 있게 통과하신 덕이긴 하지만요.
❝문제가 생기면 밖에서 답을 찾았는데 내적 여정을 통해 '내 안에서 찾아야겠다. 이미 붙들고 있는 걸 놓아버려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진다. centering prayer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 존재로 있는 것을 배운다.❞
재수강하신 벗님의 후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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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살아.” “나로 살아야지.”
한 번쯤 하거나 들어본 말입니다. 한 번쯤 다짐해 본 것이기도 하고요. 나로 살고 싶은데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막연한 질문인가요.

내적 여정은 에니어그램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나의 실재를 보고, 그 너머 ‘하나님 닮은 존재’로 지어진 나를 찾아가는 영적 수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면, 하나님 지식은 반드시 자기 지식과 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에니어그램 1단계를 시작하여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만나는 영성과정까지. 한 달에 두 번씩, 5개월의 시간 동안 전에 해보지 않은 질문,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의 여정을 걷습니다.


✔ 일정 : 평일(금요일), 주말(토요일) 과정이 있습니다.
✔ 장소 : 온라인 줌(zoom), 단계별 2회기, 6시간
✔ 인원 : 12명  ✔ 비용 : 12만 원(재수강 6만 원) / 단계별
✔ 문의 : 010-4235-8020
✔ 하반기 여정 신청은 7월에 받습니다.


[평일(금요일) 과정 일정과 신청]

기본 1 : 2월 10일, 17일(금) 10:00-13:00
신청 http://bit.ly/3ajDfkQ

기본 2 : 3월 10일, 17일(금) 10:00-13:00
신청 http://bit.ly/36BEA5E

심화1단계 : 4월 14일, 21일(금) 10:00-13:00
신청 http://bit.ly/3pLqqpT

심화2단계 : 5월 12일, 19일(금) 10:00-13:00
신청 http://bit.ly/39Gh7BT

영성단계 : 6월 16일(수) 23일(금) 10:00-13:00
신청 https://bit.ly/3rm7qib

[주말(토요일) 과정 일정과 신청]

기본 1 : 2월 11일, 18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36BEoTi

기본 2 : 3월 11일, 18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3amjgSC

심화 1 : 4월 15일, 22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2YAzYbe

심화 2 : 5월 13일, 20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2NMwOz2

영성 : 6월 17일, 24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3q8GogE

여성적인 것의 구원
2019년, 팬데믹 직전이었다. 연구소 시작하고 1년을 지내고 송년의 밤을 열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시작한 연구소, 생각보다 더 좋았던 1년을 정리하는 말로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이걸 내걸었었다. 카를 융과 함께 분석 심리학 작업을 했던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의 책 제목(궁금하면 클릭!)이다. 의미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융 심리학을 '경험의 심리학'이라고 한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해 봐야 체험하지 못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심리학이란 뜻이다. 게다가 '여성적 경험'을 담은 융 심리학 책이니 과연 몇 명의 독자가 제대로 읽어냈을까. 이 직관적인 책을 나 역시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 깊이 새겨진 이 한 문장의 강렬한 여운만은 진실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안다.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살고 지향한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을.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의 교회
대학원 3학기를 통틀어 이 한 문장을 얻었다. 이 문장을 듣기 위해 잉여에 겨운 석사과정을 했다 해도... 오케이, 인정이다! 잉여라 해도 아깝지 않다.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는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진보적 여성 신학자의 말이 아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 목사의 말도 아니다.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일 교수 신부님의 말이다.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온 강의안의 저 문장을 보고 쿵, 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동등하고'라는 말에 먼저 울컥했지만, '체험으로서의 교회'라는 말은 내 마음에 아니 내 삶이 이미 충만한 것이어서 익숙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비로소 '언표'된 것이다. <영성신학> 과목이었다. 영성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전제, 생명과 체험, 한 학기 내내 이 두 단어의 역동을 생각했다.

