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후 꿈모임에 ‘고양이’가 등장했습니다. 고양이는 꿈, 특히 여성의 꿈에 의미가 큰 상징입니다. 고양이는 독립적인 동물이죠. 페르시안 고양이의 도도함이 절로 떠오릅니다. 누구의 인정이나 허락이 필요치 않은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입니다. 여성의 꿈에 고양이가 등장했다면 독립성, 단지 심리적 독립이 아니라 영성적 독립을 촉구하거나 안내하는 것일 겁니다. 이 모티브로 ‘여성성’에 대해 풍성한 나눔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다를까요.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가 천차만별입니다. ‘다름’이 ‘고유함’으로 다가옵니다.

!!!

바로 그 앞의 오전 꿈모임에선 이런 꿈을 들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를 씻기고 특별히 사타구니를 잘 닦아주려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티브로 ‘타자화 된 여성성’을 나눴거든요. 남편, 남성, 아버지의 눈으로 본 나의 몸. 그리고 여성성. 결국은 한 번쯤 당해 본 성추행의 기억입니다. (네, 여성이 모이면 셋 중 하나는 성추행, 다섯 중 하나는 성폭력의 경험입니다.) 안전한 곳이기에 솔직하게 나누고 발설하는 것으로 이미 치유의 강물이 넘실거립니다.

!!!!!!

전날, 화요일 밤 꿈에선 ‘초경’의 경험이 소환되었습니다. 초경 즈음, 2차 성징을 맞은 자신의 몸을 기쁘게 환영해본 여성은 많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적인 존재로 여성의 몸은 죄와 수치심 그 자체라고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미 규정 당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월경이 찾아오면 그것을 숨겨야 하고, 생리대는 감춰야 하고, 행여 옷이 묻었다면 큰일이 난 것입니다. 월경을, 월경하는 몸을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소환된 초경의 기억으로 여성성의 경험을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

놀랍습니다! 연구소 꿈모임이 일주일에 세 번인데, 연달아 같은 주제입니다. 여성, 타자화 된 여성의 몸, 여성성. 화요일 저녁으로 시작하여 수요일 오후 ‘고양이’라는 상징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연구원 중 한 분이며, 오후 꿈모임의 멤버인 쌤이 혼자 한 달 대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 사진이 하나 단톡방에 올라옵니다. 핑크색 우산을 쓴 고양이 사진입니다. 헐, 대박, 흐억.... 멤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쌤, 대만에서 득도하셨나요?” 연구소에 몰카 설치하고 가셨어요? 참 놀랍습니다.

!!!!!!!!!!!!!

목요일 저녁엔 전부터 계획된 박정은 수녀님의 ‘여성과 영성지도’ 특강에 참석했습니다. 꿈모임 식구들 여럿이 함께 했지요. 꿈과 영성생활 집단여정을 통해서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얘기해주셔서 자부심 뿜뿜하며 살짝 놀랐지요. 아니, 워크숍 주제를 주시는데 ‘여성의 성’입니다. 참석한 우리들 “예습 했잖아요. 우리 어제요....” 이 지점에선 놀라서 놀랍지도 않은 지경이었습니다.

!!!!!!!!!!!!!!!!!!!!

글로 읽으시면 뭐 대단한가 싶으실 텐데. 경험한 사람들에겐 놀라운 신비입니다. 신비란 말로 다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이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만. 여성, 여성적인 것, 여성성의 치유와 구원은 연결되는 것, 발설하는 것, 누가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함께 걸어가 주는 것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블로그 포스팅이 뜸한 이유는 다른 곳에 차린 살림에 마음을 빼앗기는 탓입니다. 사회적 자아로 사는 페이스북 개인 계정, 영혼을 많이 갈아 넣은 살림집 연구소 페이지 계정 등이지요. 그러나 돌아와 발뻗고 쉴만 한 집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블로그입니다. 연구소는 따로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검색하고 찾으시는 분들이 찾다찾다 유령 연구소냐, 어딘가에서 봤는데 두 번은 못 찾겠다 하시네요. 연구소는 페이스북에 '상처 입은 치유자들'로 찾으시고, 카카오톡플러스친구에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로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딴집 살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최근 소식 알려드릴까요.  



♠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 않은 세미나 ♠

심화2과정 하루 여정 마쳤습니다. 차분하게 반가움 나누며 시작.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한 마디 질문 앞에 누구랄 것 없이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돌아보면 솔직하게 나누는데요. 거의 비슷한 내용.

오늘 여기, 오고 싶지만 오고 싶지 않은 마음. 설레지만 부담되는 곳입니다. 일상에서 쓰는 사회적 얼굴은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어도 된다는 것을 알기에 편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님을 아니까요. 그럼에도 결국 둘러 앉았습니다. 여정을 이끄는 더 역시 세미나 있는 날 아침마다 느끼는 양가감정입니다.

여정의 실전편이라 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생각’과 ‘감정’을 톺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이 아니라 마주 앉아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 들려주는 분들이 가장 투명한 거울인 것은 변함 없습니다. 함께한 벗님들 감사합니다.

영성과정 하나 남겨두고 있습니다. 1단계 들으신 분은 중간과정 못들으셨어도 신청 가능합니다.

[영성단계]

+ 일시 : 7월 13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 장소 : 신촌 나음터 (2호선 신촌역),
+ 비용 : 12만원/ 1일
+ 신청 링크 클릭 


♠서로가꿈 : 커플/부부 관계 세미나♠

“평생 사랑하며 살아갈 우리 사이, 잘 가고 있는 걸까?”
정기 건강검진 받듯 잠시 멈춰 점검해보고 싶은 커플, 건강한 관계를 꿈꾸는 커플을 초대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Prepare/Enrich 검사에 기반하여 돌아보는 시간이랍니다. 사랑을 가꾸어 가며 서로의 성장을 지향하기 위해 무엇에 주목해야 할지 짧은 강의와 이야기 나눔을 통해 알아봅니다.

