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중에 입학한 채윤이는 예고의 교복이 그렇게나 예쁘다며 꼭 입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예고 교복 예쁜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아름다움(물론 채윤이는 이런 표현을 알지 못합니다. ㅋㅋㅋ)이라며, 그 교복엔 백팩을 매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숄더백(물론 이런 용어도 모르기 때문에 '엄마, 가방 중에 그런 거 있잖아. 줄이 두 갠데 좀 길고 그래서 어깨에 매고 그러는, 회사 다니는 언니들이 매는 그런 가방'이라며 기나긴 설명을 합니다만)을 매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완전 대박! 등교가 아니라 회사 출근하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암튼, 예고 교복은 입고야 말겠다고!

 

# 채윤이 선언

 

2학년 어느 날 채윤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나 예고 가지 말아야 할까봐. 우리 인성 시간에 장래희망 이런 거 써내고 얘기 했는데.... 피아노과 애들이 장래 희망이 다 똑같애. 뭐게? 피아니스트, 땡! 모두 다 교수야.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모두 다 서울대 교수야. 엄마 그게 말이 돼? 서울대 피아노과 교수가 몇 명이나 된다고. 휴유, 나 예고 가지 말까봐."

 

이 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같은 꿈을 가졌다는 것은 새롭지 않은 놀라움이긴 하지만요. 그렇다고 예고에 가지 않겠다니. 제가 아는 채윤이는 친구들이 모두 그러겠다면 '아, 그게 답인가보다! 그럼 나도 일단 서울대 교수!' 이럴 애 거든요. 얘가 우리 나라 교육 현실에 대해서 고민을 하거나 딱히 의식이 있는 중딩도 아닌데. 오히려 채윤인 그 누구보다 학교라는 체제에 순응하여 그 틀로 자기를 바라보며 주눅이 들다가도 사소한 성과 하나로 과도하게 교만해지는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말이 더 가관입니다. "엄마, 우리가 아직 중학생이고 아직 3학년도 아닌데 선생님들은 너네 예고 못 가면 대학 못 간다, 이러면서 자꾸 한 가지 얘기만 해. 대학교를 간다 못 간단 얘기만 하는데 너무 이상한 거 같애. " 뭔가 문제의식을 느꼈나봅니다.

 

# 엄마 당황(하지 않고 일단 무시하기)

 

엄친딸, 그러니까 제 친구의 딸인 은율이가 중학교 마치고 고등학교 가기 전에 안식년으로 1년 쉬었단 얘길 듣고 그거 한 번 해보면 좋겠단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채윤이 상황은 조금 특수했지요. 이왕 예중에 입학한 거, 프로필에 예중 예고 나란히 써주는 게 순리라는 입장 또한 분명했습니다. 예고를 안 갈까보다, 하는 채윤이 말은 그러다 말겠지 싶었고. 어린 것이 다시 입시를 치르고 예고 3년을 빡빡하게 보낼 생각하면 마음은 짠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살짝 당황했지만 일단 응응, 해주고 무시하기!

 

# 채윤이 생각

 

3학년이 되고 학교 분위기가 입시체제로 돌입하였습니다. '향상음악회'라고 친구들 앞에서 연주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곡을 들고 무대에 서는 것이 반복되자 가뜩이나 꾸깃꾸깃한 자존감이 반듯하게 펴질 날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구겨지고 다시 구겨지고.... 그렇다고 연습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닌데 뭔가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 같았습니다. 급기야 레슨 선생님께선 "처음 만났을 때 반짝이던 채윤이가 없어졌다. 무엇을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통 못 알아듣는다" 하십니다. 다그칠수록 채윤이는 더욱 위축되어 음악이고 마음이고 꽉꽉 막혀있는 듯 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자꾸 무너져 내렸습니다. 채윤인지, 내 자신인지, 선생님인지, 아니면 이 현실인지 무엇엔가 화가 났습니다. 피아노가 안 되는 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반짝이던 채윤이를 잃었고 어디 가서 찾아야할 지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적보다, 성격보다, 그 무엇보다 가장 지켜주고 싶었던 채윤이다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은 아득해질 뿐이었습니다.

 

맥도날드에 앉아 채윤이와 기나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보니 절망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 채윤이를 잃어버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채윤이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채윤이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하시던 지점을 채윤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선생님이 하라는대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거기를 포르테로 치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생각할 때 포르테가 아니라 피아노가 되어야 할 것 같다구. 선생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 달라.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아져. 그래서 나도 힘들어." 그럴 때 선생님께 채윤이 생각을 말씀 드려보면 안 되겠냐고 했습니다. 당연히 안 된답니다.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자기보다 음악을 더 잘하시는데 말해도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장 내일이 향상(음악회)인데 그런 얘길 해서 뭐하냐는 것이지요. 연습을 할수록 더 안 된답니다. 엄마는 자꾸 어렸을 적 내 얘기만 하는데 그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안 된다고. 내년에 안식년 할 생각도 있었으니까 입시는 포기하든지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 엄마 깨달음

 

채윤이 얘길 들으며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채윤이는 자기 음악을 찾는 중입니다. 채윤이는 자기 생각이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헤매고 있고, 그걸 죽이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의 잣대로 보면 무지무지 음악이 안 되는 학생이지만 뭔가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후 엄마 마음에 왠지 확신이 생겼습니다. "채윤아, 포기해도 돼. 그런데 입시 끝나고 포기하자. 너는 피아노, 선생님은 포르테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선생님과 토론하고 논쟁하고 그래서 배워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그런데 엄마가 알기로 우리 나라에서, 특히 너가 가는 길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엄마는 네 생각을 지지해. 음악에 답이 어딨어! 내 음악을 만들어 가는 거지. 엄마가 지금 채윤이 얘길 듣다가 확신이 생겼어. 너 학교에서 꼴찌해도 돼. 그리고 왠지 선생님과 생각이 다른 그것이 너무 너무 중요해. 그게 있어서 다행이고. 그러나 채윤아, 딱 일 년만 그렇게 그냥 이대로 지내보자. 네 생각 소중하게 간직해서 딱 1 년만 넣어둬. 아냐, 1년도 아니네. 이제 몇 개월이야. 그리고 입시를 마친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 입시나 성적 자체가 중요하지 않지만 엄마는 네가 이런 학교와 환경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누구에게? 세상에게!) 중학교 생활을 마쳤으면 좋겠어. 엄마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교수님 레슨도 받고 연습실도 구해줄게. 돈 많이 들어도 돼. 입시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 봄바람

 

1년이야.

1년만 딱 그렇게 하고 우리 더 좋은 길을 찾자. 계속은 안 되겠지만 1년은 할 수 있겠지? 

