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료 : 며칠 전 먹고 남은 오징어 볶음 양념을 냉장고에 숙성시킨 것, 몇 시간 전 현승이가 먹고 남은 닭가슴살 캔의 부스러기, 신라면 한 개와 스프, 냉장고에 굴러다니며 약간 건조된 가지 반 토막, 야채 박스에서 뒤엉켜 있던 양배추, 파프피카, 부추 몇 가닥.
 

* 방법 :
위의 재료를 적당히 잘 조합해서 씻고, 굽고, 볶아서 위의 사진과 같이 만든다.


*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예상치 못한 남편의 전화.
'나 지금 출발. 집에서 밥 먹어. 채윤이는?' '뭐? 지금? 저녁을? 채윤이는 연습하고 늦게 오고, 현승이는 김포 갔는데. 그리고 집에 먹을 거 없어. 그러면 올 때 뭐 좀 사 와' '지금 비 많이 와서 아무데도 못 들러. 그냥 집에 있는 걸로 라볶기 같은 거 해 줘' '아,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오!'라고 말하면서 바로 잔머리 굴리면서 냉장고 스캐닝한다. 좋으면서 싫은 척 전화를 끊고 후다닥 일어나서 막 가지를 굽고, 라면을 삶아내고, 양념을 졸인다.


* 채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쓰는 글이 있는데 얘는 정말 놀이에 타고난 아이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놀잇감 삼아 가지고 노는 아이였다. 지난 주말에 잠깐 양평 나들이를 갔는데 눈에 띄는 풀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모르는 풀이 거의 없다. 이름은 몰라도 어릴 적에 다 가지고 놀았던 풀들이다. 내게 들풀은 소꿉놀이의 재료로 기억되어 남아있다. 소꿉놀이를 할 때 온갖 풀을 이용해서 그럴 듯하게 만든 요리들이 꽤 인기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놀이의 신 채윤이의 피는 내게서 흘러가는 것들이 있다. 친구들과 놀면서 새로운 방식, 더 재밌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은 거의 내 담당이었다. 3 학년과 6 학년 때 두 번 심하게 나를 따돌렸던 여자 대장 아이 S가 더 오래 나를 따돌릴 수 없었던 이유는 놀이 아이디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 아직도 내가 그 시절 소꿉놀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원고를 붙들고 늘어져 있다가 남편의 전화에 후다닥 일어나 라볶이를 만드는데
열정이 마구 솟구쳤다. 되든 안 되든 있는 재료를 굴려서 접시에 담고 듣보잡 요리를 창작해내는 일이 이렇게나 재미가 있다. 약간은 초딩 입맛에 음식에 관한 선입견이 별로 없고, 뭐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고갱님의 기호가 받쳐줘서 되는 일이긴 하지만. 하이튼, 오늘 만큼은 여자라서 햄 볶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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