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감 / 불행감


언젠가부터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멜로디가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누군가 하모니가 잘 맞는 사람과 꼭 한 번 제대로 불러보리라. 불러보고 싶다. 오래된 노래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란 곡이다. 두 개의 멜로디가 나란히 어우러져 겹치는 듀엣곡이다. 예전 한영교회 샬롬찬양대 지휘할 때 함께 불렀던 기억이 아련하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 막으나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지난 1월 교회 사경회 특송으로 부르는 기회를 딱 얻었다. 내 영혼에 찬양의 샘이 마를까 보내주신 노래 짝이 하나 있다. 탱탱한 젊은 목소리에 기대어 노래했다. 연습하느라 부르고 부르다 보니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맴돌았던 것이었다. 따르던 스승을 잃고(영영 잃은 것으로 알고 있었겠지) 십자가 언덕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 위에 선 두 사람. 그 막막한 걸음걸이를 떠올렸던 것 같다.


적나라한 2절 가사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그렇다. 나는 자주 이 세상 사는 길이 엠마오의 길이라고 느낀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소망 없는 하루를 사는 날이 많다. 엠마오 내려가는 길 위의 두 사람, 그 사람들 뒤를 비슷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먼지 나는 길이다.


나타남 / 들이닥침


특송을 부르다 부끄럽게도 목에 메고 말았다. 먼지 나는 길 위에 선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니! 나는 안다. 모두 실재라는 것. 절망과 공포 속의 홀로 걸음도 실재요, 그 곁에 홀연히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을. 그분은 나타나는 분이다. 그분의 부재로 내 영혼이 말라갈 때, 부재로 현존하는 분. 가장 부조리한 일상에 들어와 조용히 함께 걸어주시는 분.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게 해놓고 다시 사라지시는 분. 


아닌 게 아니라 특송을 부른 그 사경회에서 박영돈 교수님의 세 번의 설교는 내게 '나타난 말씀'이었다. 사모님과 짧은 대화 역시 갑자기 들이닥친 위로와 격려였다. 그렇게 그분의 은총은 예고 없이 나타나거나 들이닥쳤다. 늘 그러했다. 그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는 용기를 북돋운다.


나타난 스승들


래리 크랩의 <행복>과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 동시에 발간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의 스승들. 래리 크랩이 한 번, 리처드 로어가 한 번 나를 회심 시켰다. 내 인생에 두 스승이 나타나(들이닥쳐) 영적 가면을 벗겨내라 촉구하였고, 내내 충실한 안내자로 함께 해주셨다. 두 스승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내가 아니었을 터.


게다가 들고나온 제목이 '행복'이다. 또 '떨어짐'이다. 서문만 읽어도 이 선생님들이 뭔 얘기를 늘어놓으실지 알겠는 사이가 됐다. 늘 하시던 그 얘긴데 또 새롭고, 읽는 자세를 다시 고치게 된다. 전에 알아들었던 그 얘기가 다시 새롭게 들리는 것은 그사이 살아낸 스승들의 지난한 삶을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로 엠마오로, 드물게 예루살렘을 향해 쉬지 않고 걸었던 거장들의 진솔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떨어짐 / 행복


올라가기 위해서 떨어지고,

진정 행복을 위해 쓰디쓴 일상의 잔을 마셔야 하리라.

스승이 나타나 단호히 가르치시니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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