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마지막 주,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신학기가 시작되는 즈음이 당신에겐 어떤 느낌을 주는 시간인가요? 꿈과 영성생활, 집단여정에서의 나눔입니다. 같은 시즌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보내시는 두 선생님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랜 마음공부, 영적여정 끝에 상담학으로 학위과정을 하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분을 곁에서 보면서 공부를 저렇게 재미있게 할 수도 있구나!’ 놀라게 됩니다. 무더웠던 여름 자격시험 준비로 보내시며 힘들다 하시면서도 생기는 여전하시더군요. 개강을 앞둔 8월 마지막 주, 개강 이틀 전부터 잠이 오지 않으셨답니다. 공부 생각에 너무 설레서 말이지요.

 

이 말씀을 듣고 계시던 다른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8월 마지막 주, 이즈음이 너무 좋아요. 학기가 시작되는 시즌인데 나와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무슨 말씀인가 했더니. 일찍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박사학위를 땄고, 서른다섯에 강사생활을 하셨답니다. 친구들로부터 결혼, 공부, , 육아까지 모든 걸 다 가진 여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요. 그즈음 경험한 어떤 일들로 내가 지금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나?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지?’하는 질문과 함께 힘들여 강사생활 접고, 다 내려놓고 베이킹을 배우기 시작하셨답니다. 이후로 그렇게 쭉 살아오셨습니다. 그 선택 이후 20여 년은 지났을 텐데 아직도 신학기가 시작되면 새롭게 마음이 홀가분하시다니 이 또한 놀랍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소명을 사는 삶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늘 영적인 물러남이 요구된다고요. 그 물러남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한다고도 하지요. 헌데 각 사람에게 물러남의 방향과 방식이 다 다르다는 것이지요.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에 나오는 말입니다.

 

토머스 머튼에게 물러남은 대학교를 떠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에게 물러남은 수도원을 떠나서 개혁가가 되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물러남은 안전한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가 나치의 포로가 되는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에게 물러남은 흑인의 평범하고 당연한 자리를 떠나서 민권 운동을 이끄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러남이란 대단할 것 없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충실히 인내하는 것이다. 거창한 망상을 버리고 시장터에서 자신의 사역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유로운 사역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낮아짐의 행위로써 자신의 직업과 안전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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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꿈]_루시 구디슨, 또 하나의 문화


‘밤의 선물인 꿈’을 알기 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출판사 ‘또 하나의 문화’에서 나온 책은 빼놓지 않고 읽던 시절이었고, 

제목에서 ‘꿈’보다는 ‘여자’에 꽂혀서 선택했겠지요. 

재미있게 읽었지만 꿈 얘기는 조금 모호했고, 믿어지질 않았던 것 같아요.


낮과 의식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다, 

밤과 그림자, 무의식에 조금씩 눈을 떠가며 다시 읽는 이 책은 전혀 새로운 책입니다. 

다시 읽어도 제목에서 '꿈'보다는 '여성'이 훨씬 더 큰 폰트로 보입니다.


프로이트, 융, 프리츠 펄스, 제레미 테일러까지 꿈 작업에 길을 안내한 학자들은 대부분 남성입니다. 

책의 저자 루시 구디슨의 말처럼' 꿈은 남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임신과 양육의 경험, 어머니와 딸의 관계, 여자들 사이의 우정과 성애, 질투, 

그리고 여성 혐오적인 사회에서 우리 몸의 모습, 크기, 외모에 대한 느낌 등이지요.


그러니 여성주의 관점의 꿈작업이 꼭 필요합니다. 

이 책은 특정 꿈의 이론을 절대시 하지 않고, 

여성의 몸으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꿈, 

꿈작업 그룹에서 만난 여성들의 꿈을 성실하게 기록하고 연구한 결과입니다. 


[꿈과 영성생활 집단여정] 더운 여름 쉬고, 하반기 첫모임 하는 날입니다. 

모임을 준비하며 다시 읽어보는 책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꿈은 ‘여자 사람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여름 내 마음의 촉촉함이 부족하다 싶었는데 

내 마음의 수분크림, ‘꿈나눔’이 없어서였나봅니다. 

또 새로운 시작,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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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안내입니다.

(드디어 주말 세미나! 토요일입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 1단계는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합니다.
영성과정에선 자연스럽게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내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평생 무언가를 찾아 밖으로 헤매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보는 시도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일상에서 물러나 마음 깊은 곳으로 떠나는 피정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요. 


[일시]
. 기본1 : 2018년 9월 8일(토) 오전 10:00 ~ 오후 5:00

. 기본2 : 2018년 10월 6일(토) 오전 10:00 ~ 오후 5:00
. 심화1 : 2018년 11월 3일(토) 오전 10:00 ~ 오후 5:00
. 심화2 : 2018년 12월 1일(토) 오전 10:00 ~ 오후 5:00
. 영성 : 2018년 12월 22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한빛누리 재단 3층 Hearts&Minds (종로구 자하문로 8길 17, 3호선 경복궁역)

[인원] 9명 (선착순)      [참가비] 각 강좌 12만 원

[문의] 010-6209-0635 010-4235-8020


[신청]
1단계 : https://bit.ly/2nc9ZUZ
2단계 : https://bit.ly/2wsMeNu
심화1 : https://bit.ly/2nca7nr
심화2 : https://bit.ly/2MpH7DS
영성 : https://bit.ly/2LT38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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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정을 끝으로 상반기 세미나 마쳤습니다.