이 말 한마디 듣고자 여기까지 왔다. 언제 첫 발을 떼었을까? 서른여덟 즈음 신앙 사춘기가 시작되던 때일까, 중1 여름 수련회 때 "예수님 위해서 살고 싶어요. 선교사 될래요."라고 기도했던 때일까, 중1 겨울 아버지 손을 놓치고 천국에 있는 아버지를 그리느라 시작한 내적 여정일까,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첫 노래를 부르던 때일까, 안방 벽에 붙어 있던 기도하는 사무엘 그림을 보고 누워있던 떡아기 때일까? 나의 교회 사랑(과 미움 또는 집착)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자고 나는 이 말을 이제 와서 듣게 된 것일까? 아니, 내 안에 충만했던 말을 굳이 왜 밖에서 들어 확인해야 하는 것인가? 이 말 한마디 듣자고 나는 이렇듯 먼 길을 돌아온 것인가. 내 몸이 담겼던 교회를 떠나 높고 높은 벽을 넘어, 여기서 들어야 했던 것일까. '선언'은 얼마나 중요한가. '선포하노라!' '죄를 사하노라!' 선포에 담긴 힘이란!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후원의 밤에서 토크 콘서트 장면 / 사진 : 뉴스앤조이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은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 강의안이 사캠에 올라온 때는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나의 구원사"를 나누는 목요일이었다. 쉬는 시간에 사캠을 열어 확인했던 것이고, 쿵!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도자 과정 첫 시간의 소개와 나눔 시간에 나는 '교회'를 생각했었다. 이들에게 교회는 뭘까? 공동체는 뭘까? 이렇듯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뭐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교회에의 절망은 깊어져야 하는 걸까? 목사님, 사모님, 간사님, 선교사님, 전직 목사의 아내... 이들이 담겼거나 떠나온 교회에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헌데 지도자 과정을 마치며 구원사를 나누고,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을 통해 일구고 싶은 공동체를 그리다 보니 이들은 이미 교회를 살고 있었다! 이들이 있는 곳이 교회였다. 다만 스스로 믿어주지 못할 뿐.

저 강의안이 올라오고, 다음 주 강의를 기대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고 결국 종강 날의 주제가 되고 말았다. 종강 수업이 있던 날은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종강 날이기도 했다. 줌으로 했던 모임이었는데 "얼굴 보고 싶어요, 안아주고 싶어요" 하는 마음들이 모아져 마지막 모임을 대면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눈이 많이 왔다. 과연 다들 올까? 싶었다. 대부분 지방에 계셨으니... ktx 타고, 고속버스타고 속속 모여들었다. 풀참 대면 모임이 되었다! 손에 손에 들고 온 것들을 풀어놓으니 먹을 것은 또 얼마나 풍성한지. 색색이 따뜻한 선물까지... 여성적인 것들을 모으면 이렇다. 늘 이렇다. 이러고 보면, '여성적인 것 구원'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 구원'이다. 이날의 주제는 '하나님의 어머니 되심'이었다. 짧은 강의 후에 "하나님 어머니께"라는 글을 쓰도록 했는데, 내내 창 밖으론 하염없이 눈이 쏟아졌다. 글을 쓰고 낭독하는 사이 눈물도 쏟아졌다. 너나 할 것 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넓은 창을 마주한 내 자리에선 하염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이 꿈속처럼 느껴졌다. 아, 우리들의 하염없는... 그 무엇...

글쓰기 모임 마치고 눈길을 뚫고 학교에 갔다. 강의는 한 학기 내내 그랬던 것처럼 내게는 뜨겁고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는 모르겠고. 내게는 강의 시간이 너무 짧고 다른 학생들은 빨리 집에 가야하고.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은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문장에 대한 설명을 어찌해주실지, 나는 기대에 찼고. 교수님은 어쩌자고 당신이 써서 올린 이 문장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안 하시고. 그렇게 그냥 강의가 끝났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언표함, 선언으로 족했다.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으로서의 교회는 교수님보다 내게 더 가까운 앎일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에의 참여로서 영성을 공부하시며 그것을 살아내며 알아듣고 선언해주신 것으로 족하고 감사할 뿐. 낮에 눈 펑펑, 눈물 펑펑, 하나님 어머니 펑펑... 그 체험이면 족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일주일 후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후원의 밤 모임에 참석했다. 마이크가 주어져 떠어들댈 기회가 생겼다. 이날 주제가 "안부_ 안전한 교회를 부탁해"였다. 누구든 안전한 사람, 안전한 장소에선 자신을 드러낸다. 자기 생각을 감정을 드러낸다.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는 보호본능으로 갑옷을 입고 포장지를 두른다. 교회는 안전한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인가, 드러내고 싶은 곳인가. 포장지 두르라 권하는 곳은 아닌가. 누구에게 교회의 안전을 부탁할 수 있을까. 내가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안전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방법 밖에 없다. 우리가 안전지대가 되자는 얘기를 했다.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의 교회 얘기도 했다. 교회를 체험한, 체험으로서의 교회인 여성들이 각자 누군가의 안전이 되어 주어야 할 것 같다. 누구보다 내가.


