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현승이를 부르려는데 '운형이', 동생 이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꽤나 반복되는 말실수다. 말실수는 무의식의 발로라는 프로이트를 끌어오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일찍부터 동생의 엄마 노릇을 자처해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겨진 늙은 엄마, 어린 동생(그래 봐야 두 살 차이인데) 사이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누가 지워준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말, 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들 있지 않은가. "이제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 이제 네가 잘해야 한다, 엄마에게 잘해라, 동생 잘 보살펴라......" 

 

장례식 후 외가 친가 친척들이 다같이 모여서 확대 가족회의 같은 걸 했다. 남겨진 세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와 무엇보다 남매의 교육 문제가 관건이었다. 누군가 내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꿈이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고,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냉철한 작은 외삼촌이 딱 잘라서 말해주셨다. "안 돼, 음악은 할 수 없다. 그건 돈이 많이 들어.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음악을 할 수는 없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런 식의 말씀이었다. 아, 그렇구나! 장래희망 목록에서 음악은 지웠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결국 뒤늦게 음악치료를 선택한 건 아쉬움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 가족회의가 남긴 인상은 강하다. 마음에 심긴 메시지도 분명하다.

 

아버지 없음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한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겠구나, 아버지가 없으니 알아서  인생을 일궈가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한 몸이 아니구나, 동생과 엄마은 내가 잘 돌봐야 해, 까지 갔을 것이다.  엄마가 무책임한 어른은 아니었다. 엄마 역시 자기희생적인 사람이고 책임감 또한 강했다. 그렇더라도 우리 남매에게, 특히 내게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더욱 엄마까지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엄마를 보며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하는 것이 내 깊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친절하고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두려울수록 엄마에게 더 신경질적이었고, 걱정이 깊어지면 원망을 쏟아놓곤 했다. 

 

특히 경제적인 책임감을 과도하게 가져왔다. 엄마는 늘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이었고, 우리 교육에 관한 한 철저했다. 대학까지 학비 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청소년 시절에도 조르고 조르고 또 조르면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엄마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부담, 동생에게 뭐라도 하나 더 사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게 꽤 보람이 있었다. 더 누리고 싶어서 퇴근 후에 과외 알바를 했다. 대학원 준비하며 직장 그만두고 과외에 투신(?) 했더니 수입이 훨씬 나아졌다. 학비를 위해 돈을 모으는데 아주 잘 모아졌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고치긴 틀렸고 새로 사야 하는데...... 엄마의 걱정 몇 마디에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냉장고를 샀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돈이 있었을 것이다. 모른 척했으면 엄마가 해결했을 것이다. 정말 내놓기 싫었는데,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았다. 냉장고를 사고도 한참 서러웠다.

 

엄마와 동생을 위해서 내가 돈을 벌여야 한다는 책무감이 떠나질 않았다. 동생의 고아 의식, 즉 아버지 없는 결핍감이 물리적 힘에의 집착이 되었다면 내겐 경제적인 책임감과 정신력 같을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린 내게 지성의 표상이었다. 아버지가 설교 준비하는 앉은뱅이책상 옆에 엎드려 산수공부를 하고 글짓기 숙제를 했다. 덧셈 뺄셈을 하는데 교과서에 나온 강아지를 개수 그대로 연습장에 그려주던 아버지 모습이 아련하다. 반공 선언문 쓰기 숙제를 하는데 '유비무환'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쳐주며 글 안에 넣어서 써보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지성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지적인 욕구가 끝이 없는 것, 아버지 부재가 남긴, 고아 의식이 내게 남긴 결핍감일지 모른다.

 

청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H가 나는 잊은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를 하던 시절, 해마다 합창, 성경암송, 성경고사 등의 대회가 있었다. 노회대회에 나가서 입상하면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성가대 아이들 데리고 전국대회에 출전한 적이 몇 번 있다. 어느 해, 노회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심사를 맡은 사람이(교수인지, 음악 선생인지 모르겠다) 어이없는 심사평을 했다. 노래는 잘했지만 지휘자의 복장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휘자인 내 치마 길이가 짧았다고! (아,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네!) 당시 자타공인 페미니스트였지만, 페미니스트이고 아니고 문제도 아니었다. 대회는 어찌어찌 마쳤지만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임원을 맡았던 당시 부장 선생님을 통해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글을 써서 전달하고, 그 발언에 대해 공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여차저차 결국 사과를 받았다. 