강의하는 제가 더 많이 배우고 깨우치는 여정이었습니다.

돈을 받은 제가 더 많은 것을 남긴 시간들이었습니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혼자 울던 시간의 의미를 밝혀주신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남겨주신 후기 일부입니다. 


+ 의문투성이 안개 속 터널 속 같이 답답했던 궁금증들이 '아하'를 몇 번 외치며 하나씩 깨달아졌습니다. 나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늘 함께 하셨던 주님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니어그램 신청 안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나에게는 관심 없으신 하나님, 내 기도 들어주지 않는다며 하나님 떠나있었는데..... 나의 아픔 가운데,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 깨닫고 감격했습니다.


+ 책으로 읽고 익히(안다고 생각했던 '무지') 알아오던 개념들을 뛰어 넘어 세미나에 둘러앉아 여러 삶을 경청하며 새롭게 알아들어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앎이었습니다. 그룹 나눔의 힘을 새삼 알게 됩니다. 


+ 어렸을 때 처음 접했던 경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 나이가 주는 혜택이겠지요. 가장 알맞은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 4년 전 첫 강의 때 들려주셨던 시편 139편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아마 알에서 깨어나기 전 ‘나의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깨워주고 아픈 부분 회복시켜주는 귀한 여정이었습니다.


+ 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고의 패턴이 된다는 것, 자기수용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도 더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을 깨우게 된 것 같습니다.


+ 하나님께로 한 무릎 더 가까이 다다갈 수 있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과정이었는지 모릅니다.


+ 일 년 만에 수혈한 느낌이에요.(재수강) 향심기도 다시 시작해보려고요. 이미 걸어오신 분들이 계셔서, 그 길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 ‘모태신앙으로 시작된 신앙의 세월이 이렇게 긴데 왜 나는 변하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나를 알고 싶어 시작한 여정이 이제 한 단락 맺었습니다. 가면 속의 나, 그림자 속의 나,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많이 아팠지만 하나님 형상인 나를 알게 되고 사랑하기 시작하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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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되어 신앙하기'

내적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영성 단계’ 세미나가 있습니다.

내적여정은 잃어버린 길, 마음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입니다. 

기도의 여정이고 사랑의 여정입니다. 

영성과정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 상을 확인하고,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인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를 안내해 드립니다. 


영성과정은 1단계 이상 들으신 분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차근차근 2단계와 심화과정을 밟아서 오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만. 

중간에 시간이 안 되어 함께 하지 못하신 분들, 

여정의 마지막이 궁금하신 분들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열어두겠습니다. 

재수강도 가능합니다.

 

[일시]2018년 7월 18일(수)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마포구 신수로 56 순총빌딩 B1층 (광흥창역 4번 출구)
[인원] 9명 (선착순) [참가비] 12만 원(재수강 3만 원)
[문의] 010-6209-0635
[신청] 신청하러 가기, 클릭





한 달에 한 번, 하루 피정으로 진행되는 내적여정 세 번째 하루를 지냈습니다. 심화과정으로 성격 또는 거짓자아가 형성되는시기, 어린시절을 돌아보았습니다. 3월 1단계를 시작으로 연이어 수강하시는 분들을 세 번째 만남입니다. 아침에 서로 얼굴 보자마자 "보고싶더라고요. 언제 봤다고 보고싶더라고요" 하며 반갑게 손을 맞잡았습니다.


준비한 간식보다 들고 오신, 간식이 더 많고요. 손수 만든 맛있는 쿠키가 종류 별로 풍성합니다. 나가사키에서 온 쿠키도 있네요. 네, 나가사키에서 심화과정 듣기 위해 날아오신 선생님(선교사님)이 들고 오셨습니다. 작년에 한국 나오셨을 때 1단계를 수강하신 선생님께서 심화과정 듣기 위해 나오신 것입니다. 간절함과 열정에 뭉클합니다.


재수강 오신 선생님과는 1단계 동기라서 더 반갑고, 모인 분들 즉석으로 나가사키 성지순례(라고 쓰고 룰루랄라 여행이라 읽지요)단이 구성될 기세였습니다. 강의가 아니라 열어 보이시는 마음이, 마음 한 구석 얼어붙은 감정과 기억이 살아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배우는 마음과 살아있는 영성은 강사인 제가 최고의 수강자이고 수혜자입니다.