이틀 후에는 연구소에서 또 다른 소소한 모임을 가졌다. 지도자 과정 마치고 대학원에 간 선생님들의 수다 모임이다. 한 학기 공부한 것도 나누고, 어려움도 나누는 종강파티! 여기 또 하나의 체험적 교회가 섰다. 안전한 여자들이 모이면 거기는 체험적 교회가 된다. 좋은 것은 오래 간직하고, 재현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좋은 것은 재현되지 않는다. 영적 경험은 카피되지 않는다. 체험적 교회는 한 번 서고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것들을 복사해서 재현하고 제도화하려는 제도적 교회가 매력이 없는 이유이다. 선생님 한 분이 사 오신 케이크 위에 "Love the moment"이라 적혀 있었다. 그렇다. 정녕 그렇다. 순간 체험하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 여성들이 그걸 잘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순간의 기쁨과 경이로 만족하고,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해 진실했던 지난 1년에 후회 없다. 진실하게 몰입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돌아서서 종종 부끄럽기도 했지만, 뜨악하는 반응에 괜히 했다 싶었던 적이 없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순간, 향유의 순간, 여성적인 것들의 구원이 있는 사랑의 순간이 나의 교회이다. 우리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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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이고 때로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데. 작가로서 가장 어려운 글이 후원 편지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쓰는 후원 편지가 그렇게나 어렵네요.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담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는 것을요.

후원 편지에 진심입니다. 함께 보내드리는 작은 선물에는 매번 발품, 손품, 생각 품을 쏟아붓고요. 이번엔 손수건에 연구소 심볼을 달아 보내드리려고 연구원 선생님들이 한땀 한땀 손바느질을 했답니다(양말에도 붙이려다 참았습니다!^^).

연구원 선생님들은 실은 1호 후원자입니다. 무료 상담 봉사는 아니지만, 교통비 정도 되는 활동비를 받으며 언제라도 연구소를 위해 주머니 터는 것으로 치면 최고의 후원자들이지요. 기쁨입니다! 치유와 성장의 여성 공동체를 일구고 누리는 것이 가장 큰 보상이라서요.

보내주시는 후원금은 꼭 필요한 분들 위해 은밀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의 연결인 ‘나음터’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싶은 분들, 후원으로 연결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후원자님 중에 우편으로 편지 받지 못하신 분은 연구소로 연락 부탁드려요.

해외에 계시면서도 꾸준히 후원해주신 벗님께 그간 모아 두었던 몇 년의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드리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후원자, 내담자, 모든 과정 참가자… 누구보다 저희 자신, 그리고 깨어진 이 세상, 무엇보다 누구보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과 늘 진심으로 연결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후원 계좌 : 농협 301-0240-4119-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늘 감사한 후원자님.

지난 한 해, 마음으로는 수십 통을 썼던 편지를 이제야 한 통 제대로 써서 부칩니다. 감사합니다.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신 후원금이 연결이 필요한 분들에게 닿는 끈이 되었고, 저희에겐 큰 지지와 힘이 되었습니다.