+ 일시 : 2019년 6월 29일(토) 오후 2시-4시
+ 장소 : 마음성장연구소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대상 : 커플(부부) 3~5쌍 선착순 마감
+ 비용 : 총 7만원/커플 (온라인 검사비 2만원 포함)
+ 신청 링크 클릭 

+ PREPARE/ENRICH : 결혼 만족에 대한 10개의 핵심 영역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유일한 검사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커플관계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를 세워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 후속 워크샵 “서로가꿈 플러스(+)”도 곧 개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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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글쓰기 모임에서 “천국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라는 제목으로 편지글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가장 많이 담지한 대상이 떠오르겠지요. 수신자의 대부분이 ‘아버지’라는 것이 익숙한 놀라움입니다. 공원 산책을 하다보면 카메라에 담고 싶은 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정말 흔합니다. 목마를 태우고, 자전거 타기를 가르치고, 위태한 걸음마를 호위하며 아이 곁을 지키는 아빠들. 내적 여정이나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아빠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며칠 전 십 수 년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책 읽어주는 아빠가 책을 읽어주던 아빠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경험으로 책도 쓰셨고, 개인적으로 많이 배우고 싶은 분입니다. 네 살 아이가 열여덟이 되도록 꾸준히 지속한다는 것이 놀랍고, 다 큰 청소년 아이가 그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책 읽어주는 아빠’의 시작과 끝이 가족, 특히 아이와의 ‘정서적 연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근, 야근, 야근, 야근....의 나날 끝에 이건 아니구나 하며 시작한 것이 퇴근 후 몇 분이라도 책을 읽어주자는 것이었다고요. 그렇게 십몇 년 지나고 돌아보니 얻은 것이 ‘행복, 좋은 삶, 관계’라는 것입니다.


강의 중 본인의 아버지와 정서적 관계는 물론 아버지의 직업 상 물리적으로도 같이 한 시간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즉 많은 남성들이 그러하듯 좋은 부성은 커녕 부성을 느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지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아빠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부성(父性)을 어떻게 배우고 구현하신 걸까요?

 

심리학에선 어린 시절의 결핍이 어떻게 오늘의 성격적 결함을 낳는지, 자기방어와 신경증을 낳는지 그 설명과 이론이 무수합니다. 그러나 ‘결핍’ 속에서도 건강한 인격으로 꽃피우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빈곤합니다. 어떤 결핍이 어떤 심리적 장애를 낳는다는 이론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강사님께 그 부분을 질문했습니다. 흔한 심리학적 원리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여쭈었습니다. 즉 내 아버지와 정서적 관계맺음의 경험 없이 아이와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일궈내신 힘이 무엇인지 말이지요.(저는 ‘책 읽어주기’라는 행위보다 선행하는 것이 이이와의 진정한 관계맺음을 향한 내적인 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했던, 그러나 다시 새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의 고유한 아픔들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치심이란 말도 쓰셨습니다. 그러다 젊은 날 만난 안전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한 번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내놓은 것이 아니라 신(그분께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발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이 가진 경험의 어두운 부분들을 하나님이 수용해주시는 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으로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용하니 절로 타자를 수용할 힘이 생겼고, 누구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상처를 내어놓는 아빠. 내 아버지에게 받고 싶었던 바로 그것을 받지 못해 아픈 상처를 인식하고 내놓을 수 있는 아빠가 흔히 말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게 된다는 것이군요! 부끄러운 상처를 내어놓는 것은 또 다른 상처를 받겠다는 용기일 수도 있습니다.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옷을 벗는 느낌이랄까요. 치유와 성장의 열쇠는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부성을 경험하지 못해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비이고, 참된 의미의 기쁜 소식입니다!



라고 페이스북의 연구소 페이지에 글을 썼습니다만.

심리학과 영성 사이에서 치유를 꿈꾸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핍의 존재이며 동시에 하나님 형상인 우리. 사랑에 목말라 중독에 빠지나 이미 사랑이 부어진 존재로서의 인간. 둘 사이를 오가며 공감과 연민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상처 입은 치유자의 태도인 것은 알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응원해주세요!




교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과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세미나로 함께 했습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토요일, 오후부터 저녁까지 함께 했습니다. 청년이면 그냥 마음이 가는데 교회 문제를 겪고 있는 청년들이라니 지방이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한 청년이 질문을 해왔습니다. 다가와 말을 떼는 표정만 봐도 질문의 무게가 가늠 됩니다. 조금 울 것 같은 긴장감이 바로 느껴졌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강의 내용에 수긍이 되기도 한답니다. 무의식이나 인간의 심연에 대해 일정 정도 동의 하는데, 자신이 가진 기독교적 인간관과 충돌할 때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 무의식과의 대면입니다. 끝없는 자기분석의 요구입니다. (제 에니어그램 강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성찰'을 강조하고 하지요. 치열한 자기성찰을 강조합니다. 각 유형의 자아상 너머 무의식적 집착과 회피를 마주하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지 딱 알아들었습니다. 과연 정신분석에서 요구하는 끝없는 자기분석이 답이냐, 하는 말이었지요. 끝없는 자기분석, 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내게 달린 것처럼 노력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보되 동시에 늘 그분께 내어맡겨야 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스캇 펙의 책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격이 형성된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내적 여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에니어그램 심화과정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어떤 상처와 결핍으로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 속에서 왜 어떤 사람은 저렇듯 빛나는 아름다움을 일궈냈는가, 이지요. 저는 내적여정 안내를 하면 할수록 그 지점에 마음이 머뭅니다. 치열한 자기분석 필요해요.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심리학의 끝과 우리의 결론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네, 저는 진정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교회에 박득훈 목사님께서 설교자로 오셨습니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중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심연을 마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나 얻을 수 있는 태도이지요. 니체의 말처럼 심연만 들여다보다가는 내 그림자에 내가 먹혀 버릴 지도 모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하늘을 우러러 봐야 승리한다!”였습니다. 심연을 한 번 들여다봤다면 하늘을 두 번, 세 번, 열 번 올려다봐야 자기혐오 또는 자아팽창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적여정은 그런 것입니다. 자기분석을 위한 세미나가 아니라 치열한 성찰과 자기분석의 노력을 하다 순간순간 그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늘 아버지와 연결되는 힘을 기르는 여정입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의 내적여정 세미나는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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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상담 전문가가 수선해 줄 필요가 있는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생명을 찾을 수 있는 소외된 영혼으로 보아야 한다.