 

맥도날드 야외석에 앉아 있었는데, 아직 3월인데 이상하게 춥지가 않았습니다. '이느무 지지배 멍청해서 선생님 말씀도 못 알아듣고. 생각은 어디 가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만 쳐댄다고 연습이 되나. 어쩌다 이렇게 멍청한 게 됐나. 이걸 그냥!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려버릴라.'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대화였습니다. 그 춥고 딱딱하던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하면서 '학교. 예술전공, 우리 교육의 현실, 그 안에 있는 채윤이'의 상황이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넘사벽 앞에 선, 자기답게 음악을 하고 살고 싶은 아이,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로 혼란스러워 하는 채윤이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길이 보이는 것 같았고 마음에 알 수 없는 평안 같은 것이 생겼고, 무엇보다 채윤이를 진심으로 더 사랑하고 응원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 내가 이 아이 엄마지. 끝까지 너를 지켜줄게. 어디선가 이 노래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삶의 막막함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의 말씀이, 삶의 답답함 가운데 빛이 되시는 주님이 말씀이 내겐 봄과 같아서 내게 생명을 주고 내게 신선한 바람 불어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네"

 

 

* 1편에서 예고해 드렸던 제목과 다릅니다.

이유는 1편의 반응을 보니 구독률이 좀 나오겠다 싶어서,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연재 횟수를 최대한 늘리기로 자체 결정하였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채윤이가 예고에 합격했다는데 별로들 안 놀라시네요.

이건 좀 깜짝 놀랄 일인뎁쇼.

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일궈낸 합격이라서 그렇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일단 예중 입학부터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초3, 4부터 한다는 예중 입시 준비거든요.

5학년 가을, 입시 1년을 앞두고 채윤이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나 예중 가고 싶어.

열심히 할게. 어려운 거 알아. 힘든 것도 알아. 그래도 나 예중 가고 싶어. 엄마.

어르고 달래고 엄포를 놓곤 하다가 어차피 1년 준비해서 될 일이 아님을 알고 허락했습니다.

"14층 누나~아, 14층 누나 왜 요즘 우리랑 안 놀아?" 팬들의 성화에 아랑곳 하지 않고.

팬들이 아파트 복도를 뛰어 다니며 '경도-경찰과 도둑이라는 잡기놀이'를 할 때도

개의치 않고 피아노를 쳐댔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벽을 뚫고, 곡절 끝에 예중에 입학했습니다.

 

불과 1 년 준비해서 들어간 예중,

달랑달랑 꼬리 잡고 들어간 예중.

녹록치 않았습니다.

15개월부터 정확한 음정으로 '주는 나의 좋은 목자'를 부르고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불렀제낄 땐 얘는 독보적인 능력을 타고났다고 확신했었드랬습니다.

예중에 가보니 그런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중요한 건 또 그게 아니었습니다.

시간과 돈으로 쌓은 내공.

그것이 약한 채윤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 펼 날이 없었습니다.

예중생으로 좋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중 가기로 결정하고 야심차게 입시준비 시작할 무렵.

강동에서 낯선 마포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다음 날 딱 하루 피아노 연습했는데 다음 날 바로 아래층에서 올라왔습니다.

고개를 여러 번 숙여 죄송하다, 조치를 취하겠다 했습니다.

교패(현관에 붙이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알리는 스티커)가 밉더군요.

그날로 그나마 아쉬운대로 사용하던 업라이트 피아노는 '제니오'라 불리는 기계를 떡 붙이고

'사일런스 피아노'가 되었답니다.

이걸로 연습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실기 꼴지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와도 같았지요

 

게다가 엄마(만 거명하는 건 뭔가 혼자 독박 쓰는 기분이니까) 아빠는 최악이었습니다.

수업료와 최소한의 레슨비에도 매달 입을 쩍쩍 벌리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구요.

아이의 실력,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이 시대 성공신화의 3대 요소라는데.

실력과 재력은 둘째 치고, 엄마의 정보력은 꽝인데다가 정보를 모을 의지도 없었답니다.

정보를 얻다가 아이를 잡느니 정보원 엄마들과의 연을 끊겠다며 고상을 떨지 않나.

저명한 피아노과 교수님이 근거리에 있는데도 줄을 대볼 생각조차 못하는 찐따 엄마라니요.

등교부터 하교, 하교로부터 학원, 학원으로부터 레슨까지 따라 로드매니저 엄마도 있다던데

집에서 합정역까지 5분 태워주는 것을 가지고 아침마다 투덜대던 엄마였습니다.

한 일 년 전에는 깁스한 발로 지하철 타고 한 시간 거리 등하교를 하기도 했지요.

엄마라는 여자가 독하기도 하지요.

 

3학년 3월에는 최악의 위기가 찾아 왔지요.

버티고 버티던 채윤이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우직하게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또또 연습해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아아 악악악악악아' 밤의 여왕을 부르던 음악 영재 두 살 채윤이는 어디로 가고

앞뒤가 꽉꽉 막힌 음악 둔재가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기 적에는 물론이고,

놀며 피아노 배우던 시절 소나티네를 쳐도 근육이 먼처 춤추던 아이였는데,

무대에만 서면 로봇이 된 머리부터 손가락 끝까지 통으로 움직이는 로봇 같았습니다.

고민하고 울고 불고 하던 채윤이는 포기하겠노라 했습니다.

독한 엄마는 말했습니다.

"포기해도 좋아.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남은 1년은 열심히 하고, 그 다음에 포기해.

채윤이 니가 예중을 선택했을 때는 3년을 선택한 거야.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올해는 열심히 하는 거야. 채윤아, 니가 잘 알듯 선택에 대해선 책임이 있는 거야. 올해까진 책임져야 해. 그리고 채윤아 너 혼자 애쓰도록 하지 않을게. 엄마가 연습실도 구해주고, 앞으로 교수님 레슨도 하자.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다 도와줄게. 채윤이도 최선을 다해 연습해."

모든 걸 떠나서 중학교 3년을 패배감에 절어 끝낼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3학년 2학기, 입시를 앞둔 실기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은 채윤이는 바로 담임샘께 갔답니다.

"선생님, 등수가 안 나왔어요."

"거기 형광펜 칠한 부분이 등수야. 채윤이 너 이번에 정말 잘했어"

"어.... 여기 앞에 한 자리수가 없는 거 같은데요......이게 그럼 정말 제 등수..... 흑흑흑"

레슨 선생님께서 이 모의고사를 '복면가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입시와 똑같은 환경을 위해 심사위원석과는  막을 쳤고, 

이제껏 실기시험 때마다 채점하던 분들이 아니라 외부 교수님들이 심사를 했답니다.

선입관 없는 심사에서 최저 비용으로 예중을 다닌 채윤이는 한 자리 수 등수를 받았습니다.

 

채윤이는 자신감을 회복했고,

열심히 하면 결국 실력이 나아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엄마는, 교수님 레슨을 받는 것이 실력과 성적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채윤이는 예고에 합격했습니다. 

합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았던 지난 3월의 선택이며,

그 누구의 강요나 강압 없이 자신과의 싸움과 같은 연습시간을 견딘 것입니다.

채윤이는 이렇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말하자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3년 간의 영아티스트 분투기 입니다.

 

 

 

# '열여 섯 채윤이의 진로선택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다음 글 예고. <채윤이는 예고에 가지 않습니다>

  다음 글  업데이트 시기는 댓글 달리는 거 봐서 결정하겠씀미다. 충성!

