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다. 딸 채윤이가 전날 밤 11시가 넘어 끓이기 시작했다. 11시 넘어 줌 강의를 마치고 "그럼 엄마 먼저 잘게" 하고 누웠다. 딸이 끓이는 미역국, 참기름 냄새에 취해 잠이 들었다. 아침으로 먹는 고구마나 현미 떡 대신 심심한 미역국 한 그릇을 먹었다. 아이들은 자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먹었다. 갑자기 울음이 복받쳤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꺼이꺼이 울음이 터져 나와 국물 마시는 후루룩 소리로도 숨길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울음이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울었다. 

 

1년을 뛰어 넘은 작년 생일의 여운인가. 작년 생일, 응급실에 있던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옮기고 면회가 안 되던 시간이었다. 가족들과 생일 점심을 먹고, 선물을 사면서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 슬픔으로 마음이 펴지질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김포 갈까? 면회가 안 되면 어머니 병원 앞이라도 갔다 오자." 하고 갔다가, 병원장 면회를 하며 울고불고 한 끝에 엄마를 보고 왔다. 호흡기와 콧줄을 끼고, 팔은 묶인 엄마 귀에 대고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낳아줘서 고마워." 하면서 또 울었다. "어머니, 채윤아 엄마 잘 키워줘서 감사해요. 제가 잘할게요.” 김서방이 말했다. 엄마도 울었다. 입도 코도 막힌 엄마는 눈물로 말했다. 

생일 아침 미역국에 터진 눈물은 2월 내내 고여있던 것이었다. 2월이 되고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동생과 통화하는데 "내일이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진 날이야." 했다. 2월 첫째 토요일,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에 갔다. 그날의 기억이 쓸데없이 생생하다. 병원 가는 길 동생 집 엄마 방에 갔다. 동생이 엄마 방 청소 좀 해달라고, 응급실 가느라 경황없이 나왔다고, 조카들끼리 있는데 무서워한다고... 엄마 침대 밑으로 피가 고여 말라붙어 있었다. 아득한 정신으로 그걸 닦아냈다. 2월이 됐는데 그날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내 생일이 다가와서인지, 2월의 그날 때문인지 2월은 그렇게 남모르는 슬픔과 우울로 지냈다.

 

생일이 다가오니 더욱 엄마 몸이 그리워졌다. 엄마의 포궁 안에 있었을 나, 45세 엄마의 늙은 포궁 안에서 만들어지고 자란 내 처음 몸은 어땠을까? 엄마의 몸이 미치도록 만지고 싶다. 생일 아침 미역국을 끓인 채윤이가 내 몸 속에서 자라다 나왔듯이, 나보다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었듯이 나 역시 엄마 몸을 찢고 나와 더 큰 존재로 자랐다. 채윤이 출산하고 6주 만에 풀타임 음악치료사 자리가 생겨 어플라이 하고 입사했다. 아침마다 엄마가 우리 집으로 와 채윤이를 봐줬다.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채윤일 업고 골목 어귀에 나와 서있는 날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나타나면 뚱한 채윤이보다 더 신이 나서 "하이고, 껍데기 왔네. 우리 채윤이 껍데기 왔다!" 했다.

 

채윤이가 제 껍데기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줬는데, 생일 미역국을 먹는 나는 껍데기를 잃었다. 내 껍데기, 엄마의 몸이 그립고 그립다. 놀란 토끼 같은 엄마의 눈, 함지박만 한 입, 광대뼈, 혈관이 툭툭 튀어나온 손... 어디에도 없는 엄마의 몸이  또렷하게 살아온다. 이렇듯 생생하게 살아있는 엄마 몸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생일인 수요일 밤에 교회 행사로 강의가 있었다. 북유럽 바로크 미술을 전공하신 교회 집사님이 렘브란트 그림을 읽어주시는 강의이다. 전에 한 번 교회에서 문화 강좌로  17세기 네델란드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셨는데 참 좋았었다. "탕자와 시므온으로 그린 렘브란트의 고백"이란 제목의 강의라 연구소 벗들에게도 알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들었다. 생일 선물 같았다. 익히 알던 렘브란트의 생애 이야기였는데 역시나 새롭게 들렸다. 어쩐지 렘브란트가 그린 노인들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탕자의 귀향>의 아버지, <시므온의 노래>, <야고보>, <기도하는 노인> 등. 강의는 손에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아니, 렘브란트가 그렇게 그렸다. 나이 들어 눈이 흐릿해진 아버지는 손, 손으로 그 아들을 맞는다. 시므온 역시 손으로 아기 예수를 안는다. 기도하는 노인의 손엔 대놓고 조명이 비친다. 강의 그 부분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늙은 엄마의 손이 겹쳐져서다. 주책스럽고 부끄럽지만 이제 나는 나의 눈물을 탓하지 않는다. 화면을 끄고 그냥 울었다. 

 

 

 

엄마의 그 손을 한 번만 더 잡아볼 수 있다면. 천국에서 엄마의 빛나는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알겠는데, 엄마의 몸이 아닌 엄마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기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엄마와의 스킨십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엄마 돌아가신 이후 갈수록 나는 몸에 집착하게 된다. 생일을 지내며 내가 이 땅에 처음 왔던 때가 어땠을까 생각하다 보니 내 처음 집, 엄마의 포궁, 엄마 몸이 절절해진다.

 

 

내 생애 첫 사진이다. 태어난 지 5주. 이젠 기억에서도 흐릿해진 아버지는 이렇듯 나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 자신을 남겼다. 사진을 찍고, 사진 뒤에 메모를 남긴 아버지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데 어쩐지 본 듯이 생생하다. 엄마는 내게 남긴 것이 없다. 휴대폰에는 엄마가 담긴 영상이 많지만 엄마가 남긴 건 아니다. 엄마의 모든 것은 엄마의 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아, 엄마의 몸이 남긴 것은 나다. 그래서 내 생일이 이렇듯 서럽고 슬픈 것이다. 나는, 사라져 버린 엄마가 남긴 흔적이다. 내가.  

 

여러 차례의 여성 글쓰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생일 다음 날은 또 한 번의 모임이 끝나는 날이었다. 참가자 한 분의 글 한 문장이 가슴에 남아 있다. "나는 나의 생일을 가장 싫어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 궁굼해 지고 그리워지는 날이거든요." 어릴 적 돌아가신 아빠에게 쓴 편지이다. 나는 나의 생일을 가장 싫어해요. 이 문장을 보고 휘청, 존재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참가자들의 많은 글에서 나를 본다. 아니 모든 글에서 나를 본다. 그래서 힘겹고, 그래서 좋은 글쓰기 여정이다. 이 문장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나를 흔들었다. 예언같이 느껴졌다. 앞으로 사는 날 동안 나는 내 생일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평생 아버지 부재를 끌어안고 살았지만, 내 생일에 아버지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는 것도 신기하다. 글 쓰신 분에게 비춰본다면 더더욱. 그러고 보면 나는 아버지를 몸으로 느끼지 못했다. 관념으로 느끼고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글씨체를, 지성을 선망하며 그리워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승화시켜 숭배하며 그리워했다. 엄마는 다르다. 엄마는 내 껍데기, 내 몸이다. 나다. 

 

아직 생일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엄마 떠난 지 일주일이 모자란 일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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