연구소 연구원 스터디 첫 책을 마무리 하며 마음에 새긴 한 문장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 즉 내담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우리는 다르게 읽었다. 개인상담, 집단상담, 내적여정에서 만나는 누구라도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고, 연결이 끊어져 생명을 찾을 수 없는 ‘소외된 영혼’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나음터를 찾으시는 분들을 만나겠다는 의지이다. 세상에 상담소가 허다하지만 굳이 '나음터'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상담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상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구원 H와는 20년이 훨씬 넘은 인연이다.  10여 년 상담을 하다 7,8년을 쉬고 이제 다시 내담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10년 상담을 그만두도록 뽐뿌질 한 것도 나다. 그 이후 이젠 상담 다시 하라고 쪼아댄 것도 나다. 연구소를 시작하고 H가 말했었다. "언니, 나 이제 상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쪼아대도 상담은 안 하겠다던 H가 저 말을 하기까지 통과하 지난한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저 구절에 대해 나누면서 고백했다. 10년 상담을 실패라 규정했노라고, 상담으로 사람을 고칠 수 없다는 결론, 자신은 상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요. 그리고 다신 상담하지 않겠다며 다른 일들에 마음을 주며 살았다. 


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자기 스스로를 수선이 필요한, 뭔가 잘못된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연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타인을 만난다. 타자를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하고, 배제하는 이들로 상처 입는 때가 있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대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신비로운 존재로 대하며 선의의 해석으로 여백을 둘 줄 아는 사람은 필연 자신을 그렇게 대한다. H가 지난한 내적여정을 통해 손상된 자아가 아니라 소외된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이 간극은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가까운가! 자기와 타인을 고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연결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 타자, 하나님과 연결이 필요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알아들는다는 것은. 


훌륭한 상담자를 만나고 신령한 영적지도자를 만나면 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누군가 날 고쳐주겠지, 가 아니라. 연결되기 위해 힘을 낼 때 문제는 해결된다. 고립시키고 고립되는 한, 치유와 성장은 불가하다. 나와 타자를, 우리와 당신들을 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악'이다. 상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연구원들과 함께 정말 좋은 상담자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성찰하고 기도한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상담자든 그를 찾는 내담자든 인간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관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진정한 내 자신과 연결이 끊어진 소외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짧은 영상은 연구소 한 벽을 장식한 치유의 실을 처음으로 연결시킨  조소희 교수님의 손이다. 특별할 것 없는 손놀림이지만 예술이다. 그분은 저런 단순한 손놀림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한다. 싸구려 무명실을 이어 만든 작품처럼 가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라도 연결을 포기하지 않을 때는 예술이고 작품이다. 연결이 치유이고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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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못 쉬는 것은 미세먼지 때문만이 아니다.

밀폐된 공간이 뿜뿜 뿜어대는 자아 팽창의 호흡으로 충만할 때

공간은 마음의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 영적 호흡곤란 상태가 될 지 모른다. 

온통 '나'로 가득 차 빛 하나 들어올 틈 없는 자아숭배의 공간이라면 그렇다.

빈 가지 사이로 바람과 햇살의 길을 내주는 겨울나무 겨울의 숲처럼

여백이 있어야 한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주일예배 광고 시간이었다.

마지막 광고를 마칠 즈음 회중석 뒤편에서 작지만 큰소리,

주보에 없는 소리라 더 크게 들리는, 어느 집사님 한 분의 목소리였다.

"목사님, 저기..... 광고 하나...... 오늘 점심은 버섯 밥이었는데요, 맛있게 잘하려다 보니까......

어쨌든 밥이 안 됐어요. 그래서 점심이 없어요. 

대신 버섯과 쌀을 싸드릴 테니 집에 가지고 가셔서 맛있게 해 드세요."

미소 섞인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예배는 끝났다.

덜렁덜렁 버섯 섞인 쌀 봉지를 들고 돌아가시는 교우들의 뒷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책나눔 계획이 있던 청년부와 함께 밥솥째로 집으로 가져와 맛있게 먹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사고가 좋다.

식사 당번 집사님들이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 

쌀과 버섯이 앉힌 그대로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하셨겠지만, 

어떡하냐, 어떡하냐 당황도 하셨겠지만.

그것이 주보에 없는 광고가 되고, 미소 섞인 웅성거림이 되고, 

덜렁덜렁 마음은 허전하고 손은 좀 무거운 발걸음이 되는 것이 좋다.