 

 

 

 

 

 

 


 

 

 

# 1

조수석에 앉아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입으로 오디오 지원하면서 작성하는 중.

'저는 가는 날에는 셔틀 타지 못하구요,

다음 날 엄마랑 같이.....같이..... 구개음화....'

뭐라고? 지금 뭐라는 거야?

으흐흐흐. 들었어? 아, 이번 국어 시험범위였는데 '같이'는 '구개음화'야.

엄마 시험공부한 게 자꾸 너무 많이 생각이 나.

내가 공부해보니까 말야 티브이 예능 자막에도 철자법 틀린 게 많이 나온다.

저번 주 런닝맨에서 말야...... 피동사에....ㅏㅏㅠㅂㅓㅜㅛ=#$.......이렇더라.

참, 사람들이 무식해.

 

#2

한강에서 자전거 타다 넘어진 상처가 빠르게 나아간다.

드레싱 밴드도 떼고 아물어가는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는 채윤이가 반색을 한다.

엄마 손 많이 나았네.

다행이다. 빨리 나아서..... 체세포 분열....

엄마 이렇게 상처가 낫는 건 엄마 몸에서 체세포 분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긴 때문이야.

우힛, 과학 시험범위야.

아흐, 나 진짜 유식하지?

 

 

#3

엄마, 나 이번에 이차함수부터 진짜 수학이 좋아졌어.

풀면 딱 정답이 나오는 게 너무 시원하고 좋아.

심지어 시험 끝났는데도 수학 문제 풀면서 놀까? 이런 생각이 난다니까.

아, 나 수학 좋아!

 

 

==============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을 떼는 것은 이제 선행학습 축에도 못 드는 것 같지만.

'이제'가 아니라 채윤이가 초등학교 가던 그 시절에도 그랬지만.

꿋꿋하게 교육에 관한 순결을 지켜 '까막눈'인 채로 아이를 공교육에 보냈었다.

그땐 소신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잘한 짓인가 싶을 때가 있다.

글자를 배우는 것은 '준비가 되었을 때, 자발적인 동력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는 소신이고.

최초의 공부가 글자공부일 텐데 첫 경험이 즐거워야 공부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될 거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그게 내 각본대로 되지 않았던 것.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어마무시하게 어려운 받아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가갸거겨 하던 채윤이가 '닮았습니다. 싫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이런 단어를 써야했다!!!! 

받아쓰기 봐주던 그 1년은 내 생애 통틀어 가장 고래고래, 열폭했던 나날이었다.

(채윤아, 미안해)

일부러 한글 가르칠 필요 없다. 다 때 되면 터득한다. 즐겁게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조언을 이제는 하지 못한다. ㅠㅠㅠㅠ

 

그러나 내 인생도 길고 채윤이 인생도 길어서 말이다.

초등학교 1년이 끝은 아니었다.

비록 까막눈으로 시작한 공교육인 데다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인 데다

주입식 교육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는 상태로 시작한 터라

(공부 머리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긴 고통의 나날은 있었지만 공교육에 한 8년 정도 찌들더니 의외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험공부를 힘들어하면서도 즐거워한다는 것.

즐겁게 하는 공부 중에 침잠하는 것들이 있어서 조금씩 유식해진다는 것.

이렇게 한 8년 지내면 완전 공부 잘하는 애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 

 

 

 

 

 

 

전날 실기시험을 치루느라 기진녹진(기진맥진하여 녹초가 된 상태)한 채윤이.

다행히 실기시험 기간이라 하루 쉬게 되었습니다.

아침 먹고 두 남자들 나간 후에 설거지 마치고 조용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햇살이 만든 한 평짜리 방에 채윤이가 앉아 있습니다.

뭘 하나? 봤더니 화분들 아래 놓인 실바니안 패밀리를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한때, 채윤이가 놀짱이었던 그 시절의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한 토끼 패밀리입니다.

엄마가 주시하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 "노는 거 아냐. 정리하는 거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새 한 뼘 햇살로 만든 방도 사라지고

채윤이도 사라졌습니다.

실기시험 전날에 채윤이는 학교 수업 마치고 오후 3시에 연습실에 들어갔습니다.

밤 10시가 되어 태우러 갔더니 조수석에 쓰러지듯 몸을 던지며 "배고프다" 합니다.

저녁 안 먹었냐 물으니 시간이 없어서 못 먹었답니다.

3시부터 10시까지 무려 7시간 밥도 안 먹고 연습했다는 얘깁니다.

아, 채윤이 아빠 딸이었군요.

7시간 동안 밥을 잊고 뭔가에 열중하는 것? 글쎄요. 엄마로서는 상상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하고 싶던 신학공부 하던 시절, 채윤이 아빠는

8시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드랬었드랬지요.

채윤이에게도 아빠 피가 흐르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연습을 했으면 실기시험을 엄청 잘 봐서 피아노를 들었다 놨다 했어야 할텐데

베토벤을 칠 때 왼손을 여러 번 틀렸다며 속상해 합니다.

성적도 그닥 잘 나오진 않을 것입니다.

실바니안 패밀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 다양하고, 당차고, 끝간 데 없는 상상력으로 다채롭던 표정을요.

자기들을 쥐락펴락 하던 시절 채윤이의 표정을요.

그때 그 채윤이, 잃어버린 채윤이 표정을 찾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의 강의 후 포럼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연호 대표 바로 옆에 패널로 앉아 있었다는 걸 자랑하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아, 저 진짜 채윤이 진로 때문에 심각하다구요.

잃어버린 채윤이 표정을 찾아야 합니다!

네네, 물론 보시다시피 자리배치 끝내줬습니다.

무대 전면이 궁금하시다면 뭐 보여드리죠.

 

 

 

 

청중으로 와 있던 남편에게 사진 좀 제대로 찍어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

엉망으로 찍어놨더군요.다행히 또 다른 지인이 사심없이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세계 행복지수 1위 국가인 덴마크를 1년 6개월 취재했던 오연호 대표는 여러 번 말했습니다.

'사진 보세요. 애들이 표정이 좋아요'

'표정이 좋아요'

좋은 표정이 보이는 이유가 있더군요.

쾌활 명랑 엉뚱 당당하던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서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없어지고,

하는 말이라고는 '아무거나요'로 변하는 것을 아프게 지켜봤던 거지요.

그분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채윤이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처럼 빛나던 우리 아이들의 표정이 어쩌다 그렇게 썩었을까요?

잃어버린 그 표정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찾을 수 있을런진 모르겠지만

뭔가 꿈틀거려야겠다는 뜻은 분명해졌습니다.

채윤이 표정이 이대로 계속 썩어가도록 두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뭐든 해야겠지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거 사진 자랑 아닙니다.

저 대한민국 청소년의 엄마로서 완전 진지합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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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다음에 학교 가방 살 때는 영어 많이 써있는 어떤 가방 사 줘.

뭔지 알아? 가방에 마~악 영어가 써 있는데. MGM, MGM, MGM...... 이렇게.

