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8일 목요일.
오래 전 꿈이 문득 다시 생각나 일기장을 들추어 보았다. 정확히 저 날이었다. 남편이 신대원을 마치고 풀타임 목회를 시작한 때이다. 청년부를 맡게 되면서 아주 자연스런 수순으로 나는 지휘를 그만두게 되었다. 말 그대로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래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나 역시 남편의 청년사역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제껏 '내 사역'을 위해서 남편이 포기해주었으니(그 전 수 년 동안 내가 유치부 설교사역, 지휘를 선택함으로 남편은 고등부 교사, 청년부 교사 등을 포기했었다) 당연한 포기라고 생각했다. 별 감정의 찌꺼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몸살이 났다. 몸살 중에 꾼 꿈이다.


내가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작은 화분들을 어떤 아줌마들이 마음대로 치웠다. 화분을 치웠다는 것보다, 마.음.대.로 치웠다는 것에 몹시 분노했다. 내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도 않고 단지 화분이 작다는 이유로 그걸 치울 수 있느냐며 분노하고 울면서 꿈을 깼다. 남편과 이 꿈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작은 화분'은 나의 작은 소망, 작은 기쁨, 작은 꿈 등을 의미하며 내가 공들여 가꾸는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얘기 끝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그대로 그치지 않는 울음이 되어 펑펑, 엉엉 하룻밤을 울었다. 그리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하루 이틀 지나며 두드러기도 가라앉고 몸살도 가라앉으며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휘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늘 있지만 '아쉬움'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시 지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절실하진 않다. 내가 얼마나 지휘를 좋아하고 그 순간 행복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덤덤함은 엄청난 변화이다. 그 작은 화분 꿈 덕분이라 생각한다. 내가 의식으로 그럴 듯하게 정리한 문제가 정서적으로는 엉망진창이었음을 꿈이 알려주었고, 엉망진창이었던 마음을 똑바로 보고 감정을 쏟아내고 억울함에 이름 붙이고 하면서 그러저럭 정리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내게 온 선물은 코 앞에 닥친 중년 이후의 나날을 사는 태도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열리게 되었다. 물론 저절로 된 것은 아니고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치열하게
 했던 마음공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제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이 말씀을 가슴으로 알아듣게 되었다. 이 말씀 의지하여 하향지향적 삶을 추구한 헨리 나우웬의 고백은 외로운 여정에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지휘나 찬양인도 등 스포트라이트 받는 자리에 대해서 연연하는 마음이 온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2008년 마지막 주일,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날 묵상한 말씀은 마태복음 6장이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특히 이 말씀은 내 가슴에 콱 하고 들어와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6:5)' 젊은 날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이미 받은 상이 많다. 물론 젊은 날에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일하지 않았다. 약간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도 있었다.


그 해 지휘를 그만두고 내내 했던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청년부 목자모임을 위해서 식사준비 하는 것, 주일 청년 예배 시작 전에 커피를 갈고 내리고 하는 일이 전부였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밥하고 커피 내리는 일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밥하고 커피 내리는 자리가 스포트라이트 받는 무대가 아니어서다. 그때 그때 박수와 '아멘'이 터지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 본 비닐을 양손에 들고 질질 끌듯이 걷는 길, 죽도록 힘든데 아무도 봐주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음식을 12인분 준비했는데 다섯 명이 식사하러 왔다. 7인분에 들어간 내 노고가 증발해버리는데 어디다 호소할 곳이 없다. 이런 지질한 고통이었다. 돌이켜보면 고급인력으로서 그럴듯한 교회봉사는 못하고 밥이나 하던 그 시간, 비로소 내가 나다워지는 시간이었다.


어릴 적부터 무엇을 혼자 하는 걸 참 싫어한다. 뭐든 친한 친구와 엄마와 동생과 같이 하고 싶었다. 혼자 밥을 하던 시간은 '고독'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나를 바라봐주는 눈이 필요했던 것 같다. 글을 쓰고 강의준비를 하고 묵상을 하는 요즘, 혼자있을 수 있는 힘이 그때로부터 길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는 것은 단지 젊은 날에 살았던 외향적이고 주도적인 방식에서 물러서서 조용히 밥이나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 존재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자발적으로 나를 묶은 띠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태도 말이다. 가까이 남편에게 그러하고, 아이들에게 그러하고, 친구들에게 그러하고, 한 번 만나고 잊혀질 강의듣는 청년들에게 그러하고, 얄미운 동네 사람에게 그러하고.  


문득 5년 전의 꿈이 생각나고, 그 꿈이 안내해준 메시지가 생각나 더듬다보니 '주도권'을 포기하기 싫어 부들부들 힘을 주고 있는 내 영혼이 보였다. 본회퍼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보다도 사귐에 대한 자기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본래 뜻하는 바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리시도인의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꿈으로 글 보는 사람은 하나님이나 남이나 자기에게 자기에게 꿈을 이루자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는 요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사귐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법을 세우고는, 그것을 따라 형제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심판합니다. 그는 형제 사이에서도 모든 사람을 나부라기나 하는 듯이 떡 버티고 서 있습니다' 


5년 전에 꿈으로 말씀하시더니 그 꿈으로 오늘 다시 말씀하시는구나. '나는 자기 꿈을 사랑하는 것을 미워한단다, 얘야' 네네, 알았다구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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