기계가 아니고, 로봇이 아니라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란 이렇듯 예측 불가의 공간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때로 당황하고, 허허 허탈한 웃음 웃으며 자아의 빽빽한 숲에 빈터가 생긴다.

'내'가 지켜내는 무엇, 무엇, 무엇들이 얼마나 하릴없는 것인가.

엄격, 근엄, 진지. 각 잡고 예배 드리던 엄근진의 숲에 사람 냄새 실어오는 바람이 불었다.


작은 교회 와서 좋았던 기억은 생뚱맞게도 이런 일, 이런 순간이었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심호흡 크게 하는 날처럼 마음의 숨 크게 한 번 내쉬는 일주일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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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지켜야 하는 것들은 사실 좀 낭비적이다. 가령 상담을 주업무로 하는 연구소를 냈다면 시간과 에너지를 상담에 올인해야 하는 것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내담자 하나라도 더 붙들고, 프로그램을 더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상담 한 건 못하더라도, 시간이 맞춰지질 안하서 내담자 한 분을 못 받더라도 우선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시간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면 가치는 사치가 되기도 한다.


상담과 여타 프로그램 진행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연구원 정모이다. 나를 포함한 연구원 네 사람 모두 바쁘지만 급한 일에 매여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였다 하면 서너 시간은 눈 깜빡하는 순간으로 지나간다. 책 한 권을 읽고 스터디, 가지 치는 주제로 토론, 사례 연구, 거기다 솔직한 나눔까지.


처음 만나던 날, 일단 연구소 청소부터 했고. 이후로 정신 없는 준비 일정 가운데에도, 개소식 진행하면서도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공부했다. 상담이냐, 치유공동체로서의 교회냐? 이 주제를 지지부진 읽고 나누고 숙고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삶의 어려움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목회자를 찾아야 하는가의 문제 말이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기도를 해야 하는가. 물론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를 연구소의 가치로 삼으니 어려워지는 것이다.  


<상담과 치유 공동체> 함께 읽기를 마쳐가는데 다음 책이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다. 찾아오시는 내담자가 거의 여성이다.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과 다르고 여자의 몸을 입고 살고,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 여자로 신앙하고, 교회 생활하는 것은 남자의 그것과 다르기에 연구소의 '주의'는 '여성주의' 아닐 방법이 없다. 자연스럽게 선정한 두 권의 책이 그대로 연구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으니 신기하다.


  

연구소의 어떤 일보다 연구원 정모를 소중히 여기듯  연구원 각자 개인적 물러남의 공간, centering prayer 에도 마음을 쓰고 있다.  (향심기도 하지 않는 자, 영적 독서 하지 않는 자, 연구원 자격 없습니다! 사퇴 하세요오오! 라고 말하진 않지만 입으론 웃고 눈으론 레이저 쏘는, 헛갈려서 더 강한 압박!으로 쪼이고 있다) 자기 안의 깨어짐, 치유, 성장의 경험 없이 타인의 내적 성장을 동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위해 어떤 것들을 기꺼이 낭비하며 산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해라, 일을 해라! 생산적인 선택을 종용 받는 세상을 산다는 것이 함정.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계수되조차 되지 않는 것에 목숨 걸 때도 있다. 드문 일이지만 상대는 알아차리지 못하며, 헤아릴 수도 없는 바를 위해 내 살을 도려내고 혼자 피를 흘리기도 한다. 무엇을 위한! 어리석은 낭비! 어리석고 바보스럽지만 어떤 땐 멈출 수 없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고귀한 무엇인가 있겠지. 있으니까 이러겠지. 설마.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남모르는 낭비, 아무도 모르는 낭비가 가장 고귀한 투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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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향이 탱글탱글 향기롭고 달달하여 명절 기분을 돋구고 있습니다.

설 며칠 전 택배로 온 레드향인데 직장에서 온 설 선물이네요.

우리 사장님 쓸모 있는 센스 보소! 과대포장 대신 과일 하나라도 더! 

울퉁불퉁 유기농 레드향을 턱턱 집어넣은 듯 투박한 박스입니다.

맛과 향과 식감이 솨라있습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님이 정신실 소장에게 보낸 셀프 명절 선물 :)


여전히 사비 털어 운영하고, 

교통비도 없이 일하러 상담하러 다니는, 

지속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거룩한 낭비'를 자처하는 연구원들에게 보낸 명절 선물입니다.

(예, 수익자부담으로 상담과 강의 하고 있는데, 마음성장연구소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곧 정식 후원 요청을 공지로 알리려는데요.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들 함께 해주세요.

하나님, 이 글 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세요! 엉엉)


아이디어를 낸 재정담당 연구원의 마음도,

이걸 받고는 '무슨 돈이 있다고!' 하는 연구원의 마음도,

걱정스럽고도 은근 기쁘고, 기쁘고도 자부심 돋는, 

자부심 돋고도 맛있는 선물인 것 같습니다.

식구들 앞에서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는 말은 사구동성으로 같고요.


걱정과 즐거움이 오가는 단톡에 소장으로서 가오 딱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인간미가 없슴미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슴미까!


'거룩한 인적 자원의 낭비'가 지속 가능해지기 위해

더욱 연결되어 함께 성장하고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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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치료에서 헬로송과 굿바이송이 참 중요합니다. 치료의 시작과 마침의 의식을 담는 노래이지요. 어떤 일이든, 적절한 의식(ritual)으로 마치는 것은 의미의 마침표를 찍는 일과도 같습니다. '신앙 사춘기' 연재를 마치고 수고한 나를 격려하는 의미로 남편에게 옷을 한 번 사달랠까, 어쩔까. 가장 자본주의적인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요. 자연스레 다가온 리츄얼은 기도 피정이었습니다. 더 아름다운 마침표는 인터뷰 글과 영상이네요. 글, 영상에 더하여 노래도 한 곡 있습니다.