일부러 맞춘 듯, 개성있는 스타일이지만 컬러만 같은 상의의 세 분이 나란히 앉으셨습니다. 애써 연출해도 어려울 장면, 모시기 어려울 모델들이시라 바로 촬영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함께 한 우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미친년' 꿈을 꾸었다. 꿈일기를 '미친년의 신발'이라 제목을 붙였다. 무슨 꿈일까? 숙고하던 중에 '글쓰기 자조모임'을 준비하며 읽은 책에서 에서 본 '미친년 글쓰기'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416일 주간 주일 설교 내용도 함께 떠올랐다.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며 2천 마리 돼지떼를 몰살시킨 불가해한 이야기이다. 자주 읽어도 뜻은 모르겠었던 본문이 선명하게이해되었다. 잔혹한 제국주의의 군화발에 희생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해다 제국주의에 기생해서 부를 늘려간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신 예수님 이야기이다. 마을 공동체적 치유와 회복사건이며, 동시에 불행하고 암울한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선언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이기에 스페인의 게르니카, 제주의 4.3, 0416 세월호와 맞닿는 이야기이다. 원통함과 억울함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광인을 위한 이야기이다.

 

어렵사리 허락 받아 설교 원고 전문을 나눈다.

 

 

'거라사 광인' (5:1-15) _ 2015415일 이우교회 주일 설교

 

1937,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스크린으로 게르니카를 띄움) 이 그림은 1937426, 나치 독일의 공군 콘돌 군단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공격한 사건의 참상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게르니카 주민들은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이 지지하는 프랑코 군에 반대했고, 나치는 보복 폭격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마을의 70%가 초토화되었고, 주민 1,60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건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스페인 태생의 화가 피카소는 이 비보를 듣고 한 달 반 만에 그림을 완성합니다. 게르니카의 배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면 전쟁의 참상이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자료를 통해 본 후 그림을 보면 <게르니카>가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5장은 어떤 면에서 게르니카와 비슷합니다. 언 듯 보면 조금 기괴한 사건처럼 읽히지만, 그 배경을 알고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 참상을 담은 이야기인지 알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고쳐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일까요? 그렇게만 읽고 넘어가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이야기가 여럿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독 이 이야기에서만 예수님께서 이름을 묻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말합니다. 이름을 묻는 것도 특이하고, 귀신의 이름이 군대라는 것도 심상치 않습니다. 혹시 이 사람은 전직 군인이었을까요?

또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청을 한 후 무려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곧장 갈릴리 바다로 돌격하여 수장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래 돼는 떼를 지어 사는 동물이 아니데, 어떻게 2천 마리를 사육했을까요? , 그리고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 취급을 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우리가 다 착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걸까요? 우리는 돼지 주인의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안타깝습니다. 돼지 치는 자들이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왠지 우리는 그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저간의 사정은 모른 체 하시는 것일까요? 스스로에게 좀 불리한 이야기를 왜 기록해 두셨을까요?

이 이야기에 관한 질문은 잠시 두고, 또 다른 자료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 출신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전쟁사>라는 역사책을 남겼습니다. 그의 책에는 오늘의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줄 기록 하나가 남겨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 사후 약 36년이 지난 AD. 66년부터 있었던 로마와 유대인 간의 전쟁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의 모든 도시가 파괴됩니다. 이 책에서 여러 유대 전쟁에 관한 일화 중, ‘거라사 지방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은 기병대와 많은 보병과 함께 루키우스 안니우스를 거라사 지방에 보냈다. 안니우스는 마을을 공습한 후에 미처 피하지 못한 천여 명의 청년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군사들로 하여금 재물을 약탈케 했다. 마침내 그는 주거지를 불사르고 주변 마을로 행군해 나갔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도망갔지만, 노약자들은 비명에 갔으며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렇게 전쟁은 산과 들로 퍼져나갔다.