연구소에서 하는 일로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누구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자세한 보고를 드리지 못하는데도 한결같이 입금되는 후원금을 보면서 ‘믿음, 믿어주심’을 생각합니다. 믿어주심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상담과 내적 여정, 그리고 여러 집단 여정을 통해 풍성한 치유와 아프고 기쁜 성장의 순간이 이어지고 이어지는데 이 감동을 자세히 알려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나음터의 상담과 여정은 어느 지난날, 투명하게 마주하고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상처’와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상처’의 문을 열고 들어가 거기 부재하셨던 하나님을 만날 때 심리상담은 영성 상담의 영역이 되곤 합니다. 박정은 수녀는 ‘상처가 존재의 무늬’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함을 신비롭게 체험합니다.

연구소 사역의 열매는 모두 개인의 상처와 닿아 있고 상처가 무늬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이 흔하지만, 실적과 성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후원자님께도 전해드리지 못하고, 저희 자신도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을 이 편지를 쓰며 확인하게 됩니다. 영혼 깊은 곳의 기쁨과 보람은 있지만, 내놓고 박수받고 찬사받을 일이 없으니 인간적인 마음으로 지치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이 통장에 찍히는 후원자님의 성함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역시 마음을 보여주는 건 돈이로구나! ^^ 감사합니다. 믿어주심과 연결을 믿고 진실하게, 돈을 마음으로 바꾸어 내담자와 영적 벗들을 잘 섬기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 드렸듯, 지난여름부터 후원금 관리 기관(한빛누리)의 서비스를 중단했습니다. 서비스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물질적, 인적 에너지가 실제 후원금 대비 크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연구소 계좌로 바로 후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부금 영수증’ 발급을 해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후원을 위해 계좌이체 신청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마음은 있으나 미처 하지 못하신 분께는 한 번의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나음터는 자카리아스 하이에스 신부님의 묵상집인 ⟪별이 빛난다⟫를 읽는 기도로 드리며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 구절을 나누고 싶습니다.

❝별이 빛납니다. 당신은 이 길에 많은 것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길 위에서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떠나보내십시오! 당신에겐 사랑의 황금과 갈망의 유향과 고통의 몰약이 있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이것들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별을 따라 걷는 후원자님의 길이 사랑에 닿고,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닿기를 기도드립니다.

2022년 대림절에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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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되었지만 포스터가 예뻐서 여기저기 걸어두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나음터는 ⟪별이 빛난다⟫(자카리아스 하이에스, 가톨릭출판사)를 읽는 기도로 드리며 대림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발은 베들레헴으로,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별, 빛나는 별을 따라서요.

묵상하다 보니 별을 따라 걸어온 2022년입니다. 별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언젠가 보았던 별, 그 빛에 마음 뛰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다다를 주님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2022년 마지막 시간, 별을 따라 걸어온 길을 글로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함께, 그러나 홀로, 글로, 송구영신] 하는 자리에 초대합니다.

* 온라인(zoom)에서 만나 각자 글을 쓰고 나눕니다.
* 30일, 31일 같은 내용입니다. 둘 중 하루를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1차 : 2022년 12월 30일(금) 오후 8시~10
신청 링크 : https://bit.ly/2TAwI0C
+ 2차 : 2022년 12월 31일(토) 오후 8시~10
신청 링크 : https://bit.ly/3iCEdAw

+ 인원 : 각 9명(선착순) + 장소 : 온라인(zoom)
+ 수강료 : 2만 원 + 안내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6209-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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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명쾌하게 자기소개하는 게 어려운 인생이다. 작가, 소장, 강사, 대학원생...으로서 하는 일이 상충한다. (사실 가장 가까운 일상은 엄마, 아내, 그리고 약간 사모라 불리는 목회자 아내이다.) 그만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산다는 뜻이다. 페르소나에 맞는 일정표와 달력을 여러 개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으로서 '지도자 과정'을 동반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인가 보다. 이 달력이 제일 중요하니 말이다. 내일은(아니 정확히 오늘과 내일 일박이일) 지도자 과정 종강 피정이다. 일 년이 지도자과정 스케줄에 맞춰 돌아가고, 일 년의 기쁨과 슬픔, 즉 존재의 의미가 여기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종강 피정 일박이일은 달력에 별표 열 개를 치는 날이다.