+ Ritual 1 : 글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연재 마치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질문받고 싶어 하는 존재인가요. 부끄럽다, 민망하다 하면서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궁금해 하기를, 물어주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라지요. 나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을 하는 것은 나를 내 앞에 세우는 과정이기에 큰 배움이 됩니다. 


저는 인용문 많은 글을 좋아하지 않고, 잘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글을 쓸 때도 가급적 뭐든 제 말로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연재에선 의식적으로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 눈 밝은 편집 기자님께서 이 부분을 간파하셨습니다. 연재 마치고 ‘독서 여정’이란 주제로 인터뷰 하자고 하셨지요. 귀신 같이 캐치하신 내용으로 파고들어 질문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신앙 사춘기를 건너온 저만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저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네요. 쓰기와 읽기. 제 한 몸 추스르고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뉴스앤조이 인터뷰] '하나님 부재' 느낀 방황의 시간, 독서로 뚫고 왔다



+ Ritual 2 : 영상


녹음한 자기 목소리 민망해서 못 듣는 것, 저만 그렇지 않죠? 음성 직면(voice confrontation)이라는 말이 있어요. 상담을 통해 자기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직면’이라고 하죠. 매우 힘든 순간이거든요. 자존감이 높네 낮네 해도, ‘남이 보는 나’보다 스스로 더 낫다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성 직면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자기 목소리는 공기 전파 뿐 아니라 뼈로 전달되는 음파까지 듣게 된대요. 아마도 더 풍부한 소리로 듣게 되겠지요. 녹음된 소리는 대체로 더 고음으로 들리고 가볍게 들리기에 기대에 못 미친대요.


하물며 영상은! 저는 방송 등에 나온 제 영상을 제대로 끝까지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궁금하니 음소거 하고 보고나, 짧게 짧게 보죠. 저만 그런가요? 영상 속 저보단 주름이 없고 통통하고 예쁠 거라는,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직면이 어려운 것 같아요. (네, 내용은 모르겠고 예쁘게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해요. 저는 그래요.)


이번 영상은 다 봤습니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이미지 관리 따위는 잊고 봤습니다. 제가 쓴 많은 분량의 글과 했던 말이 그야말로 ‘편집 되어’ 나온 것이지요. ‘편집’은 얼마나 위력을 가진 말입니까. 진실을 살짝 고쳐 ‘가짜 뉴스’ 만드는 것도 편집의 힘입니다.이 영상에서도 편집의 힘을, 아니 편집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제겐 그저 일상, 심지어 하찮다고 느껴지는 개인적인 이야기에 의미의 옷을 곱게 입혀주셨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만들어주셨어요. 역시나 제 목소리와 얼굴과 표정은 맘에 들지 않고 민망하지만 편집자(또는 창작자)가 담은 메시지와 의미는 참 좋습니다. 민망함 따위는 잊고 저 자신 독자가 되어 영상이 전하는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 Ritual 3 : 노래


연재 내내 엄마가 단골로 등장했습니다. 엄마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는 분들이 '부럽다'고 하십니다. 엄마와 잘 지낼 수 있는 딸(아들도)이 많이 않지요. 엄마를 지금처럼 투명하게 대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냈는지 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마음 속으로 수십 번 엄마를 죽였다 살렸다 했습니다. 제게 신앙 사춘기는 교회를 넘어서고, 종교적 신앙을 넘어서는 일인데 그 모든 상징은 '엄마의 신앙'으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연재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가사가 하나 떠올라 노랫말을 지었습니다. 거의 모든 찬송가를 다 외우던 엄마가, 눈도 흐려져 읽을 수 없는 엄마가, 이제 외워 부를 수 있는 찬송도 거의 없습니다. 가장 자신 있게 부르는 곡이 '예수 사랑하심은'인데. 그 노래 녹음하고, 엄마의 노래 뒤에 노래를 하나 만들어 붙였습니다. 가사를 쓰고, 남편을 졸라 곡을 붙여 달라 했고요. 젊은 날 한 때 곡좀 쓰던 남편이 20년 손을 놓았던 작곡펜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 마음 먹고 들려드리려 했더니 티스토리가 음성 파일은 못 올리게 하네요. 제가 만들고 제가 부르며 우는 노래, '떠나서 다다른 사랑'입니다.



[떠나서 다다른 사랑] 

                                     

                           작사 정신실 / 작곡 김종필


(엄마 노래)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이서 배웠네

우리덜은 약허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승경이 쓰셨네 아멘


(딸의 노래)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눈물 엄마의 걱정 그건 엄마의 기도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노래 엄마의 한숨 그건 엄마의 사랑
그 슬픔이 나에게 더욱더 큰 슬픔이 되었고
그 걱정은 내게 와 더욱더 옥죄는 두려움 됐네
눈물 어린 찬송 걱정 담긴 기도
나 떠났네 나 버렸네 부끄런 그 사랑

(간주)

날 사랑하심 음음 날 사랑하심 음음
예수 사랑 그 사랑에 나 닿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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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요란한 개소식 준비했습니다.
저희와 연결되기 원하시는 분,
나음터에서 일어날 '나아지는 일'이 궁금하신 분,
누구든 오세요. 포스터 참고 하시고요.

신청 링크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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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신앙과 기도의 벽 앞에 섰던 10여 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전에 했던 기도로는 더는 실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과 삶에서 기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요. 그때 구원처럼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을 만났는데, 정말 정말 모르고 싶었던 나의 이면, '거짓자아'의 실체를 마주하고 다시 털썩!이었습니다. 