현대 사회 뿐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도 전쟁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라사는 전쟁의 참극을 경험한 지역이었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칼과 창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으며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바로 그 거라사는 그때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수차례 로마 군사들에 의해, 또 다른 군병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비극의 지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엊그제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는 시리아를 폭격했고, 그 이전 시리아에서는 IS세력과 정부군 간에, 여타 수많은 세력들 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여인과 노인과 아이들이 지금도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북부 시리아에는 1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 제10군단입니다. 하나의 군단은 6천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종종 남쪽 갈릴리아 거라사 지역으로 군사를 보내 원주민들을 위협하고 수시로 폭력을 행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로마 제10군단이 가지고 다니는 군단기에는 10군단을 상징하는 동물이 그려져 있었으니, 그 동물이 바로 돼지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에게 이름을 묻자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말 군대로 번역된 헬라어는 레기온’(Legion,λεγεών)입니다. 레기온은 바로 로마 군단을 지칭하는 군사용어입니다. 당시 거라사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로마제국의 군사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지역 정치인이나 세관, 또는 창녀나 로마를 숭상하며 재산을 지킨 지역 토호세력들이었을 것입니다. 보통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로마군사는 적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인간의 탈을 쓴 사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고, 자신들의 삶의 향유권을 짓밟고, 자신들의 영혼을 노예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군대즉 레기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불쌍한 귀신 들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로마 군인에 의해 가족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재산을 빼앗겼고, 고향을 빼앗겼고, 친구와 추억과 삶의 모든 것, 심지어 영혼까지 빼앗긴 사람 아니었을까요? 그는 어쩌면 로마 군인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차라리 제정신을 잃고 온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사는 길이었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자기가 죽었어야 했는데 하면서 돌로 제 몸을 치지 않고서는 잠 못 들지 않았을까요? 무덤에 묻힌 가족들 옆을 배회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키우는 사람들은 또한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필경 돼지를 키워 얻은 소득으로 로마 군단의 군수물자를 조공하면서 재산을 불린 사람들 아닐까요? 혹시 로마에 반역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면서 삶을 부지한 사람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군대 귀신이 이천이나 되는 돼지 떼로 들어가 갈릴리 바다로 돌격하여 수장당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한 이방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준 개인적 사건일 뿐 아니라, 마을 공동체적 치유와 회복사건이며, 동시에 불행하고 암울한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선언한 정치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고, 인간적 삶을 말살하는 제국은 필경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 맞설 수 없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로마에 편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내쫓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지난 43일은 일명 <제주 4.3사건>70주기였습니다. <제주 4.3사건>은 사회주의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정과 당시 이승만정권이 벌인 제주도민에 대한 만행이었습니다. 1948, 당시 제주도 도민이 30만 명이었는데, 좌익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무려 3 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노인, 여성, 어린이들조차 무차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6.25 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고,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66개월 간 진행된 이 토벌 작전 중에 육체적 고통을 당한 자, 정신적 후유증을 앓는 자,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자,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살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이 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주 4.3 사건이 본격적인 학살 사건으로 번지게 된 결정적 사건이 오라리방화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오라리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고은 시인이 썼습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주 4.3사건>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제주 도민 3만 명이 죽을 때 기독교인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 청년들 일부가 가입한 서북청년회는 제주도로 건너와 좌익은 사탄의 세력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끌어다가 발로 밟아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 질러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항복한 제주도민들과 사회주의자를 변별하는 일에 제주도 목사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사람들 죽어가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했고, 그 결과 제주도에는 전국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인 수가 현저히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잔혹한 제국주의의 군화발에 희생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제국주의에 기생해서 부를 늘려간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가 예수의 편에 서지 않고 제국의 편에 선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비단 <제주 4.3 사건>뿐이겠습니까? 지금도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 구조 하에서, 불공평한 사회 질서 하에서 억울하게 몸을 빼앗기고,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고, 영혼을 빼앗긴 채, 억울하고 원통해서 돌을 들어 제 몸을 치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역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쫓겨나는 영세민들이 있습니다. 군사시설 때문에 정신적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조조정 때문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동료와 가족들이 자살하고 엄청난 트라우마 속에 살아가는 해직 가족들이 있습니다. 내일은 416일입니다. 아직도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왜 구조를 한 명도 못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월호 304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그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삶을 부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다 건너 또 다른 거라사인의 지역으로 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려고 합니다. 누가, 그들의 영혼을 옭죄고 있는 쇠고랑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폭압의 기억을 씻어줘야 합니까? 누가, 가난하고 버려진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 의해 신천지 취급당하고, 교회를 선동하는 사람 취급당하고, 그래서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여러모로 돌보아야 할 시기에 책임을 다 하지 못하여, 황금 같은 시기에 정신적으로 소모된 아픈 경험을 가진 우리 이삭의우물공동체가 이 일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애지중지 키우는 돼지 몇 마리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쫓아내는 거라사인이 되어선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우리 시간을 내어 동참하십시다. 때론 물질로 동참하고, 마음으로 응원하십시다. 이 시대의 아픔을 가진 이들 곁에 서주어, 주님의 거라사 사역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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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년 동안 에니어그램이 비전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1:1로만 전수 되었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갈수록 더 그렇습니다. 미세한 표정 변화와 눈빛까지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둘러앉아 주고받으며 나눌 때 에니어그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에니어그램 강의 때문이 아니라 앞에 앉은 우주 하나 같은 존재의 무게감으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행동유형별 분류(공격형, 의존형, 움츠리는형), 날개, 화살 통해 좀 더 다면적으로 유형을 이해하는 2단계 여정을 마쳤습니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억울할 뿐이었는데 ‘수동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움츠리는 유형 9번의 울먹이는 고백이 마음에 남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질 때 그 많은 긍정성 어디 가고 집게 손가락 들어 비판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 7유형 선생님은 화살을 통해 자기이해의 폭이 넓어졌답니다.


혼자 뭐든 잘해서 누구와 함께 할 필요을 못느낀다는 공격형 8유형 선생님. 함께 한다는 것에 필요하고 좋다는 것을 경험하셨다는 말에 감동이 두 배네요.