 

(풉, 또 시작이다. 우리 중딩의 반지성주의 운동) MCM 아냐?

 

그른가?

암튼 그렇게 막 써 있는 거. 우리 학교 애들 그 가방 디게 많이 갖고 다녀.

예뻐. 나도 다음번엔 그거 사 줘.

 

뤼얼리? 중딩들이 그걸 매고 다녀?

그거 비싼데. 엄청 비쌀 텐데....

 

그럼 못 사 줘?

 

아니.

 

(오예)사 줘?

 

아니.

 

못 안 사 줘.

 

아~ 알겠어!

 

 

(중학교에 흔한 가방이 저 수준이라니. 이느무 학교를 때려쳐야 하나?)

(채윤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MCM을 갖고 싶었지만 아쉬운대로 MGM이라도 매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던 걸까? 그 친구 만나면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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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서 기억나는 꿈을 기록하고, 고요한 시간에 꿈의 영상을 리플레이 해보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는 것. 꿈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이 참 좋다. '꿈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하찮은 것을 귀하게 바라보는 눈,  스쳐지날 것을 응시하는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던지는 볼멘소리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강변 마른 풀들 사이 삐져나온 손톱보다 작은 들풀에서 그 나라의 생명을 보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아이들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쪼르르 식탁으로 달려와 '엄마, 나 꿈꿨어. 무슨 뜻일까?' 자주 묻는다. 엄마가 꿈해몽 점쟁이냐? 무슨 뜻인지 알게? 아이들의 꿈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악몽을 꾸더라도 꿈일 뿐이니 다행이고, 기분 좋은 꿈을 꾸면 기분이 좋으니까 좋고!  

 

굳이 꿈분석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꿈을 가지고 이야기 하다 보면 어느새 치유, 어느새 자기 성찰, 어느새 소망의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엊그제 주일 아침에 그랬다. 채윤이가 꿈을 꿨다면서 내 침대로 와 턱 걸터 앉아 쫑알거렸다.  

 

* 채윤이의 꿈

 

친구들이 나를 버리고 갔어. 학교 친구들인데. 한영교회 동산에 날 버리고  간 거야.
나는 동산에 혼자 남아 있어. 혼자 남아서 '어, 이건 뭐지?' 하고 있는 거야. 끝.

이 꿈은 내 꿈이 아니라 채윤이 꿈이다. 그러나 내가 그 꿈을 꾼 것처럼 진지하게 듣는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묻는다. 친구들이 왜 버리고 갔어? 따돌림당한 거야?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를 혼자 두고 간 거야. 동산에 혼자 있는 느낌이 어땠어? - 슬프거나 그렇진 않고 그냥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러고 있었어. 채윤이게 있어 학교 친구들은  어떤 친구일까? 채윤이에게 한영교회 동산은 어떤 곳일까?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여 한참 얘기를 나눴는데..... 들어보시라. 결론은 꿈보다 해몽!이다.

* 학교 친구들

 

채윤이가 얘기하는 학교 친구들이란 이렇다. 예술 중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너무 서로들 경쟁적인 관계라서 친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단다. 실기 성적으로 줄을 세워서 그 잣대로만 친구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마음을 터놓을 수가 없다. 학교 다니면서 자주 채윤이가 말했었다. '엄마, 학교 친구들은 친구라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아.' 얼마 전에는 그런 말을 했었다.  '엄마 나 정말 예고 정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이 얘기 해주면 엄마도 놀랄걸.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써냈는데 피아노과 친구들 장래희망이 다 똑같애. 완전 대박이야. 나 빼고 모두 똑같애. 뭔 줄 알아?  모두 교수야. 그것도 서울대 교수. 대박이지?' 그 사이에서 채윤이가 항상 고립감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다. 여러 환경이 채윤이와 다를 뿐 아니라 음악, 학업을 하는 방식도 다르다. 게다가 채윤이는 학교의 잣대로 보면 늘 자신을 부족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채윤이에게 성적과 상관없이 채윤이 음악이 얼마나 좋은지, 그렇게 줄 세우는 방식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가정교육이라면 가정교육이었다.

 

* 한영교회 동산  

 

한영교회 동산은 채윤이가 5학년 때까지 다녔던 한영교회, 즉 한영고등학교 안에 있는 동산이다. 한영 동산은 채윤이에게 이런 곳이란다. 어렸을 때 재밌게 놀던 곳, 눈치 안 보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놀던 곳. 너무너무 재밌었던 곳, 도심 속에 어울리지 않는 동산. 참 좋은 곳.
그리고 한영교회는 채윤이에게 이런 곳이다. 늘 그리운 곳,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 주고 예뻐해 주던 곳. 이곳 교회에 와서 1년이 넘도록 '왜 아빠는 교회를 옮긴 거야? 이 교회에는 친구가 없고 아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재미도 없어. 나 엄마랑 어른 예배드리면 안돼?' 하며 긴 적응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했다. 

 

 * 꿈이 건넨 이야기

 

3학년이 되어 입시준비며 부담이 많은 채윤이의 의식세계를 '학교 친구들' 이란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친구들이 있는 학교로부터 떨어져나오고 싶은 바램도 간절하고  친구들이 나를 친구로 생각해주지 않는 것이 두렵고, 그러다 왕따가 될까 봐 늘 노심초사이다. 무리에 섞이고 싶고 홀로이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꿈이 아닐까.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는 채윤이가 이런 지점에서 많이 힘든가 보다.

 

그 친구들이 버려놓고 갔다고 하는 동산. 그 동상은 놀짱 채윤이가 자기답게 자유롭게 놀던 곳이다. 저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까지 끌고 다니면서 극 놀이를 하고 신났던 곳. 이기고 지고, 줄을 세우는 경쟁구도가 없는 곳이 채윤이 마음 속 한영동산이다. 다시 가서 뛰놀고 싶은 동산. 그것을 채윤이는 '도심 속의 동산'이라고 표현했다. 동산은 채윤이가 그리워하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한영동산이기도 하지만 그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곳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채윤이에게 찬송가 한 장을 불러주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채윤아, 이슬이 맺혀 있는 장미가 있는 곳이 어디게? 그래, 동산! 동산은 채윤이가 말한 진짜 신나게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곳이고, 어릴 적에 너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에게 사랑받던 그런 곳이야. 엄마에게 동산은 저 찬송 가사처럼 아주 조용히 예수님 만나는 곳이다. 채윤이에게 자유, 즐거움, 사랑받음으로 기억되는 동산이 엄마가 조용히 기도하면 예수님 만날 때의 느낌과 같아.
꿈은 채윤이가 입시를 앞둔 학교생활에서 잘 못 섞이는 것 같아 힘들고, 떨어져 나오고 싶은 마음도 보여주고, 떨어져 나와서 가고 싶은 곳도 보여주네. 그런데 그건 지금 명일동에 있는 한영교회 동산만은 아닐 거야. 이미 채윤이 마음속에 있는 동산이야. 채윤이가 그때 받은 사랑과 그때 신나가 놀았던 기억이 채윤이 마음에 그대로 있거든. 그게 채윤이 마음의 동산이지. 그러니까 지금 언제든지 그 기억을 꺼내보고 기억 속에서 다시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거야.