화요일은 유난히 분열적이다. 작가, 대학원생...으로 사는 일에 급급하다 밤 11시 다 되어 귀가하니 바로 내일이 되었다. 별표 열 개짜리 일정이 있는 내일이 되었다. 김치와 피클부터 핸드드립 세트까지. 정신없이 짐을 싸고 보니 나란히 함께 하기 어려운 두 개의 정서, 위안(consolation)과 황폐(desolation)가 이중창을 부른다.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는다. 몸도 함께... 알 것도 모를 것도 같다. 낮에 '교회 성폭력 생존자 치유 글쓰기 모임'을 하며 교회고 뭐고, 인간이고 뭐고 모든 것에 절망했다. 마치고 학교 가서 수업을 듣는데,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 개신교와 가톨릭은 얼마나 먼가... (어느 순간 그리 가깝게, 전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때도 있건만...)

짧은 시간 안에 소개하기 어려운 복잡한(그 많은) 페르소나가 하나도 먹히지 않는 공간에 앉아 있자니, 신앙 사춘기 때부터 그렇게나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이냐시오 영신수련도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자꾸 눈물이 났다. 위안(consolation)과 황폐(desolation)의 이중창이 제대로 진실의 노래였다. 아, 이건 이냐시오 성인 작사 작곡의 노래인데. 영신수련은 지금 내게 먼 것인가, 가까운 것인가... 쓰고 보니, 쓰다 보니 좌표가 찍어진다. 나의 좌표, 나의 현재는 여기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인의 갈팡질팡이다. (루저, 외톨이, 센 척 하는 겁쟁이...는 아니지만)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 같다. 연구소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나의 구원사'를 쓰고 낭독했던 지도자 과정 모임 이야기이다. 그 시간을 떠올리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아, 다른 건 모르겠고 내 사랑의 좌표는 여기이다.영성이란 언제나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과거의 기억을 다시 새롭게 써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답습이 아니라 개정판 작업입니다. 최근 심리학 이론 중에 ‘현재주의’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발을 딛고 과거를 봅니다. 어디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마음으로 과거를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지도자과정 마지막을 달리는 시간에 나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어느 여정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입니다. 자랑과 성취가 아닌 부끄러움을 나누며 무르익어온 만남입니다. 이런 현재에 서서 다시 써보는 과거는 또 새롭습니다. 새로운 개정판입니다. 이 ‘현재’는 사랑입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나에게 있어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영성이란 언제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_리처드 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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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세미나 중인 교회 젊은 부부들과 J 집사님 댁에 초대를 받았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놀고, 긴 시간 훈제로 구운 삼겹살은 입에서 살살 녹고, 탁 트인 시야로 마음까지 트인 사람들은 여유롭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주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는데, 집에 오니 단톡방에 몇 년 전 그 장소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와, 이렇게 작았었다고? 씬스틸러는 아기들이다. 보자마자 신이 나서 사진 오려 붙이고 화살표 그려서 단톡에 올리며 낄낄거리는데... 채윤이가 그랬다.

엄마, 제발... 체통을 지켜. 이러는 거 주접...
아! 그래? 어쩌지? 이미 올렸는데.... 괜찮아. 재밌으면 땡이야!


희망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에 대해 낙관적 기대는 없고, 남편이 목회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교회를 떠났을 것 같다. 한창 교회가 싫을 나이, 신앙 사춘기 한가운데의 허세는 아니다. '허튼' 희망을 잃었다고 하자. '신앙 사춘기'의 독기가 완전히 빠지진 않았지만, 나름 치열하게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자매들과 치유 글쓰기를 하는 중이고, 목회자로 인해 신앙은 물론 삶까지 망가진 분들을 흔하게 만나고, 반면 얼치기 신앙 사춘기 교인들로 인해 정신과 영혼이 말라비틀어져가는 목회자들을 본다. 자주 생각한다. 교회엔 희망이 없어...

주일 오후에 <육아 세미나>로 만나는 시간에 교회를 느낀다. 육아노동 가사노동으로 인한 갈등, 어린이집 선택부터 사교육의 문제까지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의 긴장, 내 부모로 인한 상처가 아이에게 투사되어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니 그냥 아이들 등원시키고 출근하는 고된 아침을 '죽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사는 이야기, 종일 아이 재울 생각만 하다 막상 잠든 아이를 보면 밀려오는 죄책감 같은 것....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교회를 느낀다. 엉뚱하게도 내게 교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 사람들 곁에 내가, 내 곁에 이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느낀다.