더 많은 기쁨과 아픔의 영롱한 말들이 남아 있는데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한 분 한 분의 여정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연애강의가 다 뭔 필요냐, 소개팅 한 번이라도 성사시키는 게 더 영양가 있지. 솔직한 심정입니다. 강의가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는 뭐든 하고 싶다는 바램과, 하게 되더라도 정장 입고 원탁 테이블 둘러앉아 ‘나를 찍어주시오’하는 매칭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많지 않은 인원이 2박3일 정도 캠핑 가서 바비큐도 하고, 마피야도 하고, 시대의 연애담론도 나누고. 마음이 편해지면 개인의 연애사도 나누는 오글거리지 않는 매칭프로그램을 꿈꿨지요.


청년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지, 고민하는 교회와 목사님을 만나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꼭 매칭이 성사되지 않아도 좋을 캠핑이 될 것이고요. 마치고 나면 ‘연애人’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커지고, 자기 자신이 되어 연애할 힘을 얻어갈 수 있도록 도우려합니다. 


나를 찾는 길 위에서 너를 만나다!


장소, 식사, (특히) 강사가 특급입니다 :) 장소 답사 따라갔다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2박3일 머무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겠다 싶은 호텔입니다. 예, 특급 강사가 상주하며 밀착 상담도 합니다. 교회에서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의는 리플렛 안에 있는 안내로 하시고요.








"아이구, 오지마.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그거 사 먹으면 되지. 내가 그냥 먹을게 오지마라"


시어머님의 말씀입니다. 지나가다 읽는 여러분께는 '아무 말' 아니지만 제게는 엄청난 말입니다. 아니, 어머님 당신께는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소확행, 작고 확실한 행복을 살자는 게 유행이던데요. 저는 작고 확실한 변화가 확실한 행복을 보장한다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머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저 말씀은 작고 확실한 변화입니다. 


어머님은 누구보다 상처가 많은 분입니다. 그런 분들이 흔히 그렇듯 '다시는 상처 받지 않겠다' 주먹 꽉 쥐고 살아가십니다. 자기방어를 위한 진이 견고하지요. 본인에겐 자기방어이지만 주변 사람에겐 '가시 옷'과 같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찌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십니다. 아니 조금 까칠하고 때로 무례한 것도 당신 안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기조차 하시지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함께 있고 싶다, 보고 싶다'는 표현도 서투릅니다. "목요일 날 여기 오냐?" (목요일은 어머니 계신 하남 쪽으로 일하러 가는 날입니다) 목요일에 맞춰 홍삼을 달여 놨다, 김치를 해놨다, 누가 뭘 줬는데 양이 많으니 나눠가라, 하시지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주먹 꽉 쥔 어머니는 동시에 늘 계산하고 반성하고, 또 다시 헤아리며 당신 자신을 괴롭히십니다. "그래? 바쁘면 오지 마라" 해놓으시곤 며칠 후에 전화로 이러시죠. "내가 잠이 안 와서 막걸리 한 잔을 마셨는데 취했나봐. 취한 김에 그랬다. 아니, 이 며느리 년이 김치를 해놨는데 가져가지를 않어. 하하하"


어머님이 뭘 나눠주시는 마음엔 자식 사랑도 있지만 '나 좀 봐줘라'도 있고 통제하려는 힘도 작용합니다. 그걸 세밀하게 느끼는 저는 늘 깍뚜기 한 보시기, 감자 몇 알 가져오면서 쌀 한 가마니 가져오는 부담입니다. 돌려치기로 욕을 먹으면 두고두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요. 언젠가부터 받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 있어요, 아직 많아요, 들를 시간이 없어요, 라고 하거나 피할 수 없을 때는 남편이 가서 받아오곤 했습니다.


단지 무엇을 주고 받는데 그치치 않고 어머님과는 작정하고 거리두기를 한 지 몇 년입니다. 아마 어머님 자서전 써드린 이후로 마음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생각했고, 아픈 어머니의 치유자가 되겠다는 구세주 콤플렉스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한계를 인정한 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어머님의 방황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었던 막내 며느리, 상담자, 신앙의 동역자, 말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에게 거절 당한 느낌이셨을 테니까요.


어머니가 느끼실 상실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했지만 나를 지키는 것이 나를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일 때가 있음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람 참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어머님 가까이서 찔리고 피나는 지점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는데 뭔가를 느끼고 깨달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의 힘을 빼고, 무장해제 하고 지내니 어머니 또한 무기를 내려놓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편치 않은 몇 년의 시간이 걸렸지요. (여전히 그런 시간이기도 하고요)


시골에 계신 친구 분이 냉이를 보내셨다며 목요일에 가져가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냉이는 아주 사랑하는 거니까 알겠다고 답을 했지만, 목요일 당일 어머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 그냥 집에 왔고 며칠 후 통화였습니다. 주일 저녁 안 막히는 시간에 잠시 갈까 한다고 했더니 하신 말씀이  "아이구, 오지마.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그거 사 먹으면 되지. 내가 그냥 먹을게 오지마라" 입니다. 냉이 한 줌으로 '나를 알아달라, 내 호의에 고마워 해라' 통제하던 어머님이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라니요. 