 

아까 불러준 찬송 중에 엄마는 4절을 디게 좋아한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채윤이 주일날 중등부 가서 반주하고 찬양하고 예배 드리는 거 참 좋잖아. 일주일이 늘 그랬으면 좋겠지? 그런데 예수님은 학교로 가고 집으로 가래. 동산에서 얻은 쉼과 자유를 가지고 가래. 가서 채윤이 할 일이 있대. 할 일은, 학교에서도 기죽지 않고 채윤이 답게 즐겁게 자유롭게 지내는 일일 거야. 그런데 채윤이 혼자 가라는 게 아니라 이미 채윤이 마음의 동산에 예수님이 사시는걸.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라잖아. 참 좋은 꿈이다. 채윤이 마음의 동산에 살고 계신 예수님의 편지 같다.

주거니 받거니 나눈 긴 얘기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어느 대목에선 채윤이 눈에 눈물이 비치고 나 역시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일어나자마자 잠옷 입고 침대 누워서 다정하게 편지 한 장을 함께 읽은 느낌이었다. 채윤이 편지에 내게 보내신 메시지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이제 난 채윤이 마음 말고 내 마음의 동산으로 그분 만나러 간다.  

 

* 그림은 고혜경 저 <나의 꿈 사용법> 안에 있는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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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넘게 밤 10 시까지 연습하고 집에 오면 픽 쓰러져 자고,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서 세월아 네월아 머리 단장을 하고 등교. 다시 밤 10시 귀가. 이런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실기시험 하루 전 날입니다. 음악 시키는 어떤 엄마들은 등교는 물론이고 레슨실, 연습실까지 다 따라다니면서 로드 매니저 한다는데. 채윤인 '엄마, 미안한데 오늘 혹시 데리러 올 수 있어?' '고마워, 엄마 올 때까지 정말 집중해서 연습할게' 이렇게 비굴모드로 매니저를 부리고 있습니다. 따까리 정신 부족한 고자세 엄마를 만난 탓입니다. 오늘은 아빠 김기사가 뫼시러 갔다가 스튜디오까지 올라가 기다리며 연습하는 걸 찍어왔습니다. 문득, 4학년 말에 지금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있었던 '스튜어디스-스튜디오'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때 만난 선생님과 참 좋은 인연이 되어 피아노 전공을 결심했었습니다. 훌쩍 자란 중학생 채윤이가 그때 그 스튜어디스 아니 스튜디오에서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추억은 방울방울, 다시 보는 그 이야기입니다.

 

 

*********************

 

채윤 : 아빠, 아빠. 우리 피아노 선생님 스튜어 갖고 있대.
아빠 : 뭐?
채윤 : 우리 피아노 선생님 말이야...
스튜어디스 갖고 있대.
아빠 : 뭐래애?
채윤 : 아, 진짜. 새로 바뀐 피아노 선생님 말야.
스.튜.어.디.스.를 갖고 있다고...오.

 

아빠 : (엄마한테) 뭐래는 거야?
엄마 : 나도 한참 헤맸어. 어, 니네 선생님 피아노 전공 하셨는데 무슨 소리야.  예전에

         스튜어디스 하셨다고? 했더니 아니래. 예전이 아니고 지금 이래는 거야. 얘가

         뭐라는 거야? 지금 스튜어디스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했더니, 하이튼 그건 잘

         모르겠는데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근처 에 있대. 거기서 레슨 하신대. 

         뭔 말인지 알겠지?
아빠 : BBang!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빠 : (서로 복화술로) 스.튜.디.오.
엄마 아빠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습 안 되고 계속)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채윤 : 왜 웃어. 둘이... 그만 웃어.
현승 : 어? 그게 무슨 말인데... 나도 가르쳐 줘. 스튜어디스가 뭔데?
엄마, 아빠 : (진정 안되고 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승 : 누나, 무슨 말이야. 스튜어디스가 뭐야?
(엄마빠, 배경음으로 계속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채윤 : (무식해서 완전 짜증난다는듯) 승무원.
엄마, 아빠 : BBang!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승 : 그런데 선생님이 승무원을 왜 갖고 있어? 누나.
(엄마빠, 배경음 계속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채윤 : 아, 나도 몰라.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어. 왜 나한테 그래애!
엄마, 아빠 : (언어를 잃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태 진정 후에.

채윤 : (시크하게, 이 사태에 관해서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듯)
         엄마, 좋아 죽겠지? 블로그에 포스팅 할 거 생겼지?
엄마 : (깜놀, 머릿 속으로 포스팅 긱본 짜면서 헤죽헤죽 하고 있었뜸)


 http://larinari.tistory.com/1330

 

(원글은 ↑ 여긴데, 밑에 달린 댓글이 정말 추억은 방울방울이네.

센스쟁이 챙이랑 챈이 어록으로 주고받은 댓글 하며,

세상 좁다! 확인하며 어머어머 했던 일.

그렇게 만난 선생님과 이렇게 좋은 인연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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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오늘 급식시간에 또 완전 짜증났어.

아, 또 부정적인 얘기라서 미안한데, 들어줘. 진짜 짜증나서 그래.

**가 또 그러는 거야.

오늘 해물이 나왔거든.

'어우, 징그러.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먹어' 하면서 치우는 거야.

그리고 내가 먹으니까 완전 이러고, 이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봐.

그러면서 큰 소리로 어우, 야~ 그걸 어떻게 먹어? 우웩. 막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주변에 있던 애들이 다 나를 이상한 애 보듯 쳐다봐.

매일 이런 식이야.

나 진짜 오늘은 너무 열받아서 먹다가 그냥 딱 내려놨어.

솔직히 나랑 같이 다니는 애들이 못 먹는 게 많아서 내가 좋긴 좋거든.

급식 시간에 거의 다 내가 먹어줘야 해.

나는 좋지.(살짝 입가에 미소 스침.ㅋㅋ)

그런데 내가 먹으면 무슨 짐승 보듯 나를 보면서 그래.

 

진짜,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아직까지 열이 식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먹다가 딱 내려놓았던, 그리하여 남기고 온 해물들이 눈에 어른거려서일 것이다. 아마도)

 

쫌 심하다. 그냥 개무시하고 맛있게 먹어.

채윤이 니 매력이잖아. 신경 쓰지 마.

'야, 이거 맛있어. 그리고 나는 10 개월에 풋고추를 먹은 애야.

그리고 다섯 살부터 산낙지를 먹었어. 난 그런 애야' 하고 더 맛있게 먹어버려.

 

엄마, 내가 산낙지 먹었다고 하니까 애들이 막 소리 질렀어.

나는 먹는 걸 싫어하는 애들이 정말 이해가 안 돼.

그런데 엄마, 우리 곱창 한 번만 먹으면 안 돼?

나 소금구이 곱창 너무너무 먹고싶어.

접때 내가 전단지 가져온 거 어딨어?

