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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논리학> 개론서 한 권과 바꾼 수련회

larinari 2012. 6. 27. 19:50

 

 

1991년 여름 수련회와 맞바꾼 책 한 권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여름 수련회 3박4일로 1년 영발 다 채운다.'는 생각으로 수련회에 목숨 걸던 청년이었지요. 그러나 그 해에는 정말 수련회를 가기가 싫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 해 새로 오신 대학 청년부 목사님의 설교를 3박4일 내내 들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평소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읽으면 영이 악해진다며 설교단 위에서 말씀하셨고, 그 순간 제 가방엔 시사저널이 들어 있었었죠. 일주일에 한 번 듣기도 힘든 목사님의 설교였으니까 1년의 신앙 농사를 망친다 해도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아끼던 모든 분들이 '그러면 안 된다. 그래도 가야한다' 라며 설득하셨고, 무엇보다 제 맘에는 '사실 이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선택이다.' 라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대학 청년부를 지도하시다 고등부로 내려가신 전도사님이셨죠. '그래, 그렇다면 수련회 올라가지 마라. 대신 특별한 마음으로 3박4일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특별하게 보내라는 3박4일은 성경 일독도 아니고, 금식기도도 아니고 하다못해 신앙서적 몇 권을 읽으라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논리와 비판적 사고> 바로 (이 책을 먹으라! 아니고) 읽으라 하셨습니다.

 

목사의 딸로 자란 저는 수많은 당위의 세례를 받고 자랐습니다. '해야만 한다. 옳다/틀렸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하나님 뜻이 아니다' 이런 내면의 메시지가 가득한 제 기억의 저장고에는 '온전히 받아들여진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경험이 없는 것 아니겠지요. 경험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겠지요). 1991년 여름, '그래 그러면 가지마라' 하셨던 전도사님의 말씀이 제 일생에 잊히지 않는 '지지와 격려'입니다. 제 안 밖에서 '당위'의 소리만 들를 때, 제 깊은 바람을 들어주신 기억이니까요. 이때로부터 저는 이 분의 말씀은 제게 '팥으로 쑨 메주'가 되었습니다.

 

제 이름이 새겨진 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즘 '실감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가당치 않은 일이다.' 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저보다 글 잘 쓰는 분들이 페북 친구 중에서도 수두룩합니다. 저는 말하자면... (글 쓰는 걸 좋아하기 보다는) 글쓰기에 겁을 안낸다는 것과 얄팍한 말장난 기술이 있는 정도입니다. '팥으로 쑨 메주'가 되신 전도사님의 말씀이 이런 저를 '글 잘 쓰는 제자'로 계속해서 불러주셨습니다. 정말로 제가 팥으로 쑨 메주가 된 것입니다. 주보에 쓴 어쭙잖은 글에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 같다'고 하신 칭찬이 끝없이 제 자존감을 끌어올린 세월이었습니다.

 

높은 책꽂이가 앞을 딱 막고 있던 책상 앞에서 수련회 하던 마음으로 400여 페이지의 논리학 책을 큐티하듯 읽었던 그 여름이 많이 생각납니다. 당위와 비판의 메시지가 들끓는 내면으로 겉으로는 착하고 믿음 좋은 청년으로 살던 제게 한 번의 치유가 일어났던 3박4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름이 없었다면 <오우 연애>는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것이었네요. 그래서 전도사님께 '감사'라는 말은 턱 없이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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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 프로필사진 쥐씨 2012.06.29 05:21 그 스승님이 왜 <논리와 비판적 사고>라는 책을 추천해주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일년치의 영혼의 양식이 심어져 있는 밭갈이길과 맞바꿀만 함-이라는 이유로 추천해주신 것 같지는 않아서요. 나름의 결단을 하신 그 시절 그 학생 때의 모님께는 '맞바꿀만큼 짱 먹었던 것'으로 의미가 크겠지만 말이에요 ㅋㅋㅋ

    아무튼, 지지와 격려가 어떻게 사람을 길러내는지(애 말고 사람이요) 많이 느꼈던 올 상반기를 보내고 있어요 저도. 그런 분들께는 개별적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단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의 서포터즈가 되는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해요. 날카롭게 굴지 말고 "잘했군 잘했어"하는게 처음엔 연습이 요구될 정도 였는데 지금은 기쁘게 말해줄 수 있게 됐어요 남들한테ㅋㅋ
    그래도 누가봐도 아쉬운 건 "(저건 잘했지만)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찔러줘야 할 것 같은 충동은 늘 어쩔 수 없는 것인득 _-_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6.29 09:27 신고 난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
    지지와 격려로 사람을 길러내다 할 때 그 지지와 격려는 '존재'로 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말로서 '잘해어. 괜찮아'가 아니라,

    '내가 너보다 더 살았든, 더 배웠든, 더 많은 책을 읽었든, 더 신앙이 좋든...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나는 모른다. 심지어 나에가 뭐가 제일 좋은 지도 나는 모른다. 그저 너의 존재가 내겐 참 소중하고 너가 현재 가장 바라는 것이 무언지를 알아봐 주는 것이 내 관심사다'

    이런 마음과 태도? 내 수준에선 이게 궁극적으로 '사랑'이 아닐까 싶어. 어쩌면 이 일이 내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서 '팥이 메주' 되게 하는 효과를 낸 건 '신뢰'를 닮은 사랑을 받아본 때문일거란 생각이 든다.

    쥐의 댓글로 한 개 더 정리했다.^^
  • 프로필사진 BlogIcon 뮨진짱 2012.06.29 06:08 신고 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모님이 계셨던거군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jp님과 ss님의 격려가 감사합니다. ㅠㅠ 레알.
    특히 교회 옮길 때에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쥐씨처럼 왜 추천해주셨는지 궁금해서, 저 책 읽고 싶을 정도 ㅋㅋ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6.29 09:27 신고 저 책 개정판이 나왔다고 들었어.
    마음 먹고 읽어볼 만한 책인데 이번 여름 방학에 한 번 도전해볼래? ^^
  • 프로필사진 한숨 2012.06.29 18:17 수련회 인도하신 그 목사님도 하나님의 퍼즐 한 조각으로 '오우 연애' 출생에 기여하셨군요.
    사모님의 다음 책은 또 어떤 흥미진진한 탯줄을 달고 있을지 기대됩니다.
  • 프로필사진 larinari 2012.06.30 15:31 한숨님!^^
    전혀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열어주시네요.
    맞아요. 그 시절은 갑갑하고 힘들었지만 그 목사님과의 만남 또 그로 인해서 겪었던 갈등이 없었으면 이 책이 없을 수도 있네요.
    탯줄이라고 하시니....
    갑자기 수 년, 수십 년을 오가며 큰 그림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돼요.
    한숨님의 이런 눈과 댓글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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