내적여정, 마음공부, 영성수업의 끝은 작고 확실한 일상의 변화입니다. 끝없이 자기를 파고 성찰하고,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장착하고 휘두르던 가시를 인식했을 때 찌르던 당장 그것을 내려놓는 작고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에니어그램 유형에 자기를 비추고, 성찰 일기를 쓰고, 꿈을 분석하고, 향심기도 훈련을 하는 것은 작고 확실한 일상의 변화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내적여정, 마음과 영성을 공부하는 제게 치열한 실습지였습니다. 한때 꿈을 통한 마음 여정 안내를를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정 선생은 가시옷 입은 어머니를 왜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끌어 안고 찔리고 있어?" 질책이기도, 진정한 의미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착한 크리스천 콤플렉스도 있겠고, 치유자 연(然) 하는 교만도 작용하겠지만 어머님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님의 작고 확실한 변화가 그러므로 저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니, 오늘도 조금씩 성장하고자 애쓰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사람 징글징글하게 안 변하지만 사람, 신비롭게도 어느 순간 믿을 수 없게 자기를 초월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깊은 곳에 상주하시는 치유자, 보혜사 그분의 이끄심일 테지요.





회심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부인해야 할 자기를 모릅니다.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이고, 하나님을 알수록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캘빈이 말했습니다. 관계 문제에서도 너를 몰라서가 아니라 나를 몰라서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한 달에 한 번, 일상에서 물러나 마음 깊은 곳으로 떠나는 피정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요. [나는 누구인가?] 에니어그램 영성 세미나는 나는 누가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하나님 형상 담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작은 선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단계부터 심화2과정까지 연속 수강 하시는 분께는 영성과정을 1만 원에 들으실 수 있는 특전을 드립니다.)

 

[일시]


. 기본1단계 : 2018 328() 오전 10:00 ~ 오후 5:00

. 기본2단계 : 2018425() 오전 10:00 ~ 오후 5:00

. 심화1단계 : 2018530() 오전 10:00 ~ 오후 5:00

. 심화2단계 : 2018627() 오전 10:00 ~ 오후 5:00

. 영성단계 : 2018718() 오전 10:00 ~ 오후 5:00

 

[장소] 마포구 신수로 56 순총빌딩 B1(광흥창역 4번 출구 도보 6)

[인원] 9(선착순)    [참가비각 강좌 12만 원

[문의] 010-6209-0635 (문자)

[신청 1단계  신청 클릭(마감)

          2단계 신청 클릭(마감)

           심화1 단계 신청 클릭    

         심화2 단계 신청 클릭 

         영성단계 신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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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권의 책을 함께 읽었고 이제 일곱 번째 책을 시작하는 작은 모임이 있다.

우연한 만남에 부드럽지만 강한 의지 한 스푼 넣어서 몇 사람을 모았다.

좀 웃기고 가끔 지나치게 진지한, 믿을만 한 언니가 설레발 하니 어어어, 하고 따라온 동생 몇이다.

함께 읽고 배우고, 나누고, 기도하고, 더불어 자라간다는 조금 막연한 목적으로 시작했다.

나이 먹어 뭔가를 같이 해보자는 뜻도 있었는데, 역시나 막연하고 모호했었지.

'영성모임'이라 불렀다.

그러나 꾸준히 만나고 꾸준히 읽었고, 이번에 끝낸 책은 무려 햇수로 3년을 끌었다.


그대가 따라가는 실이 있지

그 실은 변화하는 것들 사이를 지나가지

그러나 실은 변화하지 않지

사람들은 그대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해하지

그내는 그 실에 관해 설명을 해야만 하지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렵지

그대가 그 실을 붙잡고 있는 한, 길을 잃을 수는 없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지

그리고 그대는 고난을 겪으면서 늙어가지

무슨 짓을 해도 시간이 펼쳐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

그대는 결코 그 실을 손에서 놓아버리지 않지


<세상의 이치> 윌리엄 스탠포드


<불멸의 다이아몬드>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시인데 '그 실'은 '진짜 자기'(거짓자아 아닌)를 뜻한다고 하는데,

돌아보면 우리의 모임 또한 '그 실' 같았다.

변하는 일상을 속에서,

굳이 우리가 왜 모이지? 우리는 어떤 관게 무슨 모임이지?

설명하거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어려운, 

고난 당하는 서로를 바라보고, 늙어가는 서로를 확인하면서 만났다.

끊어질 듯 말 듯, 가느다란 실 같으나 결코 놓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같이 책을 읽자고 했다.

청년 시절, 결혼을 하고 싶은데 마음 같이 않았던 교회 친구들 모아 책을 읽자 했고.

남편과 사귀기자마자 함께 책을 읽었고,

결혼 후 신혼부부 모임을 만들어 주일마다 책나눔을 하고.

(아기들 기어다니고 똥기저귀 굴러다니는 신혼집 거실 돌아다니며 치열하게도 모였다.)