(하교길에 곱창집 전단지를 주워서 들고 왔었음. ㅋㅋㅋㅋ)

거기서 한 번만 시켜줘.

 

(그리하여 곱창구이를 앞에 놓고 행복해서 시키는 표정 다하는 여중생 채윤이.

아흐, 간만에 귀여워. 아주 그냥 매덩!)

 

변진섭이 부릅니다. '희망사항'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곱창구이를 좋아하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 그림은 미술숙제로 그린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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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오늘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자러 가기 직전의 현승이가

엄마, 발 들어봐 하더니,

발밑에 무릎담요를 깔아준다.

그리고 말을 만지작 만지작하면서

발마사지야.

 

이 말에 내일 수행평가를 위해 독후감을 쓰던 채윤이가

버러러러러러럭!

 

야! 끼 좀 부리지 마. 너 땜에 난 매일매일 화가 나.

끼 좀 부리지 마. 너 땜에 난 매일매일 화가 나.

 

즉흥 랩을 막 하기에,

와! 우리 영 아티스트, 빡침을 예술로 승화시키는구나, 했더니

이런 노래가 원래 있단다.

 

"난 정말 쟤 저러는 게 너무 얄미워. 괜히 쟤 때문에 내가 더 이상한 애가 돼.

아흐..... 증말. 김현승. 너 자꾸 엄마 앞에서 끼 부리지 마라!"

 

인정.

동생이 이래서 멀쩡한 누나 무심하고 인정머리 없는 애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승이는 여전히 만지작만지작 하면서

"내가 좋은 걸 해주는 거야. 나 소파에 앉아 있을 때 바닥에 그냥 발 대면 싫어.

너무 차거워서. 그래서 담요 대준 거고.

엄마가 나 재워줄 때 발 만져주면 정말 기분 좋아.

그래서 엄마 발 만져주는 거야. 어휴, 왜 이렇게 굳은살이 많아?"

 

다시 한 번 빡친 누나.

 

끼 좀 부리지 마. 너 땜에 난 매일매일 화가 나.

끼 좀 부리지 마. 너 땜에 난 매일매일 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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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귀여워서 돌아버리겠어.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고 빨고 쪽쪽쪽쪽)

행복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이 충만한 느낌.

 

엄마 되기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채윤 현승 어렸을 때 빠져들곤 했던 감정이다.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날 행복하게 한 것으로 너는 내게 최고의 선물을 줬다.

네가 먼훗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사춘기가 되어

내 앞에서 눈알을 굴리며 흰자위를 번득거린다해도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면서 '재수없어' 외친다해도

오늘 이 충만감을 떠올리며 이미 네게 받은 선물로 인해 감사하리라.

 

라고 다짐도 했었다.

 

예를들면, 이런 순간.

아침에 옹알거리는 소리는 눈을 뜬다.

동쪽으로 난 창이 있는 침실에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다.

옆에 아기 침대. 돌이 안 된 채윤이가 난간을 붙들고 서 있다.

보송보송, 부숭부숭한 얼굴로 우리 침대 쪽을 바라보면서 

엄므.... 엄므....... 아르르르르........

엄마, 나 일어났어요. 엄마도 일어나세요.

영락없는 그 소리였다.

알람이 필요없었다. 

내 평생 그렇게 행복한 아침이 없었다.

 

 

그리고 1년 쯤 지난 어느 토요일 아침.

새로 이사한 집에선 도통 해가 들지 않아서 아침도 아침같지 않다.

토요일 늦잠을 자고 있으면 먼저 일어난 채윤이가 노래를 하고,

엄마 콧구멍을 쑤시다가 배를 타고 넘어 아빠 콧구멍을 쑤시러 가고,

뒹굴뒹굴 놀고 또 논다.

혼자 놀기 한계에 다다랐을 때 엄마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배보카. 쮸쮸 주에요.

아흐, 배보카!!! 이건 배고픈 것보다 천 배 만 배가 귀여운 배고픔이다.

 

 

그리고 13,4년이 지난 토요일 아침.

중간고사를 앞두고 공부 중인 채윤이가 금요일 저녁에 생각보다 일찍 자려고 한다.

내일 어차피 늦잠 잘건데 공부를 좀 더 하고 자지 그래?

아냐, 나 시험기간이라서 내일은 늦잠 안 잘 거야.

하더니 토요일 아침 식구들 식사를 다 마친 시간,

평소 토요일과 다름없는 시간에 뻔뻔하게 일어나서 '배고파'한다.

그리고  엄마보다 더 큰 손으로 식빵에 쨈 발라서 처묵처묵.

 

 

냐하하하하하하........

그래, 엄마가 이날을 위해서 13,4 년 전에 해놓은 다짐이 있어.

배고프지? 어서 무라. 많이 무라.

그래야 또 배불러서 시험공부 하다가 졸립고, 졸음 깨려고 나와서 돌아댕기지.

배보카, 배보카, 귀여웠던 채윤아!!!

엄만 이미 네게 받은 선물의 기억이 있으니까.

냐하하하하하하.......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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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른 채윤이 어제는 머리에 염색을 하고, 오늘은 교회 언니와 홍대 노래방에 갔다가 빙수를 먹고 온다며 신이 났더랍니다. 살짝 오렌지빛이 날락 말락 하는 염색 머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매직기로 정성스레 쓰다듬고, 엄마가 미국에서 사다 준 수트를 입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찬양팀 준비하러 나갔습니다. 나가서 10분 만에 전화. "엄마, 그런데 나 돈이 하나도 없어. 놀아야 하는데" 아빠 만나서 용돈 받으라고 했더니 그러겠노라고. 잠시 후 남편에게서 메시지 "채윤이가 용돈 달라고 문자 왔어. 얼마 줄까? 했더니, 만원 달래" 에고 개념없고 가엾은 녀석. 기껏 부르는 게 만 원이냐? 그걸로 노래방 가고 빙수 먹고 홍대 앞에서 머리끈이랑 귀걸이 살 수 있겄어?


중학교 가서 벌써 여섯 번째 시험을 치렀습니다. 시험 성적은 거기서 거기라도 시험을 대하는채윤이의 자세는 제법 자기주도적이고 성실해졌습니다. 피아노 전공을 하면서 평소에 공부도 꾸준히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디다. 한 시간 거리 학교를 지하철로 오갑니다. 레슨이 있는 날에는 잠실을 찍고 다시 집에 오는 긴 여정이구요. 친구들은 그러고도 밤에 과외공부하고 12시, 1시까지 공부하고 연습을 하고 잔다는데.... 채윤이는 참 건강한 청소년이라 학교 갔다 오면 연습 깔짝거리고 밥 먹고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자는 일상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실기나 향상연주회 시즌이 되면 선생님 스튜디오와 교회 빈 공간을 메뚜기처럼 찾아다니며 열심히 합니다. 기특합니다. 실기가 마치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공부합니다.