나는 교회의 딸이다. 이건 추상적 표현이 아니다. 태어나보니, 교회의 딸이었다. 어릴 적에 누군가를 따라 동네 우체국에 간 적이 있었다. 우체국에는 전화국도 함께 있어서 교환수 언니 한 명이 전화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으로 동네 전화를 다 연결했다. 나를 보자마자 "79번!(우리집 전화번호) 교회집 딸이네!'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날 보고 "목사님 딸"이라고 하니까. 교회집 딸이라... 그러면 절집 딸도 있겠고... 여하튼 태어나보니 목사 딸이었고, 목사 딸로 불렸던 나를 부르는 다른 말은 '교회집 딸'이었다. 이렇게 정말 나는 교회의 딸이다. 자랑과 자부심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때로 많이 부끄럽다. 좋은 교회 좀 소개해 달라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교회가 없다. (아는 좋은 교회가 없어요...)

모임을 모두 마치고 엄마빠와 아기를 태운 차가 하나 씩 골목을 내려간다. 안녕, 안녀~엉!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안녀~엉! 한 대씩 떠나보내는 중 남편이 "꼭 명절에 큰 형님 집에 온 동생들 보내는 분위기예요."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사님 가족과 우리 부부, 또 다른 형제님 한 분이 골목 양편에서 서서 인사를 하는데 따뜻한 것이 꼭 가족모임 이후 같았다. 카시트에 폭 싸인 아기들 때문인지, 고기로 꽉 채운 위장이라서인지, 영혼이 따뜻한 무엇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영성을 배우고 있으니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도로서의 교회에는 무엇도 희망하지 않는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를 배워가고 있다. 정해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과 연민과 기쁨이 생겨나는 곳(또는 때)이다. 연구소 모임에서는 자주 체험으로서의 교회가 선다.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이, 사랑이 사람들을 묶는다. 기쁨보다 슬픔, 간증 나눔보다 실패의 고백인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체험으로 예배는 그래서 더 성공이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는 이제 내 일상에 흔하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젊은 부부란 없었다. 몇 년 전 <신혼부부 세미나>를 진행할 정도가 되었고, 이번에 모여 사진을 찍고 보니 '이렇게 많았어?' 싶은 것이다. 조용히 이렇게 무엇이 자라고 있었구나. 게다가 최근 등록한 두 두 커플이 함께 초대되어 왔는데. 이들은 JP와 나의 젊을 날을 함께 했던, 교회에의 열정이 순수했던 그 어느 날에 함께 했던 이들이다. 사랑하고 실망하고 배신당했던 교회생활의 역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저 사진에 다 있다. 저 사진 속에 교회가 있다.

J집사님 부부가 참 귀하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면 다시 초대해서 되갚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 키우며 살아내기에 바빠 내놓을 것이 없는 여유 없는 사람을, 한참 어린 사람을 초대해준 집사님이 교회를 열어주었다. 성령님께서 이날 이 순간 잠시 내 마음에 교회를 열어주셨다. 메마른 땅에서 잘 견뎠다고 토닥토닥해주시며, 교회는 여기 있으니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자꾸 발견해가라고 하셨다.

2022년 10월 25일.
아침 운동 갔다 돌아오는 길, 고개를 푹 떨구고 걸는 중이었다. 짹짹짹짹, 귀를 잡아 이끌어 위로 향하게 하는 소리이다. 새 한 마리가 혼자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울음을 내뱉고 있다. 왜, 왜애, 무슨 일인데? 왜 혼자 그러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가만 서서 들어보니, 울음 섞인 성토 같기도 하다. 무엇이 됐든 '혼자' 저러고 있는 게 마음이 쓰인다. '혼자'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옆 나무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둘이 대화 중이었구나! 둘이 주거니 받거니, 어는 순간엔 함께 짹짹짹짹 꽥꽥꽥꽥한다. 하나는 제자리에, 또 하나는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대화 중에 움직이는 게 예의가 아니라 끝까지 함께 있으려 했는데, 둘의 대화가 끝나지 않아서 내가 먼저 털고 나왔다. 한참 고개를 쳐들고 있었던 탓에 뒷목이 뻐근하기도 하고...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는 날이다. 벌써 내려앉는 마음, 벌써 치밀어 오르는 뜨겁고 차거운 분노, 벌써 띵한 통증이다. 하늘의 전령이며 우리들의 선생님인 새가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 고개를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라고. 함께 쓰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기억하고 떠올려 보라고. '혼자'가 아닌 게 얼마나 큰 힘이냐고. 발치에 떨어진 낙엽 하나를 주워와서 책갈피에 꽂았다.