깊은 기도에의 갈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습니다. 에니어그램 여정 중에 만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를 마지막 구원줄로 붙들고 10여 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벽인가 했더니 터널이었고, 끝없는 터널인가 했더니 인생 여정에 꼭 지났어야 할 빽빽한 숲길이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터널에서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은 남몰래 드리는 향심기도였고, 과연 이것은 벽에서 터널로, 터널에서 숲으로 이끄는 구원의 줄이었습니다. 예전처럼 청하는 기도, 중보기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투명한 마음으로요. 물론 향심기도도 놓치지 않습니다. 


10여 년, 이런 저런 기도 피정을 다니면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앉아 외롭게 기도했습니다. 교회 처음 온 초신자처럼 그렇게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이번에 갔던 향심기도 피정에선 참가자 14명 중에 개신교 신자가 12명(두 분은 목회자). 가톨릭 신자 한 분이 ‘이 분위기 너무 당혹스럽다’며 개신교 신자들의 열심, 놀랍다 하셨습니다. 저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피정 인도하시던 수녀님들도 당황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10여 년 외로움, 치유의 시간.


피정 기간 붙들고 읽었던 책이 딱 한 챕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집에 오기 전 카페에 들러 마지막 챕터를 읽었습니다. 영성 수련과 관상의 자리는 다름 아닌 ‘일상’입니다. 고루한 반복, 실패, 어려움, 그리고 유혹들이 끝없이 일어나서 아무 진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 말이지요. 그런 일상에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영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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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대학입시가 끝났고,

몇 개월 큰 부담을 안고 쓰던 연재가 끝났고,

연구소 개소 준비로 세무소로 어디로 뛰어다니던 몸과 마음이었으니.

훌쩍 여행 떠나기 딱 좋을 이유가 많습니다.


이 적절한 타이밍에 어쩌자고 기도피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난 7월에 계획해 놓았던 것인데, 이렇게 맞아 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여행 대신 마음의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오늘부터 4박5일 동안 향심기도 피정에 다녀옵니다.


떠나야 할 이유가 열 개라면, 

물러나지 못하게 발목 잡는 일상의 이유는 백 개입니다.

무엇보다 연구소 개소 소식을 떠벌여 놓고, 

개소식 준비며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뒤로 하고 일주일을 통째로 비워야 하다니요.


이 적절한 타이밍은 여행이 아닌 기도의 타이밍인가 봅니다.


국을 큰 솥단지에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이런저런 메일을 보내고, 

카톡, 카톡, 카톡으로 회의를 하고도

마음으론 뭔가 많은 걸 빠트린 것 같은데

일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전화, 메시지 등 연락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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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여기서 정신실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도서의 지혜자도 인정하신 삼겹줄보다 한 줄이 더 많은 네겹 줄로 짜여진 집입니다. 애써서 엮은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 제 몫의 안녕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안녕에 기여하고 싶다는 간절함을 품고 온 사람 넷이 어쩌다 엮인 것입니다.


김하정
하정 샘과의 만남은 한 25년 전 교회 청년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여성학과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둘 다 막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쩌다 한 학기 차이로 대학원엘 들어갔고, 이 친구는 이후로 상담교사로 10년을 일했습니다. 상담교사를 할 때보다 그것을 박차고 나올 때 상담가로서 가장 많이 성장했습니다. 상담 때려 치고 마을 도서관 활동을 하면서 제대로 자기 마음, 남의 마음을 경험하고 배운 것 같습니다. 어쩌다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갖게 되었는데, 속 편히 월세나 받아 쓸 일이지. 어쩌자고 “언니, 난 언니를 도울 거야” 하고 연구소 공간으로 내어놓아 이 일을 도모한 장본인입니다.


이수진
나이 먹고 만나서 이런 친구가 될 수 있다니! 이 좋은 친구를 사귀러 저는 미국까지 다녀온 셈입니다. 5년 전, 코스타 참석차 갔던 시카고 어느 대학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대화를 트자마자 바로 사귀기로 했고, 양가 남편들에게 허락받고 여친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살아온 세월, 살고 싶은 삶이 겹치고 통했던 것입니다. 5년의 만남은 길고 긴 수다, 밤늦도록 이어진 카톡 수다로 이어지는 내적 여정의 동반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이 친구는 자기 아이들 다 키워놓고 ‘꽃친’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아이들 1년의 방학을 책임지는 청소년 안식년 운동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자기만족을 채우는 삶이 아님을, 또 다른 ‘자기’인 타자의 삶에 연루되지 않고 자기를 꽃피우는 길은 없다고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최은경
수진 샘, 하정 샘의 도움으로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 세미나’를 진행해왔습니다. 여기 참석하신 은경 샘은 1단계부터 영성과정까지 연이어 참석한 첫 그룹의 수강자셨습니다. 다음 해에는 1단계부터 영성과정까지 그대로 재수강을 하셨습니다. 그냥 재수강이 아니라, 마치 처음 듣는 강의처럼 다시 반짝이는 눈빛이었지요. ‘에니어그램이 정말 재미있으신가보다’ 싶었지요. 알고 보니, 이미 다른 곳에서 10여 년 에니어그램을 해오셨고, 심지어 가르치는 분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이렇듯 낮은 자세로?! 겸손한 배움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가르치고 떠벌이기 위한 배움이 아니라 먼저 ‘나’를 알아야겠다는 태도는 바로 내적여정의 방향성입니다. 누구를 치유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겠다는 열망으로 에니어그램 끝에 상담을 공부하게 되셨다구요.