기말고사 전에 엄마가 미국에 가 있었더니 아빠의 도움을 받아서 수학공부를 하고, 영어는 인강을 열심히 듣고, 국어는 삼촌한테 가서 한 번 배우고 알아서 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암기과목은 시험기간 당일치기고 몰아서 외우고 시험 보자마자 다 까먹는 방식으로 효율적으로 했고요. 이 모든 것을 점점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해나가니 눈물나게 고맙고 대견합니다. 아, 물론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정상적이라면 채윤이 정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상위권에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헌데 애들을 인간이 아닌 성적제조기로 만들어서 학원으로 과외로 잠을 줄이는 공부로 쥐어 짜다보니 영어, 수학 점수 평균이 88점 이상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피아노 실기도 마찬가지. 채윤의 정도의 음악성에 열심히 레슨받고 연습하면 실기 상위권에 있어야 할 텐데요. 아이들이 교수님 레슨에, 연습기계가 되어가니 보통의 가정경제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자고 쉴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채윤이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실기나 필기나 직선 위에 줄을 세워놓는 평가라서 그 줄에서 뒤쪽에 있는 채윤이를 보면서 속이 쓰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더 닦달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지금보다 더 많이 놀게 하고 싶습니다. 헌데 대한민국 중딩이 어디 제대로 놀 데가 있어야지요. 주일에 중등부 예배 마치고 찬양팀 언니 오빠들과 떡볶이 먹고 한강 가서 사진 찍고 놀았다는 말이 반갑습니다. 되든 안 되든 중등부 예배 반주를 하면서 즐기고 누리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구요.


시험이 놀짱 채윤이가 어디 가질 않아서 시험공부를 여전히 놀이하듯 하는 것이 재밌습니다. 채윤이에게 공부는 공부가 아닌 듯. 그야말로 시험공부를 통해서 교양을 쌓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문자에 관련된 능력이 취약해서 책도 잘 안 읽고, 보유하고 있는 단어 수도 협소한 채윤이에게 시험공부가 얼마나 유익한지요. '모골이 송연하다' '귀추가 주목되다' '된서리를 맞다' 등등 지성에 있어서 소영이 등급인 채윤이가 어디서 이런 고급진 말을 배우겠냐는 거지요. "아~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국어시험 공부를 하는데 얼마나 뿌듯한지요. 그러고 보니, 지난 시험 등에서는 도덕시험을 봐주면서 '자아상' 이런 주제를 설명하며 깊을 얘기를 나눴네요. 가정과목에서는 '사춘기의 변화' 부분을 봐주면서 신체적 정서적인 변화 등에 채윤이 자신의 어려움을 대입해가며 딥토킹했구요. (시험 필요하네요!ㅋㅋ 내가 보는 거 아니니까)


채윤이가 시험공부 하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메모장 여백에 아빠가 설교 구상한 것을 적어놓은 모양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채윤이가 빵터져서는 "엄마, 아빠 너무 귀여워. 내가 시험공부 한 거에 설교준비 했어. 나 이거 지하철에서 외워야 하는데 갖고 가도 돼?" 합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가 이걸 빌려 달래서 줬더니 "야, 밑에 있는 거 뭐야? 이것도 외워야 해?" 했다는. 시험보는 내내 거실에 뻗치고 앉아서 온 집안을 시험기간 모드로 만드는 바람에 날도 더운데 불쾌지수를 더욱 상승시켰던 채윤이. 열심히 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점수는 못 받고 한 학기를 마쳤습니다. 그래도 잘했다. 우리 소영이, 아니 아니 채윤이! 엄마가 돈 열심히 모아서 꼭 쌍수 해줄게!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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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중 2학년이 된 채윤이.
그다지 쉽지 않은 청소년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연주회 했는데,
드디어 언니들 드레스를 입을 수 있게 되어 의미가 크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연주회 컨셉은 '연주보다 드레스!'
키가 갑자기 크고,
덩달아 마음도 주체할 수 없이 자라면서
음악적인 키와 마음이 따라오질 못하는 것 같아요.
어릴 적 몸과 음악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오는 그런 느낌은 없지만,
차차 자기의 음악을 찾아갈 거라 믿습니다.
그다지 완성도 있는 연주는 아니지만서도 열심히 하고 있는 채윤이 연주 공개합니다.


먼저, 쇼팽 흑건 에뛰드.


 




이번엔 베토벤 소나타 한 곡입니다.


 




쇼팽 녹턴을 제일 잘 쳤는데.....
아까비! 용량이 커서 안 올라가네요.
쥔짜 잘 쳤는데 보여드릴 방쁩이 없네. ㅎㅎㅎ
대신 아빠랑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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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오래된 농담. 또는 진담.

아빠는 엄마를 제일 사랑한다.
엄마가 일등이야.
너희는 이등이야.
엄마도 그래.
엄마도 아빠를 제일로 사랑한대.
엄마한테도 아빠가 일등이야.
(누가 그래? 여보. ㅋㅋㅋ)
너흰 이등이야.

불쑥, 청소년 채윤이가 던지다.

그런데, 사랑에 등수를 매길 수 있어?
사랑은 모두 사랑이지.

오~~~~~~ 김채윤.

10여 년 전에 이랬던 ↓  채윤이가.

 

http://larinari.tistory.com/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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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 1. 음악하는 사람   2. 여자 광수  3. 광대뼈) 라는 별명이 엄마로서 정말 자존심 상하고 맘에 들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바, 받아들입니다. 우리 채윤이 별명입니다. 사춘기라도 숨길 수 없는 우리 채윤이의 최대 장점. 담백하고 쿨한 성격에다 광대로서 자신의 약점을 웃음을 위해 내어주니.... 이보다 아름다운 희생이 있을런지요. 

어제 종일 집을 비웠던 엄마 아빠가 각각 아홉 시가 되어 들어왔지요. 아빠가 사 온 통감자 먹으면서 잠시 식탁 수다. 먹는 자리 피하고 싶은 현승이 녀석은 샤워한다는 핑계로 공석.


#1

채윤 : 엄마, ㅇㅇ랑, ㅇㅇ랑, ㅇㅇ가 셋이 앉아서 나를 부르는 거야. 갔더니 '야, 채윤아 너 진심 광대 튀어나왔다. 농담 아니고 진심' 그러는 거야. 정색하고....


아빠 : 기분 안 나쁘냐?

채윤 : 아니, 튀어나왔잖아. 사실인데 뭐. 
        '어쩔래.
그래도 내가 니네보다 거든(의미의 표기)' 그랬어.

아빠 : 아니지. 걔네보다 더 높지. 걔네가 더 아. 광대.

채윤 : 아~ 진짜. 아빠! 더 괜찮고 이쁘다고.
         낮다는 게 아니고 더 다고(화자의 의미로서는 분명 ''). 
         히읗, 
히읗 받침말야. 에이치(H) 받침!

엄마, 아빠 : (눈빛 교환 후 쓰러짐)

아빠 : 쟤 정신실이았어. 김채윤을 정신실이 았어.

엄마 : 그래. 내가 았어. 받침은 에이치야.

채윤 : 왜애? 이게 다 내가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증상이야. 오늘 영어 많이 외웠단 말야.