2022년 가을과 함께 깊어질 또 하나의 W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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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카페 '읽는 기도'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전의 어떤 책 보다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웠다. 조회수도 나오지 않고, 혼잣말처럼 필사하고, 묵상 내용은 셀프 메아리 댓글로 달아 올렸다. 독백의 유익을 알았다. 독백이 아니었다. 50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예수님과 사랑이 빠진 한 여인과 만나는 만남이었다. 이 내밀한 만남을 '논문'이라는 형식에 담는 작업 중이다. 좋은 우연들에 힘입어 20여 년 만에 논문을 다시 써보려 한다. 너덜너덜해진 <영혼의 성>을 매만지며 '논물 쓸 결심'을 새롭게. 아래는 오늘 아침 연구소 카페에 올린 글이다.


---------------

나음터 벗들과 같은 기도로 시작하고 싶은 바램으로 '읽는 기도'로 하루를 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일종의 '필사'이고, 쓰는 기도가 됩니다. 여러 권의 책으로 기도했습니다. 엊그제 <영혼의 성>을 끝냈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책 보다 의미가 있습니다. 16세기 가톨릭 수녀님의 언어를, 우리와 차원이 다른 기도를 경험하신 이야기를 읽고 오늘의 묵상 주제로 가져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머리의 이해가 아니라 마음 기도의 연결이었습니다. 아침마다 글을 올리는 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눈 뜨면 먼저 카페로 들어와 읽는 기도 게시판을 열며 시작하는 몇 분도 같은 은혜를 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희한하게 꼭 오늘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는 좋은 우연이 따릅니다.

<영혼의 성>을 마친 날이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가 선종하신 날이라는 것을 알고 저는 심장이 쿵쿵거렸습니다. 누군가는 "우연히 그럴 수 있지!" 라고 말하겠지만 제게는 우연 그 이상이니까요. 존경하는 스승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좋은 일에는 좋은 우연이 따르더라구요."라고 하셔서 지지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여러 좋은 우연과 우연으로 나음터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읽는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데, 어느 책으로 해야 하나... 여러 후보 중 고민 끝에 <영혼의 성>을 제대로 한 번 더 할까 마음 먹었었습니다.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연구원 선생님들이 이제야 맛을 알아가기 시작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더 많은 벗들과 데레사 성녀의 기도 영성을 공유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리 마음먹고 있는데... 또 다른 좋은 인인이 난입하였습니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 분도출판사

영성적 에니어그램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내 안의 접힌 날개>를 쓰신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묵상집이 막 발간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분의 책을 출간 즉시 구입하여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음터 영성의 한 축은 리처드 신부님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책은 무려 daily meditation입니다. 그간의 저작과 강의에서 하루 분량 묵상 글로 발췌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이런 좋은 우연이라니요!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부디 '읽는 기도'로 같은 아침을 여는 벗이 한 분이라도 더 생기면 좋겠습니다. 이제 읽고 지나가지만 마시고, 한 줄이라도 묵상은 나눠주시면 좋고요. 기도와 묵상의 루틴을 가지는 일은 참으로 좋은 훈련이 됩니다. 아침마다 필사와 묵상으로 시작하는 저의 아침 루틴은 저를 지켜내는 참 좋은 습관이 되고 있습니다. 함께 해요! 이 묵상집의 원제는 <Yes, And...>입니다. 저라면 번역하며 이 책을 제목에 넣었을 것 같아요. 하루를 시작하기 얼마나 좋은 말인가요?