이렇게 저 포함 넷입니다. 사람 마음을 위해서는 심리학이, 치유를 넘어 성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는 체험적으로 압니다. 상담과 영성지도 사이에서 함께 낫고 나아지며 네 사람이 만났습니다. 개인상담은 주로 세 분이, 저는 집단여정을 이끌어가겠습니다.


책상 하나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공간 나음터에서 또 다른 넷, 여덟, 열여섯, 스물넷의 도반을 만나가겠습니다.


사진을 멋지게 찍어볼 계획을 여러 번 세웠지만 일단 포기했습니다. 각자 먹고 사는 일, 배우고 사는 일이 바쁜데 연구소 여는 준비까지 하느라 멋진 사진 찍는 사치는 아직 부리지 못했습니다. 첫날 만나 연구소 청소하고 옆 카페에 가서 찍은 소박한 사진으로 인사 대신합니다. 멋 부릴 일은 많고, 우리에겐 앞으로의 시간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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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 시간 준비한, 오랜 마음이 담긴, 여러 사람의 뜻이 담긴 공간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홀로 시작한 내적 여정 끝에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이 출간 된 것이 거의 5년 전의 일이 되었네요. 어느 봄날 '거실 세미나'로 내적 여정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자 세미나를 몇 회 진행했고, 모태가 되어 '정신실의 내적 여정 세미나'가 이어져 왔습니다. 

 

페이스북에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란 페이지를 만들었고, 이젠 오프라인에도 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일. 오랜 상담, 가족치료, 청소년 상담, 이야기 치료. 등의 비슷하고 다른 공부와 경험을 가진 네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쳤습니다. 네 사람 소개와 만남 이야기는 따로 풀어 놓겠습니다. 

 

개인상담 요청이 많았는데 해드리지 드디어 가능해졌습니다. (저는 주로 집단여정을 이끌고 세 분 선생님이 개인상담 합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과 다양한 집단 여정은 물론이고, 사려 깊은 수다를 나누는 공간을 지어가려고요.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하나 씩 알려드리겠습니다. 12월 내내 문 활짝 열어 놓고 '놀러와 개소식'을 할 건데, 12월 어느 날 한 번 찾아와 주세요. 자세한 소식은 따로 알리겠습니다. 

 

심볼과 로고가 참 예쁘지요? 담긴 뜻은 더 아름답습니다. 전문가의 손길이란 이런 것이더군요. 초록 심볼에 담긴 뜻과 마음은 이렇습니다. 참나무 씨앗에는 참나무가, 나리 씨앗에는 나리꽃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독특하고 유일한 생명을 품은 씨앗이었습니다. 그 생명을 온전히 꽃피우는 것, 참나무는 참나무가 되고 나리는 나리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치유입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는 치유를 넘어 성장으로, 나를 넘어 우리가 되는 곳입니다. 

 

낫고, 나아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나음터'라 이름 지었습니다. 

[나음터] 하남시 아리수로 570 효성해링턴타워더포스트 101동 824호

 

 

* 후원 신청 : https://bit.ly/3C0CKuL

* 후원 계좌 : 농협 301-0240-4119-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카페

 

 

 

 

더 나아지기 위해 가만히 있기

될 것 같지 않은 일이 되어서 5년이 되었다. 내적여정 강의 전 과정 개설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연구소를 열었고 1년짜리 과정의 지도자과정(이제 '동반자'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3기까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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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인간관계에 대해,

마음과 영성에 대해, 

인간성장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삶에 대해,

예수님처럼 자기다움의 꽃을 활짝 피워 나 자신이 되어 사는 오늘에 대해

고민할수록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착한 나쁜' 사람. 

최근에 읽거나, 전에 읽고 다시 읽은 세 권의 책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 '착한 나쁜' 사람의 그라데이션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하니 '인용'을 위주로 시각화 해보자.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는 사람'들에 관한 여러 편의 이야기이다.


그는 김숙희뿐 아니라 다른 유치원 관계자들 모두에게 친절했다. 김숙희는 퇴근길에 몇 번 집 앞까지 태워다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 앞에 도착해도 쉬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때만 많았다. (정대리)


어쩐지 나는 바로 내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럼 실례가 되지 않을까, 그가 무시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혼자 돌아가는 마음이 초라해지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이 염려됐다. 그래서 그 염려가 사라질 때까지 그의 승합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김숙희)


그저 이렇게 연인 아닌 인연이 되어 버린 정대리와 김숙희. 김숙희에게는 이미 착.한. 남편이 있었다. 불륜의 나날 일 년여를 보내고 착한 김숙희가 더 착한 남편에게 말했다.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저기, 다음에 말하면 안 될까? 남편이 내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나, 내일 또 새벽같이 일 나가야 하잖아. 남편은 그렇게 말하곤 안방으로 걸어갔다. 남편은 마치 아무 말도 듣지 않은 사람처럼, 이제 막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리를 뒤로 활처럼 젖히며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남편을 따라 들어가 계속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중략) 무언가 외면당하고 수치스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서 마음이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니까, 착하고 성실한 남편이니까, 잘못을 저지른 것은 내가 맞으니까..... 나는 그 말만 주문처럼 웅얼거렸다. (김숙희)


그리고 결국 김숙희는 남편은 잔인하게 살해하게 된다. 김숙희도, 정대리도, 남편도 누구도 착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착함을 견디다 못해 덜 착한 아내가 가장 착한 남편을 살해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 나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조금씩 연민이 가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어쩌면 누군가를 대할 때의 나같기도 한 그런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의 살인 충동이 이해가 가고 남는다니 말이다. 이 사람들, 수치심 유발, 지속적인 수치심 유발로 한 존재의 공격성을 이끌어내는 이 사람들은 착하지만 나쁜 사람들이다. 착한 나쁜 사람 1단계이다. 