엄마, 아빠 : (눈빛 교환할 새도 없이 빵 터짐 증상으로 쓰러짐)


(낫다, 낳다. 낮다의 구별에 관심도 개념도 없는 채윤이, 덤덤하게 2차전 준비)


#2

채윤 : 근데 날나리 된 애들이 거의 다 입학 때 실기 우수자다.
         실력 믿고 연습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해.


아빠 : 와, 걔네들 몇 명인데? 우리 채윤이 가만히 앉아서 몇 명 제꼈네.

채윤 : 아! 그리고 좋은 일이 있어. 이번에 우리 반에 하위권 애들이 많이 모였어.
         이번 중간고사에서 내가 엄청 유리해졌어.

엄마, 아빠 : (어이없음 증상인데 아까의 빵 터짐 증상이 남아 있어서 그냥 쓰러짐) 

엄마 : 누가 하위권인지 다 알아? 넌 뭔데? 무슨 꿘이야? 친구들이 알아?

채윤 : 아, 물론 하위권이지. 그런데 내가 티를 안 내서 애들이 잘 몰라.
         그러니까 내가 이번 중간고사에서 조금만 잘 해도 중위권으로 갈 수 있어.
         사실 내가 다른 성적은 좋은데 영어가 낮아서 그러니까 어쩌면 상위권으로 갈 수도 있어.
         (영어공부 열심히 한 증상이 부디 시험에선 많이 안 나타나길 ㅠㅠㅠㅠㅠ)

아빠 : (내내 어깨를 흔들며 소리없는 빵터짐 증상에 시달리다 수습하고) 
         채윤아, 너 오늘 참 예쁘다. 참 예쁜 캐릭터야.

엄마 :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동의함. '이래서 남자들이 무식한 캐릭터 여자애들 좋아하는구나. 쩌는 매력이 있구나' 싶음)

(잠자리 들기 전 남편이 천정을 쳐다보면 한 마디 내뱉음.
"어렸을 적에 채윤이 천잰 줄 알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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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 명지대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 직전, 채윤이에게 메시지가 왔는데 다리를 다쳤는데 아프다는 얘기,
통화할 수 있으면 전화를 달라는 얘기.
이건 또 뭔 일인가.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실기시험을 마치고 질풍노도의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서 디스코 팡팡을 타러갔던 상황입니다.
디스코 팡팡을 팡팡 타다가 떨어졌고 다리가 많이 아픈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순간, 속에서 불덩이가 훅 올라옵니다.
잘 하는 짓이다!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 충천하지만 엄마가 지금 갈 수 없으니 가까운 병원에 가라 했습니다. 
어찌 어찌 강의를 마치고 전화를 하니 발 뼈에 금이 가서 깁스를 했답니다.


얼마나 다쳐서 얼마나 아픈 걸까. 걱정에
강의 마치고 여유있게 늦은 점심에 커피 한 잔 해야지 했던 계획은 틀어졌고,
비가 오는데 꽉 막혀 있을 강변북로를 뚫고 천호동까지 태우러 가야하고,
앞으로 등하교는 어떻게 하나,
얘는 하는 일마다....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냐.
부글부글했습니다.
이런 예기치 않은 고통, 정말 싫어! 라는 마음에 운전해서 가는 길이 무겁기만 했습니다.
거의 두 시간이 걸려서 천호동에 도착.
가는 동안 통화하는데 우산도 없는 채윤이,
엄마, 내가 차 세우기 편한 곳으로 갈께. 아주 못 걷진 않아.
엄마 강의하고 피곤할텐데 어떡해.... 합니다.


애써 감정을 누르고 엄마는 괜찮아. 기다리다가 바로 앞에 가면 나와. 했습니다.
차에 타서 경과를 설명하는 채윤이.
딱 떨어졌는데, 내가 알잖아. 이건 그냥 삐끗한 게 아니구나. 너무 아픈거야.
그런데 같이 있는 친구, 좋은 분위기 망칠까봐 그냥 내색을 못했어.
엄마가 걱정할까봐 전화 하지 않고 병원 가려고 했는데 혹시 돈이 모자를까봐.
솔직히 엄마, 다쳤는데 내가 아픈 건 괜찮은데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어.
엄마, 미안해. 엄마 강의하고  힘들텐데 여기까지 오게 하고.
그리고 앞으로 치료하려면 돈도 많이 들텐데. 
엄마 미안해.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이기적이던 챈이 속이 깊어졌구나.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챈에게 어떤 엄마이길래, 어떤 존재이길래
발이 아픈 것보다 엄마 힘든 거, 돈 들어갈 것이 더 걱정인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는 채윤이에게 어떤 존재일까?
힘들고 아플 때 앞뒤 가리지 않고 그냥 뛰어들어 울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그런 품이 아닌가.
엄마는 그런 존재여야 하는데 채윤이 엄마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채윤아, 엄마가 갑자기 생긴 일에 힘들기는 하지만 니가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
아니, 미안해 하면 안 되는 거야.
왜냐하면 하나님이 채윤이를 잘 돌보라고 엄마한테 부탁하신 거야.
엄마는 채윤이 힘들 때 돌봐주고, 안아주라고 있는 거야.
이건 엄마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 생각 하지마.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꾹꾸 누르며 겨우 참고 얘기했습니다.


얼마 전에 중간고사 성적을 가지고 채윤이가 담임 선생님에게 기분 상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채윤이는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과 상관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열심히 피아노 치고, 시험기간에 반짝 공부하는 채윤이가
열심히 피아노 치고 밤 12시에 과외 받고 새벽 2시가 되어 잠드는 친구들과 성적경쟁에서 비교가 불가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채윤이를 그렇게 살도록 하지 않겠다는 의지 역시 확고합니다.
살짝 흥분을 해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남편과 의논한 끝에 그냥 지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엄마 아빠는 돌아와 안길 수 있는 품이 되자.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제 정신으로 살려면 채윤이가 많은 상처 받겠지만
그때마다 돌아와 안길 수 있는 품이 되자.


그렇게 결심한 지가 엊그젠데......
다리 다친 채윤이에게 엄마의 품은 돌아와 안길 곳이 아니라니요.
아픈 것보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니요.
지하철로 등하교 하겠다는, 할 수 있다는 아이를 굳이 차로 데려다 주고
금요일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태우러 달려갔습니다.
일종의 참회이기도 하고,

이젠 정말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똑같은 아이로 살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진정한 엄마로 사는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결심입니다.
매일 매일 채윤이와 함께 자랍니다.
내 나이 14세. ㅠㅠㅠㅠ


* 오늘도 여지없이 소영이는 한 건.

엄마, 정말 고마워. 워커를 하니까 훨씬 따뜻해.
진작에 워커를 하고 다닐 걸 그랬어. 목에 바람이 하나도 안 들어와.
(워커가 왜 목의 바람을 관리하고 그럴까요?)
워머 맞습니다. 워머를 하나 사줬더니 자꾸 워커라네요.
(이제 이 정도는 놀랍지도, 웃기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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