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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마음의 환대

장래희망 : 초로의 여인

larinari 2014. 9. 9. 01:21



지난 설에 이어 이번에도 (어머님이 안 해도 된다고, 한 접시 사면 된다고 하시는) 전을 메뉴에 넣었다. 나이가 든 탓일까? 나이가 들어 자연이 좋아지고, 밥과 김치와 된장찌개가 땡기는 것과 같은 매커니즘인가? 몸살 끝에 막 지져낸 생선전이 먹고 싶기도 했고, 기름 달구는 냄새를 막 피우고 싶기도 했다. 엄마가 일하는 걸 보면 나는 뭐할까? 나는 뭐할까? 하고 달려든 두 녀석들이 밀가루도 묻히고 계란도 입히고 쟁반에 한지도 깔고 시끌벅적하게 조수 노릇을 하더니 막 나온 생선전을 맛있게도 먹는다. 느끼할 땐 이게 딱이라며 블루레모네이드 한 잔 타서는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는다.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종가집 명절체험 제대로 했었다. 송편 한 말을 빚고나면 전을 부쳐야 하는데 끝도 없는 지글지글이었다. 열 종류가 넘는 전을 부치는 동안 어머님과 작은 어머님 한 분은 탕국이며 나물과 기타 음식을 하셨고, 전의 마지막은 잡채에 들어갈 야채볶기로 끝이 났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한 명절 음식 준비는 작은 어머니들, 며느리들, 시집 안 간 시누이들까지 손이 여러 개인데도 오후 4시나 지나야 끝나곤 했다. 일에 익숙하지 않은 신혼 때는 그러고나면 팔 다리 허리 아파 죽는다고 남편 안마기를 당당하게 돌리기도 했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이래저래 각자 명절을 보내는 분위기가 되고 이제 모이는 인원도 많이 줄었다. 무엇보다 전이나 부치고 간이나 보던 막내 위치에서 명절 음식의 반을 책임져야 하는, 어떤 때는 거의 다를 책임져야 하는 중견 며느리가 되었다. 몸살 끝 부실한 몸으로 막중한 책임감으로 음식 준비를 하다보니 '그때가 좋았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시키는대로 하면 되던 그때. 이젠 음식 해놓고 생색을 내기도 민망한 중견 며느리 아닌감. '그때가 좋았지'는 잠깐의 감상이긴 하다. 명절에 전을 왜 하는지 모르던 그때보다 전의 맛을 알게 된 지금이 좋다. 청년들을 만나면 그들의 탱탱한 피부와 무한 가능성의 미래와 자유가 부럽지만 '돌아가고 싶어?'하면 고개가 저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어떻게 먹은 나인데, 어떻게 헤쳐온 인생인데.(흡) 다시 젊어지고 싶진 않다. 


남편에게 '여보, 나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봐' 하고 자답했다. '초로(初老)의 여인!' (케케) 눈가의 주름, 쳐진 피부에 많이 적응이 됐지 싶다가도 어느 새 주름이 부끄럽다 느껴지기도 한다. 약간 애매한 이 나이가 지나서 흰머리나 주름과 더욱 한몸 이루는, 조금 더 늙은 나이가 되면 좋겠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오지 않은 초로의 나날을 그리다 전이 좋아진 낯선 애매한 중년을 즐기지도 못하고 보내버릴라.  몸살 끝 내 손으로 부친 동태전을 맛있게 먹고 입맛이 돌아왔다. 전을 좋아하게 된 내 입맛이 은근 자랑스럽다. 암튼 이제부터 내 장래희망은 초로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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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 프로필사진 mary 2014.09.12 08:56 몸살끝 몸살끝 하는거 보니 많이 아팠나 보네 ㅉㅉ
    나두 이젠 전부치는거 나름 재밌드라고. 점점 신경쓸 일이 덜 해가니 좋기만한데 되돌아가고 싶을리가 있나 ㅋㅋ
    초로의 여인 그거 좋네. 이왕이면 얼굴주름도 조화롭게 생기면 좋을텐데
    눈가 주름은 나름 보기 좋은데 입가주름은 영 아니더라구 고건 안생기면 좋겠고 ㅎㅎ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4.09.12 19:07 신고 그러고보니 몸살 끝, 몸살 끝 했군요. 아픈 걸 좀 알아주길 바랬나봐요. ㅎㅎㅎ
    초로의 여인은 카페를 지키고 있는 게 딱 어울리는데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담하고 정갈한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다. 주방 쪽인지 인기척이 나더니 초로의 여인이 공기처럼 조용히 나와 미소 짓는다' 이런 거?
    뭐 사실 mary 언니님은 주름 걱정 없으시잖어요. 주름으로 치면 제가 더 많을 듯. 그거, 그거, 그거 뭐지? 이런 거 안 하시고 단어만 딱딱 생각나시면 그냥 40대이신데 말이죠.ㅋㅋㅋㅋ
  • 프로필사진 mary 2014.09.13 12:26 중딩때처럼 단어장이라도 만들어야 할까봐
    인명 지명 사건명 이렇게 항목별로 ㅋ
    실찌면 주름은 많이 해결됩니다~~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4.09.14 10:13 신고 단어장 만들지 마세요.
    기껏 만드시고 '어디 뒀더라? 어디 뒀지?' 찾느라 시간 다 보내실지도 몰라요. 히히히.
  • 프로필사진 BlogIcon 3jin 2014.09.12 18:22 저 은근 추석 명절 음식 나올 거라는 예감을 갖고 왔더니.. 역시나 하하하하
    열혈 애독자 자가인정!!
    (이렇게 기출문제 보고 이번에 나올만한 문제 찍었으면 좋겠다T-T)

    저는 부침개 진짜 진짜 잘 못 부치는데..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 부침개 만드는 연습만 엄청하고나서 명절 맞이할 거 같아요. ㅋㅋㅋ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4.09.12 19:09 신고 귀신 다 됐다. 삼진! ㅎㅎㅎ
    결혼이란 걸 하게 되면 연습 엄청나게 하고 가서 '저 처음 해보는 거예요' 이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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