『니체의 인간학


니체의 아포리즘들이 귀에 쏙쏙 꽂혀서 기회가 되는대로 읽곤 했지만. 여성에 관한 글들을 보면 이 사람은 열등감에 찌든 환자에 가깝다, 싶어 찜찜함을 떨쳐낼 수 없다. 게다가 철학자의 말이란 늘 어려우니 누가 해설해주지 않으면 알아 듣기도 힘들다. 일본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가 지은 니체의 인간학 을 재밌게 읽었다. 니체의 '노예 도덕'의 쉬운 해설 내지는 적용편이랄까. 자신을 약자로 상정하고, 자신의 유약함과 무력함을 착함으로 정당화 하는 지점을 짚어낸다. '약자 → 착한 사람 → 악한 사람'의 매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까.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을 염불처럼 외며, 어떤 일이건 바른길을 벗어난 행동을 삼가고 상식과 관습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쪽이 안락하고 이득이니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자신의 약함이 폭력적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자신의 약함이 약자로 살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혹여 피해를 주지 않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서 생각하지 않는가?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는 강자에 대한 질투 때문이다. 그 질투심을 자기 자신에게 교묘하게 숨긴 채, 약자는 처음에는 조심스레, 나중에는 점차 큰소리로 강자를 손가락질 하며 "자기 중심적이다! 이기적이다! 사회의 적이다!"라고 외친다.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사회로부터 말살당하고 싶지 않아서, 즉 악행을 저지를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 저항하며 홀로 살아갈 정도로 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착한 사람의 가장 큰 죄는 둔감한 것, 즉 스스로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 느끼지 않는 것이다.


착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상처받기 싫으므로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한다. 누구에게도 비판받기 싫으므로 누구도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로 인해서든 불쾌해지고 싶지 않으므로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리하여 항상 벌벌 떨면서 모든 것을 내버리고 날아나려 하는, 작은 동물 같은 착한 사람 특유의 축 처진 얼굴이 만들어진다. 


착한 사람은 자신의 본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자신의 본심에 귀를 기울이면, 거기에는 타인을 상처 입히고 자신도 상처받는 불온한 언어가 꿈틀거리고 있으며, 이로써 자신의 평온무사함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자신은 약하므로 본심의 목을 졸라 말살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평온무사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착한 사람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해로운 파리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혀 악의 없이 쏘아대고, 전혀 악의 없이 거짓말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약하여 착하고 착하여 해로운 사람들을  거짓의 사람들을 통해 조명하고 싶어졌다. 정신의학자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영성적인 과학자, 스캇 펙의 저작에서 '악'의 문제는 명백하다.


『거짓의 사람들


평생 수많은 사람을 심리상담으로 만난 스캇 펙의 저작들은 읽어도 읽어도 놀랍다. 20대 처음 읽었을 때와, 30대, 40대, 그리고 50이 된 지금까지 읽을 때마다 그 통찰이 새롭다. 상담치료를 위해 만난 사람들에게 과학자의 태도를 잃지 않으며, 인간 내면에 관해서는 진지하고 겸허할 뿐 아니라 먼저 자신을 성찰하는 태도로 얻은 깨달음일 것이다. 스캇 펙의 결론은 '악은 존재하고, 악한 사람도 존재한다'이다. 그 악한 사람은 흔하게, 멀쩡히 내 주변ㅇ서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한다. 스캇 펙의 악은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두 단어로 설명 가능하다. 


악은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심지어는 합리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전에도 말했듯이 악한 사람들은 위장술의 도사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든 자기 자신에게든 자신의 참된 색깔을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지 못한다. 


악이란 게으름의 극한이라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다. 보통의 게으름이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의 게으른 사람들은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들의 존재는 단지 사랑 없음의 한 표현일 뿐 아직 악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 귀찮아 회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닫고 지낸다.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을 유지하고 병든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행동을 한다. 이 목적을 위해 행동하다 보면 그들은 남을 파괴하게 된다. 


악의 본질적 구성요소는 자신의 죄나 불완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드는 점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악을 의식하는 동시에 그 의식을 피하고자 결사적으로 노력한다. 악은 죄책감의 결손이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의 극한으로 설명하는 스캇 펙의 악인은 '이만 하면 됐다'의 사람이라고 나는 정리한다. 이만하면 도덕적이고, 이만하면 착하고, 이만하면 이타적이고, 이만하면 의식이 있고, 이만하면, 이만하면.......의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로 '나쁜 나쁜' 사람보다 '착한 나쁜' 사람이 더 위험하다. 


여기까지다. 세 책 모두에서 느낀 기시감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기시감은 솔직히 나 아닌 다름 사람에 대한 감각이다. 겉은 착하지만 속은 에고로 빽빽하여 어디 한 군데 들어설 자리 없는 사람들 말이다. 지금 당장 손가락 접어 꼽을 수 있다(고 괜한 분노에 차서 확신을 한다). 언젠가 내가 포기했던, 포기하고 있는, 포기하고 말 철벽 자기방어의 사람들 말이다. 두렵다. 이 지점에서는 늘 두렵다. 자신이 없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철칙. 내 눈에 그런 사람들이 보인다면 그건 내게 있어서 보이는 것이다. 착한 나쁨의 그라데이션 어디 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지점엔가 내가 서 있으니까 말이다. 


책을 덮으려다 눈에 띈 거짓의 사람들서문 한 구절을 인용하고 마음에 새기라는 계시를 받았다.


자신에 대한 판단과 치유에서 시작하지 않는 한 우리의 판단은 안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우리의 최대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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