Yes,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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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담을 넘고,
신분의 담을 넘고,
공간과 시대의 담을 넘은
중세 여성 평신도 공동체 “베긴(Beguine)” 영성 특강에 초대합니다.

작년 12월, 연구소 3주년 기념 특강으로 “여성, 영성, 공동체”란 이름으로 베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한 여성도 있고, 비혼 여성도 있고, 자기 집에서 사는 사람, 공동체로 사는 사람, 은수자로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처럼 살고자 했던 여성들, 수도원이 아니라 일상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수백 년 전 여성들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많은 것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요.

작년 특강 후에 마음에 남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당한 지도자도 있습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무명 베긴의 시라고 합니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배움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가톨릭 대학교의 정태영 신부님을 모시고 베긴 영성의 배경과 함께 베긴의 산파로 태어난 여성 신비가 제르트루다(Gertrude of Helfta, 1256-1302)의 영성에 대해 배워보려 합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던 그는 베긴 등 새로운 영성을 전통 안에서 받아들여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결합시켰다고 합니다. 제르트루다의 저서 『수련(Excercitium)』으로 ‘말씀’을 통한 마음의 수련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 강사 : 정태영 신부(가톨릭 대학교)
+ 일시 : 2022년 10월 7일(금) 오후 2:00 ~ 4:00
+ 인원 : 30명
+ 장소 : 공간, 서로이음
        (마포구 서강로 9길 52, B1)
+ 참가비 : 이만 원(후원자, 내적 여정 참가자 만 원)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3kDbLfR

 

담을 넘은 여인들 : Beguine 영성 특강

베긴영성 특강 강의 신청 양식입니다. + 강사 : 정태영 신부(가톨릭 대학교) + 일시 : 2022년 10월 7일(금) 오후 2:00 ~ 4:00 + 인원 : 30명 + 장소 : 공간 <서로이음> (마포구 서강로 9길 52 B1) + 참가비 : 이

docs.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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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우리가 실제의 우리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인 척하는(자만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상상한다) 대신에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질서 안에서 적합한 위치를 조용히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초자연적 겸손은, 사회에 우리를 통합시키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맺게 한다. 이로써 우리의 인간적 존엄성은 그 가치를 더한다. 자만은 우리를 거짓 존재로 만들지만 겸손은 우리를 진실한 존재로 만든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적 겸손과 금욕 생활은, 언젠가는 소멸할 세상에서 매일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가가르친다(살후 3장). 사도 바오로는 평범한 생활을 초자연적인 일과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짓된 신비주의에 의한 들뜬 동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며 현세적 안전과 행복을 탐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시간 속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한다거나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더 안전하게, 소박하게 일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삶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 목적을 추구할 때 따라오는 무익한 동요를 피할 수 있다. 덧없고 헛된 가운데서 평화롭게 살지만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뒤의 실체를 본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기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완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평범한 생활은 장엄한 금욕적 생애보다도 더 거룩하고 더 초자연적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 바로 최상의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이야말로 평범할 수 있으며 영적 자만의 한계를 넘어선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겸손은 그렇지 않다. 겸손은 평범한 것을 들어 높여 변모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 속에서 모든 평화를 찾는다.❞

토머스 머튼의 사랑에 이르는 길, 중


어렸을 적부터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재산을 팔아 바쳤는데, 조금 챙겨 숨겼다고 죽이기까지? 초대교회 시작의 엄중한 시절이라 하나님께서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셨다는 해석도 들은 것 같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팔 토시 끼고 다니며 시범 케이스로 아무 학생이나 패는 ‘학주’ 같은 그런 분이라고? 내적 여정의 어느 길목에서 알아들어졌다. "실재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이려는 척"이 무서운 죄로구나! 추석을 휴일로 지내는 아침 영적 독서 내용이 참 좋아서 옮겨 적어보았다. 겸손은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아니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알 때 맺는 열매가 겸손이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바라고, 지금 여기의 평범을 회피한다. 그러다 빠지는 것이 거짓 신비주의이다. 누추하고 무력한 지금 여기의 시간을 초자연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다. 실재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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