 

문제는 그 일을 복기하는 H의 말이었다. 나는 잊고 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며 "언니, 정말 집요하게 느껴졌어. 왜 저렇게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조금 알겠어."라고 했다. 나도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다. 지금과는 비할 수도 없는 시절, 성인지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분노하고 용기를 내고, 집요할 수 있었을까? 그 일에 대한 해석이었을까? 나이가 한참 많은, (청년들에게 현자 노릇을 하던)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너는 아버지가 없어서 제 멋대로인 구석이 있다."라고 했다. 털썩!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몸부림 친 결과가 아버지 없는 아이를 드러냄이 되었다고?! 아버지 없는 애 면전에 두고 할 말인가 싶었지만 별말을 못했었다. 당시 나를 보던 주변 사람들의 시각이었겠구나, 싶다. 부드럽고 물러 터졌으며 흐리멍덩하다는 내가 가진 자아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

 

아버지 없음은 내 인생 지성의 부재이며, 자존심을 지켜줄 권위의 부재였다. 그렇게 내가 나를 지키며 무시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평생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은 것은 아버지 없음, 고아 의식의 발로이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야 하는 처절함이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선망하고, 아버지와 동일시 하던 어린 딸, 그 아이의 선택이 이제 와 나는 한없이 가엾다.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에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참가자 넷  중 세 사람의 주제가 아버지였다. 내적 여정에서 어린 시절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보다 엄마를 동일시하는 딸이 더 많고, 둘 다 고통의 근원이었을 테지만 아버가 준 고통을 더 치명적으로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감정이입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고, 인식했다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버지와 동일시 되어 있었고, 심지어 우상화했다. 눈에 없는 신을 형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능인지 모른다. 내가 자라고 사춘기를 겪는 동안 내내 곁에 살면서 간섭하고 상처를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는 이상화되다 못해 우상이 되었다. 엄마를 혐오하고 아버지를 이상화하며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여성인 나를 스스로 낮추고 비하했다. 이율배반적으로 외부 남성 권위에는 분노하고 대항하게 되었다. 당연히 왜곡된 가부장적 하나님이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은 다시 내 안의 여성주의와 충돌했다. 영적 여정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분열이었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몇 년 전에 읽은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이다.  여성들 안의 영웅심리와 불안을 아버지와의 딸의 동일시로 설명하는 페미니즘 에세이다. 

 

'영웅의 딸'이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를 이상화 하고 어머니는 거부한다......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와 아버지처럼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딸들의 욕망은 그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와 남자들의 세계를 모방하면서 일찍부터 그녀의 남성적인 성품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지나친 자기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 속에 아버지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개별적인 정체성 수립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 중에서

 

엄마도 동생도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꼭 내게 물었다. 노인이 되면 고집쟁이 되기가 쉬운데 엄마는 내 말을 잘 들었다. 며느리와 관계에서 섭섭함을 토로하다가도 내 몇 마디에 금세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고치곤 했다. 엄마와 동생이 내게 물어올 때, 무심한 듯 응대하지만 조용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엄마나 동생이 겪는 일상의 어려움이 다 내 책임 같고, 해결해줘야 할 것 같았다. 과도한 책임감이다. 내 힘에 부치는 짐을 지고 평생 힘겹게 지내왔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아이러니하거나 신비롭게도 그 무게가 내 존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동일시되어 과도한 힘을 내어 살아온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나를 나 되게 만들었다. 차마 내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폴 투르니에 박사, 고아 대선배께서 그의 책에 먼저 썼으니 그의 입을 빌어본다.

 

고아라는 것은? 나는 항상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습니다. 폴 투르니에 『고통보다 깊은』 중에서

 

나를 형성한 것들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적당히,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책임감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엄마의 딸로서, 아니 그 누구의 딸이 아닌 나로, 역할의 옷을 벗고 가볍게 살아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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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ㅅ ㅣㄴ ㅐ 2020.06.07 23:58 신고

    하나마나 한 말...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깊이 공감하고 정말 그런 말 더는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니의 모든 것..아름다워요...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3 신고

      아냐, 그대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존재가 말보다 앞서거든! 그대의 존재를 내가 아오 :)

  2. 2020.06.08 11:00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7 신고

      이런 메아리를 기다렸어요. 이 글을 계속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나말고 이런 누군가가 또 있어'라는 확신이거든요. 그 누군가에게 당신만 그런 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기도, 무엇보다 나만 이런 것 아니라는 그 말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드디어 들었네요. ^^

      이렇게 말씀 들으니 위로도 되고, 새롭게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요. 아, 나도 그랬었지..... 우리 모두 잘 살아남아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 참 다행이에요. 특히나 좋은 남편에 좋은 아빠 되셨구요!

      사모님 형수님 이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전생에 잃어버린 남매였었잖아요. ㅎㅎㅎ 그곳의 시간들 곱게 마무리 하고 들어오셔서 뵈어요. (사모님 말로 형수님으로 가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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