마음에 딱 맞는 한 커플과 넷이서 진하게 읽고 나누는 시간도 있었다.

가정교회 선배 부부들을 졸라 부부 책모임을 하기도 하고,

아끼는 제자 한 둘을 붙들고 읽기 만남을 갖기도,

아이 키우며 돌아버릴 것 같은 처지의 동병상련 엄마들 모여 육아 책을 읽기도.

젊은 사모님들을 불러 모아 함께 한 시간도 있다.


[스승이신 예수가 우리를 부른 곳은 공동체이다!]

젋은 날 배운 이 한 문장에 꽂혀 공동체를 일구고 가꾸는 것에 조용히 목숨을 걸고 살아온 시간이다. 

남편과의 공동체가 모든 공동체의 질을 결정하는 바로미터였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 섬긴 가정교회와 청년 목자모임은 어떤 결정체였다.

매주 10인 분이 넘는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먹고, 밤늦도록 하하호호 엉엉엉엉 웃고 울었던.


이 모든 (책)모임이 각각 소중하고 고유의 의미를 지녔지만,

어쩌면 이 '영성모임'을 향한 머나먼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나온 작은 공동체 경험에 대한 보상 또는 배움의 열매로서의 만남일지 모른다.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에 지쳐 있는 내게 줄 것도 받을 것도 있는 만남이었달까. 

이 실낱처럼 이어온 모임은 나를 지탱하고, 나를 비춰보게 하는 안전한 공동체이다. 

그간 만들고 이끌어 왔던 어떤 책모임보다 덜 힘이 들었다.

아니 갈수록 힘 들이지 않고 모임을 유지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하자.


자발성과 정직성.

좋은 공동체가 가진 특징을 나는 이 두 가지로 정리하겠다.

이 두 원칙에만 부합하자는 마음으로 영성모임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아니 영성모임이 가르쳐준 것이 이 두 가지 원칙이다.

자발적이고 투명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 또한 영성모임을 통해 배운 것 같다.

여섯 권의 책을 함께 통과해왔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다.

주먹 불끈 쥐고 지켜내고자 하지 않았지만 미미하게 이어지더니 쌓인 열매가 저러하다.


끊어지지 않고 여기 '영성모임'까지 이어온 그 실은

오래 전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책모임, 그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 실을 손에서 놓아버리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이 살아와 자신의 작품 ‘엘리제를 위하여’가 소비되는 방식을 확인하면 어떤 표정 지을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수업 시작 종, 초인종 소리, 심지어 쓰레기차 후진 알림 멜로디. "이렇게나 쓸모 있는 유용한 음악을 내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며 좋아할까요?


칼 융이 살아온다면요? 자신의 심리유형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 MBTI가 쓰이는 방식을 본다면요? "딱 보니 너는 ESTJ라서 그래. 아, 그 사람은 INFP라서 그래. 는 어쩔 수 없어....." 유형으로 이름표 붙이고 규정하는 하나님 놀이를 어떻게 볼까 싶어요.


칼 융 최후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찬찬히 읽자니 그간 했던 수많은 MBTI 강의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반성, 또 반성하게 되네요. 융은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역사가 칼 융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든 현상이든 만들어진 틀에 끼워 넣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쉬운 만큼 게으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틀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게으름이야말로 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에니어그램을 '거울'이라고 합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잡아내는 인간의 본성, 자기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안다 하는 순간 어리석음으로 떨어지고, 섰다 하는 순간 넘어지는 인간입니다. 신비롭게도 안다 하는 순간 나의 새로운 면을 비춰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에니어그램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입니다. MBTI도 자기를 객관화의 도구로만 쓰인다면 이보다 신박한 거울이 없을 것입니다.


칼 융이 그린 무의식의 지도는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은 물론 많은 영성가들의 가르침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인격의 빛과 그림자, 남성성과 여성성의 일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며 온전함을 추구하는 태도. 그 지난한 고뇌와 깨달음의 여정이 <기억 꿈 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빨리 쉽게 읽히지 않는, 차마 죽죽 밑줄을 그어댈 수 없는 책입니다. 경외감을 느끼며 읽었습니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칼 융




'꿈은 당신에게 배달된, 봉투 안에 든 편지' 라고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혹여 어떤 메시지가 든 편지라면 발신자는 누구이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크리스천의 꿈은 조금 다를까요? 뱀 꿈은 마귀의 시험에 들었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거나 미래를 예견하는 방법이 될까요?


프로이트(Sigmund Freud)라면 무의식의 억압된 욕구가 꿈의 발신자라 하고, 융(Carl Gustav Jung)이라면 자기 안의 신적인 자아 Self로부터 오는 것이라 합니다. 나쁜 꿈은 없고, 모든 꿈은 우리를 도우러 온다고 입을 모아 말하지요. 여러 영성가들은 존재 중심에서 우리는 붙드는 사랑의 목소리, 그분이 발신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뱀 꿈이며, 악몽을 비롯한 모든 꿈은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너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자이다’


작은 그룹에서 꿈 여정을 하면서 "당신은 불필요한 심리치료비 1만 달러를 벌었다"는 말을 자주 떠올립니다. 가짜자기와 그 너머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하는 눈이 생긴 사람에게 리처드 로어 신부가 하는 말인데요. 정직하게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심리상담 수십 회기의 효과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꿈을 나누는 집단 여정에 초대합니다.


♧ 일시 : 2월 20일(화) ~ 3월27일(화) 오후 2시-5시
            매주 화요일, 6회기
♧ 장소 : 마포구 신수로 56 순총빌딩 B1층
            (광흥창역 4번 출구 도보 6분)
♧ 인원 : 선착순 5명    ♧ 수강료 : 7만 원
♧ 문의 : 010-4395-0501(문자로 주세요)
♧ 신청 : http://bit.ly/2DVzbFU



신화학자 고혜경 선생의 꿈 강의 한 번 들어보세요.

단지 꿈이 아니라 정서적 영적 성장에 관심 있으신 분들 귀가 커지실 것입니다.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나의 무의식 들여다보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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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지닌 영적 존재이다. 


-테이야르드 샤르뎅-



20일, 어제는 에니어그램 영성과정을 하루 여정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신실의 내적여정 세미나 완강(!?)입니다. 1단계, 2단계, 심화 1단계, 심화 2단계, 영성단계. 하루 여정으로 다섯 번. 총 30시간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마지막 강의를 '영성과정'이라 이름 했지만 처음 1단계부터 이미 영적인 과정이었지요. 영성적이 것이 특별한 신비체험 같은 것에 있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존재로 사는 것은 바로 여기, 내 몸과 행동, 감정, 지성을 통한 구현입니다. 위의 테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님의 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영성적 삶이라 확신하고요. 결국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 가까운 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서 영성이 드러납니다. 어쩌면 영성 중의 영성은 일상 영성일지도요. 


영성과정 피정에 참석하여 영혼의 폭풍을 만난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들은 신부님의 강의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받아 적은 느낌의 노트가 있습니다. 무엇을 염두에 두고 그리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강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으로 들어왔고 흘려보낼 수 없어서였습니다. 이후로도 마음의 여정은 계속 가야하는 길이었고, 그 강의안을 삶으로 경험으로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배워 시작한 향심기도도 혼자 조용히 이어왔습니다. '이해'의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 영성공부에 매달린 10 년의 세월이기도 하네요. 그리하여 무엇을 명확히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10년 전 그 강의안을 들고 감히 가르침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긴 여정을 내내 함께 해주시는 몇 분들은 참 소중한 분들입니다. 여기 저기서 산발적인 영성 강의를 하고 있지만 구슬 서 말을 한 줄에 꿰도록 해주신 분들입니다. 나 살자고, 나 좋자고 판 우물이었습니다. 내 한 목숨 살자고, 믿어야 하는 이유를 찾고자 걸어온 여정이지만 누군가의 '알아줌'은 또 얼마나 필요한지요. 나는 '영적 경험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지닌 영적 존재이니까요. 나의 지난한 길이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 작은 이정표가 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보상이며 알아줌이겠습니까. 10여 년 전, 아니 목말라 찾아간 여러 강의들에서 단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제 앞에서 온 의식을 다해 집중하시는 분들이 있어 큰 보상이 됩니다. 강의에 실패한다 해도 내 존재는 여전히 '괜찮음'이지만 한 개 말할 때 한 개 너머를 알아들으시는 눈동자는 여전히 괜찮은 제 존재에 기쁨과 보람을 돌려주십니다. 


손수 만드신 케잌과 쿠키 크리스마스 사탕까지 한아름 가져오신 선생님 덕에 풍성한 '인간적 경험'으로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선생님 한 분께서 "이걸 돈 주고 사왔다고 해도 놀라운데 직접 만들어 오셨다구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게요. 조건 없이 자발적으로 나누는 마음은 분명 더 좋은 것들을 유발합니다. 제가 늘 한 방울 한 방울 신중하게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준비하곤 하는데 케잌과 쿠키가 맛있어서 제 커피는 아름다운 조연이 되었습니다. 어느 분은 '커피를 부르는 케잌'이라고 하셨어요. 인간적 경험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참 좋았습니다.


영적 존재로서의 나를 일깨우며 버티기에는 힘겨웠던 2017년이었습니다. 인간적 경험의 비루함은 가깝고 현실적이며 영적 깨달음의 위안은 막연하고 멀기 때문입니다. 초라할 대로 초라해진 인간적 경험에 파묻혀 '거지 같고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뒹구는 나를 일으키신 분들이 내적여정 세미나 인연들입니다. 피력하지 않아도 믿어줌을 얻는 강사는 복되었습니다. 여러 제약이 있어서 이 세미나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이어가야 할 지 늘 고민하고 서성이지만 만남이 주는 생명력 만큼은 단절이 아니지요. 이렇게 2017년 에니어그램 세미나는 고마움으로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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